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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과 드래곤 (40/67)

인간과 드래곤

파르티잔은 이들과 떨어질 수 없었다.

사실 자신이 있을 곳은 어디라도 상관은 없었다.

그는 제국의 신민임을 증명하는 신분증도 없었으며 무일푼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렇다고 외곽 쪽으로만 돌아다닐 수도 없는 노릇이다.

몸도 좋질 않은데 중대형 몬스터들을 만나기라도 한다면 목숨을 내놓아야 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다행히 제라드가 그를 붙잡았다.

마지못해 따라가는 것처럼 파르티잔은 이들을 따르기로 했지만, 언젠가 돈이라도 슬쩍할 때면 여기를 뜨겠다고 결심을 굳혔다.

정말 우스운 것은 게티롱이었다.

파르티잔은 그가 꼴도 보기 싫어 따라오지 말라고 했지만 게티롱은 여전히 어울리지도 않는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기어코 빌린 돈을 주겠다는 이유였다.

돈을 받으려면 다시 라테우스 검은 산맥으로 가야 할 것이다.

파르티잔은 그러기 싫었다. 절대로.

“없던 일로 할 테니까 그냥 가슈, 제발.”

“그럴 순 없소. 자고로 신용이 걸린 문제는 확실해야 한다는 게 나 게티롱의 지론이오.”

파르티잔은 게티롱을 보며 눈을 흘겼다.

그러나 저 무쇠 고집을 무슨 수로 꺾을 것인가.

분명한 것은 게티롱의 고집을 꺾는 것보다는 그를 죽여 없애는 게 더 쉬울 것이다.

하지만 그럴 생각은 없었다.

꼴 보기 싫은 녀석은 돈을 훔쳐 야반도주를 할 때 버리고 떠나버리면 될 테니까.

이로써 우여곡절 끝에 이들의 제국행이 결정되었다.

* * *

사방이 폐허였다.

고지라고는 하지만 평평했던 땅은 마치 지진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사방으로 갈라지고 꺼져 층이 생겨서 원래의 모습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여기저기서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올랐고 이로 인해 주위는 후끈후끈한 열기에 휩싸였다.

그 중앙으로 오딘과 블랙 드래곤 아그리스가 마주 서 있었다.

오딘의 상의는 갈기갈기 찢어져 있었으며, 아그리스의 광택이 날 정도의 검은 비늘들 역시 시꺼먼 그을음이 묻어 본래의 색이 바래져 있었다.

씩씩거리던 아그리스가 물었다.

[내 가디언들을 박살낸 것도 네놈이었지?]

“가디언? 그 해골바가지들 말인가?”

아그리스는 인상을 찌푸리며 단정을 지었다.

[역시 네놈이었구나.]

그에 더 대꾸할 생각은 없는지 오딘은 거추장스럽다는 듯 상의를 찢었다.

부욱!

그리고 땅에 찢어진 옷을 던졌는데 딸캉 하고 쇠끼리 부닥치는 소리가 들렸다.

그를 유심히 보던 아그리스가 비아냥거렸다.

[누가 비겁한 놈 아니랄까 봐 요상한 무기를 많이도 숨겨 놓았구나.]

그 말에 오딘은 이죽거리며 대꾸했다.

“네놈한테는 쓰지 않았느니라.”

서로를 죽이지 못해 안달이 난 둘. 그러나 어딘지 모르게 이들은 이 싸움을 즐기는 듯 보였다.

오딘은 이 싸움에서 얻은 게 있었다.

바로 운기에 관련된 것이다.

과거 중원의 엉터리 삼류 무사가 창안한 조석천즉입시출(潮汐川卽入時出)이라는 운기는 터무니없는 것이었다.

특히나 고수들에게는 더욱더 그러했다.

조석천즉입시출은 말 그대로 방출한 기를 즉시 도로 쌓아둔다는 뜻인데, 이것은 현실상 불가능했다.

그도 그럴 것이 수십 년을 걸쳐 이룬 축기(蓄氣)를 단시간에 행한다는 것은 무리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딘은 눈앞의 녀석과 전투를 벌이게 되며 그것을 체득하게 되었다.

중원이었다면 절대 불가능한 일이었으리라.

이곳엔 중원보다 현저히 많은 양의 기가 살아 숨 쉬고 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처음엔 오딘 역시 단시간에 막대한 양의 기가 쌓이는 바람에 주화입마에 걸릴 뻔했다.

이를 무사히 넘겼기에 벌써 자신이 가진 내공의 몇 배나 사용할 수 있었던 것이다.

‘크큭, 기연이나 영약을 찾는 어리석은 놈들아, 이런 게 바로 기연이고 영약이니라.’

오딘은 중원에서 목에 힘깨나 주고 다닐 고수들을 향해 속으로나마 그렇게 나무랐다.

그렇잖아도 중원에서 상대가 없었지만, 이 대륙에 발을 들여 놓으면서부터 오딘의 무력은 더욱 막강해졌다.

요 며칠간의 일은 오딘의 힘에 지속적인 시간을 더해준 셈이다.

[그러고 보니 벌써 삼 일은 흐른 것 같군.]

아그리스의 말대로였다.

오딘과 아그리스의 싸움은 3일 밤낮으로 계속되었었다.

그런데도 아직까지 어느 하나 쓰러지지 않았다.

아그리스에게도 없던 경험이었다. 누군가를 상대로 3일 밤낮을 싸워본 적이 있었던가. 절대 아니었다.

“벌써 그렇게 되었나?”

오딘이 주억거리며 몸을 돌려 해가 뜬 쪽을 바라보려 할 때 아그리스의 긴 꼬리가 날아들었다.

퍽!

꼬리 공격에 정통으로 허리를 얻어맞은 오딘의 몸은 의사와는 상관없이 직선으로 길게 뻗어갔다.

쿠콰콰콰콱!

그의 몸은 바위를 포함해 여러 장애물들을 뚫고 하염없이 날아가 사납게 땅에 처박혔다.

