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권-악마와의 동거 (17/67)

악마와의 동거

“캐, 캐엑.”

툭하면 목울대를 쳐 대기 일쑤였다.

지금처럼…….

“아파?”

아프라고 때려 놓고 묻는 어이없음에 팔테스는 돌이킬 수 없는 후회를 할 뻔했다.

하마터면 눈을 흘길 뻔한 것이다.

속 감정과는 다르게 그의 얼굴은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것을 느꼈는지 불쾌한 감정을 일체 내색하지 않았다.

“사, 사알짝 아픕니다.”

그의 입은 주인의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하지 못했다.

조금 아픈 정도가 아니라, 끔찍이 아팠다.

그러자 나름 진지한 표정을 짓더니 오딘은 팔테스가 얼마 전 했던 말을 들먹였다.

“그래? 멀쩡한 목도 이렇게 작은 충격만 가해도 아픈데 만약 목을 잘랐다면 더 아팠겠지?”

“그때는 제가 정말 미쳤었나 봅니다. 용서해주십시오. 벌써 여러 번 말씀드렸듯이 후회하고 있습니다. 정말입니다.”

자존심을 팽개치고 땅에 바싹 웅크린 채 머리까지 숙여 가며 사죄를 구하는 팔테스.

분명 표정과 말로는 사과를 하고 있지만, 속내는 그렇지 않았다.

‘밴댕이 소갈딱지 같으니라고…….’

그럴 만도 한 것이 벌써 이 대화, 이 행동들은 여러 차례 계속되었던 것이다.

금붕어도 아닐 텐데 돌아서면 조금 전 일을 까먹기라도 하는지 오딘 이자는 계속해서 그 질문을 되풀이했다.

오딘은 여전히 진지한 낯빛을 하고 물었다.

“기왕 말이 나온 김에 오늘은 한번 해볼까?”

“무얼 말이십니까?”

“네 목, 한번 떼어보면 어떨까 하는데…….”

팔테스의 얼굴에 핏기가 싹 가셨다.

그간의 행태로 봐서는 이놈은 그러고도 남을 위인이었다.

앞서 바리톤의 병사들을 도륙낼 때도 눈 하나 깜짝하질 않았잖은가.

자신이 왕자라고 해서 체면을 봐준다거나 특별대우를 바란다는 것은 막연한 욕심이었다.

만약 그랬다면 아레인 왕성에서의 불미스러운 일 또한 없었을 것이다. 왕자라고 밝혔음에도 무자비하게 구타를 행한 것 말이다.

당장에 팔테스는 손바닥부터 불이 나도록 비벼 댔다.

“그러지 말아주십시오. 그러시면 안 됩니다. 과거의 제 행동, 깊이 반성하고 있습니다. 부디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

바로 그때 세 사람이 다가왔다.

둘은 노인이었는데 한 노인은 어딘지 모르게 겁에 질린 표정이었고, 다른 한 노인은 강 건너 불구경하는 표정으로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또 다른 한 사람은 16세 정도의 소녀로 보였는데, 그녀를 보는 순간 팔테스는 머릿속이 하얗게 질려 버리고 심장이 멎는 줄만 알았다.

말로 형언할 수 없는 아름다움에 넋이 나갔기 때문이다.

사고가 정지한 것과는 다르게 팔테스의 입은 감정을 제어 못하고 떡하니 벌어졌다. 또한 입 안에 고인 침도 그대로 입 밖으로 지저분하게 흘러내리는 중이었다.

온갖 찬사들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오오… 너무도 아름답다. 눈이 부실 정도로 아름답다. 저런 소녀가 이 세상에서 숨을 쉬고 있었단 말이냐? 그것도 이렇게 가까운 곳에?’

어벙한 모습을 보이는 그에게 잠시 그녀의 시선이 머물렀다. 그렇다고는 해도 지극히 짧은 순간이었지만.

그냥 슥 스치는 정도랄까?

그러나 팔테스는 그 순간 시간이 멎었다는 착각을 했다.

‘그녀가 날 보고 있다. 날 보고 있다. 날…….’

요동치는 가슴이 쉬이 진정되질 않았다. 심장이 주인을 버리고 뛰쳐나갈 듯했다.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든 팔테스를 두고 소녀는 수줍은 얼굴로 말에서 내린 노인을 따라 오딘에게 다가섰다.

왜인지 몰라도 그녀의 얼굴이 홍당무처럼 빨개졌다.

팔테스는 착각의 늪에 빠져 쿵쾅거리는 심장을 주체하질 못했다.

‘서, 설마 그녀도 날……?’

자신을 본 이후 벌어진 현상이다.

믿고 싶었다. 그렇게 믿고 싶었다. 아니, 그렇게 믿기 시작했다.

‘사랑은 한순간에 찾아온다더니 정말 그 말이 맞는가 보구나.’

온갖 잡생각이 머릿속을 맴돌기 시작하더니 팔테스는 곧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 들었다.

넓은 초원을 뛰고 있었다.

그의 목적지는 수줍음을 타며 도망치는 소녀.

“아하하하하, 거기 서시오.”

“소녀를 잡아보셔요, 호호호.”

팔테스의 시선은 계속해서 그녀에게 고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주변을 관찰할 여유가 없었다.

그녀를 대하는 오딘의 시선은 차갑기 그지없었다.

엘레느는 우습게도 오딘 앞에서 단 한마디도 꺼내놓질 못하고 있었다.

그 모습에 괴짜 노인이 나지막이 한숨을 쉬더니 그녀를 대신해 말했다.

“별 뜻 없다네. 이 아이가 이자를 발견했고, 자네가 찾는 것 같아 데려온 것일세.”

그러면서 그는 엘레느를 따라온 파르티잔에게 눈짓을 주었다.

호랑이 굴에 들어온 표정이 이러할까? 파르티잔의 표정은 처절하기 그지없었다.

‘이미 틀렸다. 저놈이 날 발견한 이상 빠져나가기는 글렀다. 속 편히 받아들이자. 병신이 되더라도 살아야 하질 않겠는가. 애초에 그러려고 마음을 먹고 오지 않았느냐.’

그렇게 자신을 달래며 오딘의 시선이 자신을 향하기 전 잽싸게 표정을 바꿨다.

“그간 별고 없으셨습니까?”

“별고? 있기를 바란 거야?”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전 오딘 님께서 항상 건강하시어 천년만년 사셨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 말은 솔직함을 담고 있었다.

