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사랑을 위해서라면 (18/67)

사랑을 위해서라면

야심차고도 치밀한 계획이었다.

앞쪽에 훤히 드러나는 병력들을 제외하고 상당수의 병력을 우회시켜 바리톤의 대군이 아레인 왕성을 향해 길을 떠났다.

물론 이 작전에서 유프라는 빠지게 되었다.

헥토르가 따로 말을 올리지 않았더라도 로테노아도 그를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던 차였다. 때문에 작전 회의에서도 그를 제외하지 않았던가.

이로 인해 리먼 백작은 커다란 상심에 잠겨 있었다.

자신이 제대로 이 왕자를 보필하지 못했기에 이런 불상사가 생겼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무슨 낯으로 왕비를 뵐 것이며, 앞으로 어찌 얼굴을 들고 다닐 것인가.

솔직한 마음 같아서는 이 일이 조금은 틀어지기를 바랐다.

꼬집어 얘기하자면 일 왕자 헥토르가 특별한 전과를 올리지 못하기를 원하고 있던 것이다.

로테노아 국왕은 이 일을 매우 중시하고 있었는데, 저들에게 쌓인 울분까지 작용한 탓이었다.

자신들은 진영을 지키고 철저히 저들의 눈을 속이라는 명이 내려졌지만, 왕성으로 향하는 일보다는 중한 임무가 아니었다.

“후우, 가슴이 콱 막힌 것 같군.”

근처에 있던 기사단장이 그의 기분을 살폈다.

“이곳에서 아레인 왕성과의 거리는 얼마나 되는가?”

질문을 받은 기사단장이 낮은 목소리로 답했다.

“도보로는 보름 정도의 시간이 소요될 것입니다.”

“보름이라… 그렇다면 말을 타고 달린다 하더라도 이틀 이상은 소요되겠군.”

“아마도 그럴 것입니다.”

리먼의 표정이 더욱 착잡해졌다.

“그 말은 뒤늦게 저들이 군사를 돌린다 하더라도 지쳐서 싸울 수 없다는 얘기와 같군.”

분명히 걱정 섞인 말투였다. 기사단장은 그를 위로해야겠다고 결심했다.

“하지만 주군, 성을 함락시키는 것이 삼 일 정도로 가능할 일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것도 왕성이니 말입니다.”

간단한 상식이었다.

왕성은 다른 성보다도 자연히 더 클 것이며 더욱 견고하고, 또 설계에 더욱 신경을 썼을 것이다. 다시 말해 수성을 하기에는 최적의 조건이라고 봐야 한다.

“그것도 틀린 말은 아니지. 그러나 내가 걱정하는 것은 그게 아니네. 우린 아레인에 오기 전에 저들의 전력을 측정해보았네. 국왕 폐하와 일 왕자 전하, 그리고 이 왕자 전하를 맞은 군대의 수를 어림잡아보았을 땐 대략 삼천이네. 그건 저들의 전부가 아닐까? 난 그것도 많다고 생각했네. 아무리 왕성에 사람이 많이 남아 있어봐야 채 오백도 되지 않을 것이야. 성안에 남은 사람들은 어쩌면 전투병이 아닐 수도 있어. 수성도 사람이 부족하면 무리한 것이라는 걸 왜 모르는가?”

“저들이 성문을 굳게 걸어 잠그고 있다면 무리될 일은 아니지 않겠습니까?”

“잊었는가? 폐하께서 발리스타와 투석기, 캐터펄트까지 가져가신 것을…….”

기사단장 역시 말문이 막혀 버렸는지 입을 닫았다.

순간 리먼의 뇌리에 스쳐 가는 생각이 있었다.

‘가만, 여왕이 왜 왕성을 나온 것일까? 혹시 당황했기 때문에? 육안으로 보기에는 결코 많지 않은 나이였다. 혹시 이 같은 일이 염려가 되어서……?’

섣부른 추측이었다. 하지만 뜬구름을 잡는 상상은 아니었다.

최대의 전력을 내어 바리톤의 기세를 꺾는다.

이것이 아레인에 관해 바리톤의 지휘관들이 판단하는 부분이었다.

조금이나마 리먼의 표정이 밝아졌다.

‘어쩌면 아레인의 여왕은 무능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나이보다 훨씬 조숙하고 현명할 수도 있다. 선견지명이 있어서 군대를 빼어달라는 청을 하러 왔을지도 모른다. 다른 사람이 하는 것보다는 자신이 하는 얘기가 더 설득력이 있을 테니까.’

현실과는 다르게 리먼 백작의 생각은 점점 산을 향해 가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유프라가 막사 밖으로 나와 그에게 뚜벅뚜벅 걸어와서는 대뜸 말했다.

“정탐을 가야겠어.”

“정탐이라니요?”

눈이 동그래져서 반문을 하는 리먼에게 유프라는 진지한 어투로 말했다.

“가만히 있다가는 아바마마께 더욱 미움을 받을 것 아냐. 그러니까 우리가 먼저 저들의 군대가 자리에 있는지 없는지를 확인해야지.”

“안 그래도 정찰병들이 있을 겁니다.”

