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권-배후 (32/67)

배후

“누구냐!”

검은 머리카락의 남자, 오딘은 성기사의 그 질문에 대답해줄 용의가 없었다. 구차한 질문 따위에 대답해야 할 필요성을 못 느꼈기 때문이다.

그의 시선과 관심은 쭉 성기사들에 둘러싸여 곤경에 처한 붉은 머리카락의 엘프 소년만을 향해 있었다.

오딘의 뇌리에는 이 소년을 마주쳤던 기억이 분명히 남아 있었다. 마르크와 재회했던 여관에서 말이다.

둘의 만남은 기연이었다. 이렇게 넓은 대륙에서 두 번이나 마주쳤다는 점에서…….

그리고 오딘을 다시 만나게 된 것은 쿤에게 있어서는 커다란 행운이었다.

대놓고 무시를 당해서인지 화가 난 성기사는 오딘을 향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넌 누구냐고 물었다!”

이번에도 오딘은 귀에 솜이라도 틀어박았는지 들은 체도 안 했다.

예기치 않은 상황으로 인해 쿤의 흥분은 본의 아니게 가라앉았다. 그는 오딘에게 지금 자신이 처한 곤경을 호소했다.

“절 잡아가려고 합니다! 성기사들이라는 자가 신성 제국의 이름을 등에 업고 부당한 일을 자행하려 합니다! 주위…….”

쿤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성기사의 입에서 호통이 터졌다.

“닥쳐라!”

다른 성기사도 쿤을 몰아붙이는 것을 거들었다.

“지금까지는 어려서 봐주었다고 하지만, 헛소리를 늘어놓는다면 가만두지 않겠다!”

쿤 역시 질세라 쏘아붙였다.

“다 헛소리로 받아들이는군요. 무얼 위한 거죠? 내가 가서는 안 되는 이유는 다 당신들의 치부를 감추기 위해서가 아닌가요? 아무런 죄도 없는 사람들을 죽이는 살인마를 두둔하는 이유가 대체 뭐죠?”

지금까지의 정황으로 봐서 쿤은 이 성기사들이 결코 옳지 못한 행동을 하고 있다고 여겼다. 그렇기에 이렇게 떳떳할 수 있는 것이다.

성기사들을 이끌고 온 팔라딘은 당황하는 기색이었다.

“무, 무슨 말을…….”

엘프 소년의 독설은 얼토당토않은 얘기는 아니었다. 그 역시 살면서 신성 제국의 부조리를 많이 봐왔기에.

또한 성기사들 중 일부도 소년이 하는 얘기가 거짓이 아닐 것이라는 느낌도 가졌다.

왜냐하면 신성 제국 내에 위험한 살인마가 있다는 것은 이미 풍문으로 들었기 때문이다.

사실이고 아니고를 떠나 이 얘기가 다른 사람에게 전해져서 좋을 것은 없다. 그래서인지 한 성기사가 오딘에게 되도 않는 말을 내뱉었다.

“소년의 말을 믿지 마시오. 입만 열면 거짓말을 하는구려.”

“누가 거짓말을 했다는 거죠? 내 말이 거짓이라면 왜 잡아가려는 건데요? 당신들은 진실을 증명하면 되는 것 아닌가요? 그럴 자신이 없는 거군요. 왜냐면 내 말이 사실이니까!”

성기사는 자신의 주장에 정당성을 잃었던지 흐지부지 대답했다.

“그, 그야 네가 헛소문을 퍼뜨리니까…….”

“헛소문을 퍼뜨렸다고요? 전 그런 적 없습니다. 왜 멀쩡한 사람을 거짓말쟁이로 몰아붙이는 거죠? 그렇게 해서까지 날 잡아가야 할 이유가 있나요?”

성기사들의 눈빛이 계속해서 쿤과 오딘을 살피고 있었다.

누가 뭐라 해도 이들은 신성 제국을 수호하는 성기사들이다. 명분 없이 사람의 생명을 함부로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명분이라는 게 우스웠다.

예로부터 신성 제국은 주신을 따르고 그의 가르침을 전파한다는 이유만으로 전쟁을 일으켜 수도 없는 사람들을 죽여 왔기에.

명분이야 필요하면 세워지는 것이다.

이들도 그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여차하면 지금 끼어든 제삼자, 오딘까지 해치워버리려는 분위기였으므로.

하지만 오딘은 그에 움츠러들 위인이 아니었다.

계속해봐야 손해라고 느꼈는지 다른 성기사가 오딘의 어깨를 잡으며 경고했다.

“댁과는 상관없는 일이니 이만 빠져 주시오.”

쿤은 오딘이 이 일을 외부에 알려 주길 바랐지, 위기에서 구해내주기를 바라는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그는 오딘을 낮게 평가하고 있었던 것이다.

돌연 쿤의 머릿속에 누군가의 언어가 전해졌다.

-여기를 빠져나가고 싶으냐?

놀란 쿤은 주위를 둘러보다 검은 머리카락의 남자가 미소를 짓고 있는 것을 보고 통신 마법으로 물었다.

[서… 설마 지금 저한테 말씀을 거신 거예요?]

오딘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에 쿤은 더욱더 놀랄 수밖에 없었다.

마법에 천부적인 소질을 지닌 그였기에 지금 건넨 말이 통신 마법과 다른 방식의 의사 전달이라는 것을 간단히 구별해낼 수 있었던 것이다.

그가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반증이다.

그럼에도 쿤은 걱정이 앞서 당부하듯 말을 전했다.

[저들은 신성 제국의 성기사들이에요. 무시 못할 존재들입니다. 저도 마법에는 일가견이 있지만 저들을 따돌리는 데 실패했어요.]

주의를 준 것인데 그는 전혀 기죽어 보이지 않았다. 도리어 입을 열어 성기사들에게 이와 같이 말했다.