차라리 자신이 죽어 없어지는 것이 빠를 것이라고 파르티잔은 생각했다.

그저 안 보고 사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었다.

“그래, 몸은 좀 어때?”

“오딘 님께서 만져 주신 후로 훨씬 나아진 듯합니다.”

물론 거짓이었다.

반병신, 아니 불구가 될 뻔했지 않은가.

그러면서 파르티잔은 속으로 그를 욕했다.

‘천하에 둘도 없을 나쁜 놈 같으니라고. 다 알면서 떠보다니…….’

눈앞에서 대놓고 욕을 하고 있는 셈이지만 들킬 까닭은 없었다. 철저한 표정 관리 덕분이었다.

계속 이어지는 오딘과 파르티잔의 대화를 들으면서 엘레느는 기분 좋은 표정을 지었다.

그가 대하는 대상이 자신은 아니라지만 저렇게 웃고 미소 띤 얼굴을 보고만 있어도 좋은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자신이 참 한심하게 느껴졌다.

자신에겐 단 한마디도 건네지 않았으므로.

그녀는 애써 웃음을 짓고는 감히 오딘의 얼굴을 마주 보지는 못하고 고개를 낮춰 가슴을 향해 말했다.

“그럼 전 이만 돌아갈게요.”

돌아서는 엘레느를 따라 괴짜 노인 역시 말에 올랐다.

가라는 말 또한 없었다.

파르티잔을 데려온 것은 그녀와 마찬가지임에도 그냥 없는 사람 취급을 당했으니 그녀의 기분은 꼭 말로 하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녀의 착잡한 표정을 접하며 괴짜 노인은 속으로 오딘을 나무랐다.

‘괴짜는 내가 아니라 자네일세.’

두 사람을 태운 말은 벌써 저만치나 가버렸다.

이 자리엔 주변의 기사들 외에 팔테스와 파르티잔, 그리고 오딘만이 남게 되었다.

팔테스는 자의와는 다르게 멀어져 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향해 팔을 뻗고 있었다.

그 모습이 하도 어이가 없어 오딘은 그를 한심하게 쳐다보다가 파르티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파르티잔은 당장에 얘기를 해야만 했다.

“제가 여기 오게 된 건…….”

“알아. 침이라는 게 중독성이 있어서 한번 맞으면 또 맞고 싶고 그런 거야.”

파르티잔은 뒷머리를 긁적거리며 매우 흡족한 듯한 웃음으로 맞장구를 쳤다.

“그, 그런가 봅니다. 하하하하.”

주변의 기사들에게 팔테스를 감시하라는 명을 내리고서 오딘은 파르티잔을 데리고 한적한 곳으로 향했다.

그리고 품 안의 쇠침을 꺼내자 파르티잔은 기겁을 하며 눈을 크게 떴다.

아닌 게 아니라 쇠침이 예전보다 더욱 커진 것 같았다.

하지만 사실은 그대로였다. 다만 파르티잔의 공포심이 침의 길이가 더 길어진 듯한 느낌을 던져 준 것뿐이다.

“하나 궁금한 게 있사온데 감히 여쭤보아도 되겠습니까?”

“그래, 물어봐.”

제 발로 기어왔다는 데에 대한 일종의 보상이었다.

“아까 덜떨어져 보이는 녀석은 누구입니까?”

과연 파르티잔다웠다.

그새 오딘이 그 녀석을 마땅치 않게 여긴다는 것을 깨닫고 조롱하는 듯한 물음을 건네어 조금의 환심이나마 사보려는 수작이었다.

오딘도 감출 것이 없어 사실을 털어놓았다.

“아, 그 녀석, 이웃나라 왕자래. 아마 삼 왕자라 그랬지? 바르게 누워라. 오늘은 특별히 아프지 않게 놓아주마.”

잔뜩 겁을 먹으면서도 파르티잔은 그 녀석을 상상하며 이를 갈았다.

‘결국 아레인에 발을 들여놓아 화를 입게 되는구나. 멍청한 녀석들. 하긴 그 녀석들이 아니었다면 난 무사히 도망칠 수 있었을 것이다. 오늘 이 자리에 오지 않아도 되었다 이 말이다. 으드득!’

뒤로 누운 덕에 그는 표정을 맘껏 찡그릴 수 있었다.

곧 쇠침의 감촉이 전해지며 불안한 마음이 커져 갔다.

‘끄으으으, 운이 좋게 다리는 다 나아간다고 하지만 오늘은 어떤 고통이 생길는지…….’

천만다행이었다.

쇠침이 살 속을 비집고 들어오는 아픔 말고는 아무런 부작용도 일어나지 않았는지 몸이 개운했다.

오딘은 다시 그를 풀어주었고, 파르티잔은 몇 번이나 절을 하고는 말까지 얻어 타고 아레인의 진영을 벗어났다.

“이럴 거였다면 진즉에 돌아오는 것이었는데……. 그나저나 다음도 이번과 같으리라는 법은 없지.”

다시는 안 붙잡히겠다고 다짐하는 파르티잔이었다.

* * *

그리 크지도 넓지도 않은 집이었다.

균일하게 자른 나무를 덧대어 만든 오두막집은 직사각형 모양이었는데 세로는 다섯 보폭, 가로는 열 보폭이 채 되질 않았다. 출입문이라고 해봐야 지금 열려 있는 문 단 하나였다.

근처에 흥에 겨운 휘파람 소리가 있었다.

뒷모습으로 봐서는 비교적 왜소한 체형의 사내였는데, 그는 물기를 머금은 세탁물을 탈탈 털어 빨랫줄에 너는 중이었다.

큼지막한 대야에 있던 옷들이 모두 줄에 걸리자 사내는 허리춤에 손을 올리고는 줄에 걸린 빨래들을 만족스런 시선으로 둘러보았다.

언뜻 스쳐 보이는 고집스런 입매와 매서운 눈, 높디높은 콧날로 봐서는 영락없는 게티롱이었다.

그는 빈 대야를 제자리에 가져다놓고선 몸을 돌려 중얼거렸다.

“이제는 장작을 팰 시간이로군.”

춥지 않은 날씨였다.

장작을 땔 계절이 아닌데도 그는 다가올 겨울을 위해 이토록 부지런한 모습을 보이는 것이다.

