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레인, 대륙을 향하다 (33/67)

아레인, 대륙을 향하다

당장에 확답은 들을 수 없었다.

그러나 외성문을 빠져나가는 오딘의 표정은 밝아 보였다.

그는 마치 얼마 후에 들려올 대답을 예견하고 있는 듯했다.

쿤은 그런 오딘을 의아하게 바라보다가 참아왔던 자신의 용건을 꺼내었다.

“바리톤에는 언제 가실 거죠?”

“갈 필요는 없다. 그 녀석의 죽음을 알리려거든 다른 녀석을 보내도록 하마.”

속은 느낌이 들었던지 쿤은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약속이 다르잖아요.”

“무슨 약속 말이냐?”

태연한 얼굴로 되묻는 오딘을 향해 쿤은 굴하지 않고 목소리를 냈다.

“바리톤에 이 일을 알리러 가야 한다고 말씀드렸었습니다.”

그 모습이 귀여웠던지 오딘은 얼굴에 미소를 드리우고 말했다.

“이미 알렸지 않느냐.”

“알렸다니요? 줄곧 함께 있었습니다. 오딘 님께서는 곧장 이곳으로 오시지 않으셨습니까.”

감정이 격양되었는지 대드는 듯한 말투였다.

쉬바인은 꼬맹이가 겁을 상실했다고 느끼고 단단히 주의를 주었다.

[언행을 조심하여라. 정말 무서운 분이다. 여차하면 네 목이 달아날 수도 있다.]

[흥, 누가 죽음을 겁낸다던가요? 무서운 분이라는 것은 이미 알고 있습니다. 난 정당한 요구를 하고 있을 뿐이니 끼어들지 말아주세요.]

쉬바인은 깜짝 놀랐다.

저 엘프 소년은 지금 통신 마법으로 의사를 전달하고 있다. 복잡한 캐스팅도 거치질 않고 말이다.

적어도 5서클에 이르러서나 가능한 마법을 저토록 어린 나이에 구사하는 마법사에 대해서 일찍이 들어본 바가 없는 쉬바인이었다.

놀람에 잠겨 더 말을 잇지 못하는 쉬바인을 두고 오딘은 쿤이 앞서 따진 부분에 대한 해명을 해주었다.

“그 일은 내가 지시한 것이니라.”

놀라움이 적질 않았던 탓에 쿤은 입을 크게 벌렸다.

“지, 지시한 것이라고요? 오딘 님은 아레인에서 왔다고 하셨잖아요.”

“다 얘기하자면 조금 복잡하구나.”

많은 일을 털어놓아야 했다.

바리톤과 얽힌 관계부터 마타하리가 광인이 된 것, 그리고 그 문제를 풀어주기 위해서 그의 원수를 찾는 것까지.

이런 얘기를 늘어놓는다는 것이 귀찮기도 했을뿐더러 그대로 말한다 해도 쿤은 계속해서 의문을 제기할 것이다. 그것은 꽤나 피곤할 터였다.

쿤이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오딘을 향해 물었다.

“그럼 저는 어떻게 해야 하죠?”

“무엇을 말이냐?”

“이 자리에서 오딘 님께 얘기를 전하면 되는 겁니까?”

“따지고 보니 그렇구나.”

간단한 일이었다.

반면에 간단치 않은 일이었다.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놓는 것은 어렵지 않았지만, 그 이후엔 허전함이 찾아올 것이었다.

정이 든 사람을 떠나보냈을 때에도 제대로 애도도 표하지 못했었다. 그게 아쉬움이었다.

망설이는 쿤을 보며 오딘은 뜻 모를 제안을 했다.

“될 수 있으면 네가 같이 가주면 좋겠구나. 아무래도 얘기만 듣는 것보다는 안내가 곁들여진다면 문제에 더 가까이 접근할 수 있을 것 같으니. 괜찮겠느냐?”

쿤은 다시금 생각에 잠겼다.

따로 할 일도 없었다. 뿐만 아니라 조금이라도 거들고 싶었다.

복수가 될 것이기도 하지만, 투철한 정의심의 발로이기도 했다. 부당한 힘을 응징하는 데 미약하게나마 힘을 보태고 싶은 것이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이로써 쿤의 동행이 결정되었다.

쿤은 미처 몰랐다. 이 동행이 잠시가 아닌, 평생의 동행이 될 것이라는 것을…….

* * *

3일 후, 오딘은 공국 측으로부터 카반에 일부의 병력을 주둔시켜도 좋다는 허락을 받아냈다.

또한 공국에서는 마찰이 커져 수습이 불가할 경우 돕겠다는 의사까지 전했다.

카반의 일에 관한 한 암묵적인 동맹이었다.

3일은 그리 긴 시간이 아니었다. 다행히 그사이 대전 회의가 있었을 때 레오노는 이 안건을 내걸었다.

