소설리스트

정체불명의 노인들 (41/67)

정체불명의 노인들

마르크 일행은 세 가지의 의뢰를 마치고 갈라틴으로 나아가는 중이었다.

“이렇게 강행군으로 나갈 필요까지 있을까?”

마르크의 질문에 샥은 고집을 부렸다.

“빨리빨리 마쳐야지. 이러다가 어느 세월에 다 하려고? 상단 내에도 할 일이 쌓여 있다고! 설마 내가 얼마나 바쁜지 모르는 건 아니겠지?”

헤르미온이 마르크에게 눈을 흘기는 것을 보니 그녀는 그런 샥을 옹호하는 모양이었다.

사실 샥이 이런 권한을 가지게 된 것은 전적으로 그녀 덕분이었다.

그녀가 조바심을 내는 바람에 샥은 마침 잘되었다며 연방 빨리빨리를 외쳤던 것이다.

이 때문에 이스론에서 파견을 나온 사람들은 대부분 입이 한주먹만큼 나와 있었다.

문득 헤르미온이 뒤를 돌아보며 쌍귀를 향해 물었다.

“장로님은 언제 오신대요?”

그녀의 말대로 제라드는 이 자리에 없었다.

오딘의 생사를 확인하겠다며 시간을 달라고 했던 것이다.

그에는 사람의 팔뚝만 한 매가 이용되었다. 물론 그런 의사 전달 방식은 이스론의 사람들에겐 금시초문인 일이었다.

곱지 못한 말투에 기분이 상했을 만도 하건만 쌍귀는 싫은 표정을 짓지 않았다.

-조금 늦으시는군요. 하지만 늦어도 내일 오후쯤이면 도착하실 겁니다.

지금 전음을 보낸 사람은 쌍귀 중 무귀(武鬼)였다.

쌍귀와 대화를 하는 방법은 그리 까다롭지 않았다. 그들은 들을 수 있는 귀가 있었으며 의사를 전할 전음이 있었다.

말을 하지 못한다는 것이 따로 장애가 되질 않았던 것이다. 이 때문에 쌍귀가 오딘에게 가지는 고마움의 크기는 배가 되었다.

“보름 전이라 그러시더니 또 일주일 전이라 그러시고, 이젠 내일이라고요? 이번엔 진짜 믿어도 되겠죠?”

독살스런 그녀의 눈초리를 접하며 쌍귀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서 이번엔 악귀(惡鬼)가 전음을 보냈다.

-아레인성으로 돌아가시지는 않은 모양입니다. 그 때문에 시간이 조금 지체되시는 듯합니다. 천리응의 속도로 볼 때 짐작 가는 곳을 다 뒤진 후 장로님께 돌아온다 하더라도 그 정도 시간이면 될 것입니다.

늦어도 내일이란 소리에 헤르미온의 심장이 달음박질쳤다.

미리 제라드가 오딘에게는 숲의 반지가 있다는 얘기를 했고, 별다른 소식이 없는 것으로 보아 무사하신 것 같다고 말했음에도 헤르미온은 불확실한 내용으로는 만족할 수 없었다.

살아 있다는 말, 그 말이 듣고 싶었기에 기어코 우겨 제라드에게 소식을 가져오라는 압박을 넣질 않았는가.

내일이면 그 기쁜 소식이 올 것 같았다. 게다가 운이 좋다면 그의 행방 역시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때문에 헤르미온의 표정이 부드러워지고 까칠하기 그지없던 태도가 너그러워졌다.

“그건 참 신기하군요. 사람의 뇌리에 말을 전할 수 있다는 거요. 아레인의 기사들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건가요?”

-그렇진 않습니다.

무귀의 대답에 다시 헤르미온이 물었다.

“그럼 그 전음이라는 건 누가 만들었나요? 제가 알기로는 대륙 내에서 그런 방식으로 의사를 전하는 기사들은 보지 못했거든요.”

-모두 오딘 님께서 가르쳐 주신 겁니다.

무귀의 대답을 듣고 헤르미온은 엉뚱한 상상을 했다.

‘그럼 전음으로 사랑을 속삭인다면?’

자연스레 헤르미온의 볼이 빨개졌다.

‘황홀할 것 같아.’

빨개진 양 볼을 손바닥으로 감싸며 그녀는 좋아서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상상만으로 즐거운 것이다.

자신이라고 못 배울 리 있겠는가?

기왕 배울 거라면 쌍귀나 제라드보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배우고 싶은 그녀였다.

언젠가 오딘에게 자신도 가르쳐 달라고 할 작정이었다. 혹 이를 계기로 사이가 급진전될 수도 있을 테니까.

그러나 그녀가 꿈꾸는 오딘은 현실의 오딘과 너무도 거리가 멀었다. 그는 그녀가 꿈꾸는 만큼 자상하지 못했다.

망상의 늪에 빠져 있는 헤르미온을 보며 마르크는 뜬금없이 고개를 저었다.

그 모습이 너무 한심하게 비춰져서다.

그런 반응을 보이는 사람은 비단 마르크뿐이 아니었다.

틴 역시 길게 한숨을 내쉬고 있었으니까.

게다가 제법 눈치가 빠른 몇몇 호위 무사들까지 그녀를 이상히 보았다.

헤르미온이 그를 눈치 채는 데에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뭐야? 다들 무슨 생각하는 거야?”

“생각은 무슨 생각을 했다고…….”

대충 얼버무리고 넘어가려는 마르크를 보며 헤르미온은 눈에 쌍심지를 켜고 소리를 버럭 지르며 대들었다.

“그럼 지금 그 눈빛들은 뭐야? 날 이상하게 보고 있잖아!”

“잘못 본 거겠지.”

언제 그랬냐며 애써 시선을 돌리는 사람들을 보며 헤르미온은 이맛살을 찌푸렸다.

“흥, 그딴 식으로 나온다 이거지?”

복수의 칼날을 갈고 있는 그녀를 보며 간 큰 마르크와 그나마 잘 버텨 내는 틴을 제외하고는 표적이 된 사람들은 저마다 하소연을 했다.