“누가 나 게티롱이 이런 소탈한 생활을 할 줄 알고 있었겠느냐……. 퉤.”

그는 왼손에 침을 뱉어 양손으로 비볐다. 그리고 낡은 도끼를 손에 거머쥐었을 때의 눈빛은 매의 눈만큼이나 매섭게 변해 있었다.

쩌억!

도끼가 내려칠 때마다 장작들은 어김없이 두 동강이 나서 좌우로 떨어져 나갔다.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쪼개지는 장작들.

15개 정도의 장작을 패고 나서야 그는 주위에 떨어진 것들을 주워 한쪽으로 정렬해 쌓았다.

그리곤 오두막집 안으로 들어가 미리 준비한 파를 다지고 나물을 양념에 무친 뒤, 아궁이에 불을 피워 물을 얹힌 솥에 준비한 재료들을 넣고서 팔팔 끓였다.

음식들은 준비되는 대로 식탁에 놓여졌다.

식탁에 오른 것들의 공통점이 있다면 전부 다 채소라는 것이다.

그는 고기를 입에 대면 공격 성향이 짙어진다고 알고 있었다. 이는 그가 매우 어렸을 때 스쳐 가던 일행들에게 귀동냥으로 들었던 말이다.

“만약에 내가 고기를 입에 대었다면 세상은 평화롭지 못했겠지.”

게티롱은 잠시 사악한 미소를 입가에 그리며 그렇게 주절거리다 식사를 시작했다.

풀만 씹어서인지 식사 시간은 자못 길었다.

“아쉽긴 하지만 아침은 이만 먹는 게 좋겠어.”

그는 그릇들을 한곳에 치워 깨끗이 정돈하고는 오두막을 나왔다.

허리춤에 매인 검갑에서 검을 빼어들자 나름 예기를 발하는 검날이 반짝였다.

햇빛에 이리저리 그것을 비춰보던 게티롱은 돌연 고개를 돌려 찡그린 얼굴로 어두운 산을 째려보았다.

라테우스 산맥은 날이 갈수록 점점 더 어두워져 갔다.

저 녀석이 이 산맥으로 온 후로…….

7년 전.

어느 날, 한 녀석이 오더니 라테우스 산맥에 똬리를 틀기 시작했다.

매우 커다란 생명체였다.

멀리서 바라본 것뿐이지만, 어림잡아도 자신의 15배 이상은 커 보였다. 이는 어중간한 성의 높이와도 맞먹는다.

외모 또한 유별났다.

길게 찢어진 눈은 날카롭고 사납기 그지없었고, 그보다 3배가량 더 길게 찢어진 입은 세상 어떤 생명체라도 집어삼킬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이마 위쪽으로는 하늘로 치솟은 뿔이 돋보였는데 몸통의 4분의 1에 해당하는 목만큼이나 길었다.

그리고 온몸이 철갑을 연상시키는 비늘로 덮여 있었으며, 전신을 뒤덮고도 남을 만큼 커다란 날개가 인상적이었다.

두 갈래의 꼬리는 흡사 뱀의 혓바닥을 연상케 했다.

자신의 몸을 숨길 만큼 거대한 레어를 짓는 일로 인해 잦은 공사가 벌어졌는데, 별별 이상한 생명체들이 그의 일을 거들었다.

하나 좋은 점이 있었다면 근방에 들끓던 몬스터들이 제 발로 이곳을 떠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시일이 지나며 공사 소리 말고는 어떠한 소리도 들리질 않았다.

그러던 중 한 드워프가 산허리로 내려와 게티롱을 찾았다.

그는 대뜸 이렇게 말했다.

“될 수 있으면 내려가는 게 좋을 거요. 저분의 신경을 거스른다면 좋을 게 없소.”

게티롱은 기죽지 않고 물었다.

“저분이라니?”

“블랙 드래곤 아그리스 님 말이오.”

게티롱을 처음 마주친 드워프는 조금 놀란 기색이긴 했다.

오우거나 트롤 같은 대형 몬스터들도 지레 겁을 먹고 둥지를 떠나는데 유독 그만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리라.

게티롱은 그 말을 전혀 고깝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흠, 덩치가 저리 크니 사는 곳도 넓어야겠지. 내 한발 양보하지.”

그것이 게티롱이 산 아래로 내려오게 된 사연이었다.

그는 다 양보하고 호기롭게 이웃을 맞아들였지만, 아그리스는 자신에게 폐를 끼쳤다.

그놈의 드래곤이 무슨 조화를 부렸는지 저 주위는 항상 어두컴컴했는데, 그 반경이 점차 넓어지며 이제는 게티롱의 집 근처까지 어둠이 밀려들고 있었다.

자연히 게티롱은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사내가 한 입으로 두말할 수는 없는 법이라고 자신을 세뇌시켰다.

가서 이 일을 따진다면 둘은 더 이상 좋은 이웃으로 남을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에서였다.

때문에 하늘처럼 넓은 아량으로 게티롱은 되도록 그를 이해하고자 애썼다.

그런 마음 덕분인지 게티롱의 표정이 한결 나아졌다.

구겨졌던 이맛살이 펴지고 도끼를 연상시키는 부리부리한 눈 또한 원래의 형태를 찾아갔다.

입가엔 만족스런 미소마저 떠올랐다.

“그 큰 덩치로 살아가기도 힘이 들겠지. 내 아무 소리 안 할 테니 부디 굴하지 말고 열심히 살게나.”

아그리스가 들었다면 큰일 날 소리였다.

그가 사는 곳과는 멀리 떨어져 있다고는 하나 주의를 기울인다면 충분히 들을 수 있는 소리였다. 그럼에도 저 산 위에서 아무런 반응이 없는 것을 보면 아그리스는 그에게 전혀 관심이 없는 듯했다.

마치 인간이 개미를 신경 쓰는 짝이랄까?

꼭 빗대자면 그와 유사했다.

그는 블랙 드래곤에게 신경을 끄고서 검술 연마에 들어갔다.

항상 만족하지 않고 노력하는 모습, 이것이 스스로를 정점이라 생각하는 사내 게티롱이었다.

휙- 휙-!

그의 검술은 어떠한 형식에도 구애받지 않았다.

마음이 가는 대로, 몸이 가는 대로 움직이는 게 자신이 일생을 걸려 창안한 이 무형검법이었으므로.

