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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 드래곤 아그리스 (38/67)

블랙 드래곤 아그리스

나이시스 신성 제국의 황성 내부는 매우 경건한 분위기였다.

우뚝 솟은 백색의 조형물들과 건물들 사이로 사제복을 입은 사람들이 잰걸음으로 다니면서 소음의 유발을 적게 했다.

뿐만 아니라 황성 내부를 경호하는 팔라딘들이 주축인 템플 기사단은 각자의 자리를 점하고 서서 위엄을 뽐내었는데, 그 모습이 마치 석상같이 느껴졌다.

황성 안에서 소리를 지르는 사람은 없었으며, 할 말이 있더라도 귀엣말로 속삭였다.

그중 유독 돋보이는 무리들이 있었다.

황성 안의 사람들은 그를 지나칠 때면 하나같이 머리를 조아렸으며, 석상 같던 템플 기사들 역시도 고개를 숙이며 경의를 표했다.

그들의 시선은 가장 앞쪽에 선, 온갖 보석이 치렁치렁 달린 로브를 걸친 중년 남자에게로 향했다. 그는 다른 이들보다 월등히 큰 키에 머리가 매우 작았다.

그리고 그의 뒤로는 대신관의 복장을 한 노인과 여럿의 신관이 뒤따랐는데, 이들을 따라 키가 매우 크고 체격이 좋은 템플 기사 넷이 번쩍이는 황금 갑옷을 걸친 채 그림자처럼 붙어 다녔다.

가장 높고 뾰족한 탑 옆으로는 그보다 작은 2개의 탑이 자리하고 있었는데, 중년 남자는 그중 오른쪽의 탑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의 걸음걸이는 매우 빨랐으며 거침이 없었다.

복도의 모퉁이를 두어 번 돌아가자 3개의 커다란 문이 나왔는데 이 중 가장 커다란 문은 중앙에 있는 문이었다.

그 문 앞에 서자 그곳을 지키고 있던 템플 기사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문을 열었다.

천장이 높은 매우 넓은 실내였다.

유리로 이루어진 천장으로는 푸른 하늘이 한눈에 들어왔다.

중년 남자는 다른 곳에 시선을 두지 않고 수십 개의 의자가 놓여 있는 중앙의 테이블로 다가가더니 그중 가장 가운데 자리에 착석했다.

“모두 앉게.”

말이 떨어지자 그를 따라왔던 이들이 자리에 착석하기 시작했다. 물론 템플 기사들은 예외였다.

그들은 일정한 거리를 두고 절도 있는 동작으로 테이블을 등지고 돌아선 채 그 상태로 굳어버렸다.

가운데 앉은 자가 입을 열어 호명을 했다.

“라이벤 대신관.”

“예, 비센 추기경님.”

“내 그대에게 따로 시킬 일이 있다네.”

“하명하시지요.”

“우선은 확실히 하고 넘어가도록 하지. 이 일이 외부로 흘러나가서는 절대 안 된다는 것을 모두 명심해야 할 것이네.”

여럿의 목소리가 거의 동시에 대답했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이들은 하나같이 신성 제국 내에서 여러 중책을 맡고 있었다. 또한 비밀스런 얘기를 꺼낼 정도로 추기경을 절대적으로 따르는 자들이기도 했다.

비센 추기경은 본론을 꺼내기에 앞서 착석한 자들의 면면을 세심히 살펴보았다.

저마다의 각오는 대단해 보였다.

모두를 훑어본 후에야 비센은 노파심을 떨쳐 내고 비로소 입을 열었다.

“허튼짓을 하는 사람은 없겠지. 그 말로가 어떻게 된다는 것을 알 터이니…….”

모인 이들을 대표해 라이벤이 답변했다.

“죽는 날까지 저희들은 추기경님을 따를 것입니다.”

흡족한 웃음을 짓던 비센은 정색을 하며 다시 입을 열었다.

“성녀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네.”

“그, 그게 정말입니까?”

놀라는 그들을 보며 비센은 자신이 한 말에 못을 박았다.

“그 때문에 이 자리에 모인 것이야.”

이들은 추기경이 어떤 명령을 내리리라는 것을 대략 짐작하고 있는 눈치였다.

그 명령은 곧 떨어졌다.

“언젠가 말했듯이 지금 나에게는 성녀가 필요해. 그녀가 있어야만 성황 카르만을 제어할 수 있다.”

라이벤 대신관이 물었다.

“그럼 제가 할 일이란 바로 그 성녀를 찾아오는……?”

비센은 고개를 저었다.

“그 일은 다른 신관이 맡는 게 좋겠어. 자네는 나머지 중신들을 이끌고 막스마라 대신관을 막아. 그자의 ‘눈’이 우리를 감시하고 있을지도 모르니까.”

그가 가리키는 ‘눈’이란 광범위한 것이었다.

막스마라가 심어놓은 심복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황성 안을 돌아다니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지금도 비센이 여러 곳에서 벌이는 음모들을 캐내기 위해…….

막스마라는 오래전부터 비센이 헛된 망상을 품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는 성황에게 그것을 알리고자 했다.

하지만 물증이 없었다.

자연히 막스마라의 고민은 깊어질 수밖에 없었다.

더군다나 성황 카르만은 치명적인 약점이 있질 않은가.

만일 그의 마성이 알려진다면 숱하게 많은 이들이 그에게서 등을 돌릴 것이다.

제국은 혼자의 힘으로 이끌어가는 것이 아니었다. 오로지 그만을 믿고 따르던 막스마라는 어찌 되겠는가…….

자신의 안정된 미래를 보장받기 위해 막스마라는 필연적으로 그를 지켜 내야만 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먼저 가장 위협이 되는 자를 제거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절대적으로 물증이 필요했는데, 확실한 물증이 드러나면 성황 역시 그를 가만히 둘 리는 없기 때문이다.

따지고 보면 비센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카르만도 그것이 필요했다.

성황이 신성 제국을 통치하는 이라면, 추기경은 주신과 신민들의 연결 고리와도 같았으니 함부로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라이벤 대신관은 앉은 자세에서나마 고개를 숙임으로써 그의 명령을 떠받들었다.

“소임을 다하겠습니다. 한데, 성녀의 위치는 파악이 되었는지요?”

그 질문에 비센은 음침한 미소를 떠올렸다.

“로만 공국의 카반이라는 곳에 있다고 한다. 세실리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더군.”

* * *

카반에는 평화가 찾아왔다.

그것은 마을 사람들이 그토록 갈구하던 것이었기에 그들의 얼굴은 무척이나 밝아졌다.

마음대로 돌아다니며 세상을 바라볼 수 있고, 저녁에도 낭만으로 물든 별과 달을 바라볼 수 있는 자유를 얻었다. 또한 이곳에 주둔하는 아레인의 무사들은 마을 사람들 전부가 배불리 먹을 만한 음식과 옷가지 등을 나눠주었다.

그들은 무서운 분위기를 풍기기는 했지만 마음은 따뜻했다.

마을 사람들은 한목소리로 그들을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했다.

“강자 앞에서 강하고, 약자를 배려할 줄 아는 분들입니다.”

오죽하면 자신들의 나라, 로만 공국보다 아레인을 더 선호했을까.

근래에는 로만 공국에서 카반에 부족한 식량을 보내오기 시작했지만, 마을 사람들의 마음은 바뀌지 않았다.

그들이 이렇게 협조를 하게 된 동기는 아레인이 카반의 울프를 소탕한 덕에 있었다.

실제로 대다수의 마을 사람들은 마적단이 아직도 판을 치고 있었다면, 카반의 사람들이 핍박을 당하건 굶어죽건 그들 로만 공국은 모르쇠로 일관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이들은 웃음을 되찾았고, 어른들은 그런 아이들의 얼굴에서 행복을 되찾았다.

그들은 아레인의 이 은혜에 언젠가는 보답해야겠다는 마음을 품기 시작했다.

처녀들 중에는 오딘을 동경하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들은 높은 곳을 올려다보지 않았다. 그저 마음에 간직하는 것만으로도 남모를 기쁨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전부가 행복에 취해 사는 것은 아니었다.

‘난 왜 태어났을까…….’

물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며 세실리는 슬픔에 잠겨 있었다.

그녀는 심한 우울증 증세에 시달리고 있었다.

파핀은 어렸을 적부터 절친한 친구였다. 그리고 그 이상의 감정을 가질 생각도 있었다. 그 사실을 몰랐다면…….

