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리톤 왕자의 실체
헥토르의 인상은 심하게 구겨져 있었다. 마음이 편치 않았기 때문이다.
단 7일이라고는 하지만, 그 7일은 무척이나 고되어서 1년보다 지루하게 느껴지는 시간이다.
2년에 걸쳐 이미 두 번을 겪어보아 알 수 있는 일이었다.
그는 아레인이 자신들에게 이런 요구를 한 것은 굴욕을 주기 위함이라 생각했다.
처음 로테노아로부터 그 같은 결정을 통보받았을 때, 헥토르는 분하고 억울해서 눈시울을 붉혔다.
그러나 왕명이 떨어진 이상 자신이 왈가불가할 수도 없는 문제이니 참으로 난처했다.
‘내가 아바마마의 자리를 대신했다면 사생결단을 내었을 것이다.’
이 왕자 유프라와 삼 왕자 팔테스와는 다르게 헥토르는 아직도 재기를 꿈꾸고 있었다.
물론 그라고 해도 당장에 닥친 두려움과 공포 앞에 태연할 수는 없었다.
이상하게 아레인 왕성에만 들어서면 오한이 들고 소름이 끼쳤다. 정확히 작년부터였다.
비단, 가서 받게 될 고통을 두려워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것은 사람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마기들이 커지는 까닭이었다.
헥토르는 이와 같은 현상을 전연 알지 못했다.
“어쩐지 재수가 없는 왕국이야. 아바마마께서 조금의 희생을 치르고 약간 무리를 하셨더라도 아레인을 발아래 꿇리셨어야 했다.”
동행하는 무리들은 그에 대해 일절 언급을 하지 않았다. 그의 개차반 같은 성격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어서다.
왜 일전에 아레인을 넘보지 못할 벽이라고 말한 기사를 흠씬 두들겨 패 실려 가게 만들었지 않았던가.
게다가 근래 들어서는 평판이 좋질 못한 일 왕자에게 슬며시 등을 돌리는 귀족 또한 늘어났다.
당사자인 헥토르가 이를 모를 리가 없었다.
“흥, 미래라곤 보지 못하는 작자들 같으니… 장차 왕위를 물려받을 내게서 돌아서다니, 후에 땅을 치고 후회할 것이야.”
그의 고집스러운 입매에서는 불평불만이 끊이지 않고 흘러나왔고, 자연히 요새 들어 잔뜩 겁을 상실한 두 동생에 대한 미움도 드러나며 입술이 씰룩거리고 눈매가 가늘어졌다.
“팔테스 그 자식이 감히 내게 대들어? 요새 많이 컸어. 어릴 때는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매달려 울던 녀석이. 내, 돌아가면 여기서 당한 분풀이까지 함께 해주리라.”
당장은 팔테스에 대한 분이 더 치밀었다. 그러나 유프라도 고운 시선으로 받아들여지진 않았다.
“이상하단 말이야. 근래 아바마마가 그 녀석을 보는 시선이 예전 같질 않아. 꼭 유프라만 편애하시는 것 같단 느낌이 들어. 여봐라, 너희들이 보기에도 그렇지 않느냐?”
누군가를 딱히 지정해 묻는 것은 아니었기에, 그에게 배정된 기사들 중 한 명이 동료들의 눈치만 살피다가 그들을 대신해 입을 열었다.
“그, 그런 것도 같사옵니다.”
마땅한 대답을 해주었음에도 헥토르는 소리를 버럭 질렀다.
“그런 것도 같다니, 그런 것이냐? 아닌 것이냐? 똑바로 말하여라!”
그러자 기사는 황급히 고개를 숙이며 당장에 말을 고쳤다.
“소신이 보기에는 그랬습니다.”
다른 녀석이 보기에도 그렇다고 하자 헥토르의 속은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열이 받아 얼굴까지 빨개졌지 않은가.
‘그 녀석의 약점을 잡았을 때 일러드렸어야 했거늘, 이제는 써먹지도 못하게 생겼구나.’
이미 아레인에 패함을 인정하고 그들의 뜻에 따르고 있었기에, 과거에 그러한 일이 있었다고 말해본들 로테노아는 별로 대수롭게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었다. 오히려 자칫 잘못하면 동생을 감싸주지는 못할망정 그런 일을 고자질했다고 자신이 책망을 들을지도 모른다.
또한 이제 아레인의 여왕을 가슴속에 담아두고 있는 사람은 세 왕자 모두가 아닌가.
그렇게 썩 기분이 좋지 못할 때 헥토르는 누군가의 시선이 느껴졌고, 그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나귀를 탄 엘프 여인이 자신을 빤히 쳐다보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러자 찌그러졌어야 할 인상이 그녀를 보는 순간만은 저절로 펴졌다. 그 엘프 여인이 꽤나 아름다웠기 때문이다.
기분이 나쁜 건 그 여인이 아니라 주위의 남정네들이었는데, 이유가 있다면 그녀와 같이 있다는 점과 그들 역시 자신을 멀거니 쳐다보기 시작했다는 점이었다.
헥토르가 명했다.
“누가 가서 저들이 어디로 가는지 알아보고 와라.”
곧 기사가 말을 달려 그들과의 거리를 좁혔고, 손짓을 해가며 말을 섞더니 이쪽으로 돌아왔다.
