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레인의 힘
마르크는 자신이 꿈을 꾸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착각이 들었다.
그는 오딘을 따라 라파고에 들어와 있었는데, 그것은 전적으로 헤르미온 때문이었다. 그녀가 죽어도 따라가겠다며 고집을 피우는 바람에 마르크와 틴도 마지못해 따라오게 되었던 것이다.
둘도 없는 친구임은 둘째 치더라도 혹여 그녀가 잘못된다면 상단주 폴칸에게 할 말이 없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마르크는 조건을 내걸었다.
만약에 목숨이 위험해질 경우에는 군소리 없이 빠지는 것으로…….
그 같은 약조를 받고도 모자라 양피지에 각서까지 받은 후에야 마르크는 그녀의 결정을 따르기로 했다.
조마조마하는 심정으로 이곳에 다다랐을 때, 마르크는 여러 번 고개를 돌려 가면서까지 탈출할 곳을 재차 확인했었다.
그러나 여차하면 도망갈 태세였던 그에게 막상 벌어진 일들은 충격으로 다가왔다.
음영대는 경고조차 하질 않았다.
제지를 하려고 다가온 마적단의 경비의 목이 일합에 나가떨어지며 흥건한 피가 흘러나와 바닥을 적셨다.
비릿한 피비린내가 바람에 실려 사방으로 퍼지자, 그를 시작으로 마적단들이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동시 다발적으로 몰려들어 집단 전투가 벌어졌다.
음영대의 무력은 상상을 초월했다.
검술에 있어서라면 문외한이나 다름없는 마르크에게도 그렇게 느껴졌다. 일부 무사들의 움직임은 눈으로 포착하기도 버거울 지경이었으니까.
잔인한 광경이 펼쳐졌지만, 마르크나 헤르미온은 그를 보며 질겁하지는 않았다. 이곳저곳을 다니며 이보다 참혹한 현장도 보아왔기 때문이다.
저들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이라도 해보려 이스론 상단 내에서 톱클래스에 해당하는 검술을 지닌 틴을 보았지만, 그는 얼마나 놀랐는지 떨림을 주체하지 못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것은 가히 압도적이었다.
처음 경비대가 무너진 이후 더 많은 마적단이 몰려들었지만, 그들조차 변변한 힘 한 번 못 쓴 채 나가떨어졌다.
제3문까지 들어서는 데 걸린 시간은 찰나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였다.
오딘과 마르크 일행이 느긋하게 걷는 동안 음영대의 무사들은 걸리는 모든 자들을 쓰러뜨린 것이다.
놀람과 충격의 연속이었다.
오죽하면 마르크는 자신이 잘못된 정보를 입수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의심마저 품었다. 카반의 울프는 그저 허명에 불과한 게 아닐까라고 말이다.
카반에 사는 사람들은 그들에게 약탈당하고, 억압되어 있었으니 그들의 입을 통해 퍼진 말이라면 그럴 수도 있었다.
그래서인지 마르크는 틴에게 귀엣말을 넣었다.
“허명인가 봅니다. 카반의 울프는 그냥 숫자만 많은 오합지졸이었나 봐요.”
그러자 정색한 얼굴로 틴이 고개를 저었다.
“절대 약한 게 아냐. 저들이 무식할 정도로 강한 거지.”
그의 말에는 일체의 거짓도 담겨 있지 않았다.
이곳에 동행한 음영대 무사 스물을 제외하고 아레인에서 온 나머지 무사들은 자연히 카반에 남아 있을 상단의 사람들과 그곳 주민들의 보호를 맡게 되었다.
그리고 현재 이곳에는 이스론 상단에서 파견 나온 호위 무사들 5명이 섞여 있었으니, 정확한 수는 오딘과 쉬바인을 포함해 30명이 맞았다.
마른 사내가 덴에게 보고는 제대로 올린 셈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사람 수가 아니었다. 더군다나 정작 무력을 행사하는 이들은 10명 정도에 불과했던 것이다.
쉬바인이라는 마법사가 있긴 했지만, 그는 일체의 실력 행사를 하지 않았다. 심지어 전투를 벌이는 음영대의 무사들에게 실드(Shield:방어막)조차 걸어주지 않았으므로.
혹여 다칠까 염려가 되었던지 틴 옆에 바짝 붙어 이동하고 있는 마르크.