“우린 그냥 마르크가 봐서 본 거라고.”

“억울하다. 우리까지 그렇게 생각을 했다니.”

“맞아, 오해야. 우리가 간이 배 밖으로 나오지 않고서야…….”

매번 있는 일이었다.

지금처럼 항상 덤터기는 마르크가 썼다.

쌓인 게 폭발했던지 웬일로 마르크가 협박조의 말을 내뱉었다.

“그렇게들 나오신다 이거죠?”

사람들은 딴청을 부렸다. 그래도 헤르미온보다는 마르크의 복수가 덜하리라 판단했던 탓이다.

‘어쩌다가 우리한테 불똥이 튀어서, 쩝. 될 수 있으면 둘의 관심사에서 멀어지면 좋을 텐데…….’

이스론 상단의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가지는 바람이었다.

하늘이 도왔을까?

그럴 만한 건수가 생겼다.

맞은편 길을 따라 엄청난 수의 사람들이 지나가는 중이었다.

안개가 끼어 있고, 먼 거리인지라 말발굽 소리조차 나지 않아서 지금에야 파악을 했던 모양이다.

제일 먼저 그를 발견한 이가 일행들에게 다 들리도록 크게 말했다.

“저 사람들 좀 봐. 앞에 무슨 일이 있나 봐!”

그에 맞장구라도 쳐주듯 이스론의 사람들은 과장되게 반응했다.

“어~ 어~? 정말? 코도도 있는데.”

코도는 육중한 몸집의 말 대용으로 쓰이는 동물이었다.

이를 놓고 보는 기준이 모호했는데, 일부에서는 코도를 몬스터라고 하고, 또 일부에서는 동물이라고 했다.

배가 불러도 사람조차 물어뜯는 포악함과 험악한 생김새는 몬스터와 비슷했지만, 습성은 육식동물에 가까웠다.

확실한 것은 코도는 그리 흔치 않다는 점이다.

길들일 수 없는 코도는 죽여 고기로 만들어야 한다는 얘기는 코도를 사육시키는 사육사들에게는 정설과도 같았다.

적지 않은 군대의 이동에 오크인 정크마저 흥분을 했는데 마르크는 그를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였다.

“절 얼뜨기로 만들 생각은 마세요. 사람들 지나가는 거 하루 이틀 봅니까?”

그렇게 말해놓고 보니 이상했다.

요 며칠 제국 쪽에서 오늘 같은 군대의 이동이 잦았다.

하루 이틀은 훈련 중이겠거니 했는데,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다른 이유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판단이 들었다.

마르크는 주위를 둘러보다가 농부들을 발견하고는 그쪽을 향해 나귀를 몰아나갔다.

가장 가까운 곳에 있던 농부 역시 그쪽에 눈이 팔려 있었다.

때문에 마르크가 탄 나귀가 농부 자신의 옷을 날름 핥는 것을 느끼고서 화들짝 놀랐다.

“허걱.”

생면부지의 사람에게 실례를 하게 되어 미안함이 앞섰던지 마르크는 곧장 나귀에서 뛰어내려 놈의 큼지막한 눈을 보고 꾸짖었다.

“혼나고 싶어?”

나귀는 꾸지람에도 정신을 못 차리고 기분이 좋은지 히히힝 하고 투레질을 하며 기왕 내민 혀로 주인인 마르크까지 핥으려 했다.

재롱을 못 받아주겠는지 마르크가 인상을 구기며 그 긴 혓바닥을 손바닥으로 탁 쳤다.

그걸 보며 농부가 기분 좋게 웃었다.

“하하, 됐소. 내가 부주의해서 몰랐던 것이니 나귀는 그만 괴롭히시오.”

그래도 미안한 마음이 가시질 않았는지 겸연쩍은 얼굴로 마르크는 고개를 꾸벅 숙여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이 녀석이 실성했는지 가끔 개념을 놓고 다녀서…….”

“하하하, 그 말도 재미있어. 그 주인에 그 망아지로군.”

재미난 구경거리에 근방에 있던 농부들이 웃는 낯으로 다가왔다.

그러더니 나귀 앞에 농부 하나가 선뜻 다가와서는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고놈 참 잘생겼다.”

다른 농부들도 왁자지껄 떠들기 시작했는데, 마르크는 조금 이상함을 느꼈다.

멀다고는 하지만 군사들이 오가고 있다. 또한 자신의 일행들 역시 무장을 하고 있다.

자연히 밭일을 하더라도 긴장을 해야 하질 않겠는가.

한데, 이들은 너무 태연자약해 보였다.

“어르신들은 보통 어르신들이 아닌 것 같습니다.”

마르크와 말을 섞던 농부가 그 소리를 듣고 딴죽을 걸었다.

“보통 어르신은 또 뭐야? 어르신도 종류가 있나?”

졸지에 주변에서 웃음이 터졌다.

“하하하하!”

마르크는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지만 덕분에 방금 전의 생각을 굳힐 수 있었다. 이 노인들을 대하는 데 더욱 조심을 기해야겠다는 생각으로 그는 말에 실수가 없도록 신중을 기했다.

“저 사실은 궁금한 것이 있어서 왔습니다. 여쭤 봐도 되겠습니까?”

“안 돼.”

노인들 중 하나가 그 질문을 딱 부러지게 거절했다. 그러자 그들 간에 또 한 번 크게 웃음이 터졌다.

상당히 짓궂은 노인들이었다.

당장에 마르크가 생각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하나였다.

그는 호주머니에서 농부들의 머릿수만큼 은화를 꺼내들었다.

“저 이것 약소하지만…….”

그를 보며 흰 수염이 배꼽까지 길게 뻗은 노인이 모질게 나무랐다.

“어린 녀석이 막돼먹었구나. 어디서 배운 버르장머리냐!”

질책을 받은 것뿐인데 이상하게 마르크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위협이 현실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다른 농부의 꾸지람도 이어졌다.

“푼돈 따위로 어르신들을 농락하려 들어? 내 당장에 이놈의 다리몽둥이를 분질러놔야겠군.”

정말 그러려는 생각인지 팔을 걷어붙이며 다가오고 있다.

