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인연의 꼬리 (31/67)

인연의 꼬리

마적단의 주둔지에 도착하기 전 오딘은 잠시 멈췄다.

그러자 그를 따라온 무사들 중 일부가 흙을 걷어내기 시작했고, 이후 드러난 마른 나뭇가지들과 지푸라기까지 치워내자 큼지막한 나무판자가 드러났다.

그마저 치우자 한 무사가 구덩이에서 빠져나와 오딘에게 읍을 했다.

“발각되지 않았나 보군.”

“예, 그렇습니다.”

이 무사는 이곳을 지키는 파수꾼의 역할을 한 셈이었다.

카반의 울프에게 빼앗은 보물이 얼마나 많았던지 반경 10여 장에 고루 걸쳐 파묻은 상태였다.

또한 구석에는 작게나마 무사가 따로 생활하는 공간도 만들어져 있었다. 그것들을 보며 오딘은 흡족한 얼굴로 감탄사를 내뱉었다.

“기대 이상이로군.”

원래 오딘이 남의 돈이나 갈취하는 작자는 아니었다. 하지만 이 마적단은 죽여도 괜찮겠다는 판단이 들었다.

거기에 마르크의 일과 자신의 일까지 겹쳐 버렸다.

꼭 이스론 상단의 편의를 봐주기 위해서는 아니었다. 후에 아레인에서 레인 상단 쪽으로 사람을 보낼 때를 생각해봐도 위해가 될 대상은 미리 제거해버리는 편이 낫기 때문이었다. 필요악도 아니니 세상에 존재할 필요가 없다고 여겼던 탓이다.

오딘은 보물에서 눈을 떼고는 그들의 주둔지를 바라보았다.

“이곳은 우리가 접수하는 편이 낫겠군. 이 많은 걸 아레인으로 옮기는 것도 일일 테니.”

음영대 10명을 이곳에 남게 한 후 오딘은 나머지 인원을 끌고 라파고로 나아갔다.

전부가 온 것은 아니었지만 인원이 많이 보강되어 전보다는 많아 보였다.

마적단의 무리 앞에는 두 사람이 서 있었다.

바로 엘룬과 발본이었다.

그들은 이쪽을 쳐다보며 서 있었는데, 눈초리가 여간 날카롭지 않았다.

그를 보며 음영부대주가 입을 열었다.

“무척이나 열 받은 모양입니다.”

오딘이 데리고 온 인원수는 전과 별로 다르지 않았다.

음영대 20명과 질풍대 7명, 흑풍단 7명, 철왕대 7명이 전부였는데, 이 중 음영대 10명이 보물을 지키고 있으니 오딘과 쉬바인까지 포함해 33명이 전부였다.

자연히 엘룬에게는 경계심보다 자만심이 커졌다.

“저놈들이 맞느냐?”

엘룬의 뒤쪽에 몸을 숨긴 청년에게의 물음이었다.

그러자 청년은 감히 저들을 마주 보지 못하고 겁을 먹은 채로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그 모습이 한심하게 비춰졌는지 엘룬은 청년을 나무랐다.

“사내자식이 겁이 많구나. 난 누가 내 등 뒤에 몸을 숨기는 것을 싫어한다. 앞으로 나오도록.”

마적단들에게 이 같은 일은 영광으로 여겨질 만한 일이었다. 청년도 그 말에 용기를 얻었는지 조심스레 엘룬의 옆에 섰다.

이를 오딘은 매우 흥미롭게 쳐다보았다.

그가 청년을 마적단에 보낸 이유는 결코 호의가 아니었다.

그는 힘 있는 자의 곁에 붙어 간언이나 일삼고, 이익이나 욕심을 위해서 파렴치한 짓거리들을 서슴지 않는 협잡꾼이나 모리배 같은 작자들을 지극히도 싫어했으므로.

자신이 누군가의 손에 놀아나고 있다는 것도 모르고 청년은 벅차오르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했다.

‘잘하면 나는 인정을 받아 정식 단원이 될지도 모른다. 그렇게만 된다면 많은 권한을 부여받을 것이다.’

오딘에 대해 전혀 몰랐기에 가능한 생각이었다.

마적단이 소탕되고, 남은 이들의 분노를 온몸으로 받아야 하는 것이 자신의 운명임을 이때까지도 청년은 알아채지 못했다.

어림잡아 마적단의 수는 2백에 달했다. 그로도 모자라 계속해서 모이고 있는 중이었다.

그럼에도 음영대와 질풍대, 흑풍단과 철왕대는 전혀 기죽은 기색이 아니었다. 도리어 어서 명령이 떨어지기를 기다리고 있는 눈치였다.

돌연 발본의 지팡이 상단부에 검은 기운이 뭉쳐 들더니 곧장 오딘을 향해 거무튀튀한 빛줄기가 날아들었다.

그러자 쉬바인이 오딘의 앞쪽으로 나서며 재빠르게 마법을 발현시켰다.

“배리어(Barrier:방어벽).”

마나가 뭉쳐 들며 쉬바인의 지팡이에서 넓게 퍼지더니 순식간에 네모난 방어막이 형성되었다.

발본이 쏘아 보낸 검은 줄기는 그에 부딪쳐 금세 소멸되고 말았다.

“흑마법사인 모양입니다. 저자는 제가 상대하겠습니다.”

오딘에게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이상히 여긴 쉬바인이 등을 돌려 그를 보자 뭔가 못마땅해 보이는 표정이었다.

자신이 나댄 것이 결례를 범한 것이라고 생각했는지 쉬바인은 멋쩍은 얼굴을 하고 한 걸음 물러섰다.

“죄, 죄송합니다.”

“죄송할 것 없다. 흑마법이라는 게 신기해서 쳐다보았을 뿐이지, 다른 뜻은 없다. 흠, 재미있구나. 검은 기운이라니… 그에 대해 더 듣고 싶군.”

쉬바인은 신이 나서 지껄였다.

“흑마법은 백마법과 상극되는 마법입니다. 저들은 암흑의 계약을 맺어 마법을 사용합니다. 대신 더 강력한 힘을 행사할 수 있고, 또 계약을 맺은 대상에 따라 그 힘이 더욱 커질 수도 있습니다.”

“호오, 재미있구나. 그럼 넌 왜 흑마법을 배우지 않고?”

다시 쉬바인의 대답이 이어졌다.

“흑마법은 대신에 고통을 수반합니다. 그들은 암흑의 마나를 다스리기 때문입니다. 저자가 후드를 뒤집어쓴 까닭도 얼굴이 흉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심한 사람은 앙상한 뼈만 남을 정도라고 하더군요.”

정말 그럴지도 몰랐다. 오딘이 보는 발본은 손에 장갑까지 끼고 있었으니까.

배우고자 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냥 궁금할 뿐이었다.

벌써 마법에 관해 여러 권의 책을 읽은 까닭에 일종의 재미가 들려 버렸던 것이다.

그러나 오딘이 접한 책에서는 흑마법을 접할 수 없었다. 이는 대륙에서도 철저히 금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쉬바인의 말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저자처럼 흑마법사들은 잘못된 길에 빠지기 십상입니다. 대륙 어느 곳에서도 흑마법사들은 받아주지 않으니까요.”

“왜지?”

“그들은 성격도 괴팍하고 대부분 포악하다고 들었습니다. 또한 과거에 잊지 못할 사건이 있었습니다.”

“잊지 못할 사건?”

“예. 팔 서클의 마도사가 대마왕과 계약을 맺어 이 세상에 불러들인 적이 있었다고 합니다.”

“대마왕이라…….”

얼핏 읽은 적이 있는 것도 같았다.

책의 제목은 생각이 나지 않았지만, 대마왕이라는 존재 때문에 세상이 폐허가 된 적이 있었고, 세계의 균형을 담당하고 있는 드래곤들이 뭉쳐 몰아냈었다는 이야기가 그것이었다.

“드래곤부터 시작해서 못 본 녀석들이 아직 너무 많군.”

드래곤이라는 말에 쉬바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어느 때부터인지 오딘은 드래곤이라는 이름만 나오면 대놓고 깎아내리기 시작했는데, 오늘도 그러했다.

“그 자식들은 뭐가 그리 대단하다고 산속에 처박혀 사는 거야?”

