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신성 제국 (25/67)

신성 제국

당장에 벗어나고 싶었지만, 떠나고 나니 또 착잡해졌다.

아레인 왕성을 떠나오는 헤르미온의 심정이 그러했다.

마르크는 나귀 위에서 왕성의 집무실 내에서 작성한 협약서를 열 번은 넘게 읽어보면서, 혹여나 문제가 될 부분이 있는지 없는지를 꼼꼼하게 체크해보고는 드디어 협약서에서 시선을 뗐다.

‘향후 문제가 생기는 부분은 다시 협약이 가능하다는 조항까지 있으니 전혀 나쁠 것이 없어. 단주님께서도 좋아하시겠군. 그러나 아레인이 우리가 필요한 힘까지 충족시켜 줄 수 있을까?’

원래 사람의 욕심이라는 게 이러하다. 원하는 목적에 이르면 더 바라게 되는 것이다.

다른 상단들의 눈치를 보지 않고 마음대로 무역을 행할 수 있게 되는 것, 이것이 마르크가 바라는 궁극적인 목표였다.

‘그건 너무 큰 욕심일지도 몰라.’

그러려면 막대한 힘이 필요한데, 그것은 아레인 같은 소국으로서는 불가능할 것이란 판단이 들어 마르크는 부풀어 오르던 기대를 그렇게 접었다.

‘그래도 왕국과 손을 잡았으니 어느 정도의 실리는 취할 수 있겠지.’

당장은 그것만으로 만족해야 했다.

그때, 돌연 헤르미온의 입술을 비집고 한숨에 젖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 사람, 어떤 존재일까?”

마르크는 그녀가 묻는 대상을 어렵지 않게 직감했다.

“글쎄, 아마도 아레인 여왕님의 부군이 아니겠어? 왜 나이대도 비슷해 보이잖아. 둘이 잘 어울리던데?”

마르크가 느낀 바대로 얘기하고는 헤르미온을 보자 왜인지 모르게 그녀의 얼굴이 어두워 보였다.

“너 혹시!”

“말하지 마.”

가슴이 꽉 막힌 것만 같아 그녀는 고개를 들어 넓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 모습에 짓궂은 표정으로 그녀를 놀리려던 마르크는 선심이나 쓴다는 양 고개를 돌렸는데, 고뇌에 찬 틴의 표정과 마주쳤다.

“틴 님, 기분이 안 좋으신가요? 표정이 평소 같지 않으세요.”

틴은 아무런 답도 줄 수 없었다. 아레인 왕성에서 겪은 무기력함에 자책이 깊어졌던 탓이다.

그가 무거운 얼굴로 대답이 없자 자연히 말을 꺼낸 마르크의 입만 무안해져 버렸다.

이 분위기는 오래도록 그치지 않았고, 그러다 보니 상단으로 돌아오는 길은 너무도 적적했다. 마르크에겐 말이다.

* * *

나이시스 신성 제국의 수도, 홀란트의 여러 신전들의 웅장함은 마치 신의 위대함을 설파하는 것과도 같았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은 높이에 적게는 1천에서 많게는 1만에 이르기까지의 신도들을 수용할 수 있는 공간, 그리고 대륙에 내로라하는 예술가들이 곳곳에 새긴 그림과 조각들로 안을 장식한 곳이 있는가 하면, 심지어는 값비싼 황금으로 만들어진 신전도 있었다.

그러나 홀란트의 모든 건물들이 이처럼 부유한 것만은 아니었다.

멀지 않은 곳에는 허름하고 금이 가 있는 빈민가들이 늘어서 있었으며, 제대로 먹고 자지도 못하여 눈이 퀭한 사람들도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자신들이 신성 제국의 신민이란 것을 알았기에 주신 아스카론을 섬기는 마음을 소홀히 하지 않았다. 못 먹고 못 사는 사람일수록 주신에 대한 마음은 더욱 간절했기 때문이다.

주신의 날.

보름에 한 번씩 이날이 찾아오면, 많은 사람들로 인해 신전은 문전성시를 이룬다. 신을 칭송하고 경배하기 위해 모이는 것이다.

물론 다른 이유도 있었다.

바로 신민들이 신전을 찾아 소원을 비는 날 역시 이날이었던 것이다.

물론 신께 직접 염원을 올리지는 못하고 신관들의 입을 통해 대신 전해졌는데, 이 때문에 신관들은 이날만 되면 누구보다 바빠졌다.

이곳 엠팔레스 신전 역시도 제법 규모가 컸다.

그 때문인지 신성 제국의 문양을 새긴 중장갑주를 착용한 성기사들이 간간이 눈에 띄었으며, 혹여 모를 사태에 대비하여 치유 사제들도 대기하고 있었다.

사람들이 늘어선 줄은 끝을 모르게 이어져 있었다.

그 줄은 계단 위쪽에 자리한 하나의 창구로 통해 있었는데, 사람들은 그 계단을 ‘거룩한 계단’이라 불렀으며, 창구는 ‘성지로 통하는 출입구’라고 불렀다.

성지로 통하는 출입구 안에는 중년의 신관이 의자에 몸을 기댄 채 앉아 있었고, 젊은 사제 하나가 시중이라도 드는 것처럼 곁에 서 있었다.

신관이 목을 죽 빼어 사제의 귀에 대고 아주 작게 속삭여 물었다.

“얼마나 더 남았지?”

그러자 사제는 조심스레 하얀 장막을 걷고 고개만 내밀어 곁눈질로 감히 줄의 끝을 헤아리려 했다. 그러나 도무지 계산이 나오질 않았던지 막막한 얼굴로 몸을 뺐고, 그 모습에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겠다는 듯 신관의 표정엔 짜증이 어렸다.

“수도원장님도 참, 이런 벌을 내리시다니. 이 많은 사람을 대체 나 혼자 어떻게 보라고…….”

