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카반의 울프 (26/67)

카반의 울프

홀란트 시내에 위치한 그리 호화스럽지도, 멋스럽지도 않은 그냥 흔한 여관이 있었다.

다른 여러 곳과 마찬가지로 이 여관 역시 숙박과 식사를 제공하고 있었는데, 식사를 하려던 사람들이나 간단하게 술을 마시는 사람들도 그를 크게 이상하게 보진 않았다.

검은 머리카락에 검은 동공의 이방인이라고는 하지만 다른 사내들과 그의 모습은 별반 차이점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저 20대 초반의 젊은이로 보였을 뿐이다.

그것은 그가 이 세계에 와서 산 지 이미 몇 해가 흘러 이곳의 사람들과 점차 동화되어 가고 있던 까닭이었다.

그에게서는 묘한 매력이 발산되고 있었다.

흠잡을 데 없이 잘생겨서라기보다는, 이곳의 사람들에게서는 느낄 수 없는 면모가 있어서였다.

그의 식탁 위는 매우 깔끔했는데, 호리병 모양의 물병과 푸른 빛깔이 감도는 술병, 그리고 와인 잔 하나가 전부였다.

하지만 종업원들은 그 병을 매우 귀한 보석을 보듯 하면서 근방을 스칠 때 혹여나 건드릴까 행동도 조심스러웠다. 그 병에 담긴 것은 이 집에서 가장 비싼 술이었기 때문이다.

주변에 있던 남자들은 그에게 질투의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그럴 만도 한 것이, 주위 여성들의 시선이 호감을 담은 채 전부 그에게 꽂혀 있었기 때문이다.

남자의 시선은 계속 창밖을 향해 있었다.

‘어쩜 좋아, 분위기까지…….’

그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는 여성 대부분이 얼굴을 붉히며 그렇게 생각하는 것에 반해, 보다 적극적인 여성들도 있었다.

‘딱 내 스타일인데, 이 남자만 안 데리고 왔어도…….’

그때, 여성 일행들만 온 테이블에서 한 여자가 용기 있게 일어섰다.

그녀가 그 남자의 테이블로 성큼 다가서려는 순간, 여관 문이 열리며 몇 사람이 줄지어 들어왔다.

눈을 지그시 감고 있는 허우대 좋은 남자와 구릿빛의 피부에 비교적 작은 키의 남자, 그리고 네크라인이 깊게 파인 아이보리색 블라우스에 매우 짧은 치마를 걸친 허리까지 내려오는 은발을 가진 엘프였다.

창가에 앉아 있던 검은 머리카락의 남자에게 다가가려던 여성은 그에 아랑곳 않고 용기 있게 전진했지만, 곧 발길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방금 들어온 세 남녀의 발걸음이 그 남자에게로 향했기 때문이다.

잠시 후, 여관 내에 또 다른 변화가 일어났다.

이번엔 남자들의 시선이 죄다 엘프녀에게로 쏠린 것이다.

하나같이 무슨 보석이라도 발견한 듯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엘프녀는 그들에게 아무런 관심도 주질 않았다.

그녀의 수줍어하는 얼굴은 오직 창가에 앉아 있는 남자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그 남자가 고개를 돌리기 전까지는…….

“오딘 님, 마르크입니다.”

지척에 다가선 키 작은 남자가 그리 말하자 그제야 오딘이 고개를 돌리며 푸근한 어조로 반겼다.

“예상보다 일찍 왔군.”

그와 동시에 엘프녀 헤르미온의 고개가 아래로 숙여졌다.

“헤르미온이에요.”

인사를 했으면 응당 고개를 들어야 정상일진대 그녀는 그러질 못했고, 그 바람에 오딘이 환한 미소를 지어주었음에도 그 미소를 접할 수 없었다.

“우선 앉지.”

마르크와 틴, 헤르미온이 자리에 착석하자 오딘은 손짓으로 종업원을 불렀다.

그러자 바짝 긴장하고 있던 종업원들이 동시 다발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고, 그중 한 명이 제일 빠른 동작으로 득달같이 달려가 오딘 앞에 섰다. 그러자 뒤처진 종업원들의 얼굴에서는 아쉬움의 빛이 역력했다.

“찾으셨습니까?”

“식사를 좀 내다오. 보아하니 모두 식사를 안 한 듯하군. 양은 생각지 말고 열일곱 가지를 올려다오.”

습관처럼 수십 가지의 음식의 이름이 적힌 메뉴판을 펼쳐들며 종업원이 물었다.

“어떤 것들로 가져다드릴까요?”

“이 집에서 가장 잘하는 것들로.”

어쩌면 건방져 보일 수도 있었다. 나이가 좀 되어 보이는 사람도 아니고, 새파랗게 젊은 남자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종업원은 그 말을 전혀 문제 삼지 않았다.

조금 전 술병을 가져온 종업원의 손에 금화가 쥐어진 것을 목격했으므로.

“당장 준비해 올리겠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고개를 꾸벅 숙인 종업원의 손을 오딘이 덥석 잡았고, 곧 그의 손에 금속의 촉감이 느껴졌다.

종업원의 눈은 그야말로 환희로 가득 찼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연거푸 두 번이나 허리를 숙여 인사를 한 후, 종업원은 손님들의 불쾌한 시선도 개의치 않고 잽싸게 주방으로 달려갔다.

하지만 헤르미온은 선입견 때문에 이를 다르게 받아들였다.

만약 그녀가 싫어하는 부류 중 하나, 예를 들어 헥토르가 그러했다면 그 오만한 태도에 인상부터 찌푸렸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대상은 첫눈에 반한 상대였기에 헤르미온은 오히려 그의 주머니를 걱정했다.

‘우리 때문에 저렇게 많이 쓰실 필요는 없을 텐데…….’

아쉬움이 있다면 그 말을 입 밖으로 내질 못하는 것이었다.

오딘의 표정은 여전히 여유로웠다. 그는 무슨 즐거운 일이라도 있는 것처럼 미소까지 드리우고 있었다.

그 따스한 미소에 헤르미온은 정신이 다 몽롱해지는 것 같았다.

그 순간만은 설렘도, 가슴 떨림도 없었다. 그저 잠시나마 시간이 계속되길 바랐다.

