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패
알베른은 과연 자신의 선택이 옳았는가에 대해 회의를 품고 있었다.
뿔뿔이 흩어지는 바리톤 군사들 덕에 어렵지 않게 무리를 빠져나왔지만, 앞으로의 길이 깜깜했다.
“분명 국왕은 날 가만두지 않았을 것이다. 이게 최선의 선택이었단 말이다.”
서러움에 그렁그렁한 눈물이 눈가에 맺혔다.
그가 가정하는 국왕의 결단이란 아마도 자신의 죽음으로 마무리 지어졌을 것이다.
그릇된 판단으로 대패를 안겨 준 사람을 가만두겠는가 이 말이다.
거기에 한 가지 더 걱정이 있었으니, 자신을 버러지 보듯 보던 그놈의 눈빛이었다.
앞으론 무얼 하고 살아야 될까 하는 걱정도 있었다.
“뭐가 걱정일까? 날 때도 혼자였고, 그 이후 죽 그러해왔지 않느냐. 스승 클라베르를 만나기 전까지는…….”
클라베르가 그를 제자로 거둔 데에는 동정심이 큰 작용을 했다.
당시에만 해도 알베른은 썩은 것은 아니지만 나름 괜찮은 인간성을 지녔었다.
그의 성격이 뒤바뀐 데에는 환경의 탓이 컸다.
왕성에 발을 들여놓기 시작하면서 돈과 권력의 맛을 보았으며, 그것이 그를 중독시켜 욕심을 과하게 만들어버렸다.
스승이 원하던 길과는 전혀 다른 길을 걷게 된 것이다.
“졸지에 내몰렸지만 아직 낙담할 때는 아니다. 내게는 적지 않은 돈이 있다. 그 돈으로 새로운 곳에서 새로 시작하면 될 터이니…….”
하지만 잃어버린 것들이 너무도 아까웠다.
그간 이뤄놨던 권력, 여러 귀족들과 내통하며 쌓아올린 친분 등 그것들이 모두 하늘로 떠버렸으니 그럴 만도 했다.
절로 욕설이 튀어나왔다.
“제기랄, 그 악마 같은 놈만 아니었더라도…….”
확실히 그는 악마에 비할 수 있었다.
이곳으로 빠져나오기 전 보았던, 죽기 전까지는 잊지 못할 광경.
누군가에게 그 흔적을 보여 주어 설명한다 하더라도 믿지 못할 것이었다.
그를 떠올리자 저도 모르게 몸이 떨렸다.
“일단은 도망쳐야 한다. 그놈에게서, 그리고 바리톤에게서…….”
그렇게 생각하고 나무에 매어둔 전마의 끈을 풀었다.
우선은 수중에 있는 돈으로 바리톤으로 돌아가 자신의 비밀 금고에 넣어둔 돈을 가지고 왕국을 뜰 생각이었다.
그때 스산한 그림자가 그의 머리 위에서 일렁거렸다.
귀신이라도 접한 것처럼 놀라 알베른은 고개를 젖혀 위를 보았다.
눈에 들어오는 것은 무성한 나뭇잎과 함께 흔들리는 나뭇가지였다.
“지나치게 예민해진 신경 탓인가? 하하, 그럴 거야. 난 또 그 망할 녀석인 줄 알았지.”
직감이었다. 마치 그를 볼 때의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알베른은 크게 안도하여 풀쩍 뛰어 말 등에 올라 고삐를 채었다.
“가자꾸나. 이 저주받은 왕국에서 떠나는 거야.”
하나, 말이 나아가질 않았다. 아니, 정확히는 그의 말이 한 발을 떼어 전진하려다가 다시 발을 내려놓았다.
자연스레 알베른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가자니까.”
다시 힘을 주어 고삐를 당겼지만 말은 히히힝 하고 투레질을 했을 뿐, 나아갈 의지가 없는 듯했다.
그 이유가 궁금해져 알베른은 뒤를 보았다.
순간 심장이 멎는 줄만 알았다.
그 악마가 자신이 탄 전마의 꼬랑지를 잡고 웃고 있질 않은가!
그답지 않게 머릿속이 꽉 막혀 버렸다.
생애 최악의 위기가 도래하여 아무런 사고도 할 수 없었다.
“왜? 망할 녀석 앞에서 네 치나 되는 혀 좀 놀려 볼 생각은 없느냐?”
이죽거림에 정지했던 알베른의 뇌가 맹렬히 회전하기 시작했다.
‘살아야 한다. 그러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힘으로 이길 수 없는 사람에게는 어찌해야 하는가?’
답은 어렵지 않았다.
무조건 굽히는 수밖에는 없음을 깨닫고 알베른은 말에서 떨어지듯 뛰어내려 다급히 오체투지를 하며 입을 열었다.
“위대하신 분을 뵈옵니다.”
그의 존재를 드래곤 정도로 격상시킨 말이었다. 그러나 오딘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슬며시 그의 낯빛을 살피려 고개를 빠끔히 들었던 알베른은 더 깊게 머리를 땅에 처박고 말했다.
“미천한 자가 감히 위대하신 분을 몰라 뵙고 무례를 저질렀습니다. 부디 넓은 아량으로 헤아려 주십시오.”
순식간에 솟은 식은땀들이 흙과 범벅이 되어 기분이 좋질 못했지만 그 정돈 아무 일도 아니었다. 지금은 뒤에 이어질 그의 행동이 끔찍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오딘은 알베른의 말을 귀담아 들었는지 않았는지 자신의 입장만을 내세웠다.
“용서해줄 마음은 추호도 없느니라. 대신 농락하려 들었던 대가를 치러야 한다. 본 좌는 자신의 혀만 믿고 나대는 자들을 극히 싫어하는 편이니까. 어디 네 치나 되는 혀 좀 구경이나 해볼까?”
정말 그러려는지 그가 다가오는 발소리가 알베른의 귀에 똑똑히 전해졌다.
더 이상 숙이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두 발이 있으니 도망이라도 쳐봐야 했다.
황급히 일어서서 뒤로 몸을 돌리려는데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눈으로 포착도 못할 정도로 빠른 손에 의해 어느새 혈도를 제압당해 몸을 움직일 여건이 안 되는 것이다.
자신의 몸이 왜 이리되었는지는 생각할 겨를조차 없었다.
악마라고 생각하는 자이니 무슨 짓인들 못할쏘냐.
발악하듯 알베른의 눈이 휘둥그레 떠졌다. 그리고 간절한 바람을 담아 자신의 입을 향해 손을 뻗는 그를 제지하려 했다.
“제발, 제발 이러지 마십시오.”
그 외침은 그저 바람에 실려 날아가 버렸다.
그는 인정도 없는지 기어코 알베른의 양 볼에 오른손을 뻗어 억지로 입을 벌리게 하고는, 다른 손을 집어넣어 혀를 입 밖으로 강제로 잡아끌고 있었다.
“으아아악……!”
한적하던 숲에 영혼을 쥐어짜는 듯한 비명이 메아리치고 있었다.
* * *
반신반의하는 기분으로 유프라와 헥토르는 로테노아가 있을 곳을 향했다.
그러나 그 많던 대군은 하늘로 솟은 것인지, 땅으로 꺼진 것인지 전혀 찾아볼 수가 없었다.
유프라가 그래도 국왕과 같이 있었던 헥토르에게 물었다.
“형님, 이게 어찌 된 일입니까?”
헥토르는 말끝을 흐리며 자신도 이해하기 어렵다는 표정을 지었다.
“분명 여기 계셨는데…….”
언제까지 이렇게 뜬구름을 잡는 것처럼 서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기에 유프라가 헥토르를 향해 말했다.
“이럴 게 아니라 일단은 병력을 흩어 찾아보아야겠습니다.”