불평이 채 그치기도 전에 창구 밖에서 낯선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전 주신께 저희 가족의 안녕과 기르는 가축들이 별 탈 없이 잘 커주기를 빌고 싶습니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신관의 손에 들린 깃털로 만든 펜이 부지런히 움직였다.

신관은 내용이 적힌 양피지를 옆쪽에 놓았는데, 거기엔 사람들의 염원이 담긴 양피지들이 이미 수북이 쌓여 있었다.

메모가 끝난 찰나에 창구 안으로 엉성한 바느질로 꿰맨 천 주머니가 들어왔다.

주머니를 벌려 보는 것은 사제의 몫이었다.

사제의 표정을 확인하고 난 다음 신관은 창구를 향해 말했다.

“됐소, 다음.”

다음 사람이 다가오는 발소리가 들리기 전, 신관은 왼팔로 오른쪽 어깨를 부여잡고 펜을 들었던 오른팔을 돌리며 인상을 구겼다.

“얼마나 적었는지 팔이 다 뻐근하군.”

그러는 동안 또 한 사람이 창구 앞으로 다가왔다.

“노모가 병이 드셨습니다. 사제님을 찾아가 도움을 부탁드렸지만 가망이 없으시다는군요. 아이들도 굶고 있고…….”

사연은 매우 딱했지만, 신관은 도리어 그를 윽박질렀다.

“간략하게 얘기하시오! 염원이 노모의 병이 낫는 거요? 아이들이 굶지 않는 거요?”

창구를 비집고 애절한 목소리가 힘없이 흘러들어왔다.

“두, 둘 다입니다.”

그가 노모의 병의 치유를 부탁했을 때부터 신관들을 찾아가 돈을 건네었으니, 자연히 형편이 더 어려워져 아이들까지 굶게 된 것이다.

신관은 못마땅한 눈초리로 창구를 보았는데, 앞서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천 주머니가 들어왔다. 다른 점이라고는 이 천은 앞의 천과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상태가 매우 좋지 못했다는 점이다.

사제가 그를 받아들려는 데에 신관이 그 팔을 뿌리치며 주머니를 낚아챘다. 그리고 주머니를 벌렸을 땐 더없이 인상이 구겨졌다.

“정성이 부족하면 염원이 닿지 않을지도 모르오.”

아무 소리조차 못하고 창구 앞에 서 있는 사람에게 신관은 매몰차게 말했다.

“다음.”

그 순간, 살이 트고 때가 탄 손이 창구에 구리 반지를 전해왔다. 아마도 손가락에 끼었던 것이리라.

신관은 그 구리 반지를 자신의 호주머니에 넣으며 중얼거렸다.

“꼭 많이 달라는 얘기가 아니요. 간절함이 없으면 안 된다는 거요. 내 전하도록 할 테니 이제 그만 가보시오.”

그제야 그가 물러나는 무거운 발소리가 대리석 바닥을 울렸다.

신관이 사제를 흘끔 쳐다보자 그는 일부러 딴청을 부리며 조금 전의 일을 못 본 체했다.

곧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번엔 제법 점잖고 굵은 남자의 목소리였다.

“사람을 찾고 있습니다.”

보통이라면 사람을 왜 신전에서 찾느냐고 물어야 할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 앉아 있는 신관은 그렇지 않았다.

“간절하면 도와주실 것이라고 하십니다.”

굳이 사람을 보지 않아도 그는 목소리만으로 상대의 신분을 대충이나마 예측할 수 있었는데, 이 남자는 적어도 방금 다녀간 하층민은 아닐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이 일에 많은 시간을 허비하였지만, 아직도 힘이 드는군요. 부디 이번은 헛걸음이 안 되었으면 합니다.”

그러면서 그는 창구로 천 주머니를 내밀었는데, 안이 제법 두둑했다.

긴 말이 아니었기에 신관은 금세 내용을 적고 주머니 안을 확인하는 사제의 표정을 보았는데, 꽤나 놀란 기색이었다. 안에는 은화가 무려 15개나 들어 있었던 것이다.

“그럼 주신께 잘 좀 전해주십시오.”

신관이 재빨리 눈치를 건네자 사제가 장막을 걷었지만, 누가 누구인지 쉽게 분간할 수 없었다.

사제는 지척에 있던 성기사에게 냉큼 다가서며 다급한 어조로 물었다.

“조금 전에 서 있던 남자, 어디로 갔죠?”

그러자 성기사가 손을 들어 가벼운 여행복 차림을 한 남자의 등을 가리켰다.

“아마도 저 사람이었던 것 같소.”

금화를 주고 유유히 신전을 빠져나가는 사람은 바리톤 왕국의 리먼 백작이었다.

리먼은 기기묘묘한 펜던트의 주인을 찾는 데 무려 2년을 넘게 허비한 것이다.

물론 그 긴 시간 동안 알아낸 것이 없다면 거짓말이었다.

그동안 그는 온 대륙을 누비고 다니다시피 했고, 그리하여 홀란트까지 오게 된 것이었다.

다행히 범위가 좁혀져서 사막에서 바늘을 찾는 격은 아니었지만, 지금 역시 마당에서 바늘을 찾는 정도는 되었다.

오죽하면 평소엔 믿지도 않던 주신을 찾아가 염원을 빌었겠는가.

그가 알아낸 살인마의 행방이란 대략 신성 제국 안에 있는 사람이란 정도였다. 또한 보통의 신분이 아닌 제법 고귀한 신분이란 것도…….

그렇다면 신성 제국 내의 귀족들로 압축될 것이다.

오랫동안 이 일에 매달려서인지 긴장감보다는 짜증이 치솟았다.

물론, 더 나아가지는 않을 생각이었다.

로테노아 국왕이 자신에게 부탁한 일은 그의 행방을 추적해달라는 것이었지, 잡아와달라는 일이 아니었으므로.

또한 자신에게는 그를 잡을 힘이 없었다.

