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투
성녀를 데려오기 위해 카반을 다녀왔던 여신관은 비센 추기경의 노기가 두려워 그와 눈도 마주치질 못할 지경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비센의 입에서 불호령이 떨어졌다.
“역시 여자에게 중책을 맡기는 게 아니었어. 고작 그 일도 해결을 못하다니… 무능하도다. 지금 네 말인즉슨 카반에 괴물이라도 살고 있다는 말이냐? 설마 카반의 울프라는 마적들 따위를 겁내서 도망친 건 아닐 테지?”
비센의 힐난을 못 이기고 여신관은 어렵사리 입을 떼어 항변했다.
“그건 아니었습니다. 하오나 제가 데려간 자들로는 성녀를 데려오기에 역부족이었습니다.”
“역부족이라니?”
상황을 설명하면 엄벌만은 면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지 그녀는 시간을 끌지 않고서 재깍 답했다.
“그녀를 비호하는 소드마스터가 있었습니다.”
과연 소드마스터란 말에 비센 추기경의 눈이 크게 떠졌다. 그녀를 탓하기만 하던 태도를 확 바꿔 비센은 다그치듯 물었다.
“소드마스터가 있었다고? 카반에 왜 소드마스터가? 내 듣기로는 로만 공국 전체를 통틀어도 소드마스터는 없다고 들었는데…….”
“그의 소속은 로만이 아닌 듯하옵니다.”
정확치 않은 말에 비센의 노성만 커졌다.
“로만이 아니라니? 로만 사람이 아닌데 왜 로만에 있어!”
호통을 이기지 못하고 여신관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게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가 올린 이름은 필경 로만이 아닌 아레인었습니다.”
“아레인?”
“그렇습니다. 분명히 아레인이라 했습니다.”
“아레인이라면 대륙 남단에 붙어 있는 자그마한 왕국이 아니더냐?”
여신관은 추기경의 눈을 살피며 주저함 없이 답했다.
“그럴 것입니다. 저 역시 대륙에 아레인이라는 국호를 쓰는 곳은 그곳뿐이라 알고 있습니다.”
비센은 왜 이 일에 아레인 따위가 끼어들게 된 것인지 연유를 알 수 없었다.
대외 정세에 밝은 비센이 아무리 생각을 뒤져 봐도 그와 연결이 되는 고리에 대해서 보고를 받기는커녕 들은 기억도 없었다.
의문은 더욱 커져 가 그의 머리를 복잡하게 만들었다.
사념에 빠진 비센을 향해 여신관은 다시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자들 중 하나를 심문해보면 알 수 있을 듯합니다만…….”
비센은 생각을 방해한 여신관을 탓하기보다 그녀의 말을 곱씹었다. 틀린 말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에 여신관은 용기를 내어 입을 열었다.
“추기경님, 소드마스터급의 템플 기사를 내어주시면 이번엔 틀림없이 성녀를 데리고 오겠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자들 중 하나를 생포해오겠습니다.”
그 정도는 능히 추기경의 권한에 있었다.
마스터급의 템플 기사들은 수십에 이른다고들 하지만 그들 모두가 귀하디귀한 존재들이었다.
소드마스터들은 대륙 내에서도 극히 한정되어 있다. 그 얼마 되지 않는 수의 소드마스터도 제국이나 왕국 등에 골고루 나누어져 있는 형국이라 한 사람이라도 잃는 것은 큰 손해였다.
또한 모든 템플 기사단이 비센만을 보고 따르는 것은 아니었다. 이들은 후에 성황의 세력을 몰아내기 위한 주춧돌이나 다름없었으니 함부로 남용할 힘이 못 되었다.
그럼에도 눈앞의 목적을 위해 비센은 어렵지 않게 결단을 내렸다.
“아레인에 어쩌다 인재가 난 모양이로군. 굳이 먼 아레인까지 사람을 보낼 필요는 없겠지. 목적은 성녀니까……. 기왕에 해야 할 일이라면 확실히 해두는 게 좋겠어. 둘을 붙여 주겠다. 가능하면 그 소드마스터는 생포해라. 우리 쪽으로 흡수해야겠다. 아레인을 벌하는 것은 차후에 생각하기로 하지.”
여신관은 황송해하며 허리를 숙였다.
“두, 둘씩이나 말입니까? 알겠습니다. 기필코 일을 성공적으로 해내겠습니다.”
이는 사소한 일이 아니었다.
신성 제국 내에서 소드마스터의 경지에 오른 템플 기사가 지금과 같은 작전에 투입된다는 것은 근 8년 만에 처음으로 있는 일이었다.
* * *
같은 드래곤 중에서도 블랙 드래곤 아그리스를 무시할 수 있는 드래곤은 없었다. 하물며 지금 아그리스를 대놓고 무시하는 존재는 드래곤도 아닌 인간이다.
성체에 이른 드래곤은 대부분 폴리모프를 통해 인간을 비롯한 다른 종으로의 모습으로 탈바꿈할 수 있다. 그러나 아무리 타 종족으로 폴리모프를 한다 해도 같은 드래곤의 눈을 속일 수는 없었다.
드래곤들이 그들의 심장인 드래곤 하트의 박동 소리와 동족을 느끼는 직감은 거의 절대적이었기 때문이다.
