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신관의 저택으로 (35/67)

대신관의 저택으로

엠팔레스 신전의 수도원장인 칼슨의 눈은 시퍼렇게 멍이 들어 있었다.

그뿐 아니라 온 얼굴이 퉁퉁 불어 있는 상태였다.

거대 신전을 책임지고 운영하던 칼슨은 하루아침에 이런 신세로 전락해버렸다.

그의 몰골은 매우 초라했다.

얼굴은 꾀죄죄했으며 먼지를 뒤집어쓰기라도 했는지 옷은 지저분하기 이를 데 없었다.

모닥불을 피워둔 덕에 추위는 덜했지만 커다란 상실감에서 헤어 나오질 못했다.

다 큰 어른이 울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은 쉬이 목격하기 힘든 것이었다.

진귀한 구경이 될 것이었음에도 쿤은 그에게 눈을 돌리지 못했다. 대신에 그는 앞에 앉은 오딘을 보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어기, 오딘 님.”

“왜 그러느냐?”

“저 사람을 풀어줘야 하지 않을까요?”

그 말에 칼슨의 부운 귀가 쫑긋 솟았다.

그러나 오딘은 신경 쓰기도 싫은지 답을 주지 않았고, 쿤은 조바심을 못 이기고 계속해서 그를 보챘다.

“물론 저도 오딘 님께서 그런 힘을 가지셨을 줄은 몰랐습니다. 오판했던 것 인정합니다. 저도 마스터는 한 번도 보질 못했거든요. 들은 것이 전부라……. 그런데 지금 일은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닌 듯합니다. 저 사람은 신성 제국에서 몇 안 되는 커다란 신전의 주인이나 다름없다고요. 납치는 오딘 님과 저만의 일로 끝나지 않고 국가와 제국 간의 일로 비화(飛火)될 수 있습니다. 하오니 다시 한 번 생각해주시면…….”

오늘 일이 있고 나서 쿤은 태도에 변화를 보였다. 오딘을 대하는 모양새가 사뭇 달라진 것이다.

물론 당사자는 그를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오딘은 쿤의 제안을 간단한 말 한마디로 묵살할 뿐이었다.

“그럼 저놈을 없애면 되지 않느냐. 증거를 없애면 그만인 것을.”

듣던 칼슨은 기겁을 했다.

둘의 대화를 더 이상 모르쇠로 일관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어후, 살… 뤄 주십시오. 살뤄만 주신다면 훼… 돼한 협도하겠… 숩니다(살려 주십시오. 살려만 주신다면 최대한 협조하겠습니다).”

퉁퉁 불어 발음도 제대로 되지 않는 입으로 칼슨은 하소연을 하기 시작했다.

정말 그는 자신을 죽이지만 않는다면 최대한 협조할 용의가 있었다.

절박한 그를 보면서도 오딘은 푸념을 했다.

“무슨 말인지 도통 못 알아먹겠군.”

다급한 나머지 칼슨은 두 손과 두 발로 모닥불 근처로 기어오더니 연거푸 머리를 땅에 찧어가며 자비를 구했다.

말을 못 알아듣겠다니 행동으로 보이는 것이다.

그럴수록 쿤의 안색은 초췌해졌다.

오딘이 그의 얼굴색을 살피더니 말했다.

“이 녀석도 믿질 못하겠다는 표정이군.”

칼슨은 실눈으로나마 쿤을 째려보았다.

정의감만은 무척이나 뛰어난 쿤이다. 하지만 리먼의 죽음에 연관 없는 사람까지 미워할 순 없는 노릇이었다.

그를 대신해 쿤이 항변했다.

“그럴 리가요. 전 믿어요. 이 사람을 해치면 안 됩니다.”

다시 오딘이 물었다.

“왜지? 네 말대로라면 이놈은 후환으로 남을 것 같은데 말이야. 위험한 싹은 미리 잘라버리는 게 낫지.”

물론 당장엔 그럴 생각이 없는 듯했다.

아직 칼슨이라는 이 녀석은 죽어서는 안 되었다. 그 문제의 대신관이 있는 곳까지 안내를 해주어야 하므로.

“으허헝.”

칼슨은 절규했다.

죽음이 두렵기도 했을 뿐 아니라 그에게 자신의 삶은 너무나도 소중한 것이어서 차마 버릴 수 없었던 것이다.

그의 말투가 계속 귀에 거슬렸던 나머지 오딘은 손짓으로 쿤을 불렀다.

엉겁결에 다가오기는 했지만 쿤이 오딘을 대하는 모습은 여전히 조심스러웠다.

“예?”

“저 녀석을 치료해다오.”

의외의 말에 쿤은 반기면서도 기분이 떨떠름했다.

그가 치유되면 자신 따위는 언제든 위험에 빠질 수 있기 때문이다.

내키면서도 내키지 않는 일이었다.

지금 자비를 베풀어준대 봤자 그가 자신들을 좋게 생각해줄 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도 시키는 일이고 이 사람한테 미안한 감정이 앞섰던지 쿤은 마나를 재배열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법이 캐스팅되기 전에 오딘은 주의를 주었다.

“입만…….”

“네?”

“입만 치료하란 말이다. 저놈 목소리가 영 귀에 거슬리는구나.”

칼슨은 서러웠다. 자신이 언제 이런 대접을 받아봤던가.

그러나 일단 그가 자비를 베풀어준다는 데에서 약간의 희망을 찾았다.

이미 한 번 크게 데었던 터라 그의 신경에 거슬릴 행동은 안 하리라 다짐을 한 터였다.

희미하게 빛나는 쿤의 손이 칼슨의 입에 장시간 머물렀다.

‘도대체 몸이 얼마나 상한 거지? 입만 치료하는 데에도 마나가 끊임없이 소모되잖아……. 오딘 님은 정말 무서운 분이구나.’

그의 몸 전부를 치료할 요량으로 모아뒀던 마나의 3분의 1이 입 주변을 치료하는 데에 소모되었다.

입만 치료가 되어서인지 칼슨은 해괴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누군가 지금 그의 얼굴을 본다면 마족으로 오인하고도 남으리라.

후들거리는 몸, 탱탱 부푼 눈꺼풀을 억지로 치켜뜨고서 칼슨은 오딘을 주시했다.

말 한마디라도 안 놓치려는 것이다.

싸늘한 표정으로 오딘이 물었다.

“네놈은 풀어주면 복수를 꿈꾸겠지?”

칼슨은 소리가 나도록 고개를 흔들었다. 강한 부정이었다.

그러나 치명적인 실수를 하고 말았다. 급한 나머지 대답조차 하질 않은 것이다.

“말하는 것도 귀찮은가 보군. 본 좌가 그렇게 우습게 보이더냐?”

사악하게 웃는 얼굴이었다.

칼슨은 질겁하며 여러 번 고개를 흔드는 행동을 반복했다.

“아, 아닙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가만히 그를 직시하다가 재고해볼 일말의 가치도 없다고 생각했는지 오딘은 시선을 거뒀다.

그 모습에 칼슨은 더욱 절박해졌다.

“믿어주십시오! 저 한번 약속한 일은 어긴 적이 없습니다. 절 풀어주시더라도 결단코 그럴 일은 없을 것이옵니다!”

“그 말을 어떻게 믿지?”

너무 맞아 뇌 기능이 저하되었는지 칼슨은 쉽사리 그 내용을 증명할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다시 입이 떨어지길 기다리는 것에 싫증이라도 느꼈던 걸까?

오딘은 앉은 자세 그대로 먼 하늘을 올려다보며 나지막이 말했다.

“귀찮아.”

다시 그에게 관심을 두지 않으려는 것 같았다.

바로 그때 칼슨은 그나마 괜찮은 말을 생각해냈다.

“절 죽이십시오. 행여 그런 일이 생긴다면 다시 절 찾아와 죽이시면 되질 않겠습니까? 당신은 충분히 강하시니 그럴 수 있습니다.”

너무 빠르게 말해서인지 칼슨의 입에서 튄 침이 쿤의 얼굴을 더럽혔다.