“저들 역시 아레인 왕성에 가는 중이라고 합니다.”
“그래? 그거 잘되었군.”
헥토르가 그들 쪽으로 말 머리를 돌리자 그의 호위를 담당한 이들 역시 뒤따랐다.
그리고 그들 앞에 서서 하등 기죽을 것 없다는 듯 헥토르는 호기 있게 말을 꺼내었다.
“보아하니 같은 길을 가는 처지인 듯한데, 동행이나 합시다.”
세 사람이 한 청년과 엘프 여인의 표정을 살피더니 어렵지 않게 승낙했다.
“그럽시다.”
일행들을 스치듯 쳐다보던 헥토르의 시선이 엘프 여인에게는 꽤 오래 머물렀다. 그러다 그는 고개를 돌려 앞을 바라보며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그래, 아레인에는 무슨 일로 가시는 거요?”
그중 구릿빛의 피부를 지닌 청년이 말했다.
“우린 상인입니다. 아레인 왕성에 볼일이 있습니다.”
고개도 돌리지 않고 계속 앞만 주시한 채 헥토르는 거만한 낯빛으로 중얼거렸다.
“내 짐작하고 있었지.”
말을 꺼낸 마르크의 입이 무안해졌다.
반면에 헤르미온은 단 한마디도 꺼내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지금 마르크의 귀에다 대고 속삭이는 말에서 알 수 있었다.
“저 사람 뭐야? 기분 나빠.”
“왜?”
“쳐다보는 것부터 그래. 지금도 보라고. 자꾸 날 이상한 눈빛으로 쳐다보잖아.”
“에이, 착각이겠지.”
“표정이 그렇잖아. 음흉한 생각을 하면 저 사람처럼 얼굴에 금방 드러난다고.”
과연 헥토르는 그 같은 생각 중이었다.
‘살아오며 많은 엘프를 본 것은 아니지만, 그중 제일 낫군. 도도해 보이는 것이 밤을 같이 보내기에는 딱이겠어. 품어보면 좋으련만…….’
돌연 헥토르는 말 머리를 틀어 두 사람 사이로 파고들었다. 그러더니 마르크에게는 겸연쩍은지 멋쩍게 한 번 웃고는, 고개를 돌려 헤르미온에게 나름 자상한 얼굴 표정을 지어 보였다.
“보기에 내가 뭐 하는 사람 같소?”
급작스레 묻는 질문에 헤르미온은 대답하기를 주저했다.
‘전혀 궁금하지 않은데, 이런 말을 꺼내는 의도가 뭘까?’
대답이 늦어진 것에 헥토르는 화를 내지 않았다. 자고로 미인에게는 너그러워야 하는 법이라지 않은가.
그는 여전히 자상한 표정으로 수하들에게 일렀다.
“너희들이 얘기해주어라.”
“이분은 바리톤의 일 왕자 전하십니다.”
기사 중 한 명이 하는 얘기에 헤르미온과 마르크 일행은 잠시 표정이 변했다. 왕자라는 신분이 놀랍긴 했던 것이다.
이들은 바리톤과 아레인의 관계에 대해서는 일절 듣질 못한 상태였다.
아레인 왕성의 사람들이 알려 주지 않았던 탓도 있지만, 여태까지 그저 거래처라고만 생각했기 때문에 아레인에 그다지 관심을 갖지 않아서였다.
놀라는 그녀의 표정을 지켜보다 헥토르는 투박한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헥토르라 하오.”
그러나 들려오는 것은 단호한 거절이었다.
“아무하고나 손을 잡지는 않아요.”
무안하지 않다면 거짓말이리라.
수하들 앞에서 무시를 당해 잠시 얼굴이 붉어졌지만, 헥토르는 이내 마음을 가라앉혔다.
여자는 튕길 줄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그다. 아니, 조금 많이 튕겨야 정복하는 맛이 있다고 여겨 왔다.
‘볼수록 매력이 있군. 흐흐, 이년을 어떻게 다스린다? 천 릿길도 한 걸음부터라고 했으니 천천히 생각해봐야겠구나.’
그의 주위에도 여자는 많았다.
그러나 헥토르가 아는 여인들은 죄다 부와 권력을 노리는 것들이었다. 자신의 부인을 포함해서 말이다.
물론 그것은 그가 자초한 일이었다. 자신의 부와 권력을 빌미로 여성의 마음을 사로잡았으니, 그녀들이 그것을 노리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하지만 헤르미온은 아니었다.
그녀는 바리톤의 왕자라는 신분에서 뭔가를 얻으려는 생각은 눈곱만치도 없었으므로.
당사자인 헤르미온은 마음에도 없는데 헥토르의 그녀를 향한 집착은 점점 커져 가고 있었다.
* * *
“미리 연락이라도 주고 오시지 그러셨습니까? 오딘 님께서는 연공 중이시라고 하오니, 오후쯤이나 되셔야 나오실 겁니다.”
잘못이 있다면 사전에 통보도 하지 않고 찾아온 마르크의 탓이었다.
집사의 말을 마르크는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였지만, 헤르미온은 맥이 빠지는지 어깨가 축 처졌다.
“오후면 아직 멀었는데…….”
불만을 토로하면서도 그녀는 아레인 왕성 내에 위치한 별궁 안을 신기한 눈으로 둘러보는 중이었는데, 내부의 분위기가 매우 독특했기 때문이다.