“이 소년은 내가 데려가도록 하지.”

거의 선전포고나 다름없었다. 자신들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한 말에 성기사들의 안색이 눈에 띄게 싸늘해졌다.

급기야 한 성기사가 원형 방패와 검을 앞세우고 나섰다.

“이는 주신 아스카론 님의 뜻이다. 누구인지는 모르겠다만, 이 일을 방해하려 한다면 호된 죗값을 치르게 될 것이다.”

오딘은 가볍게 웃었다.

“치부가 있긴 있는 모양이로군.”

그러자 당장에 엄포를 놓았던 성기사의 눈이 치떠졌다.

“뭣이!”

“그게 아니라면 소년을 데려가는 데 신까지 들먹여 가며 방해할 이유가 없겠지.”

여전히 비꼬는 말투에 성기사의 분노는 투지로 변해갔고, 다른 성기사도 걸어 나오며 동료와 뜻을 같이했다.

“제명에 죽긴 싫은 모양이로군.”

쿤은 저들에게서 마나의 움직임을 읽었다. 결코 작지 않은 양이다.

당장에라도 전투가 벌어질 것 같은 분위기에 걱정이 앞섰던지 쿤은 다시 한 번 오딘에게 통신 마법으로 의사를 전달했다.

[그냥 피해주셨으면 되었을 것을. 정말 싸우실 생각이시라면 저도 돕겠습니다.]

분명히 전달되었을 텐데 오딘에게선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

긴장감은 점차 고조되었다.

눈앞의 대상이 크게 위협이 되지 못하리라 착각한 바람에 먼저 나선 성기사는 오딘을 향해 무방비 상태로 달려드는 우를 범하고 말았다.

마치 일검에 동강이라도 낼 기세였다.

욕심으로 번득이는 눈은 당장에라도 눈엣가시 같은 검은 머리카락의 청년에게 쓰러지라고 보챘다.

매서운 속도로 파고들던 성기사는 대상에게 이 보 앞까지 다가섰으나, 조금 전의 기세는 어디로 갔는지 움직임이 멎어 있었다.

살기가 가득했던 눈은 불신으로 가득 차 있었다.

“어, 어떻게…….”

성기사는 그 영문조차 알지 못했다.

자신의 명치 한가운데서 왜 피가 흘러나오는 것인지…….

온몸의 마나가 허공으로 흩어지며 허망하게 꼬꾸라지는 그의 모습은 주변 사람들에게 적잖은 파장을 불러일으켜 성기사들에게는 경각심을, 쿤에게는 의문을 던져 주었다.

근처에 있던 성기사 하나가 쓰러진 동료에게 부리나케 달려가 상체를 일으켜 세운 후 상태를 확인했다.

그러자 몸도 가누질 못하는 그는 호흡을 하는 것도 버거웠는지 꼴깍꼴깍 당장에라도 숨이 넘어갈 것 같았다.

동료를 이렇게 만든 대상에게 악감정이 치솟은 성기사는 오딘을 죽일 듯이 노려보더니 그것도 잠시, 즉각 마나를 이끌어 신성 마법을 펼쳤다.

“홀리 라이트(Holy Light:성스러운 빛)!”

곧 성기사의 손에서 눈부신 광채가 일었고, 그 빛은 손을 통해 고스란히 환자의 상처로 스며들었다.

그러나 빛이 거두어졌는데도 피는 멈추지 않았다.

‘어떻게 이런 일이…….’

치유력에 있어서는 제일간다는 신성 마법이 듣질 않으니 치유 마법을 발현한 성기사는 난처할 따름이었다.

팔에 들려 있던 동료의 몸은 곧 축 늘어졌고, 그의 죽음을 인지한 성기사의 입에서는 울분이 비명처럼 터져 나왔다.

“으아아아아!”

바닥에 그를 내려놓고서 성기사는 일어섰다. 그리고 분노에 찬 눈으로 오딘을 쏘아보았다.

오딘의 얼굴에서는 아무런 죄의식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것이 불타오르던 성기사의 감정을 부채질했다.

“네 이놈! 가만두지 않을 테다!”

성기사는 즉시 몸 안의 마나를 갈무리하며 신성 마법을 몸 전체에 둘렀다.

“세인트 가드(Saint Guard:신성 보호).”

반투명의 원형 보호막이 성기사의 몸 밖으로 투영되자 다른 성기사들 역시 행동을 같이했다.

남은 성기사들의 수만 해도 팔라딘을 제하고 다섯이었다.

상황을 지켜보던 쿤이 놀라는 동안에 성기사들이 동시 다발적으로 오딘을 향해 짓쳐들었다.

얼이 빠져 있던 탓에 쿤은 마나의 재배열조차 하질 못해 오딘을 도와주고 싶어도 그럴 수 없는 상황이었다.

가능한 게 있다면 통신 마법으로 위험성을 알리는 길뿐.

[위험해요, 피하세요!]

전후좌우, 무려 4면에서 공격이 펼쳐졌다.

제일 위험한 것은 등 뒤의 성기사였다. 그의 검이 당장에라도 오딘의 목을 날려 버릴 것 같았다.

끔찍한 광경이 연출될 것 같아 쿤은 이맛살을 찌푸리며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다.

그때 나무숲을 환하게 밝혀 줄 정도로 매우 진한 빛 무리가 일었다.

서걱!

단출한 소음이었다.

이후, 성기사들의 몸은 너 나 할 것 없이 양분되며 바닥으로 쓰러졌다. 보호막이 아무런 역할을 못했음이다.

그리고 그 자리에 응당 있어야 할 대상은 없었다.

쿤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흔적이라도 찾아보려 했으나, 땅으로 꺼진 것인지 하늘로 솟은 것인지 오딘은 보이지 않았다.

