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또 다른 인연 (27/67)

또 다른 인연

태어난 것 자체가 저주라고 생각했다. 적어도 이곳 카반에서 태어나고 자란 농노들은 그러했다.

분명 카반은 매우 드넓은 곳이었지만, 땅은 척박했으며 삶의 질도 매우 떨어졌다.

그나마 소작농들은 다행인 편이었다.

농노들의 삶은 노예들의 삶보다도 형편없었는데, 그들은 이중 삼중의 착취를 당했던 것이다.

소작농들은 그들을 부리는 대신 일정한 보수를 주었는데, 그마저도 영주에게 착복을 당하곤 했다.

그나마 그것뿐이면 다행이었겠지만, 이곳은 누가 뭐라 해도 카반이다. 악명 높은 카반의 울프들이 득실대는 바로 그 카반이라는 얘기다.

더 이상 빼앗길 것도 없는 농노들은 부인과 딸들을 빼앗겼다. 빼앗는 목적 자체도 단지 한순간의 쾌락을 위해서였다.

볼일을 마친 놈들은 십중팔구 여자들의 생명까지 앗아갔고, 그것이 더욱 농노들의 마음을 썩어가게 만들었다.

그래서인지 여자들은 마음대로 바깥출입을 할 수도 없는 형편이었다.

늦은 밤에도 하늘엔 매력적인 은빛 달과 어울려 수많은 별들이 대지 위를 수놓고 있었다.

17, 8세 정도 되어 보이는 청년이 땅바닥 한구석을 덮고 있는 거적을 들추며 팔을 뻗었다.

“됐어, 나와도 돼.”

그러자 웨이브가 진 귀여운 머리카락이 고개를 내밀었다. 옷과 머리카락에 흙 부스러기가 묻어 그리 깔끔하진 않았지만, 그녀의 생김새는 피폐한 이곳과는 많은 차이점이 있었다. 보기만 해도 흡족해지는 아리따운 얼굴의 소유자였던 것이다.

청년의 설레는 눈이 그것을 증명해주고 있었다.

이 땅굴은 두 사람이 너무나 잘 아는 곳이었다. 바로 카반의 울프를 피하기 위해 마을 사람들이 만든 일종의 도피처였던 것이다.

물론 이곳에 숨는 대상은 주로 여성들이었다.

그들을 위험으로부터 지켜 주기 위해 사랑하는 마음들이 뭉쳐 만들어낸 곳이었다.

카반의 여자들은 이에 대해 남자들에게 항상 고마워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카반 내의 많은 연인들의 사이가 유독 좋은 것은 어쩌면 이 땅굴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일지도 몰랐다.

그녀의 눈 역시 청년을 신뢰하는 마음이 가득했다.

그 마음을 잠시 접어두고 그녀는 양팔을 활짝 펼친 채 지그시 눈을 감고 턱을 살짝 들어 상쾌한 공기를 마시며 자연의 정취를 만끽했다.

“으음, 너무 좋아.”

밤하늘을 느낀다는 것. 그게 그리도 기뻤는지 그녀의 입술은 연방 미소를 간직하고 있었다.

그녀가 다시 눈을 떴을 땐 청년에 대한 고마움이 배가 되어 있었다.

“고마워, 정말 고마워.”

그가 아니라면 꿈도 못 꿀 일이었다. 적어도 이 카반에서는 말이다.

아닌 게 아니라 이곳의 여성들은 한낮에도 마음대로 돌아다니지 못하는 처지였다.

허리가 꾸부정해질 정도로 늙어서야 가능한 일인 것이다.

그 전에 그녀는 지금 당장 이곳보단 하늘과 더 가까울 저 언덕 위에도 올라가보고 싶고, 시원한 물소리도 듣고 싶고, 새가 지저귀는 소리나 풀벌레들의 울음소리도 들어보고 싶었다.

아니, 그것보단 조금이라도 더 이 기분을 느끼고 싶었다.

그 기분이라도 헤아렸는지 청년이 말했다.

“세실리, 저 위에 올라가보지 않을래?”

욕심 같아서야 이 밤을 지새우고 싶은 그녀였다. 그리고 동이 틀 무렵 떳떳하게 해를 바라보고도 싶었다.

하지만 그녀는 욕심을 접고 말았다.

“이것으로 족해.”

그러나 청년은 말과는 다르게 흔들리는 그녀의 눈빛을 발견했고, 곧 굳은 농사일에 지친 투박한 손이 그녀의 희고 가녀린 손목을 덥석 잡고는 달리기 시작했다.

땅굴로부터 멀어질수록 세실리의 목소리는 점점 더 떨렸다.

“무서워, 무섭단 말이야.”

“잠시야, 잠시만 보고 갈 건데, 뭐.”

자신을 이끄는 투박한 손의 촉감을 느끼면서 그녀는 믿었다. 그라면 만약 카반의 울프와 마주친다고 하더라도 자신을 지켜 줄 것이라고…….

숨이 가빠져서야 둘은 언덕 위에 다다를 수 있었다.

청년도, 그리고 세실리도 숨을 몰아쉬면서도 웃기 시작했다.

“하하하… 하하하하…….”

“깔깔…….”

시원한 바람이 두 사람의 더운 몸을 식혀 주었고, 그제야 세실리는 드넓은 세상을 보려 했다.

그 전에, 한 가지 이상한 일이 있었다.

웃음이 아직도 그치질 않았다는 것이다.

이상했다. 이곳에 있는 사람은 단둘뿐이라고 생각했던 세실리였지만, 지금 웃는 목소리는 자신을 도와 이 언덕에 오르게 해준 청년의 목소리보다는 훨씬 더 굵게 들렸다.

거기에 더해 그녀의 머리 위쪽으로 어두운 그림자가 다가오고 있었다.

두려운 마음에 세실리는 흠칫 뒤를 돌아보았다.

그림자의 주인은 자신보다 머리 두 개는 큰, 턱에 구멍을 뚫어 긴 쇠고리를 매단 남자였다.

상반신은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알몸이었는데, 울긋불긋한 근육들이 더한 위화감을 자아내게 했다.

군침이라도 돌았는지 남자는 혀를 길게 빼어 물고 소름 끼치는 웃음을 짓고 있었다.

세실리는 소리라도 지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덜컥 겁을 먹어서인지 목소리가 밖으로 흘러나오지 않았다.

그는 다짜고짜 세실리의 허리를 끌어안더니 단숨에 땅바닥으로 눕혔다.

‘도, 도와줘…….’

육중한 몸에 깔려 세실리는 숨도 못 쉴 지경으로 도와주길 빌었다.

분명 그녀의 동공 안에는 눈앞의 남자의 어깨 너머로 이곳에 자신을 데리고 온 청년이 담겨 있었다.

그토록 자신을 갈망하던 대상은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고 있었다.

잠시 후, 무정한 그의 입이 열렸다.

세실리가 아닌 세실리를 깔아뭉갠 남자에게 하는 말이었다.

“만족하십니까?”

“클클, 그래그래. 근래 보았던 것들 중 가장 낫군. 아니, 평생 동안 이년 같은 물건은 못 봤어. 이 정도 계집이라면 내 힘을 한번 써보도록 하지.”

그녀를 빌미로 삼은 모종의 거래였다.