하지만 틴은 마르크를 살필 여유가 없었다. 놀람이 너무 컸던 탓이다.
‘하나같이 괴물들만 데리고 온 것인가?’
그의 머릿속엔 더 이상 아레인이 군소 왕국이라는 편견이 자리하지 않았다.
보편적으로 공국 이상의 경우를 예로, 힘의 크기를 논할 때 군사력은 필수였다. 이런 자들이 있는 이상 아레인은 결코 약소국이 아닐 것이다.
‘내 눈이 틀리지 않았어. 눈 하나 깜짝 않고 사람을 베어 넘기다니… 이들은 내가 느낀 것보다도 훨씬 무서운 존재들이다.’
그러자 불현듯 생기는 걱정이 있었다.
‘이런 무력 집단을 가진 줄 알았다면 아레인과의 거래에는 조금 더 신중했어야 했다.’
제일 태평한 것은 헤르미온이었다. 그녀는 오딘의 어깨를 보며 상념에 빠져 있었다.
‘한 번만이라도 저 두 팔로 안아줬으면… 그냥 안아만 줘도 좋을 텐데…….’
넓디넓은 어깨는 아니었다. 하지만 떡 벌어진 적당한 넓이의 그것은 자신을 안아주기에는 가장 이상적인 비율이라고 헤르미온은 생각했다.
생각은 금세 욕심으로 변했다.
‘그리고 시간이 멈춰버렸으면…….’
헤르미온 역시 음영대의 무력에 놀람이 적지 않았다.
그러나 그 놀람은 이런 여유로 번졌다. 알아서 다 처리해주니 마음 놓고 오딘을 훔쳐보는 것이다.
‘이 사람, 운명인 걸까? 보고 또 봐도 질리지가 않아. 나 어쩜 좋지?’
질리지 않는 것뿐이 아니라 그 때문에 다른 광경이나 소리도 들어오지 않을 정도였다.
발그레하게 볼을 붉히며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 있는 그녀를 봤다면 마르크가 한 소리 할 법도 했건만, 아직 불안함을 떨치지 못했기에 그럴 여건이 못 되었다.
상단 내에서 파견을 나와 동참하게 된 호위 무사들은 침을 꿀꺽 삼켰다. 이런 싸움에 휘말렸다가는 결코 몸이 성치 못할 것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허망하게 세상과 작별을 고했다고는 하나 발놀림, 손동작, 검로만 보더라도 여태 쓰러진 마적단들은 결코 만만히 볼 대상이 아니었다.
음영대의 무사들은 악마라도 되는지 사람의 목숨을 가엽게 여기지 않았다. 아무리 대상이 마적단이라고 해도 말이다.
그들 중 손속에 자비를 두는 사람은 일체 없었다.
지금까지 상대해온 마적단들은 일검에 목이 나가떨어지는가 하면, 허리를 베여 몸이 양분되었다.
그러나 그들에게 다행인 점이 있었다면, 가장 무서운 존재인 오딘이 검을 뽑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는 뒷짐을 진 채 구경만 하고 있었으므로.
마르크는 이를 다르게 받아들였다.
‘이렇게 뛰어난 자들을 데리고 다니셔서 걱정을 안 하셨던 거로구나.’
그에는 오딘이란 사람은 수하들의 힘만 믿는다는 생각이 내포되어 있었다.
확실히 오딘은 음영대와는 분위기가 달랐다.
그에는 그가 음영대원들보다 어려 보인다는 것과 마르크 일행에게 단 한 번도 인상을 찌푸리지 않고 푸근한 미소로 대해왔다는 것도 일조했다.
음영대원들의 눈초리와 분위기는 무서울 정도로 사나웠는데, 참극을 벌인 이후라 더욱 그렇게 느껴졌다.
제2문을 내어주고 제3문을 방어하기 위해 카반의 울프의 정규군이 몰려들었다.
서로가 대치를 하고 있는 상황에서 이스론 상단의 호위 무사들은 가슴을 졸였다. 점점 더 많은 수가 몰려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곳에서 자신들 역시 검을 뽑아야 할지도 모른다는 얘기가 된다.
이것이 상단에서 시킨 일이라면 죽든 살든 자발적으로 검을 뽑고 대들겠지만, 이는 순전히 오딘이란 저 남자의 고집에 의해 생긴 일이었기에 만약 크게 다치거나 죽는다면 억울할 법도 했다.