해가 중천에 떠서야 게티롱은 이마에 솟은 땀방울들을 손등으로 닦으며 만족스런 미소를 지었다.

“만족하는 순간 도태되는 것이다. 지금도 날 누르고 정점에 서기 위한 녀석들이 피땀 흘려가며 노력하고 있을 터이니…….”

이윽고 그는 정 자세로 그루터기에 앉아 지그시 눈을 감고 명상에 잠겼다.

그러던 중 그들이 왔다.

바리톤 왕국에서 그를 찾기 위해 파견된 원정대.

하나같이 초췌한 몰골들이었다.

여기 올 때의 인원이 7명이었던 것에 반해 지금은 3명밖에 남질 않았다. 4명은 오는 도중 도처에 퍼져 있던 몬스터의 습격을 받아 명을 달리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지금 그들은 뭔가를 해내었다는 성취감에 물든 표정이었다.

죽은 이들의 희생을 고귀하게 생각하고, 그로 인해 국왕의 뜻을 전할 수 있게 된 것을 영광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설레는 그들의 표정과는 다르게 게티롱은 그리 좋지 못한 표정이었다. 귀찮은 짐을 떠맡았다는 생각이 들었던 탓이다.

선뜻 접근할 생각을 못하는 사람들 중에서 과거 그를 찾아 바리톤 왕성으로 데려갔던 사자가 어려움을 무릅쓰고 비교적 얼굴색을 환하게 하며 다가섰다.

“절 기억하시겠습니까?”

본 지 얼마나 되었다고 잊어버리겠는가.

그런데도 게티롱의 대답은 달랐다.

“글쎄, 날 찾는 사람이 하도 많아서 말이지. 기억을 못하겠군.”

“얼마 전 바리톤 왕국에서…….”

“아… 그랬었지. 이제 기억이 나는군.”

손뼉을 치고서 마치 대단한 것을 알았다는 양 게티롱이 반기자 사자는 다시 얼굴에 화색을 짓고서 물었다.

“그간 강녕하셨습니까?”

흡사 윗사람을 대하는 말투다. 게티롱은 그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지 거만하게 고개만 끄덕였다.

그러다 갑자기 싸늘한 표정을 지어 보이자 사자는 드디어 올 게 왔다는 생각을 하고 긴장한 낯빛으로 조심스레 말을 꺼내었다.

“미리 연락도 없이 찾아온 점 사과드립니다. 다름이 아니라 게티롱 님께 부탁을 드릴 일이 있어서 왔습니다.”

일거리임을 직감했는지 게티롱은 사색을 하고 말했다.

“좀 아래로 내려가 얘기하지.”

“여기도 조용하지 않습니까?”

그러자 그는 로테노아가 보낸 사자의 등을 떠밀면서 이렇게 덧붙였다.

“근처에 이웃이 있으니 시끄럽게 굴 순 없지.”

사자 일행은 매우 놀란 기색이었다.

지금 게티롱이 하고 있는 얘기가 감히 상상도 못한 내용이었기 때문이다.

“드, 드래곤이라고 하셨습니까? 그것도 성질 난폭한 블랙 드래곤이 이웃이라고요?”

휘둥그레 눈을 뜨고 묻는 사자 일행에게 게티롱은 도리어 반문을 했다.

“그럼 내가 거짓을 말할 사람으로 보이는가?”

“아, 아닙니다. 너무도 굉장한 얘기라 놀랐을 뿐입니다.”

일행 간에 이미 오간 얘기지만 그들 자신도 설마 했었다.

그런데 막연한 바람이 그대로 들어맞아버렸으니 어찌 놀라지 않을 수가 있으랴. 이는 이야기를 만들어내기 좋아하는 사람들의 책에서나 볼 수 있음 직한 일이었다.

사람과 드래곤이 친구가 되고, 의리를 지키는 드래곤의 이야기.

보통 그런 일은 잘 이루어지지 않았다.

인간은 스스로를 고등 동물이라 자신하지만, 드래곤의 입장에서 보자면 인간 역시 하잘것없는 생명체에 불과했다.

돌려 말하면 드래곤에게 인간은 상대를 해줄 가치가 없는 존재일 뿐이라는 것.

그러니 얘깃거리로만 남는 것이다.

경외의 시선으로 게티롱을 보는 바리톤의 사자 일행.

그리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듯한 게티롱.

그가 던져 준 말로 인해 사자 일행의 가슴은 꿈으로 부풀었다.

‘이분만 모셔 간다면 삼 왕자 전하를 반드시 구출할 수 있겠군.’

‘광인이나 이방인 따위야 여기 계신 게티롱 님에 비하면 새 발의 피겠구나.’

두 마법사가 그리 막연하게 생각했던 것에 반해 사자는 비장한 각오로 머릿속을 물들였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모셔 가야만 한다.’

임무를 맡은 것은 본인이다.

두 마법사 역시 공을 치하받기는 하겠지만 어디 자신만 하겠는가. 어쩌면 전투가 끝난 후에 로테노아 국왕의 총애를 받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저희는 국왕 폐하의 명을 받고 이곳까지 왔습니다. 저희 폐하께서는 게티롱 님을 꼭 뵙고 싶어 하십니다.”

게티롱은 묻지 않았다.

가끔은 말을 아끼는 게 더 큰 무게감을 연출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서였다.

예상대로 사자가 다시 입을 열었다.

“아레인과 전쟁이 터졌고, 그 와중에 삼 왕자 전하께서 납치되셨습니다. 국왕 폐하께서는 이 일을 크게 염려하고 계십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왕자 전하가 볼모로 잡혀 있으니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신 모양입니다. 해서 저희가 오게 되었습니다.”

자신들이 추측하는 게티롱 정도의 실력자라면 전혀 어려울 것 같지 않다고 생각했기에 절실함을 듬뿍 담아 얘기하였다.

“전쟁? 국가 간의 전쟁을 얘기하는 것인가?”

“그렇습니다.”

“난 전쟁에는 관여치 않아. 내가 끼어들어 전쟁을 좌지우지하는 것은 창피한 일이라서 말이지.”

눈에 띄게 사자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지금 하는 말은 거절의 뜻이 분명했으니까.

만약 그를 만나서 데리고 가질 못했다는 말을 국왕에게 전한다면 필시 힐책을 받을 것이다.

이번 전투에서 패하게 된다면 바리톤은 망국의 길을 걷게 된다. 로테노아는 이 일에 대다수의 전력을 투입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으므로.

