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황 카르만
실내 분위기는 비교적 평온한 느낌을 주었다.
넓은 공간에 잘 정리되어 있는 가구며 브라운 색의 커튼과 은은한 빛을 발하는 샹들리에까지…….
그런데도 쿤은 안절부절못하는 중이었다.
쿤과 오딘은 막스마라 대신관의 저택에 남게 되었다. 이는 철저히 오딘의 고집 때문이었다.
벌써 며칠째인가. 날이 갈수록 쿤의 초조함은 더해졌는데, 그 이유는 바로 성황의 행차 날이 다가오기 때문이었다.
결국 그의 행차를 하루 앞둔 시점에서 쿤의 불안함은 폭발하고 말았다.
항변은 외침이 되어 터져 나왔다.
“안 돼요! 안 된다고요!”
팔락.
책장이 넘어가는 소리.
테이블에 앉아 독서 삼매경에 빠져 대꾸도 없는 오딘을 보며 쿤은 더욱 당차게 소리를 높였다.
“함정일 수도 있잖아요! 여기 남으시면 아무리 오딘 님이라고 해도…….”
“시끄럽구나.”
오딘의 눈은 시종일관 책을 향해 있었다.
비록 그 한마디에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지만, 불만이 가득 차서인지 쿤의 입은 한 발이나 나와 있었다.
그를 의식한 오딘이 타일렀다.
“불안하면 돌아가거라.”
“누, 누가 불안하다던가요? 다만, 기왕 복수를 할 거라면 더 힘을 모으자는 얘기입니다.”
오딘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단지 그뿐이었다.
다시 자신에게서 눈을 떼고 책을 보는 오딘을 보니 쿤은 한숨이 앞을 가렸다.
‘내가 어쩌다가 저런 사람과 함께해가지고……. 힘은 있지만 고집이 여간 센 게 아니야. 가만, 그러고 보니 그 여관에 오딘 님도 함께 계셨었다고 했는데… 그때 도움을 받았다면 리먼 아저씨는 돌아가시지 않았을 테지? 소드마스터의 팔라딘을 이기는 무력을 지니고 계시니…….’
그때를 기억하니 많은 아쉬움이 남았다.
회상은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불안함이 다시 달음박질쳤기 때문이다.
쿤은 오딘을 불만 가득한 눈초리로 바라보며 속으로 혀를 끌끌 찼다.
‘너무 안하무인이시네요. 오래는 못 사시겠습니다. 겁을 상실하셨잖아요. 아무리 소드마스터라도 그렇지… 세상에 소드마스터가 오딘 님 혼잔 줄 아십니까? 예? 예?’
실컷 속으로 비꼬고 나니 할 게 없어졌다.
답답하고 짜증이 나서 밖으로 나가 소리라도 치고 싶었지만 그것도 불안했다. 저들이 가만히 두겠는가?
쿤이 죽인 것은 아니지만 대신관이 총애하는 팔라딘들이 죽었다. 자연히 곱지 않은 눈초리로 볼 것이었으며, 재수가 없다면 인질로 잡힐 것이다.
오죽하면 매끼 식사에도 의심을 품고 오딘이 음식을 입에 댄 후 멀쩡한 것을 확인하고서야 먹질 않았는가.
본래 쿤은 죽는다는 것을 극도로 겁내지는 않았다. 다만 허무하게 인생을 마감하고 싶지는 않았을 뿐이다.
쿤은 성황이 이곳으로 온다는 것을 믿을 수도 없었거니와 만약 그렇다 해도 많은 호위들을 이끌고 올 것이라 생각했다. 그 호위 중에는 소드마스터인 팔라딘이 섞일 가능성도 높다. 다른 자도 아니고 성황의 행차이니 말이다.
하지만 지금 오딘이 하는 행태로 보아서는 누가 오건 몇 사람이 오건 간에 막말에 내키는 대로 행동할 것 같았다. 그것이야말로 자살 행위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반감을 가지고 쿤은 꼼꼼히 따져 보았다.
‘만일 내가 오딘 님을 버리고 간다면? 어차피 난 있어도 도움도 안 되는데……. 그런데 저들이 과연 날 그냥 보내줄까? 분명 아닌 척하면서 쫓겠지?’
더 생각하기도 싫었는지 쿤은 고개를 탈탈 털었다.
그때, 태평하게 독서만 하던 오딘이 신기한 내용이라도 발견한 듯 입을 열었다.
“호오, 여기 네가 있구나.”
“네?”
오딘은 그 부분을 읽어나갔다.
“블러드 엘프. 머리색이 빨갛고 귀가 뾰족하다.”
그것은 쿤의 종족이 맞았다. 그러나 그게 어쨌다는 말인가? 이미 쿤의 종족, 블러드 엘프에 대한 지식은 대륙에 걸쳐 넓게 깔려 평민들도 아는 이들이 많았다. 그를 신기하게 받아들이는 오딘이 쿤은 한심하기만 했다.
“보통의 엘프들과 다르게 소수로 이뤄져 있는 이들은 대개 성격이 난폭하고 직선적이다.”
설명을 듣던 쿤이 버럭 화를 냈다.
“누가 난폭하다는 말입니까?”
“여기 그렇게 쓰여 있구나.”
쿤은 오딘이 자신을 놀리려 하는 말인 줄 알고 벌떡 일어나서 그에게 다가갔다.
그가 보고 있는 책은 쿤이 봐왔던 책과는 달랐다.