이스론에서 나온 사람들 중 딱 한 사람,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틴이었다.
‘내게도 검을 뽑을 기회나 올까?’
일종의 호승심 같은 것이었다.
음영대와 비슷한 대상과 싸워 자신의 무위를 점쳐 보고 싶은 마음.
이에는 강박관념도 작용했다.
주눅이 든 이스론의 호위 무사들. 더 따지자면 자신의 수하들인 그들의 자신감을 회복시켜 주려면 틴 자신이 나서는 수밖에 없다고 여겼던 것이다.
내색은 않았지만 오딘은 마르크와 틴을 흥미롭게 지켜보는 중이었다. 틴의 투기를 읽은 그는 음영대의 무사 전부에게 전음을 보냈다.
-될 수 있으면 틴이라는 저자에게도 기회를 제공하라. 싸우고 싶어 안달이 난 모양이니까.
그 소리에 음영대의 부대주가 휘하의 무사들에게 전음을 보내자 곧 이상한 광경이 펼쳐졌다.
음영대의 무사들의 입술이 소리를 내지 않고 미세하게 떨리기 시작한 것이다. 이는 음영대의 무사들의 그들의 부대주보다 전음의 수준이 떨어짐을 의미했다.
어쨌거나 이 광경을 지켜보던 틴은 의문을 품었다.
‘뭐지? 신호? 아니면 수화와 비슷한 것일까?’
잠시 후, 음영대의 부대주가 그들의 뜻을 담아 오딘에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명을 받들겠나이다.
그때, 마적단에서 비쩍 마른 한 사내가 무리들 사이를 헤치고 걸어 나왔다. 조금 전 덴에게 보고를 올렸던 그자였다.
그는 입을 열더니 음영대를 향해 거침없이 지껄였다.
“죽고 싶으면 무덤을 팔 일이지 여긴 왜 기어들어와?”
어눌한 말투와 어리벙벙해 보이는 모습이 어울리면서도 경고 자체는 섬뜩해 묘한 분위기가 연출되었다.
“돌아갈 생각은 말라고. 기왕 온 거 최대한 잔인하게 죽여줄 테니까. 뼈를 가루로 만들어주지. 뭐, 몇은 껍질을 벗기는 게 낫겠어.”
뒷말을 끝냈을 때 사내의 표정은 더 이상 어벙해 보이지 않았다.
그는 인상이 매우 험악해져 있었는데, 덴을 대할 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그는 그것을 일종의 고질병 같은 것이라고 했다.
덴을 대할 때는 이상하게 어려워지고 그 때문에 멍청한 모습까지 내비치는 것이라고. 자신의 행동을 이상하게 보는 사람들에게 늘 해왔던 말이었다.
그러나 그건 위장이었다.
언젠가는 자신을 무시하는 덴을 죽여 그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 이 남자의 목적이었던 것이다.
보통 덴은 술을 취하도록 마시지 않는다. 타인을 믿지 못해서였다. 그런 그가 단장이 자리를 비운 새 맘껏 흐트러져 정신을 놓고 있는 바로 오늘, 운 좋게 찾아온 기회를 앗아가려는 침입자들이 남자에게 결코 달가울 리가 없었다.
그렇기에 오늘이 가면 또 언제 기회가 올지 몰라 짜증이 난 그가 이런 분노를 드러내는 것은 어떻게 보면 당연했다.
마적단의 수가 많아지고, 갑옷까지 착용한 정규군들이 들어서자 마르크는 또다시 긴장하기 시작했다. 상단 일을 하게 되며 용기보다는 돈과 친하게 지내서였다.
아직 전부가 오지 않았는지 정규군은 30명 정도였는데, 이들도 무시할 게 못 되었다.
허우대도 좋았으며 키 또한 유별나게 컸다. 게다가 도끼 자루라고 해도 믿을 만한 커다란 검은 스치더라도 뼈가 으스러질 것 같아서 위협이 되기에 충분했다.
인상 또한 하나같이 사나워 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은영대는 조금도 움츠러든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자만일까? 아니면 정말 자신이 있다는 뜻일까?’
틴이 그렇게 의문을 품을 만도 했다.
저들의 병력은 이쪽의 전부를 합한 것보다도 4배 이상이다. 거기에 이쪽 사람들 여덟 정도는 별 도움이 못 될 것이라 판단하고 있는 상태이니 무리도 아니었다.