그러면서 오딘은 쉬바인의 표정을 관찰했다.

아니나 다를까 그의 얼굴은 금세 붉게 달아올랐다. 드래곤에 대해 여전히 과민 반응을 보이는 것이다.

오딘이 그를 조금 더 놀려 주려고 하는데, 저쪽에서 불만스러운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 거지?”

실수를 깨닫고 오딘이 사과의 한마디를 했다. 그러나 그 말은 전체적으로 볼 때 사과가 아니었다.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군. 어서 편히 눈을 감게 해주었어야 하는데 말이야.”

그 한마디가 저들의 화를 돋우었다.

몇몇 마적들은 화를 못 이겨 엘룬의 허락이 떨어지기도 전에 달려 나갔다.

엘룬 역시 얼굴이 구겨져 있던 차라 그들을 탓할 생각이 없었다.

다른 마적들도 청을 올렸다.

“단장님, 어서 명령을 내려 주십시오!”

표정을 더욱 구기며 엘룬은 즉시 명을 내렸다.

“우리에 대항한 것을 뼈저리게 뉘우치게 해주어라! 단 한 녀석도 살려 보내서는 안 된다!”

“넵!”

제법 우렁찬 대답 소리가 터지며 마적단들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오딘이 있는 곳을 향해 짓쳐들었다.

오딘에게서도 명이 떨어졌다.

“쉬바인이 저 녀석과 붙는 게 낫겠군. 음영부대주가 그 옆의 놈을 상대하고.”

“명을 받들겠나이다.”

곧 전투가 개시되었다.

음영부대주와 쉬바인, 그리고 2명의 철왕대를 제외한 아레인의 전력은 2백이 넘는 마적단들과 마주쳐 나갔다. 그러는 동안에도 막 도착한 마적단들이 가세하고 있었다.

2명의 철왕대는 간이 의자를 펴서 오딘의 뒤쪽에 놓은 뒤, 그가 착석하자 매서운 눈으로 주변을 경계하기 시작했다. 혹시라도 이곳에 들이닥칠 적을 대비해 만반의 준비를 하는 것이다.

이들은 오딘의 앞에 적을 다다르게 하는 것 자체를 불충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앞쪽에서는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놀랍게도 얼마 되지 않는 아레인의 무사들은 무려 2백이 넘는 마적단들을 모두 막아내고 있었다.

그중 실력이 미비한 마적단들은 제대로 저항도 못해본 채 바닥에 드러누웠고, 그 모습은 마적단들에게 경각심을 불러일으켜 세웠다.

그를 보는 엘룬의 시선은 곱지 않았다.

“보통 놈들은 아니로구나.”

상대는 30명 정도다. 그들 중 몇 녀석만 쓰러뜨려 준다 하더라도 전세를 금방 뒤집을 수 있을 것 같아 엘룬은 검을 빼어 근처에 있던 질풍대에게 달려들었다.

쐐엑-!

검이 허공을 가르는 소리가 예사롭지 않았다.

미처 신경을 쓰지 못하고 있던 질풍대가 엘룬의 검에 난자당할 무렵이었다.

카칵!

쇠가 긁히는 소리가 들렸다.

엘룬의 검은 누군가의 검과 부대끼고 있었다.

그 검의 주인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네 상대는 나다.”

엘룬은 싸늘한 시선으로 음영부대주를 응시하다 돌연 웃기 시작했다. 비웃음이었다.

“지나친 자신감은 화를 불러올 텐데?”

“길고 짧은 건 대봐야 알겠지.”

둘의 긴장감이 증폭되는 순간, 반대편에서는 마법의 충돌이 있었다.

쿠쾅!

붉은 기운과 검은 기운이 허공에서 부딪치며 생긴 현상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쉬바인은 발본과 대치하는 중이었다.

그의 눈초리가 발본에게 고정되어 있는 것에 반해, 발본의 눈은 계속해서 오딘을 좇았다. 그럼에도 좀처럼 거리가 줄어들지 않는 이유는 쉬바인의 방해 때문이었다.

“비켜라.”

음침한 목소리가 경고를 내뱉었지만, 그렇다 한들 쉬바인은 응해줄 용의가 추호도 없었다.

그는 도리어 흑마법사가 주제도 모르고 무덤을 파고 기어들어가는 것 같아 진심을 담아 타일렀다.

“나한테 죽는 게 편할 거야.”

발본은 인상을 찌푸렸다.

여태의 정황으로 보아 우두머리는 저기 팔자 좋게 앉아 있는 검은 머리의 청년임이 분명했다.

별로 대단해 보이지 않자 발본은 그를 인질로 삼아 이 전투를 끝낼 심산이었다. 그런데 이 녀석이 자꾸 앞을 가로막으니 화가 치미는 것이다.

벌써 여러 차례 시도가 실패했기에 그는 마음을 달리 먹어야 했다.

“하는 수 없군. 네 녀석을 잿더미로 만들어버린 후에 다가가는 수밖에.”

쉬바인은 그에 코웃음을 치며 응수했다.

“글쎄, 얼마나 대단한 흑마법을 사용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너무 기고만장하는군. 나도 만만한 대상은 아닐 거야.”

후드 사이로 발본의 눈구멍에서 스산한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 듯했다.

‘암흑 투기겠군. 만만히 봐서는 안 되겠구나.’

다른 마법사들처럼 흑마법사 역시 급이 있다.

지금 발본이 보이는 암흑 투기는 저급의 흑마법사라면 결코 할 수 없는 것이었다.

검은 마나들이 안개 무리처럼 발본의 지팡이를 타고 올라와 수정구에 뭉쳐 들었다.

그 즉시 쉬바인은 마나를 재배열하며 다크 레지스트(Dark Resist:암흑 저항)를 온몸에 둘렀다. 그리고도 혹시 몰라 몸에 실드(Shield:방어막)까지 쳤다.

그 순간, 발본의 흑마법이 발현되었다.

이는 ‘다크 애로우(Dark Arrow:어둠의 화살)’라는 것으로 매직 애로우와는 차이가 있었다.

시전자의 능력에 따라 어둠의 화살은 더욱 막강한 파괴력을 자랑하며, 파괴력이 극에 당하면 두꺼운 성벽까지 부술 수 있을 정도라고 전해진다.

대응책으로 쉬바인은 매직 미사일(Magic Missile) 여러 발을 쏘아 보냈다. 파괴력을 분산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미사일 중 한 문이 다크 애로우와 맞닿으며 폭발을 일으켰고, 그러자 주변에 있던 미사일들 역시 연쇄 폭발을 일으켰다.

그럼에도 다크 애로우는 쉬바인의 몸에까지 다가와 실드에 부딪쳤다.

쉬바인은 몸을 한차례 떨며 감탄했다.

“이거 찌릿찌릿하군.”

폭발력을 반감시켰으니 이만한 것이다. 쉬바인은 대적 중인 상대가 보통이 아님을 새삼 깨달았다.

“이번엔 내 차례로군.”

발본은 평온하지 못했다. 다크 애로우는 그의 궁극 마법이나 다름없던 것이었다.

다른 마법은 몰라도 저 다크 애로우라면 못 쓰러뜨릴 상대가 없다고 믿어왔는데, 아무런 피해도 주질 못하고 소멸되어버리니 난감하기 짝이 없었다.

다시 마법을 발현시키려면 그만한 시간이 소요된다. 솔직한 심정으로는 두렵기까지 했다.

“넌 대체 어떤 놈이냐?”

이런 질문을 던지는 이유는 정말 궁금해서기도 했지만, 동시에 시간을 끌어보려는 수작이기도 했다.

쉬바인이 그를 모를 리 없었다.

“어떤 놈이냐고? 보면 몰라? 마법사지. 쯔쯧.”

대답을 하는 동안에도 쉬바인에게서 느껴지는 마나의 파동은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진행되고 있었다.

적어도 이번 공격을 막아야 발본은 다음 공격을 펼칠 수 있다. 그러나 저 막대한 양의 마나의 응집은 그의 자신감을 수그러들게 했다.

곧 쉬바인의 입이 열리며 마법이 캐스팅되었다.

“피스 오브 파이어(Piece of Fire:불의 조각).”