그때, 마르크가 그녀의 속도 모르고 입을 열었다.

“요청에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혹시 주변에 아레인의 군대가 와 있습니까?”

걱정이 들었던 것이 사실이다.

마르크가 부탁한 것은 위협이 되는 것으로부터의 안전이었고, 그 대상은 대륙 내에서 제법 유명한 ‘카반의 울프’라는 마적단이었다.

그들을 상대하려면 어중간한 힘으로는 어림없다는 것은 상단주로부터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들었다. 이곳에 오기 전뿐이 아닌, 그 전부터 말이다.

일화로 2백에 달하는 실력 있는 용병단 전체가 그들을 소탕하려다 전멸했으며, 키라 왕국의 기사단 역시도 고전을 면치 못했다고 한다.

약탈, 방화, 강간, 살인에 이르기까지 그들은 범죄에 관한 것이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았다. 마치 그것이 훈장이라도 되는 것처럼 여겼던 탓이다.

덕분에 카반의 울프의 악명은 나날이 커져 갔다.

현재 이 근방엔 이스론 상단에서 파견을 나온 사람들이 있었다. 값비싼 물품들의 안전한 이송, 그것이 목적이었다.

마르크는 그래도 부탁을 한 대상이 아레인 왕국이고, 미리 그들이 어느 정도로 위험하다는 얘기를 해놓았으니 마땅히 군대를 데리고 왔을 것이라 생각하고 물었던 것이다.

그러나 오딘은 고개를 젓고 있었다.

그 모습에 마르크의 얼굴색이 답답함과 실망으로 물들었다.

“혹시 얘기를 못 들으신 것인지요? 분명히 오딘 님께 전해드려야 한다고 그렇게 알아듣도록 일러드렸는데…….”

그는 오딘을 의심하기보다 당시 말을 전한 대상을 원망하는 기색이었다. 지령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것이라고 넘겨짚은 탓이다.

마르크의 기분도 헤아리지 못하고 종업원들은 분주하게 움직이며 테이블에 먹음직스러운 음식들을 깔아놓기 시작했다.

그러다 자리가 모자랐는지 종업원 둘이 협동하여 옆쪽의 빈 테이블을 끌어다 붙였는데도, 테이블은 남김없이 가득 찼다.

이 많은 음식을 시킨 오딘 역시도 그 일을 전혀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이는 듯했다.

그리고 그는 테이블의 한쪽에 금화 7개를 올려 두었는데, 그것은 종업원들의 수와 같았다.

근처의 종업원에게 가벼운 눈짓을 보내자 그는 허리가 꺾어져라 숙이며 고마움을 표했다.

“감사합니다. 모두 나누어 쓰겠습니다.”

그 행동은 여관 내의 여러 사람들도 보게 되었는데 몇몇은 오딘을 따가운 시선으로 쏘아보았지만, 그는 그 모든 시선에 개의치 않겠다는 표정으로 음식에 눈을 두고 말했다.

“일단 음식이 나왔으니 먹지.”

그러나 마르크는 음식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눈앞이 캄캄했기 때문이다.

이스론 상단에서도 물론 적잖은 무사들을 뽑아 물건과 같이 이동했지만, 그들만으로는 감당할 수 없을 것이었다. 때문에 아레인에 사람을 보내지 않았던가.

방법은 하나밖에 없었다.

“시일이 좀 걸리더라도 사람들을 더 보내달라고 말해야겠어요.”

틴에게 하는 말이었다. 그 역시 동조하는 얼굴이다.

그들이 가려는 행로는 카반의 울프가 잦게 출몰한다는 지역이었으므로.

마르크는 스리슬쩍 오딘을 눈여겨보았다.

그가 영향력을 발휘해 아레인의 군사를 내어주길 바라는 마음이 간절했기에 틴에게 말을 던지며 연막을 친 것이다.

물론 그가 받아들여 주지 않는다면 어쩔 수 없이 상단의 모든 무력을 동원해달라는 요청을 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그가 보는 오딘은 음식을 먹는 데에만 집중하고 있었고, 한술 더 떠 음식을 입에 대지 않는 세 사람을 타일렀다.

“식으면 맛이 없을 거야.”

오딘의 시선은 곧장 헤르미온을 향했고, 오래도록 멈춰 있었다.

헤르미온이 아무리 덤벙이 아가씨라 해도 지금 일이 간단한 게 아님은 알았다.

그렇다고 오딘의 강요를 거부할 수도 없었다.

마법에라도 걸린 것처럼 음식을 입에 대기 시작하는 헤르미온에게서 눈을 뗀 오딘이 틴을 보자, 그 역시 이 관계를 깨고 싶진 않았는지 음식을 입에 가져가기 시작했다.

마지막은 마르크였다.

하지만 그는 음식을 입에 대지도 않았고, 오딘의 시선 역시 오래 강요하진 않았다.

마르크가 먹건 말건 세 사람들만 식사를 하게 되자, 불편해하는 것은 오딘이 아니라 헤르미온과 틴이었다.

틴은 슬그머니 마르크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찔렀으며, 헤르미온은 싸늘히 쏘아보았다.

헤르미온도 무조건적으로 오딘을 옹호하려는 생각이 아닌, 이 어색한 분위기의 장본인이 되어버린 마르크를 타이르려 함이었다.

오딘은 음식을 종류별로 맛만 보고는, 물을 한 컵 마신 뒤 냅킨으로 입을 닦는 것으로 식사를 마쳤다.

그리고 아직도 세상 시름을 다 짊어진 듯한 표정을 짓고 있는 마르크를 타일렀다.

“군사는 오지 않았다. 하지만 운송에는 문제가 없을 것이다.”

거짓과 허풍은 엄연히 차이가 있다. 또 허풍과 진담도 커다란 차이가 있다.

대상에게 전해주는 느낌만으로도 그러하다.

세상 대부분의 사람들이 진실을 보지 못하면 이 세 가지를 명확히 구분하지 못했지만, 마르크는 미약하나마 이를 간파할 수 있었다. 막연한 느낌만으로…….

지금 그가 하는 말. 그것은 마르크의 귀에 왠지 진담처럼 들려왔다.

오딘은 곧 손짓으로 종업원을 부르더니 푸른 술병에 든 술을 따를 잔을 사람 수에 맞춰 내오게 했다.