가장 믿었던 사람에게서의 배신. 그것은 세실리에게 사무치는 아픔을 남겼다.

활달하던 그녀는 말수를 점점 잃어갔고, 마을 사람들의 얼굴에 자리했던 그림자는 죄다 그녀의 얼굴로 옮겨 오는 듯했다.

바보 같은 자신에게 더 화가 났다.

사람을 덜컥 믿기가 겁이 났다. 그때의 충격은 세실리의 마음을 폐쇄적인 공간으로 바꿔놓았다.

“누~ 나~!”

한 아이가 조막만 한 발로 열심히도 뛰어왔다.

고개를 돌린 세실리는 이제 5살 정도 되어 보이는 사내아이를 발견하고는 억지웃음을 지었다.

“식사하시래요. 얼른 가요.”

아이는 자그마한 손으로 세실리의 손을 잡으며 당장에 돌아가자고 보챘다.

그 작은 몸뚱이로 자신을 끌려는 아이가 귀여워 세실리는 웃음을 머금었다. 가슴이 따뜻해졌다.

또래로 보이는 두 여아들도 힘차게 달려왔다.

“언니~ 빨리 오시래요.”

벅차오르는 감정에 세실리는 미소를 지었는데, 그 미소에 곁들어 눈물까지 흘러내렸다.

‘바보 같았구나. 내가 참 바보 같았구나.’

여자 아이들이 그 모습을 이상하게 바라보며 앙증맞은 입술을 뗐다.

“언니, 왜 울어요?”

남자 아이도 걱정스러운 듯 조숙한 어조로 물었다.

“무슨 일 있어요?”

창피함을 금치 못해 세실리는 서둘러 눈물을 훔치고는 아이들의 손을 잡았다.

“아냐, 아냐. 내가 조금 피곤했나 봐. 가자.”

허리를 굽혀 세 아이를 바라보는 세실리의 눈동자는 다정함이 듬뿍 묻어 축복의 빛이라도 깃들어 있는 듯했다.

그러나 이들은 채 백 보도 가질 못해 벽에 부딪치고 말았다. 나무 뒤에서 낯선 사람들이 모습을 드러내며 길을 막아선 것이다.

겁을 먹은 여자 아이들은 세실리의 뒤로 숨었던 반면에 사내아이는 용감하게 그녀의 앞으로 나서며 두 팔을 활짝 폈다.

아이의 눈에는 남다른 각오가 어려 있었다.

그를 의식했던지 길을 막아섰던 남자 중 하나가 조심스럽게 앞으로 다가서며 말했다.

“다른 뜻은 없단다. 아저씨들은 나쁜 사람들이 아니야.”

아이는 당당하게 따졌다.

“나쁜 사람들이 아닌데 왜 길을 막아서나요?”

남자는 말끝을 흐렸다.

“뒤에 계신 아가씨한테 할 말이 있어서…….”

그것이 아이에게 더한 경계심을 불러왔다.

“못 믿겠어요. 안 믿을래요.”

고집을 피우는 아이가 성가셨던지 뒤쪽의 남자 하나가 더 다가와 옆으로 슬쩍 밀었다.

아이는 밀려나지 않으려 발버둥을 쳤지만 허사였다. 힘이 부쳤던 것이다.

그리고 어린 마음에 세실리를 지키겠다는 완강한 고집은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낳았다.

참다못한 아이는 남자의 팔을 꽉 깨물었던 것이다.

“악!”

살을 아리는 고통에 남자는 비명을 질렀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그의 투박한 주먹이 아이의 머리를 강타했다.

퍽!

둔탁한 소음이 일며 아이는 바닥에 힘없이 쓰러졌다.

겁을 먹은 여자 아이들은 울음을 터트렸고, 세실리는 즉각 다가가 아이의 상태를 살펴보았다.

머리가 찢어졌는지 피가 줄줄 새어나왔다.

그녀는 자신의 치마를 찢어 아이의 상처를 동여매고는 손을 쓴 남자에게 소리치며 항의했다.

“이게 무슨 짓이죠? 어린애한테!”

그녀의 항의는 확실히 효과가 있었다.

아이를 때린 남자는 몸 둘 바를 몰라 했으며, 나머지 사람들 역시 사고를 친 남자에게는 질책 어린 시선을, 그녀에게는 미안한 표정을 떠올렸다.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무리 중 중년의 여인이 걸어 나왔다.

“이럴 생각까지는 없었는데, 미안하게 되었어요. 제가 아이의 상처를…….”

다가와서 아이의 상태를 보려던 중년 여인을 향해 세실리는 앙칼지게 소리쳤다.

“만지지 말아요!”

중년 여인은 움찔하며 물러섰다. 그러나 우호적으로 대하던 태도는 조금 뒤바뀌었다.

“세실리.”

세실리는 놀랐다. 차가운 목소리보다 낯선 사람이 자신의 이름을 알고 있다는 데에서…….

“어떻게 내 이름을 알고 있죠?”

“그건 중요하지 않습니다. 당신은 저희와 함께 가셔야 합니다.”

뜬금없는 말을 늘어놓는 그녀를 보며 세실리는 지금의 상황이 더욱더 의문스럽게 여겨졌다.

수상쩍은 사람들이다. 의문은 풀지 않더라도 세실리는 이곳에서 빠져나가고 싶었다.

그러나 제일 신경이 쓰이는 부분은 역시 아이들이었다.

다친 아이야 자신이 등에 업고 달린다고 해도, 여자 아이들은 아니었다.

그나마 다행히 여아들은 멀리 떨어져 있었다.

“너희들은 먼저 돌아가!”

그녀의 외침을 듣고서도 여아들이 섣불리 돌아설 생각을 못하자 세실리는 더욱 다그쳤다.

“언니 말 안 들려? 어서 돌아가라고!”

그제야 돌아서는 아이들의 앞쪽에 이들 중 두 남자가 막아섰다. 눈을 깜빡할 새에 벌어진 일이었다.

세실리는 곱지 않은 시선으로 중년 여인을 보며 물었다.

“당신들은 누구죠?”

“지금 그것은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같이 가신다면 알려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내가 왜 당신들과 가야 하나요?”

“당신은 중요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녀의 말을 모두 들었는데도 세실리의 마음은 돌아서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의 다리에 눕힌 사내아이가 걱정이었다.

‘아직도 피가 멎질 않아. 한번 믿어볼까? 안 돼, 수상한 사람들이잖아. 더 나쁜 결과를 불러올 수도 있는데…….’

선뜻 결정이 서질 않았다.

쉽게 고집을 꺾지 않는 세실리를 보며 중년 여인은 여아들의 뒤쪽에 서 있는 남자들에게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거친 남자들의 손이 여아들의 어깨 위로 얹어졌다. 여아들은 겁을 너무 먹어 훌쩍거리며 흐느끼기만 할 뿐 소리조차 지르지 못했다.

중년 여인은 태도를 분명히 했다.

“저 아이들이 다칠 수도 있습니다.”

명백한 협박이었다.

저들을 따라가기란 싫었다. 그렇다고 아이들을 다치게 하면서까지 자신의 몸을 우선할 정도로 세실리의 마음이 모질지는 않았다.

그녀가 지금 반감을 가지고 있는 것은 이들이 보이는 강압적인 태도였다.

‘내 발로 자진해서 간다고 하더라도 아이들을 해칠지 몰라.’

세실리는 사내아이를 바닥에 조심스럽게 눕혀 두고서 일어서더니 잽싸게 품속에서 비수를 꺼내 중년 여인의 목 언저리를 겨누었다.

그 비수는 본래 음영대의 것이었다.

주인이 날이 무뎌져 버린 것을, 세실리는 언제 일어날지 모르는 위협에서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주워서 소지하고 다녔던 것이다. 그래서인지 그리 날카롭지 못했지만, 충분한 위협은 되었다.

“놓으라고 해요, 빨리!”

너무 마음을 놓았기 때문일 것이다.

중년 여인은 세실리가 돌변할 것이라고는 예상치 못한 듯했다.

당황한 여인은 조심스럽게 그녀를 타일렀다.

“그 칼 내려놓아요. 당신은 그래서는 안 됩니다.”

세실리의 눈이 표독스러워졌다.

“그래서는 안 된다고요? 당신들은 되고 나는 안 된다는 거예요?”

할 말을 잊었는지 중년 여인은 더 말을 잇지 못했다.

그리고 여아들을 붙잡고 있는 남자들에게 시선을 보내자 그들은 아이들의 어깨에서 손을 뗐다.