“뒤뜰을 둘러보시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그곳에서 산책이라도 하시면서 잠시 쉬었다가 점심을 드시는 게…….”
“그럴게요.”
퉁명스러운 대답. 의외롭게도 헤르미온에게서 나온 말이었다.
오는 내내 그녀는 아레인 왕성만의 독특한 분위기에 심취되어, 그렇잖아도 주변을 둘러보길 내심 바라고 있었다.
제일 까탈진 헤르미온이 승낙하자 마르크와 틴을 포함한 나머지들은 자연 군말이 없었다. 어디를 갈 때마다 제일 문제가 됐던 것은 헤르미온이므로.
집사는 그들에게 시종까지 붙여 주며 뒤뜰로 안내하게 했다.
내색은 안 했지만, 헤르미온의 표정에 기뻐하는 기색이 약간이나마 드러나자 그를 본 마르크가 조롱했다.
“웬일이냐? 들떠 있기까지 하네?”
그러자 헤르미온은 눈에 쌍심지를 켜고서 화를 벌컥 냈다.
“들떠 있긴 누가 들떠 있다고!”
하지만 마르크에게서 고개를 돌린 그녀의 시선이 다시 뒤뜰의 정경에 가닿자, 저도 모르게 정겨운 미소가 얼굴에 드리워졌다.
“에이, 좋아하고 있는 표정인데.”
딱!
“악!”
헤르미온이 머리통을 휘갈긴 것에 마르크가 머리를 감싸 쥐고 소리친 것은 조건반사와도 같았다.
꽤나 아파하는 그에게 조금의 동정도 주지 않고서 헤르미온은 나지막이 경고했다.
“또 까불었단 봐라.”
마르크는 입술을 비죽거리며 웃더니 더 이상 그녀에게 참견하지 않았다.
그녀의 고향인 엘프들의 숲만큼 넓지는 않았지만, 아름다움만은 그곳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었다.
아니, 어쩌면 그곳에서 모자랐던 점까지 채워주며 그녀의 마음을 더욱 흡족하게 만들어주고 있었다.
가는 곳마다 그녀는 발길을 멈췄다.
색이 예쁜 물고기들이 헤엄치고 커다란 연꽃이 둥둥 떠 있는 연못에서 그러했고, 숲의 향기가 물씬 풍기는 수목들 사이에서 그러했다. 또한 오딘이 살던 중원의 동양적 정서가 깃든 운치 있는 가옥들에서도 그러했다.
마르크는 그녀의 풋풋한 미소를 정말 오랜만에 본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한창 경치 감상에 빠져 있을 때, 불현듯 틴이 지그시 감았던 눈을 번쩍 떴다. 한 대상 때문이었다.
꼬집어 말하자면 검갑을 들고 다가오고 있는 대상에게서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껴서였다.
그는 곧장 이곳을 향해 다가오더니, 시종에게 가벼운 눈인사를 건네고 스쳐 지나가버렸다.
얼마나 긴장하고 있었던지 틴이 잡은 검갑에서는 땀이 묻어날 정도였다.
그때, 그의 표정이 이상하다는 걸 눈치 챈 마르크가 물었다.
“틴 님, 왜 그러시는지요?”
“아, 아니야. 예민해진 신경 탓인가?”
그리 답하고 틴은 조금 전의 기분을 상기해보았지만, 착각이 아닌 듯했다.
그는 스쳐 지나간 대상에게서 무시 못 할 이질적인 기운, 즉 마기를 느꼈던 것이다.
이를테면 직업병으로, 오랜 동안 상단 내의 호위를 맡고 있는 그였기에 위협이 될 만한 기운에 몸이 먼저 반응하는 셈이다.
‘근위 기사쯤 되려나? 질릴 정도군. 아레인에 저런 인물이 있을 줄은 몰랐어.’
검을 마주친 것도 아니고 잠시 스친 것뿐이지만, 틴은 상대의 실력을 대략이나마 가늠할 수 있었다. 그처럼 마나를 느끼고 활용할 줄 아는 자들이라면 상대의 실력에 대해 유추가 가능했다.
이스론 상단 내에서도 틴은 꽤나 중책을 역임하고 있었는데, 바로 상단의 호위대 부대장이라는 직책이다.
그런 그가 이 여정에 동행하게 된 이유는 중요한 인물 둘이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 둘이란 바로 마르크와 헤르미온였다.
과거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호위대에 지원을 해온 무사들은 수도 없이 많았다.
그중에서 쓸 만한 이를 추려 내는 것 역시 틴의 일 중 하나였는데, 여태껏 그는 방금 지나간 자와 같은 실력자를 만나본 적이 없었다.
그것은 아레인과 비슷한 군소 왕국이나 공국들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물론 상단이 아직 발을 뻗지 못하는 제국이라면 얘기가 달라질 수도 있었지만.
그러다 보니 자연 한숨이 나왔다.
‘휴, 나도 우물 안 개구리야. 언제고 지금보다 더 위험한 임무가 내려질 수도 있는데. 큰일이로군. 그렇다고 믿고 쓸 사람도 없으니…….’
힘을 원하는 것은 비단 왕국만이 아니었다. 이스론을 포함한 여러 상단 역시도 힘을 원했다.
발길만 닿는다면 무역이 행해진다고는 하지만, 어디까지나 모든 위협에서 자유로울 때의 얘기였다.