반대표와 찬성표가 극명하게 엇갈렸다.

기이하게도 주둔을 허락한다는 의견이 압도적으로 많았는데, 그것은 골칫거리였던 마적단들에게 다른 적을 심어줌으로써 표적에서 벗어나려 함이었다.

그러나 레오노가 공국 역시 도와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을 때 다른 귀족들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무엇보다 이 문제에 말려들기 싫어서였으리라.

대전 회의가 끝난 후에 레오노는 자신의 누이인 일리나와 공왕을 설득해 공성의 군대만이라도 이 일에 힘을 보태야 한다고 강력하게 설파했다.

허락은 오래지 않아 떨어졌다. 레오노의 발언이 큰 힘을 발휘한 것이다.

이를 알리고 레오노는 카반과의 중간 지점에 즉각 연락소를 설치하는 등 부산을 떨었지만 오딘은 아니었다.

그는 모든 일을 부하들에게 일임한 채 카반을 떠났다.

오딘과 함께 길을 가게 된 쿤은 하늘 위를 날아다니는 매 한 마리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

카반을 떠날 때부터 줄곧 따라오던 녀석이다.

배가 고파 그러는 게 아닐까 싶어 가죽 주머니에서 말린 고기를 꺼내 허공으로 휙 던졌다.

그러나 매는 고기는 관심도 없는지 줄곧 비행만을 계속했다.

하염없이 매에만 신경이 팔렸던 탓에 쿤은 고개가 뻐근해져 목을 빙빙 돌렸다. 그러다 보니 신경이 쓰이는 대상이 눈에 들어왔다.

쿤의 불안함은 쉽사리 가시질 않았다.

‘설마 신성 제국을 상대로 뭘 하려 하시는 것은 아니겠지? 아닐 거야. 세상 물정 모르시는 분이 아니라면…….’

그러면서 힐끔힐끔 오딘을 훔쳐보았는데, 지금처럼 가끔씩 불안함이 증폭되는 때가 있었다.

어쩌면 세상 물정을 모르시는 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 그 때문이었다.

“그때는 그와 함께였느냐?”

“그때라니요?”

두서없는 질문에 쿤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되물었다.

“홀란트 시내의 여관에서 말이다. 네가 소매치기를 당했던…….”

놀란 얼굴로 묻는 쿤.

“그 일을 어떻게 아시죠?”

“자리에 있었으니까.”

조금 더 크게 놀란 표정. 우선은 그가 원하는 답을 해주는 게 먼저였다.

“그때는 계셨어요. 이 층에 묵고 계셨거든요.”

답을 한 후에 쿤은 기억을 되짚어가다가 그래도 떠오르지 않자 급기야 머리를 싸맸다.

낮 시간이 되어 잠시 요기를 달래려 말을 근처의 나무에 매어두고 휴식을 취하는 시간, 쿤은 명상에 잠겨 있었다.

돌연 그의 입술이 열리며 작은 중얼거림이 새어나왔다.

“오토히프노시스(Autohypnosis:자기 최면).”

그리고 그 중얼거림은 그에게 줄 음식을 들고 오던 쉬바인에게 경악을 던져 주었다.

‘마, 맙소사… 정신 마법이라니…….’

정신 마법(Spirit Magic).

무려 수백 년 전까지만 하여도 정신 마법은 드래곤들의 전유물이라고까지 여겨졌다. 마법을 캐스팅하기가 굉장히 까다로웠기 때문이다.

오직 용언(드래곤의 언어)을 통해서만 시전될 수 있다고 믿었으니 무리도 아니었다.

그 고정관념이 깨어진 것이 불과 수백 년 전이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정신 마법을 펼친 자는 드래곤 이외에 역사상 최초이자 마지막으로 9서클에 오른 마법사인 블러드 엘프, 브리제였으니 타 마법사들은 엄두도 내지 못할 일이었다.

시대를 거쳐 정신 마법을 사용하는 종족들도 생겼지만, 어디까지나 극소수였다.

또한 그 대상들은 하나같이 고서클의 마법사였다. 지금의 쉬바인은 꿈도 꾸지 못할 경지에 오른 7서클 마스터들 이상이 그것을 펼쳤던 것이다.

얼마나 놀랐는지 쉬바인의 입은 악어처럼 크게 벌어져서 다물어질 줄 몰랐다.

쿤에게 시선이 고정된 채 석상처럼 변해버린 그에게 오딘이 물었다.

“왜 그러느냐?”

그 목소리가 쉬바인을 깨워준 듯했다.

그는 질겁하고 뒤로 물러서며 벌벌 떠는 목소리를 냈다.

“드, 드래곤… 레드 드래곤…….”

크나큰 착각이었다.

