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격전
쿤은 꿈을 꾸는 것 같았다.
오딘은 말 그대로 자신을 든 채 날 듯이 달렸다.
한 번 뛸 때 큰 걸음으로 20보에 이르는 거리를 뛰는 듯했다.
주변의 풍경이 너무 빨리 멀어져 방금 전 봤던 것이 토끼인지 살쾡이인지도 구분하기 힘들 지경이었다.
숨을 쉬려면 아래쪽을 보아야 했다.
성황 카르만의 모습은 자그마한 점으로 보였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어느새 막스마라의 저택 근방에 다다른 그들은 곧 울창한 숲으로 들어섰다.
얼마나 달렸을까? 돌연 앞쪽에서 외마디 비명 소리가 가늘게 울려 퍼졌다.
끊임없이 울리는 소리. 그 소리의 근원지와 오딘은 순식간에 간격이 좁혀졌다.
뚝!
나뭇가지가 분질러지는 소리에 이어 비명은 더 커졌다.
“꺄아아아아~”
오딘의 옆구리에 대롱대롱 매달린 쿤은 앞쪽에서 한 소녀가 허공에서 팔을 휘적대며 낙하하는 광경을 보게 되었다.
저 높이에서 저 속도로 땅에 부딪친다면 심한 골절상을 입거나 재수가 없으면 죽게 될 것이었다.
다행히 그녀에게 불행은 없었다.
오딘이 떨어지는 그녀를 잡아주었으므로.
“영 거추장스럽군.”
오딘이 불평을 늘어놓을 만도 했다.
한 옆구리에는 쿤, 또 한 옆구리에는 소녀를 끼고 달리고 있질 않은가.
둘은 공통점이 있었다. 모두 머리색이 빨갛고 귀가 긴 엘프라는 점이다.
저택에서 마주쳤던 두 사람이다.
그녀는 카르만의 시녀 메이였던 것이다.
둘은 질주하는 오딘의 옆구리에 끼인 채 멀뚱멀뚱 서로를 바라보았다.
쿤은 경황이 없어서 저택에서 그녀를 눈여겨보질 못했지만, 메이는 쿤을 단번에 알아보았다.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안도감과 자신이 날고 있다는 느낌을 뒤로한 채 메이가 물었다.
“넌 저택에서 봤던……?”
쿤은 눈을 끔뻑였다.
그러고 보니 본 것 같기도 하여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 와중에도 바람의 저항은 엄청나 두 사람의 머리카락은 하염없이 휘날렸다.
둘이 말문을 트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왜 나무 위에서 떨어졌지? 아니, 저렇게 높은 나무 위에는 어떻게 올라간 거야?”
“이상한 사람이 와서 던졌어. 나무 위로…….”
그녀가 이상한 사람이라 지칭한 이는 다름 아닌 카르만이었다. 마성을 부여받아 본모습이 아닌 까닭에 그가 카르만이라는 것을 알아채지 못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가 카르만의 모습이었다 해도 그녀는 쉽사리 알아차릴 수 없었을 것이다.
그 역시 지금의 오딘처럼 무지막지한 속도로 달리던 상태에서 메이를 허공으로 끄집어 던졌으니 말이다.
메이는 오늘 여러 번 진귀한 경험을 했다.
생명체가 그렇게 빨리 달리는 것이 놀라웠고, 자신의 몸이 그의 손에 의해 허공으로 날려졌을 땐 마치 부유하는 느낌이 들었다.
카르만의 신성력이 그녀를 감싸준 것이다.
또한 떨어지며 ‘이제 죽었구나’라고 생각했을 때 기적적으로 낚아챈 이 남자는 또 다른 놀라움을 안겨 주었다.
카르만이 메이를 나무 위로 던진 것은 뒤쫓아오는 대상에게 그녀가 볼모로 잡힐 것을 염려해서였다.
상당수의 이성을 상실한 상태에서도 카르만은 그녀를 염려했다. 이는 카르만이 메이를 그만큼이나 각별히 생각하고 있음이었다.
쿤이 물었다.
“넌 거기 왜 있었는데?”
“난 그분의 시녀야. 성황 폐하가 걱정이 되었거든. 점심때가 되어 가는데 오시질 않으니 도시락이라도 챙겨 드리려고 나온 거야. 그런데 어디로 가셨는지 찾는 도중에 길을 잃어버렸지 뭐야.”
메이는 계속 주절거렸다.
“여기는 어디고 그분은 대체 어디 계신 거지? 참, 넌 그분이 어디로 가신지 알고 있지? 같이 나갔잖아.”
그 물음에 쿤은 어떻게 대답을 해줘야 좋을지 몰랐다.
사실을 털어놓는다면 난리를 칠 게 뻔하므로.
불현듯 그녀는 깜짝 놀라 비명을 질렀다.
“아악!”
쿤이 연유를 물었다.
“왜?”
“너, 너무 멀리 와버렸잖아. 몇 마디 하는 동안…….”
숲은 이미 끝나 있었다.
잠깐 이동한 이 거리를 그녀가 돌아가려 한다면 하루하고도 반나절은 걸릴 것이다.
이 짧은 생각을 하는 동안에도 저택과의 거리는 더 멀어졌고, 걱정은 태산같이 불어났다.
“내, 내려 주세요. 전 돌아가야 한다고요.”
그때서야 오딘은 자신이 그녀를 들고 가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듯했다. 신경이 온통 카르만에게 쏠려 있었기 때문이다.
오딘은 깊이 생각하지 않고 그녀를 놓아주었다.
어마어마한 속도로 인해 거센 바람의 저항을 맞았으나 기이하게도 메이는 상처 하나 없이 땅에 안착할 수 있었다.
그래도 일어난 흙먼지가 옷을 뒤덮는 것만은 어쩔 수 없었다.
메이는 옷에 붙은 먼지를 털어내며 멀어져 가는 두 사람 쪽을 향해 투덜거렸다.
“이상한 사람들이야, 정말.”
* * *
석연찮은 기분이었다.
메이와 헤어진 후의 쿤의 감정이 그러했다.
피붙이와 떨어진 것 같은 느낌이었는데 쿤은 애써 그를 부정했다.
‘에이, 아니겠지. 아닐 거야…….’
어릴 때 헤어졌던 여동생이 있다면 아마도 저 나이 대쯤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어떠한 증명도 성립되지 않았다.
‘시간이 좀 더 있었더라면…….’
그랬다면 더 많은 대화를 나눌 수 있었을 것이고, 그녀의 족보 역시 알 수 있었을 것이다.
블러드 엘프의 개체는 그리 많지 않으니 다시 그녀 또래의 여아를 찾는다는 건 버거울 일이었다.
생각은 깊어지며 그리움과 걱정으로 뒤바뀌었다.
‘그 녀석은 지금쯤 어디서 뭘 하고 있을까?’
따로 대단한 사연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블러드 엘프들은 고양이와 비슷한 습성이 있다. 조금만 자라면 독립적인 성격을 지니는 것이다. 그래서 보통은 10살 정도가 되면 자신만의 길을 찾아 떠난다.
그들은 꼭 대륙에 얽매이지는 않았다. 조합을 만들어 사는 이들도 있으며, 다른 종족들과 뒤섞이기도 했다. 또 일부는 바다로 향했다.
쿤은 이 중 대륙행을 택했다.
세상으로 나가기 전, 공부를 해보겠답시고 남들보다 일찍 떠나온 것이 막 걸음마를 뗀 여동생과 헤어진 원인이 되었다.
‘날 그렇게 따라다녔는데… 헤헷.’
눈시울이 살짝 뜨거워지고 가슴이 먹먹해졌다.
하지만 그뿐. 언제 그랬냐는 듯이 쿤은 의젓한 태도를 보였다.
‘인연이 있다면 어디선가 만나게 되겠지.’
어느새 국경까지 다다르자 오딘은 그제야 쿤을 내려 주었다. 메이를 내려 주었던 방식과 동일하게 말이다.
그렇게 오딘은 멀어져 가고 있었지만, 그의 뜻은 쿤의 머릿속에 생생히 전해졌다.
-먼저 쉬바인에게 돌아가거라.
쉬바인은 멀지 않은 곳에 있을 것이었다.
홀로 남겨져 멀어지는 오딘의 뒷모습을 보던 쿤은 혀를 찼다.
“저런 속도로 끊임없이 달리시고도 전혀 지치시지도 않는구나. 저분은 어떻게 저런 힘을 얻으셨을까? 세상에 저분을 상대할 사람이 있기는 한 걸까? 불가사의해, 정말…….”