아그리스가 볼 때 분명 저 검은 머리의 남자는 드래곤이 아니었다.
한데 왜?
겁을 상실했다거나 미친놈이라고 생각하면 쉽게 풀릴 일이었다.
그렇다면 그냥 밟아죽이면 될 테니까.
‘미개한 인간과 말을 섞을 수 있는 능력 따위는 없어도 괜찮았을 것을…….’
아그리스는 그것이 불만족스러웠다.
하잘것없는 인간 따위에 자신의 인상이 찌푸려져서야 쓰겠는가.
결국 아그리스의 큰 입이 벌어지며 산천지가 부르르 떨 정도의 드래곤 로어(Dragon Roar:드래곤의 포효)가 장엄하게 울려 퍼졌다.
[미천한 인간 따위가 감히 나 아그리스에게 협박을 하는 것이냐?]
눈앞의 인간이 했던 말은 정중한 부탁도 아니었으며 요구도 아닌 완전 협박이었다.
그것이 지금 아그리스를 광분하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로어를 듣는 대상은 공포를 느낀다고 한다. 하물며 일반 몬스터도 아닌 블랙 드래곤 아그리스의 로어가 터졌다.
파르티잔은 후들후들 떨다 못해 쓰러져 바닥을 기었고 비교적 겁을 상실한 게티롱마저 전신을 떨어댔다.
하나, 아그리스가 정작 위협을 주려 했던 대상인 오딘은 한쪽 귓구멍을 후벼 팔 뿐이었다.
“꼴에 덩치 값은 하는군.”
이죽거리는 말투에 아그리스는 머리에서 김이 다 피어오를 지경이었다.
한편으로는 의아한 생각도 들었다.
‘로어에 떨지 않아?’
다소 놀라운 현상이었다.
그의 로어라면 인간은 고사하고 오크나 오우거, 트롤, 미노타우루스 등 대형 몬스터까지도 떨기 마련이다.
크기로 봐서는 다른 인간과 차이가 없어 보이는데 그는 로어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으니 아그리스가 이상히 여기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혹시나 하여 아그리스는 오딘의 체내의 마나를 측정해보았다. 하지만 그로 인해 더한 의문만 늘어버렸다.
[이놈 대체 뭐지? 저 두 녀석들보다도 마나의 양이 적다.]
정신력이 강하다는 말로는 설명이 불가할 것이다. 정신력 또한 신체의 힘이 어느 정도 뒷받침되어야만 강해지는 것이다.
아그리스는 하인으로 받아들이기로 한 파르티잔보다 이 수수께끼 같은 검은 머리카락의 인간에게 신경이 쏠렸다.
오딘이 가볍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네 종족이라면 책에서 본 적이 있지. 안 그래도 한번 만나보고 싶던 차였는데 마침 잘되었군.”
그에 대한 아그리스의 어조는 조금 전보다는 차분해 보였으나 짙은 살기가 배어나왔다.
[드래곤 슬레이어를 꿈꾸는가?]
“주위에서 하도 대단하다기에 얼마나 강한 녀석들인지 확인하고 싶었을 뿐이니라.”
[재미있는 녀석이로구나. 인간 주제에 감히 드래곤과 맞설 생각을 하다니. 그것도 단신으로 말이야.]
오딘의 입가에 맺힌 미소와 아그리스의 입에 걸린 미소가 어쩐지 닮아 보였다.
* * *
일행들과 함께 산을 오르며 마르크는 흘끗흘끗 뒤를 돌아보곤 했다. 그럴 때마다 엘룬과 마적들의 움직임이 멎었다.
“계속 따라오는데요?”
그렇잖아도 틴 역시 그에 신경을 바짝 기울이는 중이었다.
반면에 오딘의 빈자리를 채우려 아레인에서 파견을 나온 제라드와 쌍귀는 마적들을 신경 쓰지 않고 대수롭지 않게 행동했다.
지금 보이는 행동으로 봐서는 혹 문제가 발생하더라도 뒤늦게 나서줄 것 같았다.
틴은 이를 무척이나 서운하게 받아들이고 있던 차였는데, 마침 제라드에게서 그에 대한 말이 들려왔다.
“너무 걱정하지 말게. 별일 없을 걸세. 날 믿어보게.”
반신반의하는 얼굴로 제라드를 보는 틴.
그들이 믿는 것은 제라드가 아니라 쌍귀였다.
제라드는 그런 틴의 어깨에 살포시 손을 올려놓으며 믿음직스러운 시선으로 안심을 시켰다.
“난 아무 때나 허튼소리를 하는 사람이 아니네.”
자신감 깃든 말투와 눈빛으로 보아서는 그냥 걱정을 덜어주려 던져 준 말은 아닌 듯했다.
또한 쌍귀가 가장 아래서 올라오고 있으니 마찰이 빚어지더라도 저들이 가장 먼저 부딪칠 것이라는 생각까지 들어 조금이나마 마음이 편해졌다.
이 중 가장 마적에 대해 신경을 쓰지 않는 사람은 헤르미온이었다.
그녀의 관심사는 오로지 이 근방 어딘가에 있을 오딘만을 향해 있었다.