청년은 이 마을에서 가장 괜찮은 처녀를 남자에게 바치는 대신 카반의 울프에 들어가게 해달라는 요구를 했던 것이다.

세실리는 충격과 혼란에 휩싸였다.

깊은 눈이 슬픔에 잠기고, 따뜻하던 가슴속은 배신감에 사무쳤다.

탐욕으로 물든 더럽고 긴 혀가 그녀의 얼굴을 핥기 시작했다.

불쾌한 기분보다는 청년의 배신에 슬퍼 세실리는 당장에라도 울 것 같은 얼굴로 청년을 모진 말로 나무랐다.

“날 지켜 준다는 말은 모두 거짓말이었구나.”

그들의 사연 따위는 사내에게 관심 밖의 일이었다.

험상궂은 사내의 손에 옷이 찢겨지면서도 세실리는 표독스런 눈초리를 하고서 캐물었다.

“날 좋아한다는 말도 거짓말이었니?”

청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래도 죄스러움은 남아 있었던지 그의 눈은 그녀의 눈을 감히 마주치지 못했다.

그러는 동안 바람에 나풀거리던 그녀의 치맛자락이 부욱 하고 찢어지며, 눈처럼 흰 속살이 달빛에 그대로 노출되고 말았다.

올라탄 남자의 눈이 쾌락으로 물들었고, 호흡이 흥분으로 인해 가빠지며 세실리의 얼굴에 역겨운 냄새가 훅 끼쳐 왔다.

이제야 자신을 도와줄 사람이 없다는 걸 깨달았음인가?

세실리는 그에게서 벗어나려 몸부림쳤지만, 발버둥을 치면 칠수록 남자에겐 더한 쾌락만을 안겨 주었다.

그녀의 얼굴은 두려움에 가득 차 하얗게 질렸으며, 온몸은 바들바들 떨렸다. 그리고 겁을 집어먹은 눈에선 당장에 눈물이 봇물처럼 터졌다.

그녀는 모든 것이 틀렸음을 깨닫고 눈을 질끈 감았다. 하지만 눈물만은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카반에서 태어났다는 것, 그리고 카반에서 살아간다는 것에 대해 원망해본 적은 없었다. 많은 행복을 바란 것도 아니었다.

만약 어쩔 수 없이 잡혀갔다면 무서웠겠지만 이렇게 억울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남자의 탐욕에 물든 손이 그녀의 때 타지 않은 살결을 더듬기 시작하자, 세실리는 절망 속으로 빠져 들었다.

단 그뿐이었다.

턱에 고리를 매단 남자는 왜인지 무서운 눈을 한 채로 더 이상 그녀를 범하지 않았다.

그때, 의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왜? 더하지 그래?”

과연 남자의 신경과 시선도 그쪽을 향해 있었다.

“당장 꺼져라.”

세실리는 터질 것 같은 심장을 진정시키며 겨우 실눈을 떴다.

난폭한 경고가 터진 곳에는 한 젊은 남자가 턱을 괸 채 쭈그리고 앉아 있었다.

세실리는 있는 힘, 없는 힘을 다해 자신의 입을 막은 남자의 손을 뿌리치고서 간곡히 부탁했다.

“도, 도와주세요. 제발요.”

애절함이 닿질 않았을까? 젊은 남자는 시큰둥한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그는 여인의 말은 뒷전으로 밀어둔 채 재미를 보려던 남자에게 치기 어린 농담을 던졌다.

“구경 좀 하겠다는 건데, 뭘. 보면 닳는 것이냐?”

여자에게는 더없이 실례가 될 말이었다. 그녀의 인격 자체를 깡그리 무시하는 말이잖은가.

그러나 세실리는 수치심도 없는지 계속해서 그런 그라도 도와주기를 바라고 또 바랐다. 어쩌면 카반에서 태어났다는 것 때문이었는지도 몰랐다.

그녀에게 만약 제대로 된 판단이 서 있었다면 희망을 가지지 않을 수도 있었다.

현재 태연자약하게 이 상황을 지켜보고 있는 그 젊은 남자는, 겉으로만 봐서는 자신을 누르고 있는 이 남자보다 훨씬 약해 보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세실리가 도움을 요청하고 있는 것은 두려움에 질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었기 때문이다.

성난 사자처럼 으르렁거리며 남자가 젊은 남자를 향해 물었다.

“너 이 녀석, 내가 누구인 줄 알고 까부는 거냐?”

의외롭게도 젊은 남자의 입에선 비슷한 질문이 튀어나왔다.

“그럼 넌 내가 누구인 줄 아느냐?”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턱에 고리를 매단 남자가 일어서자, 그가 땅에 두 발을 딛고 선 것만으로도 충분한 위협이 되었다.

그러나 젊은 남자는 아무런 감회도 느끼질 못하였던지 그냥 그 자리에 앉아 있을 뿐이었다.

세실리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일어서서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아나려 했다.

그 순간, 그녀의 팔목을 누군가가 낚아챘다.

소스라치게 놀란 세실리가 돌아보자, 팔목을 붙든 대상은 다름 아닌 자신을 이곳에 데리고 온 청년이었다.

“너, 이런 사람이었니?”

분을 넘어서 한이 담겨 있는 눈망울이었다.

하지만 청년은 고개를 저으며 완고한 태도를 보였다.

“가지 마, 가면 안 돼.”

정말이지 파렴치도 이런 파렴치가 없었다.

그와 살이 닿는다는 자체가 짜증이 나 뿌리치려 몸을 흔들었지만 헛된 노력이었다.

절대 놔줄 수 없다는 듯 그는 붙든 손에 힘을 주어 그녀의 팔목을 더욱 옥죄었고, 결국 세실리는 입을 벌려 청년의 팔을 물었다.

“아악!”

청년이 비명을 지르며 물러나자 그제야 자유로워진 세실리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아나려 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염려가 되었는데, 청년에 대한 게 아닌, 바로 카반의 울프와 마주하게 된 젊은 남자에 대한 걱정이었다.

바로 그게 치명적인 실수였다.

세실리가 잠시 발길을 멈춘 순간에 득달같이 달려온 청년이 손바닥을 펼쳐 그녀의 뺨을 사정없이 후려친 것이다.

짜악! 하는 소음과 함께 세실리의 고개가 홱 돌아갔다.

“그, 그러니까 가지 말라고 했잖아!”

뺨을 얻어맞은 충격보다도 청년이 던지는 말이 더한 아픔으로 와 닿았다. 욕이라도 퍼부어야 했지만, 세실리의 입은 그리 모질지 못했다.

그때, 근방에서 그를 대신해주는 여성의 입이 있었다.

“쓰레기 같은 자식이네.”

긴 은발의 엘프였다.

그리고 그 옆으로는 조금 작은 키에 왜소한 체구의 남자와 온화한 얼굴에 육중한 체구를 가진 남자도 있었다.

이들은 때마침 이곳을 경유하던 헤르미온과 마르크, 그리고 틴이었다.

왜인지 오딘은 이곳에서 볼일이 있다고 하였고, 그 바람에 사람들은 인근에 묵게 됐던 것이다.

그녀를 범하려던 남자의 옆에 앉아 있던 젊은 남자가 다름 아닌 오딘이었다.

헤르미온은 성을 못 이기고 마르크를 책동했다.

“마르크, 저 자식 제거해버려!”