말을 마친 쿤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쉬바인이 있을 곳을 향해 스스럼없이 발길을 돌렸다.
* * *
카르만은 외진 곳, 더 외진 곳으로 향했다.
이틀, 그 정도는 달릴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이후가 문제였다.
몸을 너무 움직여서인지 허기가 지고 피로가 쌓였다.
해결책은 다른 공간으로의 이동뿐이었다.
그렇다고 달리는 상태에서 공간 이동 마법을 시전한다는 것은 말도 되지 않는다.
텔레포트 스크롤이 있기는 했지만, 지금은 그것을 쓸 수 없었다. 달리는 상태에서 사용한다면 자신의 몸이 허공에서 흩어질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이걸 찢기 위해 잠시라도 다리를 멈추고 시간을 지체한다면 거리는 순식간에 좁혀질 것이다.
목이 잘리지 말라는 법이 없었다.
또한 하나의 이유를 더 들자면 저놈은 살려 두어서는 안 되었다.
지금이 아니라 후에라도 위협으로 다가올 것은 불 보듯 훤한 일이다.
어떻게 보면 지금이 그를 없앨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신성력까지 동원하여 달렸으니 이 정도지, 그렇지 못했다면 진즉에 붙잡혔을 것이다.
급기야 카르만은 검은 나무들의 숲으로 들어섰다.
그가 이곳에 발을 들여놓은 것은 시야를 가려 주는 나무들을 믿어서가 아니었다.
저 정도의 무력을 지니고 있다면 청각도 극도로 예민할 것이다. 다시 말해 저자는 미약한 발소리라도 쫓을 수 있을 것이며 숨소리와 맥박, 심지어 땀구멍이 호흡을 하는 소리까지도 들을 수 있을 것이다.
숲으로 들어선 카르만은 몸을 돌려 뒤로 달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바람을 일으켜 자신의 발자국들을 지워나갔다.
지금 그가 믿을 수 있는 것은 게이트였다. 대륙 내의 다른 곳으로의 이동이 가능한 블랙 게이트.
바리톤에서 일어났던 살인극 역시 이곳을 통한 것이었다.
게이트 안으로 시꺼먼 빛이 일렁였다.
카르만은 뒤를 한 번 돌아보더니 확 인상을 구겼다.
‘따라와라. 발자국을 지운 것은 네놈이 너무 거리를 좁혀 잠시 벌려 놓을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곳은 네놈의 무덤이 될 것이다.’
이윽고 카르만은 게이트 안으로 들어섰다.
조금 후에 오딘은 게이트 근방으로 다가섰다.
성황의 흔적이 지워져 있었다.
다섯 보, 혹은 일곱 보 간격으로 나 있는 사람의 발자국.
그의 것으로 추정되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미친놈의 발소리는커녕 근방에는 사람의 호흡 소리조차 없었다.
대신에 여럿의 숨소리는 들렸다. 동물들, 혹은 그보다 큰 숨소리를 내는 생명체인 몬스터들일 것이다.
공간 이동을 했다면 하다못해 마나의 움직임이라도 있어야 했다.
오딘은 마법을 실현할 때 마나의 파동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는 대륙에서 학습을 통해 배운 것이었다.
“하늘로 꺼졌단 말인가? 아니면 땅으로 솟았단 말이냐? 이상하군. 분명 뭔가가 있을 텐데…….”
오딘은 주위를 샅샅이 뒤졌다.
단 하나 이상한 흐름, 불규칙한 기가 뭉친 곳이 못내 신경에 거슬렸다.
오딘은 그곳으로 걸음을 옮겨 갔다. 그러자 족히 일 장은 됨 직한 검은 게이트가 그의 눈에 밟혔다.
조심스레 검은 아지랑이에 손을 뻗자 마치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 들었다.
결심을 굳히는 데에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별 이상한 것도 다 있군.”
말은 그렇게 했지만 오딘은 게이트 안으로 걸음을 들여놓고 있었다.
이 게이트는 라테우스 검은 산맥으로 통한다.
이곳에 게이트를 만든 존재는 다름 아닌 라테우스 검은 산맥에 똬리를 튼 블랙 드래곤 아그리스였다.
성황 카르만의 계산 밑바탕에는 그것이 깔려 있었다.
그는 오딘을 블랙 드래곤 아그리스의 레어 근처로 안내할 작정이었던 것이다.
* * *
폭포로부터 떨어진 물줄기는 쉬지 않고 흘러갔다.
상류에서 하류로 내려가면서 물길의 폭은 좁아져 물살은 더욱 거세졌다.
커다란 2개의 바위 때문이었다.
철벅!
제법 거센 물줄기가 바위에 부딪혀 산산이 흩어지며 수백, 수천으로 갈린 물방울이 사방으로 튀었는데 유독 한 물방울만이 두꺼운 가죽 신발에 안착하여 스며들었다.
머리를 산발한 신발의 주인은 붉은 검을 길게 늘어뜨린 채 비장한 각오에 물들어 있었다.
그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카반, 아니 로만 공국 내에서 위세를 떨치던 카반의 울프를 이끌던 엘룬이라는 남자였다.
엘룬이 이곳 모넬라 호수까지 흘러들어오게 된 것은 오로지 복수에 대한 일념 때문이었다.
우선은 이스론 상단을 찾을 계획이었다.
가능하다면 덴과 합류해 상단과 손을 잡은 녀석들의 위치를 추적한 후, 기회를 노릴 생각이었다.
모넬라 호수는 가깝게는 라테우스 산맥을 끼고 있으며, 멀게는 바리톤과 아레인 왕국을 끼고 있다. 방향은 제대로 잡은 것이다.
엘룬의 뒤로는 5명의 사람들이 있었다.
이들은 하나같이 간소복 차림이었는데, 등 부분엔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고 있는 늑대가 그려져 있는 상의를 걸치고 있었다.
개중 눈에 띄는 사람은 파핀이라는 청년이었다.
세실리를 곤경에 처하게 만들었다가 도리어 마을에서 쫓겨난 자였다.
파핀은 그 일이 차라리 잘되었다고 생각했다. 덕분에 자신은 카반의 울프에 입단하지 않았던가.
비록 지금 상황이 조금 좋지 못하다는 아쉬움은 있었지만…….
‘언젠가 우리 마적단은 다시 일어설 것이다. 보란 듯이…….’
꽤나 먼 거리를 걸어 발이 부르트고 심신이 지쳤지만 파핀은 의욕만은 넘쳐 났다.
‘언제 또 엘룬 단장님과 함께 행동할 수 있을까? 이것은 나에게 절호의 기회다. 내 존재감을 더욱 부각시켜야겠다.’
때마침 한 마적이 대령해온 말에 오르던 엘룬이 물었다.
“이쪽 길이 맞겠지?”
딱히 대상을 지적하지 않는 물음이었다.
“예, 그렇습니다. 조금 더 가시면 라테우스 산맥을 벗어납니다. 이 산맥만 지나면 곧 바리톤 왕성과 연결된 마법진에 몸을 실으실 수 있습니다!”
우렁찬 대답 소리의 주인은 과연 파핀이었다.
오는 길 내내 그는 지도를 살피고 또 살펴보았다.
비단 지도뿐이 아니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최대한 숙지를 해놓은 것이다.
마적들 중에는 머리가 빈 인간이 많아 분명 평상시의 그였다면 탐탁히 여겼겠지만, 엘룬은 파핀에게 시선을 한 번 주었을 뿐 칭찬은 늘어놓지 않았다.
그럴 여유가 없다고 보아야 했다.
신경이 온통 복수에만 쏠려 있었기 때문이다.
줄곧 앞을 향해 나아가던 엘룬의 시선이 먼 점을 향했다.
‘고블린에 오크, 그리고 저건 엘프인가?’
꽤나 먼 거리였음에도 그는 대상의 면면을 들여다보는 듯했다.
나귀와 말들이 어울린 행렬. 엘룬이 보고 있는 대상들은 다름 아닌 이스론 상단의 사람들이었다.
또한 아레인에서 파견을 나온 이들도 있었는데, 흰 눈썹이 멋있게 뻗은 제라드 후작과 그의 수하들이었다.
헤르미온이라는 엘프 아가씨의 시선에 제라드는 난처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녀는 멸시하는 듯한 눈초리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를 간파한 마르크가 제라드의 귀에 대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위안을 주었다.
“원래 성격이 저럽니다. 제가 알아듣게 말한다고 해서 들을 녀석이 아니랍니다. 죄송하지만 장로님께서 이해해주세요.”
후작의 작위를 가지고 있었음에도 제라드는 장로라는 호칭으로 불리고 있었다. 이는 본인이 원한 것이었다.