틴은 걱정은 되었지만 겁을 먹지는 않았다. 도리어 이렇게 사람이 많으니 어쩌면 자신에게도 거들 기회가 주어지지 않을까 하는 기대에 차기까지 했다.
그러나 현실을 인식하며 틴은 당장 그 욕심을 고이 접었다.
“아무래도 나설 순 없겠어. 헤르미온과 마르크를 지키는 것이 내 임무니까.”
근처의 아무도 들을 수 없을 정도로 아주 나지막이 한 말이었다.
하지만 큰 걸음으로 다섯 보는 떨어져 있던 오딘은 방금 전의 말을 들은 것처럼 고개를 돌려 이유 모를 웃음을 지었다.
그것도 잠시, 오딘은 다시 고개를 돌렸다.
마적단의 도발에 가장 가까이 위치해 있던 음영대의 무사가 검을 마주쳤던 것이다.
이곳에서 처음으로 쇠의 마찰음이 터졌다.
카캉!
마적단은 일체의 양보가 없었다.
일대일로 검을 맞대고 있는 상황이었지만, 지근거리에 있던 다른 마적단이 비겁하게 그의 등을 찔러 들어왔다.
그러자 찰나에 음영대의 다른 무사들이 나섰는데 어이가 없게도 같은 편을 도와주는 것이 아닌, 제각기의 적들을 찾아 나선 것이었다.
당장에라도 먼저 검을 마주친 음영대의 무사가 등에 자상을 입을 것 같았는지 마르크가 탄성을 지르며 안타까워했다.
“저, 저런…….”
안타까울 수밖에 없었다. 온 사람이 극소수인 데다, 그들 개개인이 실력자이니 만에 하나라도 다치거나 죽는다면 앞으로의 일이 더욱 어려워질 것은 자명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상은 보기 좋게 어긋났다.
마르크가 걱정하고 있는 대상은 용케도 그것을 알아차리고는 허리를 유연하게 틀었다. 그 바람에 그의 등을 찌르려던 마적단의 검은 동료에게 날아들었다.
퍽!
절묘한 타이밍이었다. 시야가 가려져 볼 수 없었기에 피할 겨를도 없는 듯했다.
가슴을 찔린 마적단에게서 쓴 소리가 튀어나왔다.
“너 이 개… 새… 끼.”
그가 내뱉은 욕은 자신을 찌른 동료를 향하는 것인지, 아니면 급작스레 피한 음영대를 향하는 것인지 대상이 불분명했다.
그렇게 처음 달려들었던 마적단은 쓰러졌다.
전투는 계속해서 산발적으로 벌어지는 중이었다.
하지만 수가 문제였을까? 시간이 흐를수록 음영대는 수세에 몰리기 시작했고, 자연히 이스론 상단에서 따라온 8인은 초조함을 금치 못했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몸을 뺄 수도 없는 노릇이다. 너무 깊숙이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이스론의 호위 무사 하나가 격양된 음성으로 말했다.
“우리도 도와야겠습니다.”
다른 자들도 마찬가지의 의견인 듯했다.
“저들이 죽으면 다음은 저희 차롑니다. 죽더라도 해봐야겠습니다.”
그들의 시선은 틴의 입에 맞춰져 있었다. 호위대 부대장의 명이 떨어지기 전까진 독단적으로 행동하는 것이 금물이었기 때문이다.
틴은 자연히 갈등에 휩싸였다.
‘저놈들이라고 꾀가 없으리라는 법은 없다. 우리가 저쪽으로 죄다 빠지면 저놈들은 이쪽을 사로잡아 더 궁지에 몰리게 할지 모른다. 어떻게 한다, 어떻게…….’
그의 머릿속에서 나온 최선책은 인원을 반으로 가르는 것이었다.
“세 명은 남아라. 그리고 두 명은 나와 함께 저들을 돕는다.”
굳은 각오를 하고 호위 무사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그런 그들을 방해하는 목소리가 있었다.
“나서려면 혼자 나서는 게 좋겠군. 나머지는 도움도 안 될 것 같으니.”
오딘이었다.
여전히 그는 강 건너 불구경이나 한다는 심산으로 팔짱을 낀 채 치열한 전투를 바라보는 중이었다.