너무 황당한 말이었던지 마르크는 참으로 어이없어하는 기색이었지만, 그녀에게 등을 떠밀려 마지못해 청년에게 다가갔다.

“놓아주시죠.”

청년은 절대 물러설 기미를 보이지 않고서 눈을 돌려 카반의 울프를 의식하고 있었다.

카반의 울프는 죽일 듯이 젊은 남자, 오딘을 쏘아보고 있었지만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질 않았다.

청년은 그것이 대결을 앞두고 긴장감이 증폭된 것이라 생각했다.

그는 상대가 조금 사람이 많다고는 해도 자신의 후원자가 되어줄 남자와 대적할 만한 상대가 없다는 추측에는 변함이 없었다.

세실리는 그나마 그중에서 카반의 울프와 대적할 사람이 틴뿐이라고 생각했던지 목소리를 드높여 애걸했다.

“도와주세요! 저 때문에 곤경에 처하게 되셔서 죄송하지만, 제발 부탁드립니다!”

그녀의 염원은 틴의 허리에 매인 검갑을 향해 있었다.

덩치는 카반의 울프보다 다소 작을지라도 검이 있으니 어떻게든 될 것이라 생각했던 모양이었다.

그러나 틴은 움직일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자상했던 그의 눈이 가늘어졌고 바로 다음 순간, 묘한 소리가 근방에서 메아리쳤다.

서걱!

사람들의 눈이 소리가 난 쪽을 보았다.

변화가 있었다면 분명히 이곳에 없었던 밤과 어울릴 만한 검은 무복의 남자 하나가 더 모습을 드러냈다는 것이었고, 또한 자신이 카반의 울프라고 우쭐대던 남자의 목이 기울어지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의 목은 어이없게도 바닥으로 굴러 떨어졌다.

그렇다 해도 틴 말고는 여기 있는 어느 누구도 그가 검을 뽑아 카반의 울프의 목을 벤 것을 알아채지 못했다.

말로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틴은 현재 기겁을 하며 크게 놀라는 중이었다.

‘믿을 수 없는 발검 속도다. 저자가 다가왔다는 것조차 느끼지 못했는데…….’

목을 벤 남자의 표정은 방금 살인을 저지른 사람의 표정치고는 너무도 무정했다.

오딘과 동행하게 되며 처음 있는 일이었다. 드디어 그가 대동하고 왔다는 자의 실체를 보게 된 것이다.

그러나 틴은 경각심을 떨쳐 버리지 못하는 중이었다.

‘어쩌면 이들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무서운 존재들일 수도 있다.’

오딘이 그를 눈여겨보며 말했다.

“기왕 모습을 드러냈으니 소개하지. 이들은 음영대라 한다.”

헤르미온은 옷이 찢어져 여기저기 살이 비치는 세실리에게 자신의 겉옷을 벗어주었다.

그러자 연방 눈물을 쏟으면서도 그녀는 고마움을 표하려 했던지 고개를 숙였지만, 슬픔과 놀람으로 목이 매여 말은 한마디도 나오질 않았다.

헤르미온이 아무리 왈가닥이라고는 해도, 가까운 곳에 마음에 두고 있는 이성이 있는 데다 곁에서 대충이나마 지켜본 상황으로 그녀가 가지는 슬픔을 헤아릴 수 있었던 까닭에 따스한 눈빛으로 위로해주었다.

그녀를 악의 구렁텅이로 꼬드긴 청년은 모든 게 틀렸음을 깨닫고 달아나려 했다.

하지만 마음뿐이었다. 피가 흥건히 묻은 검극이 코앞에 다가왔기 때문이다.

그 단원의 목을 벤 사람, 그와 닮은 느낌을 주는 사람은 몇이 더 있었다. 아니, 느낌상으론 그보다 더 있을 것도 같았다.

오딘은 데리고 온 이들의 수에 대해서는 명확히 얘기를 하지 않았던 것이다.

음영대라 자처하는 이들은 통일된 복장이었으며 하나같이 무심한 표정이었다. 또한 말수도 적었을 뿐만 아니라, 사소한 행동 하나에도 무게감이 따랐다.

그중 한 사람은 그에 속하지 않은 마법사였는데, 그는 자신을 쉬바인이라는 이름을 가진 궁정 마법사라 소개했다.

그래도 뜻하지 않은 응원군이 생겨서인지 마르크를 제외한 이스론 상단에서 나온 사람들은 그들을 내심 반겼다.

반면에 마르크는 이 사람들만으로는 도무지 성에 차질 않았다.

그는 철두철미한 사전 답사와 조사를 하며 상황을 눈여겨보았는데, 카반의 울프들은 그리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더군다나 그에 속하는 남자를 하나 죽였으니, 그들이 이를 알아챈다면 남은 길은 편치 못할 것이었다.

세실리는 아직도 충격이 가시질 않았는지 부들부들 떠는 중이었고, 그 충격은 오랏줄에 묶여 무릎이 꿇린 청년에 대한 원망으로 더해졌다.

이미 촌장은 그녀를 범하려던 카반의 울프의 단원을 땅에 깊이 묻으라는 지시를 내려놓은 상태였다.

세실리의 얼음처럼 차가운 눈이 향하고 있는 청년을 두고 마을 사람들 간에 논의가 이어졌다.

“저 녀석을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는가?”

촌장의 말에 너도나도 의견을 내놓기 시작했다.

“말해봐야 무얼 하겠습니까? 엄벌을 내려야 마땅할 것입니다.”

“같은 생각입니다. 이 일로 저희가 서로를 믿지 못한다면 앞으로 어떻게 되겠습니까?”

더러는 이 청년과 정이 들었던지 불쌍한 시선을 보냈지만, 편들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결국 촌장은 다수의 의견을 따라 판단을 내렸다.

“추방하는 수밖에 없겠군.”

그에 당장에 반론이 생겼다.

“같이 살던 아이를 위험에 빠뜨린 녀석입니다. 그냥 쫓아낸다는 것은 솜방망이식 처벌이 아닐까 합니다.”

얘기가 점점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가자 마을 사람 개개인들의 의견이 오갔다.

“난 믿을 수가 없군. 어떻게 저 녀석이 그런 마음을 품어왔었는지…….”

“그러게 말입니다. 양의 탈을 쓰고 늑대 같은 마음을 품고 있었다니…….”

대다수가 그런 의견이었던 것에 반해 한쪽에선 그를 부정하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원래 심성이 좋지 못한 녀석이었소. 난 저 녀석의 욕심은 진작부터 알아봤소. 오히려 내가 이상한 사람으로 몰릴까 두려워 내 말을 안했을 뿐이지.”

말을 하고 있는 남자보다 어려 보이는 여인이 물었다.

“어떤 일이 있었나요?”

“저 녀석이 밭일을 그만두고 갈 때마다 도난 사건이 벌어졌었지. 한번은 우연찮게 뒤를 따라갔던 적이 있었어.”

그날을 회상하며 그는 말을 이었다. 그러자 사람들의 시선들은 죄다 그의 입에 맞춰져 있었다.

“아마 그날 갈란의 집이 도둑맞았지. 공교롭게도 저 녀석이 그곳으로 들어간 후에.”

청년은 억울한지 눈을 부릅뜨고 변명하기 시작했다.