헥토르 역시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기에 유프라는 기마병들을 사방으로 보내려 했다.
그러나 굳이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커다란 바위 뒤에서 제대로 몸을 가누지도 못하고 후들후들 떠는 병사 하나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유프라가 곁의 기사에게 눈짓을 하여 그를 데려오게 하였다.
먼저 다그친 것은 헥토르였다.
“너흰 왕성으로 향하지 않았느냐? 이게 어찌 된 일이냐?”
두 왕자를 보며 병사는 어려워하면서도 그보다 더한 존재감이 아직 사그라지지 않아 겁에 질린 표정이었다.
“아, 악마를 보았습니다.”
병사의 눈은 초점을 잃고 이리저리 방황했다.
정확치 않은 말에 헥토르가 당장에 그의 어깨를 부여잡아 매몰차게 흔들었다.
“똑바로 아뢰지 못할까? 어찌 된 일이냐고 하였다!”
그럼에도 병사가 좀체 정신을 차릴 기미가 보이지 않자, 헥토르는 버럭 호통을 쳤다.
“네 이놈, 죽어야 바른 말을 하겠느냐?”
정말 당장에라도 검을 빼어들 것 같은 기세에 유프라가 그를 만류시켰다.
“안정이 필요합니다. 다그쳐서 될 일이 아니니 제가 묻도록 하겠습니다.”
헥토르는 화가 났지만 유프라가 직접 나서 일을 대신해주겠다 하니 꾹 참아 넘겼다.
유프라가 병사 앞에 무릎을 굽히고 앉아 다정한 눈빛으로 그의 눈을 주시하며 근방의 기사에게 명했다.
“일단은 물을 주어라.”
그러자 기사가 가지고 있던 물을 병사에게 건네주며 들이켜게 했다.
차가운 물이 목구멍을 적시자 겨우나마 안정을 취하게 되었던지 병사는 말을 잇기 시작했는데, 계속하여 떨고 있는 모습이 영락없이 물에 빠진 생쥐 같았다.
“일 왕자 전하께옵서 자리를 비우신 사이 저희 국왕군은 아레인 왕성을 향해 나아갔습니다. 한데, 전의 그 이방인이 저희의 길을 막고 서 있었습니다. 이로 인해 마찰이 빚어졌는데 그는… 그는…….”
떠올리기 싫은 일을 떠올리니 그의 몸이 거부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고, 헥토르가 참지 못하고 또 다그쳤다.
“끝까지 말을 해보아라. 알아듣게 말이다.”
“제가 묻는다고 하질 않았습니까. 형님께서는 빠져 계십시오.”
두 사람은 대조적이어도 너무 대조적이었다.
헥토르의 이런 면모가 항상 못마땅했던 유프라였다. 헥토르 역시 유프라가 자신을 나무라는 듯하자 안 그래도 험한 인상이 더욱 험하게 일그러졌다.
그러나 유프라는 눈 하나 까딱하지 않고서 병사를 다독였다.
“천천히 말해. 안 좋은 일이 있었구나.”
병사가 고마운 눈을 하고 고개를 끄덕이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그를 제거하기 위해 기사님들이 투입되었습니다. 저희 바리톤에서 뛰어난 분들 역시 이에 동참하였사온데, 그분들도 변변한 저항조차 못해보고 속수무책으로 쓰러지셨습죠. 결국 국왕 폐하께서 용단을 내리셨습니다. 저희 군대 전부를 투입시키시기로…….”
그러다 그의 눈이 붉은 구덩이를 향했다.
저곳을 보아달라고 말을 할 참이었는데, 끔찍한 광경이 연상되어 발작을 일으키고 말았다.
“아아악!”
머리를 부여잡고 소리치는 병사의 모습에 유프라는 의아함을 느꼈다. 이는 헥토르 또한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병사가 바라보던 곳을 보았고, 눈치 빠른 기사 하나가 재빨리 말을 달려 구덩이로 향했다.
기사는 얼마 지나지 않아 돌아왔지만, 그의 표정은 검게 질려 있었다.
“시신들인 듯합니다.”
헥토르도, 유프라도 아연실색했다.
사람의 형체도 없는데 시신들이라고 하니 어찌 놀라지 않겠는가.
그 말의 증명이 되고 있는 것은 그 일을 겪고 충격을 감내하지 못해 땅바닥에 몸을 바싹 웅크려 부들부들 떨고 있는 병사였다.
유프라가 여전히 놀란 얼굴로 중얼거렸다.
“정말 악마가 맞나 봅니다.”
그러나 헥토르는 그 말을 인정해줄 수 없었다.
“바보 같은 소리. 넌 어째 아직도 약한 모습으로만 세상을 대하는 거냐? 저 일이 벌어진 것이 사실이라고 인정하긴 힘들지만, 그래도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우리 궁정 마법사 역시 저 정도의 일은 벌일 수 있질 않느냐.”
틀린 말은 아니었다. 다만, 그들의 마법사는 결단코 저런 힘을 가지지 못했다. 헥토르는 자기가 속한 왕국을 내세우고 싶어 그리 믿은 것이다.
유프라는 그의 말을 부정하려다 말아버렸다. 한번 시작된 말싸움은 끝이 없을 것이므로.
자신의 형 헥토르는 속이 넓지 못하여 뭐든 이겨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 아닌가.
문득 아레인 왕성에서 마주쳤던 노인의 말이 떠올랐다.
자신보다 더 무서운 존재가 바리톤을 노리고 있을 것이란 말.
돌연 걱정이 커졌다.
당장 유프라는 일어서서 말했다.
“돌아가야겠다. 이 병사는 누가 데리고 가겠느냐?”
“제가 데려가겠습니다.”
그렇게 병사를 전마 앞쪽에 싣고 기사가 말을 올라타려는 찰나, 이곳저곳에서 전마의 발굽 소리들이 요란하게 울렸다.
‘우리 군대? 아니면…….’
객관적으로 판단하는 유프라와 달리 헥토르는 내심 기대를 하는 얼굴이었다. 그의 생각 밑바탕에는 저 앞의 구덩이에서 죽은 사람이 몇 안 되리라는 추측이 깔려 있었다.
그리고 철석같이 믿는 자신들의 대군은 적들에게 동요를 일으키기 위해 사방으로 흩어졌다가 역공을 가하는 것이 아닐까란 추측도.
“아바마마의 군대일 것이다. 어서 그들을 맞을 채비를 하라.”
곧 전마들의 정체가 드러났다.
하나, 불행하게도 그들이 기다리던 군대가 아닌 정반대의 아레인 군대였다.
* * *
세 겹의 주름살이 그의 이마에 자리하고 있었다.
근 한 달 사이, 아니 그보다도 훨씬 적은 시간이 흘렀을 뿐이지만 그는 지금 10년쯤은 더 늙어 보였다.
병은 마음에서부터 온다는 얘기가 있다.
그가 그리 적지 않은 나이에 젊어 보였던 것은 세상의 시름 따위는 멀리하고 살아서이기도 했다.
바리톤의 국왕 로테노아.
전쟁의 승패는 단 한 번으로도 결정지어질 수도 있음을 그도 배우고 들어 익히 알고 있었다.
이번의 패배는 평생토록 씻기지 않을 오명이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을 달래려 애썼다.
‘그자는 사람이 아니었지 않은가.’
벌써 십수 번이나 되뇐 생각.
사고와 판단을 하고 있는 그의 머릿속도 이것은 인정해줄 수 있는지, 그때마다 잠시 묵묵부답이었다.
오는 길도 결코 평탄치 않았다.
약 반나절 전의 아레인의 하늘, 오딘이라는 한 젊은이에 의해 시작된 공포가 번져 바리톤의 대군은 급기야 도망을 쳤다.
그런 그들을 또 한 번 뒤흔든 것이 아레인의 여왕이 이끄는 정예 부대였다.