이스론 상단의 호위 무사들에게는 기분이 나쁘게 들릴 만한 소리였다. 하지만 틴은 이곳까지 오면서 느낀 바가 있었기에 그 말을 부정하지 않았다.
“그렇게 하는 게 낫겠습니다. 혹 내가 잘못된다면 너희들은 이분과 마르크, 헤르미온을 데리고 신속히 이곳을 빠져나가라.”
호위 무사들은 억울한지 한결같이 격양된 목소리로 항변했다.
“부대장님!”
“부대장!”
그러나 그 말을 들어줄 생각은 없는지 틴은 이미 적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기 시작했다. 적들은 자신들보다 수배는 많았으므로 상대를 찾는 것은 어려울 것이 없었다.
틴이 마적단과 맞붙는 것을 이스론 사람들은 초조하게 지켜보았다.
긴장을 많이 했던 탓인지 틴의 몸은 좀 굳어 있었는데, 그것도 잠시일 뿐이었다.
여러 차례 병장기를 부딪쳐 가며 그는 본래의 감을 되찾아가고 있었다.
서너 번 검을 섞은 후에 처음으로 틴이 마적단을 쓰러뜨렸을 때, 호위 무사들은 마치 자신의 일처럼 기뻐했다.
또한 애간장을 녹이며 그를 지켜보던 마르크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갈수록 힘을 발휘해 그가 3명의 마적단을 무찔렀을 때, 호위 무사들은 자부심까지 느꼈다.
마르크 역시 들떴다.
“대단해, 역시 틴 님이야.”
적어도 그들이 보는 부대장 틴은 모자랄 것 없이 충분히 강해 보였다. 음영대의 무사들과 비교해봐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단, 음영대의 부대주라는 자는 예외였다.
같은 시간 동안 그는 틴보다 상대를 가리지 않고 2배는 많은 수의 마적단을 쓰러뜨렸으므로.
“힘은 있지만 유연성이 부족하군.”
오딘에게서 나온 말이었다.
마르크는 계속 틴에게 시선을 꽂아둔 채 응원을 보내다가 시선도 돌리지 않고 물었다.
“검술을 할 줄 아시나요?”
“모른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
검존, 흑룡무제, 마교의 지존이자 천하무적이라고까지 일컬어지던 그를 마치 검술의 문외한 정도로 여기고 있음이다.
“사실 저도 검은 쥘 줄 압니다. 싸워보질 않았을 뿐이죠. 하하.”
자신을 같은 급수 정도로 생각하고 있는 마르크의 말이 우스꽝스러울 법도 하건만, 오딘은 별 내색하지 않았다.
하긴 직접 실력을 행사한 적이 없었으니 마르크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어쩌면 무리도 아니었다.
만약 오딘이 우쭐대고 나서기 좋아하는 무림인이었다면 수하들을 모두 물린 후에 혼자 이 상황을 정리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 부류가 아니었다.
그 무렵, 격전 중에서도 틴은 이상한 느낌을 지우지 못했다.
‘알 수 없는 일이다. 내가 의도하지 않았는데 어째서 점점 더 강해 보이는 자들과 맞서게 되는 거지?’
오죽하면 신이 자신을 시험하고 있는 게 아닐까란 억측까지 할 정도였다.
정말 그랬다. 일부러 저들의 수를 줄이기 위해 정규군을 피해 상대해왔지 않은가. 하지만 바로 전부터 그 정규군과 맞서게 되었다.
조금 전에 쓰러뜨린 자는 괴력의 소유자였고, 반면에 이번은 날랜 몸놀림의 소유자다.
‘이런 놈들이라면 두 명을 상대하기 어렵겠어.’
최소한의 마찰과 움직임으로 적을 제압하고 더 많은 인원을 상대하기 위해 힘을 아껴 왔지만, 이제는 그럴 여력조차 없었다.
순간 방심했던 탓일까?
틴의 옆구리에 마적단의 검날이 스쳐 지나가며 통증이 전해졌다.
“크윽…….”
흘러내리는 피를 막아보고자 상처를 입은 옆구리에 손을 가져다댔음에도, 손가락 사이로 뜨거운 피가 꾸역꾸역 밀려나왔다.
그때를 틈타 회심의 일격을 가하려던 마적단을 보며 틴이 당황하고 있을 무렵이었다.