오는 도중 물 한 방울 못 마신 그였다. 자연히 침에서 단내가 날 수밖에.

불쾌함에 쿤은 비죽 입술을 내밀고 소매로 얼굴을 훔쳤다.

오딘은 물끄러미 칼슨을 훑어보았다.

“네놈 따위를 죽이러 본 좌더러 귀찮게 또 걸음을 하라는 것이냐?”

“그,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그럼 어찌하면 되겠사옵니까?”

말투가 극존칭으로 탈바꿈하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오딘은 아무런 감회도 못 느끼는 듯했다. 그는 여전히 불평을 늘어놓을 뿐이었다.

“참 귀찮은 녀석이로구나. 내 그런 것까지 신경을 써야 한다니… 네놈은 죽어 없어지는 것이 편할 듯하다.”

칼슨은 어찌할 바를 몰라 하면서도 계속해서 자비를 구했다.

“그분이 계신 곳을 가르쳐 드리겠다고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제발 자비를 베풀어주소서.”

“그로 인한 자비는 이미 베풀어주었지 않느냐. 네놈을 죽이는 것은 그놈을 찾은 후가 될 것이니라.”

말인즉슨 그때까지 살려 주는 것을 감사하게 생각하라는 의미다.

칼슨은 속으로 그럼 안 가르쳐 주겠다고 버티면 어떨까란 생각을 품었다.

그러나 그 생각은 지극히 위험한 생각이었다.

만에 하나 그랬다간 또 한 번 지옥을 경험해야 할 것이다. 어쩌면 병신이 되어 평생을 불구자로 지내야 할 수도 있었다. 그가 가하는 구타란 범인들의 상식을 뛰어넘는 것이었으므로.

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는 계속 목숨을 구걸하는 길뿐이어서 칼슨은 애원하고 또 애원했다.

“제가 최대한 협조하겠습니다. 언제든 부르신다면 달려가겠습니다. 신전에서의 일은 모두 없던 일로 할 터이니 살려 주십시오.”

가늘게 비치는 그의 눈동자에는 정말 충성과 복종의 기미마저 엿보였다.

그때서야 오딘은 태도를 바꿨다.

“그렇게까지 나온다면야 어쩔 수 없군. 대신 약속의 징표로 손가락이라도 받아야겠어.”

급기야 칼슨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 버렸다.

‘이자는 사람이 아니다. 지옥 불에서 뛰쳐나온 마귀이거나 악마다. 어찌 인간이 저리도 사악할 수 있다는 말이냐? 왜 그걸 이제야 알았을까? 나도 참 어리석었구나. 미련하게 악마와 대적할 생각을 했다니…….’

그가 자괴감에 물들어 있을 무렵, 오딘이 품에서 한 자루의 비수를 꺼냈다.

보는 것만으로도 베이는 아픔이 느껴질 만한 비수였다.

진짜 손가락을 자르려는 생각인지 칼슨에게 다가가는 오딘을 보며 쿤이 흥분한 목소리로 물었다.

“저, 정말 자르시려고요?”

오딘은 모호한 표정으로 웃었다.

“안 되느냐?”

쿤은 뭐라고 대답을 해야 좋을지 몰랐다.

무럭무럭 자라나는 공포심은 칼슨의 머리를 다시금 땅에 붙이게끔 만들었다.

“제발! 제발 자비를 베푸소서!”

그 말은 오딘의 신경을 거슬렀다. 목소리가 너무 컸기 때문이다.

“시끄럽다! 또 한 번 소리를 지른다면 발가락까지 자르겠다.”

칼슨은 재빨리 입을 닫았다.

겁에 질려 부들부들 떠는 몸을 주체하지 못하는 그의 팔목이 오딘의 손에 덥석 잡혔고, 손바닥은 강압적으로 바닥에 밀착되었다.

비수가 달빛을 받아 더욱 시린 빛을 발하며 그의 손가락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끄어어…….”

비명이 아니었다.

울음도 아니었다.

신세를 한탄하는 소리였으며, 두려움에 물든 소리였다.

천천히 내려서는 비수를 보며 칼슨은 게거품을 물기 일보 직전이었다.

비수는 살에 닿자마자 손가락의 살을 벌렸다. 그러자 살 틈에서는 붉은 피가 흥건하게 배어나왔다.

조금 있으면 뼈가 잘리게 될 것이다.

욱신거리는 고통보다도 앞으로 사라질 손가락의 상실감이 더 큰 아픔으로 남아 칼슨의 가슴을 아리게 했다.

그러나 다행히도 비수는 뼈를 자르지 못했다. 비수의 주인이 손을 거뒀기 때문이다.

오딘은 똑똑히 경고했다.

“아까 했던 말 기억하겠다. 하지만 네 충성이 빈약해 보인다면 언제든 그 두 가지를 회수해갈 것이니라.”

“그 두 가지라면…….”

“손가락과 발가락 말이다.”

“네, 네. 그리하셔도 됩니다. 그럼은요.”

살집이 벌어진 손가락은 쿤에 의해 치유가 되었다.

그렇게 칼슨은 두려움 속에 밤을 맞이하고 있었다.

* * *

얇은 가죽 옷을 걸친 남자가 유난히 덩치가 크고 이빨이 날카로운 도베르만 2마리를 끌고 저택 주위를 배회하는 중이었다.

도베르만의 사나움은 주인의 표정과 매우 닮아 보였다.

늦은 시각이었음에도 저택의 수백 개의 방 중 예닐곱의 방에는 불이 켜져 있었다.

평온하기 그지없는 분위기였지만, 저택 안의 경계는 삼엄해서 쥐새끼 한 마리도 얼씬하지 못할 듯했다.

외부의 침입자를 먼저 발견한 것은 도베르만을 끌고 다니던 보초였다.

“누구냐!”

그의 목소리는 그리 크지 않았다. 대신 그 소리에는 충분한 위협이 녹아 있었다.

도베르만의 목줄을 든 왼손은 그대로였지만, 오른손은 어느새 허리춤에 있는 검 자루에 가 있었다.

2마리의 도베르만 역시 외부의 침입자를 향해 컹컹 짖어대는 중이었다.

워낙에 덩치가 큰 녀석들이라 줄만 풀어놓아도 침입자 중 덩치가 작은 소년 정도는 깔끔히 먹어치울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때, 오해(?)를 풀기 위해 한 사람이 나섰다.

“날 모르겠나?”

나선 사람은 다름 아닌 칼슨. 엠팔레스 신전의 수도원장이다.

외부의 정찰을 담당하던 보초는 능히 그를 알아볼 수 있었다.

“칼슨 수도원장님이 아니십니까? 한데, 이 늦은 밤중에 무슨 일로…….”

그는 같이 있던 두 사람에게서 벗어나 재빨리 보초의 등 뒤로 숨었다.

“나, 날 좀 살려 주게.”

보초의 눈이 치떠졌다.

그것도 잠시, 그는 곧 칼슨과 함께 있던 소년과 청년에게 적대적인 시선을 보냈다.

“네놈들은 어디서 온 놈들이냐!”

카랑카랑한 목소리는 도베르만들의 신경을 더 날카롭게 했다.

당장에라도 두 사람을 물어뜯을 기세로 두 도베르만은 앞으로 뛰어나가려 했다.

보초로서도 더 줄을 붙들고 있는 것은 무리라고 생각했던지 손에 쥔 줄을 놓았는데, 예기치 않은 상황이 발생했다.

도베르만들은 왜인지 모르게 기가 죽어 있었다.

컹컹 짖어대던 소리가 끙끙 앓는 신음 소리로 바뀌었고, 급기야는 뒷걸음질까지 치며 보초의 뒤로 숨어버렸다.

도베르만과 침입자들을 번갈아 바라보던 남자는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사자와 싸워도 이길 녀석들이다. 그런 녀석들이 사람을 겁낸다는 것은 이해 못할 일이었던 것이다.

그때 뒤쪽에서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슬리핑(Sleeping:잠들다)!”