제라드가 근엄한 목소리로 그를 제지했다.

“어지간히 하시오. 보아하니 그쪽도 잘못이 있는 듯한데 너무하지 않소.”

크진 않은 목소리였다.

하지만 그 목소리는 여기 있는 모두가 들을 수 있었다.

다수의 농부들이 마나를 실어 날려 보낸 목소리를 듣고서야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농부들 중 한 명이 방금 말을 내뱉은 제라드를 향해 따졌다.

“이쪽도 잘못이 있다고 하시었소? 그래, 우리가 무슨 잘못을 했는지 어디 들어나 봅시다.”

제라드는 주저하지 않고 저들의 그릇된 점을 이야기했다.

“내 보기에도 귀하들은 평범한 분들이 아니구려. 앞서 청년이 그렇게 물었음에도 당신들은 우스갯소리로 떠넘겼소. 그러니 청년이 돈을 준 것은 당연한 일일 수도 있지. 평범한 농부들이었다면 먹고살 걱정 때문이라도 염치 불구하고 그 돈을 받았을 테니까. 호의를 보인 사람을 왜 이리 핍박하는 게요? 또 청년이 여러분들보다 나이가 어리다고 함부로 대한 점도 있잖소.”

양심은 있는지 농부들이 조금 미안한 기색을 떠올리는 듯했다.

그때 초를 치는 소리가 마르크의 입에서 불쑥 튀어나왔다.

“제라드 장로님, 죄송한 말이지만 전 이분들이 평범한 분들이 아니라는 걸 알았습니다.”

잘되었다는 듯 마르크의 다리몽둥이를 분질러놓겠다고 엄포를 놓았던 농부가 앞으로 나서 따졌다.

“이것 보시오. 알았다지 않소. 그런데도 우리를 탓하는 거요?”

제라드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그냥 그렇다고 넘어갔으면 될 일을 마르크가 필요 이상으로 솔직했던 탓이다. 그것이 남을 곤혹스럽게 만드는 줄도 모르고.

머쓱한 표정을 짓고 있는 제라드를 보며 농부들 중 제일 고령자로 보이는 노인이 긴 수염을 쓸어내리며 모호한 웃음을 짓더니 마르크를 보고 벌컥 화를 냈다.

“떽, 이 녀석!”

귀청이 떨어져 나갈 정도로 큰 소리에 마르크가 놀라자 노인이 타이르듯 말했다.

“적어도 널 생각해주고 한 말인데 배은망덕한 놈이로구나.”

마르크는 그에 대해 아무 항변도 하지 않았다.

대신에 제라드에게 속마음으로나마 미안해하고 있었다. 여기서 말을 잘한다 해도 본전이거니와 못한다면 둘 다에게 해로운 상황이 초래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를 보며 노인의 얼굴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인자해졌다.

“생각이 깊은 청년이로다. 인재로구나, 인재야.”

느닷없이 칭찬을 늘어놓는 노인.

마르크는 그저 묵묵히 귀만 기울였다.

그러자 노인이 제라드를 보며 직접 사과를 했다.

“미안하게 되었소. 그대 말도 맞고, 여기 있는 청년의 말도 맞구려. 원인 제공은 우리였으니 기분이 상하였다면 푸시오.”

제라드는 겸허하게 이를 받아들였다.

“개의치 않겠습니다.”

노인은 만면에 흡족한 미소를 떠올리며 마르크를 보고 입을 열었다.

“그래, 사과의 의미로 아까 네가 궁금하다고 했던 부분을 말해보아라. 이 늙은이가 아는 내용이라면 알려 주도록 하마.”

마르크는 주저 없이 물었다. 워낙에 괴짜들이라 이들의 마음이 언제 바뀔지 모른다는 불안 때문이었다.

“며칠 전부터 근방을 지나던 무리를 발견했습니다. 바로 저런 사람들이오.”

그의 손가락 끝은 멀리 줄지어가는 행렬들을 향해 있었다.

노인은 잠시 고민에 잠기는 것 같더니, 이내 아는 바를 털어놓았다.

“어딘가에서 사금을 캔다고 하더구나. 내 알기론 저들은 그곳으로 간다고 하였다. 지금도 그곳엔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다고 하였지, 아마?”

마르크의 귀가 솔깃해지는 소리였다.

그의 인생에 가장 중요한 게 있다면 돈이었다. 이 돈이 풍족해야만 이스론을 최고의 상단으로 만들겠다는 꿈을 이룰 수 있기 때문이다.

충분히 납득이 가는 얘기였다. 돈이라면 제국의 군대가 움직일 이유가 되는 것이다.

“금이 많이 나오나 봐요?”

그냥 그렇다고 말해버리면 될 일이었다.

하지만 노인은 그 뒤의 말을 덧붙이기까지 했다.

“여기까지가 사람들이 아는 부분이지.”

한 농부가 그 뒤에 이어질 말을 짐작하고는 말을 더듬으며 항의 아닌 항의를 했다.

“어, 어르신…….”

노인은 손바닥을 펼쳐 보여 그의 입을 닫게 하고는 마르크에게 뒷얘기를 들려주었다.

“하나, 그건 그럴싸한 핑계일 뿐이고 그 이면에는 영약(靈藥)을 만드는 데 쓰이는 매우 귀중한 영초(靈草)들을 캐내려는 욕심들이 숨어 있단다.”

“영약이오?”

“그렇단다. 먹으면 강해지고 힘이 솟는 약, 바로 그걸 만들려는 것이지.”

이스론에서 취급한 품목 중에 영초라는 게 있기는 했다. 그러나 마르크는 그것을 팔기나 팔았지, 정확히 어디에 쓰이는 줄을 몰랐다.

“저도 영초를 만져 본 적은 있습니다. 그것이 있다면 영약을 만들 수 있습니까?”

질문이 엉뚱한 데로 새고 있었음에도 노인은 친절하게 이를 다 설명해주었다. 아까와는 판이하게 다른 태도로 말이다.