지팡이에 뭉쳐졌던 불덩이가 앞으로 쏘아지며 조각조각 떨어져 나갔다.

그 모습에 발본은 놀라움을 떨치지 못하고 경악했다.

‘플레임 정도를 쓸 줄 알았는데, 저런 마법을 구사할 줄이야!’

급한 대로 몸에 실드는 걸쳤지만, 불덩이는 점점 새빨갛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이 정도의 고온이라면 실드조차 녹여 버릴 것이다.

다급한 대로 발본은 옆으로 몸을 날렸다. 그러나 맹렬하게 날아오는 불의 조각들을 다 피해내기란 역부족이었다.

치익- 치칙!

실드는 부서지지 않았다. 다만 녹아 사라졌을 뿐이다.

그에도 모자라 불덩이는 발본의 살 속까지 파고들었다.

살을 태우는 불은 좀체 꺼지질 않았다. 때문에 발본은 다음 공격을 위한 준비조차 못한 채 다급히 마나를 재배열하여 불부터 꺼야만 했다.

그는 흑마법에는 매우 뛰어났지만, 다른 원소 계열의 마법에는 부족함이 많았다.

하다못해 물의 마나조차 제대로 다스릴 수 없어 ‘다크 샌드(Dark Sand:검은 모래)’로 꺼야만 했다.

아예 끝장을 보려는 것인지 쉬바인은 다음 마법을 발동시키려 하고 있었다.

그러자 발본은 자존심도 팽개친 채 줄행랑을 치기 시작했다.

‘분하긴 하지만 도저히 내 상대가 아니다. 저 정도라면 최소한 오 서클 이상이다. 숨어서 기회를 노려야겠다.’

그가 택한 도주로는 마적단들 사이였다.

자연히 쉬바인은 난처해졌다. 혹 오딘에게 질책이 쏟아지진 않을까 걱정이 되어 그를 보았더니, 아니나 다를까 불만족스러운지 인상을 구기고 있었다.

그 모습에 쉬바인은 당장 달려야 했다.

‘재수 없으면 찍히게 생겼군. 저 자식은 자존심도 없나, 일대일의 대결에서 내빼다니. 하긴 비열하다고 소문난 흑마법사에다가 마적단이니…….’

쉬바인의 지팡이에서 마법이 난사되었다. 마법 중에 제일 기초와 다름없는 ‘파이어볼(Fire Ball)’에서 ‘아이스 커터(Ice Cutter:얼음 칼날)’에 이르기까지.

무려 2년 전만 해도 이 많은 마나를 뿌린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는 5서클을 지나 6서클에 이르렀는데, 이는 괴짜 노인 덕분이었다.

남몰래 엘레느 여왕의 마법 수업을 훔쳐보며 공부를 하던 중 괴짜 노인에게 걸렸는데, 그녀의 배려로 괴짜 노인을 통해 일주일에 한 번씩 교육을 받게 되었다.

6서클이라면 내로라하는 왕국의 대마법사급이다.

그것이 병장기를 휴대한 마적단들이 사방에 깔려 있음에도 두려울 게 없는 이유였다.

파이어볼과 매직 미사일에 맞아 나가떨어지는 마적단들과 아이스 커터에 사지가 잘리는 마적단들은 발본에게 약간의 시간밖에 벌어주지 못했다.

발본은 그중 상태가 양호한 시체를 찾았다.

마적단들의 시체로 둘러싸인 곳에 과연 괜찮은 한 구의 시체가 눈에 들어왔다.

즉시 발본은 금단의 흑마법을 펼치기 시작했다.

우선은 품에서 꺼낸 녹색 앰플을 깨어 시체에 고루 뿌렸다. 이후 퓨트러팩션(Putrefaction:부패)이라는 흑마법을 펼치기 시작했는데, 이것이 독이 시체를 부패시키는 정도를 가속화시켰다.

그러자 시체에 붙어 있던 살점들이 악취를 풍기며 썩어가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뼈에서 분리된 살점들이 흐물흐물 떨어져 나갔다.

기다렸다는 듯 발본은 앙상히 뼈만 남은 시체에다 대고 소리쳤다.

“서먼 스켈레톤(Summon Skeleton:해골 병사 소환)!”

그러자 누워 있던 시체가 일어나기 시작했는데, 그 바람에 조금 남아 있던 살점들마저 바닥으로 후드득 떨어졌다.

그 무렵, 쉬바인의 파이어볼이 날아들었다.

콰쾅!

폭발의 여파에 의해 발본이 신음을 내뱉으며 뒤로 한 걸음 물러설 정도의 파괴력이었지만, 어찌 된 일인지 정통으로 맞은 스켈레톤에게는 별 피해가 없었다. 굳이 말하자면 어깨뼈가 살짝 주저앉은 정도랄까?

쉬바인은 약이 오르는지 이죽거렸다.

“막 일어난 싱싱한 놈이라 이거지?”

과연 이 스켈레톤은 던전 안에 있는 것들과는 달랐다.

오래된 스켈레톤들은 한번 무너지면 일어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이것들은 뒤에서 조종하는 놈이 있으니 치명상을 입고도 무너지지 않는 것이다.

가장 확실한 방법은 시전자를 굴복시켜 스켈레톤의 의지를 꺾는 것이었다.

그러나 쉬바인은 그 방법을 택하지 않았다.

그는 이 녀석들 역시 같이 무너뜨릴 심산이었다. 그래서 저 흑마법사의 무능력을 깨닫게 해줄 참이었다.

쉬바인의 지팡이에서 끊임없이 마나가 유형화되어 발출되었다.

마법의 종류 역시 기본적인 것들이었지만, 그 파괴력이 결코 약하지 않아 주변에서 전투를 벌이던 마적단들과 아레인의 무사들은 저만치 나가떨어졌다.

그 많은 마법을 맞아내면서도 스켈레톤은 쉬바인에게 다가서기 위해 계속해서 발을 내디뎠다.

다만, 전진은 하지 못했다. 발을 들었다 놓았을 땐 제자리이거나 도리어 반보를 물러서는 상황이 되었다.

발본이 자신의 마나까지 주입시켜 놓았으니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더 빨리 훼손되었을 것이다.

하나, 결국 쓸모없는 짓이었다.

연속 공격에 스켈레톤은 서서히 무너져 가고 있었다.

무릎 뼈가 뒤로 꺾이고 골반이 파손되었으며, 이윽고 어깨뼈와 머리통까지 뒤쪽으로 날아가 버렸다.

더 이상 발본은 저 마법사에게 대항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이럴 것이라면 스켈레톤을 부리는 것보다 널려 있는 마적단들을 미끼로 시간을 벌어 필살기를 날리는 편이 나았을 것이라는 판단이 들었다.

물론 그런다고 해서 먹히리란 법은 없다. 다만, 이만한 마나의 소모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에 와서 후회해봤자 이미 늦은 일이었다.

발본은 더욱 더 애가 탔다.

다행인 건 주변에 아직 남아 있는 마적단들이 약간의 시간을 벌어줌으로써 발본의 시야에 드디어 엘룬이 들어왔다는 점이었다.

‘네깟 녀석이 아무리 대단하다고 해도 형님과 합세한다면 못 이길 것도 없다.’

그는 이곳에서 제일 위험한 대상이 쉬바인이라 착각하는 모양이었다. 일단 그만 쓰러뜨린다면 만사가 해결될 것 같았다.

엘룬은 확실히 우세에 있었다.

그를 상대하던 음영부대주조차 세 번 중 두 번을 검을 마주칠 수 있었을 뿐, 나머지 한 번은 몸을 날려 피하는 판국이었으므로.

발본이 크게 소리쳤다.

“형님, 시간 끌지 마시고 얼른 끝내야 합니다! 더 위험한 놈이 있습니다!”

발본의 눈은 정확했다.

오랜만에 제대로 된 상대를 만났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는지 엘룬은 마적단들이 죽어가는 데에도 여유를 부린 것이다.

그 말을 귀담아들었는지 엘룬의 눈에 담긴 살기가 짙어졌다.

순간, 검에서 마나가 발출되었다.

그러나 그 마나는 애꿎은 땅만 헤집은 꼴이 되고 말았다.