‘그렇게 되어서는 안 된다. 생각하자, 빨리…….’

사자는 이렇게 다짐하고는 사자는 빠른 추론을 거듭했다.

‘이분은 엄청나신 분이다. 우리 같은 범인은 상상조차 하지 못할 정도로……. 지금 하시는 말 또한 그렇지 않은가. 어차피 국왕께서는 삼 왕자 전하의 신변을 염려하셨다. 아마도 팔테스 전하를 모셔 오는 것이 이분의 일이 될 것이다.’

결론은 곧 사자의 입을 통해 게티롱에게 전달되었다.

“저희 국왕 폐하께서도 그것은 바라지 않으실 것입니다. 오직 삼 왕자 전하의 신변을 염려하고 계시오니 그분을 다시 저희 진영으로 데려오는 것만을 원하고 계실 겁니다.”

“그런 일이라면 한번 생각은 해보지.”

“그, 그럼 들어주시겠다는 말씀입니까?”

“그냥 생각해보겠다고 하였지.”

게티롱이 뜸을 들이자 사자는 더욱더 안달이 났다.

“시급을 요하는 일이옵니다. 부디 저희의 사정을 조금 헤아려 주십시오.”

“저희들도 이렇게 부탁드립니다.”

뒤에 있던 마법사들도 허리를 직각으로 숙여 가며 절박함을 호소했다.

그런데도 계속하여 게티롱이 석연찮은 반응을 보이자 사자는 이런 말까지 했다.

“보수라면 얼마든지 드리겠습니다.”

딴에는 잡아보겠다고 내뱉은 거였지만, 그것이 바로 게티롱이 기다리던 말이었다. 안 그래도 전에 보수를 너무 적게 요구한 건 아닐까 하고 후회를 했었지 않은가.

“날 찾아 먼 길을 왔으니 성의를 무시하면 안 되겠지. 그대들의 청을 들어주도록 하겠다.”

* * *

말 그대로 지옥이었다.

단두대에서는 벗어났지만 팔테스가 요 며칠 겪은 일들은 여태 경험해보지 못한 끔찍한 사건들이었다.

오딘이란 놈은 시도 때도 없이 자신을 핍박하였고, 가끔은 자신이 바리톤의 삼 왕자가 맞는지 착각까지 들 정도였다.

왕자를 이리 박대하고 괴롭히는 법이 어디 있을까?

몇 번이나 그를 설득하려 했었다.

이리되면 두 왕국 사이는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될 것이라고.

그때마다 돌아오는 것은 잔인한 눈웃음과 핍박.

팔테스 본인도 바보는 아니었다.

이럴수록 더 자신이 괴롭게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되자 더는 그런 말을 꺼낼 수 없었다.

그는 이곳에 머물며 아레인에 관한 몇 가지를 알게 되었다.

여왕이란 존재, 그리고 그 위에 있는 존재.

물론 대륙의 역사를 통틀어볼 때 어린 왕을 대신해 다른 사람이 내정간섭을 행한 일은 종종 있었다.

하지만 그는 이방인이 아닌가.

생김새부터 이곳의 사람과는 엄연히 차이가 있었다.

일단은 구릿빛 피부가 그러했고, 보기 드문 검은 머리카락과 검은 동공이 그러했다. 냉정하게 본다면 남자답고 잘생긴 호남형의 인물이지만, 팔테스의 눈엔 오로지 악마로만 비쳐졌다.

무엇보다 한 가지 더 가슴 아픈 일이 있었다.

희고 고운 흐드러진 꽃, 하늘에 반짝이는 별이나 바닥이 훤히 비치는 호수보다도 훨씬 더 아름다운 소녀.

비참한 몰골로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는 데에 팔테스는 슬픔의 늪에 빠져 버렸다.

‘늠름한 모습을 보여 주었더라면, 그랬더라면 더할 나위 없이 좋았을 것을…….’

아쉬움은 점점 커져서 강이 되어버렸다.

이제는 홀로 있는 시간엔 그녀 생각만 간절해졌다.

한순간에 찾아오는 게 사랑이라더니, 정말 그런 것만 같았다.

그리고 근래 들어 만일이라는 생각을 자주하게 되었다.

‘만일 내가 납치되지 않았다면…….’

‘만일 우리 바리톤이 손쉽게 승리를 하였다면…….’

그가 생각하는 만일은 하나의 결론을 도출하였다.

‘그 후엔 그녀를 보았을 것이다. 필히 그리하였을 것이다. 그랬다면 난 그녀를 가졌겠지.’

그러다 팔테스는 실수를 깨닫고 자신의 머리를 주먹으로 강하게 쳤다.

뻑!

제법 큰 소리가 났지만 팔테스는 아픔도 잊은 채 스스로를 책망했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인가? 그녀에게 그런 불손한 생각은 어울리지 않아. 난 아마도 멋지게 청혼을 하였을 것이야. 그녀가 어떤 출신이건 구애받지 않고 말이다. 그리고 그녀의 하얀 손을 잡고 말을 타고 아름다운 곳을 돌아다니며 여행을 했겠지. 그녀가 좋아하고, 갖고 싶어 하는 것이라면 뭐든 사주었을 텐데……. 그녀의 부탁이라면 아마 무엇이든 들어주어도 아깝지 않을 거야.’

지금 이 순간 그는 스스로는 멋지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모든 것을 내주어도 아깝지 않을 사람을 드디어 찾게 되었으니 그녀가 행복하도록 혼신의 노력을 기울일 자신이 있었다.

그녀와 하고 싶은 게 이루 다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너무나 많았다.

그 역시 여자를 모르고 산 게 아니었다. 성인이 된 후에는 마음에 드는 여인을 사람을 시켜 불러들인 적도 심심찮게 있을 정도였으니까.

그러나 자신이 봐온 모든 여인들은 그녀의 청초함과 화사함, 아름다움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쉬는 시간만 생길 때면, 아니 잠을 잘 수 있는 시간이 주어질 때면 그녀 생각에 더욱 난감했다.

‘어떤 소녀일까?’

‘그녀의 이름은 무엇일까?’

팔테스는 그녀의 정체도, 이름도 몰랐다.

눈에 콩깍지가 씌어 당시의 상황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한 탓이다.

단지 한 가지는 확실하게 기억했다.