“정찰병들만 믿고 이렇게 있을 순 없지. 스스로 움직여 보이겠어. 만약에 저들이 일찍 알아차리면 교란 작전이라도 펴는 게 낫겠어.”

듣고 보니 반가운 얘기였다.

드디어 자신이 모시는 이 왕자 전하가 무엇이라도 하려는 의지를 보이시지 않은가.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저도 돕겠습니다.”

리먼 백작은 유프라 자신의 뜻대로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은 아니었다. 때문에 조심을 기해야 했다.

사전에 이런 말이 나올 줄 예상했던 유프라는 준비해놓은 말을 꺼내었다.

“그럼 군대를 세 패로 나누는 게 어떨까? 저들은 세 곳에 나뉘어 있다고 하지 않았나?”

“그렇습니다. 다른 귀족들도 있으나 저희가 하는 게 낫겠습니다. 그래야 더 좋게 봐주실 테니까요. 그럼 왕자 전하께 따로 인원을 배정해드리겠습니다.”

“가만, 같이 갈 병력들을 내가 고르면 안 될까? 그래도 되겠지?”

“물론입니다.”

결국 결정이 내려졌다.

이 순간까지도 리먼은 유프라가 국가에 반하는 행동을 하리라고는 감히 짐작도 하질 못하였다.

우연찮게도 가인과 헤르 진영에서도 이에 관한 얘기가 나오는 중이었다. 그것도 오딘의 앞에서였다.

“왕성을 걱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럴 가능성 또한 있을 것이라 사료되옵니다.”

헤르의 말에 가인이 자신의 생각을 피력했다.

“제 생각은 이렇습니다. 차라리 그렇게 된다면 저희 진영과 발데르 공작님 진영, 그리고 보탄 백작의 진영에서 한 번에 몰아친다면 어떨까 합니다.”

오딘은 잠자코 둘의 얘기를 듣고만 있다가 가인의 말에 맞장구를 쳐주었다.

“나쁘지 않은 생각이군.”

팔테스를 괴롭힐 때와는 사뭇 다른 진지한 모습이다.

마음속 깊이 존경하는 대상과 자리를 같이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영광인데, 칭찬까지 받아서인지 가인의 기분은 절로 들떴다.

“다만, 문제가 있습니다. 왕성에 일천 정도의 군사가 있다지만 저들이 저희를 무시하고 전력을 투입할 가능성에 대해서입니다.”

오딘이 침묵을 하고 있었기에 헤르가 끼어들었다.

“그게 문제가 되오?”

“공성 장비를 동원한다면 모를 일이지요.”

오딘 역시 공성 장비라 하는 것을 모를 리가 없었다. 바로 투석기를 일컫는 것이리라.

다시 헤르가 말을 꺼냄으로써 둘의 대화가 이어졌다.

“그럼 우리가 왕성에 도착할 때까지 버티느냐 버티지 못하느냐가 문제이겠구려. 그러나 켈타스 후작께서는 전쟁터에서 잔뼈가 굵은 분 아니시오. 최소한 우리가 도착할 때까지는 버텨 줄 수 있을 것이오. 또 왕성에는 ‘그’가 있지 않겠소?”

“그라면 누구를 말씀하시는 건지?”

“마타하리 말이오.”

뜻하지 않은 말에 가인이 반기는 표정을 지으려는데 오딘이 고개를 저었다.

“그 녀석은 안정이 필요하다.”

그 말에 가인과 헤르는 기대를 접어야 했다. 어쨌거나 김이 빠지는 소리였다.

그 표정을 놓치지 않고 오딘이 말했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염려하지 말거라. 내 직접 시간을 끌어주겠노라.”

황송한 말이기는 했다.

하지만 자신들이 모시는 오딘이 아무리 대단하다고 해도 그 먼 거리를 짧은 시간 안에 갈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말을 타고 달려도 단숨에 달린다면 기수라도 지칠 거리이다.

물론 자신들이 아는 그는 불가사의한 힘을 가졌으므로 지칠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었다. 다만 번거로움이 문제였다.

“거리가 꽤 머옵니다.”

“걱정하지 말거라.”

오딘은 손가락에 낀 것을 사용할 작정이었다.

언젠가 숲의 정령 사이하드로부터 약속을 지켜준 데 대한 고마움의 선물이랍시고 전해 받은 숲의 반지.

이미 시험한 적도 있었다.

왕성 근처에도 당연히 숲이 있다. 그곳으로 이동한다면 얼마 되지 않아 저들을 마주할 수 있을 것이다.

‘괘씸하게 아직도 안 가고 뻐겼겠다?’

오만한 생각이 싹트며 오딘이 사악하게 이를 드러내고 웃는 모습을 보며 가인과 헤르는 같은 생각을 했다.

‘불쌍한 자들…….’

더 말을 꺼낼 것도 없었다.

왕성에서 이 같은 소식이 전해진다면 오딘은 왕성으로 향할 것이고, 자신들은 발데르 공작과 보탄 백작에게 이를 알려 행동을 같이하면 되는 것이다.

대충 토론이 정리가 되자 오딘이 화제를 돌려 물었다.

