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자의 계책
로테노아는 꽤나 만족스런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여기까지 오는 동안 저들의 눈을 교묘하게 피했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발각이 되지 않고 여기까지 다다랐다는 것만으로 금세 성을 함락시킬 수 있다는 자신감에 물들었다.
헥토르 또한 비장한 각오를 내보였다.
‘이놈들, 땅을 치고 후회하게 해주리라. 왕성이 무너지면 나머지 역시 차례차례 격파시키겠다. 최후엔 발데르 네놈이다. 으드득!’
헥토르는 그에게 당한 게 얼마나 분했던지 그 일 이후 이빨을 자주 갈았던 까닭에 윗니 하나가 흔들렸다.
로테노아는 헥토르의 그런 모습을 높이 사고 있었다.
‘강인함과 결단력이 없다면 어찌 왕이 될 수 있을까? 내 헥토르를 너무 폄훼한 듯하니 앞으로는 조금 더 눈여겨보아야겠구나.’
나란히 말을 몰아가는 두 부자의 모습에서 무언가 느꼈던지 레고타 후작도 옆의 현자에게 나쁘지 않은 기분을 피력했다.
“현자는 정말 안목이 탁월하신 듯하오. 그대가 따라와주지 않았다면 이 전투는 매우 힘들었을지도 모르겠소.”
일이 잘 풀어진다면 이 공은 현자의 것이나 다름없다. 그와 친하게 지내면 얻을 것이 많을 것 같아 레고타 후작이 이리 대하는 것이다.
현자는 밝은 표정을 하고 답했다.
“과찬이십니다.”
그 역시 같은 계산이었다.
자신이 꿈꾸는 미래를 위해서는 왕자들하고는 두루 친하게 지내야 했다.
이 전투에는 일 왕자만 가담했고, 그가 공을 세우게 될 것이니 그의 부관이나 다름없는 레고타 후작과도 잘 지내야 했다.
레고타는 말 옆으로 몸을 길게 빼어 현자의 귀에다 대고 나지막이 속삭였다.
“부자가 참 다정해 보이지 않소?”
현자는 호탕하게 웃었다.
“하하, 그렇군요.”
두 사람은 비슷한 꿈을 꾸고 있었다.
대다수의 귀족들이 그렇듯 실세를 거머쥐고 싶어 하는 것이다.
이해관계에 따라 장차 적이 될지도 모르지만 지금은 서로를 필요로 했다.
또 서로 협력하는 좋은 관계가 될 수도 있질 않은가. 그래서인지 둘 사이가 이 시점을 계기로 급속도로 가까워지려 하고 있었다.
그 와중에도 로테노아가 이끄는 대군은 아레인 왕성을 향해 다가가고 있었다.
그때 뒤쪽에서 소란이 일었다.
아주 작은 비명 소리였는데, 그것은 흡사 전염병처럼 맴돌기 시작했다.
시간이 흐르며 이곳저곳에서 동시 다발적으로 터져 나오는 비명 소리에 뒤쪽의 대열이 잠시 흐트러졌다.
소란의 원인을 파악하기 위해 각 지휘관들이 뒤를 돌아보기 시작했고, 로테노아 역시 그 소리를 들었던지 주위를 둘러보며 의아한 표정으로 묻고 있었다.
꼭 말을 하지 않아도 그의 뜻을 헤아릴 수 있었던지 레고타 후작이 근방의 기사에게 명했다.
“무슨 소란인지 가서 알아보고 오거라.”
“넵.”
대답과 동시에 기사가 말을 타고 뒤쪽으로 달려갔다.
군대는 이리저리 흩어져서 말 그대로 난장판이었는데,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온 기사 역시 연유를 몰라 잠시 머뭇거릴 수밖에 없었다.
조금 더 가까이 가서 확인한 결과 어렵지 않게 원인을 파악할 수 있었다.
두 사람이었다.
군대 사이로 파고들어 닥치는 대로 병사들을 쓰러뜨리는 그들 때문에 적잖은 병사들이 지레 겁을 먹고 물러서는 바람에 일이 이 지경이 된 것이다.
그 모습이 하도 한심해 보여 하마터면 명령도 뒤로하고 자신의 검을 빼어들고 달려갈 뻔했다.
그러나 그럴 필요는 없었다.
뒤늦게 상황을 파악한 기사들이 검을 곧추세우고 득달같이 달려들었으므로.
일단은 왕이 궁금해하고 있으므로 일의 보고가 우선이었다.
기사는 즉시 돌아가 이 일을 전했다.
“아레인의 기사들인 듯합니다. 후미를 노려 교란시키는 게 아닐까 합니다.”
“몇 명인가?”
“그, 그게 두 명인 듯합니다.”
로테노아와 헥토르의 표정이 동시에 구겨졌다.
이 소동에 잠시 진군이 멎었다. 그들을 따로 두고 무턱대고 나아갈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곧 정리가 되겠지’라는 생각으로 뒤쪽을 바라보던 로테노아의 얼굴색은 점차 짜증에 물들었다. 그럴 만도 한 것이 좀체 소동이 끝나질 않았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탈자가 더 많아져서 한심한 꼴을 내보였다.
결국 지휘관들이 기사들을 데리고 나서기 시작했는데, 화가 치민 로테노아도 뒤쪽에 계속해서 시선을 고정시켰다. 그러자 그에게 광경을 보여 주려 병력들이 양옆으로 길게 갈라섰다.
덕분에 로테노아와 헥토르, 그리고 레고타 후작은 이 같은 광경을 감상할 수 있었다.
피를 흩뿌리며 즐비하게 쓰러진 병사들의 꼴이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그 수가 벌써 삼십 정도에 이르렀는데, 그들 중엔 간간이 기사들도 보였다.
기사들이 그나마 두 사람과 검을 섞어보기나 한다면, 병사들은 말 그대로 추풍낙엽과도 같았다.
그렇지 않아도 기분이 좋지 않은데 대부대가 단 두 사람을 제압하지 못하여 저런 꼴을 보이자 로테노아는 화가 치밀었다.
소동의 장본인들은 한술 더 떠서 큰 소리로 화를 돋우었다.
“바리톤에는 실력도 안 되는 것들뿐인 모양이로구나!”