흔적으로 미루어볼 때 그 살인마는 자신, 아니 바리톤의 날고 기는 기사들이라 할지라도 대적할 상대가 없었을 터였다. 덧붙여서 신성 제국의 내에서 지위가 높은 자를 자신이 어쩔 능력도 없었다.

그저 알아내기만 할 생각이었다.

그러면 자연히 보고는 아레인에 올라갈 터이고, 그리된다면 나머지는 그쪽에서 알아서 할 일이다.

‘설마 마찰이 커져 전쟁으로 번지는 것은 아닐 테지?’

오딘이라는 그 작자가 멍청이가 아니라면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을 것 같았다.

대륙의 기둥과도 같은 신성 제국과 마찰을 일으켜 봐야 좋을 것이 하나도 없을 테니까.

군사력 하나만 놓고 보아도 그러하다.

신성 제국엔 신성력을 바탕으로 하는 성기사들과 사제들이 넘쳐 났으며, 마스터나 고위 사제들과 마법사들 또한 적지 않았으므로.

생각이 길어지고 있을 무렵, 누군가의 목소리가 그를 애타게 부르고 있었다.

“신도님, 신도님…….”

리먼 백작이 고개를 돌려 소리가 나는 쪽을 보자 사제복 차림의 한 청년이 보였다.

사제는 그제야 마음이 놓였는지 헐떡이는 숨을 고르기 위해 허리를 숙이고 두어 번 심호흡을 한 뒤 상체를 일으키며 말했다.

“잠시 시간이 되신다면 저와 함께 가주시지 않겠습니까?”

이런 말을 자주 접한 사람들이라면 쉽게 짐작이 가능했겠지만, 리먼 백작은 신성 제국에 발을 들인 게 이번이 처음인지라 의문을 감추지 못하고 그를 따라갔다.

따라간 곳에서 리먼은 결국 한 신관을 만나게 되었다.

첫 대면에서 신관은 자애로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는 창구 안에서 사람들의 염원을 들어주던 신관이 아닌, 새로운 신도를 확보하는 일에 주력하는 신관이었다.

“어디에서 오셨습니까?”

그 말이 첫마디였다. 그리고 리먼 백작은 그를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였다.

“바리톤에서 왔습니다.”

“아, 바리톤이라. 꽤 먼 곳에서 오셨군요.”

더러는 모를 수도 있었다. 바리톤이라는 왕국은 아레인과 마찬가지로 바다를 접하고 있고, 그리 크지 않은 규모여서 군소 왕국으로 칭해지곤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눈앞의 신관은 아니었다.

그는 바리톤 같은 군소 왕국뿐만 아니라 대륙 내에 산재해 있는 어중간한 소도시의 이름까지도 꿰차고 있었다.

자신이 속한 왕국을 신성 제국의 신관이 알아준다는 사실에 확실히 리먼은 반색하는 모습이었다. 그 모습에 신관은 더더욱 용기를 얻어 유창하게 말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혹시 저희 신전에 대해 소개를 받고 오셨는지요? 그렇다면 추천을 해준 신도가 있을 텐데…….”

리먼은 여전히 솔직하게 대답했다.

“근방을 지나다 들렀을 뿐입니다. 오래도록 염원한 일이 잘 풀리지 않아서 말이지요.”

“그 염원이 무엇인지 제가 들어도 무방하겠습니까?”

어려울 것 없다는 듯 리먼은 품 안에 고이 간직하고 있는 펜던트를 꺼내들고는 신관과 눈을 맞춘 채로 말했다.

“이 물건의 주인을 찾고 있습니다.”

결코 평범하지 않은 물건이었다.

고급스러움에 시선이 가고, 또 특이하다는 데 시선이 갔다.

신관의 시선이 펜던트에 쏠려 있는 것을 보며 리먼은 괜히 보여 주었다고 생각했다. 그 역시 모르는 표정이었으므로.

서슴지 않고 이것을 꺼낸 이유는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에서였다.

“안에 무슨 표식이 있지는 않을까요? 이를테면 이름이라거나…….”

필히 그런 경우가 많았다. 소중한 것을 안에 새겨 넣는 것이다.

신관은 그런 의도로 물어보았지만, 정작 리먼이 펜던트의 덮개를 열어주었을 땐 할 말이 없었다.

곧 하얗고 눈부신 광채가 신관의 시야를 덮쳐 왔고, 그 빛이 얼마나 밝았는지 리먼을 꼬드겨 온 사제조차도 펜던트에 온통 시선을 빼앗겨 버린 것이다.

현재 리먼이 안내되어 온 이 방은 꽤나 널찍했지만 사람들이 거의 다 빠져나간 관계로 한산했다. 다만 신전의 관계자들이 더러 몇 있을 뿐이었는데, 그들조차 펜던트의 밝은 빛에 시선을 빼앗겼다.

그때, 광대뼈까지 깃이 세워진 하얀 로브를 걸친 노인이 리먼을 향해 성큼 다가왔다. 좀 전까지만 해도 내부에 없던 인물이었다.

그는 이곳에 들어서자마자 곧장 빛을 향한 것이다.

리먼과 얘기를 나누고 있던 신관이 그를 알아보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대, 대신관님!”

경악에 가까운 얼굴빛이다.

대신관을 목격하기란 신관들에게도 좀체 쉽지 않은 일이었는데, 그럴 만도 한 것이 신성 제국의 대신관들이라고 해봐야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로 소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가 왕래를 해주었다는 것만으로 신관은 영광으로 여겼다.

신관들이나 사제들 입장에서 보자면 그는 지극히 높은 인물이었다.

리먼이라고 해서 신성 제국 대신관이라는 신분의 위치를 모를 리는 없었다. 그렇다고 바리톤의 백작이라는 작위를 가진 자신이 기죽을 이유는 없었지만, 대단한 사람이란 생각만은 변함이 없었다.

대신관은 곧장 이 물건의 출처를 물었다.

“이걸 어디서 구하셨소?”

리먼은 솔직히 답했다.