팔라딘의 반응 역시 쿤과 유사했다.

그는 사라진 대상의 행방을 파악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그 눈은 두려움에 물들어 있었다.

부들부들 떨리는 손은 그가 잔뜩 겁을 먹은 것을 입증했다.

마찬가지로 떨리는 입술에서는 나지막한 탄성이 터져 나왔다.

“소… 소드마스터…….”

방금 전 그 빛은 분명히 오러 블레이드였다.

팔라딘의 동공의 초점이 모아진 곳에는 남은 성기사가 질겁한 모습으로 미동도 않고 서 있었는데, 그 바로 뒤에는 오딘이 사악하게 이를 드러내며 웃고 있었다.

오딘이 등 뒤로 다가온 것을 그제야 알아차렸을까?

빠르게 몸을 돌려 뒤를 베어가려던 성기사는 ‘욱’하고 신음을 토했다.

황당하게도 자신의 검이 자신의 복부에 박혀 있었기 때문이다. 상대의 손에 의해서…….

오딘은 거추장스럽게 자신에게 기대려던 성기사를 손으로 가볍게 밀어 옆으로 넘어트리고선 팔라딘을 향해 다가왔다.

“또 그 소리군.”

길게 늘어진 흑룡검에선 성기사들의 몸에서 묻은 피가 미끄러지듯 흘러내렸다.

성기사들의 몸이 일순에 베어진 것, 그리고 오딘이 그곳을 벗어나 뒤쪽에서 기회를 엿보려던 성기사에게 소리 없이 다가온 것, 이 모든 게 찰나에 일어난 일이었다.

팔라딘의 뇌리에 경적이 울렸다.

‘상대하지 못할 자다. 나로서는 저자와 검을 맞대는 것조차도 불가능한 일일지 모른다.’

한 걸음, 두 걸음씩 그는 뒷걸음질을 치고 있었다.

이것이 치욕이라는 것을 느낄 새도 없었다.

오로지 이 상황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현실만이 강박관념이 되어 자꾸만 머릿속을 자극했다.

팔라딘이 발을 돌려 달아나려 하는 때에 마치 옆에서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래도 그나마 나은 녀석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나 보군.”

자존심에 먹칠을 하는 말이었다.

살면서 자신이 누군가에게 패배를 인정해본 적이 있긴 하던가?

그럼에도 팔라딘은 돌아설 수 없었다.

그를 가르친 검술 교관 역시도 마스터였다. 그 앞에서 얼마나 많은 무력함을 느꼈던가.

아무런 정도 섞이지 않은 낯선 사내와의 싸움은 미치도록 피하고 싶을 정도로 꺼려졌다.

‘더군다나 저자는 나이를 예측하기 힘들다. 하면 어느 정도의 무위를 지녔다는 말인가? 저자와 맞선다는 것은 자살 행위다.’

같은 마스터라도 엄연히 차이가 있다.

이를 구별하는 것 중에서 신체의 나이가 젊어진다는 것은 그 차이에 명확한 선을 그어주었다.

중원에서의 환골탈태나 반로환동은 이 로마노스 대륙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되었던 것이다.

물론 그런 자들은 극소수에 불과했다.

따라서 이 같은 사항을 알고 있는 자들보다는 모르는 자들이 더 많았다.

다행히 이 팔라딘은 그런 사람을 하나 알고 있었다.

바로 신성 제국의 성황이 그였다.

일의 심각성을 깨우친 팔라딘은 전속력으로 이곳을 벗어나기 시작했다.

천운이라면 천운이었다.

오딘은 그에게 관심을 두지 않았으므로.

다만, 비꼬는 목소리가 멀어지는 팔라딘의 귓전으로 날아들었다.

“겁쟁이가 따로 없군.”

분명 팔라딘이 어렵사리 고개를 돌렸을 때, 오딘은 그 자리에 선 채 멀어지고 있었다. 그런데도 목소리는 조금 전과 마찬가지로 바로 옆에서 말을 하는 것처럼 생생히 전해졌다.

‘정말 괴물 같은 자로구나. 목소리에 마나를 실을 정도라니……. 치가 떨릴 정도다. 소년을 놓쳤다는 것에 필시 질책을 받겠지만, 이는 감수해야 한다. 저자는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위험하다. 지금은 이 일에 저자가 끼어들었다는 것을 알려야 한다.’

팔라딘이 멀어지고 난 후에는 영혼이 빠져나간 시신들만 덩그러니 남았다.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널브러진 시신들을 바라보는 쿤에게 오딘이 웃으며 다가섰다.

“괜찮으냐?”

방금 무자비하게 살육을 자행한 사람의 얼굴 같지는 않았다. 그 점이 더한 괴이함을 불러일으켰다.

그래도 분명한 것은 쿤 자신에게는 이 사람이 적의를 품고 있지 않다는 점이었다.

평정을 되찾은 쿤은 얼떨떨한 얼굴로 대답했다.

“에~ 예.”

바로 그때, 시커먼 인영 둘이 오딘의 뒤에서 불쑥 모습을 드러냈다. 한 사람은 검은색의 무복을 입은 남자였고, 다른 한 사람은 로브를 걸친 남자였다.

쿤이 깜짝 놀라 몸을 오그릴 찰나, 그들은 오딘에게 허리를 조아리며 아뢰었다.

“늦었사옵니다. 소신들의 무능함을 책망하여 주십시오.”

“되었다. 그래도 용케 찾았구나.”

“운이 좋았사옵니다.”

두 사람은 대답을 하면서도 당혹감을 지우지 못하는 표정들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순식간에 오딘이 원 위치에서 사라져 버려 찾는 데 어려움을 겪은 것이다.