그러기가 무섭게 세실리가 소리쳤다.

“어서 가! 빨리!”

아이들은 잔뜩 겁을 먹고 서둘러서 뛰었다.

세실리는 그제야 한시름 놓을 수 있었다. 걱정이 줄어들었음이다.

그 한순간 긴장을 풀어서일까?

중년 여인은 비수를 든 세실리의 팔을 쳐내 위협에서 탈출한 뒤 재빨리 마법을 구현했다.

“쇼크 라이트(Shock Light:일시적 충격)!”

중년 여인의 마법 도구인 오브(Orb)에서 흘러나온 빛이 세실리의 몸을 덮치자 그녀의 몸이 빛에 감싸여 허공으로 떠올랐다.

“꺄아아아아~!”

세실리의 입에서 극도로 고통스러운 비명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 소리는 여태껏 여기서 들렸던 어떤 소리보다도 컸다.

허공에서 세실리가 몸을 파들파들 떨다가 축 처질 때쯤 중년 여인이 발현한 마법은 효력을 상실했다.

그러자 한 남자가 기다렸다는 듯이 다가와 혼절해 쓰러진 그녀를 등에 업기 전, 실신해 있는 아이 쪽을 보며 물었다.

“이 아이는 어떻게 할까요?”

중년 여인은 길게 생각하지 않았다.

“편안히 눈을 감게 해줘.”

선심 쓴다는 듯 하는 말이 그것이었다.

명령을 받은 남자의 눈에도 아량이란 없는 듯했다.

그는 허리춤에 차고 있던 긴 검을 뽑더니 사내아이의 목에 겨눴다. 단숨에 숨통을 끊으려는 것이다.

빠르게 검이 하강하며 사내아이의 목을 찌르려는 순간, 깡! 하는 소리와 함께 이변이 일어났다.

어디선가 날아온 돌이 남자의 검을 쳐내며 검로를 바꾸었던 것이다.

계획한 일이 실패로 돌아가자 남자는 얼굴을 구기며 돌이 날아온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적의를 걸친 사내가 빠른 속도로 다가오는 중이었다.

바로 적의질풍대의 무사였다.

허락 없이 카반에 발을 들여놓은 무리들 중 2명이 각자의 검을 머리 높이까지 치켜들고 마주 달려 나갔다.

또한 사내아이를 해치려던 남자 역시 검을 쥐고 일어섰다.

난데없는 격전이 펼쳐졌다.

깡! 까캉! 까깡!

3명을 상대하면서도 적의질풍대의 무사는 결코 굴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대등하지는 못해 뒤로 밀리기는 했지만, 무사는 그들의 검을 모두 받아내고 있었다. 질풍대란 이름답게 그의 몸놀림은 날랬으며 검술은 위력적이었다.

침입자의 수는 중년 여인까지 포함해 모두 아홉이었다.

중년 여인이 짜증스런 표정을 지었다.

‘창피하구나. 저자는 하나인데 셋이 덤벼들어도 저 정도라니……. 신성 제국 성기사의 자격이 없는 놈들이다.’

그랬다. 이들은 신성 제국의 신관과 성기사들이었다.

얼마 전, 신성 제국의 신관인 이 중년 여인은 비센 추기경으로부터 성녀를 데려오라는 명령을 받아 이곳에 도착한 것이다.

타인의 눈을 의식해 이들은 평상복까지 입고 왔다.

그러나 비교적 쉽게 끝나리라는 예상과 달리 일은 점점 더 꼬여만 가고 있었다.

그들이 맞부딪치고 떨어지는가 하면, 잠시 후 뒤섞이기까지 하자 중년 여인은 섣불리 손을 쓸 수가 없었다.

“이봐, 아크, 가만히 있지만 말고…….”

말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쪽빛 망토를 걸친 남자가 그녀의 시야에서 빠르게 사라졌다.

남자는 곧 적의질풍대의 무사 옆쪽에서 모습을 드러내더니 어깨로 그의 등을 강하게 밀쳤다.

뻑!

둔탁한 소리와 함께 적의질풍대 무사의 몸은 저만치 나가떨어졌다.

충격이 적지 않은 모양이었는지 그는 몸을 일으키려다가 다시 쓰러지기를 반복했다.

억지로 몸을 일으키려니 바스라지고 어긋난 뼈가 소음을 유발했다.

둑, 두둑.

“억지로 일어설 것 없어, 안 일어나도 된다고.”

그의 말은 들을 생각도 없는지 적의질풍대 무사는 안간힘을 쓰며 일어났다.

그리고 자신의 등을 밀친 남자에게 검을 휘둘렀다.

헛손질.

쪽빛 망토를 걸친 남자는 깍지를 낀 채 팔을 머리 뒤로 두르고는 돌아섰다.

“못 말릴 놈이군.”

성기사들이 기다렸다는 듯 다시 적의질풍대 무사를 마주쳐 나갔다.

그제야 적의질풍대의 무사는 힘에 부치는 모양이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유리한 쪽은 성기사들이었다. 그 증거로 적의질풍대의 무사에게 자잘한 상처들이 늘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붉은 옷이 피로 인해 더 빨갛게 물드는데도 그는 물러서거나 도망칠 생각이 없는 듯했다.

그의 눈에 가득한 것은 각오였다.

결코 물러서지 않겠다는 각오.

그 각오는 여신관의 눈에 처절하게 비춰지기까지 했다.

‘어째서 저렇게까지……. 저들이 성녀의 정체를 아는 것일까? 그게 아니라면 무엇 때문에 목숨을 걸고 지키는 것일까?’

그녀는 절대 알 수 없었다. 그가 목숨을 내던질 각오로 전투에 임하는 까닭을…….

허벅지를 베이고 무릎을 꿇고서도 그는 검을 휘둘렀다. 또한 어깻죽지가 갈라지면 반대편 팔로 검을 들었다.

그 움직임은 그의 심장에 정확히 검이 관통하고서야 끝이 났다.

쪽빛의 망토를 걸친 젊은 남자는 혀를 끌끌 차며 죽은 이를 나무랐다.

“쯔쯧, 그러게 고집을 왜 피워. 죽으면 모든 게 끝인데.”

성기사들도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지, 질긴 놈…….”

성기사들은 이렇다 할 상처는 없었다.

여신관 딴에는 그들조차 추려서 데리고 온 것이었다.

창피하고 부끄러운 일이었다. 만에 하나 젊은 남자가 나서주지 않았다면 3 대 1의 승부의 승자는 죽은 무사가 될 수도 있었다.

문득 그녀는 의문이 들었다.

‘로만의 군사인가?’

평상시 그녀는 로만 공국을 무시하고 있었다.

그들의 군대는 형편없으며 그들이 믿는 신 또한 하찮다고 여겼다.

그렇기에 지금의 일은 더 큰 놀라움으로 다가왔다.

상념에 빠져 있던 그녀를 향해 쪽빛 망토를 걸친 젊은 남자가 투덜거렸다.

“언제까지 이곳에 있을 거지? 바쁜 사람을 불러놓고 너무하는군.”

그녀는 그때서야 정신이 들었던지 고개를 돌리며 서둘렀다.

“누가 성녀를 업어라. 바깥쪽의 마법진까지 이동한다.”

다시 그녀를 들쳐 업으려고 할 때에 숲 안쪽에서 2명의 남자가 다가왔다.

조금 전 도착한 무사와는 다르게 그들은 느긋하게 걸음을 옮기고 있었는데 그중 뒤쪽의 남자, 적색의 장포를 걸친 남자의 발걸음은 제법 묵직했다.

그 남자가 적의질풍대의 대주 헤르라는 것을 그들이 알 리가 없었다.

헤르는 유유자적하게 걸어오더니 곧장 숨이 끊어진 무사에게로 다가갔다.

마침 돌아가려던 성기사들은 예상치 못한 상황으로 인해 그 자리에 멈춰 그의 행동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헤르는 그들을 개의치 않는 듯했다.

그는 적의질풍대 무사의 맥을 짚어보고는 섭섭한 표정을 지었다.

단지 그것으로 끝이었다.

그는 서서히 일어섰다. 그리고 아직 닦이지 않아 피가 묻은 검을 들고 서 있는 성기사들을 향해 조용하게 물었다.

“자네들이 이랬는가?”

성기사들은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그들을 대신해 쪽빛 망토를 걸친 남자가 조롱하듯 입을 열었다.