“땅에서 주웠소.”

다시 신관이 물었다.

“혹시 본인한테 팔 의향은 없으시오?”

리먼은 빠르게 그의 표정을 살폈다. 혹시나 해서였다. 이 물건의 주인을 그가 알고 있지는 않을까 하는…….

“어째서 사려고 하는지요?”

섣부른 물음이었다.

어설픈 유도심문에 대신관은 쉽게 빠져 들지 않았다.

“이유랄 게 있겠소? 그냥 마음에 들어서요. 크게 비싸지 않다면야 내가 사고 싶소.”

졸지에 두 사람 간에 긴밀한 대화가 오가자 자연히 그와 얘기를 나누고 있던 신관은 뒷전이 되어버렸다. 지금 이 순간, 리먼도 대신관도 신관에겐 볼일이 없었다.

유도심문이 실패로 끝나자 리먼은 딱 잘라 말했다.

“이건 팔 수 없는 물건이오. 그때라면 모르겠소만.”

“그때라니?”

눈을 빛내며 묻는 대신관에게 리먼은 솔직하게 속내를 털어놓았다.

“이 물건의 주인을 찾는 날, 그 이후라면 팔 수 있소.”

신성 제국의 대신관이라는 직책이 아무나 얻는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확실히 그는 보통 사람이 아니었다.

눈 한 번 마주치는 것만으로 리먼의 눈에 내포된 좋지 않은 감정을 꿰뚫어 볼 정도였으니까.

‘아마도 펜던트에 대한 말 못할 사연이나 미련이겠군.’

하지만 리먼 역시 만만치 않은 인물이었다.

“혹시 말이오. 주변에 이 펜던트와 비슷한 걸 차고 다녔던 사람이 있었소? 내, 주인에게라면 돌려줄 수도 있는데…….”

솔직함이 담긴 말이었지만, 대신관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을 뿐이었다.

리먼은 속으로나마 그를 비꼬았다.

‘설마 주신을 믿으면서 거짓이나 일삼는 건 아니겠지?’

몇 마디 말을 더 섞어봤지만, 불행히도 리먼은 그에게서 어떤 단서도 얻어내질 못했다.

그렇게 아무 소득도 없이 허무하게 신전을 떠나는 리먼의 뒷모습을 보는 대신관의 눈은 왜인지 모르게 혼탁해져 있었다.

* * *

땅거미가 깔린 저녁.

초라한 움막집에서 나오는 사람은 모두 4명이었다.

그중 두 사람은 노년과 중년의 남자였으며 또 한 사람은 중년의 부인이었는데, 그녀는 예닐곱 정도로 보이는 어린 소녀를 업고 있었다.

중년의 남자는 노년의 남자에게 연거푸 고개를 숙이며 감사를 표했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노년의 남자는 눈가에 주름살이 생기는 것도 마다치 않고 인자하게 미소 지으며 그의 부담을 덜어주었다.

“괜찮네.”

그러면서 그는 중년 남자의 낡고 해진 바지 주머니에 무언가를 넣어주었다.

손에서 떠난 물건들은 주머니 하단부에서 마찰을 일으키며 짤그랑 하고 부딪치는 소리를 냈다.

그 소리를 듣고 중년의 남자는 그가 무엇을 넣어주었는지를 직감할 수 있었다.

“제발 이러지 말아주십시오. 아이를 치료해주신 것만으로도 감사한데, 저희가 무얼 더 바라겠습니까?”

대가 없는 치료. 그에 더해 돈을 받았다는 데 대한 미안함이었다. 아무리 궁한 처지라 해도…….

“떽, 내 성의를 무시할 거라면 다시는 찾아오지 말게.”

말로는 호통을 쳤지만 노인의 얼굴에서는 치기가 가득했다.

중년의 남자와 여자는 금세 눈시울이 붉어져 당장에라도 눈물을 뚝뚝 떨어뜨릴 것만 같았다.

아이를 업고 있는 여자를 대신해 중년의 남자가 당장 바닥에 무릎을 붙이더니, 서럽게 울어댔다.

“현자님께 받은 은혜, 죽을 때까지 잊지 않겠습니다.”

그랬다.

그는 바리톤의 전대 현자 클라베르였던 것이다.

클라베르는 긴 수염을 쓸어내리며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허허, 계속 무안함을 줄 텐가? 어서 일어나게.”

클라베르는 좀체 일어나지 않는 그의 어깨를 양손으로 부여잡고 일으켜 세웠다.

그 거부할 수 없는 손길에 이끌려 남자는 일어났지만, 터진 눈물은 쉽사리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결국 클라베르에게 등이 떠밀려서 이곳을 벗어나면서도 그들은 고마움이 담긴 눈으로 몇 번이나 돌아보았다.

그들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미소를 간직하고 있던 클라베르의 얼굴. 확실히 그 얼굴은 진정한 행복을 느끼는 듯했다.

그가 움막집으로 발길을 돌리려 할 때쯤, 어두운 곳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저입니다.”

그러자 환했던 클라베르의 표정이 눈에 띄게 어두워졌다. 목소리의 주인공이 누구인지를 알았기 때문이리라.

그의 시선이 향한 곳에 달빛에 음영이 걷히며 예상했던 인물이 서서히 얼굴을 드러냈다.

직감이 맞았다. 바로 현자 알베른이었던 것이다.

거지 행색을 한 그는 전과는 상반될 정도로 초췌한 몰골이었다. 게다가 모진 고초까지 겪었는지 얼굴에선 티끌만 한 여유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알베른은 클라베르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했지만, 반면에 클라베르는 그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는 중이었다.

그 시선이 무서웠는지 알베른은 땅에 무릎을 대려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그를 눈여겨보던 클라베르가 싸늘하게 말했다.

“그럴 필요 없다.”

순간 알베른의 눈이 클라베르에게 향했다.

두려움보다 의문이 커진 까닭이었다.