눈을 감았을 때 느끼는 기분. 그 기분이 도베르만을 데리고 있던 보초를 지배했다.

스르르 온몸에서 힘이 풀려 나가는 기분을 느끼며 그는 밤이슬에 젖어 축축해진 바닥에 몸을 뉘었다.

시전자는 칼슨이었다.

눈을 감으면서도 보초는 의문을 감추지 못했다.

“무, 무슨…….”

도베르만들은 살기로 그윽한 오딘의 눈을 보고 더 겁을 먹었고, 급기야 잠들어버린 주인을 놔두고는 깨깽거리며 줄행랑을 쳐 버렸다.

칼슨은 비굴한 얼굴로 오딘에게 다가왔다.

“하하, 정리가 된 듯합니다. 이제 안쪽으로 들어가시면 될 것 같습니다.”

친절하게 손으로 방향까지 가리키고 있었지만, 칼슨은 오금이 다 저렸다.

대신관들은 황궁과 저택에 주로 머무르는 편이었지만, 개인의 성까지 소지하고 있었다. 그중 경계하는 인원이 가장 적을 거 같다고 생각되는 쪽은 저택이었으나 그는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다른 저택도 아니고 대신관의 저택이다. 무서운 자들이 넘쳐 날 것이다.

오딘은 재촉하듯 말했다.

“안내해라.”

칼슨은 사실 들어가기 싫었다.

그러나 그가 대신관의 얼굴을 모른다고 하였기에 하는 수 없이 따를 수밖에 없었다.

문득 잊고 있던 게 떠올랐는지 칼슨은 오딘을 향해 기다려달라는 요구를 하고서 잠이 든 보초에게 다가갔다. 그리고는 품에 감춘 단검을 꺼내들어 그 심장에 박았다.

피가 그의 얼굴까지 튀었다.

쿤이 그 광경을 보며 이맛살을 찌푸렸다.

“신을 모시는 분이 살인을 서슴지 않는군요.”

“저도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하하.”

칼슨은 쿤을 탓할 생각이 없었다.

앞으로도 그럴 생각이었다. 만약 녀석을 잘못 건드리면 오딘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저택으로 향하기 전, 칼슨은 뜻을 분명히 했다.

“여기까지는 제가 힘을 보탤 수 있었지만, 지금부터 전 철저한 포로입니다. 약속은 꼭 지켜 주십시오.”

오딘은 고민도 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저택의 입구를 향해 앞장서 걸어가면서 칼슨은 회의에 빠졌다.

‘왜 내가 이런 길로 들어서게 되었을까?’

막막한 심정이었다.

단지 재수가 없었다고 생각하기에는 일이 너무 커져 버렸다.

이 일이 성공하리라는 보장은 없다. 또한 만약 성공한다 하더라도 자신이 무사할지에 대해서는 장담할 수 없었다.

모든 증거를 인멸할 수도 없거니와 설혹 그렇게 한다손 치더라도 이곳에 저 둘을 데리고 온 책임은 피해갈 수 없기 때문이다.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나아가다가 칼슨은 저택의 경비와 마주쳤다.

“대신관님을 뵙고 싶네.”

경비 역시 그의 얼굴을 알고 있었다. 하나, 의문을 지울 수는 없었다.

“칼슨 수도원장님께서 이 늦은 밤에 웬일이십니까?”

“급히 의논해야 할 일이 있어서 들렀네.”

경비의 눈이 뒤쪽의 두 사람, 오딘과 쿤을 직시했다.

“저 둘도 함께입니까?”

“그렇다네.”

경비는 칼슨의 얼굴에 어두운 그늘이 깔려 있다는 것을 발견하지 못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안에 들어가 말씀을 올려 달라고 전하겠습니다.”

즉각 돌아서 저택으로 달려가는 경비를 보고 칼슨은 한숨을 쉬었다.

“후우.”

걱정이 커졌기 때문이리라.

남아 있던 경비가 그 한숨 소리를 의식하고 그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혹 편찮으신 데라도…….”

칼슨은 당황해하며 손을 휘저었다.

“아, 아닐세.”

오래지 않아 말을 전하러 갔던 경비가 저택의 집사와 함께 돌아왔다.

집사는 그를 알아보고는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칼슨 수도원장님이시로군요. 오랜만입니다.”

“오랜만일세.”

형식적인 인사에도 칼슨의 말투에는 긴장이 묻어났다.

집사는 돌연 난색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불은 켜져 있으나 이미 잠이 드신 모양입니다. 주무실 곳을 안내해드리겠습니다. 급하신 일이 아니라면 밤이 늦었사오니 오늘은 그곳에서 주무시고 내일 아침에…….”

“아니, 급한 일이야.”

칼슨이 아닌 그의 뒤쪽에 있던 오딘의 말이었다.

집사는 초면인 셈이다.

예절을 갖추지 않은 말을 듣고 아니꼬운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던 집사의 귀에 대고 칼슨은 작게 속삭였다.

“하하, 집사가 좀 이해해주게. 저분께서 말을 좀 거칠게 하시네. 나도 말하기가 좀 어려울 정도라네.”

잠깐 동안 집사는 생각에 잠겼다.

그가 어렵다고 생각할 정도의 사람이란 누구일까에 대해서…….

‘모르겠군. 엠팔레스 신전의 수도원장께서 저리 말씀하실 정도면 하여간 대단한 사람이기는 한 모양이군.’

집사의 불쾌한 감정이 채 가시기도 전에 다시 오딘의 입에서 명령조의 말이 툭 내뱉어졌다.

“잠이 들었으면 깨워. 나도 그렇게 한가한 사람은 아니니까.”

더는 참아줄 수 없어 집사는 신경질적으로 몸을 돌려 저택 근처로 돌아갔다.

그리고 곧 네 사람이 그와 함께 걸어 나왔다.

모두 팔라딘이었는데, 그들을 보는 즉시 칼슨의 얼굴은 사색이 되었다. 예사 인물들이 아니었던 것이다.

탁탁탁!

칼슨은 전속력으로 달려 나가 집사의 소매를 잡고 항변했다.

“도, 도와주시오! 저 사람이 날 납치해 이리 끌고 왔소.”

그의 시선이 향한 곳에 청년, 아니 오딘이 서 있었다.

칼슨은 눈으로나마 그에게 자비를 구했다.

‘당신이 이래도 된다고 했으니 할 뿐이오. 난 포로니까…….’

차라리 그는 이 자리에서 오딘이 제거되기를 바랐다.

그럼 집사에게 뇌물을 먹여 입을 닫게 만들 수도 있고, 혹 대신관의 귀에 이 말이 들어간다 할지라도 힐책 정도면 끝날 일이었다.

재수가 없다면 파면을 당하겠지만…….

그래도 좋았다. 적어도 목숨은 건질 수 있질 않은가.

스스로 최선의 판단을 내렸다고 생각한 칼슨은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막 시작될 싸움에 시선을 빼앗겼다.

집사는 그에게 동정의 시선을 보내면서도 한편으론 탓을 하고 있었다.

엠팔레스 신전의 수도원장이나 되는 사람이 입이 무겁질 못하여 대신관의 저택에 불청객들을 끌어들였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바로 시선을 거두었다.

전투의 경과를 지켜본 후 혹시 일이 잘못될 때에는 차선책을 내려야 했기 때문이다.

물론 그럴 리는 없다고 믿었다.

이 네 사람, 특히 가장 오른쪽에 서 있는 타론이라는 팔라딘은 굉장히 뛰어난 실력을 가졌으므로.

팔라딘들 역시 기사의 성질과 많이 닮아 있었다.

그들은 되도록 정의로워 보이길 원했기에 한 사람을 여러 사람이 상대하는 것은 비겁하다 여겼다.

그래서인지 한 성기사만이 나섰다.

“배짱도 좋군. 여기가 어디라고…….”

검집을 빠져나가는 소리가 흘러나오지 않았는데도 그의 손에는 이미 잘 벼린 검이 들려 있었다.