나귀가 한 발, 또 한 발을 내디딜 때마다 그녀의 심장 박동은 더욱 빨라졌다.
그러다 어느 순간 그들은 발길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여기 있는 누구도 살아생전 한 번도 목격하지 못한 하나의 대상을 발견해서였다. 그 대상을 보는 것은 매우 진귀한 경험이었던 동시에 내면에서부터 걷잡을 수 없는 공포심을 불러왔다.
그것은 크기만도 어중간한 성과 맞먹는 생명체였다.
“드, 드래……!”
틴은 재빨리 마르크의 입을 억지로 막았다.
“조용히 해야 한다. 재수가 없으면 우리 쪽으로 다가올 수도 있다.”
놀라는 것은 사람들만이 아니었다.
블랙 드래곤을 보는 순간 고블린 샥과 오크 정크는 이성조차 상실했는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당장에 산 아래로 뛰어 내려가려 했다.
쌍귀가 두 팔을 벌려 그들을 막아섰다.
샥은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 쥐고 두려움에 벌벌 떨었다.
“가, 가디언들이 올 거야. 가디언들이…….”
드래곤을 볼 수 있다는 것, 그것은 금지된 선을 넘었다는 것과도 같았다. 그 선을 넘을 때는 여지없이 가디언들이 들이닥치게 될 것이라는 걸 샥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고블린이란 종족은 인간이란 종족과 다른 점이 있다.
인간은 한계에 도전해 넘으려는 욕구를 가졌던 반면에 고블린이라는 종족들은 힘의 우위를 명확히 구분했다.
그러니 무작정 도망만 치려는 것이다.
샥은 온몸의 진이 다 빠지고 다리가 너무 후들거려 다른 이들의 하산을 보챌 의욕조차 잃었다.
이들의 시선은 죄다 드래곤에 고정되어 있었으니 그 자리에 오딘이 있고 없고를 확인할 새도 없었다.
돌아가자는 의견이 우세한 데에도 헤르미온은 주저했다. 혹시 저곳에 오딘 님이 있지는 않을까 해서였다.
마르크가 재빨리 그녀의 팔목을 낚아챘다.
“정신 차려. 오딘 님이 이런 데 계실 리가 없잖아. 다른 데 계실 거라고. 길을 잘못 들었으니 어서 돌아가야 해.”
모두가 등을 돌리려는 이때, 앞쪽에서 인 섬광을 보고 제라드가 멈칫하다가 다시 원점으로 시선을 고정시켰다.
그러자 제라드의 눈에 밟히는 사람들이 있었다.
제라드의 눈에 밟힌 사람들이란 다름 아닌 파르티잔과 게티롱이었다.
이들은 한참이나 실랑이를 벌이는 중이었다.
오딘의 몸놀림은 범인들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게티롱조차도 생전 저렇게 빠른 사람을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게티롱은 눈앞에 펼쳐지는 현상들을 극구 부정했다.
“저건 속임수야.”
또 제멋대로 생각하고 판단하는 그를 보며 파르티잔이 잔뜩 인상을 찌푸린 채 조롱을 퍼부었다.
“그럼 당신은 속임수라도 저렇게 할 수 있소?”
“진정한 무사는 속임수를 쓰지 않아. 오로지 자신의 검을 믿지.”
기가 찰 노릇이었다. 게티롱의 사고방식은 산전수전을 다 겪은 파르티잔으로서도 도저히 이해하기 힘든 것이었다.
‘정말 못 들어주겠군. 착각도 유분수지. 착각의 늪이 아니라 착각의 강, 아니 착각의 바다에 빠져 사는군.’
될 수 있으면 파르티잔은 더 그와 말을 섞고 싶지도 않았다.
말을 섞어주는 자체만으로 자신까지 바보가 되는 기분이었으니 어련하겠는가.
드래곤이라는 존재는 과연 무시무시했다.
그러나 오딘의 힘 또한 상상을 초월했다. 파르티잔이 여태 봐왔던 오딘의 힘은 지금 보이는 힘의 10분의 1도 되질 않았으므로.
과거 저런 인간에게 대들었던 시절을 회상하니 오싹하여 온몸의 털이 쭈뼛쭈뼛 곤두서기까지 했다.
하나, 절망스러운 상황에서도 파르티잔은 기쁜 마음도 들었다.
저 전투는 파르티잔 자신에게 분명 무엇인가를 안겨 줄 것이다.
오딘의 패배이거나, 아니면 드래곤의 패배.
생애 최악의 상황에 봉착했다지만 기왕 이렇게 된 것, 무엇이 되어도 좋았다.
오딘이 죽는다면 드래곤의 하인이 될 것이지만 해묵은 원한을 삭혀 줄 수 있다.
반대로 드래곤이 죽는다면 그의 하인이 될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
쇠침 한 방으로 끝날 일이다.
그 침은 또 다른 부작용과 고통을 안겨 줄 가능성이 농후하지만 말이다.
저울질하기 힘든 사안이었지만 파르티잔은 드래곤을 응원했다.
멀쩡했던, 아니 창창했던 자신의 앞날을 송두리째 흔들다 못해 뒤바꾼, 처절한 고통만을 안겨 준 오딘의 죽음은 자신의 앞길과도 맞바꿀 수 있는 것이었으므로.