책장이 매우 고급스러웠는데, 그것만 보더라도 아무나 쉽게 구입할 수 있는 책은 아닌 듯했다.
오딘은 뒷얘기를 이어나갔다.
“그중 극히 일부의 블러드 엘프는 베일에 싸여 있다. 브리제의 피를 이어받은 자들이 그러하다. 그들은 감히 인간의 머리로는 따라갈 수 없는 지식을 보유하고 있으며, 스스로 깨우치며 진화한다.”
블러드 엘프인 그로서도 처음 듣는 얘기였던지라 쿤은 멀뚱멀뚱 오딘이 읽어가는 부분을 훑어볼 뿐이었다.
그는 자신이 브리제의 피를 이어받은 엘프라고는 추호도 생각지 않았다. 그저 대륙에 흩어져 사는 블러드 엘프 중 한 명이라고 생각했을 뿐…….
* * *
화기애애한 분위기였다.
말을 타고 가는 사람들은 만면에 미소를 띠었으며, 도보로 그들을 따라 이동하는 병력들 또한 흐뭇한 얼굴이었다.
말에 탄 사람들의 일부는 흰 사제복을 입고 있었고, 또 일부는 매우 두꺼운 은색의 중장갑주를 걸치고 그것과 마찬가지 색인 투구까지 쓰고 있었다.
구성원 모두를 합하면 족히 50명에 이르는 적지 않은 행렬이었다.
그들의 신경은 온통 앞쪽의 대상들에게 쏠려 있었다.
한 청년과 한 소녀.
청년은 언뜻 보기로 병자 같았다.
창백하게 질린 얼굴은 매우 희었고 핏기조차 없었다. 뿐만 아니라 단식이라도 행했는지 볼이 쏙 들어가 광대뼈가 두드러진 모습이었다.
반면에 붉은 머리칼의 소녀는 11살 정도의 건강해 보이는 매우 귀여운 아가씨였다. 귀가 매우 길고 뾰족한…….
이들의 신분은 천지 차이였다.
창백해 보이는 얼굴의 청년은 나이시스 신성 제국의 성황인 카르만이었고, 귀여운 소녀는 그의 시녀였다.
처음 보는 이들이 만일 둘의 관계를 안다면 절대 이해하지 못할 상황이었다.
시녀와 성황이 말 머리를 나란히 한 채 나아가고 있으니 말이다.
소녀가 낭랑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성황 폐하는 또 그 옷이군요.”
꾸짖는 듯한 말투였다.
그러나 당사자는 전혀 기분 나쁜 내색을 하지 않았다.
그는 자조적인 웃음을 지을 뿐이었다.
“지겹지도 않으세요? 더 편하고 좋은 옷이 많이 있는데도 왜 꼭 그 옷을 고집하시는 거예요?”
성황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
소녀의 눈이 소매 끝자락을 응시했다.
“그 옷에 묻은 피는 빨아도 빨아도 지워지지 않던걸요?”
비단 그뿐이 아니었다.
20년은 지난 옷. 그런데도 해지지 않았다.
만약 소녀가 이 옷이 그렇게 오래된 것을 알았다면 놀라 까무러쳤을 것이다.
아무리 좋은 원단을 사용하고 대단한 재봉사를 고용하여 만든 옷이라 해도 계속 입고 다닌다면 원래의 상태를 유지할 순 없다. 그럼에도 옷이 멀쩡한 이유는 성황의 신성력이 깃들어 있기 때문이었다.
카르만에게 이 옷은 너무 중요한 사연이 있는 옷이었지만, 그가 알려 주지 않았으므로 소녀가 그 사연을 알 리 만무했다.
고로 소녀는 때도 지지 않는 옷을 뭐가 좋다고 입고 다니는 것인지 불평을 하곤 했다.
소녀는 시녀였지만, 신분의 차이를 넘어 카르만의 말동무 또한 되어주었기 때문이다.
카르만은 그런 소녀를 무척이나 아껴 주었고, 그로 인해 주위에서 소녀를 혼내거나 간섭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덕분에 소녀는 점점 기가 살아 자신의 본분을 잊어버린 채 성황 카르만에게 시시때때로 잔소리를 늘어놓기까지 했다.
주객이 전도되었다고 해도 무리가 아니었다.
널따란 초원에 이르렀을 때, 곁에 있던 성기사단장이 말들의 허기를 달래주려 카르만을 종용했다.
“말들에게 풀을 좀 먹일까 합니다.”
카르만이 고개를 끄덕이자 대열이 멈췄다.
여러 사람들이 분주해졌지만, 엘프 소녀 메이와 카르만은 예외였다.
메이가 한 일이라고는 나무 그늘을 찾아 카르만을 안내하고 그가 앉을 자리에 방석을 깔아주는 일뿐이었다.
카르만은 말들이 풀을 뜯어먹는 모습과 푸르디푸른 언덕을 바라보며 흡족한 표정을 떠올렸다.
그러나 메이는 그에는 관심이 없는 듯 뜬금없는 말을 꺼내었다.
“그분은 욕심이 많아 보여요.”
지금 그녀가 거론하고 있는 대상은 다름 아닌 추기경이었다.
불과 2년 전, 메이는 신성 제국의 신전에서 성녀 노릇을 해보려다 성격이 괴팍하다는 이유로 쫓겨나고 말았다.
당시 그녀는 대신관과 함께 그곳을 방문한 카르만의 환심을 사게 되었는데, 카르만의 눈에는 메이의 하나하나가 마음에 쏙 들었던 것이다.