서걱!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검날이 궤적을 그리며 마적단의 목을 경유했고, 그와 동시에 틴의 심장에 검을 찔러 넣으려던 마적단의 움직임이 멎었다.
몸에서 분리된 머리통은 미끄러지듯 땅으로 떨어진 후 데굴데굴 굴러갔다.
약속이나 한 것처럼 흩어져 있던 음영대의 무사들 서넛이 틴의 주위로 다가와 전투를 벌였다.
“고맙소.”
그들에게 고마움을 표한 후, 틴은 재깍 옷을 부욱 찢어 상처 부위를 단단히 묶었다.
“이젠 됐소. 아직 움직일 수 있을 듯하오.”
그는 목숨이 다하더라도 싸울 생각이었다.
성큼 발을 디디려 할 때, 누군가가 어깨를 잡고 만류했다.
오딘을 따르는 쉬바인이라는 마법사였다.
“상처를 손봐주겠소.”
고맙게도 그가 힐링을 캐스팅해주어 자상을 입었던 옆구리는 원상 복구되었다. 애초에 상처를 동여맬 필요는 없었던 것이다.
“고맙습니다.”
일단은 고마움을 표하면서도 틴은 한편으론 의문이 일었다.
‘왜 이 마법사는 돕지 않지? 이 사람이 돕는다면 좀 더 수월하게 저들을 상대할 수 있을 텐데…….’
본디 전투라는 게 그러하다.
구성원에 마법사가 포함된다면 전력은 배가 되거나, 그 이상이 될 수도 있다.
개인의 몸을 이동시킨 것뿐이라지만, 그는 카반에서 직접 마법진을 그려 아레인 왕성까지 다녀오질 않았던가.
그 말인즉슨, 이 마법사의 실력은 결코 낮지 않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럼 수고해주시오.”
틴은 얼렁뚱땅 몸을 돌려 오딘에게 가려던 쉬바인의 팔뚝을 덥석 잡고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왜 돕질 않는 것이오? 당신이 돕는다면 이 전투는 더 쉬워질 수 있을 텐데…….”
쉬바인의 눈에 잠시나마 당혹한 빛이 어렸다.
“마나를 아껴야 하오.”
그는 그렇게 대답했지만 틴의 눈이 여전히 의심을 품고 있는 듯하자, 자신의 입장을 털어놓았다.
“내가 할 일은 오딘 님을 지키는 것이오. 또한 이들이 다가 아니라고 하였으니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해야 합니다. 만약 일이 잘못되면 당신네 일행은 누가 보호합니까?”
듣고 보니 일리가 있는 말이어서 틴은 그를 잡고 있던 손을 놓았지만, 어쩐지 속고 있다는 느낌은 말끔히 씻지 못했다.
쉬바인이 돌아간 후, 틴은 가장 강대한 적을 맞게 되었다.
마적단의 수가 줄어들기 시작하자 마른 남자가 드디어 나선 것이다.
그는 산 자를 독려하지 않고 죽은 자들에게 불만족스러움을 드러내며 욕부터 퍼부었다.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자식들 같으니라고…….”
우연찮게도 상대가 없는 틴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그는 틴보다도 작은 덩치, 왜소한 체구였지만 하등 기죽을 것이 없는지 이죽거리며 다가왔다.
“첫 희생양이 되겠군.”
처음 등장 때부터 틴은 그를 눈여겨보았었다. 이들의 우두머리급이라는 점에서이다.
지금 역시 넘쳐 나는 배짱만으로 그가 자신의 상대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였다.
마른 남자는 허리춤에 돌돌 말려 있던 칼날이 박힌 채찍을 꺼내들었다.
그 모습에 자연히 틴은 신경을 곤두세울 수밖에 없었다.
‘스치기만 해도 피부가 찢겨 나가겠군. 조심해야겠다.’
틴도 보통내기는 아니었다. 물러나려는 것이 아니라 맞서려는 것이다.
마른 남자는 뜸을 들이지 않고 손목을 흔들어 채찍을 휘둘렀다.
그러자 둘둘 말려 있던 채찍이 흡사 살아 있는 뱀처럼 틴에게 날아들었는데, 그 속도가 무시무시하여 파공음까지 일었다.
몸을 간단히 빼어 피할 수 있는 경우가 아니었다.
틴은 채찍을 벗어나기 위해 무작정 몸을 던졌다.