소녀가 자신 쪽을 보며 두 뺨에 홍조를 띠었다는 것.

‘분명히 그녀는 날 보며 수줍어하고 있었다. 혹시 그녀도 운명을 느낀 것일까?’

이는 물론 철저한 오해였다.

그가 본 소녀는 다름 아닌 엘레느였는데, 그녀는 팔테스를 본 것이 아니라 그 옆에 있는 오딘을 먼저 본 것이었다. 하여 볼에 홍조를 띤 것을 팔테스가 그만 착각해버렸다.

사랑은 때로 위대한 힘을 발휘한다고들 한다.

지금 팔테스 또한 그러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살기 위해, 오딘의 마수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녀와의 미래를 위해서라면 어떻게 해서든 이 처지를 극복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남성은 여성과 달라서 본능적으로 자신의 강인함을 내세우고 싶어 한다.

저도 모르게 용기가 치솟은 팔테스는 당장에 자신을 가로막은 장애물, 오딘을 어떻게 해볼 순 없을까라는 생각마저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곧 고개를 탈탈 털었다.

‘인간은 동물이나 몬스터와는 다르다. 지혜가 없다면 어찌 만물의 영장이라 할 수 있을까? 이 위기를 슬기롭게 극복하자. 힘이 강하다고 해서 남들의 인정이나 존경을 받는다는 법도 없다. 헥토르 형님만 봐도 그렇지 않은가. 너무 강한 것은 부러지게 마련인 법.’

그렇게 생각하다 보니 오딘이란 놈도 언젠가 부러지지 않을까란 막연한 기대에 물들었다.

자신이 상상할 수 있는 저주란 저주는 다 퍼부어보았지만 아직 어떠한 효과도 나타나지 않았다. 도리어 더 젊어 보이기까지 하고 있으니 짜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하늘에 대고 기도를 한들 뭣 하랴. 현실에서 통용되는 일이라야 한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 그게 무엇일까?’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하지만 머릿속엔 석연찮은 계획들만 떠올랐다.

어설픈 행동을 한다면 더한 화를 일으킬 것은 불 보듯 훤한 일.

‘당장에 힘들다고 서두르지 말자. 내 인생이 걸린 문제다. 그녀를 위해서라도 기필코 성공해야 한다.’

그가 바라는 것은 오직 하나,

이곳에서의 탈출이었다.

어느새 동이 트려 하고 있었다.

그녀에 대한 생각이 너무 깊어졌기에 밤을 꼴딱 지새운 것이다.

막연한 두려움들이 샘솟았다.

하루의 시작은 고통의 시작과도 직결되는 것이니.

‘한 시간이라도 자두어야 한다. 단 한 시간이라도…….’

어렵사리 사념을 떨쳐 버리며 잠이 들었다.

잠시 후 눈을 감았다 싶었는데 명령조의 말투가 들려왔다.

“죽은 듯하니 땅에 묻어주어라.”

“넵.”

며칠 이곳에서 묵은 시간을 통틀어 현재 팔테스의 긴장감은 최고조에 달해 있었다.

당연히 목소리의 주인이 자신이 그토록 두려워하는 오딘이라는 것을 깨달았지만, 피로가 누적된 까닭에 눈꺼풀이 천근만근 무거워져 쉽사리 눈이 떠지질 않았다.

‘일어나야 한다. 일어나지 못하면 산 채로 땅에 묻혀 죽게 된다.’

인근에 서 있던 장정들이 팔테스의 속도 모르고 두 팔과 다리를 부여잡자 그때서야 그의 두 눈이 번쩍 뜨였다.

하나, 뜻과 같지 않았다.

오딘은 이미 자리를 벗어난 상태였고, 힘이 억척같이 센 장정들은 팔테스를 정말 묻을 생각인지 숲 한쪽으로 들고 가기 시작했다.

팔테스는 고래고래 소릴 쳤다.

“이것 놔주시오! 일어났으니 놔달라는 말이오!”

그럼에도 장정들은 요지부동이었다.

한 사람이 팔테스를 붙잡아두고 나머지 장정들이 부지런히 땅을 파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하도 어이가 없어 팔테스는 계속하여 항변했다.

“이보시오! 내 아직 살아 있다지 않소.”

하나, 장정들의 태도는 차갑기 그지없었다.

“우린 묻으라는 명령을 받았으니 묻을 뿐이야.”

땅은 순식간에 팔테스를 세울 수 있을 정도의 깊이까지 파였고, 땅을 파던 장정들이 구덩이에서 빠져나오자 다른 장정이 팔테스의 엉덩이를 발로 걷어찼다.

자연히 팔테스의 몸은 균형을 잃고 구덩이 안으로 곤두박질쳐졌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장정들이 주위에 수북이 쌓인 흙을 구덩이로 밀어 넣기 시작했다.

“사, 사람 살려… 푸우.”

입을 벌리다 먹었는지 팔테스는 흙을 뱉어내며 괴로움을 호소했다.

그러나 장정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삽으로 뜬 흙을 열심히 던져 댔다.

팔테스의 눈엔 마귀들이 따로 없었다.

구덩이에 사람을 밀어 넣고 산 채로 묻으려는 자들의 얼굴이 조소까지 머금고 있질 않은가.

어떻게 보면 무리도 아니었다. 악마로 생각하는 자의 수하들이니 마귀라 봐도 무방할 것이다.

절박했다. 이제는 흙더미에 파묻혀 제대로 몸을 가눌 수도 없는 형편이다.

과연 자신이 이렇게 죽어야 하는지에 대한 회의마저 생겨났다.

결국 흙더미에 머리까지 묻혀 버린 팔테스.

그로도 모자랐는지 장정들은 작당이나 한 것처럼 흙을 발로 꾹꾹 밟기 시작했다.

그는 비명을 지를 수도 없는 형편이었다. 입을 여는 즉시 흙이 입으로 들어갈 테니까.

눈치가 없게도 입은 입술에 묻은 흙을 식사로 착각했는지 어서 넣어달라고 채근했다.

사람이 흙 속에 파묻혀 살 수 있는 시간이 얼마나 될까?

그 시간 동안 팔테스는 구겨질 대로 구겨진 얼굴로 갖은 상념에 빠졌다.

‘애초부터 아레인을 침공하는 것이 아니었다. 무슨 일이 있었더라도 아바마마를 말렸어야 했어. 이제 죽게 생겼으니 복수도 할 수 없겠구나. 내가 죽은 후에 복수를 하면 뭣 하리. 살아생전이 아니라면 의미 없는 일인 것을.’

