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말의 무게 (20/67)

말의 무게

개울 위로는 제법 운치 있는 돌다리가 자리했으며, 광장의 중앙에는 분수대가 설치되어 있었다.

아기자기하게 자리하고 있는 건물들은 우아하고 깔끔했으며, 곳곳에는 사람들이 맑은 물에 발을 담그고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공간들도 자리해 있었다.

이곳 로독스는 그리 크지 않은 규모의 도시였다.

그럼에도 이곳은 아레인에 사는 많은 사람들의 잦은 발길이 이어지고는 했는데, 그만큼 이 도시의 아름다움은 사람들의 기억에 오래도록 각인되어 한번 찾은 사람은 꼭 다시 찾곤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평소에는 인파로 가득할 이 시간에 로독스는 한산하기만 했다.

이유인즉슨, 바리톤의 침공 때문이었다.

곧 군대가 당도했다. 두 방향에서 도착한 각 부대의 지휘관들은 서로 눈을 마주치며 반가움을 금치 못했다.

“어서 오시게.”

“때에 맞게 도착해서 다행입니다. 오래 기다리시지는 않으셨는지요?”

“나도 방금 도착했다네.”

대화를 나누는 이들은 다름 아닌 발데르 공작과 보탄 백작이었다.

근래 들어서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던 두 사람이었다. 자연히 서로 마주칠 시간도 적었고, 그 때문에 지금의 반가움은 배가 되었다.

이렇게 운치 있는 곳에서 잠시 쉬어갈 만도 하건만, 두 사람은 그럴 여유가 없는지 진군을 멈추지 않았다.

“듣기로는 몸소 나서셨다고 하더군.”

발데르의 말이 뜻하는 바를 어렵지 않게 알아차리고 보탄은 허심탄회하게 웃었다.

“찍혀도 참 안 좋게 찍힌 모양입니다. 하하!”

발데르가 마주 웃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우린 그분께 늘 신세만 지는 것 같군.”

“저 역시 그게 부끄럽습니다. 이번에 저들의 움직임을 간파하신 것 역시 오딘 님이라고 들었습니다.”

“나도 그렇게 들었다네. 죄송한 마음을 금할 길이 없어.”

아쉬운 것은 아직까지도 아레인에 관한 일이었다.

보답을 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은데 아직도 아레인에 관한 일을 해결하는 데에 힘을 빌리고 있는 판국이니 영 마음이 편치가 않았던 것이다.

보탄도 그와 같은 심정이었다.

“공작 전하, 지금의 저희와 바리톤이 싸운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아레인은 약하지 않아. 다만, 출혈은 컸을 것이라고 생각되네. 지금 상황만 보아도 그렇지 않은가. 우린 현실에 안주하지 말고 더욱 노력해야 할 걸세.”

“백번 공감하는 얘기이옵니다. 그래도 공작 전하는 마스터에 오르셨으니 더 무얼 바라시겠습니까? 일이 끝나는 즉시 검술에만 매진하여 저 역시 그 경지에 오르려고 했는데, 바리톤 놈들이 쳐들어오는 바람에…….”

보탄은 무엇인가를 깨달아가고 있는 단계였다.

그러나 발데르의 입에선 그리 달갑지 않은 얘기가 흘러나왔다.

“그렇지 않네. 마스터라고 다 같은 마스터가 아닐세. 자넬 폄훼하고자 하는 말이 아님을 먼저 알아두게. 쉬운 예로 나와 오딘 님만 비교해보아도 그렇잖은가.”

“제 생각은 공작 전하와 다릅니다. 오딘 님은 마스터가 아닐 겁니다. 검술의 최고 경지라는 그랜드마스터라면 모르겠습니다만…….”

사견을 내보이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보탄의 이런 말들을 발데르는 기분 나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백작과 공작이라면 당연히 보이지 않는 벽이 존재한다. 이렇게 스스럼없이 자신의 의견을 말하는 것은 둘의 거리가 매우 가까움을 의미했다.

말투만 그렇지, 발데르는 보탄을 오랜 지기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럴 수도 있겠지. 확실히 그분의 힘은 사람의 힘이라고 생각되지 않아. 가만, 이럴 게 아니라 속도를 더 내야겠어. 로독스는 왕성과 그리 멀지 않은 거리이니…….”

그에 보탄은 때 묻지 않은 미소로 화답하였다.

“그래야겠습니다.”

* * *

아레인 왕성의 거대한 성문이 열리고 있었다.

그리고 줄지어 도열한 군대가 위용 있는 모습을 드러냈다.

선두에는 3필의 말이 각자의 주인을 태우고 있었는데, 한 사람은 켈타스 후작이었으며 다른 한 사람은 괴짜 노인, 그리고 백마에 올라 있는 사람은 엘레느였다.

켈타르 후작은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존경을 담아 아뢰었다.

“오늘 여왕 폐하의 용기는 아레인의 모든 백성들과 귀족들이 높게 살 것입니다. 신이 목숨을 걸고 지켜 드리겠사옵니다.”

어린 나이에 전쟁터로 향한다는 것이 겁이 날 만도 했건만, 그녀의 눈빛에는 굳은 각오가 서려 있었다.

“저들이 아레인의 여왕은 겁쟁이라고 놀릴 거예요. 제가 욕먹는 것은 참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백성들과 여러 대신, 그리고 아레인이 욕먹는 것은 참을 수 없어요.”

켈타스는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부족한 신이 국왕 폐하를 제대로 보필하지 못하였습니다. 잠시나마 역적을 받든 것은 뼈저리게 뉘우치고 있습니다. 부디 하늘에서나마 지켜 봐주옵소서. 국왕 폐하의 따님, 아니 여왕님을 보필하는 데에 일체 모자람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크레멘을 따랐던 자들이 왕성에 이와 같은 일을 알렸다.