“꼭 그렇지만은 않단다. 영초 역시 여러 종류로 나뉘는데, 극소수의 기사들이 먹는 영약은 그리 흔한 영초가 들어가는 게 아니야. 희소성이 짙어 제국의 어지간한 귀족들조차 구경도 못해봤을 정도로 진귀한 것이지.”

비로소 마르크는 영약이라는 것을 지금에서야 처음 알게 되었다.

그가 모르는 것도 당연했다. 보통 기사들이라 할지라도 영약이라는 것은 이야기를 꾸며 내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지어낸 얘기라 치부하고 있었으므로.

“너도 욕심이 나느냐?”

“솔직히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전 장사치거든요.”

속셈이 따로 있었다. 저들을 따라가 그 귀한 영초라는 게 어떻게 생긴 건지 알아볼 작정이었다.

혹시 모르지 않은가. 그 영초의 생김새를 안다면 언젠가 득이 될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기대심리가 작용한 것이다.

생각을 정리하고서 다시 마르크가 물었다.

“저 한 가지만 더 여쭤도 되겠습니까?”

“그러려무나.”

“어르신들의 정체가 궁금합니다.”

그의 물음에 농부들은 딴청을 부릴 뿐이었다.

하지만 노인은 그에 대한 대답도 들려주려 했다.

“우린 말이다.”

뒷말이 이어지기 전에 한 농부가 당황해하며 그를 제지코자 했다.

“어, 어르신!”

“우리가 뭔 대수라고 그러는가? 우린 그냥 농부일 뿐이네. 지금은 말이야.”

노인은 그 이상의 대답을 해주려는 생각은 없는 듯 보였다.

마르크 역시 이쯤에서 그만두는 게 낫다고 여겼던지 대화를 마쳤다.

“알겠습니다. 언젠가 인연이 있다면 또 뵙게 되겠지요. 제 욕심만 채우니 어르신들께 괜히 미안해지네요. 하하하.”

뒷머리를 긁적거리는 마르크를 보며 노인은 주저하지 않고 말했다.

“기본은 되어 있는 녀석이군. 세상에 공짜는 없지. 그 대가로 우리가 갈던 땅이나 갈아주고 가려무나.”

* * *

코 아래부터 수북이 자란 붉은 수염이 꽤 인상적이었다.

키는 작되 매우 탄탄한 몸의 소유자였다.

오딘은 부지런을 떠는 그를 보며 내내 경탄성을 터트리고 있었다.

“파이어해머 드워프라……. 놀라울 정도군. 저렇게 일을 잘하다니.”

“저 녀석의 이름은 살탄이야. 맘에 드나?”

아그리스의 질문에 오딘은 시원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그리스는 그에 만족스러워했다. 기왕에 붙어 지내게 된 것 악감정을 세워봤자 좋을 건 없었다.

서로가 불편해하면서까지 붙어 다닐 필요가 있을까? 해서 아그리스는 화해의 뜻에서 자신의 레어에 있던 드워프를 데려왔다.

드워프를 그대로 두는 건 생산성에 차질이 생긴다.

레어에서 놀고 있는 녀석을 데려온 것이니 문제 될 것은 없었다.

저 일꾼은 오딘에게 있어 매우 큰 선물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작업의 귀재라 일컬어지던 드워프라는 종족을 찾으러 대륙을 떠돌아다니려던 중이었지 않은가.

막혔던 작업들이 술술 풀려갔다.

가마를 만들던 일 역시도 어렵지 않게 마무리가 되었다.

“이 정도면 되겠습니까?”

드워프 살탄의 질문에 오딘은 환한 미소로 응답했다.

“썩 맘에 드는군.”

“마음에 드신다니 다행입니다.”

자신이 한 일이 인정을 받아서인지 살탄은 매우 만족하는 표정이었다.

비단 가마만이 아니었다.

얼기설기 지어졌던 도자기소 역시 매우 근사한 모습으로 탈바꿈해 있었다.

또한 사람들의 주거지까지도 예술작품처럼 뒤바뀐 상태였다. 먼 계곡 근처에서 옮긴 돌들이 앞마당과 길을 장식했다.

그 때문인지 마을 사람들의 얼굴에는 더한 행복함이 어려 있었다.

도자기소를 나온 이후에도 살탄은 계속 부지런을 떨었다.

그의 눈은 쉴 틈 없이 일거리를 찾아 헤맸다.

“하하하하, 자네 검의 날이 무뎌졌군. 이리 주게.”

얼떨결에 검을 뺏긴 무사는 잠시 당황하는 눈치였지만 내심 고마워했다.

쉽게 눈을 떼지 못하는 오딘을 보며 아그리스가 투덜거렸다.

“계속 여기에만 있을 거냐?”

“그러고 보니 시간이 많이 지체되었군. 이만 가야겠어.”

“그곳으로 가면 되는 거지?”

고개를 끄덕이는 오딘의 어깨에 아그리스가 손을 짚었다.

그리고 눈부신 빛과 함께 두 사람의 모습이 사라졌다.

바로 그때였다.

능글맞게 웃으며 무사의 검을 들고 가던 살탄은 돌변한 태도를 보였다.

딸캉!

방금 쇳소리는 무사의 검이 돌바닥으로 떨어진 소리였다.

무사가 그가 떨어뜨린 검을 주워들려고 다가왔는데 살탄은 매정하게 말했다.

“자세히 보니 그다지 무뎌지지 않았어. 도로 가져가.”

황당해하는 무사를 두고서 살탄은 잰걸음으로 마을 한쪽을 장식한, 여럿이 앉을 수 있는 나무의자에 걸터앉았다. 다리가 짧아서인지 바닥에 닿지 않아 대롱거렸다.

그의 입에선 긴 한숨이 배어나왔다.

“후우~”

이를 눈여겨보던 노인이 다가왔다.

그는 원래 이 작업장의 책임을 맡고 있던 노인이었다. 노인은 살탄이 나타났을 때 가장 반가워하던 사람이기도 했다. 왜냐하면 오래전 헤어졌던 그의 친구가 살탄이었으므로.

근심 가득한 얼굴로 노인이 물었다.

“자네, 왜 그러나?”

“뭐가 말인가?”