쉬바인은 저 나이에 정신 마법을 구사하는 것을 보고 은연중에 그가 타 종족으로 폴리모프하여 유희를 즐기고 있는 드래곤이라는 확정을 내려 버렸던 것이다.

“도, 도망쳐야 합니다! 여, 여기 있다가는 큰일이 벌어질 겁니다. 저희가 속고 있었습니다.”

때마침 쿤이 눈을 뜨며 손뼉을 쳤다.

“아, 생각났어요! 그때 오딘 님은 창가에 앉아 계셨군요.”

엉겁결에 제 발에 걸려 넘어지며 엉덩방아를 찧은 쉬바인.

쿤은 그런 그를 의아하게 바라보았다.

“왜 그러세요?”

쉬바인의 눈은 공포의 늪에 빠져 있었다.

말로만 듣던, 아니 흠모하던 대상인 드래곤이다. 그러나 막상 눈앞에 있다고 생각되자 걷잡을 수 없이 공포만 커졌다.

쉬바인은 대답할 여건이 못 되었다. 입이 얼어 말조차 꺼내질 못하고 있질 않은가.

그를 대신해 오딘이 답했다.

“네가 드래곤이라는군.”

“예? 왜요?”

대답해줄 것 같지 않자 쿤은 쉬바인 쪽을 봤는데, 그는 금방이라도 입에 거품을 물 것 같아 보였다.

“왜 제가 드래곤이에요?”

바짝 겁을 먹어 쉬바인은 결국 해서는 안 될 행동을 하고 말았다. 당장에 오체투지를 하였던 것이다.

“위대하신 분을 뵈옵니다.”

오딘의 미간이 찌푸려짐과 동시에 쿤도 아연실색하며 오해를 풀려 애썼다.

“전 드래곤이 아니에요. 뭔가 오해를 하고 계시다고요.”

“그, 그렇다면 어떻게 정신 마법을?”

여전히 겁을 먹은 얼굴이다.

그러자 쿤은 어렵사리 미소를 지으면서 얘기했다.

“몇 가지는 할 줄 알아요. 크게 어려운 것은 아니거든요.”

말들은 다시 앞을 향해 나아갔다.

쉬바인의 얼굴은 퉁퉁 불어 있었다. 조금 전의 행동은 주군을 무시하는 처사였으니 괘씸죄라 봐야 했다.

또한 해가 떨어지기 전까지 셀프 힐링(Self Healing:자가 치유)을 금지해놓았기에 오딘의 구타로 인한 아픔의 후유증을 쉬바인은 고스란히 느끼고 있었다.

그렇다고 쿤이 죄책감을 가질 필요는 없었다. 어디까지나 그의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므로.

“구래, 구럼 넌 다룬 접군 방쉭을 취한 거시구나(그래, 그럼 넌 다른 접근 방식을 취한 것이구나).”

입까지 퉁퉁 불어 발음이 제대로 나오질 않았으나 다행히 쿤은 그 말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런 셈이에요. 정신 마법도 따지고 보면 시전에 있어 불필요한 배열이 많거든요.”

쉬바인은 감탄을 금치 못했다.

자신의 앞에 있는 이 엘프 소년은 마법에 있어서는 천재 중의 천재였다.

억울했던 마음도 많이 누그러졌다.

그리고 행여나 아까 구타를 당한 것에 대한 화살을 쿤에게 돌릴 마음은 쥐꼬리만큼도 없었다. 그의 머릿속에는 오로지 쿤과 친하게 지내야겠다는 생각만이 가득했으므로.

“구론데 구지 구것을 또올려야 할 필요성이 있었술까(그런데 굳이 그것-오딘을 보았던 현장-을 떠올려야 할 필요성이 있었을까)?”

쿤은 밝게 웃으며 답했다.

“헤헤, 궁금한 것은 못 참아서요.”

멀리 사람들이 머무는 마을이 시야에 들어오며 서서히 날이 저물고 있었다.

* * *

심하게 부패되어 악취까지 풍기는 나무문이 밀리며 경첩에서 녹이 슨 철가루가 떨어져 내렸다.

문을 연 남자는 쟁반에 음식을 받쳐 들고 서서 침대 위에 누워 있는 노파를 애석하게 바라보았다.

“어머니, 식사 가져왔습니다.”

삐그덕!

노파가 힘겹게 몸을 일으키자 침대는 당장에라도 쓰러질 것처럼 위태위태하게 흔들렸다.

광대뼈가 두드러진 깡마른 얼굴에 쭈글쭈글한 피부, 벌린 입속에 서너 개의 이가 빠져 있는 모습이 보는 이의 마음을 더욱 안타깝게 만들었다.

그래도 남자는 애써 환한 미소를 머금고 다가가 엉덩이를 겨우 걸칠 수 있을 만한 작은 의자에 몸을 앉혔다.