그러나 기쁜 마음으로 나선 것과는 다르게 제라드는 헤르미온으로부터 심한 미움 세례를 받았다.
상단과 합류하고 몇 건의 일을 성사시켰음에도 그녀는 결코 좋은 말을 하지 않았다.
원인은 엉뚱한 곳에 있었다. 오딘을 대신해 그가 왔다는 것!
그것이 헤르미온이 제라드를 극도로 미워하는 이유가 되었고, 이유도 모른 채 계속 당하기만 하면서도 제라드는 아쉬운 소리 한 번 하지 못했다.
헤르미온은 그를 향해 독설을 퍼부었다.
“왜 일부러 시선을 피하는 거죠? 나한테 죄진 거 있어요? 아님 내가 더러워 보이나요?”
사실 제라드도 오래 고개를 돌린 관계로 목이 저릴 지경이었다. 그럼에도 따지지도 못하고 그는 꿀 먹은 벙어리처럼 침묵을 지켰다.
그것이 못마땅해서였을까? 헤르미온의 입에서 또다시 시비조의 말투가 흘러나왔다.
“지금 절 무시하나요? 내 말에는 대답하기도 싫다 이건가요?”
시도 때도 없는 꼬투리였다. 제라드는 이마에서 식은땀이 흐를 지경이었다.
“아, 아닐세. 시선을 일부러 피한 것이 아니었네. 그냥 저곳의 풍경을 본 것뿐이야.”
“풍경이오? 저곳에 뭐가 있다고요? 내가 쳐다보니까 기분이 상해서 일부러 시선을 돌린 게 아니고요? 내가 부담되죠? 같이 있기 싫으면 싫다고 해요. 왜 솔직하게 말을 못하죠?”
제라드는 얼굴이 다 화끈거렸다.
대답을 하면 하는 대로, 안 하면 안하는 대로 지금처럼 욕을 얻어먹으니 마치 가시 방석에 앉은 느낌이었다.
이 일을 떠맡은 것이 억울하기까지 했다.
그녀가 제라드를 대하는 태도를 보다 못한 마르크가 결국 큰 소리를 냈다.
“헤르미온, 정도껏 해. 이분은 우리 일을 도와주시려고 온 거라고!”
헤르미온의 분노가 고스란히 마르크를 향했다.
“네가 뭔데 참견이야!”
불똥이 엄한 데로 튄 것이다.
제라드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둘 사이를 화해시키고자 했다.
“내, 내가 다 잘못했네. 용서해주게. 청년한테까지 그럴 것은 없잖나.”
그에 헤르미온은 도끼눈을 뜨고 제라드를 노려보며 악을 질렀다.
“뭐가 어쩌고 어째요? 아하, 아주 절 몰아붙이려고 둘이 작당을 하신 모양이구나. 그래, 내가 싫으면 떠나주죠. 잘들 해봐!”
그녀가 잘못되면 여기 모인 모두가 좋을 게 없었다.
내다놓는다면 그럴 가능성이 농후했다고 생각했던지 여럿이 그녀를 제지했다.
“헤르미온, 그러지 마.”
“마르크, 어서 사과해. 잘못했다고…….”
항상 이런 식이었다.
결국 마르크가 태도를 굽힘으로써 제라드는 자신을 막아주던 방패마저 사라졌음을 느꼈다.
그녀 앞에서 제라드는 한없이 작아졌다. 쥐구멍이라도 있다면 숨고 싶은 심정이었다.
잔뜩 어깨를 움츠리고 눈치만 살피는 제라드.
그것도 못마땅했는지 헤르미온은 고개를 팩 돌렸다.
“흥, 마음에 안 들어. 죄다!”
원래 헤르미온의 성격은 그리 곱지 못했다.
게다가 오딘에게 잘 보이려 사온 옷들이며 치장 등 모두 무용지물이 되어버린 것이다.
거기에 쏟은 노력과 애태우던 기다림이 수포가 되어 허탈함으로 돌아오니, 그녀가 이렇게 길길이 날뛰는 이유도 어쩌면 당연할 터였다.
그러나 더 큰 원인은 언제 그를 만날지 모른다는 데에 있었다.
오크인 정크가 그 광경을 보다 입을 열어 물었다.
“취익취익(왜 저러는 거지)?”
고블린 샥은 그 말을 용케도 알아들었다.
“꾸이익꾸이(원래 여자란 동물은 이상한 거야).”
엉성하기 그지없는 오크어였다. 그러나 정크는 그 말을 알아들었는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정크에게서 시선을 뗀 샥은 뒤를 보지 않았다. 혹여나 헤르미온에게서 불똥이 튀지 않을까 걱정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돌린 시선이 한 무리에게 향했다.
그들은 멈춰 서서 이쪽을 주시하고 있었다.
“마르크.”
“응?”
샥이 손가락을 뻗어 가리킨 곳으로 마르크가 고개를 돌리자 6명의 남자들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들은 모두 허리에 검을 차고 있었는데, 어쩐지 저들 중 일부의 복장은 낯이 익다는 기분이 들었다.
급작스레 마르크는 한 청년과 눈이 마주쳤다.
전에 보았던 청년이었다. 세실리를 마적단에게 넘기려던 바로 그 녀석!
크게 놀라며 마르크는 말을 더듬었다.
“카, 카반…….”
카반이라는 말에 상단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틴 역시 적잖이 놀란 기색이었다.
“저들이 왜 여기에…….”
놀람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상단의 호위 무사 하나가 더욱 떨리는 목소리로 말문을 열었다.
“저… 저자는…….”
상단 무리들 간에 웅성거림이 적지 않았다.
“누굴 말하는 거야?”
“누군데 그래?”
말을 꺼냈던 호위 무사는 파악이 쉽게 보충 설명을 늘어놓았다.
“붉은 검을 들고 있는 자 말입니다. 그가 엘룬일 겁니다.”
급해진 마르크가 나귀를 끌고 다가가 물었다.
“엘룬이라니요? 그가 누군데요?”
호위 무사는 침을 꿀꺽 삼키고 두려운 목소리로 답했다.
“저놈이 카반의 울프의 단장일 겁니다.”
마르크의 입이 벌어져 버렸다.
뿐만 아니라 상단 사람들의 입도 덩달아 벌어졌다.
틴 역시 불안한 표정이었다.
‘그게 사실이라면 큰일이다. 왜 그놈들의 우두머리가 이곳에…….’
대략적인 추측은 가능했다.
하지만 마르크는 틴이 하는 추측보다 한발 더 나아가 생각했다.
“어쩌면 우리 상단을 노리고 있는 것일 수도 있어요. 저 청년이 다 얘기를 했겠지요. 우리가 이 일에 개입되었다는 것을 말입니다. 금품을 요구할 수도 있어요. 하지만 저들의 포악함으로 볼 때, 요구를 들어준다고 하더라도 여러 사람들이 다칠 거예요.”
헤르미온 역시 걱정이 되긴 되는 모양이었다.
그녀는 제라드와 함께 온 사람들을 보았다. 전에 오딘이 데리고 있던 자들처럼 이들 또한 무사들인 듯했다.
그가 데리고 있던 무사들의 무력은 하나같이 엄청났다. 이들 또한 그럴 것이라는 생각에 헤르미온은 상황의 추이를 본 후 위협에 처하면 이들 뒤에 숨기로 마음먹었다.
오딘과 재회하기 전에 죽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별별 치사한 수를 써서라도 그때까지는 살고 봐야 했다. 죽기 전에 고백이라도 해봐야 할 것이 아닌가.
고블린 샥이 불안한 눈을 하고 소리쳤다.
“그럼 이러고 있을 게 아니라 도망이라도 쳐야지!”
틴이 고개를 저었다.
“쉬운 문제가 아니야. 나귀들이 자갈밭에서 빨라야 얼마나 빠르겠어. 또 우리만 살자고 내뺄 수도 없잖아.”
도보로 이동하는 짐꾼들이 문제였다.
또한 짐들은 어떻게 할 것인가. 저들이 짐을 노린다면 내어주고 도망을 칠 수도 있겠지만, 목적은 그게 아닌 것 같았다.
“와요!”
마르크의 외침에 헤르미온의 시선이 그를 확인했다.
정말 카반의 울프 중 세 남자가 이곳을 향해 다가오는 중이었다.
그녀는 즉각 나귀의 말머리를 틀어 두 무사의 뒤쪽으로 숨음으로써 생각을 실천으로 옮겼다.
상단 사람들은 모두 긴장한 얼굴이었다.