뜻하지 않게 시녀로 들어오게 되었지만 그에 대해 그녀는 불평하지 않았다. 말만 시녀지 그녀가 하는 일의 대부분은 다른 시녀들이 떠맡았기 때문이다.
그녀가 하는 일이라면 카르만의 빨래와 방 청소, 그리고 식사 때가 되었음을 알리는 정도였다.
할 일이 없고 카르만과 오래 하는 시간이 많아지다 보니 말을 섞는 기회도 많아졌다.
급기야 그녀는 일상적인 것들뿐만이 아닌, 사사로운 것까지 화두로 꺼내 얘깃거리로 들고 나왔다.
물론 방금 툭 꺼내놓은 말처럼 무거운 얘기도 오갔다.
그렇게 느끼는 이는 메이만이 아니었다.
말을 않했을 뿐이지, 대놓고 욕심을 드러내놓고 잇속을 챙기기 바쁜 추기경을 그 몰래 질타하는 소리는 넘쳐 날 정도였다.
그에 대하여 성황에게 이렇게 직언을 하는 사람도 분명 메이 혼자였다.
카르만은 자애로운 웃음을 지었다.
“네 눈엔 그렇게 보였구나.”
메이는 대답도 않고 고개만 끄덕였다.
하지만 걱정을 담아 얘기한 메이와는 다르게 카르만은 그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듯했다.
메이는 그것이 답답했다.
“간단히 넘기실 문제가 아니지 않나요? 그분은 신성 제국 안에서 권력을 가진 사람들을 자기편으로 만들기 위해 사비를 털어서까지 노력한다고 들었어요.”
하지만 카르만의 표정엔 도통 변화가 없었다.
걱정도 되질 않는지 그는 여전히 미소를 드리운 채 웃는 얼굴이었다.
메이는 속이 탔다. 신성 제국의 성황이란 분이 이렇게 물러 터져서 되겠느냔 말이다.
결국 메이는 그를 계몽해주기로 마음먹었다.
“제 말 잘 귀담아들으세요. 그분이 힘을 모으려는 것은 성황 폐하의 자리를 탐내고 있기 때문이라고요. 나중에 가서 후회하지 마시고 돌아가시면 꼭 말씀하세요.”
“뭐라고 하면 될까?”
메이는 똑 부러지게 답했다.
“그러지 말라고 하세요.”
“내 말을 안 들어주면 어쩌지?”
“음, 그럼… 그럼…….”
메이 역시 차선책은 잘 떠오르지 않는 모양이다.
“따끔하게 혼을 내주어야겠지?”
그 말을 들은 메이는 손뼉을 짝 하고 쳤다.
“그래요, 그러시면 돼요.”
그러나 곧 그녀는 카르만을 미심쩍은 눈으로 바라보았다.
한없이 나약해 보이는 그의 대답이 영 미덥지 않은 것이다. 할 수 있을까란 의문이 드는 것은 당연했다.
카르만은 한층 더 밝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 일은 걱정 마렴. 추기경이 그럴 리는 없을 테니까.”
“또, 또…….”
메이는 불만이었다.
카르만은 항상 모질지 못한 마음 때문에 결정을 번복하고는 했다. 그것도 그녀가 보는 앞에서 말이다.
놀리려고 그러는 것인지, 진짜 그러는 것인지 아직도 메이는 알지 못했다.
그녀는 어렸기에 아직 황성 내의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자세히는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오늘은 따끔하게 훈계라도 하려는 작정인지 그녀는 양쪽 허리에 살포시 접은 주먹들을 올려 두고서 입을 열려 했다.
돌연 그녀의 배 속에서 가냘픈 소리가 들려왔다.
꾸루루룩.
“훗.”
카르만은 실소를 흘렸다.
그러나 메이의 진지한 얼굴은 거두어지지 않았다.
지금은 배고픈 게 문제가 아니었다. 하지만 말할 시간은 주어지지 않았다. 언제 다가왔는지 모를 성기사단장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까처럼 불평하는 것은 상관없다 하지만 훈계는 안 될 것이다.
그녀가 아무리 무(無)개념이라지만, 그 정도의 개념은 가지고 있었다.
성기사단장이 카르만에게 물었다.
“폐하,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가까운 곳에 얼마 전 들어선 마을이 자리하고 있다고 합니다. 식사를 하시고 가시겠습니까?”
카르만은 귀여운 메이에게서 시선을 떼고 생각할 필요도 없다는 듯 답했다.
“그러는 게 좋겠어.”
이들의 목적지는 막스마라 대신관의 저택이었는데, 그곳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식사를 하고 가겠다는 것은 배가 고픈 메이에 대한 배려였다.
풀을 뜯어먹으러 갔던 말들이 서서히 돌아오며 메이는 훈계를 할 기회를 아예 잃고 말았다.
그래도 언젠가는 그녀 자신이 남들 보는 앞에서도 그에게 바른 소리를 할 수 있는 날이 올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마을 어귀에 다다랐을 때, 그들은 한 남자와 마주쳤다.
막스마라 대신관의 경호를 책임지고 있는 팔라딘 타론이 그였다.
타론은 말에서 뛰어내리기 무섭게 한쪽 무릎을 굽히며 예를 올렸다.
“신 타론, 위대하신 성황 폐하를 알현하옵니다.”
카르만은 어렵지 않게 그를 알아볼 수 있었다.