“맞아, 쟤네들이 죽였지. 내가 다 봤다구.”

헤르는 무심한 눈으로 그를 한 번 바라보고는 다시 피가 묻은 검을 들고 있는 네 성기사에게 눈을 돌렸다.

그러자 쪽빛 망토를 걸친 남자가 입을 열었다.

“그런데 아저씨, 어쩔 거야? 혼자서 뭘 해보려고? 웬만하면 참아. 나이 들어서 함부로 몸을 놀리면 금방 다친다고…….”

헤르는 그 말을 들은 체도 안 했다.

그저 노기를 가득 띤 눈으로 성기사들을 직시한 채 뚜벅뚜벅 다가설 뿐이었다.

3명의 성기사들은 대기하지 않았고, 그것이 참극을 불러왔다.

가장 먼저 달려든 성기사가 언제 뽑았는지 모를 헤르의 발검으로 인해 양단되어 바닥에 나뒹굴었다.

그들은 동료를 주시할 틈이 없었다. 각자의 목표에 시선이 고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설혹 알았다고 한들 이미 몸을 빼기엔 늦은 시각이었다.

다음으로 도달한 성기사의 허벅다리가 잘리며 균형을 잃은 몸뚱이가 바닥으로 굴렀고, 마지막으로 다다른 성기사는 목이 잘려 나갔다.

무거운 몸통이 바닥에 쓰러지며 소음을 유발했을 때 헤르의 발은 떨어진 머리통을 누르고 있었다.

그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발에 힘을 주었다. 그러자 소름 끼치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퍼석!

머리가 짓이겨져 해골째 박살나는 소리였다.

무시할 수 없는 실력과 잔인하기 그지없는 손속에 뒤쪽에 서 있던 성기사들은 지레 겁을 먹고 말았다.

여신관 역시 그들을 탓할 생각은 없었다.

남은 성기사들을 보내봐야 결과는 같을 것이란 판단을 내렸던 것이다.

성기사들이 잔인하게 죽은 부분이 걸렸지만 여신관은 일단 대화를 해보기로 했다.

더 이상의 피해를 입지 않고 성녀를 데려가면 그것으로 족한 것이다. 복수는 다음에 해도 될 것이므로.

“누구십니까?”

“내가 그런 것을 말해야 하나?”

여전히 헤르는 앞을 향해 다가섰다.

여신관이 쓰러진 세실리와 인접해 있는 성기사에게 빠르게 눈치를 주자 성기사는 재빨리 달려들어 들쳐 업으려는 생각인지 한 팔로 그녀를 안으려 했다.

그 순간, 헤르의 몸이 순식간에 앞으로 튀어나감과 동시에 검에서 찬란한 빛이 흘러나왔다.

동시에 성기사의 비명 소리가 숲을 울렸다.

“으아아아아아~”

그녀를 안으려던 한 팔이 신체와 분리되어 바닥에 뒹굴며 퍼덕였다.

그것은 분명히 오러 블레이드였다.

여신관은 더 이상 평온할 수 없었다.

“소, 소드마스터… 어째서 이런 곳에…….”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었다. 로만 공국에 소드마스터가 있다는 얘기는 금시초문이었으므로.

“소속을 밝혀 주시오. 그대는 로만 공국의…….”

그녀는 더 묻지 못했다.

소드마스터는 자신의 말은 들을 생각도 없는지 한 팔을 잃어버린 성기사의 머리를 갈라놓으려 어깨를 한껏 틀었다.

성기사는 살고 싶었다. 적에게 등을 돌렸다는 데에서 올 문책보다 죽음이 두려웠다.

그렇게 자신의 팔도 되찾지 못하고 그는 몸을 돌려 달아나기 시작했다.

그때 헤르의 시선을 받은 같이 온 무사가 질풍처럼 달려 나가 도망치는 성기사의 등에 예리한 검을 박아 넣었다.

“크으으으…….”

외마디 비명과 함께 성기사는 쓰러진 후 부들부들 떨다가 이내 생을 하직하고 말았다.

쪽빛 망토를 걸친 젊은 남자의 시선은 달라져 있었다. 그가 소드마스터라는 것이 밝혀진 이상 더는 그를 조롱할 수 없었던 것이다.

대신에 젊은 남자는 잘못된 그의 행동을 나무랐다.

“너무 심하시구려. 우린 그가 생명을 위협했기에 별수 없이 손을 썼을 뿐이오. 한데, 귀하는…….”

호칭까지 달라졌음에도 헤르에게서는 답이 없었다. 그는 인상만 잔뜩 구길 뿐이었다.

이제 와서 여신관은 크게 후회하고 있었다.

‘확실히 내가 협조를 구해 데려온 팔라딘은 다른 팔라딘들보다도 강하다. 하지만 소드마스터급을 불러왔어야 했다. 로만 공국에 소드마스터가 있었다니…….’

쪽빛 망토를 걸친 젊은 남자는 팔라딘이었던 것이다.

빈손으로 돌아간다면 분명 비센 추기경에게 힐난을 받을 것이 자명했다.

하지만 어쩔 도리가 없질 않은가. 힐난을 받더라도 병력을 충원해와야만 했다.

‘지금보다 더 많은 수의 성기사를 데려온다고 해봐야 오러 블레이드 앞에서는 무용지물이나 다름없다. 템플 기사단, 그중에서도 상위에 속하는 자들이 필요하다. 그들이 아니라면 이자를 제압하기란 매우 까다로울 것이다.’

지금 그녀는 정말 중요한 것을 잊고 있었다.

아직 헤르의 분노가 가라앉지 않았다는 것을!

다른 이도 아니고 적의질풍대의 무사가 죽었다. 이는 적의질풍대를 이끌고 있는 대주의 입장에서는 결코 좌시할 수 없는 문제였다.

헤르는 데리고 온 무사에게 눈짓해 쓰러져 있는 세실리를 부축하게 했다.

성기사들은 서로의 눈치만 살피는 중이었다.

순간 쪽빛 망토를 걸친 팔라딘은 재빨리 피딱지가 내려앉은 머리를 감싸 쥐고 일어나려는 사내아이에게로 향했다.

팔라딘과 사내아이의 거리는 5보. 헤르와 사내아이의 거리는 15보는 되었지만, 이는 애초부터 상대가 안 되는 일이었다.

팔라딘이 발을 떼는 것을 보고 신형을 날린 헤르는, 그가 아이에게 닿기 전 이미 그 앞에 서 있었다.

기겁을 하고 물러서려던 팔라딘의 가슴에 오러 블레이드가 박혀 있었다.

몸을 관통한 오러 블레이드가 팔라딘을 들어올렸다.

팔라딘은 자신의 살을 태우며 끔찍한 고통을 주는 오러 블레이드를 떼어내려 손으로 잡았지만 멍청한 짓이었다.

오러 블레이드는 손바닥까지 태우며 더욱더 비린 냄새를 풍겼다.

“끄아아아악!”

비명도 잠시였다. 온몸의 마나가 흩어져 버렸는지 팔라딘은 축 늘어지고 말았다.

여신관은 이미 달아나는 중이었다.

반면에 성기사들은 그럴 수 없었다. 이들에게는 본인들의 목숨을 바쳐서라도 그녀를 무사히 돌아가게 만들어야 할 의무가 있었던 것이다.

여신관의 뒤쪽에서 소드마스터의 것으로 추정되는 우레와도 같은 목소리가 하늘을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졌다.

“어디서 온 놈인지는 모르겠다만 널 보낸 자에게 확실히 말해두어라! 아레인을 건드리는 자에게는 피의 보복이 있을 지니…….”

* * *

작은 나무들은 성황 카르만과 오딘이 일으키는 바람을 견디지 못해 뿌리째 뽑혀 날아가 버렸고, 어중간한 나무들도 허리가 부러진 채 쓰러졌다.

두 사람이 지나간 곳은 폐하나 다름이 없었다.

가파른 산길을 오르면서도 성황 카르만과 오딘, 두 사람의 속도는 좀체 줄어들 기미가 보이질 않았다.

주위는 갈수록 어두워지고 있었다.

카르만은 커다란 굴 안으로 숨어들었지만 속도를 줄이기는커녕 앞쪽에 걸리는 기둥들을 부수며 나아갔다.

때문에 오딘이 굴 안으로 들어섰을 때에는 돌조각이 수북이 쌓여 길이 막혀 있었다.

하지만 그 역시 멈춰 설 생각은 없는 듯했다.