엘룬이 눈을 치뜨고 자리에서 벗어난 음영부대주를 노려보았다.

“어떻게 피할 수 있었지?”

음영부대주는 그에 답을 주지 않았다. 사실은 오딘에게서 전음이 들려왔던 것이다.

애당초 오딘은 음영부대주가 그의 상대가 되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럼에도 맞붙여 놓은 것은 그를 더 강자로 만들기 위해서였다.

백 번의 연습보다 단 한 번의 목숨을 건 대결이 중요하다는 것을 오딘은 알고 있었으므로.

“너무 입을 아끼는군. 죽어서는 말을 못한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말과 동시에 엘룬이 매서운 속도로 음영부대주를 향해 파고들었다.

음영부대주가 좌측으로 몸을 빼자 엘룬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다시 검에 실은 마나를 방출시켰다.

이번 역시 음영부대주는 피했지만, 땅바닥에서 튄 파편이 왼쪽 가슴을 강타했다.

그러나 음영부대주의 몸은 단련된 몸이었다. 파편은 그의 몸을 관통하지 못하고 옷과 함께 살에 박혀 있었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엘룬을 상대하기 위해 한 명의 무사가 더 가세했다. 그리고도 버거웠는지 또 한 명의 무사가 더 가세했다. 그리고 또 한 사람이…….

음영부대주까지 총 4명의 사람이 엘룬을 맡게 되자, 당사자인 엘룬은 더 이상 여유를 부릴 수 없게 되었다.

“이 개자식들! 떼로 몰려 와서 덤비겠다는 거냐?”

그러나 그의 속마음은 달랐다.

‘혼자 수십 명도 베어버린 나다. 그러나 이놈들은 하나같이 괴물 같은 놈들이다. 특히 방금 나온 녀석은 제일 처음 온 녀석보다는 못하긴 하지만 감당 못할 지경이다. 어디서 이런 녀석들이 튀어나온 거지?’

방금 가세한 이는 철왕대의 무사였다.

오딘이 만든 단체 중 가장 강한 자들만 골라 만든 곳이니 그럴 만도 했다. 물론 아렌의 마혈단을 제외하고 말이다.

더욱 놀라울 점은 이들의 손발이 착착 맞는다는 것이었다.

이 때문에 지금 역시 엘룬은 곤경에 처할 뻔하지 않았는가.

엘룬은 눈을 돌릴 여유조차 없었다.

‘냉정해져야 한다. 자칫 실수라도 하는 날에는 사태는 더 악화된다.’

그러나 마음 같지 않았다. 그를 상대하는 4명의 무사들은 마치 양을 모는 것처럼 그를 압박했기 때문이다.

순서조차 없었다.

마적단들의 수도 급감했다.

계속 궁지에만 몰리자 결국 엘룬의 화가 폭발했다.

눈이 뒤집힌 그는 마구잡이로 검을 휘둘러댔고, 검에서 발출된 마나들은 애꿎은 땅만 파고들었다.

자연히 지치는 것은 엘룬이었다.

앞뒤 안 가리고 검을 휘두른 탓에 빈틈이 많아졌고, 급기야 허벅지에 뜨거운 감촉이 느껴졌다.

“크윽, 네 이놈!”

호통을 치며 검을 휘둘렀지만 엘룬의 허벅지에 자상을 남긴 백의질풍대의 무사는 장기를 살려 빠르게 옆으로 빠졌다.

필살의 공격이 헛되어버리자 엘룬은 소리를 버럭버럭 질러댔다.

“한 놈도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네 이놈들, 다 갈기갈기 찢어주마.”

그때 잠시 엘룬의 시선이 오딘에게 꽂혔다.

‘모든 원흉은 저놈이다. 저놈이 이놈들을 끌고 온 것이다. 죽을 때까지 잊지 않겠다.’

엘룬의 뇌리에 오딘의 모습이 똑똑히 각인되었다.

검은 머리카락에 검은 눈, 고급스러운 의상을 걸치고 있는 태연자약한 젊은 청년의 모습.

잠시 한눈을 팔자 옆구리에도 검날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의 몸이 워낙에 단단했으니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뼈까지 잘렸을 것이었다.

그때, 시커먼 먹구름이 주위를 집어삼키더니 누군가 자신의 손목을 잡아끄는 게 느껴졌다.

이는 필시 발본이 펼친 다크 클라우드(Dark Cloud:먹구름)일 것이다.

그가 서 있는 땅바닥엔 언제 그렸는지 모를 검붉은 마방진이 자리하고 있었다.

발본의 입이 쉴 새 없이 움직이며 공간 이동 캐스팅의 준비를 마칠 찰나였다.

좌중에 쉬바인의 외침이 들려왔다.

“모두 비키시오!”

눈치 빠른 아레인의 무사들이 먹구름에서 비켜서자 쉬바인은 강력한 마법을 발현시켰다.

“파이어 익스플로전(Fire Explosion:불 폭발)!”

불덩이가 곧장 먹구름으로 날아들자 폭발이 일어나더니, 먹구름을 중심으로 사방으로 불길이 퍼졌다.

그리고 폭풍의 눈에서 미처 비켜서지 못한 마적단들은 끔찍한 비명을 내질렀다.

“크아아아아!”

비교적 외곽에 있던 자들은 온몸에 불이 들러붙는 정도였지만, 근처에 있던 마적단들은 살은 물론 뼈까지 녹아내렸다.

하지만 막상 근방을 가리고 있던 먹구름이 걷혔을 때는, 뼈가 앙상한 흑마법사의 하반신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 * *

소동은 어느덧 멎어 있었다.

자신들을 지탱하는 존재 둘이 사라진 후, 마적단들은 수세에 몰렸으며 살기 위한 도주를 택했다.

이미 반수 이상이 죽은 후였다.

오딘은 구태여 그들이 도망치는 것을 막지 않았다.

또한 본인의 눈으로 두 놈들이 사라지는 것을 보고서도 손을 쓰지 않았다. 그래야 할 필요성을 못 느꼈기 때문이다.

음영부대주는 후환이 될지도 모르는 적을 도망치게 놔둔 것이 못내 아쉬운 모양이었다.

그 표정을 보고 오딘이 물었다.

“걱정이 되느냐?”

“사실대로 말씀드리자면 그렇습니다. 검에서 마나를 발출할 줄 아는 자였으니까요.”

오딘은 만면에 미소를 드리우며 말했다.

“후에 마주친다면 직접 막으면 되질 않느냐.”

음영부대주는 오딘이 하고 있는 말을 즉각 헤아렸다.

“마주치게 된다면 필시 그리하겠습니다.”

흡족한 얼굴로 오딘은 시체들을 치우고 있는 무사들을 보고 일렀다. 크진 않은 목소리였지만, 내공이 듬뿍 실려 멀리 떨어진 자들조차도 손을 멈추고 그의 입을 바라보았다.

“도리어 잘되었구나. 이곳에 우리가 남아야 할 명분이 생겼으니 말이다. 본 좌가 직접 조만간 이곳의 공왕이란 자를 만나보겠다. 이 많은 양의 보물을 옮기는 데에도 상당한 힘이 들 테니 일부를 빼고는 여기에 남겨 두겠다.”

무사들은 모두 그의 결정이 옳다고 여기고 아무도 반론을 제기하지 않았다.

오딘은 웃으며 말을 이었다.

“카반은 우리의 땅이 될 것이다. 수고한 대가로 그대들은 여기 있는 보물들에 손을 대도 좋다. 단, 들고 갈 수 있는 양이라야 한다. 될 수 있으면 마을에 머물고 있는 이들 것도 전해주도록.”

기뻐해야 정상일진대 이들은 그렇지 못했다. 입이 헤벌쭉 벌어진 쉬바인을 빼놓고는…….

그들을 대신해 그나마 지위가 높은 음영부대주가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아뢰었다.

“오딘 님, 저희는 오직 충성을 행할 뿐입니다. 명을 거두어주옵소서.”

그 말에 쉬바인의 표정이 싹 바뀌었다.

‘아, 저 멍청한 놈들… 왜 주신 것을 안 받으려고 하는 거야?’

속이 터질 지경이었다.