“타론 경, 오랜만이네. 안 그래도 조금 있으면 도착할 텐데 고맙게도 마중을 나와 주었군.”
“성황 폐하, 미천한 신이 영접을 나온 것은 맞사옵니다. 하지만 그 전에 긴히 드릴 말씀이 있사옵니다.”
카르만은 의아한 낯빛을 띠었다.
곁에 있던 성기사단장 메르타도 무슨 일이 있다는 직감이 들어 타론을 예의 주시했다.
“드릴 말씀이라니?”
“저택에 변고가 일어났사옵니다. 불청객이 난입하여 팔라딘 세 명이 목숨을 잃었사옵니다. 그자는 엠팔레스 신전의 칼슨 수도원장을 인질로 데려왔사온데, 뭔가 복잡한 사연이 있는 듯합니다. 그리고 무엄하게도 성황님을 만나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메르타는 확 인상을 구겼다.
하지만 카르만은 의외라고 생각했을 뿐, 경계심을 곤두세우진 않았다.
“말해보게. 그자의 이름이 뭐라고 하였나?”
타론은 뜸들이지 않고 대답했다.
“오딘이라고 하옵니다.”
“오딘?”
“그렇사옵니다.”
메르타는 성황의 시선이 자신을 향했음을 알아채고는 즉각 답했다.
“신은 모르는 자이옵니다.”
카르만의 기억에도 없는 이름이었다.
“나도 모르겠어.”
예외적인 상황에 메이는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말려야겠어.’
그녀 나름의 충심이 발동한 것이다.
가지 말라고 하려고 했는데, 이번 역시 늦어버렸다.
카르만의 입이 먼저 열려 버린 것이다.
“날 만나기를 기다리고 있다니 가봐야겠지. 얼굴을 보면 알 수도 있을 테니까.”
그리 말하고 카르만은 다시 메이를 바라보며 뒷말을 이었다.
“우선 식사부터 하고…….”
* * *
철문은 활짝 열려 있었다.
막스마라 대신관의 저택 내의 사람들은 곧 다가올 이들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모두가 경건한 마음 자세를 하고 있었다.
후원에 있을 오딘과 쿤, 단 두 사람을 제외하고는…….
오딘의 존재는 이 자리에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불편함과 불쾌함이 되었다. 그중 더러는 불안한 마음까지 가지고 있었다.
대신관은 오딘과 성황의 대면을 약속했기 때문이다.
성황의 경호에 만전을 기한다지만, 혹여 잘못될까 우려를 하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그들 대부분은 성황이 오랜 젊음을 유지하는 이유가 단지 신성력 덕분이라고 여겼다.
그들이 아는 성황 카르만은 공식 석상에서 힘을 자랑하는 일이 없었고, 직접 그를 알현한 사람들은 그가 보통의 철검 하나도 휘두르질 못할 것이라 판단했다. 키가 작은 것은 아니었지만, 그의 체구는 너무 말라 초라할 정도였다. 그러니 걱정이 되는 것이다.
주신 아스카론 다음으로 그들이 떠받드는 존재가 바로 성황이다.
이들 중에 신성 제국의 상징과도 같은 존재가 잘못되기를 바라는 이는 없었다. 그리고 제일 앞에 서 있던 막스마라 대신관 역시 그 마음은 같았다.
하지만 그는 저들 같은 걱정은 하지 않았다.
‘네 오만함은 여기서 끝날 것이다. 네놈이 얼마나 대단한 놈인지는 모르겠다만 성황님께는 발끝에도 미치질 못할 것이다.’
성황의 진짜 힘을 알고 있는 사람은 오직 그뿐이었다.
평소였다면 성황의 알현을 앞두고 대내외적인 상의거리들을 머릿속으로 되뇌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그의 머릿속은 불청객에 대해 올릴 말들을 정리하고 준비하는 중이었다.
또각또각.
멀리서 말발굽 소리들이 들려왔다.
성황 카르만과 성기사단장, 메르타 그리고 시녀 메이가 선두에 있었다.
곧 영접이 이루어졌다.
말이 멈춰서고 성황과 메이, 성기사단장이 올라 있던 말에서 내리자, 저택에서 나와 대기하고 있던 마부들이 재깍 다가와 그들이 타고 있던 말을 데리고 갔다.
대신관을 비롯해 이곳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경건한 마음 자세로 무릎을 굽히며 고개를 숙였다.
“성황 폐하를 알현하옵니다.”
“되었네, 일어들 서게.”
카르만은 그들 모두를 찬찬히 살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막스마라 대신관에게 눈을 두었다.
막스마라 대신관은 긴장했는지 굳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의 뇌리에 성황의 말이 들려왔다.
[날 보고 싶다고 한 남자가 있다고 들었다.]
통신 마법이었다.
대신관 역시 입을 여는 대신 그의 머릿속으로 말을 전했다.
[그러하옵니다. 신이 무능하여 일이 이 지경이 되었습니다.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탓할 생각은 없어. 그자에게 안내해.]
한 남자가 등을 보이며 뒷짐을 진 채 초목을 바라보는 중이었다.
그 옆으로는 한 소년이 손톱을 물어뜯어가며 초조함을 보이고 있었다.
후원을 찾은 사람들은 총 다섯이었다.
막스마라 대신관과 팔라딘 타론, 그리고 성황 카르만과 성기사단장 메르타, 시녀 메이가 그들이었다.