한참을 물러난 끝에 일단의 부대들이 모여들어 다시 대열을 정비하려 했지만, 불행이 또 닥쳤다.
바로 발데르와 보탄이라는 남자에 의해서였다.
그들이 했던 말들이 로테노아의 뇌리를 오갔다.
‘내가 아레인의 여왕이다.’
아직 여물지 않은, 스스로를 여왕이라 칭하는 소녀의 목소리가 놀라움의 첫 번째였다.
두 번째는 장년의 사나이에게서였다.
‘나 발데르가 어리석은 바리톤의 대군에게 친히 가르침을 내려 주겠노라.’
그런가 하면 중년인 세 번째 사내의 말도 놀람이 적지 않았다.
‘나 보탄이 아레인을 짓밟은 네 녀석들을 응징하리라.’
두 번째와 세 번째, 그러니까 장년과 중년의 남자들에게서 들린 음성은 귀가 아플 정도로 컸다.
그들의 무력은 감히 감당할 수 없을 지경이었고, 그들의 군대도 백정들인 양 겨우 모인 바리톤의 대군을 닥치는 대로 무너뜨렸다.
지금에 이르러서는 군대를 얼마나 잃게 되었는지도 파악이 불가했다.
상심은 로테노아만 떠안고 있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좌초를 한 배처럼 바리톤 대군의 사기는 저하된 게 아니라 아예 사라진 듯했다.
대부분의 지휘관들 또한 망연자실하게 고개를 숙이고 땅만 쳐다보기 일쑤였다.
바리톤이라는 나라가 왕에 의해 결정이 내려지고 왕권 위주의 국가라고는 하나, 이 같은 결과는 앞으로의 상황에 결단코 좋은 영향을 가져다주지는 못할 것임을 로테노아는 뼈저리게 느끼는 중이었다.
그나마 다행이랄 것은 이 원정이 중신들 모두가 찬성한 일이라는 것이다.
자신은 강요를 하지도 않았으며, 그들도 더 큰 영예를 얻고자 팔을 걷고 동참한 일이 아닌가.
그러나 자꾸 본전 생각이 났다.
오랜 기간에 걸쳐 쌓아올린 국력. 그 국력이 어느 정도 피폐하게 되었는지는 짐작조차 가질 않았다. 그 파급 효과 또한 클 것이다.
무엇보다 걱정은 아레인이었다.
당하던 자가 자신의 강함을 깨닫고 역공을 하게 되면 어떻게 될 것인가.
최악의 경우 자신은 왕위에서 물러나고, 바리톤이 아레인의 속국이 될 수도 있는 노릇이다.
이는 꼭 겪어보지 않더라도 깨달을 수 있는 일이었다.
후회가 물밀듯이 밀려왔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어디서부터…….’
문제 될 것이 있다면 욕심이다. 바로 욕심에서 비롯된 일이었다.
탄식이 목구멍까지 솟아올랐다.
그러나 주위에 사람들이 몰려 있으니 답답한 마음에도 한숨조차 쉴 수가 없다.
“국왕 폐하,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곁의 지휘관의 질문대로 모종의 결단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군대를 물려라. 우선은 유프라와 합류하겠다.”
* * *
자유자재로 전마를 모는 기사들이 유프라의 군대를 조롱하기라도 하듯 주위에서 맴돌고 있었고, 어디선가 들리는 피리 소리가 더 많은 아레인의 군대를 집결시켰다.
급기야 유프라가 거느린 5백의 병력 주위에는 그보다 더 많은 아레인의 병력이 모여들었다.
헥토르는 당장에 성질부터 냈다.
“뭣을 하는 게냐? 더 많은 적들이 몰려오고 있지 않느냐! 어서 빨리 쓰러뜨려야 후발 부대를 마주치는 데 어려움을 덜 겪을 것이 아니냐!”
헥토르가 그럴 만도 했다.
유프라는 자신이 거느린 군대에 아무런 준비도 시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대신 품 안에 고이 간직한 아레인의 여왕에게서 받은 물건을 어루만졌다.
곧 지척에서 귀를 울리게 할 정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레인의 보탄 백작이라고 하오. 그대들은 뉘시오?”
짐작하고서도 묻는 말이었다.
헥토르가 다른 꼼수를 생각해내려는데 유프라가 속도 모르고 솔직하게 말했다.
“바리톤의 이 왕자 유프라라고 합니다. 우린 싸울 의사가 없으니 잠시 얘기를 하였으면 합니다.”
배짱 좋게도 저쪽에서 중년의 남자가 날랜 전마를 끌고 단신으로 짓쳐들더니 유프라의 말 근방에 섰다.
헥토르가 볼 때 이것은 기회였다. 그는 당장에 유프라의 귀에 대고 나지막이 속삭였다.
“저자의 복장이 예사롭지 않다. 필시 아레인에서 높은 직책을 갖고 있을 것이니, 그를 사로잡자.”
유프라는 그를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우습게도 보탄은 그 말을 듣고서 둘의 반응을 재미있다는 듯 눈여겨보고 있었다.
그러던 중 한 사람이 더 다가왔다.
헥토르는 그를 보는 즉시 사색이 되었다. 바로 외눈의 발데르였던 것이다.
고양이 앞의 생쥐 꼴이랄까.
유프라는 낯선 헥토르의 모습이 쉬이 이해가 가질 않았다.
돌연 발데르가 묵직한 음성으로 물었다.
“이 왕자라 하시었소?”
“그렇습니다.”
발데르는 잠시 유프라에게 시선을 두었다가 얼굴에 자상이 있는 헥토르를 보았다. 그 자상은 얼마 전 발데르 자신이 남긴 것이었다.
그러나 발데르는 오만한 낯빛을 짓지 않고 다시 유프라에게 시선을 돌리고서 물었다.
“할 얘기라 함은 무엇이오?”
“우린 지금 싸울 의사가 없습니다.”
발데르가 침묵하자 보탄이 대신 그를 부정해 보였다.
“그걸 어떻게 믿소?”
그때서야 유프라는 매만지던 비단 주머니를 꺼내었다.
그를 보자 발데르의 외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유프라는 헥토르의 시선을 의식하며 말을 몰아 발데르 앞에 당당히 다가가더니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레인의 여왕님께서 호의를 베풀어준 데 감사하다고 하시며 자신들의 군대를 마주친다면 이걸 보여 주시라 하셨습니다.”
발데르 역시 낮게 물었다.
“호의라 하면?”
“그럴 필요는 없었지만, 아레인의 왕성이 위험에 처할 것 같아 모두에게 비밀로 하고 이 일을 왕성 내에 알렸습니다.”
사실 발데르는 이곳에 오기 전 스치듯 엘레느를 목격하였다. 그리고 그녀가 보낸 기사로부터 대충의 부탁을 받은 상태였다.
잠시나마 유프라를 보던 발데르의 눈이 다정해졌다.
그러나 아주 잠시일 뿐이었다.
발데르는 곧 정을 거두고는 보탄을 향해 망설임 없이 말했다.
“여왕님의 것이 맞구려. 보내줍시다.”
마주 향하면 더 빨리 맞닿는다.
유프라와 헥토르, 로테노아가 그러했다.
두 아들을 둔 아버지는 아들들의 무사 귀환에 기뻐하기는커녕, 살아 돌아온 헥토르에게 성을 내기 바빴다.
“네놈은 제대로 하는 일이 하나도 없구나! 감정 따위에 치우쳐서 뭘 하자는 것이냐!”
주위를 살필 여력도 없었다.
오로지 부글부글 끓던 속을 저놈에게라도 풀어야 조금이나마 직성이 풀릴 것 같았다.
헥토르는 자신의 잘못을 아는지 모르는지 억울한 낯빛을 지었다.