오딘이 쿤과 성기사들, 그리고 팔라딘과 얘기를 섞고 일을 치를 무렵, 그들은 보필해야 할 대상의 행방을 찾아 필사적으로 달려온 것이다.

그래도 신기하게 이들의 이마에서는 땀방울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그만큼 신체가 단련되었다는 얘기이리라.

어리벙벙한 얼굴로 세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다가 쿤은 잊고 있었던 일을 떠올리고는 허리를 숙이며 오딘에게 고마움을 표시했다.

“저, 오늘 일은 너무 감사했습니다. 어떻게 보답을 드려야 할지…….”

“돈이라면 좋겠군.”

오딘이 짓궂은 얼굴로 말하는 것을 진담이라고 받아들였는지 쿤은 진지한 표정을 하고서 주머니를 뒤적이기 시작했고, 그 모습이 여간 우습지 않았던지 오딘은 호탕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하, 하하하하! 되었다, 농이니라.”

얼굴이 벌게져서 어쩔 줄을 몰라 하는 쿤에게 오딘이 웃음을 그치며 물었다.

“보아하니 쫓기는 모양이구나. 행선지는 어디냐? 비슷하다면 나와 동행하는 것은 어떻겠느냐?”

바라 마지않은 물음에 쿤은 반색을 하다가 금세 침울한 얼굴이 되었다. 이 사람과 자신의 행선지가 같을 가능성은 매우 희박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던져진 질문이니 대답은 해야만 했다.

“제가 가려는 곳은 바리톤 왕성입니다. 대륙 남단에 위치한 곳이라고 들었어요.”

조금은 의외인 말이었다.

바리톤은 오딘 역시 너무 잘 알고 있는 곳이다. 그러나 이곳과는 꽤나 먼 거리여서 이유를 물었다.

“왜 그곳에 가려는 것이냐?”

쿤은 숨김없이 털어놓았다.

“얼마 전 알게 된 아저씨가 그곳에서 오셨다고 했어요. 바리톤에서 펜던트의 주인을 찾으러 오셨다고 했거든요.”

오딘의 눈이 약간의 놀라움에 물들었다. 그 일은 본인이 지시한 게 아니었던가.

그가 상념에 잠기는 동안에도 쿤의 말은 계속되었다.

“그 와중에 저들에게 쫓겼다고 했습니다. 아마도 이 일은 신성 제국에서 제법 지위가 높으신 분과 관련이 되어 있는 듯해요. 해서 아저씨는 더 이상 뒤를 캐내는 게 어렵다고 판단하시고 바리톤으로 돌아가려 했습니다. 하지만 얼마 전에…….”

끝마치지 못한 마지막 말은 울분이 가득 담겨 있었다.

쿤의 주먹이 분노로 부르르 떨렸다.

그러자 오딘이 그의 어깨에 손을 올려놓으며 자상한 어조로 물었다.

“어떻게 되었다는 거지?”

그때의 일을 회상하며 쿤은 어금니를 물고서 악에 받친 목소리를 냈다.

“돌아가셨어요. 저 사람들처럼 몸이 잘려서 말이에요.”

쿤은 정이 많은 소년이었다. 게다가 리먼은 살면서 그가 정을 주었던 몇 안 되는 존재 중 하나였다. 그러니 그의 죽음이 어찌 애석하지 않으랴.

삭여지지 않은 분은 제쳐 두고라도 죽은 지인의 한이라도 달래주고 싶었던지 쿤은 주머니의 돈을 모두 꺼냈다.

“이걸 드릴게요. 제가 바리톤에 이 일을 알릴 수 있게 도와주시면 안 될까요? 적어도 그곳과 인접한 마법진까지만이라도 다다를 수 있도록…….”

이후는 자신이 가진 장신구를 팔아서라도 그곳으로 이동할 생각이었다.

오딘은 쿤의 어깨를 짚은 채로 허리를 숙여 눈높이를 맞춘 채 나직이 웃었다.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구나.”

아리송한 말에 쿤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오딘은 그 의문을 풀어줄 생각이 당장엔 없는 듯했다.

* * *

고블린과 오크였다.

분명 앞쪽의 나귀에 올라탄 대상은 그들이었다.

고블린 샥은 대수롭지 않은 표정이었던 데 반해, 오크인 정크는 멍청해 보이는 표정으로 이곳저곳을 둘러보았다.

그 바람에 나귀는 힘이 드는지 가끔씩 기다란 목을 돌려 등에 탄 오크 주인을 원망스럽게 쳐다보았다.

그 뒤로도 십여 명의 사람들이 더 있었지만, 아무도 나귀의 고충을 헤아려 주는 이들은 없었다. 그들은 저들끼리 얘기를 나누기에 바빴고, 사색에 잠겨 있었기 때문이다.

얘기의 골자는 아레인의 귀족인 보탄 백작에 관해서였다.

“글쎄, 검에서 광선이 나가지 뭡니까? 전 그분이 마법사인줄만 알았습니다.”

“내가 전에 봤던 뚱보는 날렵하기가 예사롭지 않았는데, 표범보다도 빨라 보이는 놈이 단칼에 죽었다니…….”

“오러 블레이드라고 했잖아. 마스터들만 구사가 가능하다는 오러 블레이드…….”

흥분해서 침까지 튀겨 가며 말을 하는 사람들.

그때 일행 중 한 명이 의문을 품고 질문을 던졌다.

“한데, 어째서 마스터가 아레인 왕국에 있는 거지?”

“풀 나는 곳에 풀만 나라는 법이 있습니까? 인재가 태어난 것이겠지요.”

“마스터라면 제국에서도 작위를 인정받을 텐데…….”

이 자리에는 마르크와 헤르미온, 틴도 함께 있었다.

헤르미온은 전과 달리 수수한 옷차림새였다.