그러나 상대 쪽에선 아무런 응답도 들리지 않았다. 고개를 옆으로 기울이며 팔라딘은 소년을 보았다.

“거기, 엘프 꼬마도 싸울 생각인가?”

지적을 받은 대상인 쿤은 고개를 들어 오딘의 눈치만 살폈다.

그러자 오딘은 한 걸음 나서며 쿤을 대신해 답했다.

“그럴 일은 없을 거다. 이 일에 본 좌는 더 이상 시간을 할애하지 않기로 했다. 목숨이 아까운 자들은 물러서라.”

“정신이 어떻게 된 모양이로군.”

당장에 대들려던 팔라딘의 뇌리에 타론이 통신 마법을 이용해 주의를 주었다.

[방심은 금물. 조심해라, 수도원장을 꺾은 자다.]

대답을 하기 위해 팔라딘이 잠시 고개를 돌렸을 때였다. 느닷없이 그의 머리가 허공으로 치솟는 게 아닌가?

머리를 잃어버린 목 부위에서는 피가 분수처럼 터져 나왔다.

언제 뽑았는지 모를 오딘의 흑룡검이 원인이었다.

다른 팔라딘이 울화를 이기지 못하고 소리를 치며 달려 나왔다.

“비겁한 놈!”

그러나 두 번째로 달려온 팔라딘의 움직임이 이상하게 변하고 있었다.

하체는 분명 목적지를 향하고 있었지만, 상체는 그 속도를 못 따라갔던 탓인지 기울어지며 뒤편으로 추락하고 말았다.

몸이 양분된 것이다.

다른 팔라딘이 눈을 치뜨고 나서려 할 때 옆쪽에서 불호령이 떨어졌다.

“아서!”

그는 차마 앞으로 나설 수 없었다. 상관의 명령은 절대적이었으므로.

세 번째로 나서려던 이를 대신해 타론이 오른손으로 맞은 편 허리에 매달린 검갑에서 검을 빼내었다.

세 자 두 치는 됨 직한 길이로, 검은 꽤나 긴 편이었는데 대신에 너비가 얇았고, 또한 양쪽으로 날이 서 있는 양날검이었다.

오딘은 속으로 그 검이 꽤 괜찮은 검이라 생각했다.

타론도 오딘이 자신의 검을 주시하고 있음을 간파했음인지 스스럼없이 나서며 자신의 검에 대한 자랑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진귀한 검이지. 드워프가 만들었다고 하더군. 못 베는 것이 없는 검이야. 근래에는 연습 때 말고는 검을 쓸 일이 없었지. 어쨌거나 자네나 나나 이 자리에서 운명이 정해지겠군. 죽으면 서로 탓을 하기 없기네.”

타론의 말투에서는 오랜 연륜이 묻어났다.

겉으로 드러난 나이로 볼 때 그는 충분히 오딘보다 연배였다.

그러나 오딘은 그의 말투와 태도를 싸잡아 비웃었다.

“어린 녀석이 자만에 빠져 사는군. 검과 함께 말이야.”

그 말에 타론의 한쪽 눈썹이 뒤틀렸다.

감정이 상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어린 녀석이라는 말이 귀에 거슬렸던 것이다.

“그럼 네놈은 젊어지기라도 했다는 말이냐?”

“알 필요 없어.”

오딘은 흑룡검을 들어 달빛에 반사시켰다.

칠흑의 빛이 오묘한 기운을 발하는 중이었다.

섬세한 문양, 기괴한 느낌까지 주는 그것을 보며 팔라딘 타론의 입에서 뜻밖의 감탄이 흘러나왔다.

“보기 드문 검이로군.”

“이놈을 제외하면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물건이지.”

“그것도 드워프가 제작했는가?”

오딘은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그렇지는 않아. 대신 꽤나 오래 걸린 물건이라더군. 자그마치 삼백 년 동안 제작하였다고 했으니… 다시 만들라고 해도 못 만들 물건이지.”

타론은 흑룡검에 시선을 빼앗기는 것으로 모자라 매료되어버렸다.

좀체 눈을 떼질 못하는 그를 보며 오딘은 검을 길게 늘어뜨려 시선을 거두게 했다.

“전투에 앞서 불필요하게 말을 섞게 되었군.”

그제야 타론은 정신을 차렸다.

한편으론 자책감도 들었다. 수하 둘이 저자의 손에 죽었는데도 검에 홀려 미지근한 태도를 보인 자신에게 화가 났던 것이다.

타론은 검을 들어 오딘의 가슴 정중앙을 향해 겨눴다.

“죽은 녀석들에 대한 탓은 안 하지. 대신에 자네의 실력이 대단했으면 좋겠어. 그렇다면 죽은 녀석들은 덜 억울할 테니까 말이야.”

강자와 싸워보는 것은 많은 검사들의 염원이었다.

기습을 당해 죽는다든가, 암습에 당해 죽는 것보다 강자와 싸워 죽는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자랑거리였다.

죽은 자들은 말이 없었지만 산 자들에 의해 그 미담이 오가기에.

막 전투가 벌어질 상황인데도 오딘은 아무런 긴장도 없이 평온하기만 했고, 이는 사이한 느낌마저 던져 주었다.

‘어째서일까? 저 녀석의 마나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아. 단지 검이 빠른 것일까? 방금 전의 속도는 신체의 능력만으로는 설명이 불가했다.’

앞발을 조금씩 밀어 잰걸음으로 거리를 좁히는 타론과는 다르게 오딘은 보폭을 크게 하고 다가왔다.

그러자 순식간에 가까워진 거리에 타론은 화들짝 놀라 땅을 박차고 뒤로 멀리 뛰었다.

오딘은 그런 그를 한심한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부끄러운 기색을 떠올릴 새도 없었는지, 타론은 입 안이 바짝바짝 타들어가는 느낌마저 들었다.

‘왜지? 내가 왜?’

베어버렸으면 될 일이었다. 하지만 타론은 그 타이밍을 놓쳐 버렸으니 검을 섞어봤자 얼기설기해졌을 것이다.

그는 자신이 너무 생각이 깊었다고 판단했다.

‘평상시처럼 한다. 나 타론이 누구에게 굴한 적이 있던가?’

생각을 마친 즉시 타론은 기합성을 내지르며 힘차게 뛰어나갔고, 그 바람에 바닥에 널려 있던 돌가루들이 나뭇잎인 양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의 움직임은 조금 전의 팔라딘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의 빠르기였다.

“차합!”

수직으로 긋는 검이었다. 하지만 오딘의 허리는 활처럼 휘어지며 검은 애꿎은 허공만 갈랐다.

그 모습에 타론은 급히 검을 회수한 후 다시 사선으로 내리그었다.

이번에도 결과는 매한가지. 오딘의 몸은 그와 반대편으로 꺾였다.

두 차례의 공격이 무위로 돌아갔지만 타론은 공격에 더욱 열을 올렸다.

사위는 쥐죽은 듯 고요했다.

날카로운 바람을 안고 대기를 가르는 소리와 타론의 거칠어진 숨소리만이 들릴 뿐이었다.

어느 순간 타론의 검은 세 방향에서 날아들었다.

허리와 목, 그리고 다리를 노리는 검이었는데 그 속도가 무척이나 빨랐던 까닭이다.

처음으로 검끼리 부딪치며 짙은 쇠 마찰음을 흘렸다.

카칵!

흑룡검이 자신과 맞닿은 상대의 검을 가소롭다는 듯이 노려보고 있다.

오딘은 얼굴이 붉어진 타론을 마주 보면서 조용히 타일렀다.

“잔재주는 부리지 않는 게 좋아.”

돌연 타론이 손목을 퉁겨 그 반작용으로 뒤편으로 뛰며 허공에서 한 차례 공중제비를 돌았다. 되도록 바람의 저항을 줄이기 위한 행동이었다.

어렵잖게 착지한 후 그는 재차 오딘에게 달려들었다.

이번의 공격은 조금 전보다 패기가 실려 있었다.