“아바마마, 제게 군사를 조금만 더 내어주셨다면 그 두 녀석을 반드시 잡을 수 있었습니다. 아쉽게도 코앞에서 놓쳤습니다. 전 정말 억울합니다.”
방귀 뀐 놈이 성낸다고 하더니 지금 헥토르가 딱 그 짝이었다.
혈압이 오르는지 로테노아는 얼굴을 붉힌 채 헥토르를 쏘아보았다.
“네놈이 이제 눈에 뵈는 것이 없는 모양이구나! 대신들 앞에서 이 무슨 추태란 말이냐? 네놈은 공과 사를 구분하는 법도 잊었더냐?”
자신을 아바마마라고 칭한 데에 처음으로 힐책이 쏟아졌다. 그리고 헥토르가 뭐라 변명을 하려던 찰나, 또 한 번의 노기가 폭발했다.
“나설 데와 안 나설 데도 구분 못하는 무능한 녀석 같으니라고! 실력도 안 되는 녀석이 죽겠다고 나서? 소드익스퍼트 중급 정도의 실력으로 그들을 잡겠다고 나서다니, 네놈은 안목 또한 없도다! 그런 모습으로 왕세자를 꿈꾸다니 에이, 못난 녀석 같으니라고…….”
성을 내고 고개를 돌리는데 유프라가 눈에 밟혔다.
“어찌 된 영문이냐?”
5백의 군대를 끌고 합류한 사연을 묻는 것이었다.
유프라는 당연히 거짓을 아뢰었다.
“국왕께서 친히 아레인 왕성을 정벌하겠다고 나서셨다는 전갈을 받았습니다. 소자가 가만히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라 저들의 군대를 흩어놓으려는 계산이었습니다. 하지만 제가 무능해 뜻한 바를 성취하지 못했사옵니다. 용서하여 주십시오.”
숙이고 반성하는 모습이다.
헥토르가 이랬어야 했다.
헥토르의 잘못에 비하면 유프라의 잘못은 하잘것없었다.
오히려 기특하게도 돕겠다고 스스로 나서지 않았는가.
그러나 지금은 그를 칭찬할 수도 없었다.
뜻하지 않게 이 왕자로 인해 속에 쌓인 울분이 티끌만큼이나마 삭여졌다.
헥토르는 자신에게 향했던 아버지의 눈빛이 동생인 유프라에게 향하고 있음을 느끼고 질투를 했다.
‘네놈이 아바마마의 총애를 받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난 네놈의 치명적인 약점을 잡고 있으니 말이다.’
헥토르는 진지로 돌아온 즉시 자신의 막사로 들어와 낮의 일을 분해하면서도 그녀를 떠올렸다.
그 미모는 확실히 경국지색이라 할 만했다.
이 난국에도 저절로 기분이 즐거워지고 있지 않은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널 내 여자로 만들겠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렇게 욕심이 치민 데에는 그녀의 지위 또한 작용했다.
한 나라를 대표하는 여왕이라지 않는가.
하나, 전에 한 가지 걸림돌이 있었다. 바로 자신들의 군대였다.
‘만약 우리 군대가 아레인을 정벌한다면, 그럼 자연스레 아바마마께서도 그녀를 볼 것이 아닌가?’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그 정도 미모라면 로테노아가 탐낼 수도 있었다.
“그리되어서는 안 된다. 그리되어서는…….”
아직까지 사태 파악을 못한 까닭이었다.
그는 자신이 그토록 믿는 로테노아가 좌절에 빠졌다는 것조차도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로테노아는 그와 말을 섞는 것조차 꺼리고 있었으며, 다른 귀족들도 그를 곱게 봐주지 않았다.
처지도 모르고 헥토르는 초조하게 서성였다.
그러다 단 한 가지의 방법이 떠올랐다.
‘빼돌려야 한다. 내가 왕이 되기 전까지는 철저하게 그녀를 숨겨야 한다.’
그에게는 이미 부인이 있었는데도 욕심을 내는 것이다.
자고로 영웅에게는 여자가 많다고 하질 않았던가.
자신은 능히 그럴 만한 자격이 된다고 생각했다.
벌써부터 그녀를 가질 수 있다는 확신에 찼는지 그의 눈이 욕심으로 희번덕거렸다.
마냥 좋아 죽고 있는데 막사 밖에서 인기척이 일며 기별을 전해왔다.
“일 왕자 전하, 국왕 폐하께서 찾고 계십니다.”
“아바마마께서?”
“그렇사옵니다.”
대답이 조금 늦게 들리는 것으로 봐서 지금 말을 올리는 자는 헥토르가 말끝마다 아바마마, 아바마마 하는 것이 영 듣기 거북한 모양이었다.
그렇다고 헥토르가 눈치 챌 정도는 아니었다.
“알았다. 내 곧 가도록 하지.”
답을 내어주고 헥토르는 잠깐 고민에 빠졌다.
“틀림없이 추궁하시려는 것이겠지. 그러나 난 떳떳하다. 나쁘게 받아들일 것도 아닌데 아바마마께선 왜 그러시나 모르겠어. 결과야 좋게 나왔지 않은가. 나 때문에 진군이 다시 되었으니.”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라는 식이었지만 회군에 대해서는 일절 언급을 못 받았던 탓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 역시 그렇게 말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무슨 일인지 모르지만, 많이 지쳐 보이셨다. 인정하긴 싫지만 내 우선은 잘못했다고 하자. 그리고 화가 풀어지실 때 얘기를 나누는 것으로 하면 되겠어.”
그로서는 많이 물러서 준 것이다.
그리 결정짓고 막사 밖을 빠져나간 헥토르는, 그러나 곧장 로테노아를 만날 수는 없었다.
그는 아주 중요한 손님과 독대를 하고 있었으므로.
로테노아의 기분 따위는 살피지도 않고 게티롱은 자신이 푸대접을 받게 된 것에 대한 원망만 늘어놓고 있었다.
“사람을 지치게 하는군. 이러자고 날 부른 것이오?”
“미안하게 되었소.”
너무 힘이 빠져 그를 상대할 기운조차 없었지만, 그래도 이 사람이 대단한 자라는 것을 잊지는 않았다.
한편으로는 의심도 생겼다.
“전의 일 말이오. 아레인을 정탐했던 순간을 묻고 싶소. 혹시 이상한 낌새를 눈치 채지는 못했소? 사람 같지 않은 자가 있다거나…….”
오딘을 지칭하는 말이었다.
하지만 놀랍게도 게티롱의 입에서도 같은 자가 거론되었다.
“이상한 녀석이 있긴 하였지. 검은 머리카락의 이방인.”
그 대답에 로테노아의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그를 보았소? 그를 정말 보았소?”
“그럼, 나와 눈이 마주쳤는데. 그건 왜 묻지?”
대화를 하는 모양새로 봐서는 흡사 로테노아가 아랫사람 같았다.
게티롱의 거만함이 그를 뛰어넘은 것이다.
“혹 그때 그의 대단함을 간파하지는 못했소?”
게티롱은 턱을 매만지더니 생각났다는 듯 뇌까렸다.
“글쎄, 확실히 대단하기는 했지. 멀리서 날 발견한 것을 보면 말이야. 물론 내가 기척을 숨기지 않았기에 가능한 일이었겠지만.”
그 말이 던져 주는 파장은 적지 않았다.
로테노아는 자신이 대단한 존재를 눈앞에 두고 있는 것처럼 기뻐했다.
그렇다 해도 아주 잠시였다.
바리톤의 군대를 집어삼킨 검은 회오리가 떠오른 즉시, 그의 표정은 눈에 띄게 침울해졌다.
‘이 사람은 그에 대해 완전하게 모를 것이다. 삼 왕자의 일을 부탁하려 불렀지만 그조차도 쉽지 않을 것이다. 그가 있다면…….’