쉬바인은 돈이 필요했다. 마법 도구야 왕성에서 지원해주었지만, 개인적인 용도로는 사용할 수 없었다.

그는 새로운 아티팩트의 마법 지팡이도 사고 싶었고, 고급스러운 로브도 걸치고 싶었다. 뿐만 아니라 아레인 왕성의 외곽에 조그만 별장이라도 마련하고 싶었다.

그 모든 게 한순간에 이뤄질 수 있었다. 자신은 경량화 마법을 시전할 수 있었으니까.

그렇다고 바리바리 싸가지고 갈 것은 아니었다. 그에게도 최소한의 양심이란 것은 있었기 때문이다.

다행이 오딘에게 힐책이 들려왔다.

“명을 어길 셈이냐?”

싸늘한 목소리에 무사들은 머리를 숙였고, 음영부대주는 그보다 깊게 머리를 숙이며 자신의 잘못을 뉘우쳤다.

“신이 잘못을 하였사옵니다. 부디 노여움을 거두어주옵소서.”

“그 말은 받아들인다는 말로 생각해도 되겠지.”

“그, 그렇사옵니다.”

다시 쉬바인의 입이 헤벌쭉 벌어지려 할 때, 오딘은 부러 그를 의식하고 말했다.

“그럼 쉬바인만 제외하고 그리하라.”

억울한 마음에 쉬바인은 당장 따지는 우를 범했다.

“에? 왜 저는 아닌지요?”

“한 일이 없지 않느냐.”

쉬바인은 자신이 한 일이 참 많다고 생각했다.

아레인에 사람들을 부르러 간 것도 자신이었고, 이곳에서는 꽤나 강한 녀석을 상대했다. 또한 마적단도 적잖이 쓰러뜨렸다. 그런데 한 일이 없다니…….

“하, 한 일이 없다니요? 제가…….”

그러나 그는 더는 말을 할 수 없었다. 오딘의 표정이 구겨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쉬바인은 허리를 반쯤 숙이며 고개를 깊이 숙였다.

“소신, 주제넘었습니다.”

말은 그리했지만 심사는 꼬여 있었다.

‘치, 치사하십니다, 정말. 제가 밉보인 게 뭐라고…….’

그를 보며 오딘은 웃음을 머금고 말을 번복했다.

“농이니라. 쓸 만큼 가져가도 좋다.”

이윽고 쉬바인의 허리가 펴지며 얼굴색 또한 확 펴졌다. 오딘을 바라보는 그의 눈에는 호감이 잔뜩 묻어 있었다.

* * *

사방이 진흙 더미였다.

숨이라도 쉬는지 진흙의 일부분이 들썩거렸다.

시간이 흐를수록 움직임은 커지나 싶더니, 이윽고 진흙을 둘러쓴 사람이 상반신을 일으키며 기침으로 고통을 호소했다.

“후웁, 쿨럭쿨럭!”

진흙 사이로 드러난 얼굴 윤곽과 이목구비는 엘룬이었다.

호흡을 방해하는 진흙을 손으로 떨쳐 내면서도 그는 죽을상을 지었다. 덕분에 입 안에 머금었던 모래는 가루가 되었다.

분을 억누르지 못한 엘룬이 맨주먹으로 사정없이 진흙을 찍어 누른 까닭에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다.

그러다가 무슨 생각이 들었던지 엘룬은 주변을 황급히 둘러보기 시작했다.

곧 그의 눈에 자그마한 움직임이 감지되었다.

아주 미약한 움직임이었다. 주먹만 한 두꺼비가 흙더미 안에서 호흡을 할 정도의…….

엘룬은 끈적거리는 진흙 위를 뛰듯 다가가 당장에 흙더미를 파헤쳤다.

잠시 후, 사람의 손이 드러났다. 이어서는 팔이 드러났고, 더 후엔 사람의 머리로 추측되는 물체가 눈에 들어왔다.

엘룬은 발본이라는 직감이 들었던지, 손을 맞잡아 거칠게 끌어올렸다.

푸확!

흙더미에서 로브를 걸친 사람의 형상이 드러났다.

그 모습에 엘룬의 눈이 잠시나마 반가움과 기쁨에 휩싸였으나 이내 절망으로 바뀌었다.

드러난 형체가 완벽하질 않았던 탓이다. 그 몸은 상반신만 달려 있을 뿐 하반신이 없었다.

바삐 엘룬은 그를 끌고 진흙 더미에서 벗어났다.

그의 몸을 덮고 있는 진흙을 걷어주며, 발본임을 확인한 엘룬은 격정에 부르르 떨었다.

냉혈한이나 다름없던 그였다. 하지만 이 순간만큼은 그의 눈은 슬픔에 잠겨 있었다.

“어, 어쩌다가…….”

놀랍게도 발본은 미약하게나마 아직 숨이 붙어 있었다.

살이 없어 앙상한 몰골이었다. 그가 항상 후드로 몸을 가리고 다녔던 이유였다.

심지어 엘룬에게조차 자신의 몰골을 보여 주기를 꺼려하질 않았던가.

창피함과 함께 무력함이 들어 발본은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무… 리하게 공간… 이동을 한 결… 과입니다. 크흣!”

몸에 남아 있는 마나를 전부 쥐어짜내어 하는 말이었음에 발본의 목소리는 떨렸다.

엘룬은 모진 말로 그를 나무랐다.

“이 미련한 자식아!”

“선택… 할 수 없었습니다. 만약 그 마… 법에 맞서려… 고 했다면 형… 님 또한 이 자리… 에 계시지 못하… 였을 테니까요.”

쉬바인이 펼쳤던 파이어 익스플로전은 발본의 모든 지식과 마법을 동원한다 해도 막을 수 없는 것이었다.

거기에 엘룬 또한 부상을 입은 상태였으니 달리 어쩔 도리가 없었던 것이다.

발본은 솔직하게 속내를 털어놨다.

“크… 흐, 억울합… 니다. 형님만 사시다… 니.”

정말 억울한 표정이었다.

발본이 아무리 그를 따랐다고는 하나 자신의 몸이 먼저였다. 그에 반해 엘룬은 정말 오랫동안 함께한 가까운 자를 떠나보내는 게 쉽지 않은 모양이었다.

착잡한 심정으로 자신을 내려다보는 엘룬을 보며 발본은 못내 서운해했다.

“제가 죽어… 도 끝끝내 눈물… 은 보이시지 않… 는군요.”

같은 이치였을 것이다. 엘룬이 발본을 아꼈던 것도 따지고 보면 정보다는 그의 능력을 높이 샀기 때문이니까.

지금 발본이 울고 있는 이유는 곧 죽게 된다는 억울함이었다. 이런 말을 내뱉는 것은 그 딴에 보인 조롱과 항의였다.

그래도 미안함은 있었던지 엘룬은 내내 그 표정으로 일관했다.

시간이 갈수록 발본의 호흡은 더뎌져 갔다. 그는 잔뜩 구겨진 인상으로 겨우나마 입을 열었다.

“그놈… 들, 그놈… 들을 형님이…….”

발본은 채 말을 끝마치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그것이 그의 최후였다.

발본의 상체를 두 팔로 받쳐 들고 엘룬은 주변이 떠나가라 괴성을 내질렀다.

“으아아아아아!”

슬픔이 아니었다.

모든 것을 잃었다는 데 대한 처절한 부르짖음이었다.

돌연 엘룬은 발본을 땅에 내려 두고는 일어서서 정색하며 생각에 잠겼다.

우선은 일이 왜 이렇게 되었는지를 되짚어보았다.

원인이 있다면, 그놈들이었다.

그리고 그놈들을 부른 놈들, 즉 카반에 사는 마을 주민들이 보다 근본적인 원인이란 판단이 들었다.

분노는 그곳에만 머물지 않았다.

‘오기 전 보았던 검은 머리의 사내, 그가 이끌고 온 것이다. 그놈이 주동자다.’

더 이상 보상 따윈 필요 없었다.

자신을 나락으로 끌어내린 존재. 그 존재에 대한 원망이 걷잡을 수 없이 커져 그 녀석을 죽이지 않고는 아무런 일도 할 수 없을 것만 같았다.

그 후에나 재기를 꿈꿀 수 있을 것이다. 목표로 한 일을 이룬 후에…….