검은 바람을 가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몰고 왔고, 또한 검신의 길이가 늘어나더니 뒤로 한 발 물러서려던 오딘의 옷자락을 찢었다.

타론은 정색을 하고서 입을 열었다.

“숨기고 있었군, 실력을. 내 오러 블레이드를 피하리라고는 예상치 못했는데…….”

긴장감이 팽배해지고 있다고들 믿었다.

단 한 사람, 이 싸움을 벌이고 있는 오딘을 제외하고 말이다.

오딘은 실없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해진 옷가지를 추스르며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앞으로 걸어 나왔다.

돌연 타론의 뇌리에 누군가의 뜻이 전해졌다.

-재미있구나. 한 가지만 충고하마. 살고 싶으면 최선을 다해라. 본 좌의 기대 이하라면 네 목숨도 회수해버릴 터이니.

말을 하고 있는 대상이 어렴풋이 짐작이 가능했기에 그 말은 타론에게 있어서 경각심을 불러일으켰다.

‘헤아릴 수 없는 자다… 저자는 도대체 무어란 말이냐?’

타론은 지금의 감정, 생각을 애써 떨치며 비워버렸다.

아까처럼 바보 같은 행동을 되풀이할 수는 없지 않은가.

다시 두 사람이 맞닥뜨리기 일보 직전이었다.

타론은 오직 공세에만 치중하기로 했다. 오러 블레이드로 무엇이라도 잘라버릴 심산이었다.

기세등등하게 날아들던 타론의 검은 밝은 빛과 마주쳤다.

자신의 검에 맺힌 오러 블레이드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밝은…….

타론의 팔뿐만 아니라 말까지도 벌벌 떨렸다.

“너… 넌 대체 누구냐?”

그는 여럿의 마스터를 만났고, 또한 그들과 검도 섞어보았다.

그러나 그가 만나본 마스터들 중 이렇게 무시무시한 오러 블레이드를 구사하는 이는 없었다.

타론의 검은 호랑이를 만난 개처럼 기가 죽어 있었다.

이조차 다행이었다. 오딘이 상황을 봐주지 않았다면 그의 검이나 팔은 떨어져 나갔을 테니까.

팔이 부들부들 떨리는 것을 견디지 못하고 타론은 검을 든 손목을 튕겨 멀찌감치 물러섰다.

‘이 상태라면 가망이 없다. 저자의 체내에 있는 마나는 아직도 미비하지만, 검에 맺힌 마나는 상상을 불허할 정도로구나. 안 되겠다.’

그는 재깍 신성력의 도움을 받아 자신의 몸에 헤이스트를 걸고 신성 보호막까지 둘렀다.

보호막은 움직임을 더디게 하는 반면에 헤이스트는 속도를 빠르게 한다. 그렇기 때문에 보호막을 두른 상태에서도 몸놀림은 아까보다 더욱 빨라질 것이다.

과연 효과는 엄청났다.

계속되는 맹공은 오딘을 수세에 몰아넣는 것처럼 보였다.

쿤은 점차 뒤로 밀리는 오딘을 보며 초조함을 금치 못했고, 칼슨 수도원장은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내가 헤이스트라도 걸어드려야 하지 않을까?’

이것이 쿤의 생각이었던 반면에 칼슨은 다른 생각을 품었다.

‘내가 돕는다면……?’

두 사람은 동시에 고개를 탈탈 털었다.

쿤은 자신이 허락도 없이 나선다면 오딘에게 질책을 들을 것이란 염려 때문이었고, 칼슨은 그 생각이 지극히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미련했다. 어차피 대신관님이 계신다. 나와 타론 경이 합세한다 해도 대신관님을 이기리란 보장이 없다. 이 자리에서는 괜히 나서봐야 좋을 것이 없다.’

타론의 오러 블레이드는 비록 오딘의 몸에 닿지는 못했지만, 그 대신 주변의 공기를 태워버렸다.

순간이 좌지우지할 수 있는 싸움이었다. 한 발만 헛디디더라도 목숨이 경각에 처하는…….

연속 공격으로 오딘의 자세가 조금 흐트러졌다.

타론은 그때를 놓치지 않고 혼신의 힘을 다해 검을 휘둘렀다.

“끝이다!”

그러나 그것은 철저한 오해였다.

오딘은 몸을 돌리는 동작을 취했을 뿐이었다.

그의 몸과 함께 회전하던 흑룡검이 길게 휘둘러지며 곧 타론의 검과 마주쳤다.

딱히 힘이 실리지는 않은 동작이었음에도 엄청난 굉음이 들렸다.

파캉!

동시에 타론의 몸도 허공으로 떠올랐다. 아니, 타론은 몸을 던졌다고 봐야 했다.

땅바닥을 구르며 잽싸게 일어선 타론은 검을 쥔 쪽의 어깨를 부여잡은 채 죽을상을 지었다.

돌연 기침이 터졌다.

“쿨럭!”

극심한 통증 때문인지 입에서 피가 한 움큼 뱉어졌다. 내상을 입은 게 틀림없었다.

타론은 신성력의 힘으로 자가 치료에 들어갔다.

“홀리 라이트(Holy Light:성스러운 빛)!”

상처는 빠르게 수복되었으나 이에 소모되는 신성력이 적질 않았다.

무엇보다 더 큰 문제는 다른 곳에 있었다.

‘하, 하마터면 어깨가 날아갈 뻔했다. 저런 놈이 어째서 이곳으로 기어들어온 것인가? 큰일이구나. 이대로라면 대신관님 또한 위험하다.’

타론은 즉시 남아 있던 팔라딘에게 통신 마법으로 의사를 전했다.

[집사를 호위하여 저택으로 들어가라. 가서 대신관님을 피신시켜 드려야 한다. 너무 위험한 놈이다. 내가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모르겠다.]

듣는 팔라딘은 가장 존경하던 상관이 죽을 위기에 처했음에 군소리를 늘어놓을 수 없었다.

그는 각오를 다지며 뒤로 돌아섰고, 오딘이 그런 그를 보며 나무랐다.

“한 발자국이라도 내디디면 죽는다. 명심하도록.”

팔라딘은 잠시 사고에 들어갔다.

저자와 자신의 거리는 큰 보폭으로 족히 20보는 차이가 난다. 게다가 근방에는 타론 경까지 있질 않은가.

한 발을 내디디는 것만으로 죽는다는 것은 말도 되질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던지 그는 작정하고 발을 디뎠다.

바로 그때, 무언가가 빠르게 날아와 그의 뒤통수를 파헤쳤다.

퍼억!

그대로였다. 그의 몸은 그대로 무너지고 있었다.

정확히 한 발을 내디디고 앞으로 꼬꾸라지는 그를 보며 타론은 기겁을 했다.

쓰러진 수하와 오딘을 번갈아 보며 그는 의문을 드러내고 말았다.

“뭐, 뭐냐!”

그의 말은 묵살하고 오딘은 싸늘한 시선으로 죽은 시체를 바라보며 투덜댈 뿐이었다.

“괘씸한 놈이로군. 감히 본 좌의 말을 무시하다니…….”

팔라딘의 머리에서 흘러내린 듯한 피가 주위의 흙을 적시고 있었다.

집사 역시 두려움이 적지 않았다.

그는 책임감과 죽음의 기로에서 갈등하던 중이었다.

저택을 향해 소리를 지를까 생각도 해보았지만, 소용없는 일 같았다.

팔라딘이 한 발도 떼질 못하고 죽는데 자신의 목소리라고 한들 제대로 된 뜻이나 전할 수 있겠는가.

모든 게 자신의 불찰이었다.

이들 넷만을 데려온 것이 실수였다고 여겨졌던 것이다.

타론 또한 갈등에 휩싸였다.

어차피 자신은 이자의 상대가 되지 못할 터. 그렇다면 이 일을 내부에라도 알리는 것이 옳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앞섰기 때문이다.

그래도 그는 방금 죽은 팔라딘보다 배짱이 뛰어났던지 오딘에게 대놓고 등을 보였다.