“거짓말이에요! 전 훔치지 않았어요!”

오딘도 그루터기에 앉아 음영대원들에게 둘러싸여 이 광경을 흥미롭게 지켜보는 중이었다.

청년의 말이 옳다면 남자는 헛소리를 한 셈이 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그는 더한 심증을 내걸었다.

“그래? 내가 그 뒤로 몇 차례 네 뒤를 밟았단 건 모르겠지?”

순간, 청년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잘되었다는 듯 남자는 계속 그를 몰아붙였다.

“우연이라고 할 순 없을걸? 이상하게 네가 사람들의 집으로 들어갈 때마다 그 집에서 도둑이 들었다는 얘기가 돌더군. 참 이상한 일이지? 안 그래?”

마을 사람들은 눈을 휘둥그레 뜨고 서로를 살폈다.

“그, 그럼… 여태 일이 모두 저 아이의 소행이었던 거야?”

그동안 마을에 풀리지 않은 의문이 있었으니 잦은 도둑 사건이었다. 하지만 회의를 거쳐 경계를 했어도 도둑을 잡을 순 없었다.

마적단이라면 협박을 하며 대놓고 물건을 집어간다.

다시 말해 도둑은 내부의 사정을 잘 아는 사람이라는 반증이었던 것이다.

그때, 한 남자가 성큼 앞으로 발을 내디디며 미심쩍게 생각하던 부분을 들추어냈다.

“혹시 세실리의 할머니 일도 네가 저지른 것이냐?”

그 물음에 충격을 금치 못하고 세실리의 눈이 굳어졌다.

친할머니는 아니었지만, 지금 거론되는 그녀의 할머니는 그녀를 친부모 이상으로 아끼고 귀여워해주셨던 분이다.

어느 날 집은 도둑맞았으며, 그녀의 할머니는 목이 졸려 죽어 있었다.

지금까지도 마을 사람들은 그 사건의 범인을 잡지 못했다. 오죽하면 마적단의 소행일 것이라고 생각하질 않았던가.

남자는 당황하고 있는 청년에게 시선도 두지 않은 채 말을 이었다.

“당시 이웃집 할머니가 저항한 흔적이 남아 있었습니다. 할머니에게 값비싼 물건이 있기는 했었지요. 바로 품에 간직하고 다니시던 귀걸이입니다. 세실리가 장차 어른이 되어 혼인을 하게 되면 준다고 했던 것은 다들 기억하실 겁니다.”

사람들의 눈이 청년에게 빠르게 돌아갔다.

남자의 부인으로 보이는 곁에 서 있던 여인도 그 의견에 힘을 실어주었다.

“맞아요. 이이의 말대로 저도 이상하게 생각했었어요. 할머니를 죽인 사람이 마적단이라면, 품에 넣고 다니시던 귀걸이를 어떻게 발견했을까요?”

차디찬 바람이 사람들 사이를 휘젓고 지나갔다.

잠시 후, 촌장이 청년에게 물었다.

“얘야, 그것이 정말이냐?”

“거, 거짓말이에요! 전 살인을 저지른 적은 없어요!”

추위 때문인지 아니면 자신이 저지른 행동이 탄로 난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인지 청년은 떨고 있었다.

‘내가 안 했다고 잡아떼면 그만이다. 증거가 있다면 예전에 걸렸을 테니까.’

청년이 그와 같은 행동을 저지르게 된 동기가 있었다.

그는 이런 구차한 삶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그 일들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여겼다.

악명 높은 카반의 울프를 만난다는 건 쉽지가 않았다. 게다가 만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만난다 해도 그 뒤에 무사함을 보장받기 위해서는 뇌물이 필요했다.

세실리의 할머니를 죽이게 된 것은 어쩌면 필연적이었는지도 모른다.

금지옥엽 손녀의 선물로 줄 것이라 그녀에게는 그 귀걸이가 목숨보다도 소중했기에 당연히 저항이 거셀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결심을 굳힌 청년은 그 자리에서 얼굴을 가린 가면을 벗고, 그녀의 목을 졸라 잔인하게 살해했다.

그러나 그는 이 모든 정황을 입증해줄 증거물이 마을 사람들한테 없다고 믿었다.

한 가지 걸리는 점이 있긴 했다. 바보같이 그녀와 몸싸움을 벌이다가 셔츠에 달린 단추 하나를 잃어버렸던 것이다.

아직까지도 긴가민가했다. 그것이 그곳에서 떨어진 것인지, 아니면 다른 곳에서 떨어진 것인지…….

촌장 역시 심증은 있지만 물증이 없었기에 자백을 들으려 했다.

그런 와중에 정말 의외의 여성이 걸어 나왔다. 바로 청년의 양모였다.

자주 있는 일이었다.

사람은 원래 힘들고 어려운 상황일수록 서로에게 기대고 의지하려 한다. 때문에 이곳에서는 어려서 부모를 여읜 아이들과 노년에 달한 사람들이 연을 맺어 서로에게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곤 했다.

사실 그녀 역시 자식을 굶주림으로 떠나보낸 이후, 죄의식에 사로잡혀 있다가 청년을 양아들로 맞은 것이었기에 자신은 굶고 못 입는 한이 있어도 그에게는 부족함이 없이 해주려 했었다.

자식이 잘못되더라도 감싸주고 싶은 마음은 부모라면 누구나 다 마찬가지일지 모른다.

하지만 이 순간만큼은 그녀는 단호한 태도를 내보였다.

그녀의 손에는 때에 찌든 단추 하나가 들려 있었다.

“오랫동안 잊고 살았구나.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이라는 말을. 이 단추는 내가 큰마음을 먹고 샀다. 그분께서는 이 단추를 손에 꼭 쥐고 돌아가셨지. 손녀딸과 그렇게 잘 어울려 놀던 아이의 손에 화를 입으셨으니 얼마나 슬픔이 크셨을까?”

눈시울을 붉히던 그녀는 돌연 흐느끼며 세실리에게 무릎을 꿇고 애걸했다.

“흑흑, 염치없게 여태 숨겨 와서 미안하구나. 내가 잘못했다. 다 내 잘못이다. 그저 자식 하나 제대로 못 키운 날 원망해다오.”

그녀의 절박한 목소리가 사람들의 가슴에 슬픔으로 와 닿아 애간장을 녹였다.

청년은 당황하며 무릎 꿇은 자세 그대로 사람들을 둘러보며 물었다.

“서… 설마 어머님의 말씀을 믿으시는 것은 아니시겠지요?”

하지만 누구도 그의 말을 듣는 사람은 없는 듯했다.

조금 전의 사건으로 보나, 평소에 거짓말을 입에도 담지 않던 그의 양모의 말로 비추어보나 진실은 매한가지였으므로.

또한 자신의 어머니를 우롱하는 듯한 말투가 그들의 귀에 곱게 들릴 리 없었다.

청년에 대한 마을 사람들의 악감정은 도에 지나칠 정도가 되어버렸다.

“전 도저히 저 상판대기를 보고 가만 못 있겠습니다. 돌팔매라도 해야겠습니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한 남자가 손에 쥔 돌을 청년을 향해 던지자, 그게 시발점이 되었는지 곳곳에서 돌멩이들이 날아들었다.

그 광경을 보며 촌장은 한숨을 쉬었다.