벌써 여러 차례 느낀 것이지만 지난 후에 후회해서 변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여기서 팔테스는 인생의 교훈을 얻게 된 셈이다.

물론 반대편에 선 생각 또한 있었다.

‘그때는 몰랐었다. 저놈이 악마일 줄. 또 그때 당한 울분을 풀어야 했지 않느냐.’

‘울분이라고? 그때 당한 것이 울분이었나? 근래 당하고 있는 것에 비하면 새 발의 피다. 덕분에 이렇게 비참하게 죽게 되질 않았느냐.’

뭐가 옳고 그른지 판단조차 할 수 없는 상황.

그러는 동안 코에 흙이 스며들고 적잖은 흙을 씹어서인지 기분이 몹시도 불쾌했다.

아니, 그것보단 호흡을 제대로 할 수가 없어 당장에 죽을 것 같아 젖 먹던 힘까지 짜내어 발버둥을 치기 시작했다. 그 바람에 조금이나마 그가 묻힌 땅이 들썩였다.

의식이 가물가물해질 때쯤 몸이 더 옥죄어오는 느낌이 들었다.

푹! 푹!

흙을 삽으로 찌르고 걷어내는 소리였다.

어쩌면 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팔테스는 희미한 미소를 얼굴에 걸친 채 그대로 혼절해버렸다.

팔테스가 눈을 떴을 땐 정말 반가운 소리가 들려왔다.

“어? 죽은 거 아녔어?”

정말 듣기 싫은 소리였었다. 하지만 이 순간만은 아니었다.

악마의 이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것은 자신이 살아 있다는 반증이 아닌가.

흙을 먹어 속이 메스껍고 뒤집어질 것 같았지만, 내색해서는 안 될 것만 같은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잘러… 주셔서 감사합니다. 점말… 감사합니다.”

발음이 제대로 되질 않았다.

그 와중에도 살려 주어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었음이다.

먼지투성이인 팔테스의 얼굴엔 눈물까지 흘러내렸고, 덕분에 간절한 느낌만은 전달되었다.

하나, 측은한 마음이 들 만도 하건만 오딘은 여전히 짓궂은 표정이었다.

“죽었던 거 맞지? 남들이 봤다면 내가 생사람을 땅에 묻은 줄 알 거야. 어떤 게 맞아? 살아 있었던 거야? 아님 죽었다가 살아난 거야?”

저자의 마음에 드는 답변을 내주어야 했다.

그러나 눈에선 눈물이, 코에선 콧물이 흘러내리고 침과 범벅이 된 흙이 씹혀 제대로 입이 벌어지질 않았다.

“넌 꼭 두 번씩 말하게 하더라? 그건 나쁜 버릇인데… 어쨌거나 말해봐. 죽었다 살아난 게 맞지?”

끄덕끄덕!

오딘이 다시 한 번 묻자 팔테스는 소리가 나게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그는 한 가지를 확신하게 되었다.

이자가 마음만 먹는다면 언제든지 자신의 목숨을 취할 수 있음을.

현실을 자각했음이다.

그나마 그의 마음에 드는 대답을 내놓아서인지 씻을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고, 팔테스는 속에 들어간 흙더미를 조금이라도 더 뱉어내려 헛구역질을 했다.

그리고 속이 조금이나마 개운해지자 오딘이란 몹쓸 존재에 대해 의문이 일었다.

‘사람이 저렇게 악독할 수 있단 말인가? 작두는 둘째 치고 생사람을 땅에 묻다니……. 마계라는 곳이 있다더니 저놈은 필시 그곳에서 온 존재가 틀림없다. 우리 바리톤은 너무도 무서운 적을 만들어버렸다.’

한편으론 후회도 무럭무럭 자라났다.

‘그때 그 말만 하지 않았더라면… 아니, 아레인에서 기분 나쁜 내색만 하지 않았더라도……. 한순간의 일이 이토록 후회로 남는구나. 이제라도 밉보이지 말아야 한다. 내가 살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래야만 한다. 돌아가는 날까지는 간이고 쓸개고 다 내보여야 한다. 걱정이구나. 정말 그가 악마라면 우리 바리톤에 희망이 없다고 봐야 하는 것 아닌가. 아바마마와 대면이라도 시켜 준다면 좋으련만…….’

이 일 이후 팔테스는 오딘을 향한 시선을 달리하게 되었다.

그는 자신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는 존재였으니 말이다.

* * *

엘레느를 그리워하는 사람은 팔테스만이 아니었다.

얼마 전 헥토르에게 호통을 듣고도 유프라는 그녀 생각을 전혀 떨치지 못했다. 아니, 그리움은 더욱 커져 이제는 세상 모든 일이 귀찮아져 버렸다.

모든 게 엘레느가 오딘을 만나보겠다며 왕성을 나옴으로써 벌어진 일이었다.

“전쟁은 하여 이긴들 뭣 하리. 조금 더 넓은 땅, 조금 더 많이 가지려는 욕심일 뿐인데……. 욕심을 부리려면 한도 끝도 없다는 걸 아바마마와 형님은 왜 모르신단 말인가.”

다른 한편으론 걱정도 앞섰다.

“우리 바리톤이 이기게 된다면 그녀는 곱지 않은 시선으로 날 바라볼 것이다.”

그렇게 되긴 싫었다.

가능하다면 이 전투를 말려서라도 다시 좋은 이웃 국으로 남고 싶었다.

그러나 그의 바람과는 다르게 바리톤 진영에서는 저들에 대한 악감정만 커져 갔는데, 특히나 팔테스 문제가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

전투력을 논하기보다 저들을 비난하고 헐뜯는 데에는 삼 왕자의 납치 문제만 한 것이 없었던 탓이다.

상식 밖의 행동, 국가 간의 예의라고는 모르는 자들로부터 시작된 말들은 ‘치사한 자들’, ‘몰염치한 자들’ 등 별별 내용들로 번져 갔다.

아예 바리톤의 진영에서는 몇몇을 따로 파견해 멀리서 대놓고 아레인 진영을 향해 나무라는 말을 해댔다. 그러나 그들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이는 유프라의 귀에도 들어온 일.

유프라는 이 점에 관해서는 비교적 냉정하게 생각했다.