이 중 메이의 눈은 자신과 같은 머리 색깔의 엘프 소년에게 향했다.
그를 눈여겨보며 카르만이 웃음을 머금었다.
“너와 같은 종족인 모양이구나.”
그러나 메이는 별로 달갑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저 의아해하는 눈빛, 그뿐이었다.
어찌나 긴장했던지 쿤은 동족을 보면서도 별 생각을 가지지 못했다.
그는 도리어 막 당도한 사람들을 주시했다.
그러나 막연하게 걱정했던 것과는 달리 성황으로 추측되는 마른 체형의 남자는 그리 강해 보이지 않았다.
‘괜한 걱정을 한 건가? 그래도 확실히 하는 게 좋겠어.’
쿤은 마나를 재배열해 뷰 마나 포스를 시전하려 했다.
그 순간, 누군가의 뜻이 쿤의 머릿속에 들려왔다.
[쓸데없는 짓은 하지 말거라. 너한텐 용무가 없다. 괜히 긁어 부스럼을 만드는 일은 없도록.]
지레 놀라 쿤의 몸이 경직되어갈 무렵, 막스마라 대신관과 성황 카르만이 지척에 다다랐다.
막스마라는 성황의 뒤쪽에 삼 보의 거리를 두고 멈춰 서서 침묵했다.
카르만은 아직까지 자신에게 시선도 주지 않고 있는 오딘을 향해 조용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날 찾았다고? 용건은?”
성황의 태도에는 위엄이 깃들어 있지는 않았다.
본래 카르만은 신성 제국의 신민이나 추기경 보기를 동일시했다. 신분이 낮다고 하여 깔아보는 시각은 없었던 것이다.
다만 지금 그의 표정은 마치 송장 같았는데, 메이를 대할 때와는 천양지차였다.
카르만을 향해 돌아선 오딘은 잠시 대답을 미루고 그의 얼굴만을 주시했다.
카르만 역시 말이 없었다.
두 사람 사이에 이상한 기류가 느껴졌는지 쿤은 목을 감싼 채 기겁을 하며 뒤로 물러섰다.
분명 두 사람 사이에는 아무 일도 없었다.
그러나 오딘은 낮게 웃고서 대뜸 칭찬을 늘어놓았다.
“제법이로군.”
그나마 근처에 있던 막스마라 대신관도 지금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한 번도 이런 광경을 접해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서 있는 카르만에게서 등을 돌린 오딘은 다시 초목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앞서 카르만이 물었던 질문에 대한 답을 들려주기 시작했다.
“광인 중에 잘 아는 녀석이 있지. 사연인즉슨, 미친놈에게 가족을 잃었다고 하더군. 그게 한으로 남았던 모양이야. 그를 견디지 못하고 그놈 역시 결국 미쳐 버렸지.”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냐?”
“그 가족에게 본 좌가 약속한 게 있느니라.”
카르만은 진지한 표정이었다.
“…….”
“원인 제공자인 미친놈을 잡아 제정신으로 돌려주겠다는 약속이었다. 다시 말해…….”
여기까지 얘기한 오딘은 돌연 몸을 돌렸다. 그리고 입가에 사악한 미소를 걸치며 이죽거렸다.
“네놈의 영혼을 가져가겠다는 말이다.”
“영혼을… 영혼을 가져가겠다? 내 영혼을……?”
카르만은 꽤나 심각한 표정이었다.
그러나 그 표정은 조소로 바뀌더니 이내 광소가 되어 터졌다.
“하하하하! 하하하하하!”
그는 좀체 웃음을 주체할 수 없었다. 그 까닭에 후원에 있는 사람들은 다급히 귀를 틀어막아야 했다.
터지는 목소리는 사람의 것이 아닌 오우거, 아니 그보다 더 흉포한 몬스터에게서나 터져 나올 법한 크기였던 것이다.
웃음을 그쳤을 때 카르만의 눈은 얼음처럼 싸늘해졌다.
반면에 그의 심장은 요동치는 파도 같았다.
카르만은 목에 걸린 펜던트를 들어 덮개를 열었다. 그러자 눈부신 빛이 그의 시선을 사로잡으며 평온을 안겨 주었다.
조금은 진정이 되었던지 그는 길게 심호흡을 하고서 말했다.
“심장이 폭발하려고 하는군. 이럴 게 아니라 장소를 옮기지.”
둘의 연배는 비슷해 보였다.
오딘과 카르만, 그들은 닮은 구석이 있었다.
내면에 잠자고 있는 사악함과 광기가 그러했다.
그러나 카르만이 목에 걸려 있던 펜던트를 거칠게 뜯어버렸을 땐 상황이 달라졌다.
“이 녀석이 날 제어하지. 기분 나쁘게 말이야. 물건이 감히 사람의 정신을 지배하려 든단 말이야.”
카르만은 부들부들 몸을 떨었는데, 얼굴은 쾌감이라도 느끼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목소리 또한 더욱 거칠어져 심한 괴리감마저 던져 주었다.
“흐흐… 너… 너도 가면 안 돼…….”
그가 가리키는 대상은 다름 아닌 쿤이었다.
먼저 자신의 상대인 오딘을 죽이고 쿤마저 죽이겠다는 얘기다.
막스마라 대신관은 그런 카르만을 가엽게 바라보다가 그가 떨어뜨린 펜던트를 주워들었다.
그러자 죽일 듯한 시선으로 그를 향해 카르만이 갈라진 목소리로 소리쳤다.