“예전에는 일거리가 없으면 화를 낼 정도였지 않은가. 한데, 지금은 그렇게 보이지 않아서 말이야.”

보는 그대로였다.

살탄은 오딘이 지시한 많은 일거리를 전부 해치웠지만 진심으로 좋아서 했던 게 아니었다.

거리낌 없이 살탄은 속내를 털어놨다.

“과거에는 일이 정말 좋았었지. 하지만 이젠 정말 지쳤네.”

“지치다니? 그게 무슨 말인가?”

살탄은 다시 한 번 한숨을 푹 쉬었다.

“자네도 들었겠지? 내가 그의 레어에서 일했다는 얘기를. 거기서 시작되었지. 어떤 일이건 생기기만 하면 쉴 시간도 주어지지 않았네. 지겹다 못해 진저리가 날 정도로 일을 했었네. 이제는 일에 관한 얘기만 나와도 몸서리가 쳐지네. 어쩌다가 저런 드래곤의 눈에 들었는지…….”

즉, 그는 아그리스에게 끌려간 것이었다.

드래곤과 드워프는 거의 상극에 해당한다. 왜냐면 드워프에게는 천부적인 재능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재능이 살탄에게는 불행을 안겨 준 것이다.

“일도 내켜야 하는 것이지. 하지만 그는 내게 강요를 했어. 명백한 협박이었지. 다론, 자네라면 견뎌 낼 수 있었을까?”

친구의 얘기를 듣고 나서야 다론은 이해할 수 있다는 모습을 보였다.

‘내가 뭐라 위로를 해줘야 할지 모르겠군. 나는 자발적으로 응하고 있지만 이 친구는 지금 역시 끌려온 건데……. 어쩌면 오딘 님이 지시하신 일에 차질이 생길지도 모르겠군.’

그러나 그것은 괜한 걱정이었다.

시일이 흐르며 살탄은 미치도록 일에 매달렸다.

다론이 가르쳐 준 방법대로 도자기를 몇 개 구워보더니 이제는 잠자는 시간마저 쪼개고 있었다.

파캉!

잘 구운 도자기 하나를 망치로 부수며 살탄은 고개를 내저었다.

“이것도 아니야.”

바닥은 깨어진 도자기 수십 점이 굴러다녀 너저분했다.

그를 본 다론이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다 깨어버리면 어쩌자는 건가?”

“맘에 들지 않아. 최고를 만들 거야, 최고를.”

역작용이었다.

차라리 일을 안 했다면 대충 구운 도자기라도 내다 팔 수 있었을 것이다.

초반에 만든 도자기는 몇 점 내어다 팔았지만, 근래에 들어서는 살탄의 손에 든 망치에 의해 죄다 깨어지고 말았다.

살탄의 욕심 가득한 눈은 온통 가마 안에서 구워지고 있는 도자기에 향해 있었다.

마치 홀린 듯했다.

다론은 막연한 걱정이 앞섰다.

‘오딘 님께서 이를 아신다면 큰일이 나겠군. 조만간 또 들르실 텐데.’

그랬다. 오딘은 아그리스를 따라 제국으로 갔지만 며칠에 한 번 꼴로 이곳을 들락거렸다.

숲의 반지가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최근엔 아그리스마저 이곳에 와 쿤과 쉬바인까지 데리고 갔다.

자연히 살탄은 더 눈치를 볼 대상이 없게 되었다.

그러나 눈 아래 검은 그림자가 생기도록 일에 매달리는 것은 그 때문이 아니었다.

말로는 형언하기 힘들 도자기의 아름다움에 그만 매료되어버렸던 것이다.

하나의 도자기가 더 만들어졌다.

그러나 그 역시도 살탄의 망치에 의해 박살이 나고 말았다.

살탄의 표정은 고뇌에 차 있었다.

“후우~ 혼자 있고 싶어. 좀 나가줄 수 있나?”

별수 없이 다론은 밖으로 나섰다. 그리고 계속하여 오딘에게 무어라 설명을 해야 할지 고민해야 했다.

* * *

전신거울 앞쪽으로 나이시스 신성 제국의 성황 카르만이 나체로 서 있다.

그의 오른쪽으로는 원형 테이블이 자리했는데 그 위로 일렁이는 빛을 간직한 펜던트가 놓여 있었다.

때문에 카르만의 얼굴은 오딘과 사투를 벌일 때와 마찬가지로 추악하기 그지없었다.

그의 눈은 시종일관 거울에 비치는 몸에 뚜렷이 드러난 자상들을 좇았다.

“썩을! 아직도 나을 기미가 보이지 않아. 갈아 마셔도 시원치 않을 녀석.”

원래 카르만의 몸에 난 상처들은 대부분 신성력으로 자연 치유가 가능했다. 한데, 오딘과 싸워 생긴 상처는 신성력을 쏟아 부었는데도 쉽사리 지워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분을 주체하지 못한 주먹이 부르르 떨었다.

인정하기 싫지만 카르만은 싸운 대상이 자신의 힘을 한참이나 상회했다는 것을 깨우쳤다. 검술에 더 매진한다고 하더라도 앞으로도 이기리라는 보장이 없었다.

그때의 선택은 어쩔 수 없었던 것이다.

카르만이 거울 속 자신을 보며 물었다.

“분명히 죽었겠지?”

거울 속에서는 어떠한 대답도 들리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그는 자신을 세뇌하듯 중얼거렸다.

“죽었을 거야. 분명 그곳까지 들어갔으니 먼저 가디언들이 튀어나왔을 테지. 운 좋게 그 녀석들을 잡았다고 하더라도 블랙 드래곤의 분노를 이기지는 못했을 거야. 분명 그랬을 거야.”

벌써 한참이나 지난 일이었다.

하지만 카르만은 미친 사람처럼 오딘에 대한 악몽을 꾸는 날마다 거울 앞에 서서 지금처럼 중얼거렸다.

정말 그렇게 믿기 시작했는지 카르만의 입꼬리가 흉측하게 올라갔다.

그러나 그도 잠시, 그는 다시금 불평을 늘어놓았다.