상단주가 고민하는 일을 그 역시 동일하게 고민하는 것이다.
마르크는 힐끔힐끔 틴을 엿보았다. 고뇌에 찬 그를 접한 기억이 없던 나머지 생소하게 받아들여져서이다.
반면에 헤르미온은 세상 시름이 모두 씻겨 나간 듯, 만면에 어린아이와 같은 천진난만한 표정을 그리고 있었다.
식사 시간이 다 되었을 때, 틴의 표정은 사색이 되어 있었다. 그가 마주친 4명의 사람들이 하나같이 괴물들이었기 때문이다.
그중 독보적인 존재는 마지막에 마주친 남자, 바로 붉은 눈썹의 보탄이라는 백작이었다.
그 앞에서 틴은 형언할 수 없는 위압감과 거대한 존재감에 억눌려 감히 숨도 못 쉴 지경이었다.
“원래는 붉은 눈썹이 아니셨습니다. 한 일 년 전쯤부터 저렇게 되셨지요.”
식사 장소로 마르크 일행을 안내하며 시종이 하는 말이었다.
그는 최대한 이들에게 친근함을 내보여야 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오딘의 손님이 아닌가.
헤르미온이 정경을 감상할 때도 시종은 오딘이라는 이름을 자주 거론했었다. 그가 원해 바꾼 것이라는 설명까지 덧붙여서 말이다.
그러자 헤르미온 역시 오딘이라는 사람이 만나보고 싶어졌다. 그의 취향이 마음에 쏙 들었기 때문이다.
식사는 별궁 내에서 하게 되었다.
그들이 자리한 식탁에는 매우 이색적인 요리들이 차려졌는데, 아레인을 찾은 다섯 사람 모두가 평생 맛보지 못한 음식들이었다.
쇠고기로 육수를 우려 낸 탕의 국물도 끝내줬지만, 조린 쇠고기를 얇게 썰어낸 음식이 일품이었다.
“이건 이름이 뭐죠?”
마르크의 질문에 시종은 곁에 선 채 원하는 답을 내주었다.
“오향장우육이라 합니다. 다섯 가지 향이 그윽하다 하여 그리 이름이 붙여졌다는군요. 이 요리는 그분도 즐겨 드신답니다. 하지만 아직 저희 조리사가 미숙하여 그분이 떠올리시는 맛을 내드리지 못하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모를 소리들이었지만, 마르크는 그에 대해 재차 질문을 하지 않았다. 혀에 닿는 즉시 사르르 녹는, 감칠맛 나는 고기가 몇 점 없어 얼른 집어야 했기에.
차려진 요리 전부가 그들의 마음에 들었다면 거짓말이리라.
하지만 못 먹어본 음식, 생소한 음식들의 경우는 죄다 포크가 오갔고, 음식을 맛본 5개의 혀들은 저마다 감탄을 머금었다.
식탁이 마치 전쟁터를 방불케 했기에 시종은 웃으며 그들을 만류시켰다.
“음식은 더 있습니다. 마음껏 드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보통 때의 3배나 많은 양을 후다닥 먹어치운 일행은 모처럼 포만감을 느낄 수 있었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말린 고기에 빵 조각, 우유 등으로 끼니를 해결했으니 그럴 만도 했다.
식사를 마친 다섯 사람은 헤르미온의 고집에 의해 다시 별궁 밖으로 나서야만 했다.
자고로 배가 부르고 등이 따스하면 잠이 오기 마련이어서 그녀를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은 조금 쉬기를 원했지만, 그녀는 아니었다.
“아직 못 본 것들이 많다고, 그렇죠?”
시종에게 닦달하듯 물어 그렇다는 대답을 얻어낸 그녀는, 결국 네 사람마저 별궁 밖으로 끌어냈다.
신이 나 있는 그녀를 두고 마르크는 나무 그늘에 몸을 기대려 했다.
그때, 인근에서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쉴 수 있다는 것에 만족할 줄 알아야 하고, 평온하다는 것에 기뻐할 줄 알아야 하며, 또한 잘 수 있다는 것에 행복할 줄 알아야 한다. 무릇 지금의 처지에 감사해야 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젊은 남자에게 중년의 사내가 하는 설교 소리였다.
설교를 듣는 젊은 남자는 두 팔로 몸을 지탱한 채 엎드려뻗쳤다가 일어나 곧은 자세를 하였다가를 반복하는 중이었는데, 그가 입은 후줄근한 옷은 반복되는 동작으로 인해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오래 반복될수록 그의 동작은 점점 굼떠졌다.
헤르미온과 마르크, 그리고 틴은 그 젊은 남자가 누구인지 대번에 알아차렸다.
바로 이 왕성에 오기 전 동행했던 헥토르라는 남자였다.
자동적으로 헤르미온의 입술에서 싫은 소리가 튀어나왔다.
“뭐 저딴 사람이 다 있지? 대단한 듯 행세하더니, 순 허풍쟁이 같으니라고.”
그녀와는 다르게 마르크는 자신을 바리톤의 일 왕자라고 소개했던 헥토르에게 저런 고난을 안겨 주는 중년 남자의 정체가 궁금해졌다.
“저분은 누구십니까?”
“조르바 님이라고 합니다.”
시종은 구태여 추가 설명은 하지 않았다.