그러나 발데르 공작과 보탄 백작의 진영, 그리고 가인과 헤르의 진영에 이 일을 보고할 필요는 없었다. 이미 발데르 진영에서 도착한 마법사가 작금의 상황을 아뢰었기 때문이다.

의외롭게도 오딘은 칙서를 통해 왕성에 있는 군대마저 내오라고 하였다.

켈타스 후작이 내심 기다리던 말이었다.

혹여나 왕성만 지키다 허무하게 끝나버리진 않을까 노심초사했던 그였다.

하지만 켈타스 후작만큼 엘레느의 표정은 밝지 못했다.

‘또 날 보신다 하더라도 뒷전이시겠지?’

걱정을 떨쳐 버리려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는데, 그 바람에 그녀의 찰랑거리는 금빛 머리카락이 바람에 흩날리며 아찔한 향기를 물씬 풍겼다.

근방의 지휘부는 당혹한 기색이었다.

날이 갈수록 그녀의 아름다움이 더해져 신하들조차도 사심이 생길 정도였다.

‘충심으로 이겨 내야 한다.’

이것이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진 마음이었다.

하나, 그녀는 여러 중신들의 이런 마음을 알지 못했다.

신경은 죄다 ‘그분’ 아니면 ‘여왕으로서의 책임’ 정도에 있었기에 그쪽에 미처 관심을 기울이지 못한 까닭이다.

‘아냐, 그분을 보고 싶은 것은 맞지만 지금은 적을 맞으러 가는 거야. 할아버지도 그렇게 말했는걸.’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그녀는 그렇게 마음을 다졌다.

성문이 활짝 열리자 켈타스가 그녀의 행동을 살폈다.

엘레느는 옆구리에 파지하고 있던 금빛의 투구를 머리에 깊이 눌러쓰고서 말고삐를 끌어당기며 말을 전진시켰다.

그러자 켈타스를 포함한 5백의 군사들이 일심동체가 되어 발을 내디뎠다.

곧 넓은 세상이 한눈에 들어왔다.

여러 말들의 말발굽 소리와 보병들의 발소리가 그녀의 귓가로 파고들었다.

그에 그녀는 막중한 책임감을 느끼고는 독하게 각오를 다졌다.

‘약한 모습을 보이면 안 된다! 난 아레인의 여왕이니까!’

그녀가 이 길을 가게 된 것은 무엇보다 괴짜 노인의 덕이 컸다.

아직은 그의 진짜 이름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그녀였다.

괴짜 노인 역시 할아버지 소리를 듣는 게 좋다며 계속 그리 불러주기를 원했다.

그는 엘레느의 정신적인 지주이자 든든한 후원자의 역할을 하였다. 힘들 때 위로해주고 항상 따뜻하게 감싸주어 일찍이 세상을 떠난 부모의 빈자리를 메워준 것이다.

거기에 마법까지 가르쳐 주었으니 고마움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래도 엘레느는 격식을 차려 고마워하기보다 그를 할아버지로서 받아들이는 것이 그에게 더 큰 기쁨이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길을 재촉하며 엘레느는 많은 생각을 했다.

그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져 뇌리에 단 하나의 의문을 던져 주었다.

‘그분이 내게 바라는 건 무엇일까?’

크게 어렵지 않은 의문이었다.

‘강한 면모를 원하시겠지. 아레인을 이끌어갈 존재가 되어주기를 바라고 계실 거야. 난 도구다. 그것을 잊으면 안 된다.’

생각의 끝에 가서는 급격히 우울해졌지만 애써 자신을 채찍질했다.

그때 문득 다정하고 따스한 목소리가 물어왔다.

“두렵지 않느냐?”

괴짜 노인이었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세상을 환하게 만들어줄 만한 미소를 짓고는, 나란히 말을 몰아가고 있는 그의 귀에 대고 나지막이 속삭였다.

“사실은 두려워요. 겁이 많이 나는걸요.”

노인은 함박웃음을 지으며 행여 말소리가 샐까 손을 들어 반대편을 가리고는 그녀만 들을 수 있게 얘기했다.

“옆에 할아비가 있을 때는 염려 말거라. 저들이 네 옷자락도 건들지 못하게 만들어주마.”

엘레느는 웃었지만 표정에선 적잖은 서운함이 묻어났다.

‘할아버지가 가시면 전 정말 힘들 거예요. 그러니 가지 마세요. 저랑 평생 함께 살아요. 예?’

종종 그는 자신이 떠날지도 모른다는 말을 암시해왔다.

맘 같아서는 평생 같이 살자고 얘기하고 싶었지만, 그 말은 지금처럼 입 밖으로 떨어지지가 않았다.

괜히 서먹서먹해질까 두려워 차라리 얘기를 꺼내지 않았던 것이다.

“저도 이제 마법사인걸요. 제 한 몸 못 지킬까 봐서요?”

그랬다. 엘레느는 그간 마법에 대해 장족의 발전을 보여 왔다.

노인도 종종 그녀를 어디 내어놔도 염려할 게 없을 것 같다며 대견해하지 않았던가.

“할아버지가 말씀하셨잖아요. 실험실 마법사는 아무리 대단해도 제 실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법이라고요. 저도 겪어볼 거예요. 할아버지가 이렇게 대단한데 손녀의 실력이 엉망이면 안 되잖아요.”

노인은 소리가 나게 고개를 끄덕였다.

“기특한 녀석.”