이어 틴과 헤르미온의 잔에 찰랑거릴 정도의 술을 따라주고는, 마르크의 앞에 놓인 잔 앞에서 술병을 든 손을 멈췄다.

“술도 먹지 않을 텐가?”

마르크는 오래 고민하지 않았다.

“조금은 먹겠습니다.”

* * *

귀가 매우 길고 뾰족한 아이였다.

피부는 매우 희었으며, 크고 동글동글한 눈에 높진 않지만 잘 뻗은 시원한 콧날, 연분홍의 두툼한 입술과 적당한 볼 살, 달걀형의 얼굴이 조화를 이루어 무척이나 귀여웠다.

바람이라도 불어올 때면 붉은색의 머리카락이, 크고 투명할 정도로 매우 옅은 붉은색의 동공을 사이에 두고 찰랑거렸다.

일각에서는 붉은색은 도발을 의미하며, 잔인함이나 정열 등을 나타낸다고 한다. 그러나 그 무엇도 이 소년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듯했다.

소년의 표정 어디에서도 세상의 찌든 때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그는 침대 위에 누워 있는 중년인을 의식하고 있었다.

공이라도 집어든 것처럼 손을 벌려 눈을 감고 명상에 잠기는 듯하더니, 시간이 길어질수록 소년의 양손바닥은 흡사 불이라도 지핀 것처럼 타올랐다.

특이한 점은 왼손이 푸른 불길이었던 것에 반해 오른손은 붉은 불길이라는 것이었다.

소년은 계속해서 정신을 집중했고, 그 사나운 불길들은 서서히 잠식되더니 작은 공처럼 변해갔다.

이어 물방울이 붙는 것처럼 두 공 모양의 빛이 합쳐져 조금 더 커다란 하나의 둥근 빛이 되었을 때, 소년은 중년인의 몸에 손을 뻗었다.

그러자 놀랍게도 중년인의 몸은 그 빛을 모조리 흡수했다. 순간, 하얗게 질려 있던 중년인의 안색에 점차 핏기가 드러나더니 화색이 돌기 시작했다.

“됐다, 휴우.”

소년은 성취감에 물들어 손등으로 이마에 솟은 몇 방울의 땀을 훔쳤다.

돌연 중년인이 번쩍 눈을 뜨며 상체를 일으켰고, 그 바람에 중년인의 이마와 소년의 코가 부딪쳤다.

소년은 양손으로 자신의 코를 감싸며 괴로워했다.

“아이코, 코야.”

그제야 중년인은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다.

“얘야, 괜찮으냐?”

그때 소년의 코를 잡은 손이 투명하게 빛나더니, 손을 치웠을 땐 약간의 피가 흐른 흔적 말고는 무엇도 찾아볼 수 없었다.

중년인은 꽤나 놀라는 얼굴이었다.

그리고 자신이 이렇게 상태가 멀쩡한 것에 대한 의문이 샘솟아 자신의 몸을 살폈다.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 치명상을 입었던 가슴 역시도.

그는 정체불명의 성기사의 공격을 받아 가슴에 구멍이 뚫렸던 리먼 백작이었던 것이다.

리먼의 음성이 떨렸다.

“어, 어떻게……?”

그 역시 마법사들을 보아왔고 다친 사람들을 치료하는 과정도 몇 번 본 적 있었다. 아니, 그뿐 아니라 자신도 치료를 받은 적이 여러 번 있었다.

그러나 얼마 전 입었던 상처는 자신이 아는 마법사들이라면 고개를 저을 만한 심각한 상태였다.

의문을 가득 머금고 있는 리먼의 눈을 바라보며 소년은 불필요하다는 듯 입을 뗐다.

“말로는 설명하기 힘들어요.”

알게 된 사람이 궁금증을 드러낸 것에 심적 부담감을 느꼈던지, 소년은 친절하게도 재차 입을 열어 자신이 한 일을 최대한 설명하려 애를 썼다.

“저희들도 모두 자연 덕택에 살아가잖아요. 그 말은 성장에 필요한 많은 것들을 자연에서 얻는다는 말이 되는 것이죠. 꼭 먹는 게 전부가 아니라는 말이에요. 공기나 햇살, 그 외에도 많은 것들이 꼭 필요하거든요.”

리먼은 멍한 얼굴로 얘기를 듣고만 있을 뿐이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소년의 말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불로 그것들을 잡아두었어요. 왜 불은 모든 것을 앗아가잖아요. 필요한 기운을 삼킨 불을 마나의 품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봉인시켜 두었다가, 제가 아저씨의 상처에 필요한 성질로 변환시켜 사용한 셈이 되는 거죠.”

“어떻게 그 같은 일을…….”

“저처럼 마법을 익힌 존재들은 마나가 힘의 근원이라고 믿으니 제 식대로 설명할게요. 구멍 난 신체 부분을 채우려면 일종의 유기물이 필요했어요. 우선은 활성화시켜 줄 마나가 필요했죠. 촉매제를 무얼 삼을까 고민을 많이 하다가 제 몸에게 물어본 후, 그에 맞는 성질의 마나를 찾는 데 시간이 오래 걸렸네요.”

소년이 찾은 것은 재생을 돕는 기운이었다. 이는 그저 마나의 힘을 빌려 상처를 치유하는 것과는 천양지차의 차이가 있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 이 소년은 천재라 봐야 했다. 마법에 관한 천재.

당장 이 한 가지만 보아도 충분히 그런 명칭이 주어질 수 있었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책에서 배운 지식들과 들은 지식들, 이미 만들어진 마법을 따라가고 있다.

이는 비단 인간들의 경우에만 국한되는 사항은 아니었는데, 이 소년처럼 귀가 뾰족한 엘프들 역시도 그 범주에서 벗어나질 못했기 때문이다.

창의적으로 무엇인가를 개발하고 터득한다는 것 자체가 이 소년이 예사 인물이 아님을 뜻했다.

“너 정체가 뭐냐?”

그래서 묻는 질문이었지만, 엘프 소년의 입에서는 당연한 듯한 대답이 흘러나왔다.

“쿤이오.”

“이름 말고, 정체 말이다.”