바위와 돌의 잔해 속에 파묻혀 버렸을 오딘을 향해 아그리스는 좋다고 웃었다.

[크하하하! 이놈, 이제야 이 아그리스 님의 힘을 알았느냐?]

불현듯 수북이 쌓인 잔해들이 꿈틀거렸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오딘이 불평을 늘어놓으며 몸을 일으켰다.

“좋아하기는 일러. 네놈도 비열하기는 나 못지않군.”

절로 아그리스의 인상이 찌푸려졌다.

[네놈은 겁을 상실해 못하는 소리가 없구나. 질긴 놈, 하나만 묻자. 네놈은 정체가 뭐냐? 인간이냐? 아니면 다른 종족?]

“인간이다. 중원에서는 본 좌를 흑룡무제라 불렀지.”

[인간이라고? 거짓말하지 마라. 내가 상대한 인간들 중 너 같은 놈은 없었다.]

“인간마다 차이가 있게 마련이지.”

아그리스는 인간에 의한 인식을 달리하게 되었다.

피라미, 버러지, 필요 없는 생명체라 여기던 인간에게 이런 힘이 있다는 것이 놀라웠던 것이다.

그가 알고 있던 인간들의 힘과 오딘이라는 이 인간의 힘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워낙에 차이가 컸다.

분명 같은 인간일진대…….

아그리스는 의문을 떨칠 수 없었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정말 이해가 불가하구나. 이 녀석은 여태 보았던 녀석들하고는 달라도 너무 다르다. 왜 그렇게 차이가 나는 걸까?’

갑자기 그는 인간에 대해 연구가 하고 싶어졌다.

쉽게 보면 정말 간단한 문제일 수도 있었다.

오딘이 남보다 강한 이유는 천부적인 소질보다도 노력의 공로가 컸던 것이다.

중원에 있을 당시 무공의 기초부터 갈고닦지 않았다면 오늘 날 아그리스와의 대결에서 뼈도 추스르지 못할 것이었으므로.

물론 아그리스의 입장에서 볼 때 의문이 싹트는 것은 당연지사였다.

드래곤들은 선천적인 힘을 부여받는다. 따로 마법을 익히고 수련을 거듭하지 않더라도 성체에 이르면 막강한 신체의 능력을 부여받음과 동시에 브레스를 발출할 수 있기 때문이다.

급작스레 생긴 의문은 뒷전으로 미루고 아그리스는 욕심을 버리지 못하고 물었다.

[어떠냐? 나 블랙 드래곤 아그리스 님의 수하로 들어오는 것은? 레어나 지키는 가디언 따위로 임명하지는 않겠다.]

듣는 사람에 따라 어쩌면 매력적인 제안일 수도 있었지만 오딘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리고 실로 광오한 말을 서슴없이 내뱉었다.

“네놈이 본 좌의 수하가 되는 것은 어떻겠느냐? 덩치가 커서 데리고 다니기는 사납기는 하겠지만, 그 정도야 감내해주도록 하지.”

서로가 상대의 자존심을 훼손함으로써 다시 긴장감이 증폭되기 시작했다.

아그리스는 천천히 다가서는 오딘을 보며 아까와는 다른 위협을 실어 말했다.

[미친 녀석, 감히 나에게 그런 말을 지껄이다니. 요구에 불응하겠다니 이렇게 마냥 시간을 보낼 수도 없고, 끝장을 봐야겠군. 네놈하고 노는 것도 이젠 지친다.]

이 무렵 기괴한 현상이 벌어지고 있었다.

오딘의 전신에서 스산한 마기가 하염없이 흘러나와 구름이라도 만드는 듯했다.

이는 새로운 경지와도 같았다. 조석천즉입시출로 몇 차례 운기를 한 후에 벌어진 일이었다. 오딘의 이성이 마성과 본성 그 중간 상태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반면에 아그리스는 그 커다란 입을 벌리며 쇳덩이도 부식시키는 브레스를 뿜어낼 준비를 했다.

* * *

가인은 한쪽 다리가 잘려 싸늘하게 굳은 주검을 바라보며 헤르에게 물었다.

“이렇게까지 해야 할 필요가 있었는가?”

질문에 대한 헤르의 대답은 무정했다.

“난 그래도 자비를 행했어. 갈기갈기 찢어 죽여도 분이 풀리지 않을 놈들이었네.”

할 말이 있으니 이곳으로 향해 달라는 말을 들은 것은 이틀 전이었지만, 국경 지대의 일을 정리하지 못해 가인은 지금에서야 도착을 한 것이다.

맨 먼저 시선을 끄는 것이 바로 무덤에서 방금 파헤친 이 시신이었다.

이는 헤르가 가인에게 상황을 설명하기 위해 보여 주려는 것이었다.

‘그가 성격이 불같다고는 하지만 서슴없는 살인을 행하지는 않는다. 필시 무슨 사연이 있을 터.’

생각이 여기까지 이르자 가인은 대놓고 물었다.

“자세히 일러주게.”

닫혀 있던 헤르의 입이 무겁게 열렸다.

“적의질풍대 무사 한 명이 이들에게 죽었네.”

가인의 눈이 크게 떠졌다.

“그게 정말인가?”

대답하기도 싫었는지 헤르는 고개만 끄덕였다.

헤르는 감정을 추스르며 있었던 일을 늘어놓았다.

“자네도 알 걸세. 오딘 님께서 우릴 왜 이곳으로 불렀는지. 그 명령 중엔 이곳 사람들의 보호도 속해 있네. 세실리라는 여자가 납치될 뻔했었지. 비명을 듣고 근처에 있던 적의질풍대 무사가 먼저 도착했었네. 하지만 힘에 부쳤던 모양이야.”

침통한 얼굴이었다.

가인은 그가 얼마나 자신의 수하들을 아끼는지를 실감했다.

‘나였더라도 그랬었겠지.’