긴 시간을 살아오며 이렇게 좋아한 사람이 몇이나 될까? 문득 노인은 그런 생각을 하였다.

지금의 엘레느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손녀 그 자체였다.

그것은 세월과 비례했다.

한나절도 세월이고, 하루도 세월이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몇 년이었지만, 그 시간들이 흘러갈수록 노인의 그녀에 대한 애정은 나날이 커져만 갔다.

두 사람이 정겹게 얘기하며 즐거워하고 있을 때에도 점차 저들과의 거리는 가까워져 갔다.

바리톤의 대군이 멀리서나마 눈에 들어와서야 그녀는 서서히 긴장을 하기 시작했다.

아레인의 군대가 멈춰 서자 엘레느는 준비했던 말을 꺼내었다.

“켈타스 후작님.”

켈타스가 말 위에서 팔을 굽혀 보이며 읍을 했다.

“예. 여왕 폐하, 하명하시오소서.”

“병력의 운용에 관한 것들은 후작님께 맡기겠어요. 아레인 왕국을 침범한 저들에게 본때를 보여 주세요.”

“여왕 폐하의 지엄하신 명을 받들어 모시겠나이다.”

그는 돌아서서 굳은 각오를 내보이는 군사들을 바라보며 드높게 소리쳤다.

“여왕 폐하의 호위대를 제외하고는 모두 나를 따르라! 본국을 짓밟은 자들의 어리석음을 가르쳐 주어야 할 때가 왔다!”

부관들이 큰 소리로 지시 사항을 하달했다.

“일 진 앞으로!”

“이 진 앞으로!”

“삼 진 앞으로!”

150여 명 안팎의 군사들이 거리를 두고 착착 줄을 맞춰 섰다.

대열이 정비되자 각각의 부관들은 부대를 통솔해나갔고, 마지막으로 켈타스 후작이 엘레느에게 아뢰었다.

“신 켈타스, 반드시 살아서 돌아오겠사옵니다.”

이어서 그는 말을 돌려 고삐를 채었다.

“이럇!”

그의 말이 용맹하게 달려 나가는 것을 본 엘레느는 약해지려는 마음을 다잡고서 호위대에게 전했다.

“우리는 측면을 지원하고 저들의 대열을 흩게 될 겁니다. 쉬바인 경, 날 따라오세요.”

“네, 폐하.”

아레인 최고의 마법사 쉬바인도 공을 세우겠다는 일념으로 눈을 빛냈다.

호위대인 만큼 그녀를 따르는 이들은 하나같이 뛰어났다. 이들은 예전 일월진 안에서 수련을 했던 기사들과 마법사들이 주를 이뤘다.

엘레느의 표정이 눈에 띄게 침울해졌다.

“저도 힘이 되어야겠어요. 할아버지가 가르쳐 준 마법이 사람의 생명을 앗는 일에 쓰이겠지만 망설이진 않을래요. 지켜야 할 것이 있잖아요.”

엘레느의 나지막한 중얼거림에 괴짜 노인은 그녀가 의욕이 너무 앞서는 듯해 조용히 타일렀다.

“얘야, 왕은 말이다… 직접 적을 쓰러뜨리는 것보다도 때로는 존재를 나타내주어 군사의 사기를 드높여 주는 것도 중요하단다.”

* * *

바리톤 대군은 일대 혼란을 겪고 있었다.

현자의 계책은 매우 그럴싸했지만, 뜻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지금이라도 기사들을 빼야 하질 않겠습니까? 저러다간 명망 있는 기사들이 죄다 죽어버릴 것입니다!”

어느 지휘관의 간절함이 담긴 외침이었다.

로테노아 역시 당황하긴 마찬가지였다.

본래 어린아이의 싸움부터 어른들의 싸움까지가 그러했고, 전투도 그러했다.

상대가 도망치겠다고 마음만 먹으면 뒤쫓아 잡기가 힘든 것이다.

그러나 저자에게는 그런 상식이 통용되지 않았다.

닿는 것들은 모조리 양분되었다. 몸을 보호할 중장갑주조차 주인과 함께 종잇장처럼 찢어발겨졌다.

급기야 마법이라도 펼치는 것인지 그의 칙칙한 흑검에서는 눈이 부실 정도의 빛이 줄기줄기 뻗어 나왔다.

필사적으로 말을 달려 도망치려는 기사들이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었다. 그는 말보다도 빨랐으므로.

처참하게 널브러진 시신들 사이로 소름 돋는 웃음소리가 전장에 울려 퍼졌다.

“크하하하하!”

귀청이 떨어져 나갈 것 같은 소리에 로테노아를 포함한 여러 사람들이 다급히 귀를 틀어막았다.

묘한 일이었다.

그저 허심탄회하게 웃어젖힌 것뿐인데, 어쩐 일인지 땅이 다 들썩거렸다. 또한 미처 귀를 막지 못한 자들은 비명을 지르며 난리를 쳤다.

“우, 우리가 상대하고 있는 저자가 과연 사람인가?”

로테노아의 질문에 대답할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들 역시 같은 의문을 품고 있었으므로.

제일 놀라고 당황하고 있는 것은 현자 알베른이었다.

자신의 계책이 실패를 낳고 있는 것만으로 당혹함을 금치 못하고 있는데, 정체불명의 말소리가 머리를 울렸다.

-본 좌를 상대로 잔꾀를 부리다니. 미리 말했듯이 날 쓰러뜨리지 못할 경우에 네 혀는 온전치 못할 것이니라. 네놈이 본 좌를 말로나마 업신여긴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다.

다 듣고 나서야 현자는 그 말이 저자에게서 들려온 것임을 깨달았다.