다시 묻는 질문에 소년이 기억을 더듬어봤지만 딱히 생각나는 게 없었다.

“정체요? 전 엘프잖아요. 이름은 쿤이고요.”

어리벙벙한 표정을 짓고 있는 리먼을 보다 쿤은 연유를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일어서며 말했다.

“식사 안 하셨죠? 제가 이리 가져오라고 할게요.”

쿤이 문을 열어두고 나간 사이 리먼은 상념에 빠져 들었다.

분명한 것은 저 소년이 자신의 생명의 은인이라는 것이다.

성기사에게 당한 후 몸에서 맥이 풀리고 모든 마나가 빠져나가 꼼짝없이 죽은 줄로만 알았다.

그들이 자리를 떠난 후에, 시리도록 차가운 바람이 불었던 덕에 미약하게나마 리먼의 몸이 꿈틀거렸다.

마침, 쿤이 그곳을 지나가는 중이었다.

쿤은 당장 응급조치를 취해 죽어가던 리먼을 회생시켜 놓은 후, 이 여관으로 데려와 꾸준히 상태를 보아주었다. 이것이 그동안의 전말이었다.

리먼의 표정이 시시각각 변화했다.

쿤을 떠올릴 땐 귀엽고 고마운 아이에 대한 감정에 물들었으며, 비열하게 자신을 기습했던 자들과 의식을 잃기 전 흐릿하나마 분명히 목격했던 성기사를 떠올릴 땐 분을 금치 못해 치가 떨렸다.

신성 제국의 상징이라면 여러 가지가 있지만, 성기사도 그중 하나에 속한다.

‘왜 그가 왔을까, 왜 그가 자신을 죽이려 했을까?’란 생각은 하나의 경험과 연계되어 추론 내려졌다.

바로 리먼이 엠팔레스 신전을 방문하여 염원을 빌었던 일, 그리고 그 도중 신성 제국의 대신관이라는 자에게 목걸이를 보였던 일과…….

본인의 힘이 닿지 않는 일이기에 더욱더 화가 치밀어 이가 갈렸다.

‘네놈들이 그러고도 신성 제국이라 할 수 있느냐?’

감히 입 밖에 낼 수 있는 말이 아니었다. 이곳은 엄연히 신성 제국의 수도 홀란트 내에 위치하고 있었으므로.

자고로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고 하질 않았던가.

성기사까지 보내었을 정도면 이미 리먼은 요주 인물이 되었을 가능성이 높았다.

당장 두 갈래의 갈림길이 생겼다.

한 가지는 지금 당장 바리톤으로 돌아가 이 일을 알리는 것이었다. 분명 일전에 보았던 그 대신관이 연루되었을 것이다. 그에게 표적이 되었으니 이 이상 수사를 한다는 것은 위험할 수 있었다.

다른 한 가지는 사태의 추이를 조금 더 지켜본 후 정확한 범인을 집어내 돌아가는 길이었다.

암만 생각해봐도 후자라야 맞았다.

로테노아 국왕이 원하는 것은 완벽한 범인의 지목이지, 좁혀 든 수사망 따위가 아닐 것이므로.

위협이 따를지라도 만족할 만한 결과를 보여 주어야 했다. 그렇지 못한다면 자신은 무능함에 힐책을 당할 것이므로.

또 사람을 데리고 온다고 하더라도 별반 도움이 될 것 같지도 않았다. 검술에 있어서 리먼 본인만큼 뛰어난 사람은 바리톤 내에 없었기 때문이다.

이 왕자 유프라의 실력을 높이 산다고는 하지만, 그는 자신이 모시는 왕자인 데다 아직 경험도 많질 않아 여러 위협 요소가 따를 것 같았다.

‘어렵게 생각하지 말자. 이제부터는 내가 조심하면 된다. 경각심이 없었던 탓에 기습을 당했던 것이다. 펜던트를 빼앗겼다고는 하지만 크게 문제 될 것은 없다. 그 모양은 수백 수천 번을 본 것이니… 도리어 그 녀석들이 주인을 찾아주면 다행이겠군.’

그렇게 리먼은 생각을 굳혀 갔다.

* * *

오딘은 전혀 술이 취하지 않았는지 일행들의 면면을 훑어보며 얼굴에 미소까지 드리운 채, 술잔에 담긴 술을 입 안에 털어 넣었다.

반면에 마르크는 비실대면서도 의자에서 바닥으로 추락하지 않으려 용을 쓰고 있었다. 답답한 속을 달랠 길이 없어 연거푸 술을 마셔 댔기에 이미 만취 상태였던 것이다.

또한 헤르미온은 오딘이 주는 술을 거절하지 못해 계속 마시고 말았는데, 그 때문에 부끄러운 빛과 취기가 섞여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술은 용기를 준다고 하더니, 과연 그녀가 그랬다.

‘마음 놓고 봐주겠어, 흥.’

그녀는 풀린 눈으로 오딘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중이었다.

그나마 멀쩡한 사람이 틴이었다. 그는 몇 잔 마시지 않았는데, 마르크와 헤르미온의 안전을 책임져야 할 의무가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다 보니 이제 오딘은 술잔을 마주칠 사람도 없어져 버렸다.

자고로 같이 마셔 주는 친구나 동료가 없다면 술은 그 맛이 떨어지는 법이다. 그래서인지 오딘도 주변을 돌아보는 시간이 늘었다.

마침 앞에 앉은 헤르미온처럼 귀가 긴 소년이 식사를 담은 유리 용기들이 놓인 구리 쟁반을 들고 올라가려는 것이 보였다.

그때 소년의 등에다 대고 이 여관의 주인장이 말했다.

“계산한 돈은 오늘까지다. 더 묵으려면 돈을 더 가져오든지 해야 한다.”

“아, 돈 있어요.”

당장에라도 줄 수 있다는 말이다.

그 순간, 소년의 어깨를 누군가 치고 지나갔다.

콱!

소년의 상체가 뒤틀리며 양손에 받쳐 든 쟁반이 볼썽사납게 엎어졌다.

쨍그랑!

용기가 깨지고 그 안에 든 음식들이 너저분하게 깔리며 바닥을 더럽혔다. 그런데도 소년을 치고 지나간 남자는 도리어 눈알을 부라리며 성질을 냈다.