언뜻 보더라도 확실히 아그리스는 오딘을 봐주고 있는 상황이었다.
지금은 육탄 공격이 주였으므로.
아그리스는 가끔 마법을 쓰기는 했지만 난사하지 않았고 드래곤들에게 가장 강력한 무기인 브레스 또한 뿜지 않았다.
이와는 다르게 게티롱은 블랙 드래곤 아그리스를 보며 흐뭇한 미소를 머금었다.
“말은 서운하게 했지만 그래도 날 이웃으로 생각하고 있었군. 당신은 나한테 감사해야 하오. 내 덕분에 당신이 목숨을 건졌으니.”
“헛소리 좀 작작하시오. 저 드래곤이 당신을 신경이나 쓸 것 같소?”
“흥, 인정하기 싫겠지. 드래곤과 이웃인 내가 부러우면 부럽다고 왜 말을 못하오? 자고로 사람은 진솔해야 하오.”
파르티잔은 듣기 싫은 소리에 괴로운 듯 귀를 틀어막고 발악하듯 소리쳤다.
“또 헛소리, 또 헛소리!”
귀에서 손을 뗄 때쯤 다시 게티롱의 입이 열리려 했고 질겁하며 파르티잔은 다시금 양 손바닥으로 자신의 귀를 막았다.
이제는 그를 보는 것조차 싫어 고개를 돌려 버렸는데 그로인해 한 사람과 눈이 마주쳐 버렸다.
“응?”
꽤나 먼 곳에 있어 얼굴을 식별하는 것이 쉽지는 않았지만 파르티잔은 저 사람이 어쩐지 낯이 익다는 느낌이 들었다.
문득 대상이 파르티잔을 보며 손을 흔들었다.
크게 열 발자국 정도를 옮겨 놓으려 했을 때 동시 다발적으로 경고음이 들려왔다.
[한 발자국만 더 떼어놓으면 가만두지 않을 테다!]
-도망치지 않는 게 좋아. 본 좌와의 약조를 잊은 것은 아니겠지?
파르티잔은 지금 말을 한 대상들이 누군지 금세 알아차렸다.
뒤쪽에서 사활을 건 전투를 펼치고 있는 오딘과 블랙 드래곤 아그리스일 것이다.
그는 그 자리에서 얼음처럼 굳어 더는 발을 옮겨 갈 수 없었다.
다행히 파르티잔의 의문 해소는 풀릴 것 같았다.
그를 대신해 그의 눈에 익은 대상이 이곳으로 걸음을 옮겨 오고 있었으므로.
이윽고 대상의 식별이 가능해졌다.
파르티잔이 보던 남자는 제라드 백작이었다. 한때 하인리히를 따르던.
본래 제라드는 후작이었고 지금도 후작이지만 파르티잔이 기억하던 당시의 그는 백작이었다.
‘백작이 왜 이곳에 온 것일까?’
파르티잔은 일찌감치 탈출을 감행했으니 그간 아레인 왕성 안의 실정을 알 리가 없었다. 복잡한 추론을 거쳐 생각을 하는 것보다는 그가 왜 여기에 몸을 드러냈는지를 역추적하는 게 쉬울 것 같았다.
‘나를 찾으러 왔을 리는 없다. 내 행방을 추적했다고 보는 것도 억측일 터. 오딘을 찾아왔다는 게 맞겠지. 이 또한 억측일지도 모르겠다만, 저 무식한 오딘 놈이 세상 물정 모르고 드래곤 사냥이라도 나온 것인가? 아니, 억측이 아닐 수도 있다. 저놈은 괴팍해서 얼마든지 그럴 가능성이 있으니까. 그럼 근방에 아레인의 군사가……?’
생각을 하다 말고 파르티잔은 좌우로 고개를 휙휙 돌려 다른 이들이 있는지를 살폈다.
점점 추론이 엉뚱한 데로 흐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제라드 백작의 근방에 있는 사람들을 제하고는 더 이상의 군사는 없는 듯했다.
제라드는 파르티잔에게 다다르기 전 의문의 막에 어깨를 부딪쳤다.
막이 펼쳐진 것으로 추정되는 곳에 손을 뻗자 작은 스파크가 튀었다. 이는 아그리스가 파르티잔이 도망치려는 것으로 오인하고 조금 전 쳐 놓은 결계였다.
하는 수 없이 제라드는 멍하니 있는 파르티잔을 향해 손짓을 했다.
“이보게, 자네 발데르 폰 그라니트 공작 각하 휘하의 마법사였던 파르티잔이로군. 아레인 왕성에서 자네 얘긴 많이 들었네.”
이로써 명백해졌다.
제라드는 복직이 되었다는 걸.
파르티잔은 더 다른 생각은 않기로 했다.
왕성 안에서 얘기라고 해봐야 좋은 얘기는 떠돌지 않았을 것이다.
자신이 없는 상태에서 사람들이 보았을 흉을 생각하니 파르티잔은 찝찌름한 기분이 들었지만 특유의 능력을 발휘해 표정 관리를 하며 답했다.
“예, 백작님 오랜만입니다.”