한 가닥의 기대라도 걸어보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생명을 헛되이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는 바리톤의 사람도 아니요, 돈을 지불했다고는 하나 어찌 되었건 신세를 진 사람이다.
“미안하게 되었소. 지휘관들과 논의는 거듭해봐야겠지만 우린 이 전쟁에서 손을 뗄까 하오. 어려운 걸음을 해준 데 대해 미안함을 금할 길이 없구려. 내 성의는 보여 드리겠소.”
그냥 왕래해준 것에 돈을 지불하겠다는 것이다.
게티롱은 정이 많은 사람이었다.
상대가 이렇게까지 나오자 나쁜 기분이 아니어서 준비해온 말을 꺼내었다.
“부탁할 일은 이미 들었소. 어렵지 않은 일이더군.”
“파, 팔테스, 아니 삼 왕자 말이오?”
게티롱은 여전히 거만한 태도로 고개만 끄덕였다.
그러자 자그마한 욕심으로 인해 로테노아는 다시 한 번 환상에 빠졌다.
‘그래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내 핏줄이다. 전쟁에서 패한 것은 패한 것이다. 그러나 팔테스라도 무사한 것을 알고 싶다. 아니, 무사하게 해주고 싶다. 내가 끌고 온 것이다. 적어도 나 때문에 피해를 보는 일만은 없어야 한다. 책임을 질 수 있다면 져야지. 그것이 아비 된 자로서의 도리가 아닌가.’
굳은 얼굴로 로테노아가 물었다.
“당신은 어느 정도로 강하오?”
그 질문에 게티롱은 코웃음을 쳤다.
“풋.”
로테노아가 재촉했다.
“대답해주시오.”
“이런 말을 내 입으로 하긴 우습군. 나보다 강한 사람이 과연 세상에 존재하기나 할까?”
거만하기 짝이 없는 말이었다.
그에 로테노아는 그만 게티롱에게 돌이킬 수 없는 길을 걷도록 종용해버렸다.
“부탁, 아니 청탁을 하겠소. 삼 왕자를 구출해주시오. 아니, 그 일이 성사되면 내 더 큰 건을 맡기겠소. 물론 그 일까지 해내준다면 보수는 그때의 백배, 아니 천배라도 내겠소이다.”
치솟는 욕심.
그가 바라는 궁극적인 목표는 바로 오딘의 제거였다.
그만 없다면 아직 이 전투는 해볼 만하다고 여겼다. 아니, 적어도 저들의 역공 정도는 방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혹 그와 마주칠 수도 있소. 그래도 괜찮겠소?”
“그라면 이방인 말인가?”
로테노아가 작심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게티롱은 감히 상상하지 못했던 말을 꺼내놓고 말았다.
“그것은 나 역시 바라고 있던 일이야. 안 그래도 누가 제일인지 가리고 싶었거든. 돈 벌기 참 쉽군.”
분명 게티롱은 그렇게 말했다.
* * *
팔테스는 개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아레인의 왕성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이는 자신을 두고두고 이용해먹겠다는 수작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썩 기분이 좋질 않았다.
물건 취급받는 것도 그러하거니와 체류 기간이 길어질 것이라는 데에 눈물이 앞을 가렸다.
한시도 편할 때가 없었다.
오딘이라는 놈이 자리를 비울 때면 항시 다른 녀석이 와서 핍박했으며, 이제는 잡일까지 시키고 있질 않은가.
언제 자신이 비를 들고 먼지가 풀풀 날리는 바닥을 쓸어보았으며, 코가 썩어 문드러질 것 같은 하수구 청소나 지저분한 쓰레기들을 치워보기를 했겠는가?
일이 고되고 힘든 것 따위가 문제가 아니었다.
이는 왕자로 나고 자란 팔테스의 자존심에 커다란 바늘을 꽂는 격이었다.
빗자루를 팽개쳐 보기도 하고, 서러움에 북받쳐 울음을 터뜨려 보기도 했지만 그럴 때마다 돌아오는 것은 더 큰 시련이었다.
갈수록 초라해지는 자신의 몰골을 보는 것도 이제는 지긋지긋했다.
정신과 몸이 피폐해지는 것만 같았다.
아바마마는 뭘 하시기에 아직까지 구원의 손길을 뻗지 않는 것인지 원망스러웠던 적도 많아 혹시 자신을 버린 게 아닐까란 극단적인 생각까지 품었었다.
그러나 일주일, 그리고 보름이 흘러가며 아주 서서히 적응을 하기 시작했다.
‘언젠가는 그날이 오겠지…….’
기약 없는 바람.
말 그대로 ‘언젠가’였다.
그가 이 왕성에서 받는 취급이란 최고의 푸대접이었다.
가장 높다고 말할 수 있는 왕실의 자제가 허드렛일을 하는 하인보다도 못한 취급을 받고 있으니 말이다.
비교될 자가 있다면 딱 한 사람뿐이었다.
조르바라는 저 사람.
하도 주위에서 그를 심부름꾼 부리듯 하여 그의 이름을 어렵지 않게 알게 되었다.
그런데도 그는 항상 웃고 있었다. 자신처럼 심각하다거나 고뇌에 빠진 모습은 일체 본 적이 없었다.
항시 섞여 있어서 그랬다.
그러나 지금 처음으로 마당엔 두 사람만 남게 되었다.
말이라도 걸어볼 요량으로 팔테스는 그를 쳐다보았지만, 그에게선 예상치 못한 싸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뭘 봐?”
당황해서 팔테스는 잠시 말을 잊었다.
그는 차가운 태도로 극명하게 적의를 드러내며 협박까지 했다.
“너 말이야, 기분 나쁘게 자꾸 힐끗힐끗 쳐다보는데 조심해. 그러다가 쥐도 새도 모르게 가는 수가 있어.”
팔테스로서는 기가 찰 말이었다.
이런 미천한 자에게까지 자신이 무시를 당해서야 쓰겠는가 하여 눈알을 부라리며 성질을 부렸다.
“네 이노옴~!”
조르바는 조르바대로 약이 올랐다.
당장에 손을 치켜들어 팔테스의 볼따구니 가까이 대고 귀싸대기라도 한 대 올려붙일 것처럼 겁을 주었다.
“어린놈의 자식이 뭐가 어쩌고 어째?”
팔테스는 지지 않고 소리쳤다.
“내가 누군지 아느냐?”
조르바가 알 턱이 없었다.
그저 시킨 일만 묵묵히 했기에 그가 어떤 신분이고 왜 이곳에 와 있는지 몰랐던 것이다. 조르바는 호기심이 동해 물었다.
“누군데?”
“난 바리톤의 왕자다. 네놈 따위가 함부로 입에 올릴 분이 아니란 말이다!”
조르바는 이제야 정황이 이해가 갔다.
사실 귀족들은 무얼 해도 티가 난다. 특히나 신분이 바뀐 지 얼마 되지 않은 사람들은 더욱 그러하다.
녀석을 보았을 때 꽤나 귀한 집 자식이라는 것쯤은 예상할 수 있었다.
그러나 자신이 그런 것을 신경 쓸 여력은 없었다.
그는 오딘으로부터 죄를 용서받기 위해 요 근래 들어 정말 열심히 일했고, 남의 눈에 거스르지 않을 만한 행동만 했으므로.
그래도 이곳에서도 종종 오가는 말이 있었다.
바리톤의 대군이 아레인을 침공했다는 것쯤은 어렵지 않게 전해들을 수 있었다.
듣고 보니 놀랄 일이었다.
적국의 왕자를 끌고 와 이곳에서 부려먹는다는 게 말이다.
하지만 곧 이해가 갔다.
‘그 사람이라면 그럴 수 있지. 암, 그럴 수 있고말고…….’