입장을 바꿔 생각했더라도 가인 역시 그랬었을 것이다. 가인은 보채듯 물었다.

“이놈들을 보낸 작자들은 어떤 놈들인가?”

“저놈이 마지막이었네. 난 저놈을 죽이기 전 배후를 캐냈지. 한데, 조금 의외더군.”

잔뜩 궁금한 얼굴을 하고 있는 가인에게 전혀 예상치 못한 대답이 들려왔다.

“나이시스 신성 제국이라더군.”

신성 제국이라는 말이 가인에게 던져 주는 파장은 적지 않았다.

“그들이 왜?”

“세실리라는 여자, 그녀를 노렸네. 이유를 물으니 어처구니없는 얘기를 하더군. 성녀라고 하더군. 그래서 데려가야 한다고 했지.”

“성녀?”

“그렇다네. 한데, 그 말이 왜 믿음이 안 가는지 모르겠어. 신성 제국에서 신의 목소리를 대변한다는 성녀를 그렇게 거칠게 대해도 되는 건지……. 내가 왔을 때 그녀는 실신해 있었네. 다행히 지금은 안정을 되찾았지만.”

“그녀는 만나보았나?”

“만나보긴 했네만 그녀는 모르는 듯하네. 자신이 성녀라는 것을. 솔직히 나도 믿기질 않아. 자세한 것은 뒤를 더 캐봐야겠지.”

벌써 몇 명을 파견하여 일부의 조사가 들어갔다는 말이다.

현 상황은 엎질러진 물과도 다름없었다.

그러나 헤르의 얼굴에서는 두려움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예전이었다면 두려워했을 것이네. 우리 아레인의 힘은 미약하기 그지없었으니까. 하지만 이젠 달라. 적이 누구라고 해도 아레인을 건드리는 놈들은 가만두지 않을 걸세.”

단지 힘이 있고 없고의 문제가 아니었다. 지금의 아레인은 끈끈한 유대감으로 똘똘 뭉쳐 있었다.

자국민을 괴롭히는 자들과 아레인에 도전하는 적에 대해서는 용납하지 말 것.

이는 오딘이 아레인의 귀족들에게 내린 철칙 중 하나였다.

이것을 귀족들은 한뜻으로 받들고 있었다.

가인이 냉랭한 목소리로 물었다.

“모두 처결했나?”

“한 녀석을 놓쳤네. 여성이었지.”

“그럼 십중팔구 또 오겠군. 이럴 게 아니라 사정을 알려야겠어.”

가인이 엄지와 검지를 입에 물고 길게 휘파람을 불자 어디에선가 매 한 마리가 날아와 그의 어깨 위로 살포시 내려앉았다.

매는 커다란 눈을 끔뻑이며 뭔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가인은 매의 깃털을 쓰다듬어주고는 먹이를 준 후 뒤에서 대기하고 있던 무사에게 말했다.

“펜과 양피지, 그리고 내 직인을 가져와다오.”

무사는 읍을 하고 자리에서 빠르게 사라졌다가 어느새 준비된 도구를 들고 나타났다.

그를 받아든 가인은 양피지에 글자를 적어나갔다.

<카반, 신성 제국과의 마찰이 예상됨.>

매우 간결한 글이었다.

직인이 찍었으니 발신인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가인은 메모와 직인이 들어간 부분만을 빼고 나머지 여백을 찢어 가볍게 했다.

그리고 돌돌 만 후에 손등을 올리자 그 위로 매가 올라섰다.

이후 실을 이용, 내용을 적은 양피지를 매의 다리에 묶고는 손을 들어올리자 매는 하늘 높이 힘차게 날아올랐다.

푸드득!

급작스레 날아오른 매의 날개에서 깃털 하나가 빠져나와 원을 그리며 떨어져 내렸다.

가인은 손을 뻗어 깃털을 잡아 이리저리 돌려 보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신성 제국과 지금의 아레인, 누가 더 강할까?”

귀를 기울였다면 충분히 들을 수 있는 소리였지만 헤르는 그 의문에 관심을 기울이지 못했다. 멀리서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다.

가인 역시 의구심을 품고 고개를 돌려 보았을 때 네다섯 마리의 말들이 이곳을 향하고 있었다. 그중 가장 앞쪽에 있는 청년의 복장은 꽤나 고급스러워 보였다.

하나, 말끔한 외모와 달리 청년은 무척 당황한 기색이었다.

헤르가 다리를 잃은 성기사의 시체 곁에 있던 무사에게 눈짓을 보냈다. 뜻을 알아차린 무사는 구덩이에 시체를 밀어 넣고서 잽싸게 흙으로 덮었다.

막 매장이 끝났을 때 제법 귀티가 흐르는 청년이 탈것에서 내려 허겁지겁 다가왔다. 그러더니 대뜸 하는 말이 이러했다.

“이곳의 책임자를 보고 싶습니다.”

“어디에서 온 누구시오?”

경황이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청년을 따르던 남자가 당황해하는 그를 대신해 말했다.

“이분은 로만 공국의 레오노 공세자님이십니다.”

그 말을 듣고서야 헤르의 경계심은 풀어졌다. 헤르는 아까의 감정을 뒤로하고서 애써 태연함을 유지한 채 입을 열었다.

“로만의 공세자님이셨구려. 난 아레인의 헤르 남작이고, 이쪽은 가인 자작입니다.”

바리톤과 전쟁할 당시부터 이들은 작위에 변동이 없었다. 하나, 두 사람 중 누구도 이에 이의를 제기하거나 불만을 품지 않았다.

사실 그럴 것도 없었다. 작위만 그대로였지, 각각 백의질풍대와 적의질풍대의 대주를 맡고 있는 두 사람의 권한과 위용은 다른 귀족들을 상회하는 것이었다.

레오노는 두 사람과 손을 맞잡은 후 용건을 꺼냈다.

“오딘 님께서는 어디에 계시는지?”

그 이름이 나오자 헤르의 태도가 달라졌다.