“제라드라는 자를 알고 있나?”

헤르가 대답했다.

“물론입니다.”

“어떤 자였나?”

“본래는 곧은 사람이었습니다. 역적 하인리히에게 돌아서기 전까지는 말입니다.”

가인도 살을 덧붙였다.

“여러 방면으로 박식합니다. 검술에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였습니다.”

“호오, 그래?”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거짓을 아뢰겠사옵니까.”

“그러나 후작은 누명을 쓴 것이라 하더군. 누구 말이 맞는지 모르겠어.”

헤르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누명이라고 하셨습니까?”

“그래.”

가인도 속내에 감춰두었던 말을 꺼내었다.

“저는 사실 의심이 갔습니다. 그가 반역에 동참했다는 얘기는 가장 믿기 힘든 말 중 하나였습니다.”

두 사람 모두 제라드에 대해 나쁜 감정이 있는 것은 아닌 듯했다.

대다수의 공국뿐 아니라 왕국들과 제국들, 더 나아가서는 제법 규모가 큰 상단이나 여러 세력들에는 파벌이 존재한다.

아레인도 예외가 아니었다.

따지고 보면 지금 역시도 파벌이 형성되고 있을지도 모른다.

오딘도 이 부분에 관해서는 아직 별다른 방향을 잡지 못하였다.

안 될 말이지만 후에 발데르를 따르는 자들과 보탄을 따르는 자들이 대립할 수도 있는 것이고, 서로 간의 이해관계나 견해 차이에 의해 파벌이 생길 수도 있다.

그것은 세력의 덩치가 커지면 커질수록 더해진다는 것 또한 알고 있었다.

마교 역시 그랬었으니까.

그러나 아직은 이른 고민이었다.

“그렇다면 일찍 알았으면 좋았을 텐데…….”

헤르의 때 아닌 탄식에 오딘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이미 왕성으로 다시 불러들이라는 명을 내려놓았느니라.”

* * *

칼스만 제도.

철석!

푸른 바다 사이로 여러 개의 섬들이 자리하고 있다.

높게 뜬 흰 구름 사이로 갈매기들이 자유를 만끽하듯 태평하게 날아다니고 있었고, 거센 파도는 바위에 부딪히며 물보라를 일으켰다.

한 남자가 가파른 절벽 위에서 그를 보며 감상에 잠겨 있었다.

“이것 참, 유배를 온 건지 휴양을 온 건지 모르겠군.”

받아들이기 나름이었다.

외지고 척박하다면 그렇겠지만, 다른 면에선 제법 운치도 있질 않은가.

말을 하는 이는 힘 있게 뻗은 흰 눈썹이 매우 인상적이고, 투박한 바느질로 기운 낡고 해진 옷을 입고 있는 사내였다.

그의 이름은 제라드.

예전에는 아레인 변방의 방어를 담당했던 후작이었고, 얼마 전에는 백작으로 강등이 되어 아레인 왕성 내에 거주하던 인물이었다.

지금은 어떠한가.

지위도 권세도 없다.

그럼에도 그는 서운해하지도, 착잡해하지도 않았다. 모든 것을 초탈이라도 했는지 만면엔 여유마저 넘쳐 났다.

약간 불편한 표정은 이렇게 경치 좋은 곳에 오게 된 것이 누군가 자신에 대하여 손을 썼기 때문이 아닐까란 엉뚱한 생각이 들어서였다.

자신은 반성을 하러 온 것이지, 이렇게 경치 좋은 곳에서 휴양을 하러 온 것이 아니었다.

따지고 보면 반성이랄 것도 없었다.

시기가 맞지 않았고, 그로 인해 복수를 미루게 되었던 것이므로.

“그래도 마음이 평온하군. 꼭 경치 덕분만이 아냐.”

내심 바라던 일이었다.

자신이 아니라도 누군가 옳지 못한 왕권에 철퇴를 가해주길 바랐다.

그걸 이루게 되었으니 어찌 좋지 아니하랴.

제라드는 중년의 나이를 훌쩍 넘겨 노년에 다다르고 있었지만, 신체 나이는 그렇지 않았던 까닭인지 매우 젊어 보였다.

모르는 사람이 그를 본다면 아마 30대 정도라고 생각했으리라.

여기 와서 그가 제일 많이 한 생각은 인생의 덧없음과 지나간 과거를 제외했을 때 단 하나였다.

바로 켈타스 후작이다.

꼭 오랜 시간을 걸쳐 사귀어 온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그에게는 이상하게 정이 많이 갔다.

왕성을 떠나올 때 보여 주었던 그 모습은 그를 보았던 자신의 눈이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해주었다.

나이로 따지자면 자신이 스무 살은 연배였지만, 제라드는 항상 그를 친구처럼 대해왔다. 그것은 켈타스 역시 마찬가지였다.

항상 그를 떠올릴 때노라면 자꾸 지금처럼 헛웃음이 나왔다.

“아쉽군, 참 아쉬워. 작위 따위는 바라지도 않네. 자넨 기회가 있어 좋겠군. 은혜를 입었으니 마땅히 갚아야 할 걸세. 신하 되는 자로서 말이야. 내게 허드렛일이라도 시켜 주었다면 좋았으련만.”