잠시 그와 시선이 마주쳤는데, 자신을 보는 그의 표정은 사악하기가 이를 데 없어 책에서나 접하던 마신에 빗댈 수 있을 정도였다.

이제는 왕의 책망을 걱정할 여유조차 없었다.

당장에라도 저자가 이곳으로 달려와 자신을 손아귀에 넣으려는 느낌이 강하게 풍겨 왔기 때문이다.

몸에 오한이 들고 덜덜 떨렸다.

자신도 저들 같은 꼬락서니로 남을까 두려워 무리 사이에 슬그머니 몸을 숨기려 했다.

그때, 난데없이 로테노아의 힐책이 쏟아졌다.

“이제 어떻게 하면 좋겠는가? 벌써 열이 넘는 기사들이 죽어 자빠졌지 않은가! 우리 바리톤에서는 제일 소중한 전력들이네! 죽은 자가 살아 돌아올 수 없다는 것은 자네도 잘 알겠지?”

알베른은 억울했다.

그 역시도 손뼉을 치며 반길 정도였지 않았는가.

일이 뜻과 같이 흘러가지 않았다고 해서 모든 것을 자신의 탓으로 돌리고 있으니 억울할 법도 했다.

목구멍까지 치솟았던 말을 삼키며 알베른은 당장에 방법을 바꿨다.

“기사들을 빼주십시오. 수로 밀어붙여야겠습니다. 저도 저자의 무력이 저 정도까지일 줄은 몰랐습니다. 창과 방패를 든 병사들을 내어 방진형으로 전진시켜 주십시오.”

로테노아는 미심쩍어 하는 표정이었지만 달리 도리가 없었다.

잠자는 사자의 코털을 건드렸으니 어찌 되었건 끝장을 봐야만 했다. 출혈이 크더라도 말이다.

로테노아의 명이 있고 난 후, 뿔 나팔 소리가 전장에 울려 퍼졌다.

뿌우우우우-!

보통 사람의 2배에 이르는 긴 창들이 병사들의 손에 의해 땅과 수평으로 세워졌고, 혹여 모를 공격에 대비해 그들의 한 손에는 타원형의 방패가 들려 있었다.

곧 진군이 시작되었다. 그저 앞을 향해 척척 발을 맞춰 걷는 것뿐이다.

당장에 오딘은 그들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저들이 다가오는 동안 서넛의 기사들이 그의 검 앞에 명을 달리했다. 그리고 남은 기사들이 병사들 사이로 숨어들었을 때, 그들을 바짝 쫓아 오딘이 그 사이에 교묘하게 파고들었다.

딴에는 철두철미하게 행하던 진에 쉽게 구멍이 생겨 버린 것이다.

상대가 일개 기사라면 포위라는 게 가능했겠지만, 저자는 아니었다.

당장 병사들이 이 의외의 상황에 창을 찌르려 했지만, 자신들의 기사와 너무 바짝 붙은 관계로 그럴 수 없었다.

닭 쫓던 개가 지붕 쳐다보는 격이랄까.

뿔뿔이 흩어졌던 까닭에 당장에 기사들의 피해는 덜했지만, 잘 훈련받은 병사들도 문제가 되었다.

그의 오러가 흉흉한 빛을 내뿜으며 허공을 가르자 긴 창이며 방패며 할 것 없이 두부처럼 속속들이 잘려져 나갔다.

쓰러지는 병사들이 속출하며 삽시에 진이 뭉개지기 시작했다.

차라리 그것뿐이라면 다행이었겠지만, 오딘은 흩어진 기사들을 귀신같이 찾아내 주변과 함께 깡그리 무너뜨리기 시작했다.

현자의 계책은 점점 더 악화일로를 걷게 된 것이다.

전에 알베른은 비교적 냉철하게 상황을 지켜보았었다.

바리톤이 저자에게 그렇게 겁을 먹은 까닭은 광인에 이어 허세를 부렸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그의 강함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었다. 하나, 지금 이 정도로 높게 생각하진 않았다.

‘상종 못할 힘이다. 어떤 장애물도 있을 수가 없다. 사람이 어떻게 저런 힘을 가지고 있을까?’

가능하다면 저자를 비켜 가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았다.

믿기 힘든 일이었다.

고개를 저으며 부정하고 싶었다.

이 많은 군사들이 저자 하나 때문에 공포를 느껴야 한다는 것이 어디 말이 되느냔 말이다.

로테노아는 그에 미덥지 않은 표정을 지었지만, 또 듣고 보니 틀린 얘기가 아니었다. 그러나 당장에 인정해주지는 않았다.

알베른은 초조해져 다시 한 번 왕을 설득했다.

“제물을 바치는 수밖에 없습니다. 배가 부른 짐승은 피로해지기 마련입니다.”

그 말이 화근이었다.

안 그래도 제법 노기가 치민 오딘에게 씻을 수 없는 빌미를 제공한 것이다.

-본 좌를 이젠 짐승에 비유하는군.

현자 알베른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전투가 벌어지는 저곳까지의 거리는 무려 2백 보가 넘는다.

소리를 쳤다면 혹 들을 수도 있었겠지만, 조용한 어투로 로테노아에게만 들릴 정도로 말한 것이었다. 그걸 듣다니, 도대체 저자의 청각은 어느 정도라는 말인가.

뭉쳐 있던 20명의 병사들과 2명의 기사를 간단하게 제압한 후, 그가 여유로운 시선으로 또 한 번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알베른의 가슴 깊은 곳에는 불안한 마음이 싹텄다.

어쩌면 이 대병이 자신을 지켜 주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걱정이 샘솟았다.