“그러게 말입니다. 이런 자들도 전투병이랍시고 왔나 봅니다.”
크게 내지른 소리라 앞쪽에 있는 사람들 또한 그 말을 들을 수 있었다. 자연스레 로테노아의 이마에 힘줄이 불거졌다.
왕의 기분을 헤아린 헥토르가 대신해 부하들에게 소리쳤다.
“우선 포위해라! 절대 살려 보내서는 안 된다!”
이때까지만 해도 우왕좌왕하는 자들이 많아 주변이 매우 느슨해진 상태였기에 대군 사이를 파고들었던 크레멘과 제라드가 내빼는 데에는 어려움이 따르지 않았다.
그러나 두 사람은 아직 이곳에서 벗어날 생각이 없었다.
헥토르의 명령은 인근의 지휘관에게, 그리고 기사들과 병사들에게 전달되어 두 겹, 세 겹으로 포위망이 구축되었다.
그러자 두 사람은 잠시 당황하는 듯하더니 다시 난동을 부리기 시작했고, 병사들이 또다시 우왕좌왕하려 하자 어디선가 버럭 호통이 터졌다.
“물러서는 자는 가만두지 않으리라!”
불쌍한 것은 병사들이었다. 나서자니 죽을 테고, 물러서자니 엄벌에 처해질 것이다.
그래도 전달된 말은 교묘한 피신처가 있었다. 가만히 자리를 점하는 것이 그것이었다.
곧 기사들이 투입되었다.
아무리 크레멘과 제라드라고 해도 이 많은 사람들 사이를 헤집어놓는다는 건 사실 버거운 일이었다. 그나마 약한 자들만 골라 쓰러뜨렸으니 망정이지, 실력이 된다 하는 기사들과 싸우게 된다면 더욱 힘을 소모하게 될 것이다.
더욱이 크레멘은 퇴로를 확보하려 제라드와 거리를 멀리 두게 되었으니 난감하기 이를 데 없었다.
‘아쉽군. 내 전음술이 진보했으면 좋았을 것을. 내가 전할 수 있는 전음으로는 모두가 듣게 될 것이다. 직접 가서 전하는 수밖에 없겠군. 어쨌거나 더 늦기 전에 이곳에서 빠져나가야 하니…….’
생각을 굳히며 크레멘은 제라드를 향해 말을 몰아나갔다. 그러자 여럿의 기사들이 먹이를 쫓는 하이에나처럼 그에게 몰려들었다.
그렇다 한들 원체 빠른 말을 따라잡을 순 없는 노릇이어서 근방에 있던 더 많은 기사들이 달려들었고, 그런데도 그를 붙잡을 수 없었다.
흡사 미꾸라지같이 이리저리 내빼고 있질 않은가.
바리톤의 기사들보다 그의 기마술이 월등히 뛰어났던 까닭이었다.
순식간에 거리를 좁혀 크레멘이 다가오자 제라드의 시선도 그를 향했다.
“그만 빠져야겠습니다.”
크레멘의 말에 제라드는 웃음을 머금고 물었다.
“벌써 지쳤는가?”
“다시 오게 되더라도 지금은 상황이 좋질 못합니다. 일단은 퇴로를 확보해야겠습니다.”
“그러지.”
둘이 힘을 합치자 무엇도 장애가 될 수 없었다. 그러나 너무 오래 끌었던 까닭인지 중심부로 바리톤의 대군이 꾸역꾸역 밀려들어왔다.
“이러다간 압사할지도 모르겠군.”
이 상황에서 아직도 농담을 던지는 제라드를 보며 크레멘은 한숨을 지을 뻔했다.
‘자칫 일이 틀어질 수도 있겠군.’
그때였다.
난데없이 한 젊은이가 검을 빼어들고 말을 달려왔다.
“네놈들의 목은 내가 취하겠노라!”
그 뒤를 중년인이 난감한 표정을 하고 뒤따르고 있었는데, 바로 레고타 후작이었다.
물론 호기롭게 소리치는 이는 다름 아닌 일 왕자 헥토르였다.
로테노아가 가장 염려하는 것이 헥토르의 이런 면이었다.
물불 안 가리고 나서는 성격.
그 딴에는 이 난제를 자신이 해결해 사기를 드높이려는 계산이었다. 아닌 게 아니라 포위망 또한 구축이 되어 있는 상태라 자신이 조금만 휘젓는다면 금방 끝날 것 같았다.
하지만 그는 좀 더 냉철히 판단했어야 했다.
로테노아에게 강인한 인상을 심어주려 묻지도 않고 말을 달려온 것이다. 그가 이맛살을 찌푸리고 있다는 것도 모르고 헥토르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네 녀석들을 기필코 이 손으로 잡아 아바마마께 칭찬을 들어야겠다.’
그를 보는 크레멘과 제라드의 표정에 미묘한 느낌이 교차했다.
술까지 달린 투구에 고급스러운 흉갑을 걸치고, 탄탄한 근육에 윤기가 번지르르한 말을 타고 치렁치렁 보석이 박힌 보검까지 들고 있으니 따로 설명하지 않아도 대충 저자의 지위 정도를 가늠할 수 있었던 것이다.
제라드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헥토르를 향해 마주 달려 나갔다. 그 뒤를 쫓으며 기회를 노리고 달려드는 병사들을 처리하는 것은 크레멘이 담당했다.
헥토르와 제라드의 거리가 급속도로 줄어들수록 레고타 후작은 애간장이 탔다.
‘더… 더 빨리…….’
결국 레고타는 둘 사이에 먼저 끼어들 수는 없었다.
헥토르의 검이 제라드의 목덜미를 덮치자 쇠 마찰음이 일었다.
카칵!
어느 순간 제라드의 검이 곧게 세워지며 헥토르의 검의 진로를 차단한 것이다.
헥토르는 볼 살을 씰룩이며 인상을 구겼다.
제라드가 모호한 미소를 지으며 부닥친 검을 밀쳐 내자 헥토르는 성이 난 사자처럼 다시 대들어 이번엔 그의 허리를 노렸다.
또다시 둘의 검이 격돌하며 불꽃을 튀겼다.