쟁반 위에 든 음식은 다름 아닌 풀죽이었다.

노파에게 말없이 수저로 풀죽을 떠먹여 주는 남자의 안색에는 죄스러움만 사무쳤다.

풀죽 역시 그리 많은 양이 아니어서 몇 수저를 뜨자 그릇의 바닥이 드러났다.

결국 그의 입에서 울음이 참지 못하고 터져 나왔다.

“제대로 모셔 드리지도 못하고…….”

흐느낌은 갈수록 커져 남자의 목이 메는 바람에 노파는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죽었어야 하는 것을 못 죽어서 생고생을 시키는구나.”

노파의 탄식은 남자에게 더한 아픔으로 와 닿았다.

굶주림의 고통 따위엔 비할 바가 아니었다.

“어머니, 그런 말씀 마세요. 어머니가 계시니 제가 있는 겁니다.”

두 사람은 부둥켜 얼싸안고 울음을 터뜨렸다.

그때 문지방에 또 한 여인이 서 있어, 안타까운 시선으로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노파가 그를 먼저 발견하고서 눈가의 눈물을 훔쳤다.

“며느리 앞에서 추태를 보였구나.”

다시 말해 저 깡마른 여인은 이 남자의 부인이 된다는 얘기였다.

부인이 온 것을 깨달은 남편 역시 아직 정리되지 않은 눈가를 닦았다. 창피한 꼴은 보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며느리를 향해 애써 미소를 짓던 노파의 시선은 곧 눈에 띄게 차가워졌다.

“얘야, 반지는 어딜 갔느냐?”

그녀의 눈은 아들의 손을 향해 있었다.

매번, 아니 항상 끼고 있던 반지. 그것도 결혼 예물이랍시고 소중히 여기던 구리 반지가 마땅히 있어야 할 약지에 없었던 것이다.

그 소리를 들었는지 며느리는 고개를 돌렸고, 남자는 어떻게 해서든 이 사태를 무마시키고자 했다.

“제가 칠칠치 못해 오는 중에 잃어버렸습니다. 구리 반지야 다시 사면 되는 거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노파는 아들에게 눈을 흘겼다. 이 형편에 어떻게 구리 반지를 산단 말인가.

또한 아들의 눈은 거짓을 얘기하고 있었다.

그러나 뭐라 할 처지가 되지 못했다. 원체 가난했지만 가세가 기울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자신의 병이 제공했으므로.

구리 반지가 없어지게 된 경위는 이러했다.

그는 얼마 전 나이시스의 수도 홀란트를 방문했던 적이 있었다.

그리고 엠팔레스 신전에 들러 소원을 빌었다.

노모의 병이 낫게, 그리고 굶고 있는 아이들을 도와달라고 말이다.

일전에 리먼의 앞에 줄을 섰던 남자가 바로 이 사람이었다.

하지만 간절함이 깃든 염원이었음에도 두 가지 중 무엇도 이루어진 게 없었다.

굶주림을 참지 못해 억지로 잠을 청하고 있을 아이들.

나날이 병세가 악화되는 노모.

남은 것이라고는 허탈함이었다. 신에 대한 원망도 뒤따랐다.

지금 상황은 말 그대로 절망이었다.

그래도 노모와 부인 앞에서 약한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는지 그는 억지웃음을 지으며 부인을 보았다.

“무슨 일이 있소?”

애틋한 눈길로 그를 보던 부인이 용건을 떠올리곤 말했다.

“조금 전에 외부인들이 왔어요. 이 주위를 자꾸 둘러보는 것 같아서…….”

딱히 죄를 지은 것은 없었다. 여기 있는 세 사람 모두가 말이다.

그럼에도 외부인이라는 말에 두려움이 있었던지 남자는 노모에게 양해를 구한 후 굳은 얼굴을 하고 문밖으로 나섰다.

한 젊은 청년이 땅을 살펴보고 있었다.

풀 한 포기 자라지 않는 저주받은 땅을 말이다.

부근은 온통 흙뿐이었다.

이 땅은 노모를 모시는 남자가 지주로부터 밀린 임금을 대신해 받은 땅이었다.

하나, 아무런 소용도 없었다. 적어도 이곳에서 키우는 작물들은 이 땅과 영 맞질 않았다.

그가 좋지 못한 시선으로 이곳에 모인 사람들을 응시하고 있을 무렵, 청년의 옆에 있던 한 소년이 다가왔다.

붉은 머리카락에 귀가 매우 긴 소년이었다.

“저, 여기서 하루만 묵어갈 수 없을까요? 날이 저물어서요.”

검을 차고 있는 사람들은 위화감을 주었지만, 이 소년은 뒷머리까지 긁적거리며 살갑게 다가와 조금의 긴장이나마 덜어주었다.