“떨어져 있어! 죽기 싫으면!”
“분부를 따르겠습니다.”
막스마라까지 멀리 거리를 두고 나서야 카르만은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아니, 마음껏 폭주할 수 있게 되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오딘과 카르만, 쿤과 막스마라 대신관 이렇게 넷뿐이었다.
그는 타인에게 자신의 마성을 드러내는 것을 극도로 꺼렸는데,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그냥 제국도 아닌 주신을 섬기는 신성 제국이었기 때문이다.
겉으로나마 그들이 표방하는 것은 선과 자애였다.
그러니 이 일이 밖으로 알려진다면 카르만의 입장은 꽤나 난처해질 것이다.
카르만의 이런 모습을 아는 사람은 현재 5명도 채 되질 않았다. 그중 하나가 여기 있는 막스마라 대신관이었다.
그는 결단코 이 일을 알리지 않겠노라고 다짐했다.
하지만 그 외에 그의 마성을 목격한 이들은 신분 고하를 막론하고 죽임을 당했다.
바리톤 왕국의 백작 리먼처럼…….
공연히 쿤은 리먼 생각이 났다.
그의 마성을 발견하자 울분이 치솟아 두 주먹이 불끈 쥐어졌다.
‘내게 힘이 있었다면… 그랬다면 아저씨의 원수에게 보기 좋게 한 방 날려 줬을 텐데…….’
아직도 쿤의 몸은 떨림이 멎질 않았다.
그가 발하는 마성은 일대를 공포로 몰아넣기에 충분했던 것이다.
눈앞의 대상은 신성 제국이 아니라 마계에나 어울릴 법한 자였다.
카르만의 얼굴은 점점 더 흉측해졌다.
눈이 가늘게 찢어지며 안면 근육도 제멋대로 뒤틀렸다.
고르던 이빨과 손톱은 날카로워져서 마치 짐승의 그것을 연상케 했다.
또한 입은 초승달 모양으로 벌어지며 사악한 미소와 함께 손에는 언제 뽑았는지 모를 검이 들려 있었다.
장식용으로 보이던 고급스러운 보검이 예기를 발하기 시작했는데, 그 빛은 잔인할 정도였다.
쿤은 커다란 바위 뒤에 숨어 그 검을 유심히 보며 조용히 중얼거렸다.
“마, 마검인가?”
너무 멀리 떨어져 들리지도 않을 크기였건만, 카르만은 그에 대한 대답을 던져 주었다.
“크큭, 그래. 원래 마왕의 것이라더군. 이걸 가지고 있던 마족을 죽여서 빼앗았지. 나와 아주 잘 맞는 녀석이야.”
정말 둘은 닮아 보였다. 생김새가 아닌 분위기가…….
카르만 주위의 풀 잎사귀들이 바람이 분 것도 아닌데 흔들렸다.
오딘은 그 현상을 어렵잖게 해석할 수 있었다.
몸 안의 기가 팽창하다 못해 넘쳐 밖으로 흐르는 까닭일 것이다.
스르릉!
흑룡검이 검갑을 빠져나오며 부드러운 소리를 내뱉었다.
오딘의 흑룡검과 카르만의 마검이 서로를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았다.
두 검은 마나를 집어넣은 것이 아닌데도 패도적인 기운을 발했다.
땅에서 먼저 발을 뗀 건 오딘이었다.
검을 길게 늘어뜨린 채 그는 경계심도 없이 카르만을 향해 걸어갔다.
반면에 카르만은 사악한 미소를 걸친 채 쏜살같이 파고들었다.
다섯 보 정도의 거리만이 남았을 뿐이다.
삽시간에 카르만의 검이 길어지더니 치렁치렁한 오러 블레이드가 빛을 발했다.
오딘 역시 검에 기를 불어넣었다.
그러자 흑룡검에서 불쑥 솟은 오러 블레이드에서는 이채가 일었다.
한껏 비튼 어깨가 휘둘려지며 카르만의 검이 오딘의 목을 향해 번쩍였고, 오딘은 그의 검을 예의 주시하고 있다가 한순간에 후려쳤다.
흑룡검과 마검이 부딪치며 굉음이 터졌다.
콰차창!
카르만의 몸이 균형을 잃고 비틀거렸다.
동시에 체중을 싣고 있던 오딘의 오른발 역시 한 자가량 밀려났다.
“힘은 괴물이로구나.”
거짓을 담고 있지 않은 오딘의 칭찬이었다.
반면에 카르만은 그를 칭찬해줄 생각이 전혀 없는 듯했다.
조금 전의 엄청난 힘이 그의 자존심을 건드렸기 때문이다.
단 한 번의 격돌로 인해 카르만의 표정에서 여유가 걷혀 버렸다.
그는 더 이상 웃지 않았다.
주눅이라도 들게 하려는 것인지 안면 근육을 구기며 험한 인상을 지을 뿐이었다.
“네놈!”
멀리 있던 쿤은 한껏 인상을 찌푸리며 다급히 귀를 틀어막았다.
하지만 이미 늦은 조치였다.
충격이 적지 않았는지 오른쪽 귀에서는 피가 흘러내렸다.
멈춰 있던 그에게 이번엔 오딘이 다가갔다. 마찬가지로 큰 걸음이었다.
석 자는 뻗은 흉흉한 오러 블레이드가 카르만의 몸을 덮쳤다.
카르만 역시 검을 들어 막았지만, 오딘에게선 계속하여 맹공이 퍼부어졌다.