그러자 남자는 가볍게 손목을 퉁겼고, 힘이 실린 채찍 끝의 진로가 바뀌어 아직 착지하지 못한 틴의 발목을 스쳤다.
발목이 욱신거리는 통증을 느끼며 틴은 볼썽사납게 나뒹굴었다.
몸을 바로 했지만, 그는 죽을 것처럼 인상을 찌푸렸다. 당장에 발목이 검푸른색을 띠고 퉁퉁 부어오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칼날 끝에 독이 발려져 있었던 탓이다.
마른 체구의 남자는 틴을 잡아먹을 것처럼 만면에 사악한 미소를 드리우며 나불거렸다.
“굼벵이.”
다행인 건 매우 독한 독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만약 칼날 끝에 치료가 불가능할 정도로 위험한 독이 발라져 있었다면 음영대의 부대주가 그를 상대했을 것이므로.
상황은 갈수록 악화일로로 치달았다.
틴은 상처 부위를 열십자로 째고 피를 빼내었지만, 채찍을 피해 계속 움직인 까닭에 그곳에서 더 큰 통증이 느껴졌다.
흥이 동한 걸까? 남자는 부러 틴의 발목만을 노려 채찍을 휘두르며 조소를 퍼부었다.
“클클, 꼴이 말이 아니군. 다리를 잃고 싶지 않으면 더 빠르게 움직여라.”
틴은 마치 춤을 추는 것 같았다. 그에게는 더없는 굴욕이었다.
마르크와 헤르미온을 포함한 자신의 휘하 호위 무사들도 지켜보고 있을 것을 생각하니, 창피함에 얼굴이 다 화끈거렸다.
안색이 노래지고 차츰 다리에 감각도 없어졌다. 주위에서 격전을 벌이는 탓에 쩌렁쩌렁 귀를 울리던 병장기 소리도 희미하게 들렸다.
그럼에도 틴은 의식의 끈을 부여잡고 있었다.
‘이대로 끝나서는 안 된다. 이렇게 허무하게 죽을 순 없어.’
틴의 눈이 집요하게 채찍을 좇다 문득 적의 빈 몸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저거다! 무서운 것은 병장기지, 저 남자가 아니다.’
틴은 즉시 호흡을 가다듬고 평정을 되찾았다. 그러자 정신이 맑아지고 몸이 가벼워졌다.
이것은 그의 스승에게서 배웠던 것이다. 단점이 있다면 아직 그 상태를 오래 지속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순간적으로 틴의 몸이 빨라졌다.
채찍이 쭉 뻗어 회수되기도 전에 틴은 무서운 속도로 마른 남자에게 파고들었고, 채찍 또한 질세라 틴의 몸을 휘감으려 했다. 그러나 무게가 실린 틴의 검은 채찍을 밀쳐 냈다.
카캉!
이제 남은 거리는 큰 걸음으로 다섯 걸음 정도였다.
틴의 검날이 당장에라도 마른 사내의 목을 베어버릴 것같이 예기를 내뿜었다.
그런데 참 이상한 일이었다.
마른 남자는 위기가 닥쳤는데도 전혀 겁을 먹은 표정이 아니었다. 도리어 다가오기를 기다리는 것인지 기분 나쁜 웃음까지 머금고 있었다.
자신감이 없다면 못할 행동이었다.
그는 자신이 가진 채찍에 더 이상 신경을 쓰지 않았다.
마침내 틴의 검이 사선을 그었다.
순간, 참으로 어이가 없는 일이 일어났다. 마른 사내는 검을 피하기는커녕 도리어 머리를 들이댄 것이다.
콰창!
그러자 기가 찰 상황이 벌어졌다. 틴의 굵직한 검이 마른 사내의 머리와 부딪쳐 그만 깨어지고 만 것이다.
검의 파편들이 틴의 몸에 박혔다.
처참하게 쓰러진 틴을 향해 마른 사내가 채찍을 바닥에 질질 끌면서 다가오고 있었다.
“원래 난 머리가 단단하다고. 채찍은 그냥 장난감일 뿐이야.”
마른 사내는 힘들이지 않고 늘어진 틴의 멱살을 잡고 들어올렸다. 맥이 풀렸는지 틴은 저항조차 할 수 없었다.
“널 가지고 노는 것은 그만 해야겠어. 놀 것들이 사방에 널려 있으니…….”
그의 말처럼 놀 것들은 사방에 널려 있었다.