돌연 삼 왕자가 난리 법석을 피우며 자신을 구해달라고 했던 모습이 뇌리에 주마등처럼 스쳐 갔다.

‘그럴 순 없다. 그럴 순…….’

그때, 작지 않은 소란이 일어났다.

저자의 힘을 소진시키려 병사들을 내모는 판국에서 겁을 먹은 병사들이 이곳저곳에서 하소연을 했기 때문이다.

핑계는 다양했다.

두고 온 처와 자식이 있다는 말부터 연로한 노부모를 모시고 있거나 저번의 전투에서 부상을 입었다는 등 온갖 핑곗거리들이 다 나왔다.

그러나 기사들과 부관들에게는 씨알도 먹히지 않을 소리였다.

“헛소리를 지껄인다면 가만두지 않겠다!”

귀한 기사들을 구제하기 위해 병사들이 대거 투입되었다.

하지만 오딘은 애초에 목표로 두었던 기사들 위주로 요절을 낼 작정이었다.

애초부터 수천의 군대를 두려워할 오딘이 아니었다.

중원에서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몇만, 몇십만이 넘는 몽고의 대병들 사이를 헤치고 다닌 기억조차 있지 않던가.

그는 경천동지할 무공 덕분에 이 대군을 일일이 상대해주어야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이 와중에도 사상자가 계속 발생하자 로테노아는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그 기분을 헤아린 알베른은 감히 고개를 들 엄두가 나질 않았다.

‘목표가 된 자는 어김없이 죽게 된다.’

기사들의 뇌리에 공통적으로 스친 생각이었다.

손발도 맞지 않았다.

애초에 제압을 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치고 빠지는 데에 열중하라고 하질 않았던가. 그러니 변변한 실력 행사 한번 못해 보고 허무하게 쓰러져 가는 것이다.

동료들의 끔찍한 죽음이 늘어나며 기사들 사이로 걷잡을 수 없는 공포심이 자라났다.

호각으로 알리는 자신들의 퇴각 명령을 들은 뒤 병사들이 투입되는 것을 보고 잠시 안도했지만, 그들은 아무런 도움도 되질 않았다.

이방인이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며 워낙 신출귀몰한 탓에 대다수의 병사들은 그의 움직임조차 간파하지 못했다.

동체 시력이 기사들에 비해 현저하게 떨어지는 병사들이다.

자신들 또한 그의 움직임을 놓치기도 하는데, 병사들이라고 방법이 있겠는가.

타고 있던 말을 잃은 기사들도 있었다.

급작스레 앞에 나타난 그를 보고 말들이 기가 죽어 난리를 치는 바람에 벌어진 일들이었다.

더더욱 신기한 것은 쫓기는 시간이 흐를수록 기사들이 무리와는 상관없는 곳으로 내빼게 된다는 것이다.

돌연 오딘이 행동을 멈추고 로테노아 쪽을 바라보았다. 시선은 정확하게 알베른에게 꽂혀 있었다.

그러자 알베른은 더듬거리며 말했다.

“지, 지금입니다. 저자가 드디어 지친 것 같사옵니다.”

“지쳤다고?”

왕의 의심을 담은 눈빛이 그와 마주쳤다.

“애써 태연한 척하는 것일 겁니다. 폐하, 전군을 몰아주십시오.”

더 이상 로테노아는 알베른의 말을 신임할 수 없었기에 싸늘한 시선으로 그를 보며 협박조의 말을 했다.

“그러다 또 그대의 판단이 잘못된 거라면?”

“구, 국왕 폐하.”

더 이상 하소연이 통하지 않는지 로테노아는 계속해서 그를 나무랐다.

“그 피해는 내가 고스란히 감당해야 하는 것인가?”

입이 백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어쩌다 자신이 이런 상황에까지 내몰리게 되었는지 원통했다.

“현자의 말에 따르라. 단, 이번에도 잘못된 판단이라면 내 그를 엄히 문책하리라.”

지금 로테노아가 하는 말은 청천벽력과도 같았다.

줄곧 믿었지 않았던가.

난생처음 자신의 말에 책임을 느끼고 알베른은 방금 했던 말을 곱씹으며 다시 생각을 되풀이했다.

‘지쳤을 것이다. 그러니 멈추었을 것이다. 전의 광인도 그러하질 않았는가. 내 마스터란 자들에 대해서는 해박한 지식이 없지만, 그들 역시 많은 힘을 쏟으면 마나가 동이 난다고 하였었다.’

이 역시 오산이었다.

평생 무공을 익혔으며 온갖 영약, 영초를 접하며 살아온 오딘이었던지라 지금의 일은 식전 운동거리도 되질 않았다.

알베른은 자신이 오판한 것은 아닐까 하는 의구심을 가지고 앞을 바라보았다.

그가 벌인 일은 정말 대단했다.

죽어 자빠진 자들이 가히 2백은 넘어 보였다.

이에는 알베른의 계책이 거꾸로 악영향을 미친 까닭도 있었다. 병사들을 밀집시켰기에 오딘의 검이 한 번에 여럿을 베어 넘겼으며, 그 때문에 피해가 막심하게 번진 것이었다.

오러 블레이드에 의해 동강난 시신들에게서 시선을 돌린 알베른은 오딘을 보고 생각했다.

‘인간의 체구다. 인간의 체구에 마나가 얼마나 들어갈 수 있겠는가. 저 정도의 힘을 쏟아 부었다면 필시 동이 났을 것이다. 지금 저자가 가만히 서 있는 것은 주위의 마나를 흡수하기 위해서겠지. 더 늦기 전에 손을 써야 한다.’