그 모습에 오딘이 씁쓸한 미소를 머금고 타일렀다.

“네 녀석 머리라고 더 단단하지는 않을 터. 가능하면 마탄지를 쓰고 싶지 않다. 본 좌와 검을 섞어라. 될 수 있으면 자비를 베풀어주지.”

그러나 타론은 갈 태세였는지 다시 등을 돌릴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때 뒤에서 엄청난 빛 무리가 일었다.

얼핏 보기로 그것은 흡사 뱀 같았다. 수십은 족히 넘을 뱀의 무리들.

그것들은 땅과 부딪치며 거대한 폭발을 일으켰다.

쿠콰콰쾅!

화산이 폭발한 것처럼 땅이 파헤쳐지며 모래 먼지와 흙이 사방으로 튀었다.

타론은 두 팔로 급하게 얼굴을 막고 신음을 토했다.

“윽…….”

후두두둑!

신성 보호막이 사라진 후라 천장으로 떠올랐던 흙무더기들이 그의 머리와 어깨 위로 수북이 쌓였다.

소동이 가라앉아 그가 팔을 내렸을 땐 앞쪽에 거대한 구덩이가 자리하고 있었다.

발을 헛디뎌 추락한다면 뼈가 분질러질 정도의 높이였다.

“내 허락 없이 그 선을 넘어간다면 가차 없이 목숨을 거둘 것이니라.”

광오하기 그지없는 말이었다.

마음만 먹는다면 언제든 죽일 수 있다는 말. 그러나 그 말이 타론은 결코 허황되지 않을 것임을 깨달았다.

그는 몸에 쌓인 흙을 털어낼 생각도 못한 채 떨리는 입으로 물었다.

“다… 당신이 사람이오?”

오딘은 그 질문에도 대답할 생각이 없는 듯했다.

“너무 오래 시간을 허비한 것 같군.”

오딘이 다가올수록 타론의 입 안은 침이 말라 바싹바싹 타들어가는 것 같았다.

확실히 그의 몸은 자신의 의지를 따르지 못했다. 저절로 뒷걸음질이 쳐지는 것을 어찌하란 말인가.

참다못해 바보 같은 자신의 다리를 부여잡자 때를 놓치지 않고 무서운 빛을 머금은 흑룡검이 날아들었다.

후웅!

타론은 놀라 뒤로 자빠지고 말았다.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조금만 늦었어도 목이 몸과 분리되었을 테니까.

지켜야 할 것이 없다면 자비라도 빌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 와중에도 흑룡검은 무서운 기세로 포효했다.

웅웅웅웅!

응집된 마나를 머금은 흑룡검이 몸에 닿지도 않았는데 살이 타들어가는 느낌이 들었던지 타론은 잔뜩 인상을 찌푸렸다.

“별 볼일 없는 놈이었군. 오랜만에 검이나 한번 섞어볼 상대가 있나 했더니 시간 낭비였어.”

오딘의 회의에 물든 말이었다.

이제는 더 봐주지 않을 생각인지 오딘의 검이 높게 들려 올라갔다.

땅과 함께 꿰어버릴 작정인 듯했다.

그때, 어디선가 그를 제지하는 목소리가 당차게 들려왔다.

“손을 멈추시오.”

희끗희끗한 머리카락의 노인이 다가오고 있었다.

목소리는 그의 것이었다.

타론은 그를 보며 발악하듯 소리쳤다.

“막스마라 대신관님! 어서 이곳을 벗어나십시오. 이자는……!”

말을 끝마칠 수 없었다. 오러 블레이드가 그의 목덜미에 다가섰기 때문이다.

분명 한 뼘 정도의 거리 차이가 있었음에도, 흑룡검에서 뻗어 나온 강기는 열기마저 간직했던지 타론의 목을 뜨겁게 만들었다.

“크윽…….”

살이 타는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오딘은 더는 자비를 베풀어줄 요량은 없는지 그의 목에서 검을 치우지 않은 채 노인을 바라보며 툴툴거렸다.

“얼굴 보기가 이리 힘들어서야…….”

엠팔레스 신전부터 이곳까지, 오딘은 너무 시간을 허비했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일도 아니요, 마타하리의 일이었다.

이곳을 방문한 목적은 팔라딘이 아니라 저 대신관이라는 늙은이에게서 정보를 캐내려고 온 것이다.

게다가 정보를 캐내는 게 끝이 아니라 그것을 토대로 또다시 살인마를 찾아야 하니 은연중에 짜증이 솟구친 것이다.

팔라딘들의 목숨에 자비를 두지 않은 것 역시 이에서 비롯되었다.

막스마라 대신관은 죽은 팔라딘들을 보며 안타까워했다. 거기다 가장 신뢰하는 타론마저 생명이 경각에 처해 있음을 보고는 엄한 목소리로 오딘을 다그쳤다.

“당장 검을 거두시오! 보아하니 초면이거늘 이 무슨 행패요?”

물론 오딘은 그에 굴할 위인이 아니었다.

달갑지 않은 녀석에게 훈계까지 듣는 듯하여 오히려 흑룡검에 더 기를 증폭시켰다.

그러자 검신이 더욱 길게 늘어나며 타론은 급기야 비명을 질렀다.

“크아아아!”

머릿속이 비어버렸다. 공포가 지배한 까닭이다.

막스마라 대신관 역시 다급해졌다.

“검을 치우시오. 용건이 있다면 그 검부터 치우고 얘기를 나누어보면 어떻겠소?”

한풀 수그러든 기세였다.

오딘은 대신관을 향해 시선을 고정시킨 채 오러 블레이드를 거둬들였다.

그사이 막스마라 대신관의 머릿속은 맹렬히 회전했다.

‘전연 본 기억이 없다. 저놈뿐만 아니라 저 뒤의 엘프 소년도……. 저들은 누구란 말인가? 왜 이곳에 와서 행패를 부린단 말이냐? 하나, 한 가지는 분명한 듯하구나. 나에게 좋지 못한 감정을 가졌으리라는 것!’

눈에 잔뜩 경계심을 담고 막스마라 대신관은 오딘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다른 대상에게도 신경이 쏠렸다.

아까부터 고개를 숙이고만 있는 대상, 바로 칼슨 수도원장이었다.

“엠팔레스 신전의 수도원장께서 여기는 어쩐 일이오?”

결코 곱지 못한 목소리였다.

칼슨은 모기만 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예, 저, 그게…….”

분명히 뒷말이 이어지고 있지만 너무 작은 목소리였다.

정말 듣질 못했는지 아님 역정이 났는지 막스마라 대신관은 큰 소리로 그를 다그쳤다.

“똑바로 말해보시오. 또박또박! 말하는 법도 잊어버렸소?”

그가 매우 화가 나 있다는 사실을 인지한 칼슨은 어찌할 바를 몰랐으나 당장에 원하는 답을 내주어야 했다.

“저자가 따질 것이 있다며 절 볼모로 잡아 대신관님이 계신 곳으로 안내하라고 하였습니다. 일이 이렇게 크게 벌어질 줄 몰랐습니다. 정말입니다. 믿어주십시오.”

마치 애원하는 듯한 목소리였다.

그럼에도 평소엔 자신을 살갑게 맞이해주던 대신관의 노여움은 좀처럼 거두어질 줄을 몰랐다.

무례도 이런 무례가 없었다.

야밤에 저택을 찾은 것은 제쳐 두고서라도, 자신이 아끼는 팔라딘을 셋이나 죽여 버렸다. 거기다 마당을 피로 물들이고 그것으로도 모자라 거대한 구덩이까지 파놓은 것은 결코 용납되지 않는 행태였다.

지금 당장에 그 화살은 고스란히 엠팔레스 신전의 수도원장인 칼슨을 향해 있는 것이다.

따가운 질책의 눈총을 받으며 칼슨은 쥐구멍이라도 찾아 기어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러다 막스마라 대신관은 거대한 구덩이에 정신이 팔렸다.