성난 마을 사람들에게 자신의 결정은 이제 먹히지도 않을 테니까.

청년은 팔이 부러지고 이마가 찢어져 피가 흘렀다.

그때, 그의 양모가 몸을 던져 청년을 감쌌다.

이미 사람들의 손을 떠난 돌멩이들은 제대로 못 먹어 앙상한 그녀의 몸을 무자비하게 때렸다.

그녀의 몸은 그나마 잘 먹고 자란 청년의 몸보다도 하잘것없었다. 그러자 불쌍한 그녀를 보며 사람들이 돌팔매를 멈췄는데 한 남자가 참지 못하고 청년에게 욕을 해댔다.

“천하의 개자식아! 이래도 아니라고 발뺌할 테냐?”

정말 그를 매도하려 했다면, 그녀는 돌멩이가 날아다니는 그곳에 청년을 보호하려고 몸을 던지진 않았을 것이다.

그 무렵 음영대의 무사들이 모자지간을 막아섰다.

마을 사람들이 의아한 눈으로 보고 있을 때, 그루터기에 거만하게 앉아 있던 오딘이 싫은 소리를 했다.

“보자 보자 하니까 너무들 하는군.”

“뭐가 너무하다는 말이오?”

“내가 아니었다면 저 두 사람은 애초에 이 자리에 있지도 않았을 것인데, 어찌 너희들이 결정권을 가진단 말이냐?”

자신에게 처결을 맡겨야 한다는 얘기다.

그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때문에 마을 사람 중 한 명이 그가 말하는 요지를 알아듣고서 허락을 구하려 했다.

“무얼 원하십니까? 저희가 들어드릴 수 있는 것이라면 들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대신 이 두 사람은 저희 마을에…….”

말이 끝나기도 전에 오딘은 이미 고개를 젓고 있었다.

“마적단에 가는 것이 원이라면 그렇게 해야지. 안 그래?”

마을 사람들에게는 납득이 안 되는 얘기였다.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시는 겁니까? 이렇게 싹수가 노란 녀석을 그냥 보내다니요? 그것도 마적단들에게? 만약 그리된다면 이 녀석은 우리 마을을 몰살시키자고 주장할지도 모릅니다.”

“그리되는 일은 없도록 약조하지.”

청년이 들었다면 반색할 일이었지만, 그는 무자비한 돌팔매질에 어느새 정신을 놓고 있었다.

“어떻게 그리되는 일이 없으시리라 호언장담하시는 것인지요?”

“마적단들은 본 좌가 직접 소탕할 생각이니라.”

“카반의 울프들을 소탕하시겠다고 하셨습니까?”

마을 사람들의 입을 대변해 이곳에서 가장 연로한 촌장이 놀란 눈을 하고 묻는 말이었다.

도무지 속을 알 수 없는 인물이다.

그가 왜 그런 결정을 내리게 되었는지는 말을 안 했으니 알 수 없었다. 그래서인지 마르크는 오딘이 이런 일을 자청한 동기가 알량한 정의심 따위일 거라고 치부해버렸다.

‘정말 종잡을 수가 없는 분이군. 어디로 튈지 알 수가 없어. 실력 있는 무사를 데려온 것은 인정하지만, 얼마 되어 보이지도 않는 사람들로 마적단을 소탕하겠다니… 세상 물정을 모르셔도 너무 모르시는군. 귀하게 자라셔서 그렇겠지.’

이렇게 마르크는 여전히 속으로 오딘을 비꼬고 있었다. 그를 너무 띄엄띄엄 보고 있는 것이다.

뛰어난 두뇌의 소유자답게 마르크는 생각에 생각을 거듭해 하나의 추론을 이끌어내는 중이었다.

‘만에 하나 이 일이 잘못된다면? 아니, 분명히 잘못될 것이다. 듣기로는 그들의 정규군이 오백이라고 하였다. 지금은 도처에 퍼져 있다지만, 설령 근방의 마적단들을 운 좋게 쓸어버린다고 해도 정규군이 뭉치게 되는 날에는…….’

그 화살은 이스론 상단과 아레인을 향하게 될 것이다.

마르크는 여기 모인 힘없는 마을 사람들의 생리를 어렵잖게 꿰뚫어 볼 수 있었다.

만약 괴롭힘과 추궁을 당한다면 이들이 이 일을 들추어낼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다.

막강하다고는 볼 수 없겠지만, 아레인은 그래도 왕국이 아닌가. 그에 반해 이스론은 일개 상단일 뿐이다.

이스론의 호위 무사들을 총집결시킨다 하더라도 그들과의 싸움에서 이기리라는 보장이 없었다.

마르크는 골이 다 지끈거렸다.

“오딘 님, 이건 아닙니다.”

오딘은 그 말을 콧등으로 들었는지 들은 체도 안 했다.

그러자 마을 사람들도 사태의 심각성을 알았는지 촌장이 그들을 대변해 철딱서니 없어 보이는 오딘을 조심스럽게 타이르기 시작했다.

“세실리를 구해주신 것은 감사합니다. 그러나 방금 전 말씀은 저희도 받아들이기 힘들답니다. 그들의 악명은 보복성 때문입니다. 한번 당한 일은 결코 잊지 않으며, 잔인하기가 이루 말할 데 없어 사람 보기를 고깃덩이 보듯 합니다. 못 들은 것으로 할 터이니 그 말씀은 접어주십시오.”

그래도 그 말은 귀담아 들었는지 오딘은 진지한 낯빛을 하고 물었다.

“저들의 전력은 얼마나 되지?”

그가 아무리 대단한 무공을 가졌다고 해도 적에 대해 아무런 정보도 없이 무턱대고 들이대는 인물은 아니었다.

그러자 참을성이 극에 달해서인지 마르크는 차마 표정 관리를 하지 못하고 툭 쏘아붙였다.

“정규군만 오백이랍니다. 비정규군까지 합친다면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일 겁니다.”

오딘에게 말을 건넸던 촌장이 심각한 얼굴로 현실을 자각시켜 주었다.

“틀렸습니다. 정규군은 과거에 비해 더 늘었습니다. 지금은 적어도 육백 내지 칠백은 될 것입니다.”

듣는 것만으로도 마르크는 거북할 지경이었다.

반면에 틴은 낮은 목소리로 오딘에게 그 이유를 물었다.

“왜 카반의 울프를 노리시는 것인지…….”

“욕심이라면 설명이 되겠나?”

집어삼키겠다는 뜻이다. 꽤 큰 마적단이라는 말에 그의 욕심이 동한 것이다.

솔직한 말로 오딘이 상단을 꾸리고 무역을 하려는 이유 역시 아레인을 더 성장시키기 위함이었다.

확실히 틴은 이스론 상단에서 나온 다른 이들과는 다르게 자신들이 아직 오딘이란 사람을 평가절하하고 있는 게 아닐까란 생각을 했다.

돌연, 오딘이 음영대의 부대주라는 자에게 물었다.

“음영대의 인원은 모두 몇이 따라왔지?”

“저를 포함, 모두 이십입니다.”

그 말에 마르크는 허탈하게 웃기까지 했다.

자신들의 상단에서 따라온 호위 무사들과 합쳐 봐야 총합이 50을 넘지 않는 것이다.

“사고를 치는 마당에 적어도 이들의 안전은 책임져 주어야겠지. 쉬바인.”