자신이 아는 오딘은 왕국을 발칵 뒤집은 인물이다.
직접 그가 나서지 않았다고 해도 발데르 공작과 보탄 백작이 그의 도움을 받았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잠시 그가 멈칫하자 팔테스는 이제야 뉘우치겠구나 생각했다.
이웃 국의, 비록 사이가 안 좋아진 나라의 왕자라고는 해도 예의는 갖춰야 할 게 아닌가. 왜냐하면 이자는 자신과 신분 자체가 다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니었다. 그는 도리어 잘되었다는 듯 비꼬면서 자신의 성깔을 돋우었다.
“허이구, 그러셨어요? 바리톤의 왕자님이라굽쇼? 그렇게 잘나신 분이 왜 이곳에 있을까?”
“내가 거짓을 말하는 것 같으냐? 난, 난…….”
“난 뭐? 말을 해, 말을……. 말을 해야 알아듣지.”
그러면서 조르바는 이미 든 손으로 팔테스의 볼따구니를 밀어댔다. 밀 때마다 팔테스의 고개는 원 상태로 돌아왔지만, 조르바의 손이 재차 밀었다.
자연히 짜증이 치솟아 결국 더 참지 못하고 팔테스가 목청을 높여 성을 냈다.
“당장 그만두지 못할까! 난 적어도 너 따위에게 업신여겨져서는 아니 된다!”
불난 데 기름을 끼얹은 격이었다.
조르바의 참아왔던 성미가 급기야 폭발하고 말았다.
“너 따위? 말 잘했다. 나 따위에게 오늘 한번 죽어봐라!”
당장에 팔을 걷어붙이고 조르바는 무작정 주먹과 다리를 휘두르기 시작했다.
하도 근거리라 피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었다.
퍽! 퍽! 빡! 탁!
“크윽.”
구타음과 신음이 뭐가 앞인지 뒤인지 분간하기 힘들 정도였다.
조르바는 그간 쌓여 왔던 분풀이를 마음껏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주위를 흘끔거리는 것을 잊지 않던 그는, 문득 자신의 행동에 이치를 따져 보게 되었다.
‘가만, 내가 눈치를 볼 필요가 있나? 이 녀석이 이웃 국의 왕자인데 이런 꼬락서니라면 오딘 그 사람이 시킨 게 아닐까? 그럴 것이다, 그럴 거야. 그럼 이 녀석을 흠씬 두들겨 패주면 잘하면 점수까지 딸 수 있겠구나.’
그렇게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더욱 팔테스를 두들겨 패는 데에 열을 올렸다.
팔테스는 흉하게 바닥에 엎어져서 두 팔로 그의 공격을 무마시키고 있다가 이를 악물고 대들었다.
“이… 이러면 나도 가만있지 않겠다!”
“가만있지 않으면 어쩔 건데?”
일어서려다가 팔테스는 조르바의 발길질에 걷어차여 다시 볼썽사납게 나뒹굴었다.
그 이후로는 구타가 더 극심해져, 이러다간 자신이 이렇게 허무하게 죽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아닌 게 아니라 이마가 찢어져 피까지 흐르고 있질 않은가.
“이건 경우가 아니다. 아무리 내가 지금 이런 모습이라고 해도 이리 대할 수는 없다. 좋게 경고할 때 그만두도록.”
나름 위엄을 실어 팔테스가 말했지만, 조르바에게는 씨알도 먹히지 않을 소리였다.
체내의 기를 이용한 것이 내공이라 한다면 외공은 말 그대로 손발을 비롯한 신체 부위를 이용한 무공이다.
그렇게 따져 볼 때, 아주 긴 시간 동안 원치 않는 체력 연마를 하게 된 조르바는 팔테스보다 수배는 더 외공이 뛰어났다.
동체시력 또한 마찬가지였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오딘에게 직접 맞은 것이 몇 차례인가? 팔테스가 휘두르는 손발 따위는 너무도 쉽게 피할 수가 있었다.
그간 당한 분풀이를 조르바는 지금 이 녀석에게 하고 있었다.
‘왕자인지 뭔지 내 알 게 뭐람? 허허, 속이 다 시원하구나. 십 년 묵은 체증이 다 내려가는 것 같네그려.’
조르바의 표정은 희열을 넘어 쾌락까지 느끼고 있는 듯했다.
그에 반해 팔테스는 팔을 뻗어 호소하고 있었다.
“그, 그만…….”
그런데도 조르바는 절대 멈추지 않았다.
팔테스도 필사적이었다.
‘이렇게… 이렇게 죽을 수는 없다. 이렇게 허무하게 죽어서는 안 된다!’
퉁퉁 부은 눈이 피로해져 눈이 감기려 했지만, 의식을 놓지 않고 버텨 냈다.
그때, 어딘가에서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야, 너 소질 있구나?”
그제야 구타가 멈췄다.
팔테스는 퉁퉁 부운 눈꺼풀이 눈을 덮은 까닭에 그 대상을 눈으로 확인할 순 없었지만, 귀로는 알 수 있었다.
“오, 오셨습니까?”
얼핏 들어도 팔테스는 자신을 때렸던 이가 잔뜩 겁을 먹은 목소리라는 것을 간파할 수 있었다.
‘크흑, 내 오딘 저자에게 안 좋은 감정이 있지만, 어찌 되었건 날 때린 이자는 큰 벌을 받겠구나. 이놈, 네 행동을 뼈저리게 뉘우쳐 보아라!’
그러나 팔테스의 예상은 보기 좋게 어긋났다.
“그러고 보니 요즘 일을 열심히 한다고 들었어. 이제야 뉘우치기 시작하는구나.”
이 얼마나 조르바가 기다렸던 말이던가?
고뇌의 시간이 얼마인지 계산도 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그와의 악연이 영원할 것만 같아 목숨을 끊어볼까를 고민한 적이 몇 번이었던가.
세상이 새롭게 느껴지고 있었다.
‘전 새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새사람이…….’
당장에 조르바는 눈시울이 달아오르려 했지만 인내로 버텨 내며 그냥 합죽이처럼 웃었다. 그게 그가 원하는 모습일 것이므로.
그리고 어수룩한 태도로 뒷머리를 긁적거리며 답했다.
“그냥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입니다.”
오딘이 듣고 보니 또 거슬리지 않은 말이었다.
“그래, 그런 태도 보기 좋아. 그럼 이제부터 다른 일을 해보는 건 어떠냐?”
“다른 일이라면 무엇을 지칭하시는 말씀이온지?”
하마터면 조르바는 너무도 반가워 눈에서 빛을 발할 뻔했다.
만일 그랬다면 오딘에게 실망을 샀으리라.
그 역시 오랜 수행의 결과였다.
가식적인 표정을 마음껏 지을 수 있다는 것. 이게 자신의 최대의 장기가 아니던가.
오딘이 말했다.
“이번에 맡길 일은 교육이야. 바로 저 녀석의 교육 말이야. 새사람이 되게 할 수 있겠어?”
사실 조르바가 기다리던 말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그조차도 감사해하고 있었다.
“맡겨만 주신다면 기필코 해내 보이겠습니다.”
그 각오에 사무친 대답을 팔테스는 들을 수 없었다.
앞서 오딘의 말에 절망을 느끼며 이미 맥이 다 풀어진 채 가물거리던 의식을 놓았던 것이다.
* * *
제라드는 왕성의 별궁 안에 머무르고 있었다.
그동안 그는 오딘은커녕 켈타스 후작도 만날 수 없었고, 엘레느 여왕 폐하와 발데르 공작도 볼 수 없었다. 그들 모두 전장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바로 어제 오딘과 켈타스 후작, 그리고 엘레느 여왕 폐하가 왕성 안으로 돌아왔다는 기별을 전해들었다. 그래서인지 간밤엔 영 잠이 오질 않았다.