곧 약간의 정도 담지 않은 간략한 말로써 클라베르는 그 의문을 해소해주었다.

“너는 더 이상 내 제자가 아니다.”

“스승님!”

“스승이라 부르지 말아다오. 난 네게 가르쳐 준 게 없으니…….”

클라베르는 허탈함을 금치 못했다.

알베른은 당장 이 상황을 타개해보려 말투는 능글맞아지고 얼굴색은 비굴해졌다.

“가르쳐 주신 게 없다니요? 스승님께 배운 지식이 얼마나 많은데……. 제 머릿속의 그 많은 것들을 전부 스승님께서 가르쳐 주셨지 않습니까.”

힐책을 담아서인지 클라베르의 목소리 톤이 급격히 커졌다.

“허울뿐인 지식을 배워 어디에 사용하려고 하였느냐? 정작 필요한 것들은 받아들이지 않고 말이다!”

알베른은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그의 타락을 제일 안쓰럽게 지켜본 건 바로 스승이었다.

그가 잘못된 길로 들어설 것 같아 클라베르는 몇 번이나 조언을 해주고 또 해주려 했지만, 그때마다 알베른은 기피하기 일쑤였다.

또한 들어도 한 귀로 흘렸으며, 후에는 자리에 있는 데도 없다는 말을 전하라고까지 했었다.

솔직한 말로 알베른은 스승 보기를 길가에 차이는 돌부리 보듯 하였던 것이다.

당장에 알베른은 클라베르에게 바짝 다가서서 무릎을 꿇고 그의 바짓가랑이를 잡고 매달렸다.

“뉘우치고 있습니다. 부디 스승님께서 새 길을 열어주십시오. 제가 새 삶을 살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클라베르는 그런 그를 유심히 보았으나 이내 몸을 돌리고 말았다. 이유인즉슨, 알베른의 눈에 아직도 어려 있는 욕심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개탄스럽게도 그는 아직도 자신을 도구로 사용하려 하고 있었다.

알베른은 절망스러움에 눈물을 쏟으며 신세 한탄을 하기 시작했다.

“어찌 이렇게 무정하십니까? 제자의 이런 몰골이 불쌍하지도 않으십니까? 하마터면 벙어리가 될 뻔하였습니다. 가진 재산을 모두 털어 겨우 고칠 수 있었습니다. 이제 전 가진 게 아무것도 없단 말입니다!”

엄밀히 말하자면 장애였다. 바리톤과 아레인의 관계에 있어서의 걸림돌.

흑성, 아니 아레인의 하늘이라는 오딘이 알베른을 본다면 필시 좋지 못한 감정을 드러낼 것이다.

그럼에도 클라베르는 그가 진심으로 뉘우친다면 위험을 안고서라도 받아줄 용의도 있었다. 자신을 희생하고서라도 말이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었다.

클라베르가 보는 알베른은 뉘우치기는커녕 오히려 재기를 꿈꾸고 있었다. 알량한 지식 따위로 다시 한 번 부귀영화를 노리는 것이다.

그것은 꼭 바리톤이 아닐 수도 있었다.

부족한 것을 채우려는 것이 궁극적 목적인 셈이었다.

왕국이나 공국, 제국에서 대우를 받는 것은 기사들이나 마법사들만은 아니었으므로.

박식한 지식을 가진 학자들 또한 그에 못지않은 대우를 받았고, 바로 그것이 알베른이 위험을 무릅쓰고서 스승을 찾아온 계기였다.

그러나 완강한 클라베르의 태도는 절대 변할 것 같지 않았다.

상황이 절망으로 치닫자 알베른은 눈물을 흩뿌리며 억울함을 호소했다.

“모든 게 스승님 때문입니다.”

클라베르의 발걸음이 우뚝 멈췄다. 그리고 곧 물었는데, 그 목소리는 여전히 차가웠다.

“왜 나 때문이냐?”

원통한 심정을 금치 못하고 알베른은 따지듯이 말했다.

“절 왜 주웠습니까? 그냥 얼어 죽게 놔두었으면 이렇게 힘든 시련은 없었을 겁니다.”

분명히 그건 클라베르의 책임이 맞았다. 하지만 당시에는 도저히 굶주리고 추위에 떨고 있던 알베른을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그 책임을 통감했기 때문인지 클라베르는 그가 깨우칠 만한 말을 해주었다.

“끝난 것은 없다.”

새로 시작하라는 말이었다.

그러나 늦은 말이기도 했다. 이미 심사가 꼬일 대로 꼬여 버린 알베른은 모든 탓을 그에게 돌림과 동시에 그 말을 다른 의미로 받아들였다.

“그렇지요. 아직 끝난 것은 없지요.”

그의 눈엔 광기가 어려 있었다.

스승에게 가르침을 얻을 때만 해도 허락이 있기 전까지는 일어나지 않았을 그였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잃어버린 것들의 허전함과 그간의 억울함, 그리고 악감정들이 떠오르며 그는 이미 반쯤 미친 상태였다.

뱀이라도 잡아먹을 것 같은 사악한 표정을 하고 알베른은 무례하게도 스승의 그림자를 밟았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클라베르는 그 자리에서 한 걸음도 떼질 않았다.

불현듯 클레베르의 귓전으로 스산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시는지 모르겠군요. 전 아직 끝나지 않았지만, 스승님은 곧 끝날 거라는 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알베른은 클라베르의 목을 조르기 시작했다.

그의 눈엔 울분이 가득 쌓여 당장에라도 흘러넘칠 것 같았다.

먹여 주고 길러준 은혜에 대한 고마움 따위는 결코 찾아볼 수 없었다. 당장 서운하게 대한 그가 미웠던 탓에 악감정만이 드러나 있었다.

하지만 발악을 하리라고 생각했던 클라베르는 고통으로 팔을 휘적거리는 행동조차도 하지 않았고, 그게 더 열이 받았는지 알베른은 그의 목을 조인 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

조금 후에 클라베르의 얼굴은 피가 통하지 않아 새까맣게 질렸으며, 더 후에는 육신이 축 늘어졌다.