엘룬이 그에게 복수를 다짐한 것은 당연히 그 사내, 오딘이 어떤 자인지를 몰랐기 때문이다.

일대일이라면 져 본 적이 없던 그다. 상대가 누구라 할지라도 말이다.

더군다나 그 녀석은 전투에 손을 놓고 있었다.

어쩌면 풋내기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그가 이리 쉽게 오딘을 죽이려고 결심할 수 있는 원인이 되었다.

그는 정말 모르고 있었다.

자신이… 대륙에서 가장 무서울지 모르는 존재에게 검을 들이대려 하고 있다는 사실을.

* * *

마르크 일행은 말을 달리는 속도에 박차를 가했다.

이스론 상단에 거의 다 와갈 때쯤 그들은 위험한 대상을 목격했다.

바로 카반에서 보았던 덴이라는 자였다.

상단 내에 그를 막을 힘은 없었다.

자칫하면 최악의 사태가 벌어질 수 있었기에 틴은 이미 죽을 각오를 하고 있었다.

그를 따르던 휘하의 호위 무사들 또한 같은 생각이었는데, 두려움이 앞섰는지 연방 침을 꼴깍꼴깍 삼키고 있었다.

헤르미온의 표정도 절박했다. 양부가 다치는 일만은 절대로 없어야 했다.

걱정에, 혹은 두려움에 머릿속이 하얗게 비어버리고 얼굴색이 샛노랗게 질려 버린 그들은 한시라도 빨리 이를 알려 최악의 사태를 면하기 위해 쉴 새 없이 말을 달려 나갔다.

* * *

라비아 항만을 끼고 있는 경치 좋은 전망대였다.

철 계단을 따라 전망대 위쪽으로는 경비 초소가 자리했는데, 이곳은 오늘 다른 용도로 사용되고 있었다.

테이블과 의자들은 본래 있던 것이기는 하나 이곳을 찾은 사람들은 제법 의외의 인물들이었다.

바로 현 이스론의 상단주인 폴칸이 그중 한 명이었고, 다른 한 명은 붉은 눈썹의 사내였다.

“아레인 왕국의 백작님께서 직접 이곳에 들르시다니, 안 그래도 제가 찾아뵈었어야 하는데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아니외다. 미안하게 생각하지 마시오.”

소박하고 털털하기까지 한 남자의 이름은 보탄.

오딘의 총애를 받고 있는 사람 중 한 명이었고, 아레인의 백작이기도 하였다.

또한 그는 흑풍단의 단주였다.

몇 해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중년의 나이에 다다라 있던 보탄은 전보다 더 젊어 보였다.

오딘이 살던 곳에서 소위 말하는 반로환동이나 환골탈태를 겪어서가 아니었다. 끊임없는 수련으로 건강이 좋아졌던 것이다.

본래 보탄은 자잘한 병치레가 잦았는데, 이 역시 근래에는 사라졌다. 목소리에는 힘이 담겨 있었고, 얼굴에서는 여유마저 넘쳐 났다.

두 사람은 오늘 처음 대면한 것이었지만 오랜 친구 같은 분위기를 풍겼다.

“더운 날엔 여기에 있으면 그렇게 시원할 수가 없습니다.”

“하하하, 정말 그렇군요.”

보탄이 웃음으로 화답함으로써 말을 꺼냈던 폴칸은 조금 더 기분이 좋아졌다.

그는 오딘을 볼 때를 대비해 아껴 뒀던 말을 꺼내었다.

“저번의 협상 말입니다. 아레인에서 너무 양보를 하신 것 아닙니까?”

보탄은 그에 함박웃음을 지었다.

“그분께서 결정하신 것이니 저희는 이러쿵저러쿵할 아무런 권한이 없습니다. 명하셨으면 따르는 게 저희 도리일 뿐입니다.”

문득 폴칸은 궁금증이 치밀었다.

마르크와 헤르미온에게 듣긴 했지만, 막상 협상을 체결한 오딘이라는 사람이 아레인에서 어떤 직책을 담당하고 있는지는 확실하게 전해듣지 못했기 때문이다.

또한 보탄이라는 이 백작 역시도 그를 지극히 높이고 있었기에 궁금증은 더욱 커졌다.

“저, 오딘 님은 아레인에서 어떤 위치에 계십니까?”

보탄은 말 못할 것도 없다면서 순순히 답해주었다.

“그분은 아레인의 하늘입니다.”

잠시 폴칸의 움직임이 멎었다.

높다고는 생각했으나 이런 대답을 들을 줄은 몰랐던 것이다. 하늘이라는 말은 여왕보다 높다는 말이 되질 않겠는가.

그러면서 또 하나의 의문이 일자 그는 망설이지 않고 내친 김에 다 물어보기로 했다.

“혹 아레인의 여왕님과 오딘 님은 부부의 연을 맺으셨는지요?”

이것은 헤르미온이 가장 궁금해할 내용이었다.

헤르미온은 어려서부터 고민을 양부인 폴칸에게 스스럼없이 털어놨는데, 이것에 관해서는 좀체 말을 하려 하지 않았다.

하지만 상단 일만 수십 년에다 눈치라면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그였다. 더군다나 다른 사람도 아닌 친딸로 생각하는 헤르미온이 아닌가.

폴칸은 마르크를 불러내 알아내었다. 그녀가 오딘이란 사람을 마음에 품고 있다는 것을.

보탄의 입에서는 솔직한 대답이 흘러나왔다.

“그렇지 않습니다.”

폴칸의 머릿속이 뒤숭숭해졌다.

‘이 녀석, 내가 기뻐해줘야 하는 거냐? 말아야 하는 거냐?’

걱정이 들었던 게 사실이다.

그와 잘못된다면 마음고생을 하며 시름시름 앓는 딸의 모습을 봐야 할 것이고, 또 만약 그와 잘된다고 하더라도 여태 키운 딸을 내주기가 서운했으며, 그가 헤르미온에게 잘해줄지도 걱정이었던 것이다.

폴칸은 오딘이 그렇게 높은 존재니 필시 안하무인일 것이라 생각했다.

‘그렇다면 고생길은 훤하지 않을까…….’

나지막이 한숨을 쉬는 폴칸을 보며 보탄은 의아했다.

“왜 그러시오?”

“아, 아닙니다. 어제 처리한 일이 걱정되어 그랬습니다.”

표정 관리에 신경을 썼기에 들키지 않은 거짓말이었다. 거짓말은 그의 장기가 아니던가.

보탄은 그에 별다른 의심 없이 고개를 돌려 먼 바다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정말 좋소. 삶에 여유는 꼭 필요한 듯하오.”

폴칸도 맞장구를 쳤다.

“앞만 보고 달리는 사람들을 보면 많이도 한심합니다. 그들은 정말 좋은 것들을 잊고 사는 것 같습니다.”

여전히 보탄은 먼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흡족한 웃음을 짓는 중이었다.

폴칸의 시선도 보탄의 시선을 좇았다.

‘그러고 보니 나부터가 그러지 못했군. 난 참 많은 것을 놓치고 살았어. 저 세상의 아름다움을 언제쯤이나 만끽할 수 있으려나… 지나간 것들은 돌아오지 않는 법인데.’

그래도 폴칸을 웃음 짓게 하는 건 마르크와 헤르미온이었다.

그 둘을 생각하면 인상이 찌푸려지기도 하였고, 지금처럼 만족스런 웃음도 떠올릴 수 있었다.

인상이 찌푸려지는 추억들은 거의 다 헤르미온이 심어준 것들이었다.

그녀가 친 사고들, 그 뒷수습. 그로 인해 자신의 머리털이 하얗게 세질 않았던가.

하지만 지나 보면 모두 추억들이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그 혼자 화를 삭였다는 것이다.

그는 만약 바보같이 자신이 그때 화를 내었다면, 그녀가 지금처럼 자신을 좋아하지 않을 것이라 판단했다.

물론 그게 악영향이 되어 헤르미온은 자신밖에 모르는 고집쟁이에다가, 왈가닥에 도도해지기까지 해서 걷잡을 수 없게 되었지만.

평온할 것 같은 시간은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아래에서 고성이 터졌기 때문이다.