“그분을 만나기로 하셨습니까?”

“그런 것은 아닙니다. 단지 안면이 있는 사이이니 그분께 얘기하기가 편할 것 같아서입니다.”

가인도 대화에 끼어들었다.

“오딘 님께서는 이곳에 계시지 않습니다. 이곳의 일을 저희에게 위임하고 가셨사오니 우리에게 말을 하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조금 맥이 빠졌는지 레오노의 어깨가 살짝 처졌다.

“하는 수 없군요. 헤르 남작님과 가인 자작님께 얘기를 하는 수밖에요. 얘기가 좀 길어질 것 같은데…….”

눈치 빠른 가인이 지휘부 막사가 있을 곳을 향해 팔을 뻗었다.

“이쪽으로 가시지요.”

막사 안으로 들어서 착석한 레오노가 가장 먼저 꺼낸 말은 이것이었다.

“로만은 아레인과 불가침조약을 맺었으면 합니다.”

레오노는 그간 카반의 울프들의 동태를 파악하는 데에 열을 올렸다. 오딘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단정하기엔 아직 이르지만 레오노의 시선에 그들은 와해된 것이나 다를 바 없었다.

그것은 아레인의 군사력이 무시 못할 지경이라는 것을 의미했다.

늑대를 쫓다가 범을 들인다는 로만의 속담이 몸소 와 닿았던지 레오노는 부랴부랴 이곳을 찾았던 것이다.

이미 공왕으로부터 이에 대한 전권을 일임받은 상태였다.

레오노의 굳은 입술이 어떤 일이 있더라도 이 조약을 성사시키겠다는 각오를 대변했다.

지금 그가 꺼낸 말이 조금은 뜻밖이었던지 가인과 헤르는 서로를 의식했다.

그러다 가인이 대표로 물었다.

“그 배경을 물어도 되겠습니까?”

사실대로 얘기하자면 로만의 위상은 땅으로 추락할 게 뻔하다. 레오노는 그렇게 생각했다. 저들에게 무시를 당할 것이라 여겼기에 되도록 굽히고 싶지 않았다.

“앞서 오딘 님께서 카반에 삼십의 병력을 잔류시킨다고 하셨습니다. 이는 저희 공국에서 아레인에서 카반의 울프들과 마찰을 일으켰다기에 편의를 봐드린 것입니다. 저희는 앞으로도 되도록 아레인과 적으로 남고 싶지 않습니다. 옛말에 적과 적은 동지가 된다고 하였습니다. 만남이 나쁘지 않았으니 앞으로의 관계도 나쁘지 않았으면 합니다.”

가인이 낯빛을 바꾸고 되물었다.

“그 말씀은 저희더러 군사를 빼란 얘기로 해석해야 합니까?”

레오노는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로만은 한 입으로 두말을 하지 않습니다. 때문에 앞으로 발생할 수 있는 불미스러운 일들을 줄이기 위해 온 것입니다. 아레인에서 군대를 철수시키겠다고 하기 전까지 저희 쪽에서 그런 일을 부탁하는 일은 되도록 자제할 것입니다.”

이를 테면 아레인과 로만의 관계를 더욱 돈독히 하되 국가에 위해가 되지 말아야 한다는 얘기다.

그제야 가인은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레오노의 말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앞서도 오간 얘기이지만 협조가 필요하시다면 돕겠습니다. 또한 저희 쪽에도 문제가 있으면 아레인과 상의할 수 있는 자리가 마련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런 얘기라면 저희 역시 환영입니다. 서로 공생하는 관계라면 오딘 님께서도 반기실 것입니다.”

레오노의 마음이 놓이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레오노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이를 문서화해서 기록으로 남겨 두었으면 합니다. 가능하겠는지요?”

“어려울 것은 없습니다. 다만, 여왕 폐하의 직인을 받아야 하니 시일이 좀 걸릴 듯합니다.”

가인의 말에 레오노는 단호하게 요구했다.

“그럼 그렇게 해주십시오.”

“그러도록 하겠습니다.”

아직도 마음을 놓지 못했던지 레오노의 표정은 조금 불편해 보였는데 그를 보며 가인이 물었다.

“먼 길을 오셨을 텐데 와인이라도 한잔하시겠습니까?”

“술은 다음에 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준비가 되는 대로 두 분 중 한 분이 저희 공성으로 들러주십시오.”

“그러도록 하지요.”

레오노가 자리에서 일어섰을 때 묵묵히 입을 닫고만 있던 헤르가 말했다.

“얼마 전 신성 제국과 마찰이 있었습니다.”

“신성 제국과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헤르의 예상대로 레오노의 얼굴이 구겨졌다. 하지만 말해두는 게 옳았다. 후에 가서 일이 커져 괜한 시빗거리로 남아서는 안 되질 않겠는가.

로만은 원체 신성 제국을 멀리했으며 반기질 않았다. 그러나 작금의 시국에 불필요한 마찰까지 겪을 필요는 없었다.

지극히 실망스러운 표정을 하고 레오노가 물었다.

“어째서입니까?”

“그놈들이 내 수하를 죽였습니다. 내가 마찰을 일으킨 것은 그 부분이었습니다.”

“어디에서입니까?”

“바로 이곳에서입니다.”

“그들과 다른 곳에서도 마찰이 있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럼 왜?”

레오노는 자세한 대답을 듣기를 원했다. 세 번째의 대답까지 들은 후에는 괜히 그를 탓한 것이 미안해졌다. 다른 곳도 아니고 로만에 그놈들이 흙발을 들여놓았다지 않은가. 그것만으로 레오노의 가슴에서 타오른 작은 미움의 불씨는 죄다 신성 제국으로 옮겨 붙어 활활 타올랐다.

이어지는 대답은 놀라운 것이었다.

“그놈들 중 하나가 그랬다더군요. 성녀를 데려가야 한다고. 그 성녀를 끌고 가는 것을 내 수하가 제지하다가 벌어진 일이라고 추측됩니다.”