남자는 머리를 굴려 보았다.

이들을 거절한다면 어떻게 될까? 또한 이곳에서 묵게 한다면 큰 탈은 없을까?

그러다 곧 고개를 저어버렸다. 생각할 필요도 없었던 것이다. 자신은 이들을 제재할 힘이 없었다.

“뭐라고 하질 못하겠군. 보다시피 우리 집은 너무도 작아. 추위를 피하려면 헛간이라도 치워주지. 단지 사용한 지 오래되어 냄새가 좀 날 거야. 그래도 괜찮다면 머무시게.”

근방의 다른 집들이라고 다를 바가 없었다.

소년은 한 줌 흙을 집어든 젊은 청년에게 다가가더니 소곤거렸다.

“헛간을 내어주신다고 하네요.”

멀지 않은 거리여서 그 소리는 집주인에게도 고스란히 들려왔다.

소년의 말에 젊은 청년은 갑자기 일어서더니 대뜸 집주인을 향해 다가왔다.

지척에 다다라서야 집주인은 그의 머리카락이 검은색이라는 것을 알았다.

물론 그런 발견보다 이자가 자신들에게 위해를 끼치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이 앞서 그는 절박한 심정으로 하소연했다.

“그 말이 기분을 거슬렀소? 하지만 어쩔 수가 없소. 안에는 몸도 제대로 가누질 못하시는 노모가 계신단 말이오.”

청년은 문 앞을 가로막는 그의 어깨에 가볍게 손을 댔다. 비키라는 뜻이다.

“차라리 날 죽이시오! 절대 물러서지 않겠소!”

남자는 젖 먹던 힘을 짜내 우뚝 서서 그렇게 외쳤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청년의 팔이 슬그머니 옆으로 밀자 남자는 저항도 못해보고 힘없이 옆으로 비켜났는데, 그 물러서는 과정에서 그는 자신의 몸이 마치 나뭇잎처럼 가볍다는 느낌마저 받았다.

기가 찰 노릇이었다.

오랜 시간을 농사일에만 몰두해서 힘이라면 자신이 있질 않았던가.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

당장에 문 안으로 들어서는 오딘의 바지를 붙잡고 늘어질 요량이었지만, 이미 늦은 일이었다.

그는 안에 있었으므로.

믿기지 못할 상황에 남자는 지금 자신이 꿈을 꾸는 게 아닐까 싶어 고개를 옆으로 세차게 흔들었다.

분명 꿈은 아니었다.

아니, 꿈이었다 하더라도 자신은 필사적으로 그를 막았을 것이다.

죽을 각오로 문 안으로 들어서려 했지만, 어느새 다가온 한 무사가 한 손으로 자신의 어깻죽지를 잡고 들어올렸다.

남자는 발버둥을 쳐 봤지만 허공에 뜬 발이 바닥으로 떨어지질 않았다.

일이 이 지경이 되자 그의 부인 역시 땅에 무릎을 대고 주저앉아 당장에라도 눈물을 쏟을 것처럼 애원했다.

“우리 그이를 제발 놔주세요.”

애절한 목소리가 가엽게 여겨졌을 만도 하건만, 이들은 피도 눈물도 없는지 외면할 뿐이었다.

조금 후 지팡이를 든 남자가 안으로 들어갔고 엘프 소년이 그 뒤를 따랐다.

얼마가 지나고 안에서 변화가 찾아왔다.

컴컴한 밤에, 대낮처럼 훤한 빛이 일고 나서야 청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와도 좋다.”

놀라운 일이었다.

오늘내일하던 노모는 거짓말처럼 무척이나 건강해 보였다.

눈 아래 자리 잡았던 거무스름한 눈 밑 지방은 보통 사람과 다를 바 없는 살색을 띠었으며, 볼에는 얇게나마 홍조마저 배어났다.

“어머니,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나도 모르겠구나. 네가 언성을 높이는 것을 듣고 다급히 나가려다 쓰러졌었는데… 조금 전까지만 해도 숨도 못 쉬고 죽는 줄만 알았다.”

그 말을 듣고 그는 안에 있는 세 남자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처음 들어온 청년은 무표정 그대로였으며, 두 번째 지팡이를 들고 들어왔던 남자는 ‘으흠’ 하고 헛기침을 했다.

그러자 마지막으로 들어온 엘프 소년이 싱글벙글 웃으며 청년을 가리키고 말했다.

“오딘 님이세요. 이분이 할머니께서 숨이 멎으시려는 것을 알고 들어오셨지요. 귀가 아주 밝으시거든요. 그 후에 저희 둘을 부르셔서 할머니의 병환을 손본 겁니다.”

지팡이를 들고 있던 남자가 소년을 그 자리에서 다그쳤다.