“이스란 상단주, 거기 있는 것 다 알고 있다! 이리 내려와라!”

폴칸의 뒤쪽에 있던 호위 무사가 난간에 다가가더니 아래를 보고 당황해했다.

“단주님, 이리 와보십시오.”

폴칸은 구부정한 등을 세우고 일어서서 그에게 다가갔다.

밑에서는 비대한 체구의 남자와 그의 수하들로 보이는 자들이 전망대 위를 노려보고 있었는데, 그들의 손에는 이스란에서 유능한 상단원인 샥이라는 고블린과 정크라는 오크가 붙잡혀 있었다.

샥은 애처로운 눈빛으로 구조를 요청하고 있었다.

“단주님, 살려 주십시오.”

폴칸이 그를 보다가 시선을 거두고 이방인들의 얼굴을 낱낱이 훑어봤지만 하나같이 못 보던 자들이었다.

“누구지?”

호위 무사 또한 알 턱이 없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저도 모르겠습니다.”

이들은 카반에서 온 마적단들이었다.

대답이 성의 없이 들렸는지 폴칸은 그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퍽!

“악!”

당장에 질책이 쏟아졌다.

“모르면 물어봐야 할 것 아니냐.”

그에 호위 무사가 고통을 줄이기 위해 정강이를 부여잡고 아래를 내려다보며 소리를 질러 물었다.

“어디에서 온 누구시오?”

마적단들을 끌고 온 비대한 체구의 남자 덴이 콧방귀를 뀌며 소리쳤다.

“흥, 하나같이 건방진 놈들이군. 곱게는 못 넘어가겠다. 우선 이 녀석들부터 찢고 시작하지. 얘들아!”

“넵.”

명령이 떨어지지도 않았는데 마적단들은 정크의 팔다리를 붙들고는 당장에라도 찢어버릴 것 같은 시늉을 했다.

그러자 정크는 잔뜩 겁먹은 표정을 지었고, 보다 못한 폴칸이 소리쳤다.

“내려갈 테니 잠시 기다리시오!”

폴칸은 고개를 돌리려다 깜짝 놀라고 말았다. 어느새 붉은 눈썹의 보탄이 자신의 옆에서 그들을 주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정말 모르는 자들이오?”

“그렇습니다. 내려가서 왜 이러는지 이유나 물어봐야겠습니다.”

전망대 위에 있던 사람들이 죄다 내려와 땅에 발을 디디고 있었다.

그러는 동안에 사방에서 구경꾼들이 몰려들기 시작했고, 폴칸이 그 꼴을 봐줄 수 없어 눈을 부릅뜨고 소리쳤다.

“뭣들 하는 거야? 구경났어? 일해, 일!”

무리들이 해산되기 직전에 덴에게서 비웃음이 들려왔다.

“일? 네놈들 처지를 알기나 하는 거냐?”

더 이상 폴칸은 상단원들에게 시선을 줄 수 없었다.

“왜 이러시는 거요? 우리 상단은 엄연히 대륙 상단법의 보호를 받고 있소. 아무 까닭도 없이 물의를 일으킨다면 대륙 곳곳에 알리겠소!”

틀린 말이 아니었다. 이스란같이 큰 상단은 제법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무렵의 대륙은 법보다는 주먹이 가까웠으며, 이스란은 그들에게 빌미를 제공했다.

덴이 물었다.

“정말 몰라서 묻는 거냐?”

“그렇소. 어디에서 온 누군지나 말해주시오.”

덴의 입이 가로로 길게 찢어졌다.

“우린 카반의 울프다. 설마 모른다고는 하지 않겠지?”

모름지기 사람은 감정에 솔직할 수밖에 없다. 특히나 갑작스런 놀라움엔 더하다.

폴칸도 예외는 아니어서 저도 모르게 안색이 굳어졌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그가 원했던 일은 카반을 돌아 물품을 안전하게 운송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저들과 마찰이 빚어졌다면 이는 큰일이었다.

덴의 입이 다시 열렸다.

“네놈들, 배짱도 좋더군. 감히 우리 주둔지에 쳐들어와 형제들을 죽였지. 물론 그 녀석들은 지금쯤 큰형님의 손에 죽었을 테지만. 하지만 보상은 해야 한다. 만약 보상이 적절치 못하다면 이 상단 내에 있는 상단원들은 이 시간부로 죽었다고 생각하는 게 좋을 것이다.”

정말 덴은 그럴 자신이 있어 보였다.

폴칸은 그때까지도 의문을 지울 수 없어 그의 말을 반박하고 나섰다.

“거, 거짓말 마시오! 우리가 그 근처에 간 것은 맞지만, 난 카반에 가라고는 하지 않았소. 돌아서 가라고 했단 말이오!”

“씨팔! 지금 나랑 말장난하자는 거냐? 꼽추, 네놈이나 거짓부렁 않는 게 좋을 거다. 내가 본 녀석들 중 특이한 녀석을 나열해볼까? 먼저 구릿빛 피부에 키가 작은 녀석이 있었지. 또 검은 머리카락에 검은 눈의 사내놈과 짧은 치마를 입은 은발의 엘프도 있었다. 이 세 녀석만 해도 부정할 순 없겠지?”

상단주 폴칸은 오딘을 직접 본 일은 없었지만, 그의 외모에 대해서는 대충 설명을 들은 상태였다.

거기에 은발의 엘프가 흔하지 않다는 것은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이 헤르미온이라는 직감이 강하게 들어 폴칸은 온몸의 기운이 다 빠질 것만 같았다.

‘저자의 말이 거짓이 아닌 듯하다. 하지만 어떻게… 녀석들이 무슨 힘으로 카반에 들어가 저 마적단들과 싸웠단 말인가.’

폴칸은 절망스런 표정이었다.

성질 더럽기로 유명한 녀석들이니 그토록 근처에 가지 말라고 주의까지 주었다. 그로도 불안해 아레인에 군사 요청까지 하지 않았던가.

사태가 예기치 않게 돌아가는 듯하자, 상단원 중 일부는 제 살길을 찾기 위해 슬그머니 발을 빼려 했다.

그때, 덴의 호통이 터졌다.

“한 발짝이라도 떼었단 봐라! 그 즉시 발모가지를 절단내버리겠다!”

좌중은 정적에 휩싸였다.

더러는 문제를 야기한 마르크 일행을 원망하는가 하면, 상단주인 폴칸을 원망하기까지 했다.

자신들은 일을 하러 온 것뿐이지 이번 운송과는 관련이 되지 않았으니 억울할 만도 했다.

아무 곳에서도 발소리가 나질 않았다.

그러나 지금, 발소리가 들렸다. 그것도 폴칸과 매우 인접한 곳에서…….

“슬슬 가야겠군.”

목소리의 주인공은 보탄 백작이었다.

수행을 나온 흑풍단의 무사 둘이 그를 뒤따르자 자연히 덴의 눈이 노기를 띠고 부릅떠졌다.

“미쳤냐?”

그 말을 참지 못한 흑풍단의 무사가 말없이 앞으로 나서려는데, 보탄이 손을 들어 제지시키고는 덴을 바라보며 말했다.

“말이 좀 심하군.”

내용은 경고였으나 표정은 전혀 그래 보이지 않았다. 어떠한 위협도 느끼질 못했기 때문이리라.

보탄은 부러 말꼬투리를 잡은 것인데 덴은 어리석게도 그에 말려 들어갔다.

“뭐가 어쩌고 어째?”

마적단들은 서로 점수를 따기 위해 나섰다.

“저희들이 저자의 사지를 끊어놓겠습니다!”

“허락해주십시오! 다 잘라 바다에 던져 주면 물고기들이 좋아할 겁니다.”

보탄은 곁의 무사들에게 눈짓을 보냈다.

전음을 한 것도 아닌데 흑풍단의 무사 둘은 이를 용케 알아듣고 우람한 덩치의 마적단들에게 다가섰다.

“너희 상대는 우리들이다.”

덴은 어이가 없었다.

“미, 미친놈들. 소원이라면 그렇게 해줘라. 대신 우리에게 객기를 부린 대가로 한 놈에 열 명씩 상단원들의 목을 베겠다. 정확히 삼십 명이 되겠군.”