미련이었다.

이미 그 역시 오딘에 관한 얘기를 들은 차였다. 고맙다는 인사라도 하고 싶었거늘, 이렇게 유배를 오게 되었으니 할 수가 없다.

일축하자면 곁에 좋은 친구를 두고 그리하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이었다.

지금의 말은 왕성에 있을 켈타스에게 하는 말이었다. 닿을 수 없는 목소리여서인지 애절함이 묻어났다.

스스!

문득 풀을 스치는 소리에 제라드의 청각이 예민해졌다.

그는 고개를 돌리는 수고를 하지 않고 그 자리에서 상념에 빠졌다.

‘날 보러 온 게로군. 어쩌면 올 게 온 것일 수도…….’

보통 유배라는 게 그러하다.

유배지에서 죄인들이 죽어나가는 것은 비단 병 때문만은 아니었다. 비밀리의 암살 역시 이에 속했던 것이다.

어쩌면 지나친 추측일 수도 있었다.

몇 년 사이에 제라드는 지나치게 부정적인 측면으로 사리를 판단하는 경향이 짙어졌다.

좋게 보자면 왕성엔 후작이 있어 자신의 뒤를 봐줄 터이니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여길 수도 있다.

문제는 실세나 다름없는 발데르 공작이었다.

억울한 일이지만 그에게 좋지 않게 찍혀 버렸다.

그가 알던 발데르는 맺고 끊는 게 확실한 인물이었다.

자신을 알아주는 이라고는 오로지 켈타스 후작뿐이었다.

켈타스가 발데르를 설득했을 가능성 또한 낮을 것이다. 또한 바라지도 않는 일이다.

이미 원을 이루었으니 죽음도 나쁘지 않게 받아들일 자신이 있었기에 조용히 눈을 감았다.

발소리는 점차 가깝게 들려왔고, 이윽고 세 사람이 다가섰다.

“후작님, 오랜만입니다.”

적의적인 목소리가 아니었음에도 제라드는 불신을 떨치지 못했다.

그래도 이렇게 예를 차려 주는 사람에게 목숨을 맡긴다면 나쁘지 않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던지 그를 확인하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

의외로 익히 알던 반가운 얼굴이 서 있었다.

“오, 자네, 오랜만이군.”

자신을 찾은 이는 발데르 공작의 기사단장을 역임하고 있는 크레멘 준남작이었다.

미소로 대하자 크레멘 역시 평소의 무표정을 떨치며 절제된 미소로 화답했다.

“그간 무고하셨습니까?”

“나야 잘 있었지.”

달가움에 제라드는 더 말이 이어지려는 것을 꾹 참아 넘겼다. 괜히 분위기를 좋게 이끌어간다면 그 역시 죄의식을 느낄 것 같아서였다.

크레멘은 정색을 하며 용건을 꺼내었다.

“다름이 아니라 오딘 님의 칙명을 받고 왔습니다.”

“어렵게 생각하지 말고 말해보게.”

너무 앞서가는 모습이었다. 마치 당장에라도 죽어줄 수 있다는 눈빛을 하고 있질 않은가.

크레멘은 두루마리에 실로 매듭지어진 봉인을 풀고서 그 안에 적힌 내용을 경건한 자세로 낭독해나갔다.

“후작으로부터 그대에 대해 듣게 되었다. 그동안 변론할 기회가 있었음에도 그리하지 않았던 것은 마땅히 그대의 잘못이다. 가까운 사람에게 오해를 사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은 없느니라. 이에 대해서 당연히 반성의 시간을 가져야 한다…….”

힐책에서 시작된 말은 다른 말로 번져 갔다.

“…그리하여 믿어주기로 했다. 정녕 떳떳하다면 그대에게 자유를 주려 한다. 혹 본 좌의 신하가 될 생각이 있거든 왕성으로 돌아오라.”

제라드는 넋이 나간 얼굴이었다.

‘직접 말을 올리고 싶은데 그분께는 좀체 가까이 가기 힘드오. 이런 말하긴 우습지만 그분과 대화를 섞은 기억조차 없는 듯하구려.’

이는 왕성을 떠나기 이틀 전에 켈타스 후작에게 들었던 말이었다.

요 며칠 사이에 둘 사이가 급속도로 가까워지기라도 했다는 말인가?

쉬이 이해가 가질 않았다. 그보다는 지금 혹시 잘못 들은 것은 아닌지가 의심이 되었다.

“그, 그게 진짜 그분의 칙서인가?”

크레멘은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얘기를 하는 중이었다.

“그렇습니다.”

멀거니 자신을 쳐다만 보는 제라드에게 크레멘은 재촉했다.

“이제 결정을 내려주십시오. 조금 시간을 드리고도 싶지만, 시국이 시국이니만큼 서둘러 돌아가야 합니다.”

“시국이라니? 무슨 일이 있단 말인가?”

“바리톤의 대군이 아레인에 들어와 있습니다. 이미 한 차례 대규모 접전을 벌였습니다.”