제라드는 자신이 백작으로 불리는 것을 일체 문제 삼지 않았다. 예나 지금이나 그는 권위에 우쭐대는 인간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걸음을 옮기다 만 엉거주춤한 자세로 있는 그가 의아했던지 제라드는 의구심을 드러냈다.
“한데, 자네는 왜 그러고 있나? 아니, 그보다 저 드래곤하고는 무슨 사인가?”
엄밀히 두 사람이 서 있는 공간은 달랐다.
제라드는 결계 밖에 있고, 파르티잔은 결계 안에 있다.
파르티잔은 난처해하는 기색을 보였다.
“피치 못할 사정 때문입니다. 한데, 백작님께서는 어인 용무로 오셨는지요?”
“껄껄, 나는 오딘 님을 찾아왔다네. 그분께서 이곳으로 향하시는 것을 보아서 따랐다네.”
파르티잔은 땀이라도 삐질 흐를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굳이 가르쳐 줄 필요도 없었다.
이미 제라드의 눈은 전투의 현장을 향하고 있었으므로.
“어, 어째서 오딘 님께서 드래곤과 싸우시는 것인가?”
놀람과 충격에 휩싸인 물음.
파르티잔은 입을 열어 사태가 왜 이렇게 되었는지 차근차근 설명해나갔다.
“제가 저기 게티롱이라는 작자 때문에 이곳을 오르다 저 블랙 드래곤과 마주쳤습죠. 여차여차해서… 시비는 오딘 님께서 거신 게 맞습니다. 예, 그랬습죠.”
아무리 제라드라고 해도 기절초풍할 내용이었다.
‘내 오딘 님의 경천동지할 무공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드래곤과 대적이라니…….’
쿠쿵!
꽈르르릉!
흡사 지근에 천둥번개가 내려친 것 같았다.
전투는 점차 격렬해져서 저들의 전투 현장과는 멀리 떨어진 곳에도 나무가 맥없이 쓰러지거나 바위가 깨져 파편이 튀고 지축이 뒤틀리는 등 심한 파장을 불러왔다.
제라드의 눈이 빠르게 오딘의 움직임을 좇았다.
가히 상상도 못할 빠르기와 힘이었다. 하지만 걱정이 드는 것이 사실이어서 사태를 방관할 수만은 없었다.
‘지금은 막상막하의 대결을 펼치고 계시지만 결국엔 드래곤 하트의 마나를 감당하실 수는 없으실 것이다. 큰일이구나.’
제라드는 당장 검을 뽑았다.
그리고 즉시 막강한 오러 블레이드가 빛을 발했다.
부웅-!
“비켜 있게.”
제라드의 검에서 급작스레 튀어나온 오러 블레이드를 보며 파르티잔은 화들짝 놀라 물러섰다.
‘어, 어찌 된 거지? 제라드 백작의 검술이 왕국 내에서 유독 뛰어나다 해도 마스터는 아니었다고 들었는데…….’
얼떨떨해 있는 파르티잔의 얼굴을 향해 제라드의 오러 블레이드가 내리쳐졌다.
쿠왕-!
오러 블레이드는 기겁을 하는 파르티잔에게 쇄도하지는 않았다.
결계에 막혀 튕겨져 나간 것이다.
제라드는 좀 전의 충격으로 인해 저리는 팔목을 움켜쥐었다.
오딘은 아그리스가 쳐 둔 둥글고 검은 막에 둘러싸여 행동에 제약을 받고 있는 상태였다.
여유가 생기자 아그리스는 고개를 돌려 제라드를 매서운 눈초리로 쏘아보았다.
[쓸데없는 짓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거다, 애송이!]
그저 경고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제라드의 그런 느낌은 착각이었다.
지축에 변화가 일었다.
그 변화는 제라드뿐 아니라 멀리 떨어진 이스론 상단의 사람들과 쌍귀마저 느낄 정도였다.
눈 깜짝할 사이에 아그리스는 제라드가 있는 곳부터 후미에 쌍귀가 있는 곳까지 제2의 결계를 쳐 버린 것이다.
오딘과 아그리스는 서로에게 이렇다 할 상처를 입히지 못하고 있었다. 아그리스의 관심이 제라드와 이스론 상단 사람들에게 쏠렸을 때 흑룡검에서 뻗은 날카로운 강기가 검은 막을 뚫고 나왔다.
이어 오딘의 몸을 둘러싸고 있던 검은 막이 껍질이 벗겨지듯 걷혀지며 무수한 강기 다발이 아그리스의 안면을 향해 쇄도했다.
쿠콰콰콰쾅!
폭발은 분명하게 있었지만, 강기 세례를 받은 아그리스의 얼굴에선 김이 모락모락 피어났을 뿐이었다.
아그리스는 노한 표정으로 오딘을 죽일 듯 쏘아보았다.
[비열한 놈.]
그에 오딘은 낮게 웃었다.
“칭찬인가? 고맙군.”
엘룬은 이 상황을 멀리서 지켜보는 중이었다.
그 역시도 드래곤이 있다는 것을 보았기에 감히 접근할 엄두를 못 내었다.
덕분에 그는 결계의 범위에 갇히지 않았지만, 잦은 폭발을 일으키며 드래곤과 사투 중인 대상이 누구인지를 확인하지 못했다.