“서, 성녀? 성녀라고 하셨습니까?”

헤르가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보며 레오노의 눈이 찢어져라 크게 떠졌다.

“그분은 어디 계십니까?”

“바로 이곳, 카반에 있습니다.”

성녀는 나이시스 신성 제국뿐만 아니라 로만에서도 함부로 가치를 매길 수 없는 매우 중요한 존재였다.

적어도 같은 신을 모시는 왕국이나 공국들에게는 그러했다.

가인과 헤르는 그가 이런 반응까지 보이는 데에 자못 놀랐다.

가인이 슬그머니 입을 열었다.

“그들이 다시 올지도 모른다고 합니다. 이에 대해 아레인은 병력 증강을 하였으면 합니다. 물론 로만이 원치 않는다면 군사들은 국경 지대에 위치시켜 놓겠습니다. 공세자의 의견은 어떠하신지?”

레오노는 굳은 각오를 내보이며 다짐하듯 입을 열었다.

“아레인의 전력이 얼마가 되었든 카반 내의 주둔을 허락합니다. 또한 그 말이 사실이라면 이 일에 로만은 전력을 투입할지 모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 동맹국들도 뜻을 같이하게 될 것입니다.”

이는 평소에 로만이 얼마나 신성 제국을 미워하고, 또 견제하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 * *

쿠콰콰콰콰쾅!

거대한 폭발이 일었다. 그리고 한참 후에 연기가 걷히며 오딘과 아그리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아그리스의 몸 상태는 그리 좋지 못해 보였다. 오딘의 흑룡검에서 뻗어 나온 강기는 아그리스의 몸을 덮고 있는 강철 같은 비늘마저 찢어놓았다. 무려 10여 군데가 넘게 찢겨 있어 꼴이 말이 아니었다.

오딘이라고 사정이 여의치는 않았다. 왼쪽 팔은 부러졌는지 기형적으로 꺾여 있었고 한쪽 다리의 허벅지는 부패가 심해 뼈가 드러나 보일 정도였다.

아그리스가 자신의 몸에 치유 마법을 펼친 것과 동시에 오딘 역시 어긋난 뼈를 끼워 맞췄다.

두두둑!

그를 아그리스가 유심히 보며 물었다.

[그건 뭐냐?]

“접골이라고 하지.”

[쳇, 이상한 녀석.]

그렇게 불평 한마디 늘어놓을 뿐이었다.

둘은 상처를 수복했으나 서로의 눈치만 보았다.

먼저 말을 꺼낸 것은 아그리스였다.

[어디서 괴물 같은 녀석이 나타나서는…….]

무려 두 번의 브레스와 흑월파천무가 맞부딪쳤다.

서로가 지칠 만도 한 것이다.

오딘 역시 싸우고픈 마음이 싹 가셨다.

“사실 본 좌도 시간이 아깝구나.”

보름이 훌쩍 지났다. 더 이상 힘을 쏟아 붓는다는 게 무의미하게 느껴질 만도 한 것이다.

저 녀석이 인간이었다면 끝을 보았을지도 모르지만 상대는 드래곤이라는 전혀 다른 생명체이다.

전투 방식 또한 다르니 무공을 논할 가치가 없었다.

불현듯 아그리스의 몸이 눈부신 빛에 휩싸였다.

그리고 그 빛이 사라졌을 때는 검은 머리카락의 미남자가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오딘은 지금 사라진 블랙 드래곤의 행방을 묻는 어리석은 질문을 하지 않았다. 이미 저놈에게는 불가능한 일이 없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건 뭐냐?”

“폴리모프라 한다. 네놈 종족뿐만 아니라 다른 어떤 대상으로도 변할 수 있지.”

인간의 입으로 하는 말이어서 아그리스의 말은 더 이상 웅장하게 울리지 않았다.

“잘난 체는 여전하군.”

그 말이 분명 귀에 거슬렸지만 아그리스는 잠시 멈칫했을 뿐 다시 싸울 태세는 보이지 않았다.

‘인정할 건 인정하자. 이놈은 내게 인정을 받을 만한 자격이 있다.’

오딘은 허벅지의 상처 부위에 금창약을 바르고 단환 두 알을 꺼내 집어삼켰다.

하지만 이 금창약이라는 게 만병통치약도 아니고, 효과가 빠르지 않은 것이라서 상처가 아무는 데에는 꽤나 시일이 소요될 것이었다.

‘이 상처가 회복되려면 빨라도 일주일은 걸리겠군.’

이 역시 오딘이었으니 가능한 일이다.

아마도 범인들이 이런 상처를 입었다면 다리를 잘라내야 했을지도 몰랐다.

아그리스가 그를 보며 중얼거렸다.

“가까이 가도 베지 않겠다고 약속해라.”

뚱딴지같은 소리에 오딘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하지만 인간 상태라 크게 위험할 것 같지 않았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50보는 떨어진 거리에서 갑작스레 아그리스의 몸이 사라졌다.

블링크(Blink:순간 이동)였다.

그리고 오딘의 앞에서 갑자기 나타났을 때 그의 오른손바닥에서 형형한 광채가 일어났다.

아그리스는 오딘의 눈을 직시하며 경계를 하면서 그의 허벅지에 빛을 폭사시켰다.

모든 빛이 그의 허벅지로 스며들었을 때 다시 아그리스는 블링크를 시전하여 오딘과 거리를 두었다.

오딘이 자신의 허벅지를 보았을 땐 상처가 말끔히 아물어 있었다.

아직 통증이 완벽히 가신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그를 오딘은 나쁘게 받아들이지 않아 만면에 미소를 그렸다. 실컷 싸우고 나서 생긴 미운 정이 깃든 미소였다.

“난 줄 게 없는데?”

“받고 싶은 생각도 없어.”

모든 것을 다 가졌다고 자부했던 아그리스다.