“이 망할 자식아, 앞을 똑바로 봐야지!”

누가 봐도 소년이 잘못한 건 아니었다.

주위의 따가운 시선들이 느껴졌던지 남자는 황급히 자리를 떴다.

이미 가버린 사람 탓해서 뭣 하리. 쿤은 엎어진 음식을 보다가 다시 헤벌쭉 웃으며 주인에게 말했다.

“어지럽혀서 죄송합니다. 죄송하지만 다시 해주실 순 없을까요? 돈은 드릴게요.”

그러면서 호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었는데 허전함이 느껴졌다. 리먼으로부터 받은 돈이 없었다. 분명히 내려올 때까지만 해도 있던 돈이다.

의심할 여지가 없었는지, 쿤의 시선이 문을 향했다.

당장에 그쪽으로 달려가려는데, 문이 열리며 정말 의외의 상황이 벌어졌다.

쿤의 어깨를 치고 지나갔던, 그러면서 호주머니를 슬쩍한 범인이 제 발로 걸어 들어온 것이다.

더욱 황당한 점은 범인이 쿤의 앞에 다가오더니 돈을 돌려준 후 무릎까지 꿇고 손바닥을 싹싹 비벼 대는 것이었다.

“내가 잘못했다. 제발 살려만 다오.”

소매치기가 돌아온 시간은 쿤의 주머니가 빈 후로 그리 길지 않았다.

이 수수께끼 같은 상황에 쿤은 아리송할 뿐이었다.

경황이 없어서인지 그는 미처 간파하지 못했다. 창가 쪽에 앉은 검은 머리카락의 한 남자가 자신을 보며 흡족한 표정으로 웃고 있다는 것을.

“앞으론 이러지 마세요. 됐어요, 가보세요.”

의외로 쉽게 용서하는 소년 덕에 남자는 일어섰다.

그럼에도 마음을 놓을 수 없었던지, 주위를 희번덕이는 눈으로 살피다가 뒷걸음질을 치며 여관의 후문을 향해 부리나케 도망쳤다.

우선적으로 쿤은 누군지 모르는 대상에게 고마운 마음이 들었고, 그 마음은 범인을 다시 들여보내준 정문을 향했다.

여러 사람들 앞에서 소동을 피울 순 없어 그는 잰걸음으로 정문에 바짝 다가가서는 벌컥 나무문을 열었다.

지나다니는 사람은 많았지만, 좀체 짐작이 가는 대상이라고는 없었다. 그래도 쿤은 어딘가에서 도움을 준 대상이 듣고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했던지 문밖에다 대고 목청을 높여 크게 소리쳤다.

“누구신지는 모르겠지만 감사합니다! 전 쿤이라고 해요!”

소년이 무사히 계산을 치르고 계단 위로 올라가는 것을 보며 오딘은 밖에서 대기 중일 음영대원들에게 전음을 보냈다.

-수고했다.

그 즉시 전음으로 화답이 왔다.

-당연한 일을 했을 뿐이옵니다.

쿤의 시야에 은인들이 쉽사리 들어오지 않았던 까닭은 역시 그들이 음영대였기 때문이다.

마르크 일행이 오는 도중 이상한 낌새를 눈치 채지 못했던 것도 같은 맥락이었다.

오딘이 창설한 5개의 단체는 눈부신 진보를 거듭했다.

살과 뼈를 깎는 고통을 감내해가면서 그들은 힘을 키우기에 열중했고, 덕분에 단체의 이름에 부끄럽지 않은 실력을 지니게 되었다.

최고의 스승과 최고의 환경, 그리고 최고의 자부심에 의한 노력으로 인해서.

하지만 그 최고의 스승인 오딘조차도 마타하리 건에 관해 일전에 바리톤에서 일을 맡긴 남자인 리먼 백작이 바로 위층에 머물고 있으며, 위험에 처해 있다는 사실은 인지하지 못했다.

* * *

헤르미온이 술이 거나하게 취해 취기가 영 가시질 않았던 까닭에 오딘 일행은 이틀을 더 여관에 머물렀지만, 리먼을 목격할 수는 없었다. 이는 아직 쾌차하지 못한 리먼이 바깥출입을 꺼렸기 때문이다.

말과 나귀를 매어둔 마구간으로 향하면서 헤르미온은 슬그머니 마르크의 옆구리를 찌르고는 물었다.

“혹시 나 실수한 거 없어?”

“실수? 많이 했지. 수도 없을 정도로…….”

대수롭지 않게 말하는 마르크를 보며 그녀는 대뜸 의심부터 했다.

“너 뻥치는 거지? 그렇지?”

“내가 거짓말을 해서 뭣 하겠어? 틴 님한테 물어봐. 내가 거짓말 하는 건지.”

그녀의 눈이 틴을 향했지만, 그는 대답하기가 꺼려졌는지 애써 고개를 돌렸다.

헤르미온의 눈은 계속 오딘을 의식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혹여나 술에 취해 그에게 헛소리를 한 건 아닌지 걱정부터 되어 마르크의 귀를 잡아끌곤 재차 물었다.

“똑바로 말해. 내가 무슨 실수를 했어?”

“아아, 꼬집지 좀 마. 아프다고.”

그러자 귀를 잡은 손을 놓은 대신 그녀는 마르크의 앞을 가로막은 채 팔짱을 끼고 물었다.

“거짓말이었단 봐라. 말해봐, 내가 무슨 실수를 했는지.”

은근한 강요이자 협박이었다.

마르크는 진지해진 표정으로 결국 입을 열었다.

“첫날은 침대에서 깔깔거리며 헤엄을 쳤지. 그리고 다음 날 아침엔 바닥을 마구 어지르고 다녔고. 그것뿐이면 말을 안 해, 치마를 훌러덩 걷어올리고 춤도 췄잖아. 아마 그때 내가 안 말렸으면 스트립쇼를 했을지도 몰라.”

“아악……!”

더 듣기 민망했는지 헤르미온은 깜빡 소리를 지르고 말았고, 그 바람에 그 소리를 듣고 고개를 돌린 오딘과 눈이 마주쳐 버렸다.

하지만 오딘은 잠시 잠깐 미소를 지었을 뿐, 고개를 돌려 가던 길을 계속 갔다.