그렇게 결단이 선 알베른은 자신의 말을 번복하지 않았다.

아직 미련이 남았는지 로테노아가 물었다.

“활을 쏜다면 어떻겠는가?”

그에 알베른은 고개를 저으며 자신의 생각을 강하게 피력했다.

“활을 쏜다면 달아나고 말 것입니다. 저런 자를 놓친다면 후에 저희는 땅을 치고 후회하게 될 것입니다.”

곧 대군이 다닥다닥 붙어 오딘을 향해 진군을 시작했다.

하나, 이상한 것이 있었다. 정말 마나가 동이 났다면 몸을 빼야 정상일진대 그는 그러지 않았다. 도리어 다가오기를 기다리는 눈치였다.

“어리석은 자들에게 경고하노라. 돌아서면 살게 될 것이요, 다가서면 죽게 될 것이니라. 본 좌의 말을 귀담아 듣도록.”

적에게의 마지막 배려였다.

이 섬뜩한 경고에 많은 이들이 겁을 먹었다.

로테노아 또한 잠시 망설이는 빛을 떠올렸는데 알베른이 그를 살피며 종용했다.

“지금이 아니라면 기회는 없습니다. 저자는 지금 허세를 부리는 것입니다. 그도 사람입니다. 국왕께서도 아실 겁니다. 인간에게는 한계가 있다는 것을…….”

하는 수 없이 로테노아는 마지막으로 그의 말을 믿어보기로 했고, 그 결과 병사들에게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라는 명을 내리고 말았다.

백 보… 오십 보… 삼십 보…….

그 거리까지 다가갔을 때 마침내 오딘이 첫발을 뗐다.

돌아서서 가는 것이 아니었다.

마중을 나오기라도 하려는 것인지 점차 다가오고 있었다.

소름 끼치는 순간이었다.

그의 체구에서 흘러나온 마기가 구름처럼 퍼지자 많은 이들이 겁을 먹기 시작했다.

로테노아는 다행히 멀리서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다 갑자기 이상한 직감이 들었다.

‘군사들이 죽게 된다?’

점차 오딘이 바리톤의 군사에 접근하는 속도가 빨라졌다.

이윽고 그가 무리 안으로 섞여 들었고, 로테노아는 순간 눈을 크게 떴다.

무리들 사이에서 다시 치렁치렁한 오러가 빛을 뿜었다.

그 빛은 이리저리 휘둘리며 하늘을 수놓기라도 하듯 장엄한 광경을 연출했다.

그러나 눈을 감탄시키던 광경과 대조되게 피보라는 사방으로 뿜어지며 기괴한 느낌을 전해왔다.

잔혹한 비명이 일었다.

공간이 일그러지기라도 하려는 듯, 한기인지 열기인지 모를 아지랑이들이 이곳저곳에서 피어올랐다.

마침내 서서히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근처에 있던 병력들은 기사이건 병사이건 신분을 가리지 않고 뛰쳐나오려 했다.

서서히 불던 바람이 소용돌이로 변해가더니 곧 광풍이 휘몰아쳤다.

흑룡검은 총 열세 방향으로 검은 줄기들을 뿜어내며 하나의 화폭을 그려 내었다.

바로 용(龍)이라는 형상이었다.

그것은 주위를 집어삼킬 듯이 입을 크게 벌려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냈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사방을 휘감는 검은 형상에 대지가 흔들리며 바리톤의 병력이 영문도 모르게 휩쓸려 갔고, 비교적 멀리 있던 놀란 말들 역시 당장에라도 도망을 칠 듯했다.

로테노아의 명마도 예외는 아니었다.

일찍이 자신이 탄 말이 이렇게까지 겁을 먹은 것을 본 적이 없었다. 당장에라도 이곳을 빠져나가고 싶어 미칠 지경인지 눈에 광기마저 어려 있지 않은가.

이윽고 거대한 폭발이 일었다.

콰콰콰쾅!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땅이 들썩거렸다.

검은 폭풍이 맹렬하게 휘몰아치며 검은 달을 연상시키는 구체로 변했다.

하늘마저 깨뜨릴 생각인지 무섭게 팽창하며 돌던 구체가 삽시간에 주위를 집어삼킨 까닭에 더 이상의 관전은 불가능했다.

확인 가능한 것이라고는 저 검은 폭풍에서 빠져나오려는 바리톤의 병력이 속출하고 있다는 것뿐이었다.

그들은 공포에 질린 눈을 하고 본대로 복귀할 생각도 없는지 무작정 달아나고 있었다. 그를 보면서 로테노아는 자신이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게 아닐까란 생각이 들었다.

‘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가? 도대체 무슨 일이…….’

병력들이 사방으로 흩어진 덕에 로테노아는 수수께끼 같은 일이 벌어진 현장을 목격하게 되었다.

아비규환이었다.

거대한 구덩이가 움푹 파여 있었는데 주변은 온통 붉었다. 땅의 색깔이 군사들의 피로 변질되어 버린 것이다.

의도하지 않게 로테노아는 그 중심에 우뚝 서 있는 무서운 존재를 목격하게 되었다.

‘아레인… 아레인의 하늘이라고 했던가…….’

그때서야 얼마 전 적장이 했던 말이 로테노아의 몸에 직접 와 닿았다.

그답지 않게 사시나무처럼 온몸이 벌벌 떨렸다.

불행한 일이 또 벌어지고 있었다.

여태껏 모습을 보이지 않았던 아레인의 왕국군이 검은 안개 속에서 튀어나와 짓쳐들고 있는 것이었다.

무서운 것은 기마대와 마법사들이었다.