원하는 것은 기필코 손에 넣었으며 수많은 보물을 레어나 아공간에 쌓아두었다.

인간 따위가 내민 선물이 눈에 찰 리 없었다.

하지만 유독 가지고 싶은 게 있었다.

“마음이 정 그러하다면 내 부하…….”

“시끄럽다.”

말이 끝나기도 전에 욕을 얻어먹고서 아그리스는 민망해했다.

‘가만, 저 검도 좋아 보이는데?’

흑룡검을 보며 순간적으로 생긴 욕구에 다시 아그리스가 입을 열었다.

“그럼 그 검이라도…….”

“일 없어.”

두 번이나 거절을 당하자 화가 났던지 아그리스는 씩씩거렸다.

“줄 것도 아니면서 준다고…….”

“본 좌가 언제 준다고 했느냐? 줄 게 없다고 했지.”

마주친 둘의 눈빛에서 불꽃이 튀길 것만 같았다.

하나, 더 싸운다는 것은 의미가 없는 일이라는 것을 알기에 이들은 다시 맞부딪치려는 생각을 품지 않았다.

오딘은 갈기갈기 찢어진 상의를 주워들었다.

그러다 문득 잊은 게 떠올랐는지 홱 돌아선 아그리스를 추궁했다.

“그 녀석들은 어디로 보낸 것이냐?”

“모른다.”

“네가 보내놓고 모른다고?”

“알아도 가르쳐 줄 생각 없다.”

오딘은 검갑에 집어넣었던 흑룡검을 다시 끄집어내며 이죽거렸다.

“아무래도 끝장을 봐야겠군.”

그때서야 아그리스의 태도가 달라졌다.

“아주 징글징글하구나. 대륙 반대편의 제국 근처로 보냈다. 네놈도 그리 보내줄까?”

포악해 보이기는 해도 아그리스의 눈빛은 거짓을 담고 있지 않았다.

친절하게 보내준다는 말까지 했는데도 오딘은 고개를 저었다.

“사양하지. 그 전에 데려와야 할 녀석들이 있으니 그곳엔 천천히 가는 게 좋겠어. 그건 그렇고 너무 과민반응을 하는군. 덩치에 걸맞지 않게 소심하기는.”

그에 아그리스의 눈과 입이 찢어져라 부릅떠졌다.

“뭐가 어쩌고 어째?”

하지만 역시 다시 싸우려는 의지는 추호도 없었다.

어서 이놈을 보내놓고 휴식이나 좀 취할 작정이었는데, 계속 성질을 긁어대니 화가 치미는 것이다.

자신이 누구인가.

성질 더럽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워한다는 블랙 드래곤이다. 그중에서도 유독 까칠하다는 아그리스가 아닌가.

오늘 일은 수천 년을 살아온 그에게 더없는 치욕의 날이었다.

속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그를 두고 오딘은 볼일 다 보았다는 듯 돌아섰다.

“될 수 있으면 앞으로 서로 마주치지 말았으면 하느니라. 네놈도 피곤하고 나도 피곤하니.”

아그리스의 기분이 엉망이 된 것은 개의치도 않고 오딘은 눈을 감고 이동할 숲을 떠올렸다.

잠시 후 손가락에 낀 반지를 문지르며 감쪽같이 사라진 오딘을 보며 아그리스는 바드득 이를 갈아댔다.

“으아아아, 크아아아아!”

사람의 울부짖음인지 드래곤의 포효인지 헷갈리는 소리가 엉망이 되어버린 대지 위를 울렸다.

이것이 오딘과 블랙 드래곤 아그리스의 첫 번째 만남이었다.

* * *

인부들은 흙과 돌을 나르고 나무를 규격에 맞게 자르는 등 쉴 새 없이 움직였다.

근방에 뼈대를 잡고 있는 건물들의 기초 공사인 듯했다.

아레인에서 파견을 나온 인부들뿐만 아니라 국경 지대에 살고 있던 천민들까지 팔을 걷어붙이고 일을 거들었다.

물론 허리가 구부정한 노인들은 그를 바라만 볼 뿐이었다.

“우릴 위해 집까지 지어주시다니…….”

국경 지대의 난민들은 하나같이 고마워하는 얼굴이었는데, 더러는 감동을 받았던지 눈가에 그윽한 이슬까지 맺혔다.

쿤은 기뻐하는 사람들을 보며 내심 흐뭇해하고 있었다.

“뭐가 그리 좋으냐?”

쉬바인의 물음에 쿤은 미소를 거두지 않고 솔직한 심정을 내보였다.

“사람들이 즐거워 보여요.”

“그래서 좋은 거냐? 네 집을 지어주는 것도 아닌데?”

“네.”

짤막한 대답과 함께 빙그레 웃는 쿤.

정말 그는 행복이라도 느끼는 모습이었다.

쉬바인은 그 모습을 보며 나름의 생각을 고쳤다.

‘블러드 엘프가 꼭 더러운 성격만 있는 것은 아닌가 보군. 아니지, 어쩌면 이 녀석 변종일지도 몰라.’

누가 뭐라 해도 지식층은 마법사들이다.

마법책만 해도 얼마나 많은 전문 용어가 사용되는가.

이를 정독(精讀)하기 위해서는 다독(多讀)이 필요했다.

때문에 마법사들은 여러 책을 접했고, 그 까닭에 마법사들이 유식하다는 말은 자연히 따라다녔다.

쉬바인은 이에 한발 더 나아가 적이 인간이 아닐 경우를 대비해 여러 종족에 관한 책도 두루 섭렵했는데, 그 가운데 블러드 엘프에 관한 얘기도 있었다.

엘프 중에서 얼마나 성질이 더러우면 블러드(Blood:피)라는 수식어가 붙어 있겠는가.

너무 착해 멍청해 보이기까지 하지만 쉬바인은 그를 나쁘게 생각지 않았다.

‘나도 저렇게 순수할 때가 있었겠지.’

한참 감상에 잠겨 있는데 아레인의 인부들이 손을 놓고 부복하며 소리쳤다.