헤르미온은 마르크의 귀에 대고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저분도 보셨어?”

“그러엄, 다 지켜보셨지. 내가 말한 건 저분이 본 것만 나열한 거야. 옆방에서 주무셨는데 그걸 용케 알아서 깜깜한 밤에 저분 방에 들어가겠답시고 난리까지 피웠잖아. 종업원들이 뜯어말리느라 진땀 좀 뺐을 거다.”

헤르미온의 얼굴이 홍당무처럼 빨개졌다.

마음에 두고 있는 사람에게 추태란 추태는 다 보인 꼴이 아닌가.

그 때문에 헤르미온은 되도록 오딘과 시선을 마주치지 않으려 했다.

나귀에 올라서도 그녀의 고개는 축 처졌고, 그에 반해 뭐가 그리 즐거운지 마르크는 내내 키득거렸다.

곧 응징의 주먹이 마르크의 옆구리로 날아들었다.

퍽!

마르크는 아픈 옆구리를 부여잡으며 일부러 소리를 크게 질렀다.

“아악! 또 때려? 무슨 여자가 이렇게 남자를 패길 좋아하냐?”

그 소리를 오딘이 못 들었을 리 만무했다.

헤르미온은 행여 그가 고개를 돌릴까 봐 덜컥 겁이 나서는 손가락으로 자신의 입술을 가리며 조용히 해달라는 신호를 보냈다. 하지만 마르크가 그에 응해줄 리 없었다.

“뭘 조용히 해? 네 폭력성을 보아서는 안 될 사람이라도 있나 보지?”

드디어 더는 참지 못한 헤르미온이 도끼눈을 떴다.

당장 나귀에서 내려 분풀이를 하고 싶은 생각은 가득했지만, 차마 그럴 수가 없어 나귀 옆에 매어둔 행낭에서 양피지 한 장을 꺼내어 펜으로 급히 무엇인가를 적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양피지를 마르크에게 불쑥 내밀었는데, 거기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넌 돌아가면 죽었어.>

마르크는 그것을 보고 잠시 겁을 먹었지만, 이를 역이용해야겠다는 심보가 들었던지 나귀의 옆구리를 걷어차서 빠르게 걷게 했다.

그러자 헤르미온이 그를 알아차리고 질겁했다.

중간에 마르크가 고개를 돌렸을 때, 그녀는 두 손을 모은 채 간곡히 부탁하고 있었다. 제발 그러지 말라는 뜻이다.

그럼에도 마르크는 오딘에게 다가가 양피지를 펼쳐 들었다.

“저, 이것을 봐주시겠습니까?”

헤르미온의 얼굴에 핏기가 싹 가셨다.

자신은 이미 행실이 좋질 못하고, 밝힘증 환자에다가 스트립쇼나 즐겨 하는 여자로 낙인이 찍혀 버렸을지도 모른다.

게다가 난폭하고 폭력 쓰기 좋아하는 여자라는 인식마저 심어주게 되었으니 난처했다. 뭐 하나 치명적이지 않은 게 없었기에 될 수 있으면 하나라도 줄이고 봐야 했다.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헤르미온은 둘과의 거리를 좁힌 후, 대화라도 들을 양 큰 귀를 쫑긋 세웠다.

“…그렇단 말입니다.”

행동이 늦었던 탓에 그녀는 앞의 대화를 하나도 듣지 못했다.

그때, 오딘이 고개를 돌려 이상한 눈빛으로 자신을 보자 헤르미온의 가슴은 철렁 내려앉았다.

‘아, 이제 난 어쩌면 좋지? 어쩌면 좋은 거야?’

혼란스러워하는 그녀에게서 시선을 뗀 뒤 오딘은 자신이 가던 길만 열중했고, 마르크 역시 다시 뒤로 물러서 헤르미온에게 다가왔다.

헤르미온은 어깨가 축 처져서 마르크를 힐책할 기운조차 없는 듯했다.

첫사랑, 아니 첫 짝사랑이 이렇게 허무하게 끝나버렸으니 그 심정이 오죽하겠는가.

그게 미안했던지 마르크가 그녀의 어깨를 토닥여 주었다.

“양피지는 보여 드리지 않았다고. 내가 보여 드린 것은 로만 공국의 지도였어. 그러니 기운 내. 영점은 아니니까 말이야.”

눈물까지 맺히려던 헤르미온의 눈이 서서히 안정을 찾기 시작했다. 그렇게 악랄한 내용을 보여 주지 않았다는 것에 안도했던 것이다.

* * *

이스론 상단이나 아레인 왕국이 로만 공국으로 가는 길은 홀란트를 통하는 게 가장 빠르고 안전했다.

오딘과 마르크 일행이 신성 제국의 수도 홀란트에서 만난 것은 목적지가 로만 공국이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신성 제국과는 달리 치안이 좋지 못한 로만 공국부터지만 말이다.

로만 공국.

이곳은 신성 제국과 인접한 곳이기는 하지만 다른 신을 섬기고 있었다. 아주 오래전부터 말이다.

그것은 고대, 그러니까 왕국들과 공국, 제국들이 대륙에 뿌리를 내리기 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대륙의 도처에는 인간들이 사는 수천의 부락이 존재했으며, 당연히 지역에 따라 언어, 그리고 생각과 관점의 차이도 존재했다.

주신 아스카론은 무려 1세기 동안 유희를 했는데, 그것이 시발점이 되어 대륙의 곳곳에선 주신을 섬기게 되었다.

분명 속을 파헤치자면 로만 공국이 입버릇처럼 외치는 다이안이라는 신과 신성 제국이 섬기는 아스카론은 같은 대상이었다.

해석이 다르긴 하지만 종교 서적에서도 이와 유사한 점을 들 수 있는데, 아스카론을 따르는 신성 제국이나 다이안을 모시는 로만 공국을 위시한 여러 나라들은 현재까지도 이를 받아들이지 못하였다.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는 말이다.

바로 이 점이 오래도록 로만 공국이 신성 제국에 편입되지 못하는 이유였다.

현재 로만 공국은 실제적으로 연합국에 속했다.

이는 자신들을 눈엣가시로 여기던 신성 제국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한 행동이었는데, 이 점이 악영향을 초래했다.