저들의 실력이 문제가 아니었다.

사방으로 흩어지는 바리톤의 군사들은 제대로 된 방비조차 못하여 도망치는 와중에 대항해볼 생각도 못하고 속수무책으로 쓰러져 갔다.

불길이 치솟고 얼음 화살이 날아다니는가 하면, 여기저기에서 처절한 비명 소리가 울렸다.

로테노아는 얼이 빠졌는지 멍한 표정이었다.

인생 최대의 위기가 닥쳐왔지만 어찌할 바를 몰라 그 자리에 석상처럼 굳어 있었다.

도망치듯 뒤로 빠지던 귀족 하나가 황급히 아뢰었다.

“국왕 폐하, 여기서 주저하시면 아니 되옵니다. 어서 퇴각을…….”

겨우나마 정신을 차리고 위험 지역에서 물러나면서 현자를 찾았지만, 그의 모습은 어디에서도 발견할 수 없었다.

* * *

바리톤군의 대패.

이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유프라는 낯부끄러운 얼굴색을 지었다.

아레인의 여왕과 아주 잠시 말을 나눈 것뿐이지만, 그 잠시의 순간이 꿈처럼 달콤했다.

‘그녀와 대화를 해보았어. 하하, 하하하!’

그가 데려온 군사들과 합류한 터라 이런 말을 입 밖에 낼 순 없었다.

한편으로는 의문이 아직도 가시질 않고 있었다.

수수께끼의 노인, 아니. 지고한 경지에 오른 마법사라고 봐야 맞을 것이다.

‘어째서 그런 자가 아레인에 있단 말인가? 어쩌면 걱정을 해야 할 것은 아레인이 아니라 바리톤이다. 분명 노인이 그렇게 말했다. 자신보다 더 무서운 존재가 바리톤에 이를 드러내고 있다고… 그가 누굴까?’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돌연 소름이 끼쳤다. 그리고 생각은 물꼬를 트며 더욱 깊어졌다.

‘어떻게 한다? 아바마마께 이 같은 사실을 알려야 할지도 모른다. 하나, 그리된다면 내가 한 일을 낱낱이 고해바쳐야 할 수도 있다. 아아, 막막하구나.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무작정 노인이 한 말을 믿을 수는 없었다. 아직 유프라는 어떠한 상황도 접한 게 아니니까.

‘더 생각해보아야겠다. 만일 노인이 우리에게 겁을 주기 위해 속임수를 쓴 것이거나 한다면 그녀가 위험해질 터이니 일단은 아바마마의 군대를 살펴보아야겠구나.’

그러면서 돌아가는 길이 너무 허전하게 느껴졌다.

아직도 걱정이 가시질 않았지만, 그래도 마땅한 대책 정도는 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만약 그리하였어도 그녀는 최소한 도피처 정도는 마련해놓았겠지.’

이런 생각으로 자신을 달랬다.

얼마 지나지 않아 유프라는 헥토르와 마주쳤다.

“못난 녀석들 같으니…….”

헥토르는 분명 그렇게 말했다. 자신이 데려온 몇몇의 기사들을 보며 말이다.

자신 때문에 죽어간 기사들에 대한 죄책감 따위는 눈을 씻고 봐도 찾아보기 힘들었다. 기사들은 항의와 불만을 가슴속에 담아둘 뿐, 어떠한 내색도 하지 않았다.

헥토르는 유프라를 발견하고 성큼 다가오더니 다짜고짜 입을 열었다.

“네 군사를 내어다오.”

전혀 예상치 못한 요구에 유프라는 당혹한 기색으로 의문을 드러냈다.

“왜입니까?”

“괘씸한 두 녀석이 있다. 아직 멀리 가지 못했을 터. 그 녀석들의 모가지를 딴 후에 아바마마와 합류하겠다.”

마치 어린아이의 사탕처럼, 유프라에게 5백의 군사가 있으니 그것을 탐내는 것이다.

그러나 누가 뭐라 해도 이 군대는 유프라의 군대였다. 적어도 유프라는 자신의 군대가 아레인을 핍박하는 데에 사용되길 원치 않았기에 단호히 거절했다.

“그럴 수 없습니다.”

안 그래도 화가 치밀었던 헥토르였다.

분명히 이 군대가 유프라에게 배정된 것을 알면서도 헥토르는 우기기를 시작했다.

“어차피 아레인의 정벌에 사용되는 군대가 아니냐. 내 그걸 하겠다는 것이다. 사사로운 일에 쓴다고 하였더냐?”

유프라도 목소리를 높였다.

“형님께는 형님의 군대가 있지 않습니까? 그들은 다 어디 있고 몇몇 기사들밖에 보이지 않는지요? 형님의 군대를 찾아 쓰십시오.”

둘 사이의 언쟁은 점점 더 커졌다.

성질을 참지 못하고 펄펄 뛰는 헥토르를 설득시키려 유프라는 요목조목 따져 가며 안 된다는 말만을 반복했다.

결국 헥토르는 비장의 카드를 꺼냈다.

“정 이렇게 나온다면 나 역시 생각이 있다.”

유프라의 귀에 대고 하는, 매우 낮지만 협박을 담은 말이었다.

“모든 일을 아바마마께 아뢰겠다.”

그 말에는 함축적인 의미가 담겨 있었다.

헥토르는 유프라의 사정을 모두 들어 알고 있었고, 단호했던 어조는 곧 음흉하게 바뀌었다.

“아레인의 여왕을 짝사랑하느라 전투는 뒷전이라고 말이지.”

유프라의 낯빛이 확 변했다.