과거에 그가 자작의 작위를 가진 귀족이었고, 어떤 이유로 몰락해 하인들에게도 푸대접을 당하며 허드렛일이나 하게 됐었는지를.
눈치 빠른 마르크 역시 그에 대해 더 이상 묻지는 않았지만, 그 때문에 궁금증만 더욱더 증폭되었다.
‘오딘이라는 분도 그렇고, 조르바라는 저 사람도 그렇고 아레인 왕성엔 왜 작위가 없는 사람들이 있는 거지?’
기사라 하더라도 경이라는 호칭이 붙는데, 두 사람은 그렇지 않았다.
이미 마르크는 이곳에 오기 전 오딘에 대한 궁금증이 치밀어 주위 사람들에게 물어본 적이 있었고, 그 결과 그가 상당히 높은 사람일 것이라는 추측을 할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이스론 상단에 손을 잡자고 제안한 것은 그가 아닌가. 그것이 아레인의 왕이 되는 자의 결정이었다 할지라도 그 말을 대신할 사람은 낮지 않은 신분이어야 한다.
그럼에도 호칭이 존재하지 않다는 것은 여전한 의문점으로 자리하였다.
풀 수 없는 궁금증들이 쌓이면 때론 스트레스로 변하게 된다. 그래서인지 마르크는 대놓고 시종에게 묻고 말았다.
“그럼 오딘 님은 왕성 내에서 어떤 작위를 가지고 계시는지요?”
그러자 시종의 입에서는 놀라운 대답이 튀어나왔다.
“아직은 없으십니다.”
“없다니요? 전 꽤 높으신 분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시종은 빙긋이 웃더니 알 수 없는 말을 늘어놓았다.
“아직 원치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그 바람에 마르크는 또다시 의문투성이의 얼굴이 되었다.
‘이건 또 무슨 말이지? 원치 않는다니? 그럼 당사자가 원한다면 지금이라도 작위를 얻을 수 있다는 건가?’
아직 마르크는 오딘에 대해 모르는 게 너무도 많았다.
거래를 하게 되면 어차피 알게 될 일이라고 생각하고 시선을 돌리는데, 멀찌감치 이상한 구조물들이 그의 시야에 들어왔다.
헥토르는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마르크가 보고 있는 구조물 중 한 곳으로 이동하고 있었고, 반면에 같은 구조물을 보는 조르바의 표정은 뿌듯해 보이기까지 했다.
물구덩이를 사이에 두고 길고 커다란 통나무가 좌우에 박혀 있는 구조물이었다.
맨 위로는 마찬가지로 통나무를 세워두었는데, 가장 위쪽에는 두 줄의 긴 동아줄이 매여 있었다.
동아줄에는 사람의 몸뚱이가 겨우 들어갈 만한 통나무 하나가 걸려 있었는데, 조르바는 그것을 헥토르에게 가져다주었다.
헥토르는 겁에 질린 얼굴이었다.
그럴 만도 한 것이 그 아래의 구덩이에는 사람 몸뚱이 반만 한 뱀장어들이 돌아다니는 중이었기 때문이다.
그에게 등이 떠밀려 헥토르는 나무받침에 몸을 제대로 실어보지도 못하고 물웅덩이로 곤두박질쳤다.
“아푸, 아푸…….”
허우적거리는 헥토르.
원래 물이라면 질색하는 그다.
수영은 둘째 치고 뱀장어들이 헤엄치고 있는 곳에 빠졌으니 기분이 유쾌할 리가 없었다.
뱀장어들이 그의 몸을 스치고 지나가자 미끄러운 점액들이 몸에 닿았다.
헥토르는 소름이 끼쳐 입에 거품을 물기 직전이었지만, 살아야 한다는 일념하에 의식의 끈을 놓지 않았다.
“구, 구해주십시오! 전 수영을 못합니다!”
간절한 외침에도 불구하고 조르바의 눈에선 조금의 자비도 찾아볼 수 없었다.
“못하면 그냥 죽든가…….”
이 조형물은 조르바가 기발한 발상으로 만들어낸 것들이었는데, 일단 자신이 맡은 일에서는 최선을 다하겠다는 의지가 작용된 결과적 산물이기도 했다.
또한 오딘 역시 창의적인 면이 돋보인다며 이를 좋게 평가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행위는 조르바에게는 대단한 일일 법도 했다. 바리톤의 왕자들을 교육시키는 일이니 어찌 뿌듯하지 아니할까.
게다가 크게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착안한 바를 양피지에 그리기만 하면 인부들이 팔을 걷어붙이고 일을 거들어주었으므로.
그렇게 해가 갈수록 조형물들은 늘어나기 시작했고, 작년엔 3개에 불과하던 것이 올해는 10개에 이르렀다.
헤르미온이 멸시하는 듯한 눈초리로 헥토르를 보고 있던 것과는 다르게 마르크는 정색한 얼굴로 의구심을 드러냈다.
“아레인과 바리톤은 이웃이라고 들었는데, 이해할 수가 없군. 어째서 아레인이 바리톤의 왕자를…….”
“바보, 그 말을 믿는 거야? 딱 보면 모르겠어? 저 사람의 말이 거짓이야. 바리톤의 왕자도 아니었을 거야. 흥, 거짓말쟁이들은 입을 꿰매야 하는데… 그냥 확 물에 빠져 죽어버려라!”