로만 공국은 거대한 네실리안강을 끼고 있어 연합국들과는 육로로 발길이 닿질 않았다. 때문에 잦은 몬스터의 침입이나 카반의 울프 같은 마적단들에게 종종 피해를 입었다.

그렇다고 관계가 소원해진 신성 제국에 도움을 요청할 수도 없는 형편이었다.

게다가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귀족들은 욕심에서 자유롭지 못하여 진정으로 공국을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에, 자연히 힘들어지는 것은 힘이 없는 하층민들이었다. 그들이 귀족들에게 바치는 세금은 거의 착복 수준이었던 것이다.

거기에 더해 점점 세력을 늘려 가는 카반의 울프를 위시한 여러 마적단들과 제어를 하지 못해 급격히 불어난 몬스터들에게 짓눌려 하층민들은 말 그대로 숨도 못 쉴 지경이었다.

도시만 예를 들어보아도 공국 내에 규모가 큰 도시는 8개에서 7개로 줄어버렸다.

그리고 현재 오딘 일행은 이 중 제8의 도시라고 불렸던 토르시를 경유하는 중이었다.

“폐허나 다름이 없군.”

오딘이 보는 대로였다.

불에 탄 건물들의 잔해와 어지럽게 널려 있는 부서지거나 더럽혀진 집기들, 간간이 동물의 것인지 사람의 것인지 파악하기도 힘들 바스러진 뼛조각들이 눈에 들어왔다.

버려진 도시에는 까마귀들이 곳곳에 앉아 주인 행세를 하고 있었다.

“마적단이 이곳의 영주와 전투를 벌여 승리를 거머쥔 이후 대대적인 공습을 펼쳤다고 합니다.”

틴의 말이었다.

현재 마르크는 죽을상을 짓고 있었다.

사실 내색을 않았다 뿐이지, 틴이나 물건 이송을 담당하는 짐꾼들, 그리고 상단에서 파견을 나온 호위 무사들도 마르크와 마찬가지의 심정이었다.

그들의 마음을 마르크가 대변했다.

“오딘 님, 생각을 바꿔주실 순 없겠습니까? 조금만 돌아가면 인근의 도시로 이동이 가능합니다.”

“왜 그래야 하지?”

“필요한 물건이라도 건져 가려 하위 부대가 올지도 모르는 일이지 않습니까.”

틀린 말이 아니었다.

어느 단체나 그렇겠지만, 마적단들 역시 아래에 속해 있는 자들은 남이 버린 것을 주워다 썼다. 바로 어제만 해도 자신들끼리 조를 이뤄 이곳에 다녀가지 않았던가.

그 설명으로도 모자라다고 판단했는지 마르크는 부연 설명까지 덧붙였다.

“지진에도 여진이 따르는 법입니다. 다시 말해 이곳은 제일 위험한 도시라는 말입니다.”

그런데도 오딘은 전혀 물러설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제일 가까운 곳이라고도 하였지.”

하마터면 마르크는 대놓고 불평을 할 뻔했다.

과연 악감정이 솟을 만도 했다. 정작 그가 데려온 사람들은 이 자리에 코빼기도 비치질 않고 있질 않은가.

한발 한발 내디딜 때마다 불안이 싹트는 정도가 아니라 무럭무럭 자라나고 있는 중이었다.

참 이상한 점은 왜 자신이 오딘의 말에 따르고 있느냐였다.

이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힘이 작용했는데, 마르크가 말을 따르려 하지 않을 때마다 오딘은 말투에 위엄을 싣거나 표정을 슬그머니 구겨 인상을 써서 끌어온 탓이다.

마르크에게 제일 문제가 되는 것은 그와의 관계였다. 그것이 걸림돌이 되었던 것이다.

또한 확신을 실어준 글귀도 큰 작용을 했다.

오딘은 만에 하나 ‘이 일이 잘못될 시에는 모든 보상을 하겠다’라는 각서를 써주었다.

그래도 마르크가 억울한 것은 상단에 몸을 담고 있는 사람들의 안전이었다.

누구든 죽는다면 어디에서 하소연을 할 것인가.

그것 때문에 여태 불평불만이 삭여지지 않고, 증폭되어 가는 중이었다.

하지만 아무런 걱정도 없는지 오딘은 태평해 보였다.

“이곳도 대륙 공용어를 사용하는가?”

그 물음에 불안이 가득해 얼굴색이 노랗게 질려 있는 마르크를 대신해 틴이 답했다.

“로만 공국은 그들만의 언어를 가졌었지만, 지금은 유실되어가고 있습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그보다는 더욱 쉽게 배울 수 있고 살아가는 데에도 유용하게 쓰일 대륙 공용어를 배우길 원했기 때문이죠.”

대륙의 언어를 배울 당시에 오딘이 느끼기에도 그러했다. 다른 것은 몰라도 확실히 대륙 공용어가 익히기 쉽다는 장점은 안고 있었다. 덕분에 자신 역시 오래 걸리지 않아 말을 배울 수 있었지 않은가.

“이 나라 사람들에게는 아쉬운 일이군. 그 나라의 언어가 아니라면 고유의 색을 낼 수 없을 텐데…….”

그 말을 그대로 전해들은 마르크는 자칫하면 오딘이란 이자가 생각이 깊은 사람이라 여길 뻔했다.

‘그렇게 생각이 깊고 사려가 깊으신 분이 왜 이런 무리한 일을 추진하신 겁니까?’

아무리 오딘이라 해도 사람의 속생각을 꿰뚫어 볼 순 없었지만, 마르크의 표정에는 자신을 못마땅해 하는 심정이 여실히 드러나 있었다. 그럼에도 오딘은 그냥 웃어넘겼다.

오히려 자신의 결정을 마지못해 받아들이는 마르크의 태도가 재미있을 정도였다.

오딘은 다시 틴을 향해 물었다.

“로만 공국이라 하였나? 이곳은 무엇이 발달하였지?”

나라마다 지역마다 내세울 것이 있다. 이는 어디서건 비슷한 경우이다.

동시대가 아니라 해도 후에 인정을 받을 자원이나 식물, 채소가 있는 법이며 그것이 아니라 해도 타지에 비해 뛰어난 인적 자원이 있는 법이다.