‘조금 전 보았던 것은 분명히 오러 블레이드였다. 타론이 무력함을 느낄 정도라면 저자의 힘은 그 이상일 터. 아니, 칼슨 수도원장이 그와 호흡을 맞추지 않았던 것은 저자가 생각보다 더 위험하다는 뜻이겠지. 검으로 저런 구덩이를 판다는 것은 나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일이구나. 어쩌면 내가 이들과 호흡을 맞춘다고 하여도……?’

막스마라 대신관은 이내 생각을 접어버렸다.

일단은 왜 이런 소동을 벌이게 되었는가를 추궁해볼 작정이었다.

생각이 담긴 내용들이 그의 입에서 말로 술술 풀려 나왔다.

“어째서요? 어째서 이런 일을 벌인 것이오?”

“얼마 전, 본 좌는 하나의 일에 대한 조사를 명령했다. 살인에 미친놈을 추적하라는 명령이었지.”

의외의 말에 막스마라의 눈이 경계심을 띠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오딘의 말은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미친놈이 흘리고 간 것이 있다더군. 하나는 영롱한 광채를 발하는 펜던트고, 다른 하나는 색실이었지. 그걸 가지고 조사에 착수했다는 보고를 받았다. 그 녀석이 어쩌다가 이곳까지 오게 된 모양이야. 그리고 엠팔레스 신전에서 네놈을 보았다더군.”

기분 나쁜 웃음을 지으며 자신을 노려보는 오딘의 시선에 막스마라는 불쾌함을 드러냈다.

“나를 보았다고?”

오딘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철저히 진실을 외면하고 있었지만, 막스마라의 표정에서는 거짓의 기미 또한 여실히 드러났다.

그러자 오딘이 타이르듯 말했다.

“독심술이라는 게 있지. 행여 거짓을 얘기할 생각이라면 그만두는 게 좋아.”

믿을 수 없는 얘기였지만 확신에 찬 그의 표정은 막스마라에게 정말 독심술이라는 게 있다는 느낌마저 던져 주었다.

결국 막스마라는 그의 말을 더 부정하지 않기로 했다.

“어떤 펜던트인지는 모르겠지만, 칼슨 수도원장이 있는 엠팔레스 신전에서 누군가의 펜던트를 구경했던 적은 있었소. 그게 어쨌단 것이오?”

“그다음은?”

오딘의 물음에 황당한 표정을 짓는 막스마라를 향해 쿤이 삿대질을 하며 소리쳤다.

“당신이 쫓으라고 했지요? 펜던트를 보고 당신이 쫓으라고……! 리먼 아저씨를 해하고 펜던트까지 훔쳐간 것을 보면 뭔가 숨기고 싶은 것이라도 있었나 보군요!”

막스마라는 냉랭한 표정으로 쿤의 말을 되받아쳤다.

“아이야, 확인되지 않은 말을 진실인 것처럼 호도하여 얘기를 하면 안 된다. 그 말에 책임을 질 수 있느냐?”

쿤은 쉽사리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러다 나온 말이 이것이었다.

“성기사가 개입했다고 했어요. 비겁하게 뒤에서 기습을 해서 죽을 뻔했었지요.”

“참 안된 일이구나. 우리가 신성 제국에 몸을 담고 있긴 하지만 잘못된 길로 들어서는 이들도 있단다. 그 점은 내가 사과하마.”

“그 사람 혼자가 아니었죠. 저희를 추적하던 사람들도 하나같이 사제와 성기사들이었습니다. 팔라딘까지 있었죠.”

막스마라는 씁쓸한 미소를 머금었다.

결정적으로 쿤은 품에서 양피지 한 장을 펼쳐 들었다.

“수배 전단입니다.”

수배 전단에 그려진 엘프 소년과 지금 말을 하고 있는 엘프 소년은 생김새가 달랐다.

의문을 지우지 못하는 막스마라에게 확인이라도 시켜 줄 요량이었던지 쿤은 밀가루로 반죽된 인피면구를 거칠게 잡아 뜯었다.

“배포가 안 된 곳이 없더군요.”

“억지 좀 그만 부리려무나. 그 전단을 우리가 뿌렸다는 증거가 없질 않느냐. 그들이 성기사와 사제 복장으로 위장을 했을 수도 있는 것을…….”

쿤은 그에게 성큼 다가서서 양피지의 하단 부를 가리키며 또박또박 얘기했다.

“이 직인이 그 증거입니다. 이래도 잡아떼실 겁니까?”

확실한 물증이었다.

이 양피지는 돌아다니는 양피지와는 차이가 있었는데, 대신관의 직인이 그것이었다.

다시 말해 쿤이 들고 있는 수배 전단은 소수에게만 나누어주는 전단이었던 것이다.

쿤은 오딘이 자신을 구해주었을 때, 죽은 성기사에게서 이 전단을 갈취했다.

그런데도 막스마라는 고개만 흔들 뿐이었다.

“내 이름은 맞아. 하지만 난 아니야.”

계속 발뺌을 하는 그에게 오딘이 한심한 눈초리를 던졌다.

“꼴사납군.”

바로 그때 멀리서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즉각 이곳으로 달려온 말 위에서 한 남자가 떨어져 내리며 땅에 한쪽 무릎을 붙였다.

“대신관님을 뵙습니다.”

주위는 폐허가 되어 있고 팔라딘 몇의 시체가 나뒹굴고 있다. 뿐만 아니라 타론 역시도 일어서서 적에 대한 경계심을 풀지 않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 딴에는 힘이라도 보탤 생각이었다.

그러나 소동의 장본인이라 생각되는 청년을 보는 순간, 팔라딘의 눈은 굳고 말았다.

오딘 역시 그 얼굴을 익히 알아보고는 때 아닌 웃음을 지었다.

“적시적소에 잘 와주었군.”

쿤 또한 그를 보고 매우 놀랐다.

“다, 당신…….”

그는 오딘을 만나기 전 자신을 핍박했던 성기사의 무리 중 하나였던 것이다.

당시 목숨을 건진 이는 이 팔라딘밖에 없었다.

잠시 쿤은 말을 멈췄다. 금세 작금의 상황이 이해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랬군. 이제 발뺌은 못하겠군요. 다 당신이 지시한 일이죠?”

자신을 직시하는 쿤의 눈초리를 보며 막스마라는 난색을 표했다.

보아하니 세 사람은 만난 적이 있는 듯했다.

꼭 듣지 않아도 충분히 짐작이 가능한 일이었다. 게다가 좋지 못한 감정들이 섞여 있다는 것 또한 저들의 얼굴 표면에 드러났다.

그렇다고 눈앞에 버젓이 서 있는 휘하의 팔라딘을 모른다고 잡아뗄 수도 없는 노릇이 아닌가.

애초에 부정을 하지 않았다면 모르겠지만, 부정을 한 상태에서 말을 번복할 수는 없었기에 막스마라 대신관은 오로지 침묵으로 일관했다.

“대신관이라는 자가 거짓말을 쉽게 입에 올리는군. 신을 신봉하는 자들이 그래서야 쓰나.”

따가운 일침. 타론과 막 도착한 팔라딘은 자신들이 모시는 대신관에게 수치심을 주는 오딘을 죽일 듯 노려보았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이미 그들은 오딘의 힘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그나마 오딘의 진면목을 모르는 팔라딘은 여차하면 대들 태세였다.

그는 타론에게 슬금슬금 다가가더니 귀엣말로 속삭였다.

“타론 님, 저자의 무력이 아무리 뛰어나기로서니 우리가 한 사람을 당해내지 못할 리는 없을 겁니다. 여기에는 저뿐만 아니라 타론 님과 막스마라 대신관님, 그리고 칼슨 수도원장님까지 계시지 않습니까.”

타론 역시 같은 생각이었다.

단, 한 가지.

곁눈질로 보이는 칼슨 수도원장은 매우 겁을 먹은 듯했다. 나서는 것조차 두려워할 정도로…….

그 점이 계속 신경에 거슬렸다.