“말조심하려무나, 쿤.”

엄한 듯하면서도 정감이 담겨 있는 말투였다.

소년 역시 잘못을 깨우쳤는지 당장에 사과를 했다.

“죄송해요, 쉬바인 님.”

“나한테 사과를 하면 어쩌자는 게냐?”

쿤은 반쯤 혀를 내민 채 머리를 긁적이며 배시시 웃고서는 고개를 돌려 사과의 대상을 달리했다.

“참, 오딘 님, 죄송합니다.”

구타 이후 쉬바인은 군기가 바짝 든 모습이었다.

물론 오딘이 무정하게 손을 쓰지는 않았다.

마법사의 체력이 기사보다 떨어짐을 알기 때문인 데다, 아직 쉬바인은 드래곤 찬양 이외에 이렇다 할 정도로 미운털이 박히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남자는 입이 너무 크게 벌어져서 부르튼 입술에서 피가 새어나오는지도 모르고 물었다.

“그, 그럼 어머님의 병환이 나으셨다는 말입니까?”

쿤은 확신에 찬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예, 운이 좋았어요.”

남자의 놀람으로 물들었던 눈은 이제 기쁨으로 뒤바뀌었다.

그 고마움은 이루 말할 수 없었지만, 당장에 할 수 있는 것이라곤 바닥에 몸을 납작 웅크려 말로나마 대신하는 것이었다.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제 이름은 무트라 합니다. 미천한 이름입니다. 무엇이든 제가 도움이 된다면 돕겠습니다.”

노예가 되라 해도 그럴 작정이었다. 그래서 꺼낸 말이 아닌가.

그러나 차마 노모 앞에서 그런 말을 꺼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문득 오딘이 문 쪽으로 몸을 돌리며 말했다.

“밖에서 얘기를 좀 했으면 좋겠군.”

무트는 그를 뒤따르며 헛간을 내주었던 데 대한 아까의 미안함을 떨쳐 버리려 애썼다.

“제 아이들의 방이 있습니다. 매우 작긴 하지만 두 분은 주무실 수 있을 듯합니다. 그리고 어머니가 주무시고 계신 방에도 몇 분을 재워드리겠습니다. 저희 부부는 습관이 되어 웅크려서도 잘 자니…….”

말이 계속되었지만 오딘은 계속 흘려들었다.

그의 관심사는 오로지 흙이었다.

흙 때문에 머물렀는데, 기왕 날이 저문 김에 쿤은 잠자리를 부탁한 것이다.

근방이라고 해서 그럴싸한 여관 따위는 없었다. 이곳은 이들과 비슷한 천민들의 마을일 뿐이었으니까.

“여기는 어디에 소속되어 있지?”

무트라는 남자는 흡사 지체 높은 귀족을 대하는 것처럼 공손하게 허리를 숙이며 대답했다.

“엄밀히 보아서는 이곳은 로만 공국과 나이시스 신성 제국의 국경선에 위치해 있습니다. 그 때문에 이 근방에서 자주 국지전이 벌어지곤 했습니다. 저희들은 자세한 것은 모릅니다.”

“로만과 신성 제국의 국경선이라……. 그럼 이 땅은 어느 곳의 소유지?”

“원래는 하롯이라는 지주의 것이었습니다. 저희들은 이 년 동안이나 밀린 임금을 받지 못했는데, 하롯은 이 땅으로 그를 대신하겠다며 각서를 써주었습니다. 그러니 저희들의 것이라 보셔도 됩니다.”

대답을 하면서도 무트는 왜 오딘이 이런 질문을 하는 것인지를 알 수 없었다.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 자라지 않는 땅. 거기에다가 빈번히 전쟁까지 벌어져 가옥마저 무너질 위기에 처해 있는 곳이다.

멀리서 전투가 벌어진다고 해도 수십, 수백의 군마의 발굽은 지축을 흔들기에 모자람이 없었으니까.

오딘의 입에선 믿기 힘든 말이 불쑥 튀어나왔다.

“자네들이 주인이라…….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 이 땅을 내가 샀으면 좋겠군.”

대륙에서 농작물은 산업의 근간이다.

당연히 이런 오지의 땅은 농작물을 지을 수 있어야만 가치가 있다.

그러나 그는 흙을 제외하고는 허허벌판이나 다름없는 땅을 산다는 말을 하고 있다.

무트는 이해가 가질 않는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왜 이 땅을 사시려고 하는 것인지요?”

오딘은 손에 든 한 줌 흙을 매만지며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흙이 마음에 들어.”

이 흙은 밟을 때 촉감이 부드러울 정도로 토양이 매우 고운 입자로 되어 있었다. 또한 누렇고 거무스름한 색은 황토임을 증명했다.