제라드가 다시 힘을 주어 밀어내자 헥토르는 약이 바짝 올랐는지 크게 팔을 틀어 검을 휘둘렀다.
목표 없이 아무렇게나 휘두른 것이었다.
궤적을 그리던 둘의 검이 허공에서 맞부딪치며 소음을 유발했다.
파칵!
울리는 소리가 아닌 깨지는 소리였다.
불행인 쪽은 제라드였다.
그의 검은 헥토르의 검을 이기지 못하고 부서져 버렸는데, 그가 건네받은 기사의 검이 좋지 못해서가 아니라 헥토르의 검이 워낙 보검이어서였다.
크레멘은 크레멘대로 몰려드는 적들을 상대하기에 바빴다.
검이 반 토막이 나버렸음에도 제라드는 당황하지 않았다. 반면에 헥토르는 득의만만한 표정을 지었다.
“클클, 벌써 한 놈을 잡았군.”
말이 끝나기 무섭게 헥토르의 검끝이 제라드의 가슴팍을 파고들었다. 그는 제라드가 무방비 상태라고 착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또 한 번의 마찰음이 경쾌하게 일었다.
캉!
제라드는 자신이 가진 검이 그가 지닌 보검의 날을 견디지 못하는 것을 깨닫고 검을 비틀어 쳐내었던 것이다.
“이제부터는 조심하게. 자비란 없을 걸세.”
헥토르는 가까스로 위기를 넘기고 도리어 큰소리까지 치는 제라드가 심히 못마땅했다.
“허세가 지나치군. 입만 산 녀석들은 질색이다.”
당장에 그의 목을 베어버릴 듯 헥토르의 검이 매섭게 날아들었고, 제라드의 반 토막뿐인 검이 그의 검과 다시 마주쳤다.
하지만 전과는 달랐다.
헥토르의 검은 마치 아교에라도 붙은 것처럼 제라드의 검과 떨어지지 않았다.
제라드가 팔을 크게 돌리며 어느 순간 힘을 가하자 헥토르의 팔에 묵직한 통증이 전해졌다.
검을 붙들고 있다가는 팔이 떨어져 나갈 것 같았는지 헥토르는 검을 쥔 손아귀에 힘을 풀고 말았다. 그러자 푸른색의 기운을 담고 있는 보검이 하늘 높이 떠올랐다.
“이제 전세가 역전된 것 같군.”
살기를 품고 있는 제라드의 눈빛에 헥토르의 안색이 노래지며 아연실색이 되어갈 때, 뒤늦게 레고타 후작이 둘의 사이로 파고들었다.
“네 상대는 나다!”
자존심이 처절하게 무너지는 소리에 헥토르의 개차반 같은 성질이 그대로 표출되어 버렸다.
“후작, 내게 검을 주시오. 어서!”
그 말을 레고타는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버렸다.
‘아아, 왕자께서 사태 파악을 못하시는구나. 이자는 일 왕자 전하의 상대가 아니다. 훨씬 뛰어나다. 보검이 있어도 감당하시지 못할 텐데 승기를 잡았다가 놓쳤다고 오해를 하고 계시는구나. 마침 주변이 소란스러우니 후에 따지신다면 못 들었다고 하자. 그렇게 둘러대면 될 것이다.’
그리 생각하고 레고타 후작은 주변의 기사에게 일렀다.
“뭣들 하느냐! 어서 일 왕자 전하를 보필하지 않고!”
주변에 기사는 많았지만, 일 왕자가 직접 검을 빼어들고 결투를 벌이는 도중 끼어드는 것도 예가 아니기에 그저 여차하면 나서야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거나 뒤쪽에 있던 크레멘에게 달려드는 게 전부였다.
다행히 저자의 검을 부러뜨려 안도하고 있을 때 벌어진 일이라 당황한 상태였다.
후작의 명령에 기사들이 삽시에 그를 에워싸자 그 모습에 헥토르가 짜증을 부렸다.
“어서 저리 비키지 못할까? 누가 나에게 검을 내어다오!”
하지만 기사들 누구도 헥토르의 명을 들을 사람은 없었다. 만에 하나 비켜 주었다가 그가 잘못되기라도 한다면 그 뒷감당을 어찌하랴.
헥토르는 성난 사자처럼 길길이 날뛰었다.
“내 말이 말 같지 않느냐!”
“왕자 전하, 옥체를 보존하시옵소서…….”
기사 딴에는 생각해서 올린 말이었지만, 그 말이 헥토르의 신경을 더욱 자극했다.
헥토르가 대노하여 크게 소리쳤다.
“뭣이 어쩌고 어째? 네놈은 내가 저놈에게 죽기라도 할 것처럼 말하는구나!”
로테노아 역시 이 광경을 보고 있었는데, 그는 일 왕자의 이 같은 행동에 머리가 다 지끈거리는 것만 같았다.
‘멍청한 녀석! 낄 데 안 낄 데 구분도 못하고, 거기다가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다니……. 내 너를 좋게 봐주려 했거늘. 난제로구나, 난제……. 장차 왕세자로 누구를 책봉해야 한단 말인가?’
썩 내키지 않더라도 기본은 되어야 했다. 그러나 그의 아들들은 모자란 구석이 너무나 많았다.
못난 첫째 아들에게서 시선을 떼고 로테노아는 소동의 장본인들을 바라보았다.
수많은 병력에 둘러싸인 상황에서도 난전을 벌이고 있었다. 이는 저들의 실력이 종잡을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나다는 것을 의미했다.
굳이 비교하자면 저 둘은 이미 한 차례 마찰을 겪었던 아레인의 정예들의 실력까지도 한참 웃도는 것이었다.
가히 일당백이라 할 만했다.
‘저 많은 병력을 상대로 지치지도 않는 것 같군. 아레인엔 귀신같은 놈들이 왜 이리 들끓는 것인가?’
광인, 사람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 이방인까지 뇌리에 떠오르자 로테노아의 온몸에 소름이 다 돋는 듯했다.
돌연 의문이 생겼다.
‘만약에 헥토르와 마주쳤다는 발데르까지 가세해서 우리 전력과 전면전을 벌인다면 어떻게 될까?’
수를 믿고 싶었지만 그러기가 힘들었다.