콰콰콱!

돌 조각들은 그의 장력에 의해 가루가 되거나 몸에 닿기가 무섭게 사방으로 튕겨 나갔는데, 순간적으로 몸 전체에 강기로 된 보호막을 둘렀기 때문이었다.

무엇도 장애가 될 수는 없었다.

달리는 상태에서 오딘은 사악한 미소를 머금고 이죽거렸다.

“괘씸한 녀석.”

한 가지 믿기지 않는 부분이 있었다.

오딘의 경공은 중원에서도 따라올 자가 없었다. 하물며 대륙에 그런 자가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또한 성황 카르만의 실력이 상상 이상이기는 했지만, 중원의 최고수와 놓고 보았을 땐 약간이라도 부족한 게 사실이었다. 설혹 빠르다손 치더라도 이렇게 장시간을 달린다는 건 이해 불가였다.

‘저놈을 잡으면 의문은 풀릴 것이다.’

애초에도 놓칠 생각은 아니었지만, 의문까지 겹치자 그를 놓아주고픈 생각은 말끔히 사라졌다.

작정하고 경공을 펴는 것이니 지금 오딘의 빠르기는 다른 때와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였다.

오딘이 굴 밖으로 나왔을 때는 사방이 어둠이었다.

어느새 라테우스 산맥의 중심부에 들어온 것이다.

“이곳이 언젠가 쉬바인이 말한 곳이군. 블랙 드래곤인지 뭔지 하는 놈이 산다는 곳 말이야.”

성황 카르만을 족친 후에 그 드래곤 녀석을 한번 만나보는 것도 나쁘진 않을 거란 생각이었다.

그러나 성황의 움직임은 포착되지 않았다.

아무리 오딘이 어둠 속에서 사물의 식별이 가능하다고는 해도 멀리 있는 대상을 눈으로 좇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숨소리도, 발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다.

오딘은 몰랐지만 카르만은 이미 그곳을 벗어나 있었다. 텔레포트 스크롤을 찢어 신성 제국으로 귀환한 것이다.

카르만은 오딘이 이곳에서 죽어주길 바랐다. 그 때문에 그 먼 길을 마다않고 여기까지 달려오지 않았던가.

그는 언제라도 카르만, 그리고 신성 제국의 앞길에 후환으로 남을 것이었다.

오딘의 근처로 이상한 존재들이 다가오고 있었다.

쿵! 쿵!

땅을 울리는 커다란 발소리에 이어 그를 위협하려 다가오는 존재들의 형체가 서서히 드러났다.

그들이 근처로 다가와 눈으로 식별이 가능했을 때, 오딘은 황당함을 금치 못했다.

죄다 처음 보는 것들이었다.

묵직한 발소리의 주인은 오딘보다 3배는 커 보이는 큼지막한 돌덩이였는데, 그것은 놀랍게도 직립보행을 하는 사람의 형상이었다. 거기다 커다란 돌망치를 어깨에 메고 있는 모습이 상당히 이색적이었다.

아지랑이처럼 하늘을 날던 검은 물체는 군데군데 찢어진 천으로 온몸을 가리고 투구를 쓰고 있었다.

반면에 미끄러지듯 다가오는 검은 로브의 인영은 후드를 눌러쓰고 있었지만, 후드 안에 드러난 얼굴은 해골바가지였다.

또한 마갑을 걸친 뼈만 남은 말을 타고 달려오는 기사도 있었다. 그 역시도 투구와 갑옷을 착용하고 있었지만, 그 속의 얼굴은 영락없는 해골이었다.

이 중 가장 무서운 기운을 풍기는 것은 검은 안광을 내뿜고 있는 말을 탄 기사였다.

그 옆으로는 그와 비슷한 옷차림새의 기사 둘이 서 있었는데, 세간에서는 이들을 일컬어 데스 나이트라 불렀다.

이곳에 나타난 존재들은 강화 돌골렘과 쉐이드, 리치, 그리고 데스 나이트였던 것이다.

[이곳은 블랙 드래곤 아그리스 님의 레어다. 그대는 허락 없이 이곳에 발을 들여놓은 대가를 치러야 한다.]

엄밀히 보자면 레어와는 조금 거리가 있는 곳이었다. 드넓은 마당이라고 해야 맞았다.

오딘은 화가 치밀었다. 성황을 놓친 것도 열불이 나는데, 이상한 녀석들이 협박을 하고 있질 않은가.

평상시였다면 호기심을 드러냈겠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이상한 세계이니 이런 녀석들이 있는 것도 크게 놀랍지는 않군.”

저들은 호흡을 하지 않았다. 대신 몸으로 끊임없이 마나가 들락거렸다.

오딘은 아마도 중원에서 강시를 부리듯 저들에게 누군가 주술을 걸어놓은 것이라 생각했다.

사람이어야, 아니 그와 비슷해야 대화를 해주지 않겠는가.

그러나 자신들을 무시함에 있어 저들은 성질을 부리진 않았다.

대신 행동으로 드러냈다.

쿵! 쿵!

거대한 발소리가 오딘을 향해 다가왔다.

강화 돌골렘이었다.

크게 골렘은 여러 가지로 나뉜다. 그 제작자가 누구냐에 따라 성능이 달라지지만, 몸체를 무엇으로 만들었느냐에 따라 전투력도 달라진다.

그렇게 보았을 때 강화 돌골렘은 금속 골렘들을 제외하고는 꽤나 강한 축에 속했다.

하나, 빠르지는 못했다.

대상을 향해 한발 한발 내디뎌 근방으로 다가설 때까지 오딘은 제자리에 있었다.

그렇게 강화 돌골렘은 목표에 다가섰지만 공격할 수 없었다. 대상이 하늘로 솟은 것인지 아니면 땅으로 꺼진 것인지 보이질 않았기 때문이다.

위치를 확인하려 위아래, 양옆을 확인하던 강화 돌골렘의 뒤쪽에서 적으로 인식되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주 굼벵이가 기어가는 게 빠르겠군.”

강화 돌골렘의 허리가 틀어지며 커다란 주먹이 움직였다.

후웅~

걷던 것과는 다르게 팔놀림은 매섭기 그지없었고, 그로 인해 풍압까지 일어나며 오딘의 머리카락이 휘날렸다.

그러나 집채만 한 주먹은 오딘을 강타하지 못했다. 강화 돌골렘의 주먹보다 턱없이 작은 오딘의 손바닥이 그와 맞닿아 있었기 때문이다.

한 팔이 막히자 골렘은 무거운 몸체를 돌려 돌망치로 내려찍기 위해 오른쪽 발을 들었다.

그 순간, 오딘의 오른쪽 손가락이 강화 돌골렘의 팔에 박혀 들었다.

콰작!

으깨진 돌골렘의 팔로 자색의 기운이 희뿌옇게 투영되었다.

그 상태로 오딘이 왼발에 힘을 주어 몸을 회전시키자 어이없게도 강화 돌골렘의 두 발은 모두 허공에 뜨고 말았다.

이윽고 거대한 몸체가 돌아가며 무거운 파공음을 흘렸다.

후웅- 후웅!

오딘이 팔을 빼며 손을 놓았을 때, 두어 바퀴쯤 돌던 강화 돌골렘은 허공을 날아 가디언들이 있는 곳으로 처박혔다.

워낙 무거운 몸이 빠르게 떨어져서인지 그것은 반쯤 땅에 박혀 쉽사리 빠져나오질 못했고, 그 여파로 중심에 남아 있던 리치는 돌골렘에 깔려 버리고 말았다.

골렘을 집어던질 수 있었던 건 단지 오딘의 힘이 강해서이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강화 돌골렘의 체중이 한 발에 실려 있어 돌리기가 수월했던 것이다.

뒤를 이어 하늘 위로 떠올랐던 쉐이드가 오딘을 향해 날아들었다.

그러자 때를 같이해 오딘 역시 땅을 박차고 뛰어올랐는데, 그 속도가 무시무시해 마치 쉐이드와 마주 나는 듯했다.

흑룡검에서 치렁치렁한 오러가 흘러나왔고, 그 오러는 쉐이드의 몸을 정확히 잘라놓았다.

쉐이드는 날개가 부러져 추락하는 새와 같이 떨어져 내렸다.

두 조각으로 나뉜 몸체는 땅에 닿자 스며들 듯 형체가 사라졌고, 주인을 잃은 투구와 천옷만 덩그러니 남았을 뿐이다.