돌변한 분위기에 제라드는 의문을 드러냈다.
“왜들 그러는가?”
헤르미온은 고개만 내밀어 다가오는 자들을 바라보고 있다가 제라드를 흘겨볼 뿐 대답을 주지 않았다. 이 상황에서도 삐친 마음이 돌아서지 않은 것이다.
틴이 그 대답을 대신해주었다.
“저들은 카반의 울프라는 악명 높은 마적단입니다. 앞서 오딘 님과 함께 저들을 만났던 적이 있습니다. 음영대의 무사들이 저들의 본거지를 흔들어놓았는데, 당시 마적단의 단장은 그 자리에 없었습니다. 아마도 지금 그것을 확인할 모양입니다.”
이들 또한 뒷얘기는 모르고 있었다. 그러자 그 뒤에 벌어진 일을 제라드가 아무렇지도 않게 얘기했다.
“그것이라면 일부는 나도 들었네. 카반의 울프인가 하는 마적단은 궤멸된 게 아니었던가?”
“궤, 궤멸이라니요? 그때 막심한 피해를 입었다고는 하나 그건 저들 병력의 전부가 아닙니다. 카반의 울프가 얼마나 거대한 마적단인지 모르고 계신 겁니다.”
단정 짓듯 내뱉는 말에 제라드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이상하군. 자네 말이 그렇다면 내 잘못 들은 것이겠지. 한데, 저들이 그렇게 무서운 자들인가?”
“그렇습니다. 카반뿐만 아니라 로만 공국도 저들의 힘을 두려워합니다. 대륙에서 손꼽을 정도의 녀석들이지요. 비단 잔인하기 때문만은 아닐 겁니다. 음영대의 부대주님이 서열 삼 위인 녀석과 싸웠었는데, 일대일의 대결이었다면 결코 이기지 못했을 겁니다. 하물며 서열 일 위인 단장의 무력은 상상을 초월할 테지요.”
“음영부대주를 이긴 게 그렇게 대단한 건가?”
제라드를 보는 틴의 눈이 확 변했다. 대수롭지 않게 하는 질문에 놀라서였다.
‘정말 몰라서 묻는 걸까? 아니면 음영부대주의 힘을 깔보는 건가?’
의문을 못 참고 틴은 일부러 돌려서 물었다.
“보탄 백작님을 아십니까? 아시겠죠? 아레인 왕성에서 그분은 어떻습니까? 검술 실력이 말입니다.”
“보탄 백작? 그는 강하지.”
“아레인에서 제일의 검사님은 소드마스터인 보탄 백작님이 아니신지요?”
소드마스터란 단어를 강조하여 묻는 질문에 제라드는 나직이 웃었다.
“그가 강하긴 하네. 하지만 가장 강한 것은 아니라네. 그건 분명히 말할 수 있지.”
틴은 정색하고 말했다.
“그럼 이 중에 그분보다 강한 분이 있습니까?”
“없어.”
틴은 침울해졌다. 당장의 사태가 불안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가하게 얘기만 늘어놓을 시간이 없었다.
그런데도 제라드는 태평하게 엉뚱한 소리를 내뱉었다.
“저쪽에서 셋을 보냈으니 우리도 사람을 내야겠구먼. 세 명이면 세 명을 내야 하는 건가? 난 될 수 있으면 자네들이 내어줬으면 좋겠네.”
“무슨 소리를 하시는지요? 저들은 일반 마적이 아닙니다. 단장을 호위하는 녀석들이니 훨씬 강할 겁니다. 저희 전부를 내어도 승리를 장담하기 힘든 판국에…….”
그에 제라드는 환하게 웃으며 두 사람을 소개했다.
“별수 없구먼. 소개하지. 이 두 사람은 쌍귀(雙鬼)라고 하네. 오딘 님께서 이 못난 놈에게 직접 붙여 주신 자들이지. 이 둘이라면 저들과 능히 맞설 수 있을 게야.”
정말 그랬다. 제라드를 따라온 두 사람은 이들과 인사도 하지 않고 내내 침묵했다. 상단 사람들 중에 그들이 입을 여는 것을 보았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틴은 여전히 걱정을 떨치지 못하고 물었다.
“외람된 질문이지만 한 가지만 더 묻겠습니다. 저들은 음영부대주님보다 강합니까?”
제라드는 그에 가벼운 말로 질책했다.
“이 사람, 성질도 급하군. 지켜보면 알 게 아닌가.”
제라드의 명을 받은 쌍귀는 거리낌 없이 앞을 향해 나아갔다.
이쪽에서 뒤늦게 반응해서인지 카반의 울프 3인은 너무 가깝게 다가온 상태였기에 그들이 하는 말은 상단 내의 사람들에게도 모두 들릴 정도였다.
카반의 울프 중 한 남자가 먼저 입을 열었다.
“엘룬 단장님의 명령이다. 같이 좀 가줘야겠다. 너희 둘을 포함해 뒤쪽의 놈들도…….”
강압적인 태도였다.
양옆의 두 마적은 구부러진 기형 검으로 자갈들을 골라내고 있었다.
하지만 쌍귀에게서는 아무런 대답도 들리지 않았다.
그들이 벙어리라는 것을 알 리 없었기에 말을 꺼낸 마적은 당연히 기분이 상했고, 그 때문에 소리를 높였다.
“이런 쳐 죽일 놈들을 보게, 내 말이 개소리로 들리냐?”
말과 행동은 거의 동시에 이루어졌다.
그는 쌍귀 중 하나의 멱살을 움켜쥐려고 손을 뻗은 상태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옆의 두 마적은 쌍귀를 노려보며 시건방진 웃음을 짓고 있었다.
돌연 소름 끼치는 소리가 들렸다.
츄칵!
쌍귀 중 한 명의 소매를 비집고 날카로운 칼날이 튀어나와 있었다.
피를 흩뿌리며 멱살을 움켜쥐려던 마적의 팔이 허무하게 자갈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는 비명을 지르며 팔을 높게 쳐들었는데, 그때 다른 쌍귀의 허리춤에서 나온 장검이 마적의 오른쪽 다리를 잘랐다.
비명이 묘하게 변해갔다.
“크악… 끄으으으~”
한 팔과 한 다리, 그것이면 다행이었다.
마적의 몸이 균형을 잃고 무너지기도 전에 쌍귀는 서로 호흡을 맞추며 춤을 추듯 각자의 무기를 휘둘렀는데, 그럴 때마다 마적의 몸은 두 조각, 세 조각, 네 조각으로 늘어나며 결국엔 몸의 전체가 조각조각으로 잘려 바닥에 어지럽게 널려 버렸다.
쌍귀들은 각자 2개의 검을 지니고 있었다.
한 사람은 양 팔뚝에서 솟은 칼날이 주무기인 듯했고, 다른 한 사람은 짧은 검과 긴 검인 듯했다.
남은 두 마적은 이 해괴한 상황에 서로를 바라보며 놀라다가 분을 감추지 못하고 쌍귀에게 짓쳐들었다.
쌍귀 역시 그들을 마중 나갔다.
첫발을 내디딘 때와 다르게 쌍귀들의 발놀림은 점점 빨라지더니 급기야 뒤꿈치를 들고 달리기 시작했는데, 그 바람에 주위의 자갈들이 사방으로 튀겼다.
쌍귀와 마적들이 마주쳤을 때 또 한 번 잔인한 광경이 연출되었다.
마적들의 신체 일부가 떨어져 나가기 시작했는데, 그중 공중으로 떠오른 한 마적의 상반신은 양쪽에서 뛰어오른 쌍귀들에 의해 처참하게 난자당했다.
전투가 모두 끝날 무렵이 되어서야 자욱한 피보라가 걷히고 있었다.
이 모든 게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상단 사람들 중 일부는 너무 잔인한 광경에 구역질과 함께 속에 있는 것을 게워내고 말았다.
대륙을 떠돌아다니며 잔인한 광경을 봐왔던 사람들은 그나마 덜한 편이었다. 그들 중엔 마르크와 헤르미온처럼 그를 보며 비린 표정을 짓는 이들도 있었다.
제라드가 미안한 기색을 떠올렸다.
“허허, 미안하네. 그래서 웬만하면 자네들이 저들을 상대해줬으면 했다네. 이해해주게.”
그러면서 등을 두드리니 틴마저도 비위가 나빠져 헛구역질을 할 뻔했다.
그래도 그를 비롯한 상단 사람들은 다행이라 생각했다.
본인들이 죽는 것보다는 잔인한 광경을 보는 게 백배는 나을 것이므로.
눈앞의 광경은 엘룬에게 있어 충격이었다.