저 두 사람을 똑 부러지게 제압하지도 못하는 상황 앞이라 더 그러했다.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안 돼!”
사념에 빠져 들던 로테노아는 저도 모르게 목청을 높이고 말았다. 그러자 주위의 지휘관들이 이를 이상하게 여겼다.
“폐하, 무엇이 안 된다는 말씀이신지…….”
“아, 알 것 없다.”
평상시의 그와는 다른 모습이었다.
이렇게 힘든 전쟁을 하게 되리라고는 생각을 못했던 탓이다.
‘각개전투를 펼쳐야 한다. 왕성부터 함락시키고 분산된 전력들을 따로 무너뜨리는 수밖에는 없다.’
그가 여러 생각에 잠기는 동안에 일이 터졌다.
포위망에 구멍이 뚫려 버린 것이다.
그 때문에 여러 곳에서 힐책하는 목소리가 튀어나와 주변은 더욱 시끄러워졌다.
정신이 번쩍 들었던지 로테노아가 다시 그곳을 주시했다.
상황 파악은 어렵지 않게 되었다.
두 사람이 힘을 합쳐 한곳을 집중적으로 공략했던 것이다.
막 달아나려는 두 사람과 그들을 쫓는 바보 같은 무리를 보는 로테노아의 입에선 노성이 터졌다.
“멍청한 것들, 활을 쏘아라! 활이 있지 않느냐!”
궁수대가 재빨리 활을 꺼내들어 시위에 걸었다 놓은 화살들이 우후죽순으로 늘어나며 제라드와 크레멘을 향해 날아들었다.
2백 보도 떨어지지 않은 거리.
하나 몇몇 화살들은 목표물과 동떨어진 곳을 향해 날아갔는데, 이는 로테노아의 닦달을 못 이겨 다급히 쏘았던 까닭이었다.
그래도 목표물에 십여 발의 화살이 근접했다. 그러나 두 사람은 화살이 허공을 가르는 소리를 듣자마자 돌아서서 각자의 검으로 화살들을 쳐내었다.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거리가 꽤 멀리 떨어져 있다면야 화살이 나는 속도가 줄어들어 막아낼 수도 있다 치겠지만 그게 아니질 않은가.
하도 황당했는지 궁수대의 상당수가 멍하니 입만 벌리고 있을 뿐이었다.
그 점이 로테노아의 화를 더욱더 돋우었다.
얼굴이 온통 붉어지고 핏대가 솟을 대로 솟아 꽤나 험상궂은 모습이 되었다.
이 상태에서 그가 소리를 친다면 뭔가 크게 잘못될 것 같다고 느꼈던지 지휘관들이 목청을 높여 병력을 진두지휘해나갔다.
“재장전을 하지 않고 뭘 하느냐?”
“기사들은 어서 저들을 쫓도록 하라!”
두 명령이 한데 엉켜 또 한 번의 난제를 불러왔다.
제라드와 크레멘은 차라리 잘되었다며 말을 돌려 접근하는 기사들을 향해 파고들었고, 궁수들은 난처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헥토르 역시 문제를 일으켰다.
저들에게 시선이 집중된 틈을 타 긴장이 느슨해진 기사를 밀쳐 내며 그의 검을 빼앗아서는, 다시 오른 말의 앞발을 높이 치켜들어 당장에라도 깔아뭉갤 듯이 기사들을 겁주었다.
이를 간파한 선임 기사가 발악하듯 소리쳤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길을 내어드려서는 안 된다!”
모든 게 말처럼 쉬우면 얼마나 좋을까?
뜻과 같지 않았다.
헥토르의 말이 앞을 가로막은 기사를 앞발로 걷어차고는 펄쩍 뛰어 제라드와 크레멘을 향해 달렸다.
그러자 사태의 추이를 지켜보던 많은 이들이 헥토르에 대한 실망감을 금치 못했다. 거의 다 잡아놓은 두 사람을 놓치게 된 것이 전적으로 그의 책임으로 비춰졌기 때문이다.
날뛰는 헥토르를 제지하느라 크레멘을 억압하던 기사들이 빠져 포위망이 느슨해졌고, 그 바람에 저 둘의 합공을 버티지 못해 구멍이 생긴 게 아닌가.
내색은 못해도 많은 이들이 그에 대한 원망을 품었다.
로테노아라고 해서 어찌 그것을 모를까.
자신이 느끼기에도 그러했으니 일 왕자에 대한 실망감과 미움이 지극히 커져 결국 모두가 듣는 앞에서 큰 소리로 그를 힐책하고 말았다.
“헥토르 네 이놈, 썩 돌아오지 못할까!”
참는 데도 한계가 있는 법이다.
꽤 큰 소리여서 들릴 것이었음에도 그의 말은 콧구멍으로 들었는지 헥토르는 두 사람을 향해 짓쳐드는 중이었다.
하마터면 사지에 내몰릴 뻔했던 제라드와 크레멘은 무작정 내빼려다가 헥토르가 다가오는 것을 곁눈질로 확인하고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돌아섰다.
곧 때 아닌 난전이 펼쳐졌다.
신분이 고귀해 보이는 녀석을 사로잡으려는 두 사람과 그 두 사람을 자신의 손으로 처치하려는 욕심을 품은 헥토르. 그리고 그 사이를 갈라놓으려 여러 기사들이 달려들었다.
그를 보는 로테노아의 뒷골이 다 당겼다. 없던 화병이 생기려는 것이다.
스트레스에 머리가 핑 돌아 몸을 주체 못하고 자칫하면 말에서 떨어질 뻔했다.
바리톤의 현자도 이상하게 돌아가는 상황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그러다 국왕에게 올릴 말이 떠올랐는지 말을 몰아 그에게 다가가 아뢰었다.
“국왕 폐하,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여기서 이렇게 시간을 허비하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저자들이 실력이 대단하긴 하지만 단둘입니다. 단 두 사람 때문에 전군이 발이 묶인 상황이니 부디 넓게 헤아리시어 진군에 속도를 내셔야 할 것입니다.”
로테노아가 듣고 보니 또 맞는 말이었다.
현자가 자신의 아들이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엉뚱한 욕심도 들었다.
방법을 떠올렸음에도 로테노아는 현자에게 물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그의 의사를 최대한 존중하여 주겠다는 뜻이다.