그때, 땅에 박혔던 강화 돌골렘의 움직임이 있었다.

왼쪽 어깨를 두어 번 들썩이니 팔이 빠져나왔고, 이어서 다리를 세 차례 흔들어 빼내었다. 그리고 나머지의 몸뚱이까지 빼내어 일어서자 몸체에 붙어 있던 잔해들이 후두둑 떨어졌다. 그중엔 납작하게 찌그러진 리치의 투구도 섞여 있었다.

일어서는 것까지는 좋았다. 하지만 강화 돌골렘은 뱀처럼 날아드는 강기 다발을 피하지 못했다.

수십의 강기 다발이 강화 돌골렘의 몸체와 부딪치며 여러 차례 폭음을 유발시켰다.

쿠콰콰콰쾅!

강화 돌골렘은 몸을 움찔움찔 떨며 버티려 했지만, 마지막에 날아든 앞서의 것보다 커 보이는 강기에는 버티지 못했다.

그 몸체는 파편으로 화해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를 얻어맞아 데스 나이트들의 갑옷이 우그러졌으며, 그중 우두머리로 보이는 데스 나이트가 앉아 있던 말 역시 앞발을 치켜들다가 돌덩이에 얻어맞아 꼬꾸라졌다.

그 순간 우두머리 데스 나이트는 말을 버리고 뛰어내려 땅으로 착지하더니 쿵쿵거리며 오딘에게 달려들기 시작했다.

몸체가 무거웠는지 그 발에 짓눌린 땅이 푹푹 꺼졌다.

두 데스 나이트 중 한 녀석은 재기 불가 상태였지만, 다른 한 녀석은 한쪽 다리를 절뚝거리면서도 한 손에 검은색 검을 치켜들고 달려왔다.

“그래도 앞의 녀석이 조금 낫구나.”

오딘이 본 대로 앞쪽의 녀석은 두 손으로 검을 받쳐 들고 제법 노련한 자세로 달려오고 있었는데, 뿐만 아니라 뒤쪽의 녀석보다 몸놀림이 부드러워 보였다.

오딘은 앞쪽의 데스 나이트를 스쳐 지나가 뒤쪽 데스 나이트를 향해 파고들었다.

둘의 거리가 10보 정도 차이가 날 때쯤 오딘의 속도는 훨씬 빨라져 눈으로는 판독이 불가할 지경에 이르렀다.

그가 다리를 절룩거리던 데스 나이트를 지나쳤을 때 묘한 소음이 일었다.

콰작! 콰자자작!

데스 나이트의 목부터 오른쪽 어깨가 세로로 잘려 미끄러지는 중이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검에 닿은 곳으로 추정되는 부위부터 남은 몸체들이 삽시간에 얼어가고 있다는 점이었다.

흑월파천무(黑月破天武) 중 월하빙혼(月下氷魂)이었다.

잘려 떨어져 나간 부위들은 땅과 부딪쳐 일부가 깨져 버렸고, 남아 있는 부위는 졸지에 얼음 조각상이 되어버렸다.

이쯤 되면 겁을 먹을 만도 한데 남아 있는 데스 나이트는 몸을 돌려 재차 오딘에게 짓쳐드는 중이었다.

그 모습을 보며 오딘은 광소를 터뜨렸다.

“흐하하하하-!”

땅이 울리고 흘러가던 구름이 흩어질 정도의 소리였다.

금방이라도 마주칠 듯한 데스 나이트를 보며 오딘은 낮게 이죽거렸다.

“재미있는 놈들이구나. 너희들은 본 좌가 대륙에 온 이래 최고의 장난감이다. 약간이라도 긴장을 하게 해주었으니 말이다.”

이들을 상대함에 있어 오딘은 소홀하지 않았다.

마음을 느긋하게 품었다가 행여나 다칠 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실력은 앞서 대결한 성황이 나을지 몰라도 위험 수위는 이쪽이 높았다. 그만큼 이들의 주인이 이것들을 불러들이는 데 심혈을 기울였으리라.

곧 데스 나이트가 들이닥쳤다.

오딘은 이형환위로 자리를 벗어났지만 어찌 된 일인지 데스 나이트는 그에 속지 않았다. 허상을 구별할 수 있는 것이다.

데스 나이트의 검이 오딘을 찌르고 들어왔다.

무려 2장이나 떨어진 거리였다.

그리고 그 순간, 믿기지 않는 일이 벌어졌다.

데스 나이트의 검에서 치렁치렁한 검은 오러가 순식간에 뻗어 나왔다.

콰직!

더 놀라운 일은 오딘의 몸을 보호하던 강기가 깨어지는 사태가 발생한 것이다.

강기가 깨어지는 것을 보며 재빨리 몸을 피했으니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치명적인 부상을 입었을 것이다.

오딘의 입가에서 미소가 싹 걷혔다.

흑룡검에서 본래 보였던 환한 빛의 오러가 사라지고 검고 진한 오러가 흘러나왔다.

“네 녀석이 흑월파천무까지 끌어줄지는 의문이구나.”

데스 나이트의 공격이 재기되었다.

무작위로 내려치고 휘두르는 검은 땅을 뒤집을 정도의 위력이 깃들어 있었다.

쾅! 콰쾅!

검끼리 부딪칠 때마다 어마어마한 소음이 터져 나왔다.

그렇지만 번번이 오딘의 흑룡검에 데스 나이트의 공격은 빛을 발하지 못했다.

시간이 흘러도 데스 나이트는 전혀 지친 기색이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점점 밀리는 형국이었다.

오딘의 속도가 점차 빨라졌기 때문이었다.

급기야 오딘의 검에 의해 데스 나이트의 갑옷들이 우그러지기 시작했다.

십삼로 흑룡패월(十參路 黑龍敗月).

흑룡검은 조금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의 빠르기와 위력으로 상대를 향했다.

곧 강철, 혹은 그 이상으로 추정되는 데스 나이트의 금속 갑옷이 진한 흑빛의 오러에 갈가리 찢겨졌다.

결국 데스 나이트는 분해가 되다시피 해서 땅에 무릎을 꿇고 말았다. 흉흉한 안광이 차츰 빛을 잃었다.

오딘은 흑룡검을 검갑에 집어넣고는 막 쓰러진 데스 나이트의 갑옷을 유심히 살피며 중얼거렸다.

“조금 전의 녀석들과는 재질 자체가 다른 모양이로군.”

* * *

누가 말을 건넨 것일까?

파르티잔은 휘휘 고개를 돌려 보았다.

라이팅이 또 꺼져 홍채가 이완된 터라 당장 눈에 들어오는 형상은 없었다.

하지만 곧 파르티잔은 이곳이 그렇게 깜깜하지만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원인은 머리 위쪽에 있었다.

파르티잔은 고개를 뒤로 젖혀 하늘을 보았다.

2개의 거무스름한 불빛이 은은한 빛을 발하였는데 불빛의 모양새가 조금 이상했다.

동그란 모양이 아닌 매우 기다란 불빛이었던 것이다.

그것은 안 그래도 눈초리가 긴 대상이 불쾌한 기분에 눈을 실쭉이 떴음을 의미했다.

“허허, 누가 저런 곳에 등을 달아놓았담? 높기도 하군.”

어디에 달린 등일까 하는 궁금증이 들었던지 파르티잔은 무작정 앞으로 다가서기 시작했다.

그는 저것이 십중팔구 나무나 아니면 다른 조형물에 매달린 등이라고 착각한 것이다.

빛이 그리 밝지 않았던 까닭에 그는 손을 뻗어 봉사가 바늘을 찾듯이 앞으로 나아갔고, 그러다 보니 손에 걸리는 게 있었다.

파르티잔의 입가에 절로 미소가 걸쳐졌다.

성내에 달린 등에서도 불빛의 밝기를 조절하는 장치가 있다.

마찬가지로 이 불빛 역시 감도를 조절하는 장치가 되어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파르티잔은 고개를 돌려 게티롱에게 들으란 듯이 중얼거렸다.

“여기 있소. 잘하면 장치가 되어 있겠구려. 내 장치를 한번 찾아보지.”

파르티잔의 손이 겁도 없이 대상물을 더듬기 시작했다.

“표면이 매우 까칠하구려.”

그는 또 이것의 정체를 알아내기 위해 가볍게 쥔 주먹으로 통통 두드렸다.

“나무는 아닌 듯하군.”

이때까지 파르티잔은 자신이 더듬고 있는 분에게 실례되는 행동을 계속하고 있다는 걸 알아채지 못했다.