그때 덴의 뇌리에 누군가의 뜻이 전해졌다.

-그건 살아 있을 때의 얘기고…….

보탄의 검에서 일어난 휘황찬란한 오러 블레이드가 덴의 목살을 비집고 들어오는 중이었다.

* * *

을씨년스러운 날씨였다.

하나, 산비탈을 뛰어 내려가는 귀가 긴 소년에게는 날씨를 느낄 여유조차 없었다.

물이라도 들이부었는지 소년의 이마엔 땀방울이 흐르다 못해 비 오듯 퍼부어 내렸으며, 걸친 옷가지도 몸에서 배어나온 땀으로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헐떡거리다 못해 숨이 넘어간다 해도 하등 이상해 보일 것 같지 않은 소년이 뜀박질을 멈출 수 없는 이유가 있었다.

성기사들이 앞을 다투며 그를 바짝 추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두피에서 흐른 땀으로 인해 소년의 붉은 머리카락에서도 연방 땀들이 빗물처럼 고여 흘러내렸다.

쿤이라는 이름의 이 소년은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앞서 헤어진, 그리고 이제는 고인이 되어버린 지인의 뜻을 전하는 것이다.

우연찮게도 쿤은 한 신전 앞에서 리먼의 시신을 발견하고 말았다.

그러나 시신을 보고 애도하거나 목 놓아 울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근방에 자신을 쫓는 무리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급한 대로 쿤은 리먼의 시신을 근처의 양지바른 곳에 대충 묻어주고는 바리톤으로 향하려 했지만, 그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어쩐 일인지 신성 제국에서 파견 나온 성기사들이 그를 노리고 있었던 것이다. 이미 쿤의 얼굴이 그려진 초상화가 그들의 손에 쥐어진 후였기 때문이다.

신성 제국 입장에서는 별수 없는 일이었다.

만약 이 일이 세상에 알려진다면 돌이킬 수 없는 사태가 벌어질 것이므로.

그렇다고 성기사들이 그 연유에 대해 알 수는 없었다.

신성 제국의 성황이 그런 짓을 일삼아왔다는 사실은 추기경을 비롯한 대신관들 일부만이 알고 있는 일이었다.

목격자를 죽이는 일만이 해결책이 될 것이다.

그들은 리먼이 죽은 것도 모른 채 일부는 그를 찾아 헤매고 다니는 중이었다.

또한 지금 쫓기는 쿤 역시 자세한 내막은 알지 못했다. 그저 전에 들은 것이 전부였다.

그때, 왜인지 몰라도 쿤의 머리카락은 새빨개지며 눈빛은 점점 붉은 형광 빛을 띠어갔다.

쿤은 자아를 억눌렀다.

‘안 돼, 안 된다고…….’

거부감이 들었다. 이것은 본능이었지만, 쿤은 단 한 번도 그것을 깨웠던 적이 없었다.

더군다나 이렇게 위급할 때 몸이 말을 듣지 않으려 하니 억지로라도 그것을 타일러야 했다.

겨우 흥분이 멈췄다.

소로로 들어서며 쿤과 저들의 거리는 더욱 줄어들었다. 그러나 날랜 성기사 하나가 어느 순간 쿤의 어깨를 잡고 뒤로 넘어뜨렸다.

위기의 순간이었다.

놀란 눈으로 저들을 보았을 때, 한 성기사가 숨을 몰아쉬면서 앞으로 나서서 불쾌함을 드러냈다.

“질긴 놈.”

쿤은 목청을 높여 즉각 따지고 나섰다.

“왜 이러는 거죠? 알아야겠습니다!”

“그러는 넌 왜 도망쳤느냐? 무언가 찔리는 게 있나 보지? 우리 돈을 슬쩍했거나…….”

“누가 돈을 슬쩍합니까? 난 당신들한테 죄진 게 없습니다. 당신들이 무서운 표정으로 다가왔으니 도망친 거지요!”

먼저 나섰던 성기사가 말문이 콱 막혀 버리자, 그를 대신해 조금 직위가 높아 보이는 성기사가 앞으로 걸어 나왔다.

일상복이었지만 그의 가슴팍엔 아스카론의 형상을 딴 문양이 새겨져 있었는데, 그것은 팔라딘(Paladin)이라는 상징이었다.

일반적인 성기사와 팔라딘은 엄연히 차이가 있다.

팔라딘은 최소 소드익스퍼트 중급 이상의 경지에 이르러야만 했는데, 그중엔 마스터급에 오른 인물들도 적지 않았다. 거기에 팔라딘은 신성 마법까지 구사할 수 있으니 그야말로 무시무시한 존재들이었다.

이처럼 아스카론을 몸에 달고 다닐 수 있는 사람들은 저마다 높은 직위를 가지고 있었다.

“기왕 일이 이렇게 된 것 솔직해지자꾸나. 우린 너와 네 동료를 찾아오라는 명령을 받고 있다. 별일 없을 것이다. 그가 있는 곳으로 안내해주어라. 그리고 우리와 함께 가자꾸나. 정말 죄지은 게 없다면 그분들께서 풀어주시겠지.”

얼마든지 꾀를 낼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쿤은 울분이 치밀어 속에 있는 말을 그대로 내뱉고 말았다.

“흥, 살인마가 있긴 있는 모양이군요. 당신네 대신관은 알고 있었죠? 입막음을 하려고 우릴 잡으려는 걸 모를까 봐서요?”

성기사들도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들은 상부의 명령을 받고 있을 뿐이지, 이들의 죄목이 뭔지 몰랐기 때문이다.

단지 신성 제국을 모독했다는 얘기만 들었을 뿐이다.

팔라딘이 당황하며 말했다.

“그게 무슨 말이냐? 누가 살인을 저질렀다고 하느냐? 우린 주신 아스카론 님의…….”

“시끄러워요. 신성 제국이 썩은 것은 대륙 전체가 알고 있는 사실인데 누가 그 말을 믿을까 봐요?”

신성 제국을 모독하는 말에 팔라딘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쿤은 옷에 묻은 먼지를 털어내며 일어섰다.

“당신네 대신관에게 가서 여쭤보시지요. 신성 제국에 살인마가 있는지 없는지. 그것도 재미로 살인을 저지르는 사람 말이에요. 흥, 따지고 보면 당신네들도 다 똑같은 족속들이죠. 사람들을 시켜 아저씰 죽이려 했었고, 비열하게 뒤에서 마법을 써서 치명상을 입혔으니까요.”

뒤를 쫓아온 성기사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잘되었다는 듯 쿤은 뒤돌아섰다.

“가겠어요. 못 봤다고 하면 되지요?”

그러나 팔라딘이 날렵하게 몸을 움직여 쿤의 앞을 가로막고는 서슬이 퍼런 검날을 들이밀었다.

그 모습에 쿤은 당장 항의했다.

“죽이기라도 하겠다는 건가요?”

“순순히 따라올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면…….”

다소 호의적이었던 눈빛이 험악하게 돌변했다.

그러자 쿤 역시 화가 치밀었다. 아직은 어린 나이였기에 감정에 솔직한 탓이었다.

“당신들이 그러고도 주신을 섬기는 사람들입니까? 예?”

그 한마디는 팔라딘의 양심을 자극했다.

하지만 뒤에 있던 성기사가 열이 받았던지 당장에 다가와 검을 찔러왔다.

강하게 나가려고 했지만, 목숨이 경각에 처해 있는데 어찌 가만히 있을 수 있을까? 쿤은 즉시 검을 피해 달아나기 시작했지만, 채 열 걸음도 못 가 붙들리고 말았다.

“강제로라도 데려가겠다.”

오랏줄로 그를 묶는 성기사를 보면서 팔라딘은 아무런 제지도 하지 않았다.

쿤은 울분을 억누를 수 없었다.

점점 머리털은 새빨갛게 변했고, 또한 동공은 형광 빛을 띠어가고 있는 중이었다.

그때, 한 사람이 다가왔다.

검은 머리카락에 검은 눈의 젊은 남자였다.

보통 사람들 같았다면 부러 못 본 체하고 돌아섰겠지만, 이자는 아니었다.

인근의 성기사가 적의를 드러내며 물었다.

“넌 누구냐?”

5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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