검과 검이 맞부딪치며 땅을 울렸다.
쾅! 콰창! 파캉!
카르만은 오딘의 검을 막기 급급했다.
그리고 교묘한 그의 발놀림에 계속 앞을 내어주며 뒤로 밀려나고 있었다.
열이 받은 머리에선 김이라도 피어오를 것 같았다.
그렇게 검을 50번이나 섞었을까? 카르만은 오딘의 검로가 따로 정해져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예를 들어 가슴을 2번 노리고 들어온다면 그다음은 다리를 베려 한다.
이는 초식의 기초였다.
그 같은 사실을 깨우친 뒤 힘껏 그의 검을 쳐내어 밀어내었을 때, 카르만은 환희에 물들었다.
“크큭, 그랬었군, 그랬었어.”
오딘이 물었다.
“뭐가 그랬다는 거지?”
카르만은 실성한 사람처럼 킥킥대며 웃다가 오딘을 비꼬았다.
“단순한 놈.”
다 알아챘다는 얘기다. 검이 어느 쪽을 노리고 어떻게 들어온다는 것을…….
카르만은 지금 제정신이 아니었다.
극한 흥분 상태에 펜던트를 떼어버림으로써 마성을 증가시켰으니 인간이라기보다는 마인에 가깝다고 보아야 했다.
따라서 성황이었을 때의 위엄과 무게감도 이미 사라진 상태였다.
그리고 이는 시간이 흐를수록 더해져 언뜻 볼 때 그의 얼굴은 마치 인간이 아닌 듯했다.
뚝 웃음을 그친 카르만은 당장에 승리를 거머쥘 것처럼 중얼거렸다.
“네놈의 공격 패턴을 다 읽어냈단 말이다.”
오딘은 어이가 없었다.
그가 하루 이틀 무공을 익혔다면 지금 그의 말이 맞을 수도 있다. 하지만 수십 년을 익힌 무공이다. 여태 익힌 초식이 하나만 있을 리 없질 않은가.
또한 초식은 변형이 가능하다.
하도 기가 차서 오딘은 멍청한 말을 하고 있는 카르만을 나무랐다.
“미쳐도 단단히 미쳤군.”
그 말을 참지 못해 다시 카르만이 오만상을 찌푸리고 달려들었다.
또 한 번의 접전이 펼쳐졌다.
마검과 흑룡검이 부딪치는 바람에 풀 잎사귀가 거센 바람을 맞은 것처럼 흔들렸고, 심한 경우에는 주변의 땅이 이유 없이 푹푹 꺼지기도 했다.
약간의 시간이 흐르자 카르만은 또다시 뒤로 밀리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럴 때마다 그는 더욱 화를 주체 못하는 얼굴이 되었다.
“왜… 왜 다른 거야? 아까랑 왜 다른 거지?”
본래의 그였다면 속으로 할 말이었지만, 이성이 온전치 않으니 생각이 고스란히 입 밖으로 흘러나왔다.
그러나 오딘은 그에 대해 일언반구도 언급하지 않았다. 미친놈에게 말해줘서 무얼 하겠는가.
지금 오딘이 보인 검술은 간단한 초식에 그저 실초와 허초를 섞은 것에 불과했지만, 최고수가 펼치는 것이었기에 그 둘을 구분하기란 여간 어렵지가 않았다.
기어코 카르만의 안면에 검풍이 불어 닥쳤다.
치익-!
살갗이 찢어지며 붉은 피가 튀었다.
이어서 오딘의 무게감이 실린 패검이 카르만의 마검을 강하게 때렸다.
콰쾅!
흡사 폭발이 일어난 것 같았다.
카르만은 큰 걸음으로 다섯 보폭이나 밀려나 땅에 무릎을 대고 말았다.
덩달아 고개까지 숙여졌다.
수치였으며 치욕이었다.
성황으로서의 자존심이 아닌 카르만의 자존심, 그것이 무너져 내렸다.
오딘은 바로 접근하지 않고 그를 실망스런 눈초리로 바라볼 뿐이었다.
카르만은 볼에서 흐르는 피를 닦고는 혀를 길게 빼어 손바닥에 묻은 그 피를 핥았다.
이윽고 고개를 서서히 든 그는 괴기스런 미소를 흘리고 있었다.
조금 전보다도 강맹해진 기운에 오딘은 도리어 입꼬리를 치켜 올렸다.
“재미있는 녀석이로구나.”
카르만은 거칠어져 있었다.
검으로 땅을 찍고 일어서서 오딘을 노려보는 눈은 매우 탁했다.
그는 섣불리 달려들지 않았다.
그 자리에 선 채 휘두른 검에서는 오러가 줄기줄기 뿜어져 나왔다.
곡선을 그리며 날아오는 오러. 그 사이를 질풍같이 파고들며 오딘은 흑룡검을 휘둘렀다.
카르만 또한 호락호락하진 않았다.
그가 휘두른 마검이 흑룡검과 쾅 하고 부딪쳤다.
조금 전이었다면 몇 발자국은 밀려났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카르만은 자신의 힘이 더 강해졌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정색한 카르만의 얼굴, 그리고 여전히 사악해 보이는 미소를 드리우는 오딘의 표정은 상당히 대조적이었다.
오딘은 마구잡이로 검을 휘둘렀다.
두 사람의 근처에 있는 풀이 이유 없이 잘려져 나갔고, 땅은 푹푹 파여 갔다.