아차, 싶었다. 그저 자신을 돌아보고 그간의 일만 떠올리느라 주변의 상황을 예측하지 못한 탓이다.

“돌아가겠네. 내 백의종군을 하는 한이 있더라도 아레인에 힘을 실어주겠네.”

굳은 결심을 내보이는 그를 보며 크레멘은 작은 미소를 떠올렸다.

“가져올 것은 충심이라고 하셨습니다.”

* * *

사랑은 때때로 이성을 마비시킨다. 그래서 가끔가다가는 안 될 길을 걷게도 만든다.

지금 유프라가 걷는 길이 그러했다.

어느새 그는 아레인 왕성에 다다라 있었다.

수하들을 속이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리먼 백작과 그의 기사단장은 각각 다른 조에 있었기에 담당한 조에는 당연히 자신을 제지할 만한 인물이 없었다.

“후우, 핑계를 대고 여기까지는 어렵지 않게 왔는데…….”

꼬박 이틀 정도를 말을 타고 달린 까닭에 피로가 쌓일 법도 했건만, 지켜야 할 존재가 머릿속에 떠올라 그 피로감마저 덜어주었다.

유프라는 마음을 비우고 성벽 근처로 발소리를 죽이고 다가섰다. 이에는 별 어려움이 따르지 않았다.

안에서는 아무런 기척도 느끼지 못했는지 왕성은 매우 평화로워 보였다.

유프라는 허리춤에 둘둘 말려 있는 갈고리가 달린 밧줄을 꺼내고는 위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갈고리를 돌려 원심력을 더하더니 목표 지점을 향해 힘껏 던졌다.

밧줄 끝에 달린 갈고리는 무사히 성 위에 안착했다.

성벽이 꽤나 높아 보통 사람 같았다면 엄두도 내지 못할 일이었다.

이어 유프라는 줄을 당겼다.

끼끼끼끼끼- 칵!

손으로 당겨도 끄떡없을 듯하자 그는 줄을 잡고 곧바로 성벽을 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잠시 후 성 위에 안착하여 조심스럽게 사방을 살폈지만, 다행히 이쪽을 보는 이들은 없는 것 같았다.

그럼에도 유프라는 안도하지 않았다.

‘지금부터가 시작이다.’

수문병들을 통할 수도 있는 일이지만, 이렇게 담을 타는 이유는 두 가지였다.

가능하다면 그녀에게 직접 말을 전하고 싶었고, 또 다른 이유를 들자면 이렇게 해서 말을 전하는 편이 더더욱 신빙성을 가져다줄 수 있다는 판단이 들어서였다.

아레인 입장에서 보자면 거짓된 정보로 받아들일 수도 있는 노릇이다.

이미 이들 역시 얼마 전의 대승을 기억하고 있을 테니 거짓된 정보로 전력을 분산시키려는 목적이 아닌지에 의심부터 하게 될 일이니까.

유약해서 그렇지, 유프라의 생각은 그래도 깊은 구석이 있었다.

로테노아가 내내 왕세자 책봉을 미루던 이유 또한 이에서 연유했다. 그가 헥토르의 반만큼만이라도 강직한 성품을 지닌다면 어떨까 하는 아쉬움에서 말이다.

복면 사이로 유프라답지 않게 매서운 눈초리가 사냥감을 물색하기 시작했다.

그녀에게 접근할 신분이 필요했다. 가장 적격인 건 근위 기사의 복장이 될 것이다.

간간이 그들이 눈에 들어왔지만 너무도 먼 거리였다.

불이 환한 성 한가운데로 내려가기 전에 발각될 가능성이 더욱 크다.

“산 넘어 산이로군.”

그가 고심에 빠져 있을 때, 교대를 한 근위 기사 하나가 망루 쪽으로 올라왔다.

망루는 유프라가 있던 곳과 멀지는 않았지만, 3미터 정도의 높이 차이가 있었다.

‘저 정도의 높이라면…….’

단숨에 망루 근처까지 달려간 유프라는 땅을 박차고 펄쩍 뛰었다. 중력의 법칙조차 작용하지 않았는지 그의 몸은 마치 새처럼 가벼워 보였다.

무사히 망루 위에 안착했을 무렵 공교롭게도 망루병이 몸을 틀었다.

타탓!

유프라의 신형이 무섭게 쏘아져 나가며 그와의 거리를 좁히더니 단박에 망루병의 뒷덜미를 손날로 가격하여 제압했다.

입에 거품을 물고 기절한 망루병을 한쪽으로 끌어놓고서 유프라는 재빨리 그의 복장으로 갈아입었다.

근위 기사가 올라오는 동안에 유프라는 철저히 망루병의 행세를 하고 있었다.

근위 기사는 무거운 철 투구를 벗어 옆구리 사이에 끼고 있었다. 그가 온 것을 모른 체하며 유프라는 몸을 돌린 상태 그대로 있었다.

곧 근위 기사의 목소리가 들렸다.

“오늘은 별이 참 많군. 자기 전에 밤하늘을 보지 않으면 좀체 잠이 오질 않아.”

“그렇습니까?”