이 역시 불운이라면 불운이리라.
곁에 있던 마적이 물어왔다.
“어떻게 하실 생각이신지?”
엘룬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하나, 깊게 생각할 것은 없는 듯했다.
“어차피 드래곤의 노여움을 산 놈들이니 저놈들은 이제 죽은 목숨이라고 보아야겠지. 더 지켜보다간 불똥이 우리에게까지 튀게 될지 모른다. 철수한다.”
결코 쉽지는 않은 결정이었다.
가뜩이나 어려운 시기에 소중한 수하 셋을 눈앞에서 잃은 그였으니 말이다.
엘룬의 결정에 따라 파핀과 다른 마적은 하산하기 시작했다.
원래의 목적지인 이스론 상단으로 향하려는 것이다.
이스론 상단의 사람들은 떠나가는 엘룬에게 관심을 기울이지 못했다.
이 중 대부분은 앞을 가린 결계 막을 제거하기 위해 필사적인 공격을 감행했다.
머리로 결계를 박거나 주먹으로 치고 발로 차는 것으로 모자라 호위 무사들은 제각기 요상한 기합을 내지르며 검으로 내리쳤다.
결과는 모두가 좋지 않았다.
결계에 신체 부위를 마주친 이들은 그 부위를 붙잡고 뒹굴거나 비명을 내질렀으며, 검을 내지른 사람들은 아까운 검이 두 동강으로 쪼개지는 것을 보며 한숨을 내쉬어야 했다.
지금의 고통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단 네 사람뿐이었다. 앞쪽에 있는 제라드와 드래곤이 있을 곳을 향해 다가가는 헤르미온, 그리고 뒤쪽에 묵묵히 서 있는 쌍귀가 그들이었다.
제라드는 헤르미온이 다가오는 것을 보고 극구 말렸지만 그녀는 말을 듣지 않았다.
헤르미온의 시선은 이미 오딘의 모습에 고정되어 있었다.
점차 멍해지는 그녀의 표정을 보고서야 제라드는 왜 저 엘프 아가씨가 여태 자신에게 성깔을 부렸는지 알 것 같았다.
‘허허, 나이가 들면 세상사에 둔해진다더니… 내가 그 짝이었구먼.’
두 팔을 모아 가슴 언저리에 두며 오딘을 보는 헤르미온의 시선은 가련하기 짝이 없었다. 걱정을 담은 가녀린 손이 다가서려 했지만 그조차 무리였다.
앞쪽의 결계에 닿기도 전에 스파크가 튀며 손바닥을 저렸던 것이다.
급기야 그녀는 결계를 주먹으로 두드리며 오딘을 핍박하고 있는 블랙 드래곤 아그리스를 보고 악을 바락바락 질러댔다.
“그분을 놓아줘, 놓아달라고! 이 덩치만 큰 도마뱀아!”
그녀라고 어찌 드래곤이 무서운 존재라는 것을 모를까? 그런데도 그녀는 오딘이 걱정되고 눈에 밟혀 막말을 하는 것이다.
겁을 통째로 상실한 그녀를 보며 뒤쪽에 있던 일행들이 달려왔다.
마르크가 보기에 헤르미온은 한심한 꼴이기는 했다.
그러나 그 모습이 한편으론 측은해 보이기까지 해서 차마 웃을 수 없었다.
다행히 이는 공허한 외침일 뿐이었다. 아그리스는 오딘과의 전투에만 잔뜩 신경을 쓰고 있었으니까.
호위 무사들이 그녀의 팔을 붙들고 억지로 뒤로 끌고 가려니 역효과만 났다.
“놔, 이거 안 놔? 놓으라고!”
그녀의 목소리와 신경은 더욱 앙칼졌다. 어설프게 헤르미온의 팔을 잡은 호위 무사의 팔뚝에 그녀의 잇자국이 생겼다.
“아악!”
왼팔을 붙들었던 호위 무사가 아픔을 못 견디고 그녀의 팔을 놓아버리자 헤르미온은 몸을 돌려 반대편에 있던 호위 무사의 사타구니를 발로 걷어차 버렸다.
퍽!
호위 무사의 입에서 끔찍한 비명이 얇게 흘러나왔다.
“끄으~”
그마저 자신의 사타구니를 움켜쥐고 쓰러지자 헤르미온은 다시 그곳으로 달려가며 어깨로 결계를 들이받았다.
하나, 무의미한 일이었다.
결계에 부딪힌 그 즉시 헤르미온은 벌러덩 자빠지며 흉한 꼴을 보이고 말았다.
그래도 기필코 일어서는 그녀를 보고 주위의 사람들도 독려하고 거들기 시작했다.
그녀의 고집을 못 이긴 사람들이 다시 각자의 도구를 이용해 결계를 치기 시작하자 드디어 아그리스가 고개를 돌렸다.
[떼로 미친 모양이로구나. 성가신 녀석들 같으니라고.]
말을 마치기 무섭게 아그리스는 오른쪽 앞발을 휘둘렀다. 그러자 기이한 현상이 발생했다.
결계 내에 있던 모든 인간들이 부근에서 감쪽같이 사라진 것이다.