“제길, 그 녀석이 갈가리 찢겨 비명횡사하는 꼬락서니를 봐줬어야 하는 건데.”

문득 바쁜 발소리가 멀리서부터 들려왔다.

탁탁탁탁탁.

소리만으로도 이 발소리의 주인이 누구라는 것을 카르만은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시녀 메이일 것이다.

카르만은 즉시 펜던트를 목에 걸고 일렁이는 빛을 마주치며 인상을 구겼다.

그러다 어느 순간 고개를 확 틀었는데 거짓말처럼 카르만의 얼굴은 예전의 자상한 얼굴로 되돌아왔다.

주섬주섬 옷을 걸치며 상하의의 단추까지 다 채웠을 때서야 메이로 추측되는 대상이 문에 다다랐는지 노크를 했다.

똑똑똑!

조금 전과는 달리 매우 다정한 목소리로 응했다.

“들어와도 좋아.”

살며시 문을 열었지만 막상 몸을 안으로 들여놓고 다시 문을 닫았을 때 메이는 호들갑을 떨었다.

“점심 식사가 끝난 지가 언제인데 아직까지 이러고 계시면 어떻게 해요?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다고요.”

“점심 먹은 게 이제 막 소화가 됐어.”

“서둘러야 한다고요. 지금 성황 폐하는 왜 아직도 안 오시냐며 말이 오가고 있는 중이에요.”

카르만이 지각하는 것은 종종 있던 일이었다.

별일도 아닌데 마치 큰일이라도 난 것처럼 떠들어대는 메이가 귀여워 보였는지 카르만은 그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어주었다.

“그래? 그럼 서둘러야겠구나. 어서 가자.”

카르만이 그녀의 손을 잡고 느긋하게 걸음을 옮기려 했다. 하지만 메이는 손을 뿌리치고 그의 양팔을 잡고 끌었다.

“늦었다니까요. 서둘러야 한다고요. 중요한 사안이라고 했었잖아요.”

채근을 해대는 그녀가 미울 법도 하건만 카르만은 그녀의 이런 모습에서 어쩐지 마음의 평온을 얻고 있었다.

카르만이 대전 안에 들어서 황좌에 몸을 앉히자 각 귀족들을 포함해 여러 신관들과 대신관들, 몇몇 수도원장과 추기경이 그를 의식했다.

‘불가사의한 일이야. 저렇게 허한 몸으로 아직도 성황의 자리에 앉아계시다니. 보통 신성력이라면 불가능할 일이다.’

이처럼 다수의 신관들과 귀족들, 그리고 일부 수도원장들이 그가 젊음을 유지하고 아직도 이렇다 할 정도로 건강이 나빠지지 않은 것은 신성력 때문이라고 여겼다.

반면에 일찍이 추기경 쪽에 줄을 댄 자들은 그가 권좌를 내놓을 순간만을 학수고대하고 있었다.

신성 제국 내의 귀족들은 각 신관들과 밀접한 연관이 있었다. 제국 내에서 힘 있는 목소리를 내려면 꼭 신관들의 입이 필요했던 것이다.

때문에 신성 제국은 귀족들보다는 신관, 대신관들이 우선이었다.

“대전 회의를 속개하겠습니다.”

대전 내에 울려 퍼지는 말에 의해 분위기는 숙연해졌다.

“신 발할라, 계속 말씀을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성황 카르만의 시선과 다른 이들의 관심이 그의 입에 모아졌다.

“브란트는 그리 중요한 땅이 아니었습니다. 오지와 다름이 없다는 것이 더 정확할 듯합니다. 한데, 근래 들어 많은 사람들이 그쪽을 찾고 있습니다. 일찍이 평범한 사람들이 그것을 발견해 상인들의 발길이 이어졌고, 요 근래 들어서는 제국의 군대까지 동원되고 있습니다. 이유인즉슨, 금을 찾아서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허울일 뿐이고…….”

발할라 백작은 다소 뜸을 들였다.

여러 신관들이 어서 빨리 뒷얘기를 듣고 싶어 하는 눈치를 보냈고, 대신관들도 보채는 기색이었다.

궁금함을 참지 못한 대신관 막스마라가 모두를 대신해 물었다.

“허울이라니? 어서 얘기를 해보시게.”

그제야 발할라는 여럿의 표정을 살피고는 뒷말을 이었다.

“금보다는 영초를 구하려는 속셈이 그 이면에 숨어 있다고 합니다.”

이번엔 라이벤 대신관이 욕심에 물든 눈을 하고 되물었다.

“영초? 혹시 영약에 쓰이는 영초를 말함인가?”

“바로 보셨습니다. 정식 명칭은 베르코타말이라고 합니다.”

이는 극소수의 상인들과 지배층만이 아는 내용이었다. 영초로 쓰이는 약초에는 공통적으로 타말이라는 단어가 붙었는데 이 중 상급으로 분류되는 영초에는 베르라는 수식어가 붙어 다녔다.

여태 이런 일이 없었다. 자연히 대전 회의에서 이 같은 일을 논하는 일 또한 없던 일이었다.

영약에 대해 반신반의하던 귀족들과 신관들은 자신들의 귀를 의심했다.

하지만 그에 대해 알고 있던 라이벤은 흥분을 했는지 언성을 높여 채근하듯 물었다.

“양은 얼마나 되는가?”

“직접 확인을 해보질 못해 자세히는 모르겠습니다. 다만, 신의 생각엔 적지 않을 것이라 사료됩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제국에서 군대까지 동원할 까닭이 없다고 보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결코 좌시할 수 없는 일이었다. 영약의 효험은 엄청난 것이었다.

한 예로 소드익스퍼트 초급의 기사가 영약을 먹은 후, 소드익스퍼트 중급의 기사와 겨뤄 이겼다는 설이 있다.

물론 그는 낭비였다.

워낙에 귀한 것이니 영약은 보통은 마스터에 오른 인물들이 주로 섭취했다.

마스터들은 마나의 증진을 돕는 영약을 발견하면 전 재산을 털어서라도 구매하려는 욕심을 보였다.

때문에 이는 철저한 신용 속에서 극소수의 상인들만이 다뤘다.