“오딘 님을 뵈옵니다!”

먼저 알아차렸어야 했다.

한편으론 당황하고, 또 한편으론 깜짝 놀라 쉬바인이 다급히 몸을 돌렸을 때 바로 뒤에 오딘이 서 있었다.

재빨리 부복을 하려는데 오딘이 그를 만류시켰다.

“아서.”

쉬바인은 조심스레 그의 기분을 살폈다. 무슨 좋은 일이 있었던 것 같은 얼굴이다.

마음을 놓고 말을 올리려는데 그 말을 쿤이 가로챘다.

“언제 오셨어요?”

“방금.”

반가워하는 쿤, 그리고 시샘을 하는 쉬바인.

하지만 오딘의 시선에 두 사람은 안중에도 없는지 그는 곧장 사람 하나를 찾았다.

“도자기소(陶磁器所)는 어디 있느냐?”

허겁지겁 달려온 노인이 물음에 인사를 올리지도 못하고 팔을 뻗으며 방향을 가리켰다.

“이쪽에 준비되어 있습니다.”

오딘은 뒷짐을 진 채 그의 안내를 받으며 뒤를 따랐다.

얼기설기 지은 모양의 건물이었다.

하지만 오딘은 그를 문제 삼지는 않았다. 중요한 것은 내용이지 껍데기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가마는?”

노인은 다시 손을 들어 한곳을 가리켰다.

“저것이옵니다.”

아궁이와 굴뚝은 있었다. 하지만 모양새가 영 마음에 들지 않았던지 오딘은 노인을 꾸짖었다.

“종의 모양을 따라고 하질 않았더냐.”

“다시 만들겠사옵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어딘지 모르게 노인은 어려워하는 기색이었다.

주위를 보니 오딘은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벌써 여러 차례 실패한 모양이로군. 가마를 만드는 것도 이렇게 어려워하다니.’

아레인에서 도기 방면에서는 나름 기술자라고 하여 데려온 사람이다.

처음의 일부터 실망을 안겨 주자 오딘은 기분이 썩 좋질 못했다.

이 도자기소만 잘된다면 일을 넓혀 찻잔이나 여러 그릇들에 문양을 새겨 넣는 작업까지 하여 무역을 할 셈이었다.

그러나 이런 식이라면 기대는 접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고려에서 사람을 데려왔다면 좋았을 것을.’

고려의 물건은 말 그대로 최상품이었다. 그것은 중원을 비롯해 서역에서도 최고로 쳐주는 물건들이었다.

오죽하면 왜(倭)나라의 많은 부호들이 고려의 물건을 조금 더 가지려다 모든 재산을 탕진하였다고 하질 않던가.

오딘은 돌아서 다소 회의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것을 바란 게 잘못이었겠지. 대륙이 다르고, 사람이 다르다. 이들이 그들이 했던 것을 해낼 리가 만무할 터. 그래도 그 반만이라도 따라주길 바랐거늘.’

이런 반응을 보이자 노인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당장에 흙바닥에 엎드려서는 경직된 목소리로 아뢰었다.

“소인이 혼을 바쳐서라도 미흡한 점을 고쳐 나가겠습니다. 최선을 다할 터이니…….”

한없이 미안해하는 노인의 어깨를 짚으며 오딘은 엷은 미소를 지었다.

“그대의 잘못이 아니다. 너무 괘념치 말도록.”

짐을 주려 함이 아니었다.

노인 역시 오딘의 뜻을 알았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노력이, 재능이 부족하다는 점을 매우 애석하게 생각했다.

‘그 녀석이라도 있었다면…….’

노인의 뇌리에 오래전 친구의 모습이 떠올랐다.

원래부터 키가 작은 자신보다 더 작은 친구의 모습. 그는 드워프였다.

못 만드는 것이 없다고 알려진 드워프 말이다.

노인 역시 그에게서 많은 것을 배웠고, 그 덕에 도기를 만드는 부분에 있어서는 칭찬을 들으며 살았다.

오딘이 완전히 밖으로 나섰기에 그는 나지막이 중얼거릴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그 녀석과 헤어진 지도 벌써 삼십 년이 다 되어가는군. 그 후에 내가 아레인으로 오게 되었지.”

눈을 감기 전 다시는 못 만나게 될 것 같은 옛 친구를 떠올리며 노인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노인을 뒤로하고 문지방을 넘던 오딘은 무언가를 발견하고 우뚝 멈췄다.

사람들이 검은 머리카락의 낯선 사내를 주시하고 있었다.

“어디에서 오신 분입니까?”

신분을 확인하기 위해 다가가던 아레인의 무사의 몸이 굳었다.

이유는 이방인에게 있었다.

그저 둘의 시선이 마주친 것뿐이었다.

그를 목격한 반대편의 무사가 소릴 치며 달려들었다.

검은 머리의 이방인은 그의 목을 향해 손을 뻗었다.

손은 목에 닿지도 않았지만 무사의 몸이 허공으로 둥둥 떠오르고 있다. 무사는 목이 졸리는지 두 손으로 자신의 목을 감싸며 호흡 곤란에 힘겨워했다.

급기야 음영대의 부대주가 나서 소리를 치며 대들었다.

“이 무슨 짓이오!”

당장에라도 검을 빼어들려는 그를 보며 쉬바인도 뒤쪽에서 공격 마법을 캐스팅하려는 중이었다.

이방인의 입술이 열리며 칼칼한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쓸데없는 짓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거다.”

쉬바인은 그 목소리가 어쩐지 자신을 향하고 있다는 생각을 품었다.

‘마나의 흐름을 눈치 챈 걸까?’

쿤 역시 거들기 위해 주변의 마나를 끌어 모았다.

‘보통 사람이 아닌 것 같아. 어중간한 마법은 통하지도 않겠어.’

그때 이방인에게서 또다시 카랑카랑한 경고가 터졌다.