다시 말해 오딘이 이 흙을 매입하려는 의도에는 도자기를 굽거나 이외 다른 용도로 사용할 계획이 숨어 있었던 것이다.

신세를 진 것도 있어 무트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선심을 쓰고 싶어 했다.

“흙이라면 얼마든지 가져가셔도 좋습니다. 저희 어머님의 병환을 낫게 해드렸으니 주변 이웃들에게도 잘 말을 해서…….”

말은 중간에 가로막혔다.

“아니, 산다고 했다. 살 곳이 없다면 이곳에 집을 지어주겠다. 보수는 부족하지 않게 주지. 대신 이곳에 머문다면 내 일을 도와야 한다.”

“그, 그 말씀은…….”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무트는 도통 알 길이 없었다.

흙을 헐값에라도 팔 수만 있다면 아이들에게 텁텁한 빵이라도 사줄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오딘 자신을 돕는다면 집을 지어주고 일자리를 주겠다고 하질 않는가.

꿈만 같은 일이었기에 지금 일이 현실인지 꿈인지를 분간할 수 없었다.

살점이 별로 없는 살을 꼬집어보자 따가운 감촉이 느껴졌다.

무트가 인상을 찌푸리는 것을 보며 쿤이 웃음을 머금었다.

그때 오딘은 돌아서며 이렇게 말했다.

“내일 아침 이곳의 사람들을 만나게 해주었으면 좋겠군. 땅의 소유주들을 말이야.”

무트는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땅을 얼마에 사겠다는 말이 오간 것도 아니고, 만약 일을 시켜 준다면 얼마를 준다는 말이 나온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들뜬 기분은 어떤 결과가 나오더라도 지금보다는 나을 것이라는 생각이 지배적이었기 때문이다.

지금 그들이 처한 현실은 암울하기 그지없었다.

그나마 일거리를 던져 주던 지주는 볼 수 없었고, 일터에 접근하는 것 또한 불가했다. 무슨 대단한 것이라도 발견했는지 그 주변은 다른 인부들과 군대가 들어섰기 때문이다.

그런 와중에 지금의 일은 더없이 반가웠다.

적어도 일을 시킬 때는 먹을 것을 줄 테니, 그것을 남겨 식구들과 나눠먹을 수가 있을 것이므로.

동이 트기 무섭게 불러 모은 사람들은 어느새 정원을 채웠다.

그리고 이들은 오딘과 대면을 가졌다.

미리 무트로부터 전해 들은 얘기가 있어서 이들도 그와 같은 마음을 품었다.

일만 시켜 주어도 감지덕지하다는 뜻이다.

반면에 경계심을 드러내는 사람들도 있었는데, 그들의 걱정 또한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었다.

근방에 일거리가 어디 있다는 말인가.

속는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어 그들은 내내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오딘이 고갯짓을 하자 옆에 있던 쉬바인이 품에서 비단 주머니를 꺼내어 속에 든 것을 보여 주었다.

전부가 금화였다.

금화는 그의 한 손에 쏟고도 넘칠 정도로 많아 일부는 주머니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번쩍거리는 금화를 보며 마을 주민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를 보며 쉬바인이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한 사람당 네 개씩이오. 땅을 파는 사람들에게는 이것을 주겠소. 하나, 이 돈으로는 국경을 넘어 집을 사고 몇 년을 지낼 수 있을 정도에 불과할 것이오. 즉 어떤 일이라도 해야만 남은 생을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니, 여러분은 선택을 해야 하오.”

저마다 자신의 귀를 의심하는 모양새였다.

일부는 더 나아가 이 일에 자신들을 불러내준 무트에게 눈으로나마 고맙다는 인사를 건네는 중이었다.

쉬바인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이분의 일을 거들어준다면 한 해당 한 닢의 금화가 지급되오. 단, 그것은 최소한의 보상이오. 성과를 보여 준다면 더한 급여가 지급될 것이오.”

모두가 놀랐다.

과연 지금 이 상황이 꿈인지 생시인지 구분이 가질 않아 어제 무트가 보였던 바보 같은 행동을 하는 이가 있었을 정도였다.

그리고 곧 결정이 났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하겠습니다.”

“써주시기만 한다면 열심히 한번 해보겠습니다.”

“저도 하겠습니다.”

저마다 절절한 심정인 듯했다.

쿤은 이 일에 매우 감동을 했다.

없는 사람,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해주었다는 생각이 들어서 오딘을 보는 눈에는 존경심이 어려 있었다.

문득 오딘의 입에서 휘파람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러자 어디선가 매 한 마리가 날아오더니 그의 어깨에 안착했다. 허공에 떠 있을 때는 몰랐지만, 가까이서 보니 몸길이가 사람의 팔뚝만 했다.

쿤이 그걸 보면서 크게 놀라워했다.

“어… 그건 어제 그 새 아닌가요?”