깔끔한 멋을 내는 긴 주름치마에 레이스 장식이 달린 블라우스, 그 위에 바람결에 나풀거리는 얇은 겉옷을 걸친 모습은 누가 봐도 조신한 숙녀 같았다.

마르크의 귀는 저들의 얘기를 듣고 있었으나, 시선은 헤르미온을 향해 있었다. 그리고 평소와 다르게 내숭을 떠는 그녀를 보던 그의 입에서는 결국 웃음보가 터져 버렸다.

“…하하하하, 하하하하하!”

웃음은 좀체 그칠 줄을 몰랐고, 덕분에 사람들도 대화를 멈추고 그를 바라보았다.

주체하지 못하는 웃음으로 인해 마르크는 배꼽을 잡고 힘에 겨워했다. 그리고 허덕이다 못해 나귀에서 떨어질 뻔한 그의 어깨를 틴이 부여잡음으로써 낙마하는 일은 겨우 면할 수 있었다.

눈에 눈물까지 머금고 마르크는 손가락으로 헤르미온을 가리키면서 틴에게 하소연을 했다.

“하하! 틴 님, 저것 보세요. 미치겠어요. 캬캬캬!”

헤르미온이 표독한 눈으로 마르크를 응시했으나 사태의 심각성을 깨우치지 못했는지 그는 대놓고 그녀를 비꼬았다.

“저게 어울려요? 하하하하…….”

꽤나 오랜 시간 동안 그녀를 관찰한 마르크였기에 지금의 복장부터 자태, 표정 하나하나 모두가 우스꽝스럽게만 보였던 것이다.

놀림을 당하고 있는 것을 알아차렸는지 그녀의 표정은 더욱 싸늘하게 변해갔다. 그러자 따라 웃으려던 사람들은 분위기를 깨닫고 애써 시선을 돌렸다.

헤르미온이 나귀를 몰아 다가오고 있음에도, 마르크는 눈도 뜨질 않은 채 주절거렸는데 그게 화근이 되었다.

“기왕이면 귀에 꽃도 하나 꽂지 그러냐? 아하하하하… 악!”

거리를 좁힌 헤르미온의 주먹이 빡! 하는 소리가 날 정도로 그의 머리를 강타한 것이다.

마르크는 눈앞에서 별이 핑핑 도는 것만 같았다.

해롱거리는 그를 보면서 헤르미온은 분명히 경고했다.

“다시 한 번 그딴 소리 지껄였다가는 절대 가만두지 않겠어.”

사람들, 그리고 고블린 샥과 오크 정크 역시도 고개를 돌려 조심스레 그녀를 살폈는데, 그것 또한 헤르미온에게 잠재되어 있던 분노를 일으켰다.

“뭘 봐, 구경들 났어?”

날카로운 목소리에 대항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틴도 정색한 채 마르크를 외면했다. 그러자 졸지에 따돌림을 받은 마르크는 깊이 한숨을 지었다.

“에휴, 넌 여잔데 점점 더 주먹이 단단해지는 것 같다. 그러다 나중에 서방님의 머리통까지 박살내는 거 아냐?”

헤르미온이 도끼눈을 뜨고 즉각 팔을 뻗어 멱살을 움켜쥐려 하자 마르크는 사력을 다해 나귀를 돌려 그녀의 손아귀에서 벗어났다.

“사, 사실을 말한 거야. 사람은 솔직할 권리가 있잖아. 힘으로 그걸 누르려고 하면 안 되지.”

마르크가 나귀를 달려가자 헤르미온도 자신의 나귀를 몰아 뒤를 쫓았다.

난데없는 나귀 추격전이 벌어지는 동안, 헤르미온은 잠시나마 설렘을 떨칠 수 있었다.

얼마 후에 재회하게 될 사람에 대한 막연한 설렘 말이다.

* * *

이른 아침부터 제라드는 부산을 떨었다.

어쩐지 들떠 있는 모습이었다.

짐을 꾸리고 너저분해진 방을 치우는 것은 그의 몫이었다. 때문에 필요 없는 옷들이 사방으로 널려지고 방이 지저분해지는 데에도 시중들은 멀뚱히 서서 난감해할 뿐이었다.

자신들이 모시는 후작님의 명령이었으므로.

이처럼 제라드 후작은 될 수 있으면 주변 사람들을 시키려 하지 않았다.

방에 있는 사람은 그만이 아니었다.

켈타스 후작이 한쪽 소파에 앉아 졸음을 떨쳐 내지 못한 눈으로 부산을 떨어대는 그를 보며 비꼬듯이 말했다.

“신났군, 신났어. 피크닉이라도 가는 소년 같소.”

“그렇게 보이오?”

묻고는 있지만 제라드의 동작은 멈추지 않았다.

그의 손을 떠난 옷가지 하나가 나풀거리며 날아와 켈타스의 머리 위로 내려앉았다. 눈을 가리는 옷을 벗겨 낸 켈타스는 심통이 가득 찬 표정으로 물었다.

“그건 그렇고 왜 장로요? 장로는 할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질 않소.”

그의 말처럼 제라드는 장로라는 직책을 겸임하고 있었다. 아직 소속되어 있는 인원은 없었지만, 그의 임무는 대주, 단주들만큼이나 막중했고 할 일 역시 산더미 같았다.

당시 장로에 역임되었을 때 제라드는 무척이나 기뻐했다.

자신 또한 아레인에 중요한 존재가 되었다는 생각에서였다.

아레인의 권력은 이처럼 중원화가 되어가는 무리들에 뭉쳐 있었다.

그 말을 듣고서야 손이 멈춘 제라드는 등을 돌려 켈타스를 향해 모질게 쏘아붙였다.