그만 숨을 거둔 것이다.

모든 감정에서 초탈이라도 했는지 검게 죽은 얼굴엔 원망도, 억울함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것이 알베른을 더 화나게 하여 일말의 이성조차 앗아가 버렸다.

“하나 있는 제자에게 단 한 방울의 눈물도 아깝다는 거야?”

분을 이기지 못하고 씩씩거리던 알베른의 얼굴은 쓰러진 클라베르의 시신을 보며 더욱 잔인해졌다.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늙은이 같으니라고. 잘난 체하는 건 여전하군. 어디 얼마나 대단한 것이 들어 있는지 열어봐야겠어.”

품속에서 꺼낸 비수가 달빛을 받아 예리하게 빛나고 있었다.

* * *

“하하하하, 그게 정말입니까?”

“그렇다니까.”

목소리의 주인공들은 다름 아닌 로테노아와 오딘이었다.

지금 로테노아가 서 있는 이곳은 오늘 처음 들어와본 아레인의 왕성 내에 있는 연회장이었다.

다른 왕국이나 공국의 경우라면 모르겠지만, 로테노아에게 있어서는 매우 의의 있는 일이었다.

연회장에서 자신을 맞아준다는 자체가 오딘의 태도가 과거에 비할 것 없이 많이 누그러졌음을 증명해서였다.

또한 해가 갈수록 자신을 맞는 오딘의 태도는 살가워졌다.

이 모든 게 전대 현자 클라베르의 조언 덕분이었다.

지금 이 순간도 로테노아는 멀리 있을 클라베르에게 고마운 마음을 잊지 않았다.

‘만약 그때 짐이 마음을 못 잡았다면, 지금쯤 바리톤이라는 이름은 지도상에서 사라졌을 수도 있소. 이 모든 게 현자의 공이오.’

물론 몇 차례의 위기가 있었다.

이른바 오딘의 시험이었다.

슬그머니 자신들의 자존심을 건드려 떠보질 않았던가. 그 모든 굴욕을 참고 받아넘겼기에 오늘날의 좋은 관계가 유지되고 있는 것이다.

더 좋은 일이라면, 바리톤이 아레인에 바치는 공물의 양도 점차 줄어들고 있다는 점이다. 그 덕분에 바리톤 내의 반발이 심하던 귀족들의 직언도 많이 줄어들었다.

그러나 지금 오가는 얘기들은 로테노아에게는 그리 달갑지만은 않은 내용이었다.

바로 얼마 전 이곳을 다녀간 헥토르의 얘기였던 것이다.

오딘은 조르바의 보고를 통해 헥토르의 어리바리함을 폄하했다. 있는 그대로에 약간의 과장을 덧붙여서 말이다.

자기 자식을 흉보는 것을 좋아할 부모가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로테노아는 씁쓸한 기분을 접었다.

대의를 위해서라면 자그마한 희생쯤이야 괜찮다고 생각했고, 그게 헥토르여서 다행이라고 여긴 것이다.

‘이것 역시 시험이겠지. 헥토르, 이 무능한 녀석! 네놈이 유프라를 대신해 두 번을 온다 해도 난 만류하지 않겠다.’

이렇게 생각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전적으로 헥토르에 대한 실망감이 지극히 커져 버린 까닭이었다.

“그래서 말인데…….”

“예, 말씀하시지요.”

“헥토르의 횟수를 늘리면 어떨까 하는데. 아레인에 오는 횟수 말이야. 조르바의 말에 따르자면 세 왕자 중 일 왕자의 교육이 가장 힘이 든다고 하더라고. 뭐, 그때뿐이라나?”

로테노아는 잠시 얼굴이 굳었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도리어 좋은 일일지도 몰랐다.

“부인과 상의해보고 결정을 내리면 안 되겠습니까? 오해를 하실까 봐 미리 말씀드리지만, 전 찬성입니다.”

당사자가 듣는다면 펄쩍 뛸 얘기였다.

잠시나마 로테노아의 얼굴에 아쉬움이 스쳐 갔다.

‘차라리 어렸을 적 이런 교육을 했으면 좋았을 것을…….’

받아들이는 사람 나름이었다.

헥토르의 오만함은 분명 선천적인 것이지만, 후천적인 작용도 있었다.

첫 왕자라 여러 대신들이 항상 머리를 조아리며 흡사 왕세자를 대하듯 했었지 않은가.

결국 그가 안하무인으로 자란 것은 여러 대신들의 떠받듦과 이를 묵과해준 자신의 탓도 있는 셈이었다.

여러 말을 나누고 아레인을 떠나면서 로테노아는 바리톤에 있을 헥토르를 향해 속으로나마 타일렀다.

‘세상이 넓음을 깨닫고 그 오만함이 떨쳐진다면, 네 장래를 위해서라도 좋을 것이다.’

* * *

마르크는 당황을 금치 못했다.

“어어? 너, 그 머리?”

지금 그가 보는 헤르미온의 머리카락은 분명 은색이었다.

한 올씩 찰랑이는 은색의 머리칼.

너무 윤기가 나고 부드러워, 만약 머리 위에 벼룩이라도 떨어뜨린다면 미끄러져 그대로 흘러내려 버릴 것만 같았다.

“흥, 나 원래 은발인 거 몰랐어?”

원래 알고 있던 사항임에도, 마르크의 뇌리에는 오랜 시간 써온 연한 금색 가발로 인해 그녀의 머리카락이 금발이라는 인식이 자리를 잡았었다.

그녀가 그 가발을 쓰게 된 동기에는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이유가 있었다. 바로 숱하게 많은 남정네들이 뒤를 졸졸 따라다닌다는 이유, 그것이었다.

좀처럼 그녀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하다가, 시선이 아래로 내려갔을 때 마르크는 또 한 번 깜짝 놀랐다.