현자가 황송해하며 자신의 의사를 피력했다.
“저들을 뒤쫓는 것은 마땅히 실력이 뛰어난 기사들이어야 할 것입니다. 다만 문제가 되는 것은…….”
일 왕자라고 말하려 했다.
그러나 그의 줄을 타야겠다고 마음먹은 이상 흠잡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또한 레고타 후작이 적으로 돌릴 수도 있는 것 아닌가.
앞서가는 추측일지 모르지만 그가 자신을 적대하고 미워하기 시작하면 사람을 보내 쥐도 새도 모르게 제거할 수도 있었다.
레고타 후작의 성질이 그러했다. 그렇기에 일 왕자와 그렇게 궁합이 잘 맞았던 것이다.
‘힘이 생기기 전까진 되도록 적을 만들면 안 된다.’
이것이 장차 출세를 지향하는 현자의 지론이었다.
로테노아는 그 뜻을 어렵지 않게 헤아렸다.
‘현자의 말이 옳구나. 내 잠시 저쪽에 신경이 쓰여 편협한 사고를 하고 말았다. 이런 자를 가까이 두어야 한다. 후에 책봉될 왕세자 문제도 그래야겠구나. 그가 잘만 이끌어준다면 좋겠다만…….’
잠시 감상에 잠기던 로테노아는 당장에 명을 내렸다.
“저자들을 제압할 기사들을 따로 빼고 나머지 군대의 진군을 명한다.”
그러자 각각의 지휘관들이 부관들에게 명을 내렸고, 흩어져 있던 병력이 다시 대열을 정비하며 진군 준비를 마쳤다.
길게 본다면 길고 짧게 본다면 짧은 시간이었다.
바리톤의 대군이 다시 진군을 하는 것을 보며 크레멘과 제라드는 그래도 자신들과 동행했던 이들이 별 위협 없이 아레인 왕성에 접근했을 것이라 믿었다.
반면에 로테노아는 자신이 받은 수치를 반드시 되갚아 주리라는 각오로 아레인 왕성을 매섭게 노려보고 있었다.
* * *
사자 일행은 진땀을 빼고 있었다.
정말 어렵게 모셔온 귀빈이다. 그런데 막상 분부를 내렸던 자신들의 국왕은 어디로 갔는지 코빼기도 비치질 않았고, 진영 또한 대다수의 군대가 빠져나가 썰렁한 상태였다.
사자는 당황하여 이곳저곳을 발품을 팔아 돌아다니며 영문을 물었다.
“이게 어찌 된 일인가? 국왕께서는 어디로 가셨는가? 그리고 우리 군대는? 어서 대답해주게. 내 저분을 뵐 면목이 없네.”
병사들에게는 거의 소용없는 질문이었다. 그들은 제대로 된 상황을 알지 못했으므로.
그들에게 내려진 명령이란 그저 담담한 척하여 의심을 사지 말라는 것뿐이었다.
로테노아는 현자의 계책이 매우 그럴듯하여 자신이 내려 둔 명령조차 까맣게 잊고 곧바로 출정을 감행한 것이다.
다행히 모든 작전을 간파하고 있는 이가 있었다.
낙마하여 허리에 부상을 입은 부관이었는데, 그가 침대에 누워서나마 이를 설명해주었다.
“국왕께서는 왕성으로 향하셨소. 일 왕자 전하와 같이 말이오. 또 이 왕자 전하와 리먼 백작은 교란 작전을 펴려 나가셨소.”
사자의 얼굴에 침울함이 엿보였다.
“후우, 무리를 해서까지 이렇게 급하게 모셔 왔소. 저분은 안 그래도 대하기 어려운 분이오. 우리 군대의 위용을 보여 드려 체면치레나 할까 했는데 이게 뭐요?”
부관을 탓할 일이 아니었지만 마땅히 하소연할 데가 없었다.
“그, 그분이 오셨소?”
사자는 떳떳한 얼굴로 답을 했다.
“그렇소.”
그는 자신이 매우 큰일을 성사시켰다고 믿고 있었다.
국왕마저 대하기 어려워하는 인물을 단시간에 모셔 왔으니 말이다.
자신이 확인한 바에 의하면 저분은 국왕께서 평가하시는 것보다도 훨씬 더 대단한 분이셨다. 다른 드래곤도 아니고 블랙 드래곤과 이웃이라지 않은가.
그런 분을 기다리게 만들어야 하니 골치였다.
사자는 곤욕스러운 표정으로 그에게 다가갔다. 이미 그는 충분히 실망한 기색이었다.
“무척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저희 국왕 폐하께옵서 자리를 비우신 모양입니다. 최대한 빠른 시간 내에 돌아오시겠지만…….”
게티롱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노, 노여움을 풀어주시옵소서. 일이 이렇게 될지는 저 역시 정말 몰랐습니다.”
게티롱은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나 게티롱을 기다리게 만든다라? 농간당하는 느낌이 강하게 드는군.”
“그, 그것이 아니옵니다. 저희가 감히 게티롱 님께 그럴 리가 없지 않겠습니까?”
대륙의 정서가 이러했다.
내로라하는 왕국에서도 드래곤의 비위를 맞추는 판국이다. 간단한 예를 들어본다면, 드래곤들이 집이랍시고 제각기 산맥을 하나씩 차지하고 있어도 누구 하나 항의하는 이들이 없을 정도였다.
자신이 드래곤은 아니라지만 그런 존재와 가까운 사이라고 하니 어찌 함부로 대할 수가 있을까.
그러나 지금은 좋든 싫든 간에 그가 푸대접을 받은 꼴이 되어버렸다.
사신은 어려운 낯빛으로 최대한 게티롱의 기분을 풀어주려 애를 썼다.
“제가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바라시는 게 있다면 뭐든 말씀만 해주십시오. 폐하께 꼭 말씀드려…….”
게티롱이 손을 뻗어 사자의 말허리를 끊어버렸다.
“천하의 게티롱이 바라는 게 있을까?”
사자의 안색이 미안함과 어려움을 견디다 못해 푸르죽죽하게 변했다. 그러자 게티롱은 한술 더 떠 몸을 돌렸다.