오딘은 그렇게 생각했고, 틴의 말도 그를 입증해주었다.

“이곳은 농업이 발달한 곳입니다. 저희가 오딘 님께 납품하던 곡물 중 두 가지는 이곳에서 사들인 것입니다.”

어느새 이스론 상단의 긴 행렬이 도시를 벗어나고 있었다.

그런데 한 가지 의문스러운 점이 있었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주변에 득실거린다는 몬스터의 습격을 한 차례도 받은 적이 없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마적단은 코빼기도 비추질 않았다.

마르크 일행은 그것이 단지 운이 좋았기 때문이라고 치부했다. 그리고 그 운이 자신들의 목적지까지 지속되기를 바랐다.

그들은 이 주변을 오딘이 끌고 온 음영대들이 통제하고 있다는 것을 꿈에도 모르고 있었다.

인근에서 야영을 한 후 마르크 일행은 동이 트기 무섭게 짐을 꾸렸다.

아닌 게 아니라 새벽에도 불안함 때문에 제대로 잠도 못 이룬 차였다. 오죽하면 교대로 불침번까지 섰겠는가.

다행히 불행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아침까지 멀쩡한 걸 보면 말이다.

지금의 상황에 안도하면서도 마르크는 혹여 모를 사태에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오늘은 우회를 하여 갈까 합니다. 몬스터들이 특히 많다고 하니 주의해주십시오.”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카반의 울프들의 본거지인 카반에 발을 들여놓을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그렇다고 이 부근에서만 서식한다는 식인 물고기들이 있는 강줄기를 건널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석연찮다는 듯 오딘이 물었다.

“왜 우회를 하지?”

그 물음에 마르크는 기가 차는 표정이었지만 모를 수도 있겠다 싶어 설명해주었는데, 말투에는 불만족스러운 속내가 들어차 있었다.

“오딘 님께서도 전에 지도를 보셨지 않습니까. 번식력이 왕성한 탈라어들은 쇠까지도 먹어치웁니다. 때문에 이 부근엔 배는커녕 뱃사공조차 없습니다.”

“강으로 가자는 말이 아니지 않느냐.”

“그럼 어디로 가자는 말씀이신지요? 설마 카반으로 들어가자는 말씀은 아니시겠지요?”

고개를 끄덕이는 오딘을 향해 마르크는 고개를 저으며 강한 부정을 나타냈다.

“그건 안 됩니다. 절대로 안 됩니다.”

“왜 되지 않지? 들끓는 몬스터보다야 말이 통하는 사람이 나을 텐데.”

그가 하는 말이 세상 물정 모르는 어린애가 하는 소리 같아서 마르크는 언성을 더욱 높였다.

“그들은 마적단입니다! 피도 눈물도 없는 자들이란 말입니다.”

오딘은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세상의 마적단이란 자들이 들으면 조금 섭섭하겠군.”

도저히 오딘이 그 쇠심줄 같은 고집을 굽히지 않을 듯 보였는지 틴 역시 마르크와 한목소리를 냈다.

“오딘 님, 지금 일은 심사숙고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대륙에 많은 마적단이나 도적단들이 있다지만 악명만으로 치면 카반의 울프들은 그중 상위권을 차지합니다. 오죽하면 로만 공국조차도 그들과 마찰이 생기는 것을 은근히 꺼려하고 있겠습니까. 이건 저희가 감당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닐 듯하니 부디 재고해주시길 바랍니다.”

“그 말은 이들이 꽤 큰 마적단이라는 얘기가 되겠군.”

순순히 오딘이 인정하는 듯하자 틴은 기쁜 마음으로 답했다.

“바로 보셨습니다.”

하지만 그에게서 들려오는 말은 정말 얼토당토않은 것이었다.

“그럼 더 가야겠군. 본 좌는 그곳에 볼일이 생겼느니라. 그곳으로 갔으면 한다.”

철이 없어도 이렇게 없을 수가 있을까? 그 말이 얼마나 어이가 없었던지 마르크는 입을 벌린 채 멍하니 그 자리에 굳어 있었다.

이로써 명확해졌다.

그가 아레인에서 지극히 높은 위치에 올라 있는 것은 누군가의 후광으로 인해서라고밖에 생각되질 않았다.

싫다는 것만 골라서 하는 양반이 아니라면 자신과 무슨 악감정이 있다고 이런 행동만 취하느냔 말이다.

마치 일부러 반대로 행동해야겠다고 말해서 성질을 돋워 반응을 떠보려는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렇더라도 사람의 목숨이 오갈 수도 있는 문제로 그래서는 아니 되질 않겠는가.

상단 내에 몸을 담은, 자신과 일면식이 있는 지인들을 지켜 줘야겠다는 마음이 발동해서일까?

마르크는 정신줄을 놓아서는 안 된다고 자신을 채찍질하고서 즉시 따지고 들었다.

“오죽하면 몬스터들이 들끓는 곳을 택해 갈 생각을 하겠습니까? 카반의 울프는 여기 서식하는 몬스터들보다도 훨씬 위험하단 말입니다! 가진 것 다 빼앗기고 옷까지 벗겨진 후 가죽까지 훌러덩 벗어줘야 할지 모릅니다!”

마르크의 애타는 속도 모르고 오딘은 그 말에 그저 웃기만 했다.

여태 말을 하지 않았지만 마르크는 속으로 짜증까지 치밀어 오르고 있는 상태였다. 솔직히 그는 몸만 온 게 아닌가? 위험한 곳이라고 그렇게 일러서 군대까지 대동해달라는 청을 올렸음에도 말이다.

그러나 차마 그 말은 꺼내지 못했다. 다만, 만에 하나 소중한 자신의 친구들이 다친다면 그때 가서 돈을 돌려받고 계약 파기를 할까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볼 생각이었다.

아닌 게 아니라 헤르미온도 점차 초조해하는 기색이었다. 그녀 역시 불안이 도를 넘어섰던 것이다. 심지어 짐꾼들은 저들끼리 수군거리기까지 했다.

여럿의 따가운 눈총을 받으면서도 오딘은 고집을 굽히지 않고 못을 박듯 말했다.

“어차피 돌아서 갈 시간 안에 마무리를 짓도록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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