호위대 셋이 허무하게 세상을 하직하는 것을 보고 그는 어금니를 꽉 깨물며 잔뜩 인상을 구겼다.
그들의 처절한 죽음을 애도해줄 마음은 조금도 없었다.
이제 남은 마적은 둘. 그마저도 한 녀석은 바보나 다름없다.
나서도 본인이 나서야 한다.
그는 갈등하고 있었다.
파핀으로부터 저들이 이스론 상단의 놈들이라는 것을 듣고 본보기로 몇 놈을 괴롭혀 줄 생각이었으나 수포로 돌아간 것이다. 그것도 귀중한 녀석을 셋이나 잃고서…….
방금 본 녀석들 둘을 상대하는 것에 확신이 서질 않았다.
잔인함은 둘째 치고 그들이 실력을 전부 보이지 않은 거라면 자신은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을지도 모른다.
또한 하나 더 걸리는 게 있었다.
저 두 놈을 보낸 하얀 눈썹의 사내.
계속 그가 눈에 밟혔다.
그는 아직도 자신에게 올 테면 와보라는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도발인 것이다.
엘룬은 그가 자신이 없고서야 저런 태도를 취할 수 없다는 생각이 앞섰다.
요 근래 계속해서 좋지 않은 일만 생기고 있었다.
분을 억누르려 노력하며 주먹을 얼마나 꽉 쥐었는지 손바닥에서 피가 새어나왔다.
계속 그를 주시하고 있는데 이상 현상이 일어났다.
무언가가 엘룬의 눈에도 포착이 안 될 정도의 속도로 자갈밭을 지나갔다.
불분명한 정체가 지나간 후에는 엄청난 바람이 불어 닥쳤다. 가히 짐작하기도 힘이 들 정도의 속도라는 얘기다.
그답지 않게 멍한 얼굴로 엘룬은 멀어져 가는 존재를 바라보았다.
너무 멀어져 자신이 보는 점이 인간인지, 동물인지, 몬스터인지 좀체 구분이 가질 않았다.
저것은 엘룬이 아는 어떠한 대륙의 생명체와도 부합되지 않았다. 속도만 놓고 보았을 때도 말이다.
점이 사라진 후 그것에 정신이 팔려 있던 자신이 바보 같다는 생각이 들었던지 원 상태로 고개를 돌리려 할 때, 무엇인가가 또 스쳐 갔다.
후화악!
그것은 조금 전의 속도보다 더욱 빨라 지나간 후에 파공음을 흘릴 정도였다.
그리고 엘룬의 몸은 그 불어오는 바람을 이기지 못해 뒤로 밀려나기까지 했다.
그였으니 이 정도였다. 파핀은 뒤로 날아가 자빠져 버렸고, 남아 있던 한 마적 역시 억지로 버텨 보려 주춤거리다 뒤로 넘어졌다.
엘룬의 팔과 목소리가 부들부들 떨려왔다.
“뭐, 뭐냐? 방금 그건……?”
그러나 그가 있는 자리에는 그것이 무엇인지 대답해줄 사람이 없었다.
마르크 일행도 이 이상 현상을 목격하게 되었다.
“신기한 생물이네요. 저것들은 뭔가요?”
자신보다 세상 경험이 많은 틴에게 묻는 말이었지만, 틴은 대답해줄 수 없었다.
“나도 모르겠어.”
상단 사람들도 모르겠다는 듯 양팔을 으쓱였다.
궁금한 것은 못 참는 마르크다. 그의 눈은 곧 질문에 대답해줄 이를 찾아냈다.
확실히 다른 반응을 보이는 사람이 있긴 했다.
궁금해하는 표정이 아닌, 심각한 표정을 짓는 사람.
바로 제라드 장로였다.
“장로님은 아시는군요. 그렇죠?”
여전히 굳은 얼굴로 있는 그였지만 마르크는 자신의 의문을 풀어달라고 떼를 썼다.
“저것은 무엇입니까?”
무겁게 닫혀 있던 제라드의 입이 열리며 진실을 털어놓았다.
“오딘 님일세.”
“네?”
“오딘 님이라고 했네.”
“오, 오딘 님? 제가 알고 있는 그 오딘 님이오?”
“그럴 걸세.”
부정하려 했을까? 마르크는 은연중에 뒷걸음질을 치고 있었다. 놀람의 크기가 너무 커서 충격으로 다가왔기 때문이었다.
사람이 저런 속도로 달린다는 것부터도 믿기지 않는데, 그 가 자신이 은근히 무시했던 오딘이라고 하니 어찌 놀라지 않을 수 있을까.
“거, 거짓말…….”
제라드는 마르크가 왜 이런 반응을 보이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분께 실례라도 저질렀는가?”
순간 마르크는 우뚝 멈춰 서서 그 말을 잽싸게 부정했다.
“아, 아니요~ 그럴 리가요? 제가 그분께 어떻게 실례를 저질렀겠어요.”
미덥지 않은 대답이었다. 태도가 그를 뒷받침해주고 있질 않은가.
자신을 의심 가득한 눈초리로 보는 제라드의 시선을 피해 마르크는 식은땀을 훔쳤다.
기억을 되짚어보자 실례가 되는 행동은 많았다. 대놓고 그를 무시한 적도 여러 번이었던 것이다.
마르크는 그 원인이 오딘에게 있었다고 생각했다.
무슨 일이 생겨도 일선에 나서지 않고 항상 뒷짐을 지고 있었으니 마르크로서는 착각이 들 만도 했다.
화제를 돌리려 마르크는 재차 질문을 던졌다.
“그럼 앞에 지나간 것은 뭐죠?”
“모르겠군. 본 적이 없는 사람이니…….”
그제야 제라드의 시선이 거두어졌다.
이는 마르크가 화제를 돌려서라기보다 대상을 쫓던 오딘이 신경이 쓰였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무슨 일이 생긴 모양이로군. 오딘 님께서 저렇게 화나신 모습은 처음이네.”
느닷없이 헤르미온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오딘 님? 오딘 님이라고 했어요?”
커다란 목소리에 깜짝 놀라 제라드가 고개를 돌리자, 헤르미온이 왕방울만 해진 눈을 하고 어서 대답하라고 앙칼진 목소리로 재촉하고 있었다.
“오딘 님이라고 했냐고요.”
제라드는 당황한 모습으로 물었다.
“그, 그렇다네. 그건 왜 묻는 건가?”
“왜 묻다니요? 이상한 사람을 따라갔다면서요. 그럼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잖아요!”
“이,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라니……?”
그녀는 눈에 불을 켜고 목청을 높였다.
“오딘 님이라면서요!”
“그, 그런데?”
계속 당황하는 모습을 보이는 제라드를 향해 헤르미온은 기가 살아 제멋대로 말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오딘 님은 아레인의 하늘이라면서요. 그럼 그분의 안위는 정말 중요한 거잖아요. 당장 가서 도와야죠. 이러고 있으면 되겠어요?”
“우, 우리 일은 어쩌고?”
“지금 일이 문제예요? 자, 어서 가자고요!”
그녀가 나귀를 돌림으로써 행동에 모범을 보이긴 했지만, 제라드는 한 발자국도 떼질 않았다.
그는 철부지 같은 헤르미온을 보며 좋게 타일렀다.
“우리가 끼어들 자리가 아니라네.”
헤르미온은 볼이 부풀어 심통이 난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뭐라고요~?”
협박조의 말투. 가지 않으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의사 표시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번만은 제라드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저 정도의 속도를 낸다는 건 이미 인간의 한계를 벗어났다는 뜻이야. 나라고 해도 저 자리에 끼어들어선 별수 없을 걸세. 우리가 가보았자 하나도 도움이 안 될 거라는 얘기야.”
알아듣게 타일렀음에도 그녀는 말도 안 되는 소리로 우기기 시작했다.
“그러니 가야죠. 위험한 자라면서요. 설마 오딘 님이 잘못 되기를 바라시는 거예요?”
“그, 그럴 리가 있겠나?”
“그럼 당장 가야죠. 목숨을 내놓는 한이 있더라도 말이에요. 그게 충신 아닐까요? 설마 나라의 녹을 드시면서 이럴 때는 목숨을 아끼시는 건 아니겠죠?”
비꼬는 말에 제라드는 정색을 하며 그녀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만약 그분께서 내 목숨을 달라고 하신다면 주저 없이 드릴 걸세. 죽으라고 명을 내리신다면 미련 없이 죽을 수 있지. 하지만 우리가 가면 실이 되었으면 되었지, 득이 될 것은 없어. 그걸 알아야 해.”