만일 가짜를 팔았다간 목이 열 개라도 남아나지 않을 것이었으므로.

마스터들이 목을 맬 정도로 찾아다니는 영약이다. 그리고 그에 가장 중요한 재료인 영초가 저들의 손으로 넘어간다면 향후에도 나이시스 신성 제국이 크레노스 제국과 동등한 힘을 유지하라는 법은 없었다.

전투는 개인에 의해 좌우되는 것이 아니지만, 보다 많은 고급 기사들의 보유는 국력의 신장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었다.

신성 제국이 떠안고 있는 악재는 또 있었다.

근래 생긴 신흥 제국과의 마찰이 그것이었다.

그러니 어떻게 해서라도 힘의 균형이 깨지는 것만은 막아야 했다.

물론 대전 안의 사람들 중 일부는 그에서 더 나아가 욕심을 부리고 있었다. 특히나 비센 추기경의 욕심은 간절했다.

‘어차피 성녀를 데려오면 성황의 제거는 가능하다. 문제는 성황을 비호하는 세력들. 영약만 손에 쥔다면 그들에게 공을 들일 필요 없이 무릎을 꿇릴 수 있을 것이다. 더 나아가 대륙의 통합도 가능하겠어.’

비센의 야망은 끝이 없었다. 그에는 지금 보낸 자들이 반드시 성녀를 데려올 것이라는 계산이 밑바탕에 깔려 있었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대전 회의에 카르만은 말수가 적었다. 그러다 보니 대부분의 의사 표시는 안에 있는 이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마침내 그 의견이 하나가 되어 카르만을 향했다.

“성황 폐하, 무엇보다 힘의 균형이 깨지는 것만은 막아야 하옵니다. 하여 신들은 파병 쪽으로 의견을 모았습니다. 이에 성황 폐하께 건의를 드리오니 부디 현명하신 용단을 내려 주시옵소서.”

결단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카르만은 길게 생각하지 않았다.

“신들의 의견이 그러하다면 나 역시 그를 제지할 생각이 없소. 파병을 허락하오.”

“황송하옵니다.”

“기대에 어긋남이 없이…….”

다른 이들의 말이 이어졌지만 더 이상 카르만의 귀에 그 목소리들은 들어오지 않았다.

카르만은 속으로 발할라의 입에서 나왔던 한 단어를 되뇌는 중이었다.

‘베르코타말이라. 베르코타말… 베르코타말…….’

그의 내면에서 힘에 대한 끝 모를 욕심이 일렁거리고 있었다.

라이벤 대신관과 비센 추기경은 대전 회의를 마치고 나란히 황성 밖을 거닐며 은밀한 얘기를 나누었다.

둘은 입 밖으로 소리를 내지 않고 통신 마법으로 서로의 의사를 주고받았다.

행여 하는 말이 새었다가는 줄초상을 치르게 될 것이기에.

[이제 올 때도 되지 않았습니까?]

[올 때가 되었지. 벌써 떠난 지 보름이 흘렀으니.]

그들이 가리키는 사람은 성녀를 데려오라고 보낸 여신관이었다.

돌연 두 사람은 후미진 언덕 위 세 그루의 나무가 있는 곳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이곳은 과거 신성 제국에서 가슴에 품어둔 말을 입 밖으로 꺼내질 못하고 세 남녀가 목을 매달아 죽은 장소다. 그를 측은히 여긴 당시의 성황은 이곳에서만은 하고 싶은 말을 마음대로 하라는 의미에서 왜곡장을 펼쳐 두었다.

그 덕분에 두 사람은 더 이상 주위의 눈치를 보지 않고 편히 대화를 할 수 있었다.

“하루하루가 불편해. 그 녀석의 낯짝을 보는 것도 지겨워.”

비센의 말에 라이벤이 위로의 말을 건넸다.

“조간만 추기경님의 세상이 올 것이옵니다. 너무 심려치 마시옵소서.”

“그리되어야지. 일이 잘못되는 날에는 우리의 목숨은 온전치 못할 테니.”

“그 때문에 이렇게 오랜 시간을 준비해오지 않았습니까.”

30년이란 세월은 정말 긴 시간이었다.

그동안 비센은 여러 신관들과 귀족들을 포함해 일부 수도원장들과 템플 기사의 3분에 1에 해당하는 전력, 그리고 여기 있는 대신관을 자신의 편으로 만들었다.

이는 철두철미함 속에 가능한 일이었다.

만약에 그 시간 동안 배신을 하는 사람이 있었다면 소문은 일순간 퍼져 나갔을 것이다. 그에 천문학적인 액수의 돈이 소모되었다.

이 돈을 끌어 모으기 위해 비센은 각 신전들에 차별을 두었고, 성금을 받는 액수를 올렸다.

따지고 보면 대륙에 전도사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 것 역시도 비센의 작품이었다.

돌연 비센은 한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가만, 누가 오는 것 같군.”

그의 말대로 호리호리한 체격에 로브를 걸친 중년 여인이 멀리서 말을 타고 줄곧 이쪽만을 향해 다가왔다.

두 사람 모두 아는 얼굴이었다.

또한 계속하여 기다리던 얼굴이기도 했다.

그녀는 카반에 성녀를 데려오라고 보냈던 여신관이었던 것이다.

소식을 빨리 듣고 싶은 마음에 두 사람은 결계 밖으로 나가려 했지만 꾹 참았다.

얼마나 급했던지 여신관은 달리는 말에서 뛰어내려 그것을 매어둘 생각도 못하고 허겁지겁 달려왔다.

여신관은 두 사람 앞에 다다르더니 당장 땅에 무릎을 대고 아뢰었다.

“큰일이옵니다.”

그녀의 목소리는 격양되어 있었다.

비센과 라이벤, 두 사람의 얼굴에 불안한 빛이 스쳐 갔다.

라이벤이 닦달하듯 물었다.

“큰일이라니? 그게 무슨 말이냐?”

“제게 내주신 두 템플 나이트가…….”

“템플 나이트가 어쨌다는 얘기냐!”

여신관만큼이나 라이벤은 다급해져 있었다. 호통을 칠 만도 했다.