타론은 일단 사태의 추이를 더 지켜보기로 했다.

“대신관님께서 말씀으로 잘 해결하신다면 그것으로 끝날 일이다. 괜히 긁어서 부스럼을 만들 필요는 없다. 무력은 최후의 보루다.”

무슨 뜻인지 알아들었는지 옆의 팔라딘은 더 이상 그를 종용하지 않았다.

오래도록 침묵하는 막스마라를 더는 두고 볼 수만은 없었는지 오딘은 밤하늘을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계속 부정할 생각인가?”

막스마라는 그 물음이 자신을 향한 것임을 알았다.

“후우~”

길게 한숨을 내쉬고서 그는 결국 운을 뗐다.

“인정하지. 하지만 내가 거짓을 말했다고 해서 주신을 욕하지는 말아주게. 내 입이 바르지 못한 것이지, 그분이 거짓을 말하라고 시키신 것은 아니니까.”

“그건 보고 결정하지.”

오딘의 태도에는 전혀 굽힘이 없었다. 그는 여전히 이들을 깔아보고 있었다.

이들이 누군가? 나이시스 신성 제국의 팔라딘이며 거대한 엠팔레스 신전의 수도원장이다. 어디 그뿐인가? 신성 제국을 대표하는 대신관까지 있는 자리다.

막스마라는 될 수 있으면 조용히 일을 끝내고 싶었다. 그러나 그가 보는 청년의 태도는 도를 넘어섰다.

결국 막스마라는 그에 대해 쓴소리를 내뱉었다.

“자넨 너무 거만하군. 자네가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힘만으로는 모든 것이 해결되지 않는다. 지금의 일은 우리 신성 제국에 선전포고를 하는 것과도 다름없다. 자네가 여기서 빠져나간다고 해도 앞으로 무사할 것 같은가?”

“무사하고 안 하고는 네가 신경 쓸 일이 아냐. 묻는 말에나 대답해라.”

참을성이 한계에 달했는지 막스마라의 눈은 차갑게 식어버렸다.

여차하면 손이라도 쓸 태세였으나 초인적인 인내심을 발휘해 한 번 더 참았다. 잘못된 판단은 때로는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낳기 때문이다.

그 밑바탕에는 오딘이 강자라는 계산이 깔려 있었다.

싸워서 죽게 될 사람이 꼭 저자라는 확신은 없었던 것이다.

죽는 사람은 집사나 팔라딘들이 될 수도 있으며, 칼슨 수도원장이나 자신일 수도 있었다.

결국 원래 못돼 먹은 악인이라 치부하고는 막스마라는 그의 말투에 신경을 쓰지 않기로 했다.

오딘의 물음이 이어졌다.

“그래, 그 펜던트의 주인은 누구지?”

여기서 막스마라는 이 문제가 꽤나 심각하다는 것을 인식했다.

자칫하다가는 신성 제국의 근간이 흔들릴 수도 있는 일이다. 그가 소문을 퍼트리고 다닌다는 전제하에서…….

확실히 해둘 필요가 있었다.

이 요구가 먹히지 않는다면 생사를 걸고서라도 저놈과 싸워야 했다.

굳은 얼굴로 막스마라가 물었다.

“하늘에 맹세코 이 얘기를 퍼트리지 않겠다고 다짐할 수 있는가?”

대답은 의외로 쉽게 들려왔다.

“약속하지.”

거기서 그치지 않고 막스마라는 쿤을 쏘아보며 같은 질문을 던졌다.

“소년도 그러한가?”

쿤은 오딘의 눈치를 살폈다.

오딘이 고개를 끄덕이며 종용하자 그 역시도 약속을 내걸었다.

“약속하죠.”

원인을 제공하고 일을 이 지경으로 만든 것, 그것은 모두 저들이다. 또한 지금은 진실을 은폐하려고 한다.

마지못한 약속. 쿤의 얼굴엔 분함이 맺혀 있었다.

작심한 듯 막스마라는 주위를 물렸다.

쉽게 꺼낼 얘기가 아니었는지 그는 뜸을 들이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펜던트의 주인은 나와 친한 다른 대신관일세. 다 내 부질없는 욕심이었네. 그를 잃어버리고 싶지 않았기에 되도록 비밀로 남겨 두려…….”

말을 마치기도 전에 오딘의 입에서 거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만.”

그가 보는 오딘은 매우 화가 난 얼굴이었다.

막스마라는 허탈하게 웃었다.

“자네는 정말 거짓을 분간할 수 있나 보군.”

“본 좌가 여러 번 경고할 정도로 너그러운 성격이라고 판단한다면 오산이다.”

“미안하지만 한 가지만 더 묻지. 자네는 여기 있는 네 사람과 싸워 이길 자신이 있는가?”

“자신이 있다면 직접 시험해보도록.”

그 목소리에는 절제된 힘이 담겨 있었다.

이미 막스마라는 뷰 마나 포스를 통해 오딘의 몸에 잠재되어 있는 마나를 살핀 후였다.

확인된 바로는 극소수였다. 보통 사람이 가지는 마나, 딱 그 정도였다.

하지만 그것이 바로 막스마라가 오딘을 함부로 못하는 가장 큰 이유였다.

그가 접해본 사람 중 세 사람 정도가 그러했는데, 그중 하나는 성황이요, 다른 하나는 신흥 론도바르 제국의 황태자였다.

반면에 크레노스 제국의 황제는 그런 능력이 있었음에도 일부러 마나를 표출하여 자신의 힘을 과시하고 다녔다.

그들의 힘은 가히 짐작하기 힘들 지경이었다.

어쩌면 이자 역시 그런 힘을 가졌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그것이 막스마라로 하여금 진실을 토로하게 했다.

“펜던트는 그분 것이네. 오래전 내가 직접 선물해드린 것이었지. 그분은 참 이해 불가한 힘을 지니셨어. 어쩌면 그 힘이 그분에게 악영향을 끼쳤는지도 모르지. 마스터에 오르고 난 후부터는 가끔씩 화를 내시곤 했어. 그러다 무려 이십 년 전, 끔찍한 일이 벌어졌다네. 스스로를 제어하지 못해 참극을 벌이셨지. 인간의 본성은 그리 깨끗하지 못하다네. 살인도 어쩌면 그중 하나지. 불행하게도 그분은 그 욕구를 가지게 되셨어.”

막스마라는 과거 일이 떠오르자 길게 한숨을 내쉬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그분의 폭주는 주변의 생명체를 말살하기 전에는 멈추지 않았네. 제어할 방법은 따로 없었지. 그렇다고 그분을 내쫓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어. 직위도 그렇지만, 그 힘을 감당할 수 있는 사람도 없었네. 그러던 도중 한 유명한 트레저 헌터(Treasure Hunter:도굴꾼)로부터 그 펜던트를 사들였네. 그것은 사람의 마음을 정화시켜 주는 능력이 있어 그분이 제어하지 못하던 감정을 정화시켜 주었지.”

쿤이 듣다못해 버럭 성을 냈다.

“자꾸 ‘그분’하시는데 도대체 그분이 누구란 말입니까? 똑바로 지칭하셔야죠!”

막스마라의 표정은 차분해졌다. 그리고 이내 대답이 흘러나왔다.

“그분은 우리 나이시스 신성 제국의 성황님이네.”

대답을 듣는 순간, 쿤은 당황하며 뒷걸음질을 쳤다.

“거, 거짓말… 겁을 주려고 둘러대는 거죠? 신성 제국의 성황님이라고 하면 겁을 먹을 줄 알고요?”

적어도 쿤은 신성 제국이 떨치는 위세와 힘이 어느 정도인지는 알고 있었다.

반면에 오딘은 막스마라 대신관의 말 전부를 대수롭지 않게 듣고 있었다.

그를 눈여겨보며 막스마라가 한 가지 제안을 던졌다.

“어떤가? 원한다면 그분을 만나게 해드리지. 그렇잖아도 조만간 이곳으로 왕림하실 예정이라네. 직접 눈으로 보면 알게 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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