“예끼, 이 사람! 시샘을 할 데에다 해야지. 난 일을 하러 가는 것이지 놀러나 가는 게 아니지 않소.”

“그럼 내가 대신 가줄 수 있소이다. 내 대신 음영대의 훈련이나 부탁하오. 힘든 일일 텐데 내가 대신 가주지.”

정말 그러기라도 할 것처럼 켈타스가 일어섰는데, 그의 눈에 쌓인 피로는 말끔히 가셔 있었다.

제라드는 헛기침을 하며 딴청을 피웠다.

“허험, 이미 칙명이 떨어졌소이다. 오딘 님의 명령을 거스를 수가 없으니 그러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구려.”

근래의 아레인은 태평성국이었다.

게다가 왕성에 거주하는 귀족들은 오랜 세월 왕성에만 틀어박혀 있었기에 따분함을 느끼던 찰나였다. 그러니 왕성 밖으로 나간다는 데에 제라드가 들떠 있는 것이다.

도무지 양보해줄 기미가 보이지 않자 켈타스는 다시 소파에 앉으며 불평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못 미더운 부대주를 보내놓아서 마음이 편치 않구려. 어찌 우리 음영대는 그리 인재가 없는지 모르겠소. 보탄 백작이 이끄는 흑풍단의 샤르트 준남작 정도만 되어도 내 걱정조차 하지 않을 텐데…….”

“이 사람, 그래도 암습에 가장 뛰어난 것은 자네의 음영대가 아닌가.”

애초에 음영대는 그런 취지로 만들어졌다.

무력에 있어서는 최하위라 할지라도 기습이나 암살 등 특별한 임무를 수행하는 데 가장 최적화가 된 곳이 바로 음영대였다.

그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럼에도 켈타스가 만족하지 못하는 눈치이자 제라드는 그의 어깨를 다독여 주었다.

“언젠가 음영대가 빛을 볼 날이 있을 걸세. 그분께서 쓸모도 없는 단체를 만들지는 않으셨을 테니까.”

그제야 켈타스는 수긍하는 눈치였다.

조금 밝아진 그의 모습을 보며 제라드는 다시 짐을 꾸리기 시작했다.

그런 그의 등을 향해 켈타스가 물었다.

“그러나저러나 무슨 일이오? 오딘 님께서 시키신 일이라는 게…….”

그 질문에 제라드는 어려울 것 없다는 듯이 내용을 털어놓았다.

“일이 생기셔서 이스론 상단의 사람들을 만나기가 힘드시다는군. 그 일을 대신해서 맡아달라고 하셨네.”

* * *

쿤의 표정엔 불만과 의문이 담겨 있었다.

그는 왜 자신이 로만 공국의 공왕을 만나러 가는 길에 동참하게 된 것인지 연유를 알 수 없었다.

그렇다고 따르지 않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는데, 그 자리에 남겨졌다면 자신의 행보는 앞으로 더욱 위험해질 것이었기 때문이다.

큼지막한 성문 앞에서 쿤이 오딘에게 물었다.

“공왕님은 잘 아시는 분인가요?”

오딘은 미소를 머금은 채 고개를 저었다.

“그, 그럼 미리 약속이라도 하고 오신 거죠?”

쿤의 질문에 오딘은 또다시 같은 반응을 보였다.

그러자 쿤의 얼굴이 일순 당혹함에 물들었다. 무례라도 저지르는 것은 아닌가 걱정이 되었기 때문이다.

충분히 그럴 공산이 있었다.

오딘이라는 이 사람의 무력은 가늠하기 힘들 정도다.

그렇기에 자만심은 당연히 클 것이니 힘으로 진입을 시도한다는 생각을 가질 수도 있다.

쿤이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것은 전적으로 오딘의 탓이었다. 지극히 말을 아껴 이곳에 온 이유조차도 털어놓지 않았으므로.

외성문에 다가가자 그곳을 지키고 있던 수문병 중 하나가 긴장한 빛으로 다가와 나름 위엄 있는 목소리로 물었다.

“어디에서 오셨습니까?”

그에 말없이 오딘을 따르던 쉬바인이 걸어 나오며 정중한 태도로 말을 건넸다.

“아레인에서 왔습니다. 이분께서는 공왕을 만나고 싶어 하십니다.”

“아레인이라면 대륙 남단에 있는?”

“그렇습니다.”

수문병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중얼거렸다.

“아레인에서 온다는 얘기는 전해 듣지 못했는데…….”

쉬바인이 오딘의 눈치를 살피다가 수문병의 귀에 대고 낮게 속삭였다.

“카반에 관해서요. 당신들이 치를 떨고 있는 마적단과 연관된 일이니 어서 전해주시오.”

순간 수문병의 한쪽 눈썹이 찡그려졌다.

욕심 같아서는 더 정확한 얘기를 듣고 싶었지만, 일개 수문병이 그런 세세한 사정까지 물어볼 수는 없었다.

“잠시만 기다리시오. 내 다른 분을 모시고 오겠소.”

말을 마친 수문병은 부리나케 쪽문으로 달려갔다.

조금 후 경비대장이 수문병을 따라 나왔다.

걷는 것처럼 보였으나 그는 뛰고 있었다. 일을 꽤나 중하게 생각했음이라.

다가오자마자 그는 쉬바인에게 자초지종을 듣기를 원했다.

“카반이라고 하셨다고 들었소. 그들과 원한이라도 지신 게요?”

묻고 있는 표정으로 보아서는 마치 그런 일이라도 일어났기를 바라는 듯했다.

그러자 쉬바인은 짐작했다는 듯 의연한 목소리를 냈다.

“마찰이 있었소이다. 해서 저희 오딘 님께서는 그 부분에 관해 로만의 공왕님과 의논을 하시고자 합니다.”