수작을 걸었기로서니 너무한 말이었다.
그러나 마르크는 방긋이 웃을 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편을 들어줘봐야 그녀로부터 좋은 소리를 못 들을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때, 곁에 있던 시종이 끼어들었다.
“저자는 바리톤의 왕자가 맞습니다. 일 왕자 헥토르라고 하지요.”
“예에? 정말입니까?”
마르크는 꽤나 놀랐다. 그의 지위에 대한 놀라움이라기보다는, 바리톤의 왕자가 왜 아레인에 와서 저 짓을 하고 있느냐에 대한 놀라움이었다.
헤르미온 역시 푸른 바다 같은 눈망울에 적잖은 의문을 담고 있었다.
실례가 될 수도 있는 말이었지만, 마르크는 자신의 궁금증을 드러내고 말았다.
“바리톤의 왕자가 왜 아레인에서…….”
시종은 거리낄 것 없다는 듯 입을 열어 그간의 사정을 말해주었다.
바리톤 왕국이 아레인을 침공한 것부터, 패배를 인정하게 된 이유와 저들이 아레인의 속국이 되었다는 것까지…….
그러나 파견을 나온 사람들은 시종의 얘기를 다 듣고 난 후에도 의아함을 감추지 못했다.
여러 곡물을 발데르 공작의 그라니트성에 들여올 때부터 그들은 내심 불안했던 게 사실이었다. 그들 역시 아레인이 내전을 치르는 중이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으니까.
때문에 잔고를 남기는 한도를 최소로 잡질 않았던가. 혹 발데르 공작이 몰락하게 된다면 돈을 떼어먹힐까 염려되어서였다.
그런데 뜻밖의 반전으로 그들이 오히려 왕국을 되찾았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에도 긴가민가했는데, 이제는 이웃 왕국까지 무릎을 꿇렸다고 한다.
쉽게 믿을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시종은 중요한 내용들은 쏙 빼놓고 과정과 결과만 요약해서 말했기에 마르크 일행은 더한 의구심만 품게 되었다.
기왕 아레인과 거래하기로 마음을 먹고 이곳에 온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아레인의 전반적인 사항에 대하여 알아둘 필요성이 있었다.
치밀어 오르는 의문이 다시 마르크의 입 밖으로 흘러나왔다.
“그렇다면 외세의 힘을 빌렸겠군요.”
“그렇진 않습니다.”
납득할 수 없는 얘기들만 계속하여 듣게 되니, 마르크는 답답할 뿐이었다.
간단히 생각을 해보아도 알 수 있는 일이었다.
바리톤과 아레인은 오래 전쟁을 치르지 않았다고 했으니 둘의 힘은 대등하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상한 점은, 아레인은 그 전에 이미 두 번의 내전을 치렀다고 전해 들었으니 힘이 많이 약화된 상태였을 것이고, 그때 바리톤이 쳐들어온 것인데 어째서 아레인이 승기를 거머쥘 수 있었느냐다.
때문에 마르크는 좀 더 자세히 묻기 시작했다.
“어째서입니까? 아레인이 어떻게 외부의 힘을 끌어들이지 않고 바리톤을 누르게 되었는지요?”
“모두 다 오딘 님의 은공 덕분입니다.”
더더욱 이해할 수 없는 말.
더 말를 섞다가는 머리가 이상해질 것 같았기에 마르크는 거기서 얘기를 그만두기로 했다.
대신, 그는 직접 오딘을 거론하며 물었다.
“저어, 그러면 오딘이라는 그분은 아레인에서 어떤 중책을 맞고 계시는지요?”
공교롭게도 그 대답은 들을 수 없었다. 묻고 있는 대상이 직접 모습을 드러내며 시종이 허리를 굽혔기 때문이다.
“와주었군.”
편한 미소로 마르크를 대하는 오딘.
그의 뒤에는 범상치 않아 보이는 두 사내가 경건한 자세로 서 있었다.
마르크와 헤르미온, 틴은 각기 다른 반응을 보였다.
틴은 또 한 번 긴장을 하였는데, 그것은 오딘 때문이 아니라 그의 뒤에 서 있는 두 사내 때문이었다.
‘크윽, 뭐 이런 자들이…….’
신경을 잔뜩 곤두세우고 있어 그들의 음산한 기운을 감지한 까닭이다.
마르크는 풀지 못한 의문들로 인해 복잡했던 머릿속이 더욱더 난잡스러워졌다.
‘의문은 접어두고, 일단은 거래에 관한 얘기를 나눠야 한다. 거래에만 집중하자.’
반면에 헤르미온은 이상한 반응을 보였다.
모닥불에 다가선 것처럼 온통 볼이 발그레해져 있질 않은가.
그녀가 선 방향은 정확히 오딘 쪽으로 고정되어 있었지만, 시선은 그의 가슴팍을 향해 있었다.
똑바로 마주 보지 못해서이다.
‘아… 바보, 바보…….’
스스로를 그렇게 채찍질했지만, 그럴수록 가슴은 불을 지핀 것처럼 뜨거워졌고, 얼굴 또한 마찬가지였다.
볼이 탈 것 같았는지 그녀는 가녀리고 하얀 두 손으로 양 볼을 감쌌다.