이 말은 조금 억측이기는 했다.
제라드가 합세한다면 분명 도움이 될 것이다.
이는 겸손이기도 했지만, 자신을 깎아내림으로써 그녀를 설득하고자 하는 계산도 깔려 있었다.
하지만 헤르미온에게는 그 말도 들어 먹히질 않았다.
“그런 말이 어디 있어요!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는 말 몰라요? 어려울 때일수록 힘을 합쳐야죠. 자, 가요, 어서~”
말은 청산유수였다.
사실 가봤자 그녀가 힘을 쓸 일이 뭐가 있겠는가.
십중팔구 헤르미온은 호위 무사들은 죽건 말건 얼빠진 얼굴로 오딘이나 바라보고 있을 터인데…….
대신 그녀는 한 가지는 자부할 수 있었다.
오딘 대신 죽어줄 수 있는 용기, 그녀에겐 그게 있었다.
하지만 어디 그런 일이 생기겠는가.
누군가 오딘과 그녀의 명줄을 동시에 거머쥐고 ‘한 놈만 죽이겠다, 누가 죽을래?’하고 묻는 일은 없을 테니까.
제라드의 태도가 여전히 바뀌지 않아 헤르미온은 되는 대로 말을 내뱉었다.
“군주가 위험에 처했는데 보고만 있다니… 그러고도 충신이라 할 수 있나요?”
솔직히 위험에 처한 것은 아닌 듯했다.
위험에 처한 사람이 위협을 주는 대상을 뒤쫓겠는가? 제정신을 가진 사람이 그럴 일은 절대 없을 것이다.
오딘이 뒤를 쫓는다는 것은 보나 마나 한 일이었음에도 그녀는 억지를 부리고 있었다.
끝도 없는 우기기와 설득. 결국 제라드가 두 손을 들었다.
“그럼 내가 도와드리러 가보겠네. 자네들은 쌍귀 곁에 붙어 있게. 별일 없을 게야.”
그녀는 또 눈에 불을 켜고 대들었다.
“지금 장난하세요? 방금 제 말 못 들었어요?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고 했죠.”
제라드는 다른 사람들을 보았다. 하나같이 기가 죽은 모습들이었다.
게다가 그들은 되도록 내색하지 않으려 했다. 자신들이 가기 싫어하는 마음이라는 것을…….
이 중엔 이 천둥벌거숭이 같은 엘프 아가씨를 말릴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듯했다.
보다 못한 틴이 다가왔다.
“하는 수 없지 않습니까. 저희도 돕겠습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그는 전적으로 제라드와 같은 의견인 듯했다.
저런 속도로 달리는 사람. 그와 맞선다는 것은 자살 행위와 다름 없다는 것을 틴은 상단 내의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마르크도 제라드에게 다가와 귀엣말로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똥고집입니다. 저도 미치겠습니다. 장로님께서 볼기를 쳐서 말이 통한다면 좋겠지만, 볼기를 얻어맞아 궁둥이가 퉁퉁 붓는다 해도 절대 그럴 가능성이 없어요. 에휴~”
주위에서 부추기고 있음에도 제라드는 쉽게 결정을 내릴 수 없었다. 오딘으로부터 힐책을 받게 될 가능성이 농후했기 때문이다.
뜸을 들이는 동안에도 헤르미온은 그를 잡아먹을 것 같은 눈으로 노려보고 있었다.
제라드는 결국 두 손, 두 발을 다 들고 말았다.
“하는 수 없군. 대신 한 가지는 약속해주게. 절대 전투가 끝나기 전까지는 가까이 가서는 안 되네. 이 점은 꼭 지켜 줘야 하네.”
헤르미온은 작심한 듯 환한 표정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 정도야 어렵지 않죠.”
그녀 스스로 제라드의 말, 가봤자 우린 도움도 안 될 거라는 것을 우회적으로 인정하는 꼴이었다.
* * *
“쫓을까요?”
마적이 자리를 떠나는 이스론 상인 일행을 보고 엘룬에게 묻는 말이었다.
엘룬은 분노를 감당하지 못해 당장에라도 화병으로 쓰러질 것 같았다.
근래 들어 그에게 닥친 일은 죄다 안 좋은 일뿐이었다.
안하무인으로 살아온 그다.
목표한 것은 어떤 일이 있어도 얻어야 하며, 얻을 수 없다면 부수기라도 해야 했다.
모든 것을 잃고 나서 복수를 다짐했거늘 첫 출발부터 꼬여 버렸다.
죽은 마적단 셋은 그에게 있으나 마나 한 힘이 아니었다. 자질구레한 것들을 청소해줄 놈들은 필수였다.
불현듯 엘룬의 눈에 걸리는 게 있었다. 그 대상은 매우 가까운 곳에 있는 파핀이었다.
‘따지고 보면 이 녀석으로부터 시작된 게 아닐까?’
분명 파핀은 그 자신에게 유리하게 말을 돌렸었다. 하지만 지금 엘룬은 어쩌면 이 녀석으로부터 모든 일이 비롯되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품고 있었다.
“그때의 상황을 다시 한 번 설명해줄 수 있겠지?”
느닷없는 엘룬의 질문.
파핀은 그가 자신을 보는 눈빛이 예사롭지 않다는 것을 느꼈다.
심장이 폭발할 듯이 뛰고 입 안의 침이 바싹바싹 말라갔다. 그러나 여유가 없었다. 당장에 대답을 해주어야 했다.
“그분께서 마을의 처녀를 원하…….”
파핀의 얘기가 시작되기도 전에 엘룬은 말을 번복했다.
“되었다.”
나중에 추궁해도 될 일이다. 아니, 아예 죽여 버려도 될 것이다.
엘룬이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 줄은 꿈에도 몰랐기에 파핀은 겨우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그래도 가시방석에 앉은 것 같은 느낌만은 떨칠 수 없었다.
엘룬의 시선은 다시 상인 일행을 좇았다.
“아무래도 냄새가 나, 냄새가…….”
* * *
게티롱이라는 이름을 가진 중년인과 파르티잔이라는 이름의 노인, 이 두 남자가 나란히 비탈길을 오르는 중이었다.
게티롱은 산을 오르는 것이 그리 어렵지는 않았는지 이마에 살짝 땀이 묻어날 정도였지만, 파르티잔은 온몸이 땀으로 젖어 있었고, 숨이 찬지 계속해서 쌕쌕거렸다.
“멀었소?”
“조금만 더 가면 되오.”
백 걸음도 옮기지 않고 파르티잔은 재차 물었다.
“아직도 멀었소?”
“이제 금방이오.”
50보를 옮기지 못하고 파르티잔은 또 물었다.
“헉헉, 아… 직도 남았소?”
“‘곧’이오.”
파르티잔은 그의 말을 더 이상 신빙할 수 없었다.
결국 억울한 기분이 들어 걸음을 멈추고는, 안 그래도 가늘었던 눈을 더 가늘게 뜨며 그를 실쭉이 째려보았다.
“계속 금방이라더니 이제는 ‘곧’이라고? 야, 이 양반아! 처음부터 집이 멀면 멀다고 솔직하게 말해야지!”
파르티잔은 식당에서 초면인 게티롱에게 5페소라는 거금을 빌려 주었다. 게티롱은 집에 돈을 두고 왔다며 5페소를 빌려 주면 그 2배로 갚겠다고 했던 것이다.
원래의 파르티잔이라면 성에도 차지 않을 돈. 그러나 근래의 그는 궁핍했다. 5페소라는 돈조차도 크게 여겨졌던 것이다.
그걸 벌어보겠답시고 게티롱의 집으로 가기로 하였는데, 집이 산 위에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게티롱은 자신의 집이 가깝다며 같이 가자고 꼬드겼고, 당장에 파르티잔은 돈을 받아낼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기에 하는 수 없이 동행한 길이다.
그러나 지금 오르는 비탈길만 만 보는 넘었다.
평지도 아닌 가파른 산길이다. 평소 체력도 빈약한 그가 이 비탈길을 오르기란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몸에선 열이 후끈후끈 났고, 자연히 짜증은 배가 되었다.
미안한 마음이 들 만도 했건만 게티롱은 도리어 그를 다그쳤다.
“아니, 내가 돈을 더 주겠다고 했는데… 5페소가 그렇게 쉽게 버는 돈이오? 그리고 이 정도에 힘이 든다고 하면 세상에 할 수 있는 일이 없겠구려.”
감정 싸움이 치열해졌다.
“뭐가 어쩌고 어째? 이 어린놈이!”
“영감은 나이를 몇 살이나 처먹었기에 그러시오?”