그 물음 자체를 근위 기사는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늦은 밤에 자신을 알아보고 경의를 표하는 것이 번거로워서 매번 그러지 말라는 말이 다른 망루병들에게도 전해졌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덕분에 유프라가 다가오는 기척을 느끼고도 몸을 돌리지 않았다. 아무런 의심도 품지 않았기 때문이리라.

뻐억!

갑자기 목뒤로 느껴지는 묵직한 충격과 함께 극한 의구심이 들었지만, 때는 늦었다. 이미 그의 의식은 멀어져 가고 있었으므로.

유프라는 근위 기사마저 망루병의 근처로 데려다놓고서 그의 갑옷을 벗기며 말했다.

“미안하게 되었습니다. 이는 아레인을 위한 일이니 부디 양해해주시기 바랍니다.”

이미 혼절해버린 두 사람에게 그렇게 사과 아닌 사과를 하면서 그는 행동을 서둘렀다.

아레인의 왕성 경비 체계가 허술해서가 아니었다. 유프라의 실력이 그만큼이나 뛰어났기 때문이다.

생애 처음으로 무엇인가를 기필코 해야겠다는 의지가 스스로 발동된 결과기도 했다.

투구까지 써서 아레인의 근위 기사 모습이 되었지만, 남은 일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 왕성 안에 한 번도 발을 디딘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녀가 묵고 있을 곳은 어디일까? 정하고 움직여야 한다. 그냥 돌아다닌다면 의심만 사게 될 것이니.’

오늘이 지나기 전에, 아니 이들이 깨어나기 전에 그녀를 만나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물밀듯이 밀려왔다.

아무런 대책도 세우지 못하고 시간만 가니 마음이 조급해졌다.

이때 외성 뒤쪽의 후원이 시야에 들어왔다.

‘계속 여기 있을 수는 없다. 일단 저곳으로 이동하자.’

근위 기사들의 행동 패턴은 그도 잘 알고 있었다. 바리톤의 근위 기사들을 자주 보았었기 때문이다.

행동에 조심까지 기한 덕에 그는 어렵지 않게 후원에 다다라서 몸을 숨길 만한 수풀 사이에 몸을 앉혔다.

“후우, 난제로군. 이를 어이한다? 물어볼 수도 없는 노릇이다.”

한참을 생각했음에도 별다른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는데, 뜻하지 않게 다가온 목소리에 유프라는 희망을 얻게 되었다.

“분명히 아까까지만 해도 여기 계셨사옵니다.”

그가 풀숲 사이로 슬며시 머리를 내밀어 확인하게 된 목소리의 주인공은 시녀의 복장을 하고 있었다.

문득 그의 뇌리에 묘안이 떠올랐다.

‘내키지 않는 일이지만 어쩔 수 없군.’

그녀를 협박해서라도 왕성의 위치를 알아낼 심산이었다.

수풀 밖으로 몸을 드러냈을 때, 유프라는 다른 한 여인과 눈이 마주쳐 버렸다.

순간 그의 눈과 몸, 그리고 머리가 굳어버렸다.

바로 앞에서 인영이 급작스레 튀어나오자 시녀는 시녀대로 놀라서 날카로운 비명을 질렀다.

“꺄악!”

매우 가까운 거리였음에도 유프라는 그녀의 입을 틀어막을 생각조차 못하였다. 뒤쪽의 시선이 자신을 주시하고 있었기에…….

그가 보고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엘레느였다.

그녀는 시녀를 따라 괴짜 노인을 찾으러 왔다가 유프라와 마주치게 된 것이다.

물론 지금 유프라는 외형상으로는 중장갑을 걸친 근위 기사였기에 식별 가능한 것이라고는 단지 두 눈뿐이었다.

그럼에도 엘레느는 그가 조금 수상하다고 여겼다. 당장에 보이는 행동이 그러했기 때문이다.

참 바보같이 멍하니 입을 벌리고 전에처럼 또 그 자리에 굳어버렸지 않은가. 길을 떡하니 막은 채로…….

“무슨 일이죠?”

한겨울의 삭풍처럼 싸늘한 말투로 차갑게 묻고 있는 그녀의 모습에 유프라는 더없이 난감해졌다.

그는 ‘두 번째 만남조차 이래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용기를 내어 투구를 벗었다. 그 바람에 브라운 색의 부드러운 머릿결이 찰랑거렸다.

또렷한 이목구비, 깊이 있는 그윽한 눈, 매력 있는 입술은 달빛 아래에서도 영락없이 감탄을 자아내게 했지만, 엘레느에게는 아니었다.

“당신은 누구죠?”

여왕을 보필하는 아레인의 근위 기사라고 해봤자 50명이 채 되질 않는다. 그녀가 그들의 면면을 기억 못할 리가 없었다.

심장이 답답하고 터질 듯이 달음박질쳤지만, 모든 감정을 억누르려 유프라는 자신의 입술을 콱 깨물었다.

아픔에 잠시나마 이성이 돌아왔을 때를 놓치지 않고 그는 입을 열었다.

“전 바리톤의 이 왕자 유프라라고 합니다.”

엘레느의 눈빛이 더없이 차가워졌다. 오딘을 대할 때와 비교하자면 극과 극이었다.