먼저 그를 보길 청한 사람은 켈타스 후작이었다.
그는 오자마자 난리 법석을 피웠다.
“크레멘 준남작과 둘이서 대군을 혼란에 몰아넣었다고 들었소. 다친 데는 없으시오?”
다친 데가 왜 없겠는가.
갑옷조차 착용하질 못했었기에 목과 팔, 허벅다리에 자상을 입어 출혈이 컸었다. 그런데도 제라드는 그에게 걱정을 끼치기 싫어 고개를 살래살래 저었다.
“내 검을 놓은 지 오래되었다지만 그럴 리가 있겠소?”
물론 마법사에게 치료를 받은 상태였다.
하지만 불행히도 깊은 상처는 아물지 않아 붉은 핏물에 젖은 붕대가 바지 안쪽에 감겨 있었다.
딱 보기에도 티가 났다. 한쪽 다리가 유달리 두꺼워 보였으므로.
켈타스 역시 바리톤의 패잔병들을 뒤쫓느라 말을 타고 사방을 내달린 까닭에 지친 모습이었다.
그러나 제라드를 보자 그 피로가 서서히 씻겨 나가기라도 하는 모양이다.
그는 제라드에게 바짝 다가서 두 손을 부여잡으며 좋아했다.
“잘되었소, 정말 잘되었소. 진즉에 이랬으면 그 고생은 안 해도 되었을 것을…….”
이리 걱정해주는 데에 어찌 고맙지 아니하랴.
따지자면 자신을 왕성에 불러준 사람 역시 켈타스 후작이 아닌가.
“내 그곳에 가 마음껏 쉬고 왔소. 생각보다 경치가 좋더구려. 갈매기들을 벗 삼아 푸른 바다를 바라보는 기분이 그렇게 상쾌할 수가 없었소.”
그 말에 켈타스는 얄미운 얼굴을 하고 물었다.
“그럼 다시 가시겠소?”
제라드는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하!”
때마침 크레멘이 활짝 열려 있던 별궁 문 안으로 들어서자 켈타스가 다그치듯 물었다.
“자네 잘 왔네. 그래, 무슨 생각으로 적진을 휘젓자고 한 것인가?”
크레멘은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제가 하자고 한 게 아닙니다. 후작님께서 그러신 것 것뿐입니다.”
그는 서슴없이 제라드를 후작으로 부르고 있었다. 제라드의 과거를 문제 삼지 않겠다는 얘기다.
밉지 않은 얼굴로 제라드가 고마움을 나타냈다.
“자네가 도와주지 않았다면 난 왕성에 와보지도 못하고 죽었을 걸세. 내 잊지 않음세. 그러나저러나 하나 궁금한 게 있었네. 자네 그동안 별천지에라도 다녀온 것인가? 내 기억하기로는 자네의 실력이 대단하긴 해도 그 정도까진 아니었는데…….”
“별천지라면 별천지겠지요.”
알 듯 모를 듯한 말이었지만, 제라드는 그에 대해 어느 정도 유추해볼 수 있었다.
“오딘 님께서 만드신 곳이 그곳인가?”
“이미 들으셨군요. 그렇습니다.”
“그곳에 가면 강해질 수 있다는 말이로군. 켈타스 후작, 자네 알고 있나? 준남작이 이제는 나보다도 강하네.”
“과찬이십니다. 그래도 아직은 후작님께서 저보다 더 강하시지 않습니까.”
서로 양보하며 한발씩 물러서고 있다.
듣는 켈타스는 조금 서운했다. 자신도 어서 그 일월진이라는 곳에 들어가 검술을 연마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직접 전해들은 것은 아니지만, 들리는 말에 의하면 조만간 들어갈 수 있게 된다고 했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자연스레 이가 갈렸다.
‘바리톤 놈들만 아니었더라도…….’
갑자기 구겨진 그의 인상을 보며 제라드가 물었다.
“언짢은 일이 있구먼?”
“아, 아니요.”
대화는 그것으로 일단락이 났다. 아레인에서 제일로 치는 사람이 자신과 가장 잘 어울릴 만한 흑색의 장포를 걸치고 이곳에 발을 디디고 있어서이다.
“오딘 님을 뵈옵니다.”
켈타스와 크레멘이 그를 발견하고 동시에 읍을 했다.
반면에 제라드는 반쯤 고개를 숙여 오딘을 윗사람으로만 인정하고 있었다.
오딘은 흥미롭다는 듯 그를 관찰했다.
“왜 억울하다고 말하지 않았지?”
그것이 첫마디였다.
제라드는 속에 있던 말을 꺼냈다.
“결과를 보여 주지 못했습니다. 오해를 사더라도 달리 할 말이 없었습니다.”
“결과를 보여 주지 못했다라? 나쁘지 않은 말이로군.”
그 대답이 오딘에게 썩 괜찮은 첫인상을 심어주었다.
오딘은 크레멘과 켈타스를 물리고는 다시 물었다.
“이 왕성으로 부른 이유를 알고 있느냐?”
“소신에게 기회를 주심이 아닐까 합니다. 아무런 것이나 상관없습니다. 기회만 주신다면 일개 병졸이라도 되어 아레인을 위해 힘껏 돕겠습니다.”
“틀렸다.”
“네?”
“아레인이 아니다. 본 좌를 돕는 것이다.”
잠시 제라드는 생각에 잠겼다. 그러는 동안 오딘이 부연 설명을 덧붙였다.
“허명이니라. 왕국은 무엇이며, 영지는 무엇이냐? 다 상징이 아니더냐?”
제라드는 뭔가를 깨닫고 탄식을 내뱉었다.
‘헤아릴 수 없는 분이시다. 내 생각이 짧았다. 아레인이란 국호 따위에 목을 매지 말라는 말씀을 하시는 거구나. 하인리히 또한 아레인이란 국호를 가지고 있지 않았나. 결국은 다 사람인 것을…….’
많은 광경을 목격하지 못했지만, 이 사람을 모시는 자들은 하나같이 확신에 찬 모습들이었다.
그것이 자신들이 얻는 것이리라.
힘을 가지고 누구에게도 굴욕받지 않는 것, 그리고 마땅히 모셔야 할 사람을 모시는 것!
그는 당장 결단을 내렸다.
“오딘 님을 따르겠습니다. 미천하지만 절 도구로 사용해주십시오. 지극한 정성으로 받들어 모시겠습니다.”
오딘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내 너에게 후작의 작위를 내려줄까 한다.”
전혀 예상치 못했는지 제라드는 손사래를 치며 당황했다.
“후, 후작이라니요? 당치도 않습니다. 부디 명을 거두어주십시오.”
“네 원래 후작의 작위를 가졌었다고 들었다. 본 좌가 잘못 들은 것이냐?”
“그건 아주 예전의 일입니다.”
오딘은 만족스런 미소를 머금고는 못을 박아 말했다.
“다른 사람들도 생각해줘야 하느니라. 번거롭게 할 순 없지.”
* * *
아레인 왕성 내의 대전이었다.
안에 모인 사람들의 얼굴을 밝혀 주려는 듯, 천장에 매달린 수백 조각의 크리스털로 이루어진 샹들리에가 색색이 반짝이며 빛을 발했다.
오딘은 전쟁 도중의 귀족들을 불러들였다.
가인과 헤르, 발데르와 보탄, 켈타스 이하의 귀족들이 참여한 가운데 제라드의 작위 수여식이 시작되었다.
가운데 선 사람은 제라드였다.
그를 중심으로 발데르와 보탄, 켈타스, 가인과 헤르를 포함한 귀족들이 양옆으로 늘어서 있었다.
엄중한 분위기 속에서 엘레느가 왕좌에서 일어서 봉인된 파피루스를 두 손에 받쳐 들고, 사뿐한 걸음걸이로 붉은 카펫을 밟으며 아래로 내려서고 있었다.