음영대의 무사들은 부상 하나 입질 않고 마적단들을 착실히 쓰러뜨려 나갔기 때문이다.
물론 마적단들도 더 모여드는 중이었다.
그들 중엔 로브를 입은 자들도 있었으니, 바로 마법사들이었다.
이미 마른 사내는 승리를 점쳐 놓고 있었다.
대뜸 그가 틴의 머리를 들이받으려 하는데 가까운 곳에서 질문이 들려왔다.
“네 머리가 그렇게 단단한가?”
행동을 멈춘 남자는 목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엔 음영대의 부대주가 무심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마른 남자는 자신에게 멱살을 잡힌 틴과 음영대의 부대주를 번갈아 보다가 돌연 틴을 아무렇지도 않게 집어던졌다.
“곧 죽을 놈한텐 미련도 없다.”
그리고서 음영대의 부대주를 싸늘하게 쳐다보았다.
“네 녀석은 이 중에서 몇 번째로 강하지?”
의외로 음영대 부대주의 입에서 대답이 순순히 흘러나왔다.
“두 번째, 아니 세 번째일지도 모르겠군.”
“그럼 가장 강한 녀석을 소개해주면 안 될까? 오랫동안 강자를 만나지 못했거든.”
그 말에 음영부대주의 입에서 굵은 웃음이 터졌다.
“하하하하!”
그는 웃음을 뚝 그치고 마른 남자에게 현실을 깨우쳐 주었다.
“하도 어이가 없어 무례를 저지르고 말았군. 착각도 유분수지, 나도 과분하다고 생각해야 할 텐데…….”
자존심에 상처를 입었는지 마른 남자는 당장에 성질을 부렸다.
“감히 날 얕보는 게냐?”
은영부대주는 타이르듯 말했다.
“어디 가서 힘자랑할 수준은 되니까 하는 얘기겠지. 하지만 저분께서 나서신다면 넌 물론, 이 마적단은 흔적조차 없이 사라질 거다. 아마도 지옥을 경험하게 되겠지.”
어리석게도 마른 남자는 그 말을 귀담아듣지 않았다. 그가 유심히 들은 부분이라면 저분이라는 대목이다.
곁눈질을 통해 은영부대주의 시선이 검은 머리의 남자를 향해 있음을 깨달았다.
그는 몸을 돌려 당장 오딘을 향해 파고들었다.
“클클, 그래. 저 녀석이란 말이지. 보기엔 그리 대단해 보이질 않는데, 한번 해봐야겠어.”
미련한 욕심이었다.
음영부대주가 무서운 속도로 그를 뒤따르기 시작했다.
그가 오딘에게 가게 된다면 자신은 짐을 떠넘겼다는 죄의식을 가져야 할 테니까.
마른 남자는 오딘에게 다가설 수 없었다. 자신을 뒤따르는 녀석의 속도가 보통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나도 속도라면 뒤처지지 않는데, 저 녀석은 더 빠르군. 이대로라면 안 되겠어.’
즉시 그는 몸을 돌려 채찍을 휘둘렀다.
음영부대주가 채찍을 향해 팔을 들었는데, 그 바람에 팔목에 찬 가죽 완갑에 마른 남자의 채찍이 휘감겼다.
음영부대주가 그 팔을 확 당기자 마른 남자의 몸이 허공에 떠서 그에게로 당겨져 왔다.
‘큭, 무슨 힘이 괴물 같군…….’
그것이 그의 마지막 생각이었다.
분명히 음영부대주가 주먹을 뻗는 것을 보고 머리를 들이댔지만, 그것은 그의 살아생전 최고의 착각이 되었다.
퍼석!
묘한 소음이 장내에 울렸다.
끔찍한 몰골이었다. 마른 사내의 두개골은 함몰되어 있었다.
음영부대주는 맨주먹으로 그의 머리를 으깨버린 것이다.
골수가 손을 더럽혔지만, 그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더럽혀진 손을 옷에 쓱 문질러 닦았다.
순간 장내에 침묵이 흘렀다.
괴음에 전투를 하던 이들도, 그리고 이스론 상단에서 온 사람들도 죄다 이쪽으로 시선이 쏠린 탓이었다.
마적단들은 겁을 먹고 있었으며, 이스론 상단의 사람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던 데에 반해 음영대의 무사들은 여전히 무정한 눈을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