“그래서요?”

확실히 엘레느는 두려워하지 않는 모습이었다.

그녀가 차디찬 태도로 대하자 유프라는 입 안의 침이 다 말라가는 것만 같았다.

‘이래서는 안 된다. 난 그냥 할 말을 하면 된다. 내가 정말 바라는 것은 이 소녀의 안전이 아닌가.’

그렇게 마음을 다잡으며 어렵사리 용건을 꺼내는데 말이 계속 더듬어졌다.

“바, 바리톤이… 아, 아니 저희 군대가…….”

그녀의 눈이 채근하고 있었다.

그게 더 부담이 되어 유프라는 발작적으로 두 눈을 감고 소리치듯 말했다.

“이곳, 왕성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격분한 모습이었다. 자신이 초라해서, 창피해서 견딜 수가 없었던 이유다.

뜻밖의 말에 엘레느가 잠시 머뭇거릴 때, 이번엔 시녀가 그를 다그쳤다.

“여긴 어떻게 들어왔죠? 그리고 그 복장은?”

바리톤의 이 왕자의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유프라는 그녀를 마주하는 것이 어려워 고개를 떨어뜨린 채 원하는 답을 내주었다.

“성벽을 타고 들어왔습니다. 무례인 줄은 알지만…….”

시녀는 한 차례 엘레느의 눈치를 살피고는 계속 그를 나무랐다.

“당신들에게는 아레인 왕성이 우습게보였나 보군요.”

유프라의 고개가 더없이 처졌다.

엘레느가 감정이 격양된 시녀를 만류하고는 조금 푸근해진 미소를 짓고서 그에게 물었다.

“바리톤의 이 왕자가 왜 왔는지를 물어도 되나요?”

“거, 걱정이 되었습니다. 이는 아레인에게뿐만 아니라 당신에게도…….”

그녀의 다정한 목소리가 들리자 유프라의 고개가 제멋대로 올라갔다. 그리고 그 미소를 대하는 순간 세상 모든 시름이 떨쳐 나가는 듯했다.

그런가 하면 달빛에 비쳐 반짝이는 초롱초롱한 눈망울과 마주치자 겨우나마 진정이 되려던 심장이 다시금 폭발할 듯 세차게 뛰었다. 정신이 다 몽롱해지는 것 같았다.

그때 하늘에서 뭔가가 깃털처럼 가볍게 내려오며 그녀에게 빠져 있는 유프라의 시선을 훼방 놓았다.

‘하늘에서 사람이 떨어져 내려온다?’

이는 상식적으로 납득이 가질 않는 얘기였다.

본 그대로였다.

드러난 모습은 한 노인의 실루엣이었다. 유프라가 느끼기로 어디선가 본 기억이 있는 사람 같았다.

당시 그녀에게만 시선이 집중되어 자세히 보질 못했지만 대략적인 외형이나 느낌 정도는 와 닿았으니까.

‘그때 같이 있던……?’

한편으론 놀라움이 솟구쳤다.

비행 마법은 꽤나 높은 서클의 마법이었다.

당연히 바리톤의 모든 마법사를 통틀어봐도 이런 마법을 구사하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았다.

엘레느가 투덜거리면서도 반갑게 그를 맞았다.

“지켜보고 계셨군요? 전 어딜 가셨는지 한참이나 찾았네요.”

사랑스러운 목소리였다. 듣는 노인도, 제삼자인 유프라도 그렇게 느꼈다.

시녀는 황망히 허리를 숙이면서도 그에게 자신의 억울함을 풀어달라고 호소했다.

“어르신, 여기 계셨었지요? 여왕님께서 제 말을 믿지 않으셔서…….”

이 말만으로도 엘레느가 얼마나 아랫사람들을 따뜻하고 편하게 대해주는지를 엿볼 수 있었다.

“허허, 여기에 있었지. 그런데 이 녀석이 성벽을 타고 올라오지 뭐냐? 내 궁금해서 위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피이.”

입술을 살짝 내밀며 새침한 표정을 내보이는 엘레느.

괴짜 노인은 허허 웃음을 지었다.

그가 나타남으로써 유프라는 꿔다놓은 보릿자루가 되어버렸다. 멀뚱멀뚱 서서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만 있는 형편이질 않은가.

돌연 노인이 몸을 돌려 유프라에게 위엄이 실린 목소리를 똑똑히 전했다.

“내 손녀딸을 노리다니, 간이 배 밖으로 나왔군. 하나, 네 녀석의 성의를 생각해 바리톤의 병력들에 대해서는 내 따로 손을 쓰지 않기로 하마.”

유프라는 지금 노인이 하는 말이 결코 허황되지 않음을 알았다.

마법에 관해서는 호기심 반, 흥미 반으로 여러 책을 접했던 그다.

비행 마법을 시전할 줄 안다는 것은 7서클 이상의 마법사임과 같다. 또한 7서클의 마법사 정도라면 광역 마법을 펼칠 수가 있다. 대규모의 살상 마법 말이다.