그는 이것을 무생물이나 식물 정도로 착각했으므로.

더듬기가 지속되자 급기야 불빛이 아래로 내려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것은 파르티잔의 눈높이 근처에까지 왔다.

그럼에도 파르티잔은 놀라지 않고 게티롱을 돌아보며 말했다.

“허허허, 이보시오, 내가 뭘 건드렸나 보오. 신기한 장치일세. 가만, 밝게 해주는 장치가 어딘가 있을 텐데…….”

다시 몸을 돌려 더듬기를 계속하려던 파르티잔에게 불빛이 더 근접해오나 싶더니, 불빛에 닿기 전 그는 뭔가에 밀려 뒤로 쓰러지고 말았다.

“어이쿠.”

불빛이 조금 크게 떠졌다.

파르티잔은 그 빛이 마치 무언가의 눈과 닮았다는 느낌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짐작이 가는 대상이 머릿속에 떠오르며 얼굴이 사색이 될 무렵, 뒤쪽에서 게티롱의 외침이 들려왔다.

“이보시오, 내 동행이오! 무례를 범하지 말아주길 바라오!”

엄중한 경고였다.

게티롱은 진즉부터 이 대상이 인근에 사는 블랙 드래곤 아그리스라는 것을 알아챘던 것이다.

그러나 불쌍하게도 그는 블랙 드래곤이 자신의 말을 기꺼이 들어줄 것이란 착각 속에 빠져 있었다.

불빛을 제외하고 검기만 하던 사위가 조금씩 환해지고 있었다. 그리고 거대한 블랙 드래곤의 형체가 드러남으로써 겁을 먹은 파르티잔은 이를 딱딱 부딪치며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하늘 전체에 퍼질 것 같은 소리가 흘러나왔다.

[재미있는 놈들이구나.]

파르티잔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며 머릿속도 하얗게 백지상태가 되어 조금 전의 행동을 사과해야겠다는 생각조차 품지 못했다.

부들부들 떨리는 다리 사이의 사타구니는 당장에라도 오줌을 지릴 것만 같았다.

다행히 블랙 드래곤 아그리스에게 당장의 관심은 게티롱에게 향해 있었다.

[네놈이 뭔데 나한테 이래라저래라 하느냐? 무례를 범하지 말라고? 간이 배 밖으로 튀어나온 모양이구나.]

그의 어조에는 무시 못할 위엄이 실려 있었다. 하지만 게티롱은 그에 굴하지 않고 자신의 뜻을 밝혔다.

“우린 이웃이지 않소!”

아그리스의 눈이 가늘어졌다.

[이웃?]

게티롱은 당당하게 소리쳤다.

“그렇소. 우린 이웃이오. 당신이 이사 왔을 때 부러 내가 다른 곳으로 이사까지 해주었소. 기억 못하시오?”

아그리스는 잠시 생각에 잠기는 듯했다. 그러나 아무리 기억을 뒤져 봐도 그에 관한 것은 없었다.

[글쎄, 난 모르겠군. 그리고 알았다고 하더라도 상관없어. 내가 왜 네깟 놈을 신경 써야 하느냐?]

철저히 무시하고 있음이었다.

이는 아그리스의 입장에서는 당연한 일이었다.

인간은 수천 년을 사는 드래곤의 입장에서 봤을 때 하등하기 그지없는 생물이었던 것이다.

인간들의 개체가 점점 불어나 땅을 넓히는 것을 반복해도 드래곤들이 신경을 안 쓰는 이유는 오로지 자신들과 상관없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아그리스처럼 산맥이나 숲, 바다 같은 자연에 묻혀 살았지, 평지에는 살지 않았다. 생활공간 자체가 다른 것이다.

그러니 그들이 전쟁을 하건 땅을 넓히건 신경을 쓰지 않았다.

단, 자신들의 주거지를 침범했을 때에는 가차 없었다.

모든 드래곤이 포악한 것은 아니었지만, 대부분의 드래곤들은 자신들의 레어 근처로 들어온 고등 생물을 죽이는 일이 태반이었다.

그것은 명백한 도전으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이다.

게티롱이 살 수 있었던 것은 모두 그 이유에서였다. 레어가 완공되기 전 미리 내려가 살았으니 말이다.

자연히 아그리스는 그에 대해 관대했다기보다는, 그가 있는 줄도 모르고 살았다는 것이 된다. 먼 거리는 지금처럼 텔레포트를 이용해 돌아다녔으므로.

하지만 게티롱은 그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당신이 이럴 줄은 몰랐소. 난 당신을 여태 이웃으로 생각하고 살아왔는데 정말 실망이오.”

[실망? 네깟 놈이 실망해서 어쩌겠다고?]

게티롱은 더 이상 그의 말을 듣기 싫었던지 고개를 팩 돌렸다.

이 게티롱이라는 인간은 같은 인간의 입장에서 봤을 때도 어이가 없었지만, 드래곤인 아그리스의 입장에서는 정말 기가 막힐 정도로 제정신이 아닌 듯했다.

하도 황당해 아그리스는 잠시 말을 섞은 후 가지고 놀다가 이놈들을 죽이겠다는 결심조차 잊어버렸다.

그사이 파르티잔은 이 상황을 이용, 슬그머니 자리를 벗어나려 했다. 그러자 아그리스가 그런 그를 나무랐다.

[너도 간덩이가 부었냐? 내 허락 없이 어딜 가려고!]

그에 파르티잔은 재깍 몸을 돌리고는 바닥에 납작 웅크렸다.

“위대하신 분이시여~ 소인이 주제넘었습니다. 그 점에 대해 백배, 천배, 만배 사죄드립니다. 하오나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니옵니다. 부디 제 죄를 용서해주십시오. 이렇게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머리를 땅에 박고 두 팔만 올려 양 손바닥을 싹싹 빌어대는 모습이 가관이었다.

아그리스는 하도 어이가 없는 인간을 보다가 이쪽을 보니 그래도 ‘이놈은 정상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네놈은 태도가 썩 나쁘지만은 않구나. 하지만 네놈도 그냥은 보내줄 수 없다.]

겁에 질려 파르티잔은 울 것 같은 얼굴로 아그리스를 쳐다보았다.

“부디 한 번만 눈감아주시오면…….”

[그래줄 수 없다고 했지 않느냐. 같잖은 마법으로 감히 어둠에 불을 밝힌 죄, 그걸 용서할 수 없다는 얘기다.]

죄목도 가지가지였다.

그냥 신경을 거슬렀다고 말하면 될 것을…….

파르티잔은 다시 머리를 땅에 박았다 들었다를 반복하며 자비를 구했다.

“제발 살려만 주시옵소서. 못난 제게 처자식이 있사옵니다. 노부는 오늘내일하시고 아이들은 굶고 있습니다. 가장인 제가 일을 해서 돈을 벌어야 온 식구를 먹여 살릴 형편입니다. 제발… 그 부분이 거슬리셨다면 그걸 반성하는 의미에서 평생을 어둠 속에서라도 살아가겠습니다.”

거짓이었다.

하지만 동정이라도 구해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죽으면 모든 게 끝이니까.

그러나 포악하기로 으뜸간다는 아그리스에게 동정을 바란다는 것 자체가 의미 없는 일이었다.

과연 그는 파르티잔이 하는 말에 눈 하나 깜빡이지 않았다.

[시끄럽구나. 네놈이 아무리 떠들어봐야 내 생각은 바뀌지 않는다. 더 떠들지 않는 게 좋을 거다.]

그래도 파르티잔은 하는 데까지 해보고자 했다. 다른 일도 아니고 목숨이 달린 일이니…….

입은 쉴 새 없이 움직였지만 어찌 된 영문인지 말이 나오지 않았다. 아그리스의 침묵 마법이 그의 목소리를 차단한 것이다.

파르티잔이 입만 뻥긋거리는 꼴이 우스웠는지 게티롱은 사태 파악도 못하고 실소를 흘리고 말았다.

“키킥.”

아그리스의 눈이 노기를 품었다.

[웃어?]

게티롱은 아그리스가 정말 웃긴 모습을 놓치고 있다 생각하고 손가락으로 파르티잔의 입을 가리켰다.

“저것 보시오. 저게 안 웃기오? 크크큭.”

말도 나오지 않는데 파르티잔은 끊임없이 입을 놀려 댔다. 그렇게라도 하면 정성이 닿으리라 생각했던 모양이다.