거짓을 말하는 것 같지는 않았기에 경비대장은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공왕을 알현한다는 것이 절대 간단한 문제는 아니었지만, 곧 결정이 섰다.

“잠시만 기다리시오. 내 안에 가서 말씀을 드려 보겠소.”

조금 후, 경비대장은 다시 한 사람을 데리고 나왔다. 자주색 옷을 입은 젊은이였다.

경비대장은 우선 그의 소개부터 했다.

“저희 공국의 레오노 공자님이십니다. 안 그래도 카반의 울프에 대해…….”

말이 끊기기도 전에 오딘의 불평이 들려왔다.

“사람을 꽤나 피곤하게 만드는군.”

곁에 서 있던 쉬바인과 음영대 무사의 시선은 더욱 곱질 않았다. 주군이 무시를 당했다는 데에서 오는 못마땅함이 가득 찼던 것이다.

자신들의 주군인 오딘은 공왕을 만나려고 왔지, 경비대장이나 공왕의 아들을 만나려고 온 것이 아니질 않은가.

쿤은 싸늘해진 분위기를 살피며 조마조마해했다. 마찰이 빚어져서 좋을 것은 없을 테니까.

다행히 공왕의 아들이란 자가 살갑게 나왔다.

“무례가 되었다면 죄송합니다. 공왕님께서는 바쁜 일이 있으셔서 만나시려면 시간이 좀 걸릴 것이옵니다. 큰일이 아니라면 제 선에서 얘기를 맞춰보는 것도 나쁘진 않을까 합니다.”

이름 정도나 겨우 알고 있을 법한 왕국에서 나왔다는 사람들에게 이런 태도를 보인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그 모습이 나쁘진 않았던지 오딘의 태도가 조금 누그러졌다.

“가벼운 사안은 아닌데 괜찮겠나?”

여기서 또 실례가 될 수 있었다.

어디로 보나 오딘과 레오노의 나이는 비슷해 보였다. 더군다나 그는 공왕의 아들이 아닌가.

상대가 말을 높여 주었음에도 하대를 하니 좋은 분위기가 이어질 수 없었다.

경비대장의 안색이 확 찌그러졌다.

그러나 레오노는 자존심도 없는지 그를 제지하고는 환하게 웃으며 오딘을 응대했다.

“일단 안으로 드시지요.”

표정 관리에 애를 쓴 기색이 역력했다.

다소 가식적이라 할지라도 그 모습도 나쁘게 비춰지지 않아 오딘은 가볍게 웃어넘겨 버리고는 레오노의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정갈한 실내, 반쯤 열린 창문에서 불어오는 미풍이 은빛 커튼을 흔들었다.

시종이 각자 앉을 자리의 의자들을 하나씩 빼주었으나 착석하는 사람은 오딘과 레오노, 그리고 쿤뿐이었다.

쿤은 자신보다 어른인 쉬바인과 음영대의 무사가 앉지 않자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지만, 오딘이 미소를 지으며 그의 어깨를 가볍게 눌러 다시금 앉게 했다.

이를 레오노는 흥미롭게 지켜보았다.

곧 차가 대령되었다.

시녀가 찻잔의 뚜껑을 열자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며 그윽한 향이 풍겼다.

“차의 향이 아주 좋습니다. 아르모노라고 하는 이 차는 저희 로만 공국의 자랑입니다. 뜨거우니 천천히 맛을 음미하며 드셔 보시지요.”

여전히 레오노는 오딘에게 좋은 모습을 비췄다.

그러나 이어지는 오딘의 행동은 이해할 수 없었다.

찻잔을 들더니 그 뜨거운 차를 입속에 확 털어 넣는 것이 아닌가.

혓바닥은 물론이고, 속이 다 뒤집어질 정도의 뜨거움이다. 해서 레오노의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하지만 오딘은 그런 레오노의 반응은 관심도 없다는 듯 입을 열었다.

“각설하고 본론으로 넘어가지.”

순간 레오노를 보필하던 근위 기사가 눈을 부릅뜨고 당장에라도 달려들려 했다.

당사자인 레오노 역시 자신에게 계속해서 무안을 주는 남자가 못마땅한 것은 사실이었다. 더군다나 초면이 아닌가.

레오노는 앉은 채로 팔을 뻗어 근위 기사를 제지하고는 당당한 태도로 물었다.

“실례가 안 된다면 아레인에서 어떤 작위를 가지고 계신지 듣고 싶습니다.”

적어도 공작가 이상이라면 억울함이 조금 덜할 것 같았다.

그러나 여전히 오딘은 대답이 없었다.

이대로 계속 두었다가는 마찰이 생길 것 같았는지 쉬바인이 통신 마법으로 자신의 의사를 전달했다.

[이분은 저희 아레인의 하늘입니다. 여왕 폐하보다도 높은 지위를 가지고 계십니다. 그러니 양해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또한…….]

레오노는 말을 전하는 대상이 로브를 입은 마법사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아차렸다. 그리고 그가 전한 말에 적잖이 놀라고 있을 무렵, 뒷말이 들려왔다.

[겉으로 드러난 나이에 속지 마십시오.]

레오노의 얼굴이 금세 사색이 되어버렸다.

아레인이라는 왕국을 높게 평가하던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한 나라의 수장이 자신들의 공국을 찾았다는 것에 대한 의외로움 때문이었다.

찌푸려졌던 인상을 펴며 오딘을 대하려 할 때, 다시 한 번 통신 마법이 뇌리에 전해졌다.

[참, 제가 말씀을 드렸다는 것을 내색하시면 안 됩니다. 제가 곤란할 수 있으니까요.]

레오노는 굳이 고개를 끄덕이지 않고 쉬바인의 눈을 직시하는 것으로 그렇게 하겠다는 의사를 표시했다.