사랑에 빠져 감정을 제어하지 못했던 탓이다.

확실히 유프라는 언젠가 헥토르의 질문 공세에 못 이겨 이를 털어놓았었다. 그리고 그것이 자신의 치명적인 약점으로 자리하게 된 것이다.

‘형님이 이렇게 나올 줄은 몰랐구나. 내 그때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이를 어이하면 좋다는 말인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을 때, 멀리서 전마 소리가 들려왔다.

소리는 점차 가까워지며 지척에까지 울렸다.

자연히 헥토르와 유프라를 포함한 바리톤의 병력은 그쪽을 주시하였다.

“적입니다!”

외침이 들리며 5백 여의 병력이 당장 전투태세에 들어갔다.

유프라가 따로 시키지 않은 일이었다.

혹여 저들과의 마찰이 빚어질 것을 우려한 유프라가 말에 올라 명했다.

“너희들은 이곳에 남아 있어라. 내 알아볼 것이 있다.”

그렇게 말하고 유프라가 말을 달려 나가다 멀지 않은 거리에서 멈추었다.

저들 쪽에서도 몇 사람이 앞으로 나온 것이다.

의외롭게도 유프라는 검을 빼지 않았다. 검이 있는데도 뽑질 않았다는 것은 싸울 의사가 없음을 의미한다.

아레인의 군대에서도 한 사람이 백마를 몰고 나왔다.

개중에서도 가장 돋보이는 갑주를 착용한 자였다.

이상한 것은 유프라의 기억에도 있는 저 백마 위에 오른 사람은 다른 이들보다 몸이 빈약해 보인다는 점이었다.

유프라의 시선이 한순간 멍해졌다.

‘서, 설마 그녀가……?’

그자는 앞으로 치달려 나온 네댓의 기사들을 향해 팔을 뻗어 제지시키고는 투구를 벗었다.

그러자 찰랑이는 금빛의 머리카락 사이로 세상을 훤히 비춰줄 만한 아름다운 여인의 이목구비가 드러났다.

아레인의 여왕, 그녀였다.

유프라의 심장이 다시금 요동치기 시작했다.

사랑스러운 입술이 열리며 영혼을 뒤흔들 것 같은 곱디고운 목소리가 들렸다.

“아직 가지 않았군요.”

단 한마디에 유프라의 얼굴이 확 달아오르며 홍시처럼 붉어졌다.

“그, 그게…….”

“말씀드릴 것이 있어요.”

그녀가 말할 게 있다고 한다. 그것을 유추해보려 유프라의 뇌리에 온갖 잡생각이 다 떠올랐다.

그러나 이렇다 할 만한 결론을 도출해내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그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

“당신들의 군대는 패했습니다. 당신이 가고 난 후, 우리 쪽에서 바로 연락이 왔습니다. 바리톤의 대군이 왕성을 향하고 있다고, 그리고 그분이 오셨습니다. 어서 여기서 피하세요. 곧 왕국군이 아닌 무서운 군대가 들이닥칠 겁니다.”

그녀가 일컫고 있는 것은 발데르 공작의 군대와 보탄 남작의 군대였다. 그들이 벌써 근방에 도달해 엘레느에게까지 보고가 올라온 상황이었다.

그녀 역시 패잔병들을 뒤쫓으며 무력화시키고 있는 일에 손수 동참한 상황이었다.

유프라에게 이런 말을 하는 까닭은 다름 아닌 그가 나쁜 사람 같지는 않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바리톤이 졌다고? 그것도 벌써? 노인의 말이 사실이었나?’

사실인지 거짓인지 잠시 의심을 품었지만, 그녀의 얼굴을 접하며 의심은 종적을 감추었다.

저런 얼굴로 거짓을 말할 것 같지는 않았다.

그가 봤던 노인이 진지한 얼굴로 백 번을 말하는 것보다 그녀의 이 말 한마디에 훨씬 더한 신빙성이 느껴졌다.

예측하지 못한 상황에 놀랐으나 그 사실은 점차 뒷전으로 밀려나버렸다. 아레인의 여왕이 자신을 생각해주는 듯 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으로도 모자랐는지 그녀는 품에서 비단 주머니를 꺼내 건네주었다.

조금 특별한 공예품일 뿐이었다. 그러나 중요 직책에 있는 사람들은 이것이 왕가에 내려오는 물건이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만일 우리 군대가 당신을 괴롭힐 것 같으면 발데르 공작이나 보탄 남작을 찾아 이것을 내어 보이세요. 그리고 나를 보았다고 전하세요.”

여전히 유프라는 굳어 있었으나 그녀는 바로 말 머리를 돌려 무리 안으로 향했다. 그러자 유프라를 에워싸고 있던 기사들 역시 말을 돌렸다.

유프라는 하염없이 그녀의 뒷모습만 바라보다가 어렵게 발길을 돌렸다.

그 광경을 헥토르 역시 지켜보고 있었다.

그의 표정은 변해 있었다.

저토록 어린 나이에 여장부다운 기개와 말로는 형용할 수 없는 아리따운 모습이 상반되어 그의 가슴에 묘한 감흥을 불러일으켰던 것이다.

유프라가 돌아오는 즉시 헥토르가 나지막한 어조로 물었다.

“누구냐?”

“전에 말씀드렸던 아레인의 여왕입니다.”

유프라의 순수한 마음과는 다르게 헥토르는 험상궂은 외모만큼이나 모진 마음을 품었다.

‘네 녀석에게는 어울리지 않는다. 저 여자는 내가 가지겠다. 힘으로라도…….’

비극이라면 비극이었다.

세 형제가 한 여인을 마음에 품기 시작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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