“그냥 돌아가야겠어.”
사자는 당장에 그의 바짓가랑이를 잡고 매달렸다.
“제발 부탁드립니다. 그냥 가시면 전 죽습니다. 제발 살려만 주십시오.”
“그럼 나더러 금 같은 시간을 허비하란 소린가?”
“금과 바꿀 수 있다면 제 전 재산을 털어서라도 드리겠습니다. 먼 길을 오셨으니 조금만 더 참고 기다려 주시옵소서.”
웬일인지 다시 게티롱이 몸을 돌렸다.
“정성이 지극하군. 그 정성을 봐서 잠시 더 머물러주기로 하지. 다만…….”
“다만 무엇입니까? 뭐든 말씀하시옵소서.”
사자의 애절한 음성에 게티롱은 해야 할 뒷말을 주저함 없이 이었다.
“내 시간을 금과 바꿔준다는 그 말은 잊어서는 안 되네.”
끄덕끄덕!
그의 말에 고개를 소리가 나게 끄덕이면서도 사자는 은연중에 뭔가 미심쩍은 기분이 느껴졌다.
* * *
재진군은 순탄했다.
그러나 곧 뜻하지 않은 난관에 봉착했다.
로테노아와 대군, 그 앞에는 장애물이 있었다.
그는 마치 자신들이 오기를 기다렸다는 것처럼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하마터면 잘 뻔했군.”
시원하게 뻗은 짙고 검은 눈썹에 흑빛으로 일렁이는 동공과 진한 흑발, 높지는 않지만 곧게 잘 뻗은 콧날에 닭 피라도 바른 듯이 붉은 입술.
꽤나 강인한 인상을 가진 사내였다.
그 면상이 전해주는 충격은 놀라운 것이었다.
바리톤의 대군은 그 자리에 발이 묶여 버렸으며, 선두에 있던 대다수의 지휘관들이 기겁을 했다.
로테노아 또한 오싹함을 느꼈지만, 한편으로는 울분이 솟구쳤다.
그는 다름 아닌 삼 왕자를 납치해간 이방인이었던 것이다.
‘냉정을 잃어서는 안 된다.’
단신이라고 하지만 그의 경천동지할 무력을 이미 실감했지 않은가.
1백이 넘는 병사와 기사들이 그 자리에서 죽어나자빠졌다. 변변한 저항조차 못해보고 말이다.
단지 1백이라는 숫자가 문제가 아니었다. 그만큼의 무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더 큰 혼란을 야기할 수도 있다는 얘기였다.
삼 왕자 팔테스의 경우만 보아도 그렇잖은가.
‘저런 자를 제압하는 데에는 덫이 필요하다. 지금은 아무런 계책 또한 세워두질 않았으니 큰일이구나.’
제일 큰 문제, 그것은 자신의 신변과 연관되는 일이었다.
지금 역시도 그를 염려한 몇몇 귀족들이 기사들을 앞으로 내어 로테노아를 엄호하려 하고 있었다.
문득 자신이 보내었던 자들이 떠올랐다.
‘게티롱! 그가 이 자리에 있었다면… 이 자리에 있었다면 저자의 처리를 부탁해도 될 일인 것을…….’
섣부른 판단일지 모르나 로테노아는 게티롱이라는 사람이 저자와 부딪치기를 원했다. 그 정도의 힘도 바라지 않았다면 삼 왕자를 데려오는 일에 그를 불러들이지 않았으리라.
‘내 보기는 했다만 저자가 그렇게 대단한가? 아무리 무력이 뛰어나다 해도 그는 단신일진대, 국왕께서 너무 움츠러들어 계시는구나.’
확실히 저자의 성격은 개차반이었다.
‘괜히 신경을 거슬러서 좋을 게 없겠구나. 일단은 대화부터 청해보는 게 낫겠어. 어쩌면 그 방법이 먹힐지도…….’
그리 생각하고 현자는 로테노아에게 청을 올렸다.
“제가 대화를 좀 나눠보겠습니다. 부디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로테노아는 여전히 굳은 얼굴로 고개만 끄덕였다.
그러자 현자가 말을 몰아 그의 앞에 가서 용감무쌍하게 시선을 마주치며 물었다.
“난 바리톤 왕국의 현자 알베른이라고 하오. 다름이 아니라 귀하와 얘길 나눠보고 싶소이다. 당신이 대화가 통하는 사람이라면 좋겠구려.”
그의 무력을 높게 산다는 얘기였다.
하나 말에 뼈가 있었는데, 고집과 힘만 센 멍청이는 아니었으면 좋겠다는 말로 받아들여 주지 않으면 그렇게 생각한다는 뜻으로 얘기한 것이다.
알베른은 우선 상대의 환심을 사려는 수작인지 나쁘지 않게 미소까지 짓고 있었다.
그러나 눈앞의 사내 오딘에게는 그 태도가 그저 건방으로밖에 비춰지지 않았다.
오딘은 알 듯 모를 듯한 미소를 지었다.
그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를 모르고 있는 까닭에 현자는 제멋대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이상한 놈이로군. 하나, 나와의 대화를 나쁘게 받아들인다는 것은 아닌 것 같군. 더 얘기해봐야겠어.’
그렇게 생각하고 현자는 다시 말을 이었다.
“귀하의 실력은 우리 바리톤에서도 높이 사고 있소. 대단한 무력을 가진 것은 칭찬과 부러움을 받아 마땅하지요. 하나, 그 수는 좀 그렇지 않소? 정말 자신이 있다면 우리와 정정당당히 대결을 했어야지, 왜 왕자 전하를 납치해간 것이오?”
이른바 설득이었다.
칭찬을 섞어 저 이방인을 타일러 반성의 계기를 심어주고, 그렇게 해서 삼 왕자 전하를 돌려받을 생각이었다.
왜 이런 말도 있지 않은가.
‘말 한마디가 빚을 갚는다.’
그는 박식했다. 읽은 책만 해도 수천 권은 거뜬히 넘고, 다방면에 지식이 뛰어났다.
단점이라고는 자신이 가진 지식만으로 타인을 헤아리려 한다는 것이다.
지금 그의 말, 그것은 과연 오딘의 기분을 상하게 했다.