“예, 하명하시지요.”

“왕성에 다녀와라. 마혈단을 제외한 네 단체에서 각기 열 명씩을 추려 이쪽으로 보내라고 하라.”

“지엄하신 명을 받들겠나이다.”

그때, 마르크가 늦게나마 두 사람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기왕 다녀오실 것이라면 더 많이 보내주십시오. 아레인에는 많은 병력이 있질 않습니까. 시간이 좀 걸리더라도 그래주신다면 저도 군말 없이 따르겠습니다. 불안해죽겠다 이 말입니다.”

꼭 그렇게까지 말하지 않아도 마르크의 표정은 이미 충분히 그래 보였다.

그러자 오딘은 나름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그의 걱정을 붙들어 매고자 했다.

“그리 걱정할 것 없느니라. 이스론의 사람들은 털끝 하나 건드리지 못하게 할 터이니…….”

쉬바인이라는 궁정 마법사가 마법진을 완성시킨 후 떠나고 반나절도 지나지 않아 정확히 42명의 사람들이 마을에 당도했다.

그들은 오자마자 한쪽 무릎을 땅에 붙이곤 크게 외쳤다.

“오딘 님을 뵈옵니다!”

귀청이 떨어져 나갈 것 같은 소리에 이스론과 마을 사람들은 잠시나마 인상을 찌푸렸다.

기가 찰 일은 로브를 걸친 마법사는 갈 때와 마찬가지로 하나였다는 점이다.

당당했던 표정은 온데간데없이 그는 줄곧 후줄근한 옷을 걸친 초로의 노인을 의식하고 있었다.

노인을 본 누구도 그가 대단하다고 생각지 않았다. 도리어 다 늙어가는 노인네가 왜 딸려 온 것일까란 의문을 품었을 뿐이다.

이스론 상단의 사람들도, 그리고 이 마을 사람들도 당장에라도 허리를 두드리며 지병을 호소할 것 같아 보이는 저 노인이 매스 텔레포트(Mass Teleport:대단위 공간 이동 마법)를 캐스팅했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노인은 아레인에서 괴짜라고 소문난 사람이었다. 그는 성큼 오딘에게 다가가더니 이렇게 말했다.

“여러 마법사들을 고생시킬 수 없어 내가 왔다네. 결코 자네 얼굴이 보고 싶어서 온 건 아니라네.”

오딘은 노인을 마주 보며 모호한 미소를 떠올렸는데, 눈빛엔 약간의 고마운 마음이 녹아 있었다.

볼일을 마치고 바로 돌아가려는 괴짜 노인을 향해 마르크는 사력을 다해 뛰었다.

신분은 나이가 대신해줄 순 없었다.

하지만 젊고 늙음을 떠나 적어도 오딘에게 말을 놓고 있는 사람이다. 그라면 하늘처럼 오딘을 떠받드는 자들보다는 발언권이 있을 터였다.

“제발 좀 말려 주십시오. 저분은 지금 큰 사고를 치시려 하고 있습니다. 어르신도 카반의 울프라는 마적단에 대해 들어보셨는지요? 오래 사셨으니 한 번쯤 들어보셨을 것이라 사료됩니다. 이렇게 얼마 되지 않는 수의 사람들로 저희 모두를 보호해주시고 저들을 소탕하겠다고 하십니다. 제가 제 목숨 아까워 이러는 것이 아닙니다. 가깝게는 오딘 님과 저희 상단이 위험에 처하게 될 것이고, 멀게는 아무 상관도 없는 이 마을 사람들이 고통에 처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제발…….”

마르크는 말을 마치지 못했다. 늙수레한 목소리가 머릿속을 울렸기 때문이다.

[이보게, 청년, 내 말이 허풍이다 여기지 말고 귀담아 잘 듣게. 어쩌다가 저 악마의 눈에 벗어났는지 모르겠지만, 걱정을 해야 할 것은 이쪽이 아니라 저쪽일 걸세. 입으로 직접 얘기하지 못하는 게 미안하네만 오딘 저자는 성격도 참 지랄 맞거든.]

작금의 상황에 마르크는 황당함을 금치 못했다.

지금 노인이 하는 말은 여태 오딘이 허풍을 떨었던 것보다도 더한 내용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무턱대고 무시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머릿속으로 말을 전한다는 것만으로도 이미 노인이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으므로.

노인은 주저리주저리 자신의 의사를 마르크에게 연달아 전했다.

[그리고 원래의 인원만으로도 될 일이었어. 아마도 저 악마는 자네가 마음에 들었나 보구먼. 필요도 없는 인원을 보충한 것을 보면 말이야.]

오딘의 시선을 의식해서인지 노인은 부러 헛기침을 하며 자리를 떴다. 그리고는 흐느적흐느적 걸어가나 싶더니 처음에 병력을 데리고 온 위치쯤에서 어느새 종적을 감추었다.

하지만 이 일에 관계된 여러 사람들은 아직도 불안에 떨고 있었고, 그들을 대신해 다시 한 번 촌장이 오딘에게 간곡히 청을 올렸다.

“사람이 좀 늘었다고는 해도 아니 될 일입니다. 이 정도만으로는 어림도 없습니다. 얘기를 들으셨는지 모르겠지만, 전의 영주님도 저들과 싸우다 비명횡사하셨습니다. 괜히 일만 커지는 것 같아…….”

도무지 노인의 입이 닫힐 기미가 보이지 않자 쉬바인이 끼어들었다.

“걱정 붙들어 매십시오. 아무 일도 없을 겁니다.”

마을 사람들은 초조하게 이를 지켜보았는데, 갑자기 그들 중 젊은 남자가 눈을 치켜뜨고 불같이 성을 내며 나섰다.

“더 이상은 못 참겠소! 생판 모르는 사람들이 와서 왜 우릴 궁지에 몰아넣으시려는 것이오? 양심이 없어도 유분수지! 당신들이 죽건 말건 상관은 안 하오. 하지만 앞서 촌장께서 말씀하셨듯이 당신네들이 잘못되면 우리에게 그 화가 들이닥친단 말이오. 무엇 때문에 이런 일을 벌이는지 모르겠으나 땅을 치고 후회하기 전에 썩 그만두시오!”

예고된 일이었다.

하늘같이 떠받드는 오딘을 깔보는 듯한 말투에 아레인에서 온 자들의 눈길이 사나워졌다.

이윽고 걷잡을 수 없는 마기가 흘러나와 남자의 숨통을 조여 갔고, 숨 쉬는 것도 불가했던지 그는 목을 감싸 쥐고 괴로움을 호소했다.

그것은 비단 그에게만 국한되는 사항이 아니었다.

근처에 있는 사람들조차 위협을 느꼈는지 슬금슬금 뒷걸음질을 치기 시작한 것이다.

더러는 숨이 멎을 것 같은지 가슴을 움켜쥐고 끅끅거렸고, 더러는 그조차도 쉽지 않은지 바닥을 뒹굴거나 땅을 치며 고통을 호소했다.

본래 마기라는 게 그러하다.

살기와 달리 마기는 한번 퍼지기 시작하면 대상을 구분하지 않는 것이 특징이었다.

초절정에 올라 있는 고수라면 모르겠지만, 이들은 아직까지 그 단계가 아니었던 것이다.