비센의 가장 측근이 그였던 만큼 그는 추기경의 사정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혹 그녀를 따라 보냈던 마스터급의 템플 기사 둘이 잘못되었다면 이는 정말 큰 타격이 아닐 수 없었다.

더군다나 브란트로의 파병이 결정되지 않았는가.

그 일에 제국이 나섰다면 어중이떠중이들만 보낼 수는 없다.

신성 제국 역시 고급 기사들을 대동해야 하는 것이다.

다 빠져나간 후에는 누구를 시킬 것인가.

그러니 만에 하나 일이 잘못된다면 성녀를 다시 데려올 기회는 더 멀어질 것이다.

제발 그 대답은 아니기를 바랐건만 여신관은 지극히 실망스런 태도를 보였다.

“흐흑, 저를 벌하여 주십시오. 제 불찰이었습니다.”

라이벤은 말할 기회를 잃고 말았다.

비센의 입에서 귀청이 떨어져 나갈 듯한 소리가 튀어나와서이다.

“불찰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냐-!”

여신관의 입에서 두려움에 떠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소드마스터는 하나가 아니었습니다. 전에 없던 자가 나타나…….”

잠시 비센은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지금의 말이 커다란 충격을 안겨 주었기 때문이다.

‘하나가 아니라고? 아레인이라고 했었는데? 아레인에 소드마스터가 둘이나 있어? 그것도 마스터의 검술 실력을 지닌 템플 기사를 압도할 만한 힘을 가진 녀석들이?’

하도 황당해 그의 내면엔 공허함마저 맴돌았다.

소드마스터라는 게 어디 쉽게 만들어지는 존재인가? 살과 뼈를 깎는 노력과 세월을 곁들여도 불가능하다고들 하는 것이 소드마스터다.

거기에 반드시 타고난 재능을 겸비해야만 오를 수 있는 무의 경지이질 않은가.

라이벤 역시 놀라움이 적질 않았다.

그러나 그는 놀라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같이 갔던 템플 기사들은 어디 있느냐?”

여신관은 머리를 땅에 바짝 대고서 탄성을 내뱉었다.

“한 명은 위독하여 치료를 하기 위해 근처의 신전으로 보냈지만, 다른 한 명은 그 자리에서 그만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 소리를 들은 비센의 아랫입술이 이빨에 짓눌려 푸르르 떨리더니 이내 입술이 터져 피가 새어나왔다.

몹시도 격분한 것이다.

엎드려 있는 여신관의 머리 위로 손을 올리며 비센은 마나를 끌어 모았다.

라이벤은 비센이 그녀를 죽이려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추기경 정도라면 이 자리에서 그녀를 해치고 흔적도 없이 시체를 치워버릴 능력이 있었다.

라이벤은 얼른 그를 제지했다.

“간단히 생각하실 문제가 아닌 듯합니다.”

“간단히 생각할 문제가 아니라니?”

“어쩌면 아레인에는 그보다 많은 수의 소드마스터가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비센은 행동을 멈추고 라이벤을 보며 의구심 많은 눈을 치켜떴다.

“그들이 카반에 전력을 투입할 만한 일이 있다면 모르겠지만, 그 전력이 일부라는 가정도 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듣고 보니 맞는 말 같았다.

그 말은 더 큰 경각심을 불러일으켰다.

‘마스터가 한둘도 아니고 그보다 더 있을 수도 있다고? 그 조그만 왕국에?’

믿지 못하겠는지 비센은 의심부터 늘어놨다.

“그들이 아레인을 사칭하는 것은 아닐까?”

라이벤은 그 말도 일리가 있음을 시사했다.

“물론 그럴 가능성도 있습니다. 어쩌면 막스마라의 ‘눈’일 수도 있겠습니다. 또한 제 의견이 맞을 수도 있습니다. 어쨌건 사실 확인이 필요하고, 그들이 왜 카반에 와 있는지가 중요한 듯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아레인에 사람을 보내보는 것이 어떨까 합니다.”

냉철한 판단, 이것이 라이벤의 굉장한 장점이었다.

덧붙여 라이벤은 여신관에 대한 자비를 그녀가 듣지 못하게 통신 마법을 이용해 요구했다.

[그리고 이 여신관에게는 자비를 베푸심이 어떨까 합니다. 이 여자는 아직 이용 가치가 높습니다. 꽤 많은 줄이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들 모두가 남자지만 말입니다.]

비센은 감히 고개를 들지 못하고 있는 여신관을 보며 탐욕을 품었다.

‘그래도 몸은 잘 굴리는 모양이군. 없는 것보다는 낫겠지. 다시 일선에 투입시키지만 않으면 되니까 말이야. 마침 몸종들한테도 질리던 차였는데 잘되었군.’

생각을 마치는 즉시 그는 여신관에게 물었다.

“벌을 내려 달라고 하였느냐?”

여신관은 흐느끼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 렇사옵니다.”

“어떤 벌이라도 달게 받을 수 있겠지?”

“물론이옵니다.”

대답은 했지만 그녀의 목소리엔 두려움이 깃들어 있었다.

목숨만은 앗지 말아주기를 하는 바람이 있었던 것이다.

“네 목숨을 거두지는 않겠다. 다만, 내 화가 풀리기 전까지는 지하의 독방에서 한 발자국도 못 나갈 줄 알거라.”

석연치 않은 마음이 들었지만, 무엇이든 죽는 것보다는 낫겠다 싶어 여신관은 그렇게 하겠다고 눈물을 훔치며 수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하옵니다. 정말 감사하옵니다.”

“먼저 돌아가라. 단, 지하로 내려갈 땐 동물처럼 네발로 기어서 가야 한다.”

“며… 명령을 받들겠습니다.”

그것 역시 형벌이라 생각하고 그녀는 말을 타고 성문으로 향했다.

비센은 라이벤이 말한 내용을 떠올리며 그의 제안을 따르기로 마음먹었다.

“당장엔 아쉽지만 지금은 자네 말대로 아레인에 사람을 보내는 방법밖에는 없겠군. 달리 선택의 길이 없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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