“치, 치마가 너무 짧은 거 아냐?”

정말 그녀가 걸친 밤색의 치마는 앞으로 한 걸음만 내디뎌도 속옷이 보일락 말락 할 정도로 아슬아슬했다.

그녀를 보고 있는 사람은 비단 마르크만이 아니었다.

인근에서 일을 하던 인부들은 걸음까지 멈추고 입을 쩍 벌린 채 그녀를 보고 있었으며, 샥이라는 고블린과 오크인 정크 역시도 일손을 멈추고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브, 블라우스는 또 그게 뭐야? 어깨와 목이 너무 깊이 파… 아악!”

채 말을 마치지도 못하고 마르크는 비명을 질렀다. 헤르미온에게 귀를 잡혔기 때문이다.

그 와중에도 마르크는 그녀의 레이스가 달린 하늘하늘한 아이보리색 블라우스에 시선을 고정시킨 채 농담을 내뱉었다.

“보, 보여…….”

그 말이 가져온 결과는 참혹했으니, 마르크는 곧장 헤르미온의 길고 하얀 다리에 걸려 나자빠졌다.

그녀는 눈에 불을 켜고 손에는 높은 구두를 든 채 앙칼지게 소리쳤다.

“오늘 한번 죽어볼래?”

의사를 묻는 것이었지만, 이미 그녀의 구두는 마르크의 온몸을 마구 짓누르고 있었다.

마르크의 입에서는 정체 모를 신음이 새어나왔다.

초반엔 기뻐하는 것도 같았지만, 뒤로 갈수록 그의 신음은 고통스러워졌고 처절해졌다.

“끄으, 이제는 안 보여. 안 보인다고…….”

눈이 퉁퉁 부었기 때문이다.

“흥.”

일말의 죄책감도 느끼지 않으며 헤르미온이 몸을 돌렸을 때, 앞에 있던 많은 사람들이 마르크의 몰골처럼 되긴 싫었는지 눈을 내리깔고 비켜섰다.

주변의 마법사들은 눈치만 보다가 그녀가 자리를 비운 사이 재빨리 마르크에게 달려와 힐링을 캐스팅했다.

몸 상태가 호전되자 마르크는 천진난만하게 웃었다.

“전혀 억울하지 않아요, 하하하.”

* * *

한 사내가 피를 뒤집어쓰고 자신의 키보다 커다란 갈대들 사이를 헤치며 필사적으로 달아나는 중이었다.

그 뒤를 4명의 남자들이 피 묻은 검을 든 채 따르고 있었다.

“절대 놓쳐서는 안 된다!”

뒤쪽의 남자들 중 한 명의 입에서 흘러나온 외침이었다.

쫓기는 남자도 보통내기는 아니었는지 좀체 거리가 좁혀지지는 않았지만, 멀어지지도 않았기에 그는 생각을 달리하게 되었다.

‘출혈이 심하다. 계속 내빼기만 한다면 저들보다 먼저 지칠 것이다.’

결정을 내리기 무섭게 그는 달리기를 그만두고 멈춰 서서는, 자신을 쫓는 네 사람을 죽일 듯이 쏘아보았다.

“네놈들, 대체 나와 무슨 원수진 일이 있다고 죽이려 하는 것이냐?”

억울함이었다.

이유도 모른 채 급습을 당해 검상을 입고 도망만 쳤다. 그들은 자신을 죽이려는 이유조차도 알려 주지 않았으므로.

“죽더라도 그 전에 이유나 알고 죽어야겠다.”

“알고 죽는다면 억울함이 풀어진다더냐?”

뒤를 쫓던 남자들은 그가 멈춰 섰다는 것에 반색하면서도 여유를 부리지는 않았다. 그의 허리춤에도 검갑이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네 남자들은 두 패로 갈렸다.

당장 저자를 제압해야겠다는 부류와 조금 더 시간을 끌어 그를 지치게 만든 다음 손쉽게 제압하겠다는 부류로.

그와 대화를 섞은 남자는 그중 후자에 속했다.

당연히 얼굴까지 피를 흠뻑 뒤집어쓴 도망자는 그에게 시선을 고정시킨 채 계속하여 물었다.

“알려 주지 않겠다면 쉽게 죽지는 않겠다.”

충고인 동시에 협박이었다. 정말 그 목소리에는 은은한 살기가 담겨 있었다.

하지만 그를 쫓던 네 남자는 그 말을 전혀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길게 끌 것 없이 내가 처리하지.”

한 남자가 그렇게 말을 하며 성큼 앞으로 걸어 나왔다.

그러나 그가 다가올 때까지 쫓기던 남자는 허리춤에 있는 검을 빼지 않았다.

이 순간을 놓쳐서는 안 될 것 같았는지 우두커니 서 있는 남자에게 사내가 파고드는 속도가 급작스레 빨라졌다.

마침내 거리가 좁혀져 지근거리에 다다른 사내의 손에 쥔 검이 사선으로 그어지려 할 때, 쫓기던 남자에게서 미약한 움직임이 있었다.

눈으로 포착하기 힘들 정도로 빠른 속도의 발검이었다.

시간이 정지한 것 같았다.

단 한 번의 발검으로, 쫓기던 남자의 몸을 두 동강이라도 내버릴 것만 같던 사내의 움직임이 멎어 있었다.

사내의 갈라진 뱃가죽에서 붉은 피가 흘러내려 마른땅을 적셨다.

그는 쓰러지면서도 억울해했다.

“끄, 실력을 숨기고 있었다니…….”

털썩!

그 말이 끝이었다.

치명상을 입었는지 그는 바들바들 떨다가 이내 숨을 거두고 말았다.

자연히 세 사내들의 경각심이 곤두섰다.

방금 죽은 동료처럼 남자를 어서 제압해야겠다는 생각을 품었던 사내 역시 한발 물러선 입장을 보였다.

“보통 인물은 아니로군. 정체가 뭐냐?”

딱히 정체랄 건 없었다.