그렇잖아도 저들에게 가지는 감정이 좋질 않은데 꾀죄죄한 놈 하나가 튀어나와 자신에게 훈계를 하는 듯하니 달가울 리 없었다.
오딘이 입꼬리를 치켜 올리며 그를 어떻게 처리할까 고민하고 있는 데에도 현자는 자신의 말만을 늘어놓았다.
“조금 더 생각해보시구려. 뭐가 옳고 그른지……. 아레인에서 꽤나 높은 직책에 있다고 들었소. 확실히는 모르겠지만 그때 듣기로는 여왕이나 그 위의 존재라지? 하나, 아레인은 지금 풍전등화와도 같소. 오래 못 갈 왕국에서 나와 우리 쪽으로 오면 어떻겠소? 뱀의 머리보다야 드래곤의 꼬리가 되는 것이 낫지. 대우는 아레인보다 더 후하게 해줄 수 있소. 아직 얘기를 꺼내진 않았지만 삼 왕자 전하를 돌려보내주고 미안했다는 말 한마디면 내 꼭 그렇게 되도록 만들어주지. 우리 국왕께서도 이를 받아들여 주실 수 있을 것이오.”
그렇게 얘기하며 현자는 살며시 고개를 돌려 로테노아의 낯빛을 살폈다.
로테노아도 의외라는 표정이다.
이 얘기만 통한다면 하등 문제 될 것이 없는 것이다.
자신들의 군대가 죽긴 했지만 저 정도의 능력을 가진 자가 왕국에 들어와만 준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하나, 깊게 생각해보니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아무도 저자의 무력을 이기지 못한다. 저자가 만약 우리 왕국에 오게 되어 반란을 일으킨다면 이를 막을 수 없을 것이다.’
반란이라는 게 그러하다. 왕을 제압하고, 핵심이 되는 그 주변을 제압한다면 꼭 그리 많은 인원을 상대해야 하는 것이 아니었다. 저자의 무력이라면 그것이 불가능할 것 같지 않았다.
로테노아의 표정이 어두워지는 것을 보며 현자는 예측이나 했다는 듯 오딘에게 말했다.
“이럴 게 아니라 내 잠시 다녀오겠소.”
그리고 말을 돌려 로테노아에게 돌아와 귀엣말로 소곤거렸다.
“국왕 폐하, 걱정할 필요는 전혀 없으시옵니다. 만약 저자가 우리에게 돌아서만 준다면 저자를 이용해 아레인을 쉽게 제압하면 됩니다. 그리고 이후 저자가 혼자가 되었을 때 안심하게 만든 뒤 꾀를 내어 제압하면 되는 것이옵니다.”
불을 밝힌 것만큼이나 로테노아의 얼굴색이 환해졌다. 현자는 꼭 그가 말을 할 수고까지 덜어주었다.
“내키시지는 않을 일임을 아옵니다만 국왕 폐하, 부디 넓은 아량을 보여 주시옵소서. 제가 온 것은 허락을 맡기 위함이라고 했으니 최대한 너그러운 표정을 지어주십시오. 저자가 안심할 수 있게 말입니다.”
“알았네, 내 그리하지. 어서 가보게.”
정말 로테노아의 마음속에서 우러나온 밝은 표정이 오딘을 살갑게 맞아들이고 있었다.
하지만 오딘은 알베른이라는 현자가 다시 자신에게 다가오는 동안에 바리톤 왕의 표정에 듬뿍 담긴 가식까지 엿보고 있는 중이었다.
딴에는 꽤나 멀리 떨어진 거리에서 조용히 말한 것이라 그의 귀에는 들어가지 않을 것이라 믿고 있었지만, 그렇지 않았다. 오딘은 현자가 말한 것을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그대로 말해줄 수 있었다.
하도 하는 짓거리가 기가 차서 하마터면 실소가 터질 뻔했다.
그것도 모른 채 현자는 여전히 당당한 태도를 내보였다.
“기뻐하시오. 내 간청을 드리고 오는 길이외다. 보셨듯이 우리 국왕 폐하께서도 당신께 후한 작위와 비옥한 영지를 수여하겠다고 약조하셨소. 앞으로의 부귀영화는 따 놓은 당상이나 다름없소이다. 핫핫핫!”
오딘이 가식 덩어리로 보는지도 모르고 현자는 계속 그를 종용했다.
“의를 숭배한다면 결코 쉽지 않은 일일지도 모르겠군. 하나, 길게 봐야 하오. 아까도 말했듯이 아레인은 오래가지 못할 것이오. 그러니 우리 바리톤 왕국에 와서 큰 꿈을 펼쳐 보시오. 사내라면 그 정도 포부는 가져야 하지 않겠소? 어떠시오? 조금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오?”
현자는 이제 오딘의 태도를 살피기 시작했다.
그에게서는 한마디도 들려오지 않았었고, 그 점이 현자에게 더 큰 기대감을 불러일으켰다.
내심 기대하고 있는 찰나에 드디어 이방인의 입이 열렸다.
“네 혀는 네 치쯤이나 되는 모양이로구나.”
웃으며 하는 말이라 더욱 이상한 분위기가 연출되고 있었다.
지나치게 자신의 혀를 믿고만 있었기에 현자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를 재미있게 지켜보다가 오딘은 입술을 말아 올리며 계속하여 이죽거렸다.
“바리톤에는 멍청이들만 있는 모양이군. 네 녀석을 비롯해서 말이야.”
그에게 조롱을 당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선뜻 돌아가기가 겁이 났다. 국왕에게 큰소리를 치고 왔기에 더욱 그러했다.
재차 고개를 돌려 국왕을 보았지만, 그는 이 상황을 아는지 모르는지 희희낙락한 표정을 짓고 있다.
철석같이 자신을 믿고 있기 때문이리라.
알베른은 얼른 이 상황을 타개해보려 애썼다.
“그러지 말고 잘 좀 생각해보오. 그들이 얘기하였는지 모르겠지만 아레인은 두 번의 몰락을 거듭했소. 물론 본인은 그때 귀하가 없었으리라 생각하오. 만일 그대 같은 자가 있었다면 아레인은 몰락하지 않았을 테니까.”
충격을 받아 판단력이 흐려져서인지 말이 두서없이 막 나오고 있었다.