“꼬마, 너도 가만 있는 게 좋을 거다.”

예기치 못한 상황으로 인해 인부들의 손까지 멈춰버렸다.

사람들은 서로를 바라보았다.

저 이방인이 누군지, 왜 이곳에서 행패를 부리는 것인지 추측하기 위해서.

돌연 이방인의 뒤쪽에서 오딘의 이죽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놔줘, 좋은 말로 할 때.”

목소리를 확인한 이방인의 입에 만족스러운 웃음이 걸쳐졌다.

“시건방진 녀석.”

오딘은 그가 고개를 돌리지 않아도 누구라는 것을 단번에 알아챘다.

그도 그럴 것이 헤어진 지 반나절도 지나지 않았으니 무리될 것도 없었다.

이방인은 바로 블랙 드래곤 아그리스였던 것이다.

“실없는 놈, 용건을 대라. 아니, 물어볼 필요도 없겠군. 그냥 끝장을 보려는 생각으로 온 거겠지?”

오딘은 어느새 흑룡검을 꺼내들고 있었다.

그를 보며 아그리스는 오딘의 뇌리에 말을 전했다.

[싸울 생각은 없다.]

-그럼 무슨 생각으로 왔느냐?

[네놈이 내 집 앞마당을 박살내어놨으니 당분간 신세를 지겠다.]

-마치 나 혼자서 박살낸 것처럼 얘기하는군.

[네놈이 오지만 않았어도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을 게다.]

한참 말싸움이 계속되었다.

서로가 타인들에게 들리지 않게 얘기하는 것이어서 둘이 왜 이러고 서 있는 것인지를 궁금해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러나 애초에 둘에게 타인의 시선은 불필요한 것이었다.

[당분간이다. 네 녀석이 부숴놓은 부분을 복구하기 전까지다.]

-하루 이틀에 복구할 수 있을 것처럼 말하는군.

도무지 아그리스는 적응이 되질 않았다.

‘크윽, 나 아그리스가 인간 따위에게 저런 말을 들어야 하다니.’

미간을 좁히면서도 아그리스는 끝내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하인들을 부리면 그리 오래는 걸리지 않을 것이다. 만약 내 요구를 거절한다면 나도 네 녀석이 벌인 짓과 비슷한 행동을 취하겠다.]

-비슷한 행동?

[그렇다. 내 가디언들을 회생 불가능하게 박살을 내놨다는 것은 네 녀석도 시인한 일. 나 역시 우선은 네놈 근처에 있는 녀석들부터 죽여 없애겠다. 그리고 이 주변도 폐허로 만들겠다. 그뿐 아니라 네 녀석이 가는 곳마다 따라다니며 박살을 낼 생각이다.]

이놈이 행패를 부린다면 오딘 자신은 살 수 있다고 해도 주변인들이 죽게 될 것이며 고급스러운 점토가 될 흙들은 다 훼손되고 말 것이다.

‘덩치는 산만 한 녀석이…….’

다른 방법이 없었다. 그러나 영 내키지 않는 일이어서 오딘은 다른 방법을 택하고자 했다.

-묵을 곳은 얼마든지 마련해줄 수 있다. 이보다 좋은 곳으로 보내주지. 단, 네 녀석의 마당이 복구되는 때까지다.

그렇게 제안을 했음에도 아그리스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네놈이 저지른 짓이다. 누군 돈이 없어 그러는 줄 아느냐? 돈으로 보상을 하라는 말이 아니라 네놈이 하라는 말이다.]

떼를 쓰는 아그리스를 보니 오딘은 골이 다 지끈거리는 것 같았다.

-생각해보도록 하지.

[생각할 시간에 근방에 있는 몇 녀석을 족치며 시간을 달래야겠군.]

강압적인 아그리스의 태도에 오딘은 결국 그의 요구를 승낙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 요구 들어주도록 하지.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고 좋아하는 아그리스를 보며 오딘은 조건을 달았다.

-하지만 몇 가지는 지켜야 한다.

[몇 가지라니? 내가 내 집에 있었으면 맘대로 하고 돌아다녔을 것이다.]

-싫다면 없었던 일로 하지. 이 녀석이 조금 더 고생하겠구나.

진짜 끝장을 보려는 생각인지 오딘은 흑룡검에 시선을 두었다.

아그리스가 침을 꿀꺽 삼키며 다시 협상의 포문을 열었다.

[일단 들어보겠다. 무리한 요구가 아니라면 수용할 용의는 있다.]

그를 보며 오딘은 아그리스가 뭔가 꿍꿍이가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때문에 문제의 소지가 될 수 있는 것은 모두 조건에 달았다.

-첫째, 본 좌의 수하들을 해쳐서는 안 된다. 둘째, 본 좌의 일에 장애가 되어서는 안 된다. 셋째, 본 좌의 소유지를 파괴해서는 안 된다.

[크큭, 그 정도야 뭐. 충분히 들어줄 수 있다.]

이 세 가지는 아그리스가 이곳에 오게 된 동기에 속하지 않았다. 사실 아그리스의 속내는 다른 곳에 있었다.

오딘을 통해 수수께끼 같은 인간에 대한 연구를 하기 위함이었다.

어째서 비슷한 체구의 인간들이 천지 차이의 능력을 가지는지에 대해서.

그것은 아그리스에게 있어 풀리지 않을 숙제 같았다.

오딘이 라테우스 산맥에서 사라지고 난 후에 아그리스는 그 부분에 대해서 사념에 빠졌었다.

마당이 망가지고 가디언들이 부서진 것보다 아그리스는 자신과 맞먹는 힘을 가진 오딘에 대해 흥미를 가졌던 것이다. 제대로 된 환경에서 생활하려면 다른 산맥으로 이사를 가야 한다.

자신이 아무리 드래곤이라고 한들 그렇게 망가진 땅을 어떻게 복구시킬 수가 있겠는가.

마당을 고친다는 것은 애당초 핑곗거리에 불과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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