더 두었다가는 누구 하나 죽게 될 것 같았는지 오딘은 입을 열어 수하들을 제지시켰다.

“그만.”

그 순간 마기가 걷히기 시작했는데, 당장에 평온이 찾아오지는 않았다. 안정이 필요했던 것이다.

마르크는 괴짜 노인을 쫓아갔던 탓에 비교적 멀리 있어 이 해괴한 광경에 눈이 팔려 있었지만, 반면에 틴은 긴장으로 떨리는 몸을 주체하지 못하면서도 경각심을 떨쳐 버릴 수 없었다.

‘도대체 이들의 정체가 뭐지?’

* * *

라파고산.

카반의 울프라는 마적단의 시발점이 된 곳이기도 하다.

크게 높지 않은 산을 두고 그보다 작은 산들이 병풍처럼 둘러쳐져 있었다.

천연 요새나 다름없는 이곳에 뿌리를 내린 마적단은 그에 안주하지 않고 산에 구멍을 내어 은신처까지 마련해놓았다.

산의 아래쪽에는 그들이 머물 건물들이 들어서 있었으며, 야외에는 군사들을 훈련시킬 장소 또한 마련이 되어 있었는데, 이는 로만 공국 내 영주들의 성들보다도 규모가 컸다.

그럼에도 이곳은 현재 한산한 모습이었다. 대낮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이 마적단의 수장인 엘룬은 최근 몇 년 사이 부쩍 늘어난 단원들 때문에 하는 수 없이 인원을 분산하였고, 이로 인해 카반의 울프들은 도처에 퍼지게 되었다.

본래 엘룬은 로만 공국의 명망 있는 백작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장래가 촉망되던 그에게 불행이 들이닥친 것은 그가 스물이 되던 해였다.

군사들이 들이닥치고 저항을 하던 기사들과 가솔들은 모두 학살을 당했다.

그의 부친은 모반에 가담했던 것이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엘룬은 당시 그것이 모반이 아닌 누명이라고 생각했다. 사건의 모든 정황을 알면서도 인정하고 싶지 않은 탓이었다.

꽉 막힌 사람, 자신이 믿고 싶은 대로 믿는… 그는 그런 부류였다.

진압이 끝났을 때 남은 것이라곤 자신 하나였다.

엘룬은 자신의 몸은 지킬 정도의, 아니 공국 내에서 그를 대적할 상대가 없을 정도로 검술과 마법에 조예가 깊었던 것이다.

본디 검술과 마법은 상극이라고들 하지만 그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얘기였다.

신의 축복이라도 받은 것인지 엘룬은 당시 소드익스퍼트 상급에 올라 있었으며, 또한 3서클의 마법을 구사할 줄 알았다.

그는 이곳에 거처를 마련한 후 자신이 가진 힘으로 마적단을 모으기 시작했다.

모든 일이 순조로웠다.

그가 점찍은 사람 중 요구에 불응하는 이는 반병신으로 만들거나 목숨을 앗았으며, 마적단에 가담한 이들에게는 부와 여자를 손에 쥐어주었다.

자연히 마적단이 커지며 단원들이 늘어났고, 그럴수록 엘룬은 더욱 대담하게 행동했다.

그리고 언제부턴가는 영주 또한 두렵지 않게 되었는데, 이때부터 마적단은 잔인해지기 시작했다.

적에게 공포를 심어주는 가장 좋은 방법이 잔인함이란 것을 깨닫게 되었던 것이다.

무려 20년이나 품어왔던 복수는 내년 정도가 될 것이었다. 공국을 집어삼키고도 외세에 굴하지 않으려면 지금의 힘으로는 모자랐기 때문이다.

엘룬은 현재 바쁜 나날을 보내는 중이었다.

그가 이곳에 없는 이유 역시 하나라도 많은 인재를 확보하기 위해서였다.

그래도 백작의 핏줄이었고, 보고 자란 게 있어서인지 그는 단체를 이룰 구성원들을 중요시했다.

힘만 쓰는 멍청이들만 있어서는 머지않아 들어설 자신의 나라가 얼마 가지 못할 것이라는 불안함이 가시질 않아서였다.

그런 이유로 현재 이곳은 카반의 울프 중 3인자라고 할 수 있는 덴이 지키고 있는 상태였다.

살집이 축 늘어질 정도로 비대한 몸집의 그는 표범의 가죽을 길게 찢어 만든 소파에 비스듬히 누워 있었는데, 양옆에는 보기 민망할 정도의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나신의 여성 둘이 홍조를 띤 채 안겨 있었고, 앞쪽으로는 상다리가 부러질 정도로 술상이 푸짐하게 차려져 있었다.

뭐가 그리 좋은지 덴은 술이 거나하게 취했음에도 한 손에는 커다란 술병을 들고 여성의 작은 머리통 정도는 집어삼킬 것 같은 커다란 입을 벌려 호탕하게 웃어댔는데, 그 바람에 금을 씌운 날카로운 이빨들이 번쩍거렸다.

“헤헤헤헤! 좋구나, 좋아!”

때는 한낮이었다. 만에 하나 이곳에 엘룬이 남아 있었다면 꿈도 못 꿀 일이었다.

방종한 행동을 문제 삼는 것은 아니었다. 기강이 해이해지는 것을 막으려 함이었다.

오른쪽의 여인이 교태가 줄줄 흐르는 미소를 지으며 잘 익은 앵두를 그의 입에 넣어주곤 살포시 웃었다.

“단장님만 무서우신 것인가요?”

덴은 앵두를 잘게 씹고서 인상을 확 찌푸렸다.

“그럼, 내가 발본 그따위 녀석을 두려워할까 봐?”

발본은 이 마적단 내에서 2인자로 통했다.

그는 종종 엘룬과 함께 행동했는데, 지금 역시 그러했다.

엘룬은 발본의 능력을 높이 사고 있었던 것에 반해 덴은 그것이 편애라고 느꼈다.

발본과 덴, 두 사람은 단 한 번 대결을 펼친 적이 있었고, 그 이후 서열이 정해졌는데 덴은 아직까지 그것을 인정하지 못했다.

한번 나빠진 기분은 금세 원상복구되질 않았다.

“제기랄, 왜 그따위 녀석을 입에 올려서 술맛 떨어지게 하고 그래!”

그의 노성에도 여인은 겁을 먹지 않았다. 그녀는 덴이 가장 아끼는 여인이었던 것이다.

“깔깔, 그냥 해본 말이에요. 노여워하지 마세요.”

그녀가 덴의 가슴에 몸을 바짝 기대자 과연 그의 표정은 금세 누그러졌다.

하지만 좋은 시간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비쩍 마른 한 남자가 땅이 울릴 정도로 경박스럽게 뛰어와 반투명한 장막을 확 걷어 젖혔기 때문이다.

“부단주님, 급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나신을 들켜 버린 두 여인은 근처에 있던 가운으로 자신들의 알몸을 가리며 짐짓 인상을 구겼다.

그러자 그녀들의 기분이라도 헤아려 주는 것인지 덴이 벌컥 화를 냈다.

“죽고 싶어? 내가 이 방에서 술 먹고 있을 땐 인기척이라도 흘리고 오라고 했지?”

사내가 당황하여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자 화가 난 덴은 은으로 만들어진 술잔을 그의 머리에 집어던졌다.