적반하장도 유분수였다.
맘 같아서는 이 자리에서 요절이라도 내버리고 싶었지만, 그래서는 안 되었다. 자신의 돈 5페소와 이자로 받을 5페소가 눈앞에 어른거렸기 때문이다.
말이 너무 심했다 생각했는지 게티롱이 먼저 사과를 했다.
“미안하오, 내 말이 너무 심했소.”
파르티잔은 고개를 팩 돌리고 앉아 헛기침을 했다.
“크흠…….”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게티롱이 하염없이 앉아만 있는 파르티잔을 보며 말했다.
“안 갈 거요?”
파르티잔은 움직임이 없었다.
“오기 싫으면 오지 마시오.”
그렇게 말한 뒤 게티롱이 다시 비탈길을 오르자 파르티잔도 정색하다가 마지못해 뒤를 따랐다.
숨을 돌렸음에도 다시 숨이 가빠올 때쯤에야 드디어 평지에 다다랐다.
얼마나 높이 올라왔는지 아래쪽의 나무들이 까마득하게 보였다.
‘이게 멀지 않다고? 날 엿 먹이려는 수작이지? 두고 보자, 이 자식. 돈만 받으면 가만두지 않을 테다!’
파르티잔이 속으로 투덜거리고 있는 것도 모르고 게티롱은 팔을 쫙 펴고 길게 심호흡을 하며 탄성을 내뱉었다.
“이 얼마나 좋소? 세속에 얽매여 사는 사람들은 결코 이런 기분을 느끼지 못할 거요.”
그러고 보면 그렇기는 했다.
높은 곳을 올랐다는 성취감은 둘째 치고라도 세상을 내려다보는 기분은 꽤나 색달랐다.
“저 아래 어딘가에 그 자식도 있을 테지?”
파르티잔이 저도 모르게 내뱉은 말이었다.
그러자 게티롱이 물었다.
“그 자식이 누구요?”
“악마 같은 자식이 있소. 피도 눈물도 없는 작자지. 그 작자 때문에 내 인생이 송두리째 망가졌소. 원래 내 출셋길은 뚫려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소. 그놈이 날 수렁에 빠뜨렸지.”
“이름은 말하기 껄끄러운가 보군. 사실 나도 지옥 같은 곳에서 살다 왔소만. 아직도 그때 일이 떠오르면 자다가도 벌떡벌떡 일어나곤 한다오.”
게티롱이 아레인 왕성의 뇌옥에 갇혀 있다가 풀려난 것은 그로부터 반년도 지나지 않아서였다.
오딘은 뒤늦게 그를 수감했던 것이 착오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하는 일도 없이 밥만 축내었으므로.
하지만 게티롱은 그리 생각하지 않았다.
“내가 어떻게 풀려 난 줄 아시오?”
“어떻게 풀려 났소?”
“그들 중 누군가 그랬지. 위대한 남자를 언제까지 뇌옥에 가둬둘 순 없다고……. 그의 설파가 귀족들의 마음을 흔들었던 모양이오.”
“나더러 그 말을 믿으라는 거요?”
게티롱은 그 말에 콧방귀를 뀌었다.
“훗, 믿기 싫으면 관두시오. 영감은 날 본 것을 영광으로 생각해야 할 거요. 세상에 단 하나뿐인 영웅 게티롱을 본 것을…….”
거기서 그쳤으면 다행이었다. 게티롱은 미친놈처럼 계속 주절거렸다.
“내 직업이 뭔지 아시오?”
“뭐요?”
“해결사요, 해결사! 살면서 내가 실패한 단 한 가지 일이 있었지. 너무 막강한 녀석이 내 앞길을 막아섰소. 난 나와 대등한 힘을 가진 사람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을 처음 알았소. 놀랍더군. 하늘 아래 나와 같은 힘을 가진 사람이 있다는 게.”
파르티잔은 더 묻기도 싫었다.
‘이놈, 미친 거야? 네가 강하다고? 강한 놈이 조금 가파른 산 좀 올랐다고 숨을 몰아쉬고 삐질삐질 땀을 흘려?’
뛰어난 기사들이라면 가파른 산을 오르더라도 땀 한 방울 흘리지 않는다.
파르티잔이 누군가. 숱하게 많은 기사들과 어울렸던 마법사였다.
파르티잔이 보는 이놈은 절대 마법사는 아니었다. 그러니 더 황당한 것이다.
그냥 중얼거리든 말든 놔두려고 했는데 신경에 거슬리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오딘이라는 그놈은 수하 하나는 잘 뒀더군. 최고의 강자를 수하로 뒀으니 겁날 것도 없겠지.”
“오, 오딘??”
“그렇소.”
“그럼 당신이 갇혀 있던 뇌옥이란 게……?”
“아레인 왕성에 있던 곳이지. 난 마타하리라는 녀석과 같이 있었소.”
파르티잔의 입이 찢어져라 벌어졌다.
되도록 말을 안 섞으려고 했지만 이제는 그럴 수가 없었다.
“그럼 그가 수하로 두었다던 최고의 강자란 누굴 말하는 게요?”
“조르바, 조르바라고 하더군. 나와 동등한 힘을 가진 유일한 놈.”
당시의 기억이 떠오르자 게티롱은 투지에 물들었다.
파르티잔은 그에 대해 확신이 섰다.
‘아아, 불쌍한 녀석… 착각의 늪에 빠져 있구나. 그런 생각으로 살아서 아레인을 나왔다니… 한편으로는 대견하기도 하다.’
어쩐지 게티롱을 보는 파르티잔의 눈길이 다정해졌다.
비슷한 아픔을 공유해서인지 파르티잔은 주저 없이 자신의 얘기를 늘어놓았다.
“사실 나도 그곳에서 왔소.”
“그곳? 아레인?”
“그렇소. 원래는 유능한 마법사였지.”
말하다 말고 파르티잔은 무심결에 몸을 벅벅 긁었다.
그 모습을 보며 게티롱은 그가 몸을 긁는 이유가 오래 안 씻어서라고 생각했다. 지금뿐만 아니라 함께 있는 동안 파르티잔은 계속해서 이렇게 몸을 긁어댔던 것이다.
때문에 게티롱은 그를 불쾌하게 여기며 혀를 차며 나무랐다.
“좀 씻고 다니시오.”
“내가 안 씻어서 이런 줄 아시오?”
“그럼 뭐 때문이오?”
“이게 다 그 망할 놈 때문이오.”
“망할 놈이라니?”
“오딘 말이오, 오딘!”
그 이름이 거론되자 게티롱도 다시 인상을 찌푸렸다.
파르티잔의 부연 설명이 이어졌다.
“그놈은 쇠침을 들고 다니오. 날 찔러 죽이려는 심산인지…….”
게티롱은 궁금증이 커져 앉은 자세를 바로 하고 물었다.
“자세히 좀 얘기해보구려.”
“후우, 이 얘기를 또 해야 하나?”
상념에 젖어들며 파르티잔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파였다.
“난 사실 발데르 공작 휘하의 마법사였소. 그리고 내란이 발생했지. 당시에는 좋았지. 발데르만 바친다면 나에게 부귀영화를 모두 준다고 하였으니. 물론 난 살기 위해서는 그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소. 조르바 자작의 휘하로 들어가 양다리를 걸쳐 발데르 공작을 내어주기로 약속하지 않았다면 그 자리에서 난 죽고 없었을 거요. 한데, 조르바 자작의 성에 있을 때 이상한 놈이 찾아왔소. 검은 머리의 이방인이었지. 그게 바로 오딘이오. 그로 인해 내 인생은 꼬여 가기 시작했소…….”
파르티잔은 오딘과 어떻게 얽혔고, 왜 그에게 붙잡혔으며, 어떤 수모와 고통을 당했는지 빠짐없이 늘어놓았다.
하지만 게티롱은 그 긴 얘기를 들으면서 전혀 지겨워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오히려 초롱초롱하게 빛을 내는 눈은 지금의 얘기를 상당히 흥미롭게 받아들이고 있음이었다.
그의 말은 계속되었다.
“그렇게 살긴 싫었소. 사람이 자유로워야지, 거짓으로 손바닥을 빌어가며 비위나 맞춰주는 삶은 정말 아니지 않소?”
이해한다는 듯 게티롱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다시 파르티잔이 먼 곳을 보며 입을 열었다.