오딘은 입가에 옅은 미소를 드리운 채 쉬바인에게 양피지를 받아 무언가를 적었다. 이어 어깨 높이로 손을 올리자 매가 껑충 뛰어 그의 손등에 앉았다.

메모를 적은 양피지를 그것의 발가락 사이에 끼운 후 손을 높이 들어올리자 매는 날갯짓을 하며 하늘 높이 비상했다.

“무, 무슨…….”

의문을 가득 담고 있는 쿤의 물음에 오딘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천리응(千里鷹)이라고 한다. 전서구 대신으로도 쓰이지.”

이 매는 언젠가 이스론의 상인들을 통해 구입한 것들 중 하나였다.

순식간에 멀어져 구름 위로 사라지는 매를 보며 쿤은 멍하니 입을 벌렸다.

그 민첩함에도 놀랐지만, 무엇보다 새를 통신 수단으로 이용한다는 것이 놀라웠던 것이다.

돌연 의문이 일어 쿤이 물었다.

“저 커다란 매를 어디까지 보내신 거죠? 카반……?”

“아레인이다.”

* * *

체스판 위로 주인이 다른 두 손이 조용히 오가며 희고 검은 말들이 수차례 자리를 이동했다.

문득 불만 배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너무 한가하군. 이젠 따분할 지경이야. 이래도 되는 건지…….”

그러자 맞은편의 손 역시 우뚝 멈췄다.

“그러게 말이네. 주군께서는 바쁜 나날을 보내고 계실 텐데…….”

애초에 가인과 헤르, 이 두 사람에게 체스 게임은 흥미 없는 것이었다.

그들은 각각 백의질풍대와 적의질풍대의 대주를 맡고 있었기에 되도록 행동에 무게를 두어야 했다.

오딘에게 강요는 없었다.

도리어 아레인 왕성 내에서 자신들을 바라보는 시각이 강요였다.

오딘이 만든 다섯 단체는 왕국 내에서 존경을 한 몸에 받고 있었다.

그 단체 안에만 속해도 우러름을 받는데 하물며 대주들은 어떠할까.

이것이 이들에게는 부담감으로 작용했다.

따스한 햇살이 비치는 커튼을 바라보다 가인이 일어섰다.

“누군가 온 모양이군.”

문을 열고 나가자 과연 다섯의 무사들이 붉은 벨벳 코트를 걸친 중년 남자의 뒤편에 자리하고 있었다.

그들은 가인과 헤르를 마주하는 즉시 한쪽 무릎을 꿇고 팔을 굽혔고, 그런 그들을 대신해 지위가 제일 높아 보이는 붉은 벨벳 코트를 걸친 중년 남자가 입을 열었다.

“황명이 있었습니다,”

황명이라는 것은 황제의 명령이다. 마찬가지로 왕명은 왕의 명령이다.

그렇다 함은 곧 이들은 오딘을 황제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아직 당사자는 어떠한 직위도 원치 않았지만, 이들은 여왕 폐하의 위에 있을 사람은 황제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물론 당사자인 오딘이 자리하고 있을 때에는 그를 황제라 칭하지 않았다. 혹여 비위를 거스를 수 있기 때문이다.

가인과 헤르가 의외라는 듯이 되물었다.

“황명?”

“그렇습니다. 방금 오딘 님께서 보내신 천리응이 당도했습니다.”

“일어나 읽어주시게.”

가인의 명령이 떨어지자 중년 남자는 일어서더니 한 손에 들고 있던 양피지를 펼쳐 들고는 자못 위엄 있는 얼굴로 말했다.

“백의질풍대의 대주는 삼십의 무사를 이끌고 로만 공국의 카반으로 오라. 마찬가지로 적의질풍대의 대주는 이십의 무사를 이끌고 카반으로 오라. 그 외에 인부들 일백을 동반하라. 그곳에 잔류한 병력들에게 물으면 그대들이 해야 할 일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두 사람은 좀 전과는 반대로 무릎을 굽히고 중년의 남자에게 깊게 고개를 숙였다. 엄밀히 말하자면 양피지에 숙였다고 봐야 했다. 이것은 칙서이기 때문이다.

모든 내용을 다 전해 듣고 그들이 돌아가려 할 때쯤 헤르가 물었다.

“우리뿐인가?”

중년의 남자는 그 물음에 알고 있는 바를 솔직히 털어놓았다.

“그렇습니다.”

덤덤한 얼굴을 하고 애써 표정 관리를 하던 가인과 헤르는 칙서를 전달한 그가 가고 난 후에 화색을 띠었다.

가인은 기분이 좋은 나머지 좀체 움직일 기미를 보이지 않는 헤르의 팔을 낚아채면서 보챘다.

“어서 병력들을 추려야겠네. 서두름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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