오딘이 어이가 없다는 듯 그의 말을 되받아쳤다.
“네 논리에 따르자면 아레인에는 본 좌가 있으니 몰락하지 않겠지.”
현자의 입 안엔 침이 바싹바싹 말라갔지만, 그래도 그의 말을 부정했다.
“그, 그거랑 이거는 다르지 않소.”
“알아들을 수 있게 논리 정연하게 설명을 해봐. 그렇지 못할 시에는 네 혀는 고통을 겪어야 할 거야.”
“뒷말은 좀 거슬리는구려. 내 그에 문제 삼지는 않겠소. 일단 설명을 해 보이지. 아레인은 몰락을 거듭하며 군대 규모가 크게 축소되었다고 들었소. 그렇다면 개개인의 힘도 빛을 발할 수 있는 법, 물론 계략을 잘 짜낸다는 전제하에서 말이오. 꼭 응하기 싫다면 나도 더 매달리지는 않겠소. 하지만, 하지만 말이오, 이거 하나는 기억해두시구려. 오늘이 지나가면 다시 이런 기회는 찾아오지 않으리라는 것을.”
그렇게 말을 하고 돌아서다가 현자는 다시 입방정을 떨었다.
“그리고 각오하셔야 할 것이오. 그대가 아무리 뛰어난 무력을 갖췄다고 해도 단체 앞에 장사는 없다는 것을 알아두셔야 하오.”
현자는 엄포까지 늘어놓고 있었다.
왜 당근과 채찍은 곁들어져야 한다지 않은가.
그러나 상대는 자꾸 자신의 계산 밖의 태도로 나왔다.
“상대가 허수아비라면 무서울 건 없지.”
오딘의 조롱에 알베른은 참다 못해 버럭 성을 냈다.
“허수아비라니! 지금 뱉은 말 책임질 수 있소? 내가 꾀를 낸다면 당신 따위야 얼마든지 제압이 가능하오!”
이 자리에서 요절을 낼 수도 있다.
하지만 오딘은 그러지 않고 오히려 재미있다는 듯 받아쳤다.
“그래, 가서 꾀를 내봐. 단, 방금 한 말은 잊지 말도록 하여라. 사람은 자기의 말에 책임을 질 수 있어야 하니 말이다.”
조용히 타이르는 듯한 소리일 뿐이었다.
소리를 들으며 알베른이 돌아서려는데 왜인지 모르게 오싹했다. 경고성의 말이 정말 피부에 와 닿았던 것이다.
하지만 그저 착각이겠지 하고 돌아서서 로테노아에게 향했다.
잔뜩 기대에 부풀어 있는 그를 보며 알베른은 짜증 어린 표정을 지었다.
이럴 때는 분에 가득 찬 표정을 지어야 한다. 그리고 저자를 헐뜯어 매도해야 한다.
일종의 처세술이었다.
“말이 통하지 않는 자입니다. 아쉽긴 하지만 이 자리에서 저자를 물리쳐야겠습니다.”
그게 쉬웠다면 왜 진작 하지 않았을까? 현자가 말만 앞서가는 듯하여 로테노아의 표정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아니, 사색이 되었다고 봐야 맞을 것이다.
가장 마주치기 싫은 자가 바로 저자이다. 그가 바리톤 군대의 사기를 떨어뜨린 장본인이 아닌가.
“그럼 어찌하면 되겠나?”
“듣기로는 저자가 상대하기 어려운 자라고 하였습니다. 인정하기는 싫지만 저희 군대에 저자를 당해낼 자가 없다고 가정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저자의 혼을 빼어놔야 할 것입니다. 그때는 사정이 달랐습니다. 저희 역시 저런 자들이 아레인에 있다는 것을 모르지 않았습니까. 하지만 지금은 적을 알고 있습니다.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전백승이라는 소리가 있지 않습니까? 제가 미리 방책을 생각해두었습니다. 저자가 아무리 대단하다지만 계속하여 치고 빠진다면 언젠가는 지칠 것이옵니다. 그때를 노려야 하옵니다. 국왕 폐하, 미리 주변에 날랜 기사들을 풀어놓으시고, 역시 날랜 기사들을 따로 뽑아 저자를 상대하게 하옵소서.”
과연 그럴듯했다.
당시의 기억을 떠올려 봐도 도리어 자신들이 끌려 다니지 않았던가.
로테노아는 손뼉을 치며 반겼다.
“그것 참 묘안이로다.”
“황송하옵니다.”
칭찬에 읍을 하며 겸허한 태도를 보이는 현자를 보며 로테노아는 흡족한 얼굴로 주위의 지휘관들에게 명을 내렸다.
“현자의 계책에 따르도록 하라. 날랜 기사들을 보내 저자를 동요하게 만들어라. 단번에 죽이기보다는 계속하여 힘을 빼놓아라. 또한 도망칠 수도 있으니 근방에 날랜 기사들을 배치해라.”
“명을 따르겠나이다.”
지휘관들이 이와 같이 대답하며 부관들을 불러 기사들을 추렸다.
그때까지도 오딘은 심드렁한 태도만 내비쳤다.
‘강하면 부러지게 마련이다. 네 알량한 힘을 믿고 그러나 본데, 잘못된 한 번의 결정이 돌이킬 수 없는 후회를 불러오게 된다는 것을 오늘 깨닫게 될 것이다.’
곧 조가 편성되었다.
기사들이 나서기 전 현자는 다시 한 번 왕에게 아뢰었다.
“궁병들과 마법사들도 행동을 같이하면 더욱 좋을 것이옵니다. 궁병들은 명중률이 높은 뛰어난 사수라야 합니다.”
가르치는 듯한 말투에 로테노아는 약간의 언짢음을 느꼈지만, 따로 문제 삼지는 않았다.
앞쪽으로 나서는 기사들을 보니 로테노아 역시 익히 안면이 있던 자들 또한 더러 있었다. 왕국 내에서도 명망이 자자한 기사들이었다.
순간 불안한 생각이 뇌리에 스쳤다.
‘만에 하나 일이 잘못되면?’
그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 없다. 그럴 리는 없을 것이다.’
스스로에게 세뇌하듯 중얼거리는 로테노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