그러자 곧 깡! 하는 경쾌한 소리가 울렸음에도 사내는 단지 머리를 긁적일 뿐이었다.

아프라고 던진 것임에도 아파하는 기색이 없자 덴이 짜증나는 어투로 호통을 쳤다.

“저, 저 돌대가리. 머리통만 단단하지 속엔 든 게 없어. 네 녀석이 내 눈을 피하면 잘못이 없어지기라도 하냐? 우선 사과를 해야 할 것 아냐? 사과를!”

마른 사내가 그때서야 뉘우치는 기색을 보였다.

“죄송합니다.”

“할 말이 뭐야? 어서 해봐!”

그는 분명히 큰일이라도 난 것처럼 뛰어왔지만 지금은 잊고 있는 표정이었다.

덴이 그 모습을 보고 혀를 끌끌 찼다.

“머저리 같은 자식! 금붕어도 아니고 그새 할 말을 까먹어?”

마른 사내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자신이 무슨 일 때문에 허겁지겁 뛰어왔는지를 떠올리는 것이다.

다행히 기억이 났는지 그는 주먹으로 손바닥을 탁 치며 입을 벌려 말했다.

“수상한 자들이 다가오고 있다고 합니다.”

책임감을 느낄 법도 하였건만 덴은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몇 녀석쯤이나?”

그럴 만도 한 것이 과거 이곳에 왔던 자들은 십중팔구 당한 것의 울분을 되갚으려고 오는 것이었고, 그때마다 번번이 뼈저린 패배를 떠안아야 했기 때문이다.

한 번도 함락된 적이 없어서인지 카반의 울프들은 이곳을 난공불락의 요새라고까지 여겼다.

덴이라고 해서 다른 생각은 아니었기에 느긋함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모두 합쳐 서른 정도라 합니다.”

눈살을 찌푸림과 동시에 덴은 눈알을 굴려 단단해 보이는 물건을 찾았다.

그러나 금잔을 던지자니 아까웠다. 뭘 던진다 해도 저놈의 머리통은 깨지지 않을 것이므로.

괜히 금잔이 망가지거나 자신의 팔을 고생시킬 것 같아 덴은 힐책만 퍼부었다.

“고작? 경비 소대만으로 해결될 일을 가지고 내 귀한 시간을 방해해?”

듣고 보니 그런 것 같았는지 마른 남자는 머쓱함을 떨치기 위해 또 한 번 뒤통수만 박박 긁었다.

“뭐 해? 썩 나가 일보지 않고!”

덴의 입에서 불호령이 떨어져서야 그는 엉거주춤 문밖으로 나갔다.

“에이, 단장님 말이 틀리지 않군. 멍청한 놈을 두면 두고두고 고생이라더니… 저 녀석 대가리만 아니었으면 애초에 안 뽑았을 텐데, 쩝.”

다시 술을 먹자니 흥이 싹 가셔 있었다. 그러자 내조라도 하려는 것인지 오른쪽의 여자가 가운을 벗으며 매끈한 알몸을 드러냈다.

가늘고 긴 목에 풍만한 가슴과 잘록한 허리, 볼륨 있는 엉덩이와 매끈하게 잘빠진 다리는 덴의 시선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그의 탐욕 어린 눈이 그녀의 몸을 구석구석 훑더니, 이윽고 허리를 낚아채며 와락 끌어안았다.

살과 살이 맞닿으며 앵두 같은 그녀의 입술이 벌어졌고 간드러지는 신음 소리가 흘러나왔다.

“아앙.”

좌측에 있던 여자도 흥을 돋워주려는 것인지 거추장스러운 가운을 벗고 다가와 그의 한 팔에 착 안겼다.

그러자 덴의 입은 헤벌쭉하게 벌어졌고, 두 눈은 급격히 흥분으로 물들어 당장에라도 일을 치를 것만 같았다.

그 순간, 또 하나의 훼방꾼이 장막 밖에서 큰 소리를 내었다.

“부단장님, 큰일입니다!”

덴은 두 여인을 안고 있던 팔을 풀지 않고 노성을 터뜨렸다.

“또 무슨 큰일!”

그러자 장막 밖에선 조금 믿기 힘든 말이 들려왔다.

“제일 경비 소대가 전멸하였습니다.”

깜짝 놀란 덴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는데, 그 바람에 두 여인은 민망한 것을 보게 되어 고개를 돌렸다.

그녀들은 안중에도 없는지 덴은 약간 흥분해 있는 목소리로 되물었다.

“그게 정말이냐?”

“전해들은 대로만 말씀드리는 겁니다.”

사실 크게 문제 될 것은 없었다. 1경비 소대라고 해봐야 고작 30명 정도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평소에 없던 일이 벌어졌다는 것.

덴은 결단을 내렸다.

“사람을 더 보내! 경비대가 아니라 정규군을!”

이곳엔 정규군만 150명이 넘는다. 비정규군까지 합친다면 어림잡아도 4, 5백 명은 될 터이니 열서넛의 사람들을 못 당하지는 않을 것이란 얘기다.

자신이 가진 병력이 그리 물렁하지도 않거니와 설혹 그렇다손 쳐도 침입자들은 수를 감당하지 못할 것이었다.

곧바로 장막 밖에서 대답이 들려왔다.

“그리하겠습니다.”

남자가 물러가고 난 후 덴은 또다시 기분이 원 위치로 돌아가 버려 짜증이 났다.

“술을 더 내오라고 해.”

왼쪽의 여자에게 하는 말이었다.

그녀는 재깍 일어서서 가운을 걸치고는 방을 빠져나갔다.

기분이 가라앉은 그를 위해 오른쪽의 여자는 다시 애교를 떨기 시작했다. 그러나 두 번이나 방해를 받았고, 그 때문에 술기운이 달아나서인지 이제는 별 감흥도 없었다.

술상이 다시 차려지고 술과 안주가 다시금 그의 혓바닥을 탐닉시키고 있을 무렵이었다.

누군가 또 찾아와 다급한 목소리를 내뱉었다.

“부단장님, 큰일입니다!”

드디어 열불이 확 솟은 덴이 벌떡 일어서서 장막을 찢어져라 노려보며 소리쳤다.

“또 뭐야!”

그러나 들려오는 내용은 아까보다 더한 황당함이 깃든 것이었다.

“제이 문이 함락되었습니다.”

순간 덴은 자신의 귀가 잘못된 것이 아닌지 의심하고 말았다.

“뭐, 뭐? 제이 문이 함락되었다니? 그게 무슨 소리……?”

“말씀드린 대로입니다. 어서 명을 하달해주십시오.”

그들이 소위 ‘요새 라파고’라 칭하는 이곳은 1문부터 11문까지 있었는데, 1문이 가장 앞쪽에 위치해 있었고 그곳을 지나야만 2문으로 들어설 수 있는 식이었다.

그 말은 곧 2개의 문이 서른 정도에 지나지 않는 침입자들에 의해 뚫렸다는 얘기다.

평정을 잃어버린 덴은 소리가 나도록 이를 갈았는데 그 때문에 볼 살이 푸르르 떨렸다.

파삭!

덴의 손에 들려 있던 술병이 악력을 못 이겨 깨어지는 소리였다.

그의 관심사는 벌써부터 제3문에 다다라 있을 침입자를 향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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