“조금만 비위에 거슬려도 그놈은 날 죽어라고 두들겨 팼소. 몇 번이나 삶과 죽음을 드나들었는지……. 결국 내가 선택한 것은 도망이었소. 그날은 운이 좋았지. 아니, 운이 없었던 것일 수도 있겠군. 차라리 잡혔더라면 그때 맞고 끝났을 일을……. 어쩌면 그놈은 날 더 괴롭히기 위해 모른 척해준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드오. 그가 날 추적해온 것을 보면 충분히 그럴 공산이 있지. 오딘, 그놈은 날 잡을 때마다 그 쇠침을 쑤셔 넣겠다고 하였소.”
“쇠침이라는 게 도대체 무엇이오?”
“길고 가는 바늘 같은 것인데, 도저히 바늘이라고는 볼 수 없소. 한 뼘 길이보다 길고 바늘보다는 두꺼우니까.”
“많이 아프오?”
“아프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오. 맞을 때는 별 느낌이 없지. 그런데 쑤셔 넣고 떠난 다음에가 문제야. 한번은 다리를 절며 불구가 될 뻔했지. 이번은 어떤 줄 아시오? 온몸에 벼룩이 기어 다니는 것처럼 근지럽소. 미치도록…….”
결국 또 부작용이었다. 오딘의 침술은 통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도 아직 남은 쇠침이 있었다. 재수가 없다면 파르티잔의 상태는 더욱 악화가 될 것이지만…….
파르티잔은 많은 말을 생략했다. 도중에 바리톤의 병력에 의해 끌려간 일이며, 더 많은 고통들을 나열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 모든 게 뇌리에 주마등처럼 스쳐 가며 괴로웠던 일들은 긴 한숨이 되어 입 밖으로 내뱉어졌다.
“후우~ 내 인생은 굴곡이 있기는 했지만 나쁘지 않았지. 오딘, 그놈을 만나기 전까지는…….”
“혹시 당신이 말한 악마라는 게 오딘이오?”
“그렇소.”
“그럼 왜 얘기를 하지 않았소? 조르바에게 오딘을 해치워달라고…….”
게티롱의 말은 그에게 너무 우습게만 들렸다.
파르티잔은 큰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하, 조르바에게 해치워달라고? 하하하하하…….”
웃음을 그치기까지 오래 걸렸다.
자신이 비웃음을 당하자 게티롱의 인상이 찌푸려졌고, 그 오해를 풀어주기 위해 파르티잔은 입을 열었다.
“당신은 크게 착각하고 있소. 조르바는 약하오. 다른 이들에 비하면…….”
게티롱이 눈을 부릅뜨며 소리쳤다.
“무슨 말이오? 조르바는 강했소! 당신은 그의 진짜 힘을 모르고 있소!”
파르티잔도 목청을 높였다.
“모른다고? 내가 한때는 그자 밑에 있었소. 왜 모르겠소? 제발 착각의 늪에서 헤어 나오시오. 다 당신을 위해서 하는 말이오.”
“그와 싸워봤소?”
“군주와 어떻게 싸우라는 얘기요?”
“흥, 싸우지 못해봤으니 진정한 힘을 모르는 것이겠지.”
억지도 이런 억지가 없었다.
파르티잔은 그에 관한 일화, 즉 조르바도 오딘에게 납치를 당하고 허드렛일이나 하게 된 동기를 들려줄까도 했지만, 그 똥고집을 꺾을 수 없을 듯하여 그냥 포기하기로 했다.
‘쯔쯧, 멍청하게 살아봐야 자기만 손해지…….’
침묵만이 흐르며 좋아졌던 분위기는 서늘해졌다.
땅에서 엉덩이를 먼저 든 사람은 게티롱이었다.
“아무튼 그가 제일 강하오. 조르바가…….”
끝끝내 우기는 게티롱을 보며 파르티잔은 그의 머리통이라도 한 대 휘갈기로 싶은 생각이 굴뚝같았지만, 참았다.
해서 좋을 게 없질 않은가.
지인도 아니고 그냥 돈을 꿔준 사람, 즉 채무자이다.
제대로 된 녀석이라면 또 모르겠지만 이렇게 자신만의 착각에 빠진 꽉 막힌 놈하고는 별로 친하게 지내고 싶지도 않았다.
두 사람은 침묵 속에 발을 내디뎠다.
나무숲이 끝날 때까지도 집은커녕 사람이 남긴 흔적조차 보이지 않았다.
속았다는 생각에 열불이 났지만 파르티잔은 꾹 참았다.
‘동지라는 생각만 안 들었어도… 후우.’
얼마를 걸었는지 몰랐다. 파르티잔은 그냥 자포자기 심정으로 그의 뒤만 졸졸 쫓았다.
슬슬 어두워지고 있었고, 급기야 파르티잔은 참아왔던 화가 폭발하고 말았다.
“이게 뭐야! 아침에 출발했는데 저녁에 도착하다니! 당신 양심이 있는 거야?”
미안하면 더 주겠다는 말이라도 했어야 했다.
하지만 게티롱은 고개를 저었다.
“저녁이 아니오.”
“저녁이 아니라니? 그런데 왜 깜깜해져?”
“내 이웃 때문에 그러오.”
“이웃?”
“그렇소. 우리 집 근방에 블랙 드래곤이 살고 있지.”
털푸덕!
파르티잔은 너무 놀라 그 자리에 넘어져 엉덩방아를 찧었다.
온몸의 진이 다 빠져나간 것 같았다.
“뭐, 뭐요? 날 왜 드래곤에게…….”
“이웃이라고 하지 않았소. 게다가 마주칠 일은 없소. 설혹 마주친다 해도 내 이웃이라는 걸 알면 그도 상관 안 할 거요.”
듣고 보니 조금 이상하긴 했다.
‘가만, 이놈은 허풍쟁이니까 드래곤이 이웃으로 살고 있다는 것도 허풍 아닐까? 아니다. 이곳은 라테우스 검은 산맥……. 드래곤이 산다고 소문이 난 곳이다. 지금의 기류도 심상치 않질 않은가. 그렇지 않으면 대낮에 이렇게 깜깜해질 리는 없으니까. 그럼 드래곤이 이놈을 모르는 게 아닐까? 스스로 착각의 늪에 빠져서 살고 있는 놈이니 그럴 가능성이 크겠군.’
우선 드래곤이 있다는 말은 사실인 듯했다. 가면 갈수록 어두워져 급기야 앞이 안 보일 지경에 이르렀으므로.
어둠 속에서 파르티잔이 게티롱을 찾았다.
“이보시오~”
대답이 없다.
“이보시오, 게티롱 양반.”
또 대답이 없자 한편으로 자신이 속았다는 생각이 들었던지 파르티잔은 씩씩거렸다.
“흥, 내가 숨으면 못 찾을 줄 알고?”
빠르게 마나의 재배열을 마친 파르티잔은 기본적인 마법을 발현시켰다.
“라이팅(Lighting:조명)!”
곧 주위가 눈에 띄게 환해졌다.
오른쪽 길에서 게티롱이 그 빛을 느끼고 돌아보며 물었다.
“뭐요? 그건?”
“주위를 밝게 해주는 마법이오.”
파르티잔은 하마터면 그와 영영 이별을 할 뻔했다. 방향이 전혀 달랐던 것이다.
괜히 민망해진 파르티잔은 걸음을 서둘러 그와의 거리를 좁혔다.
걸어도, 걸어도 제자리인 듯했다.
어둠은 너무도 길게 펼쳐져 있었다. 그나마 빛이 있었기에 그를 따라갈 수 있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그 빛이 훅 꺼졌다.
파르티잔은 의아했다. 자신이 실수를 하여 꺼진 것이겠지 하고 다시 마법을 캐스팅했다.
“라이팅!”
다시 불이 들어왔다.
그러나 세 걸음도 걷지 않아 또다시 훅 하고 꺼지자 게티롱도 그를 의아하게 여기기 시작했다.
“허허, 이거 왜 이러지? 이제 난 마법사로서의 삶도 접어야 하는 걸까? 라이팅!”
다시 밝아졌다. 이번에도 역시 꺼지지는 않았다.
“하하, 그러면 그렇지. 이보슈, 내가 아레인에서 꽤 유명한 마법사였소. 오딘, 그놈도 내 마법 실력이 뛰어나다고 인정하곤 했지.”
맞장구라도 쳐 줘야 뒷얘기를 할 게 아닌가.
불빛에 비친 게티롱은 자신의 말을 들었는지 말았는지 멍하니 입을 벌린 채 굳어 있었다.
“미안하오. 본의 아니게 눈에 피로를 주었군. 원래 실수를 안 하는데 오늘따라 이상하네.”
그때, 파르티잔의 머리 위쪽에 있는 거대한 존재로부터 질문이 들려왔다.
[재미있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