그녀가 한 걸음, 또 한 걸음을 다가올 때마다 제라드는 적잖이 긴장을 하는 모습이었다.
명령은 오딘에게서였지만, 임명은 엘레느가 하는 일이다.
그래서였다. 자신이 기억하고 있던 왕가의 혈통으로부터 작위를 받게 되어 감회가 새로웠던 것이다.
마음속으로나마 그는 먼저 세상을 떠난 왕에게 눈시울을 붉히며 사죄했다.
‘신이 모자라 제대로 보필해드리지 못했사옵니다. 부디 편안히 눈을 감으시옵소서. 두 분의 따님은 눈을 마주치기 어려울 정도로 아름다우십니다.’
곧 엘레느가 지척에 다다랐고, 제라드는 숨 쉬는 법도 잊어버렸는지 한쪽 무릎을 바닥에 대고 고개를 숙인 채 움직일 줄을 몰랐다.
그러는 동안 엘레느가 봉인을 풀고 파피루스를 펼쳐 안에 적힌 내용을 낭독하기 시작했다.
“경은 들어라. 앞서 거짓된 자들과 한패가 되어 왕국에 반란을 일으켰다는 것은 사실과 다르다고 판명된바, 억울함을 호소하고 선처를 받았음이 마땅한 것을 경은 그러지 않았다. 이는 왕실의 눈과 귀를 멀게 하여 없는 사람 취급한 것과 다름없으니 엄벌로 다스려야 마땅할 것이나, 나 엘레느는 경의 능력을 높이 사서 다시 한 번 기회를 줄까 한다…….”
안에 쓰인 내용이 뭐 그리도 많은지 엘레느는 계속하여 또박또박 읽어나갔다.
당연히 그녀 자신이 쓴 내용이 아니었다.
내용을 불러준 것은 오딘이었으며, 서기가 이를 받아 적은 것뿐이다. 대충 불러주다 보니 서기는 이에 살을 붙여야 했고, 그 때문에 내용이 길어진 것이다.
다행히 그녀의 목소리가 하도 고왔기 때문인지 그곳에 모인 중신들은 전혀 지루해하거나 따분해하지 않았다.
특히나 제라드에게는 구구절절이 마음에 와 닿는 말이었다.
오로지 그녀의 목소리만이 대전 안에 옥구슬처럼 흘러가더니 어느새 내용의 끝 무렵에 다다랐다.
“하여 본래의 후작의 작위를 내려 주노라.”
엘레느는 다 읽은 파피루스를 옆에 서 있던 궁내부 대신에게 건네주고는, 가늘고 긴 은빛의 보검을 허리춤에서 꺼내들어 제라드의 양어깨와 정수리에 툭툭 대고는 말했다.
“축하드려요.”
“황송하옵니다.”
자신이 허수아비라고 생각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엘레느는 지금의 일을 당연시 받아들였다.
오히려 기분이 좋기까지 했었다.
이 작위 수여식 덕분에 잠시지만 오딘을 보았으며 얘기 또한 나눠보지 않았던가. 그래도 오딘은 그녀에게 상의를 하여 결정을 내렸던 것이다.
어젯밤의 일이 떠올라 그녀의 볼이 잠시 홍조를 띠었다.
그러다가 표정을 고치고 정색하며 제라드에게 뒷말을 이었다.
“이 전쟁이 끝나는 대로 영지를 하사하겠어요.”
그녀의 말에 여러 중신들이 크게 반기며 기뻐했다.
작위 수여식이 끝난 후에 발데르가 그를 보았다.
“내 오해가 컸군. 그간 자넬 본의 아니게 미워했다네. 그 점, 미안하게 생각하네.”
“아닙니다. 오해를 산 제가 잘못입니다.”
발데르에게 나쁘게 자리했던 감정이 눈 녹듯 사라지고 있었다.
보탄도 기다리다 제라드를 반겼다.
“축하드립니다, 후작님.”
“고맙네, 고마워.”
서로가 이렇게 살갑게 맞아주니 제라드는 눈에 눈물이 다 고일 지경이었다.
이 모두가 오딘이라는 매개체를 통해서였다.
일전에 없던 철저한 왕권 중심의 체제가 자리를 잡아가고 있는 것이다.
* * *
바리톤의 대군에는 적들이 폭풍우처럼 몰아쳤다.
요 며칠간 아레인군의 공격이 잠시 느슨해진 것 같더니, 이틀 전부터는 밤과 낮을 가리지 않고 무차별적으로 공격을 감행하고 있었다.
그에 바리톤군의 사기는 말이 아니었다.
일각에서는 살기 위한 도주를 택하고 있는 자들도 있었는데, 그 추세가 점점 늘어나는 판국이었다.
그런데도 로테노아는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어디 있소? 도대체 왜 감감무소식인 것이오? 내 언제까지 당신을 기다려야 한다는 말이오?’
섣불리 입 밖에 내지 못한 탄식이었다.
만이 넘던 대군이 반이 넘게 축나버렸다.
그들 모두가 꼭 죽었다고 볼 수만은 없었다.
부상을 당해 전투 불능이 된 자들도 적지 않았고, 공포를 이기지 못해 앞서처럼 탈영을 한 자들 또한 많았다.
이 역시 양호한 편이었다.
만약 아레인이 전열을 가다듬고 전군을 몰아쳤다면, 더 이상 버텨 낼 재간이 없었으리라.
그들은 마치 고양이가 생쥐를 갖고 놀 듯 바리톤을 농락하고 있었다.
상황이 이러니 제대로 맞서지도 못하는 상황이었다.
로테노아의 머릿속에 자리한 계산이 그에 일조했다.
‘최대한 전력을 아껴야만 한다. 그리하여 삼 왕자가 돌아오고, 만에 하나 게티롱 그 사람이 저 악마를 처리하게 된다면 한 번에 몰아칠 것이다.’
패전을 거듭하고 있는 군사들에게 귀감이 될 만한 얘기가 있다면, 지금으로부터 무려 250년 전 발생한 크라디아 제국군과 메라디스 연합군의 전투였다.
당시 사방에서 들고일어난 메라디스 연합군은 대륙의 패자로 떠오른 크라디아 제국군에 의해 패전만을 거듭하다 단 한 번의 전투에서 승리를 하게 된다.
바로 로만강 전투.
그 자리에서 모두 죽기를 각오하고 메라디스 연합군은 단 한발도 물러서지 않았다.
팔을 잃은 자도 피가 말라 죽기 전까지 싸웠으며, 다리를 잃은 자 또한 한 발로도 전진했다.
연합군은 귀신의 탈이라도 쓴 것처럼 표독한 눈빛으로 전진만을 거듭하며 크라디아 제국군에 대항해 싸웠다.
그리고 그 결과 대승을 거두게 되었는데, 크라디아 제국군은 이에 막대한 피해를 입게 되었다.
전술에 능한 지휘관들이 이 전투에서 목숨을 잃었으며, 뛰어난 무장들 역시 전투 도중 죽어나갔다.
그리고 결국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된다.
그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로테노아는 단 한 번의 승리로 전세를 역전시킬 수 있다고 믿었다.
우선은 저들의 군대가 아직까지 수가 적다는 점에 일말의 희망을 걸어볼 수도 있겠지만, 지금은 적용되지 않을 얘기였다.
무엇보다 군대의 사기가 말이 아니다.
지휘관인 귀족들마저 축 처진 어깨를 하고 있는데, 다른 이들은 오죽할까.
‘그 악마를 없앤다면 사기는 다시 진전될 것이다.’
로테노아는 그렇게 믿고 있었다.
그리고 오늘도 저들에게 유린당해가면서도 이를 악물며 최후의 방어선까지는 물러나지 않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