그리고는 오딘을 너그럽게 대하기 시작했다.

“말씀하시기 곤란하시다면 묻지 않겠습니다. 하대가 편하시면 그렇게 하십시오. 더는 문제 삼지 않겠습니다.”

그 말을 가장 고깝게 받아들인 것은 근위 기사였다.

“공자 전하, 그 무슨 말씀이시옵니까? 아니 될 말씀입니다.”

분위기 파악을 못하고 있다고 생각되는 근위 기사를 레오노는 실쭉한 눈으로 째려보았다.

그제야 근위 기사는 본분을 깨달았는지 입을 닫고 고개를 숙였다.

“시, 신이 경솔했사옵니다.”

만일 그가 근위 기사단장 정도 되었다면 이 일을 참견하고 나섰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일개 근위 기사일 뿐이었다.

차후 공왕의 자리에 앉게 될 공세자이다. 함부로 자신의 의견을 피력할 만한 존재는 아니라는 얘기다.

뉘우치는 기색을 보이는 그를 탓할 생각은 없었던지 레오노는 시선을 거두고 오딘을 바라보았다.

“그럼 길게 얘기할 것 없이 본론을 꺼내주십시오.”

오딘은 망설임 없이 입을 열었다.

“여기 오는 동안 그 녀석들과 마찰이 있었다. 완전히 소탕한 것은 아니지. 해서 카반에 우리 아레인의 전력 중 일부를 머물게 할까 한다. 요구할 것은 그것이다.”

“소탕이라고 하셨습니까? 카반의 울프를 말입니까?”

오딘이 고개를 끄덕였음에도 레오노는 쉽게 믿질 못하는 눈치였다.

공국에서조차 눈엣가시, 아니 최대의 난제라 생각했던 마적단이다. 뿌리를 뽑을 수 있었다면 왜 진작 하질 않았겠는가.

저들이 얼마의 마적단을 상대해줬는지는 모르겠으나 언젠가는 해야 할 일을 거들어주었다는 것만으로 반길 만한 일이었다.

그러나 곧 레오노의 기쁨은 멎었다.

눈앞의 사내가 요구하는 것은 간단한 일이 아니다. 타 왕국이 자신들의 공국에 군사를 내는 것이다.

공왕은 많은 권한을 레오노에게 위임하였다. 그러나 이 일은 혼자서 간단히 결정지을 사안이 아니었다.

“저, 그 일은 시간을 좀 주셨으면 합니다. 그것은 저희 귀족들과 상의를 해봐야 할 듯합니다.”

어려워하며 하는 말이었지만 의외로 오딘은 순순히 받아들였다.

“급할 건 없지. 다만, 너무 오래 끌지 말아줬으면 좋겠군.”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의논을 매듭짓도록 하겠습니다. 한데, 몇 명 정도를 잔류시키실 예정이신지?”

“많으면 삼십, 그보다 적을 수도 있다.”

얼핏 듣기에는 적은 수를 잔류시킨다니 만족스러웠지만, 한편으로는 도통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다.

다른 대상도 아니고 카반의 울프와 마찰을 일으켰다면서 고작 30명을 주둔시킨다고 하니 말이다.

자신이 신경 쓸 부분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같은 적을 두었다는 동질감을 느껴서인지 레오노는 걱정스레 말했다.

“그곳은 영주가 없습니다. 삼십의 인원으로는 그들을 막을 수 없을 겁니다.”

“그 말은 주둔을 허용할 수 있다는 말이겠군.”

레오노의 눈빛이 순간 흔들렸다.

사실 카반의 울프만 제거해준다면, 아니 그들의 발목을 붙잡아준다고만 해도 자신이 공왕의 입장이라면 카반을 양보할 생각마저 있었다. 마적단이 그곳에 뿌리를 내리면서부터 카반은 애물단지로 전락한 것이다.

이들은 카반을 로만의 지도에서 떼어내서라도 마적단을 멀리하고 싶었던 것이다.

있으나 마나 한 곳, 그곳이 카반이었다.

당최 레오노는 이 사람이 무슨 의도로 이렇게 나오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혹시나 하는 의문까지 겹쳐 그는 결례를 무릅쓰고 다시 한 번 아까와 같은 요구를 했다.

“아레인을 상징하는 문양을 다시 한 번 볼 수 있겠습니까?”

오딘이 고개를 끄덕이자 쉬바인은 그것이 허락을 뜻함임을 깨닫고 품 안에서 문양이 그려진 비단을 꺼내 레오노에게 건네주었다.

이들의 정체가 마적단이라면 결코 가지지 못할 물건이었다. 왕가를 상징하는 문양은 아무나 소지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으므로.

뚫어져라 그것을 바라보며 확인을 거친 다음에야 레오노는 나직이 한숨을 내뱉고 일어섰다.

“일단은 말씀을 드려 보겠습니다. 그리고…….”

흥미로운 얼굴로 자신을 살피는 검은 머리카락의 남자를 보며 레오노는 뒷말을 이었다.

“될 수 있으면 저희 쪽의 병력도 붙여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카반의 울프는 매우 위험한 존재니까요.”

“매우 까다로운 녀석들이었던 모양이군.”

“창피하지만 솔직히 얘기하자면 그렇습니다. 그들은 저희 공국을 노리고 있으니까요. 카반은 시작일 뿐이었습니다.”

“본 좌와 거래를 하겠나?”

“거래라면 어떤……?”

“그 마적단을 몰아내는 대가로 카반을 우리에게 십오 년 동안 맡기는 거지.”

황당무계한 요구였다.

실색을 금치 못하는 레오노에게 오딘은 뜻하는 바를 분명히 말했다.

“물론, 지금 본 좌가 카반에 잔류병들을 두고자 함은 끝나지 않은 전투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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