‘우리가 저들이 약한 틈을 타 침공을 한 것부터가 상식 밖이다. 도리에 어긋나는 행동을 해서는 안 되었다.’

좋은 말로 유프라는 바리톤의 마지막 양심인 것이다.

거기에 한 가지 생각이 더 곁들여져 버렸으니, 바로 아레인의 여왕에 관한 것이었다.

“후우, 좋지 못한 첫인상을 심어주게 되어버렸어. 이를 어떻게 만회해야 할까?”

지금 이 시간에도 여러 지휘관들 간에 작전 계획이 오가고 있었지만, 유프라가 그에 동참하지 않은 것은 개인만의 시간을 갖기 위해서다.

국왕, 아니 아바마마의 명이 없다면 그는 그 자리에 꼭 동참할 필요가 없었다.

아레인과 그녀에게, 그리고 바리톤에게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있는 자신이 무기력하게 느껴져 피로가 쏟아졌다.

그에 옆의 침상에 누우려는 찰나, 난데없는 훼방꾼이 유프라의 막사 안으로 들어섰다.

“또 잠이냐?”

질책의 목소리는 다름 아닌 헥토르의 것이었다.

그의 말대로 유프라는 요즘 시간만 나면 자리에 누웠는데, 사랑에 눈이 멀어 몸이 무기력해지고 힘이 없어서였다.

“형님 오셨습니까?”

풀이 죽은 목소리.

헥토르의 인상이 험하게 일그러졌다.

“아직도 그 생각이냐?”

유프라는 답하지 않았다. 거짓을 말하는 것보다는 침묵하는 편이 나을 것 같아서였다.

뭐라 쏘아붙이려다가 헥토르는 입가를 씰룩이며 꾹 참고는 대신 다른 말을 꺼내었다.

“조만간 아레인 왕성을 칠 것이다.”

“왕성을 말입니까?”

예상치 못한 말이었던지 유프라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렇다. 해결사 게티롱이라는 사람을 데려오기 전에는 뾰족한 방법이 없다. 일단은 저들의 사기를 떨어뜨리고 전세를 역전시켜야 한다.”

“아바마마께서도 알고 계신 일입니까?”

“방금 아바마마와 독대를 하고 오는 길이다. 현자의 계책이라 하시었다.”

다른 왕자 같았다면 시샘을 하였을 일이었다. 두 왕자가 있는데, 한 왕자에게만 상의를 해서 결단을 내린다는 것.

하지만 유프라는 아니었다.

그는 질투를 하기보다는 그녀에 대한 막연한 걱정이 먼저 앞섰다.

‘큰일이다. 아레인은 이 전투에 상당수의 전력을 쏟아 부었다고 들었는데……. 그렇잖아도 왕성이 안전할까 조마조마했었는데 결국 일이 터지고야 말았구나.’

입 밖에 낸다면 큰 오해를 불러일으킬 만한 생각이었다.

확실한 건 유프라가 바리톤을 생각하고 걱정하는 마음보다도 아레인의 여왕을 생각하고 걱정하는 마음이 크다는 것이었다.

‘혹 왕성이 버티지 못하는 상황에서 날랜 기사들이 그녀를 포로로 잡는다면…….’

생각이 여기까지 오자 유프라의 안색이 창백해지고 몸이 파르르 떨렸다.

‘막아야 한다. 전쟁은 여인을 나락으로 빠뜨린다. 그녀에게 기필코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상상도 하기 싫은 일이었다.

저들이 잘 막아준다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못할 수도 있는 일이 아닌가.

대륙의 역사를 통틀어봐도 그런 경우가 많았다.

전쟁에서 패한, 혹은 상대 진영에 붙잡힌 포로들은 인권을 박탈당하고 귀족들의 노리갯감이 되는 일이 허다했다.

사색이 짙어져서 유프라는 눈앞에 누가 있는지도 까맣게 잊어버린 상태였다.

그를 보는 헥토르의 표정은 결코 곱지 못했다.

“아직도 그 여자 생각을 하는 것이냐?”

“아, 아닙니다.”

좀체 입에 거짓말을 달지 않던 유프라였지만 지금은 그래야만 했다. 형님의 힐책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행여 의심을 살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잊었습니다. 아니, 잊으려고 노력 중입니다. 괜히 형님께서 말씀을 꺼내시니 다시 마음이 동할 뻔했습니다. 하하하하!”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는 웃음을 짓는 유프라를 보며 헥토르는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깊이 파고들지는 않았다.

“잘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군사들의 꺾어진 사기를 진전시켜 저들을 벌할 수 있다. 아바마마께서 보내신 사자가 일을 잘해내준다면 더욱 좋으련만.”

형제지간이라지만 오래전부터 두 동생에 대한 우애는 눈곱만큼도 없던 헥토르였다.

그러나 요즈음은 아니었다.

자신이 잘되려면 두 동생이 필요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유프라는 필요했었고, 팔테스는 걸림돌이 되지 말아야 했다.

자신이 아버지의 입장이라고 해도 이미 팔테스에게는 큰 실망을 하였을 것이다. 그는 지금 애물단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으므로.

남은 경쟁 상대는 눈앞의 유프라 하나. 그를 곤경에 빠뜨릴 계책도 이미 정해두었다.

바로 사랑에 빠졌다는 것.

다른 때 같았다면 모르겠지만, 지금은 전시가 아닌가.

모든 일을 사실대로 까발린다면 유프라 역시 호된 질책을 받게 될 것이다.

유프라는 근래 들어 세상이 밝거나 아름다운 것은 다 그녀가 있기 때문이라고까지 생각했고, 만에 하나 그녀가 잘못된다면 세상의 아름다운 모습도 어두워질 것이라는 느낌마저 들었다.

그래서는 안 되질 않겠는가.

당장에 생각해야 할 것은 아레인과의 전쟁뿐이었다.

어떻게 해서든 이 전투를 승리로 이끌어 반드시 왕세자에 책봉되겠다는 욕심이 헥토르의 면면에 묻어났다.

놀랍게도 유프라는 그의 속내를 알고 있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형님의 관심은 오직 왕세자 책봉이겠지. 얼마든지 물러서 드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녀가 다치는 것만은 보아줄 수가 없습니다. 아레인 왕성을 습격하는 계획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기필코 저지해야겠습니다.’

문을 나서는 헥토르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유프라는 그렇게 각오를 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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