그러나 아그리스에게는 그 모습이 전혀 웃기지 않았다.

그는 게티롱을 싸늘하게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겁 대가리 없는 녀석. 네놈은 특별히 대우해줘야겠구나.]

말을 마침과 동시에 아그리스는 용언 마법을 구현시켰다.

아그리스의 왼쪽 앞발, 길고 뾰족한 검지 발톱에서 나온 칠흑의 빛이 게티롱을 덮었다.

그는 등을 구부려 두 손을 땅에 짚더니 곧 형체가 변하기 시작했다.

피부가 초록빛을 띠더니 부풀어 오른 살에 의해 옷이 찢겼다. 맨들맨들하던 살은 오돌토돌해졌으며 얼굴과 목이 붙고 눈은 커졌다. 그리고 두 손과 두 발엔 갈퀴가 생겼다.

사람만 한 개구리였다.

게티롱은 네발로 엉금엉금 기다가 급기야 펄쩍펄쩍 뛰기 시작했다.

차마 웃을 수 없는 광경이었다.

파르티잔은 더는 중얼거리지 못하고 경악하며 뒷걸음질을 쳤다.

도망치는 것만이 살길이 될 것이리라.

그러나 자신이 없었다.

‘드래곤한테서 어떻게 도망가? 만약 저 커다란 발에 깔린다면……?’

끔찍한 상상이 파르티잔의 머릿속을 누볐다. 납작하게 눌려 죽기는 정말 싫었다.

아그리스가 물었다.

[네놈은 어떻게 해줄까? 그래도 네놈은 기본은 되어 있는 듯하니 고통 없이 죽여 줄 용의가 있다. 어떠냐?]

파르티잔은 휘휙 소리가 나도록 고개를 흔들었다.

‘차라리 개구리가 되었으면 되었지, 왜 기본을 갖춘 난 죽이려고 하는 거야?’

그 생각을 고스란히 읽었는지 아그리스는 어금니가 보이도록 긴 입꼬리를 치켜 올렸다.

[그래, 죽이지는 말아달라는 얘기로구나. 그럼 옛날 취미를 되살려 넌 키메라로 만들어줄까?]

키메라.

합성 생물체이다.

흔히 드래곤의 레어를 지키는 존재는 가디언(Guardian:수호자)이었다.

가디언이 필요한 이유는 간단했다.

침입자를 매번 상대하는 것이 귀찮기도 했을 뿐만 아니라 드래곤들은 긴 잠에 빠질 때가 있기에, 그때 자신을 지켜 줄 무언가가 있어야 했기 때문이다.

이에는 진흙이나 돌 혹은 강철로 된 골렘도 있고, 세뇌를 시킨 오우거나 반인반우(半人半牛)인 미노타우로스, 반인반마(半人半馬)인 켄타우로스도 있다.

물론 드래곤들이 가디언으로 데리고 있는 존재들을 다 나열하기란 버겁다.

하지만 그런 가디언들에 꼭 필요한 것은 두뇌 회전이 뛰어난 고등 생물이었다. 고등 생물을 섞어야만 가디언들의 멍청한 짓거리를 덜 수 있는 것이다. 여기엔 지능이 뛰어난 고블린이나 인간, 드워프나 엘프들이 들어가고는 했다.

하지만 빈약한 그 녀석들은 자주 죽고는 했고, 그래서 한 드래곤이 고안해낸 것이 바로 키메라였다.

머리는 좋은 녀석으로, 몸은 튼튼한 녀석으로 이어붙이는 것이다.

하여, 키메라는 징그러운 녀석들이 많았다. 드래곤의 시각에서는 재미있는 장난감으로 비춰졌지만…….

그 질문을 듣고 파르티잔은 기겁을 했다.

만드는 드래곤이야 재미있는 일이 될지도 모르지만, 당하는 사람은 어떨까? 수술이 성공한다는 가정하에서 암만 마취를 시킨다고 해도 자신의 끔찍하게 변한 신체를 보는 것은 죽는 것보다 더한 고통이 될 것이다.

파르티잔은 고개를 흔들며 동시에 팔도 흔들었다.

절대 그러지 말아달라는 얘기다.

파르티잔은 생각조차 마음대로 할 수 없었다. 행여 방금처럼 속생각을 들킨다면 더없이 난감할 것이므로.

그래서 그는 이를 역이용했다.

‘아아, 위대하신 분이시여~ 당신의 육신은 아름답기 그지없습니다. 전 오래전부터 드래곤 님들을 존경하며 살아왔습니다. 세상의 균형을 지키고 수호하시는 여러분들이야말로 이 세상에 없어서는 안 될 분들입니다.’

오로지 칭찬 일색이었다.

흠이 있다면 두서가 없는 칭찬이었다는 점뿐.

과연 아그리스는 그 생각을 읽고는 사념에 빠졌다.

[그럼 어찌하면 좋겠느냐? 솔직히 네가 밉지는 않구나. 하지만 널 되돌려 보내준다면 내 명성에 누가 되는데……. 그냥 곱게 죽어주면 안 되겠느냐?]

파르티잔은 이번에도 자신의 생각을 블랙 드래곤이 읽어주길 바라며 얼른 생각했다.

‘절 당신의 하인으로라도 써주십시오. 청소라면 자신 있습니다. 또 전 그리 약하지 않으니 잘 죽지도 않을 것입니다. 위대하신 분의 발톱의 때만큼도 미치질 못하겠지만, 전 마법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그러자 아그리스에게서 조롱 섞인 말이 튀어나왔다.

[마법? 마법을 사용한다? 지나가던 개가 웃겠구나. 인간의 마법으로 무얼 하겠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는 사실이었다.

드래곤의 마법과 인간의 마법은 격차가 커도 너무 컸으므로.

인간들의 마법이란 그들에게는 그저 하찮은 아이들의 장난 따위로밖에 느껴지질 않는 것이다.

파르티잔이 점점 절망에 빠져가고 있을 무렵, 아그리스는 선심 섞인 말을 내뱉었다.

[오냐, 한번 믿어보마. 대신 실망을 끼칠 시에는 각오해야 할 것이니라. 조금의 과오나 실수도 용납되지 않는다는 것을 똑똑히 알아두어라. 참고로…….]

“참고로요?”

얼떨결에 중얼거린 것인데 침묵 마법이 풀려 있었다.

그에 놀랍기도 하고 고맙기도 한 파르티잔에게 아그리스의 뒷말이 이어졌다.

[내 레어에서 생활하던 놈들의 90퍼센트가 죽었다는 것을 알아두도록.]

파르티잔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이건 안 가느니만 못한 게 아닌가.

파르티잔은 다시 엎드려서 사정을 하기 시작했다.

“절 개구리로 만들어주옵소서. 제발 부탁드립니다. 이렇게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아그리스의 표정이 확 바뀌었다.

[흥, 저 망할 개구리랑 내 레어 근처에서 분탕질이라도 하려고? 이미 생각은 정해졌다. 넌 이 블랙 드래곤 아그리스의 하인이 되는 거다.]

달리 선택의 길이 없었다.

흡사 파르티잔은 사형대로 끌려가는 사형수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그리스는 자신의 몸체보다도 긴 꼬리를 내밀었다.

[꽉 잡아라.]

꼬리의 끝이 코앞에 있었지만, 파르티잔은 머뭇머뭇했다. 이걸 잡는 즉시 인생이 바뀌는 것이다.

그 모습을 보며 아그리스가 역정을 냈다.

[한 입으로 두말하는 놈이구나! 안 되겠다.]

“자, 잡겠습니다.”

파르티잔이 눈을 꼭 감고 아그리스의 꼬리를 잡으려는 순간, 어디에선가 그를 제지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데려갈 생각이라면 그만두는 게 좋아. 그놈한테는 볼일이 남아 있거든. 내 목소리를 잊지는 않았겠지? 파르티잔.”

파르티잔이 목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을 때, 그 자리엔 오딘이 서 있었다.

결국 오딘은 성황 카르만을 잡는 데 실패했다.

가뜩이나 다 잡은 놈을 허무하게 놓친 까닭에 그의 얼굴은 노기를 띠고 있었고, 이 와중에 파르티잔을 보게 되자 심술기가 잔뜩 묻어 있었다.

파르티잔의 두 눈이 금세 눈물이라도 떨어뜨릴 것처럼 감격에 물들어 있었다.

반면에 아그리스는 굉장히 불쾌한 시선으로 오딘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6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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