오딘이 매력적인 것은 사실이지만, 그녀가 지금 보이는 과장된 반응은 자신이 엘프였다는 데에 있었다.
보통의 엘프들은 헤르미온처럼 흰 피부를 타고난다. 그러니 구릿빛의 피부가 더욱 매력적으로 비춰질 수 있는 것이다.
또한 그는 마르크가 가지지 못한 장점들까지 지닌 채였다.
일단 키부터 그보다 컸으며, 다부진 입술과 자상한 눈매에서 풍기는 여유 있는 미소, 호리호리한 체구에서는 매력적인 남성미마저 넘쳐흐르지 않는가.
지금 헤르미온은 자신의 이상형이 눈앞에 있다는 확신에까지 차 있었다. 한눈에 콩깍지가 씌어버린 것이다.
특히나 이런 경험은 그녀에게 있어 처음이었으니, 아무리 도도한 그녀라 할지라도 지금의 반응은 스스로 제어할 수가 없는 것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자신의 종족과는 다른 인간들과 어울려 살아왔으니 그럴 법도 했다.
그사이, 우선은 거래에만 집중하는 걸로 생각을 굳힌 마르크의 좁혀졌던 시야가 다시 넓어지기 시작했고, 그 바람에 틴이 또 긴장을 하기 시작했다는 것과 헤르미온이 요상한 반응을 보이고 있는 모습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그러다 보니 시야가 또다시 좁아져 버려서 제일 중요한 인물에게 실례를 범한 셈이 되고 말았지만, 오딘은 그의 행동을 문제 삼지 않았다.
“일단 좀 걸으면서 얘기하지.”
무척이나 한산하고 평화로운 수목 사이를 거닐자 마르크는 복잡했던 머릿속이 다 진정되는 느낌이었다.
더욱이 좋은 점은 그 말 많고, 탈 많은 헤르미온이 군소리 없이 따라온다는 것이었다.
비로소 마르크는 용건을 꺼내었다.
“전에 하셨던 말씀 말입니다. 아레인과 저희 이스론 상단이 손을 잡는다는…….”
“그것 때문에 온 것이 아닌가?”
부드러운 어조의 물음에 마르크가 답하며 물었다.
“그렇습니다. 한데, 그 전에 몇 가지 알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그로 인해 저희 이스론이 얻게 되는 것은 무엇입니까?”
“얻는 것이라……. 그럼 이스론은 무엇을 원하는지 알고 싶군. 전처럼 이익이라는 포괄적인 단어로 일축하지 않았으면 좋겠네.”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저도 속 시원히 털어놓겠습니다. 분명히 이스론은 더 커질 만한 능력이 되는데도 그렇지 못한 부분이 있습니다. 일단은 힘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오딘 님께서도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최고의 상단들은 항상 거대한 힘을 등에 업고 있습니다.”
“원하는 건 믿을 만한 힘이겠군.”
그가 딱 집어 말해주자 마르크는 다부지게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잠시 대화가 그치자 이번엔 마르크가 궁금한 것을 털어놓았다.
“오딘 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상단과 손을 잡으시려는 것은 갈구하시는 무언가가 있으셔서일 것이라고 생각됩니다만.”
“상권이니라.”
그제야 마르크는 일부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돈이 있고, 힘이 있다 하더라도 상권은 하루아침에 이룰 수 없었다. 그것은 짧게는 몇 년에서, 길게는 이스론 상단처럼 오랜 역사를 거쳐서야 이룰 수 있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저희와 상권을 공유하시려는 생각이십니까?”
“꼭 그것만은 아니다. 인재도 필요하다. 바로 그대 같은…….”
잠시나마 오딘의 진지한 시선을 마주하며, 마르크는 이상하게 몸이 굳는 느낌을 받았다.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밑에 사람 없다고 여겨 왔던 그다. 하물며 상단주 폴칸을 대할 때에도 그렇게 생각했었지 않은가.
그러나 오딘이 전해주는 느낌은 전혀 다른 것이었다.
왜 자신이 전에 그를 보며 보통내기가 아니라고 느꼈었는지 새삼 깨달았다.
어쩌면 처음 마주쳤던 순간부터 오딘을 윗사람으로 여겼는지도 모른다.
자신을 포용해줄 수 있는 사람, 그런 정도의 느낌을 받고 있는 것만 같아 마르크는 한사코 거절했다.
“죄송하지만 그 말씀은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저는 상단을 위하여 일하고 있고, 앞으로도 그럴 생각이니까요.”
“도움을 받고 싶다는 것이지, 아래로 오라는 말이 아니니라.”
오딘의 말을 듣고서야 마르크는 안도할 수 있었다. 그러면서도 넘겨짚은 자신이 조금은 창피했다.
“조언이다. 때에 따라서 필요한 부분은 서로 협력한다. 본 좌는 일체의 짐이 되지 않을 것이니라. 그대가 전에 말한 이익이라는 것, 그것은 서로에게 작용할 것이다.”
아레인 왕성의 집무실에서 마르크는 고뇌에 빠져야 했다.
그 자리에는 오딘 말고도 발데르 공작과 보탄 백작, 그리고 반투명한 백색의 면사로 콧등과 입술 부분을 가린 아레인의 여왕 엘레느가 착석해 있었다.
틴은 굳은 자세로 서 있었으며, 헤르미온은 정신이 딴 데 팔려 있었다.