그의 신분은 한 왕국, 아니 공국의 백작일 뿐이었으므로.

리먼, 그는 자신이 왜 이런 일을 당하는 것인지 이해가 가질 않았다.

피가 묻은 검끝을 그들에게 향하고는, 리먼 백작은 위협적인 말투로 물었다.

“그 전에 너희들이 말해라. 너희들의 정체가 무엇이며 왜 나를 쫓는 것인지를…….”

하지만 세 사내들은 서로의 눈치만 살필 뿐, 입을 굳게 닫고 있었다.

리먼은 검상을 입어 쓰라린 상처에 인상을 찌푸리면서도 한 걸음씩 앞으로 내디디며 분명히 말했다.

“설마 셋이서 상처 입은 나를 어쩌지 못해 도망치는 것은 아니겠지?”

저들의 자존심을 건드린 것이다. 도망치는 것만은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저들이 죽든 자신이 죽든 간에 머릿속에 가득 찬 궁금증을 풀고 싶어졌다. 이에는 왜 자신이 표적이 되는 것인지에 대한 억울함도 일조했다.

과연 저들은 대응할 태세를 보였다.

그 와중에 세 사내 중에서 한 사내가 농담을 던졌다.

“이유를 알려 준다면 곱게 죽겠나?”

리먼은 그에 조소를 흘렸다.

“원래는 그럴 생각이었지. 하지만 이제는 생각이 바뀌었다. 방금 전 쓰러진 녀석을 보니 네 녀석들이 별거 아니란 느낌이 드는군. 차라리 내가 네놈들 중 한 녀석을 붙잡아 고문하는 편이 낫겠어.”

말을 하는 동안에도 리먼은 걸음을 멈추지 않았으므로 어느새 세 사내 앞에 바짝 다가서 있었다.

세 사내는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당장에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에 당황할 리먼이 아니었다.

그의 눈엔 저들이 검을 휘두르는 속도가 그리 빠르지도 않을뿐더러, 검의 궤적 또한 뻔히 다 드러나 보였기 때문이다.

‘풋내기들이었어. 괜히 도망을 쳤군.’

리먼은 침착하게 대응했다.

머리 위로 스쳐 오는 검은 뒤로 몸을 젖혀 피했으며, 허리 아래로 파고드는 검은 자신의 검으로 쳐내었다.

소드익스퍼트 상급이란 경지는 거저 얻어진 것이 아니었다. 어렸을 때부터 피나는 노력을 거듭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들의 실력이 자신의 발아래 있음을 깨닫게 되자 리먼의 검에도 살기가 실렸다.

카캉! 캉!

슈욱!

내리 두 번을 저들의 검을 쳐낸 후에도 리먼의 검은 집요하게 날아들어 기어코 한 사내의 목줄기를 찢어놓았다.

붉은 피는 곧 세찬 물줄기처럼 터져 나왔다.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고꾸라지는 사내를 보며 나머지 2명의 사내들은 더 크게 눈을 치켜떴다.

그 순간에도 리먼의 검은 뱀처럼 파고들어 다른 한 사내의 허벅지를 긁었다.

촤악!

“끄아!”

살이 찢기는 소리와 함께 소름 끼치는 비명 소리가 울리며, 사내의 찢긴 허벅지에선 피가 봇물처럼 쏟아져 나왔다.

이제 멀쩡한 사내는 단 하나였다. 리먼을 쫓던 자들은 졸지에 난관에 봉착한 것이다.

리먼은 허벅지를 부여잡으며 뒤로 물러서려는 사내를 발로 걷어차서 쓰러뜨린 뒤, 승산이 없음을 깨닫고 당장에 몸을 돌려 이곳을 벗어나기 시작하는 사내를 쫓았다.

리먼의 상태 역시 그리 좋지는 못했다. 여기까지 도망치는 동안 피를 많이 흘려서인지 머리가 어질어질했던 것이다.

그래도 포기할 순 없었다. 만약이라는 것이 있기에.

만약 저자가 이곳을 빠져나가 다른 패거리들을 불러온다면, 자신은 얼마 못 가 붙잡힐 가능성이 농후했다.

또한 다시 올 때에는 지금처럼 약한 자들만 오리라는 법도 없었다.

근방의 마법진을 이용할 돈 정도는 얼마든지 들고 왔지만, 거기까지의 거리가 결코 가깝지 않았다.

여러모로 후환은 만들지 않는 것이 좋았다.

추격전의 승리자는 리먼이었다.

그에게 운이 따랐는지 도망치던 사내가 바닥에 쓰러지면서 뒤엉킨 갈대들에 발이 걸려 그만 엎어지고 만 것이다.

리먼은 검끝을 비죽이 내밀어 쓰러진 사내의 목줄기에 가져다댔다.

“말해라. 왜 날 쫓는 것인지…….”

사내의 눈은 분명 겁에 질려 있었지만, 어쩐지 말하기를 주저하고 있었다.

“아까운 시간을 허비할 생각은 없다. 꼭 네놈이 아니라도 아직 살아 있는 녀석이 있으니…….”

허벅지에 자상을 입은 사내를 일컫는 말이었다.

사내의 입이 열리는 모습에 리먼의 얼굴이 기대에 물들 무렵이었다.

퍼억!

갑자기 잔인한 소음이 들려왔다.

리먼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그 소음이 마치 자신의 몸을 꿰뚫고 지나간 것 같은 느낌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를 입증이라도 해주려는 듯 가슴이 욱신거렸다.

리먼의 시선이 고통을 호소하는 자신의 가슴을 보았다.

거기엔 손가락 2개만 한 크기의 구멍이 뚫려 있었고, 그곳에서 꾸역꾸역 피가 새어나오는 중이었다.

몸이 무너지는 순간에도 리먼의 흐릿해져 가는 시야를, 신성 제국의 문양이 새겨진 갑주를 착용한 남자가 검을 들고 다가오는 모습이 어지럽히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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