여태 봐주기라도 했던 것일까? 오딘의 공격은 한층 거세졌다.
처음엔 카르만은 한 발자국도 물러나지 않고 그 자리에서 막아댔지만, 점점 힘에 부치는 것을 느끼며 분함을 달랠 수 없었다.
치익.
풀이 잘리는 소리가 아니었다. 카르만의 상의 일부분이 너무도 날카로워진 흑룡검의 검풍에 찢겨지는 소리였다.
그 소리는 카르만의 분노를 최절정에 이르게 했고, 패도적인 기운이 그의 마검에서 뿜어져 나와 검을 마주친 오딘은 두 발이나 물러서야 했다.
비로소 오딘의 표정이 굳어졌다.
카르만의 얼굴은 아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더 험상궂어졌다.
얼굴에 깔린 검은 그림자와 시뻘겋게 충혈된 눈은 마치 피에 젖은 것 같았다.
“씹어 먹어버릴 테다!”
색깔만 없었을 뿐이지 그의 입에선 아지랑이까지 피어오르고 있었다.
분이 열기로 화한 것이다.
다시 격돌한 두 사람이 너무도 빨리 움직이는 까닭에 쿤은 더 이상 뭐가 뭔지 모를 정도였다.
그때, 그런 그에게 막스마라 대신관이 소리 없이 다가가고 있었다.
쿤은 전투에 너무 눈이 팔려 그를 알아채지 못했다.
막스마라는 오딘의 힘이 저 정도이리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혹시 성황이 위기에 처한다면…….
그 생각이 그를 불안하게 만들었고, 결국 비열한 수를 쓰려는 마음을 먹게 만든 것이다.
뒤를 점하고 이제 손만 뻗으면 쿤을 사로잡을 수 있었다.
그 순간, 바로 뒤에서 오딘의 타이름이 들려왔다.
“죽고 싶으면 마음대로 해봐.”
깜짝 놀라 막스마라가 뒤를 바라보았을 때 그는 기절초풍할 뻔했다. 오딘의 모습이 잔상을 남기고 서서히 사라지고 있지 않은가.
하지만 그는 분명히 저쪽에서 성황과 치열하게 싸우고 있을 터였다.
온몸의 털이 쭈뼛쭈뼛 서는 것 같았다. 귀신을 봤다는 느낌이었다.
‘사람이 두 개가 될 리 없다. 저자는 도대체 뭐란 말이냐?’
방금 전의 상황은 막스마라에게 커다란 공포를 안겨 주었다.
오딘이 보여 준 것은 이형환위였다.
너무 빠른 나머지 잔상을 남기는 것인데, 지금 두 사람이 격돌을 보이는 곳에서 이곳까지의 거리는 족히 30보는 떨어져 있었다.
그 같은 무공을 안다 하여도 믿지 못할진대, 모르기 때문에 더욱 기겁을 할 수밖에 없었다.
‘마법일까? 아니다. 저런 마법이 있었던가? 내가 본 서적 어디에서도 지금 그가 보인 저런 건 없었다. 저자가 과연 사람이란 말이더냐?’
대신관이 이런 생각을 하는 동안, 쿤은 그가 바로 옆에 와 있다는 사실에 깜짝 놀라 자리를 이동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카르만은 힘이 부치는 것을 느꼈다.
그를 증명이라도 하듯 이마에는 땀이 맺혔고, 흡수하는 마나보다 빠지는 마나가 많았다. 이대로라면 얼마 못 가 쓰러지고 말 것이다.
진작부터 승부는 정해져 있었다. 성황이 아무리 기를 쓰고 덤벼도 오딘을 꺾지 못하는 이유는 힘의 차이에 있었다.
다시 말해 오딘은 모처럼 실력이 뛰어난 녀석을 만나 이 상황을 조금 더 즐기기 위해 실력의 전부를 보이질 않은 것이다.
성황의 몸에 자잘한 자상들이 생기기 시작하며 옷은 피로 얼룩졌다.
흑룡검은 상대를 잡아먹기라도 할 것처럼 날뛰는 반면에 카르만의 마검은 기가 죽어 있었다.
급기야 카르만은 온 힘을 팔에 실어 마검을 휘둘러 오딘의 흑룡검을 밀쳐 내고는 달아나기 시작했다.
달리는 속도가 어찌나 빨랐던지 이미 카르만은 저 멀리 점이 되어가고 있었다.
오딘은 그를 바로 쫓을 수 없었다. 남겨진 것이 있기 때문이다.
쿤에게 고개를 돌리려는 도중 잠시 막스마라 대신관과 눈이 스쳤다.
막스마라는 모골이 송연해지는 것을 느끼며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머릿속이 텅 빈 것 같았다. 절대적인 힘이라 치부하던 카르만이 감당하지 못할 힘이다. 자신이라고 무슨 뾰족한 수가 있겠는가.
다행히 오딘은 그에게 더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돌연 오딘의 몸이 사라졌다.
막스마라가 황당해하며 고개를 두리번거렸을 때 원래 있던 자리에서 희미하게나마 그를 발견할 수 있었는데, 한 팔로 쿤을 들어 옆구리에 낀 상태였다.
그들의 모습은 점점 멀어져 갔다.
막스마라는 진이 다 빠졌는지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아버렸다.
그의 입에서 나지막한 탄식이 흘러나왔다.
“주신이시여, 어찌하여 저희에게 이런 시련을 주시나이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