자연히 이 협약의 주인들은 오딘과 마르크가 되었으니, 마르크가 심사숙고할 만도 했던 것이다.
다른 때 같았으면 헤르미온의 잔소리 덕에 자신이라도 정신을 추슬렀겠지만, 어쩐 일인지 오늘 그녀는 너무도 조용했다.
마르크는 지금 자신의 판단이 옳은지 그른지를 다시 한 번 되새겨 보았지만, 마땅히 고민할 것이 없었다.
아레인에서 새로운 상단이 들어서 크게 된다고 해도 이스론 상단에 이점이 되었으면 되었지, 손해는 되지 않을 것이라는 계산이 나왔다. 물론 오간 얘기들을 잘 지켜 줄 것이란 전제하에서 말이다.
그러는 동안 서기관이 내용을 담은 협약서의 작성을 마치고 마르크와 오딘에게 건네주며 말했다.
“빠지거나 부족한 내용들은 향후 보충하여 체결이 가능합니다. 이에 대해 이스론 상단 측은 이의가 없으신지요?”
마르크는 곧장 대답하지 않았다. 협약서에 적힌 문구들을 꼼꼼히 살펴보아야 했으므로.
다행히도 거기 적힌 대부분의 내용이 이스론에게 이로운 것들이었다.
협약서에 적힌 문구 중 일부는 다음과 같았다.
-필요에 따르지 않고서는 양 집단의 고유 영역에 대해서는 불가침을 가진다.
-양측은 발언권에 있어 평등한 권리를 부여받는다.
-이스론 상단이 위험에 처할 시 아레인은 군사력을 동원해서라도 이스론을 도와야 한다.
-이스론 상단이 독점한 부분은 당사자가 원하지 않는 한 아레인은 손을 댈 수 없다.
-상권에 관한 한 되도록 이스론은 아레인에 도움을 주어야 한다.
-최종 발언권과 결정권은 이 협약을 체결한 두 사람에게 있다.
모로 봐도 이득이 되는 것들은 죄다 이스론 상단 쪽이었다. 내어주는 것은 적은데, 받는 것이 큰 것이다.
마르크는 오딘이 왜 이렇게까지 해서 계약을 체결하는 것인지를 몰라 어리둥절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오딘의 속내란 따로 있었다.
‘기왕 하는 것이라면 마음에서 우러나서 하는 것이 나을 테지…….’
그가 원하는 것, 그것은 이스론 상단의 우호적인 감정과 신뢰였다. 그 두 가지를 저버리고는 동업은 갈수록 어려워질 것이므로.
우선은 이쪽에서 편의를 봐주고 예우를 차려 줌으로써 저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이 중요했다. 마음에서 우러나지 않는다면 관계가 길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염두에 둔 것이다.
확실히 마르크는 정색을 하고서 그런 점을 문제 삼았다.
“협약서에 따르면 저희 상단은 얻는 것만 잔뜩 있는데, 이래도 됩니까?”
오딘은 멋쩍게 웃으며 말을 되받아쳤다.
“안 될 것은 또 뭐지?”
“아레인이 얻는 게 적은 것 같아서 말입니다.”
“일이란 펼쳐 봐야 아는 것이지. 만약 그대 말처럼 적다면 이스론에 청구하도록 하지.”
우스갯소리였다.
그러나 당황함만 계속되자 마르크는 평정을 잃어버려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 말을 진담으로 받아들여 버렸다.
“처, 청구를 하신다고요?”
“농이니라. 무슨 말을 못하겠구나.”
“하하하하!”
그에 서기관을 비롯한 외눈의 발데르와 붉은 눈썹의 보탄이 호기롭게 웃음을 터뜨렸다.
또한 엘레느 역시 미소를 머금었는데, 면사 사이로 드러난 눈매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마음을 요동치게 만들었다.
특히나 헤르미온의 마음이 그러했다.
‘여왕이라고……?’
그녀의 마음은 갈대처럼 갈팡질팡했다.
당장에는 엘레느라는 저 여왕의 부군이 저 오딘이라는 사람이 아닐까란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그 생각이 점차 짙어지며 상상은 더욱 구체화되었고, 급기야 머릿속에 둘이 한밤에 같은 침대에 있는 모습이 그려지자 그녀는 저도 모르게 소리치고 말았다.
“안 돼!”
결코 의도하지 않은 일이었다.
정신을 차려 보니 집무실 안의 시선들이 죄다 자신에게 쏠려 있었다.
마르크는 시선에 무언의 질책을, 틴은 당황함을 담았고, 다른 이들은 의문을 담고 있었다.
그러다 오딘과 시선이 또 마주쳐 버렸는데, 그 바람에 그녀의 얼굴은 더욱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런 그녀를 보며 오딘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귀여운 아가씨군.”
그 한마디에 헤르미온은 정신이 다 몽롱해졌다.
당장에라도 쓰러질 것처럼 비실대고 있으니, 그녀를 보는 시선들이 더없이 난감해졌다.
보탄과 발데르는 무안함을 심어주지 않으려 고개를 돌렸으나 엘레느는 그렇지 못했다.
그녀는 자못 진지해진 눈빛으로 헤르미온을 쳐다보았지만, 반면에 헤르미온은 그럴 여력이 없었다.
그저 이 무안한 상황이 어서 빨리 끝나기를 기다릴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