그가 알기로도 제국이나 힘이 강성한 왕국 정도나 6서클 이상의 마법사를 보유하고 있었는데, 그 이상은 널리 알려지질 않았다. 존재한다 하더라도 그들은 각 왕국, 제국들의 비밀 병기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속으로는 끊임없이 의구심이 치솟았다.

‘어째서 저 정도의 마법사가 아레인에 있는 거지?’

한밤의 쌀쌀한 바람이 그의 몸에 닿으며 더한 놀라움과 공포심을 불러들이고 있었다.

엘레느와는 변변한 얘기조차 섞어보지 못하고 성을 떠나는 유프라의 머릿속에 노인의 음성이 울렸다.

[나보다 더 무서운 존재가 너희들을 노리고 있으니 지금이라도 발길을 돌리라고 하는 게 좋을 게야.]

* * *

바리톤의 대군은 점점 아레인 왕성을 향해 접근하는 중이었다.

그리고 아레인의 몇 사람도 왕성 근방에 다다르며 그들을 목격하게 되었다. 제라드를 이곳으로 데려온 크레멘 준남작의 일행이었다.

이들은 적은 인원인 데다 인근의 마법진을 이용한 덕에 바리톤군보다 빠르게 왕성 근방에 다다를 수 있었다.

멀리서나마 저들의 군대 규모를 파악하게 되자 제라드는 걱정이 앞섰다.

“저들을 이길 수 있을까? 왕성에 군대가 얼마나 있다고 하였나?”

“아마도 칠백 정도일 겁니다.”

“그렇다면 큰일이로군.”

“며칠만 버텨 준다면 될 겁니다.”

“며칠이라니? 우리 아레인에 그만한 군사력이 남아 있는가?”

“수가 얼마 되진 않지만 조금 뛰어난 자들이 있긴 합니다.”

제라드는 수긍할 수 있다는 듯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일전에 후작에게 들은 게 있어서였다. 그렇지 않았다면 왕국을 재탈환하는 것이 꿈으로 끝나버렸을 테니.

다시 제라드가 궁금증을 드러냈다.

“내 한 가지 묻지. 그 수라는 게 백이 되는가?”

“그 정도는 아닙니다. 후작님의 군대는 진에 들어가 훈련을 하지 않았으니 말입니다.”

“그럼 당장 알려야 할 걸세. 저들은 공성 병기까지 가져왔으니…….”

솔직히 크레멘도 걱정이 앞서던 찰나였다.

공성 병기에 의해 왕성의 외벽이 무너지고 순식간에 뚫려버리면, 후에 저들을 물리친다고 해도 피해가 이만저만이 아닐 것이다.

크레멘은 대동하고 왔던 마법사들을 바라보았다. 먼 거리를 번갈아가며 이동한 터라 그들 또한 마나가 소진된 상태였다.

그때 한 마법사가 비장한 각오로 말했다.

“해보겠습니다.”

운이 좋다면 근방에라도 다다를 수 있을 테지만, 마나의 부족으로 공간 이동을 하는 경우엔 여러 부작용이 초래된다.

공간 이동을 시행하는 마법사의 몸이 형체도 없이 사라지거나 최악의 경우 목숨을 잃기도 한다.

크레멘 역시 그걸 모르고 있진 않았다.

“시급을 요하는 일이기는 하지만 조금의 시간을 벌기 위해 그럴 필요는 없다. 왕성까지 멀지 않았으니 다른 마법사에게 부탁하는 것으로 하지.”

그때 짤막한 단말마의 비명이 있었다. 제라드를 태우고 있던 기사의 것이었다.

기사는 땅에 떨어지기는 했지만 별다른 부상을 입지는 않았다.

제라드는 그를 밀쳐내 말 아래로 떨어뜨리고는 고삐를 채어 말 머리를 틀었다. 그러면서 갑자기 떨어져 놀란 기사와 크레멘에게 말했다.

“떨어뜨려 미안하군. 그 조금의 시간이 필요하다면 내가 벌어주겠네.”

그렇게 말하고 제라드는 말을 달려 나갔다.

그 모습에 크레멘이 당황하다가 황급히 주위 기사들에게 명했다.

“어서 왕성으로 향해라. 그리고 사람을 시켜 공작 전하께 필히 이 사실을 알려야 한다.”

그 역시 제라드를 향해 말을 돌리려는 찰나, 한 기사가 자신의 검갑을 내던지며 소리쳤다.

“준남작님, 이것!”

크레멘은 허공에 유유히 날아오는 검갑을 받아들고 눈인사를 건네더니 재깍 말을 돌려 제라드를 따랐다.

확실히 크레멘이 오른 말이 빨랐다. 그가 올라탄 말은 어느 순간 제라드의 말을 추월하려 하고 있었다.

크레멘은 말을 하는 수고를 아끼고 팔을 뻗어 조금 전 기사에게 받은 검을 내밀었다.

제라드가 검을 받자 그때서야 크레멘이 입을 열었다.

“몸을 보존하셔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저 역시 그분에게 드릴 말씀이 없으니까요.”

제라드는 그가 말하는 대상이 누군지를 어렵지 않게 간파하고는, 흡족한 미소를 지어 보이면서 만족스런 답변을 내주었다.

“알았네, 그리함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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