파르티잔과 게티롱도 함께였다.
아그리스는 다시 고개를 돌려 오딘을 바라보며 날카로운 어금니가 드러나도록 긴 입꼬리를 치켜 올렸다.
[귀찮은 떨거지들은 갔으니 이제 제대로 한번 놀아볼까?]
게티롱과 파르티잔, 제라드와 쌍귀를 비롯해 이스론 상단의 사람들은 어안이 벙벙한 표정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은 조금 전과 너무도 다른 곳에 와 있기 때문이다. 사방으로 빼곡히 들어차 있던 초목들은 다 어디로 사라졌는지 한 그루도 보이질 않았다.
이곳은 어림잡아도 수백은 넘어 보이는 돌기둥들이 솟은 드넓은 협곡이었다.
보기만 해도 오금이 저릴 것 같은 블랙 드래곤의 모습도, 그와 대적하여 무시무시한 오러를 발출해대던 오딘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모두가 이것을 착각이라 믿었다.
“환영?”
“혹 왜곡장이 아닐까요?”
두리번거리면서 묻는 질문들에 확답을 줄 수 있는 사람은 이 중에 아무도 없었다.
마법을 익힐 당시 마법의 창시자와 다름이 없는 드래곤에 대해 공부를 거듭했던 파르티잔 또한 이 기괴한 상황에 대해서는 금시초문이었으므로.
당황함이 적지 않았던 탓에 한동안 그들은 자리에서 벗어날 생각조차 못했다.
그들 중 제일 먼저 발을 뗀 것은 헤르미온이었다.
“이건 속임수라고. 속임수일 거야.”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그녀는 드래곤과 오딘이 있었을 자리를 향해 다가갔다. 그냥 거리상의 추측이었다.
그러나 막상 그 위치 정도에 다다랐을 때 느껴지는 건 뺨으로 훅 하고 불어오는 휑한 바람뿐이었다.
다른 사람들 역시 주변을 돌아다니며 돌기둥을 만져 보거나 바닥의 흙을 한 줌 주워 촉감을 느끼고 냄새를 맡아보기 시작했는데, 하나같이 그들의 입에서는 탄식이 흘러나왔다.
“이럴 수가.”
모든 게 보는 그대로였다.
이곳은 가상으로 꾸며 낸 공간이 아닌 실제의 공간이라는 얘기다.
헤르미온 역시 그 사실을 깨우친 듯했다.
“이건 거짓말이야. 거짓말이라고!”
현실을 부정하고 싶었음이라.
오딘에 대한 막연한 걱정으로 머리를 흔들며 몸서리치는 그녀를 보며 추하다고 여기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특히나 상단 내의 사람들은 그녀를 가련히 생각했다.
평소엔 비록 성격이 까칠하고, 상단 사람들 알기를 우습게봤다고는 해도 한 남자를 사모하는 마음만은 안타까울 정도로 순수해 보였기 때문이다.
그런 그녀를 가장 안쓰럽게 쳐다보는 것은 마르크였지만, 그는 속마음과는 다르게 모진 소리를 내뱉었다.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 거야? 그렇게 주저앉아 울기만 하면 사태가 해결돼?”
헤르미온은 마르크에게 대들 힘도 없는지 쭈그리고 앉아 눈가에 쉴 새 없이 샘솟는 눈물을 훔치기만 할 뿐이었다.
“네가 뭘 안다고 그래. 엉엉.”
마르크는 달래주기는커녕 더 독하게 쏘아붙였다.
“바보야. 그럴 힘이 있으면 여기가 어디인지라도 알아봐야지.”
그녀와 더 말상대를 해주는 것도 귀찮았던지 마르크는 나귀를 몰아나갔다. 헤르미온은 순간 나귀의 발굽 소리에 정신이 확 들었다.
그녀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흠뻑 젖은 눈물들을 모조리 손바닥으로 훔치고는 자신의 나귀를 찾아 올라탔다.
헤르미온까지 앞으로 나아가자 남은 사람들은 자연히 그들의 뒤를 쫓았다.
자연히 이 일과는 전혀 상관없는 게티롱과 파르티잔만이 그 자리에 남게 되었는데, 파르티잔은 꼭 으스스한 분위기가 어딘가에서 몬스터가 튀어나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던지 후다닥 그들을 뒤따라갔다.
게티롱은 거만한 걸음걸이로 파르티잔을 따르며 그의 방정맞은 걸음걸이를 나무랐다.
“체통을 지키시오!”
파르티잔은 그 소리를 듣고 속으로나마 역정을 부렸다.
‘체통 좋아하고 자빠졌네. 어떻게 저런 개념 없는 인간이 아직까지 살아남았는지 지상 최대의 불가사의다.’
그가 들은 게티롱의 과거사는 결코 평범한 게 아니었다.
오딘이 블랙 드래곤 아그리스와 전투를 벌이는 동안에도 게티롱은 과거 얘기를 끊임없이 늘어놓았던 것이다.
마치 그것이 자랑인 것처럼.
물론 파르티잔은 지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도 같았다.
그 모든 게 게티롱의 철저한 착각에서 비롯된 것이었으니 불가능할 것도 없었다.
다만 뒤에 따라오는 저 게티롱이라는 작자는 아주 운이 좋았다.
‘그랬으니 이 험한 세상에서 살아남았겠지.’
파르티잔은 더 그에게 신경을 쓰지 않기로 하고 행여 앞에 가는 이들의 행렬에 뒤질세라 걸음에 박차를 가했다.
마르크가 제일 먼저 언덕 끝에 다다랐다.
그는 발아래 펼쳐진 경관을 보며 탄성을 토했다.
“맙소사!”
익히 아는 곳이었다.
각기 높이가 다른 길게 뻗은 뾰족한 모양의 철탑들.
철탑들의 위쪽으로는 강대한 제국을 상징하는 문양이 아로새겨져 있다.
그 문양을 보았을 때 마르크는 깨우쳤다. 이곳이 대륙에서 내로라하는 크레노스 제국의 블레헴이라는 것을.
블레헴은 크레노스 제국의 3대 도시로 손꼽히는데, 특히 상업이 발달한 곳이었다.
마르크에 이어 다른 사람들이 놀란 표정을 짓는 것은 그 때문이 아니었다.
크레노스 제국은 라테우스 산맥과는 거리상 너무도 동떨어진 곳이기 때문이다.
드래곤의 가공할 능력에 저마다 경악을 금치 못했다.
가장 먼저 충격에서 헤어난 마르크가 입을 떼어 한숨을 쉬었다.
“하아, 어떻게 해야 하지?”
고블린 샥은 이것이 다행이라 여겼다. 죽을 둥한 위협에서 벗어났으니 말이다.
그래서인지 마르크의 질문에 어렵지 않게 응했다.
“근방에도 일거리가 있잖아. 그것부터 처리하면 되지.”
그러나 이 대답은 헤르미온의 원한을 샀다.
샥은 당황하면서도 할 말을 했다.
“설마 그 블랙 드래곤에게 돌아가자는 얘긴 아니겠지? 그럴 생각이어도 어쩔 방도가 없잖아. 여기서 최단 거리로 마법진들을 타고 이동한다 해도 비용이 장난 아니게 들 것이고, 기간만도 한 달은 소요될 거야.”
틀린 말이 아니었다. 마법진에서 마법진까지 이동하는 시간을 무시할 수는 없다. 또 샥의 말처럼 남은 거래들의 대금을 받지 못했으니 그 전에 돈이 동날 가능성도 컸다.
이스론의 현 상단주 폴칸은 아레인의 힘을 전적으로 믿고 이들에게 여러 일거리를 떠맡기며 여정 중에 부족한 돈은 대금을 받아 충당하라고 했던 것이다.
달리 선택의 기로가 없었다.
그런데도 헤르미온은 방법을 모색했다. 그러다 돌연 눈에 걸리는 사람이 있었다.
“아저씨, 얼마 있어요?”
헤르미온의 시정잡배 같은 말투에 제라드는 당황했다.
“그, 그건 왜 묻나?”
“돌아가야지요.”
마르크가 참다못해 그녀의 어깨를 흔들었다.
“정신 차려. 한 달은 걸린다고 했잖아.”
헤르미온은 마르크의 말이 거슬려서 들으려고도 안 했다. 현실을 부정하고 있는 것이다.
옴팡진 고집이었다.
제라드는 길게 한숨을 쉬고는 먼 곳에 시선을 두었다.
문득 헤르미온의 뇌리에 제라드의 전음이 전해졌다.
-나라고 왜 걱정이 안 되겠는가. 자네가 그분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나 역시 그분이 중요하네. 꺾어진 의지를 세워주신 분이야. 또한 내 주군이시기도 하지.
헤르미온은 그가 자신의 머릿속으로 의사를 전한다는 사실에 다소 놀라면서 그 말을 곱씹고 있었다.
-내가 아는 오딘 님은 그리 허술한 분이 아니시네. 드래곤에 질 분도 아니시지만 혹시 무리라 생각되시면 알아서 빠져나오실 걸세.
그의 진정 어린 마음에 호감을 얻었던지 헤르미온은 조용히 그에게 다가가 귀엣말로 속삭여 물었다.
“어떻게요? 그 도마뱀이 손짓 한 번으로 우릴 여기로 날려 버렸는데 오딘 님이 무사히 빠져나오실 수 있을까요?”
제라드는 입가에 웃음을 걸치고는 그녀에게 다시 전음을 보냈다.
-그분께는 숲의 반지라는 게 있네. 정령에게서 선물을 받으신 거라더군. 그 반지만 있으면 세상 어느 숲이라도 갈 수 있다고 하셨네.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말게.
“정말요?”
제라드는 전음을 그치고 그녀의 커다란 귀에 대고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사실이네. 내가 자네에게 거짓말을 했다가 또 무슨 미움을 받으려고.”
그제야 헤르미온은 한 시름 덜 수 있었다.
그가 하는 말은 꼭 거짓말 같지 않아서였다.
헤르미온을 비롯해 일행들은 결국 샥의 의견에 따르기로 했다.
하지만 막상 그들을 뒤로한 제라드의 얼굴에 깊게 드리워진 그림자는 쉽사리 걷히지 않았다. 여기 있는 누구보다 주군인 오딘의 자존심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