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리톤의 희망
이 왕자 유프라와 보탄 남작이 조우하고 있는 곳에도 전투는 치열했다.
얼결에 병장기를 맞대기 시작하며 싸움은 일파만파 커져 갔다.
그 와중에서도 파르티잔을 쫓는 자들이 있었다.
파르티잔은 운이 좋게 주인을 잃은 말에 올라 도주하고 있었는데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었다. 사방이 자신을 잡으려는 자들로 넘쳐났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인기 폭발이었다.
불행이랄 건 두 진영 모두 자신을 좋은 의도로 데려가려는 게 아니었다는 것이다.
‘내 인생은 참으로 어지럽구나. 어쩌다 이런 인생을 살게 되었는가.’
말을 달리는 도중에 감정이 격해져 흐른 눈물이 허공에 흩뿌려졌다.
그러나 저들은 그 눈물을 보지 못했으며, 설혹 보았다 하더라도 동정을 주지 않았을 것이다.
파르티잔은 그렇게 생각했다.
하나, 유독 한 사내가 그를 애석하게 여기고 있었다.
“저자는 슬픔이 많구나. 저들이 그를 잡아가면 필히 죽이려고 들 것이다. 차라리 우리 진영이 저자를 보호해주는 것이 낫겠다.”
지금 말을 뱉은 사람은 다름 아닌 바리톤의 이 왕자 유프라였다.
그는 여태 전투를 지근거리에서 지켜보고 있다가 기사 몇을 데리고 파르티잔을 향해 달려갔다.
“제일 걸리는 것이 바로 저 기사로군.”
그가 보는 대상은 아레인의 실력자이자 보탄 백작의 기사단장인 샤르트였다.
왕국 내에서 손에 꼽을 정도의 검술 실력을 지닌 자이다.
그에게 쓰러진 이만도 벌써 십수 명이 넘었다. 그것 또한 파르티잔을 생포하기 위해 이리저리 움직여서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더 많은 바리톤의 병력들을 축내었을 것이다.
왼손으로 고삐를 채어 말을 재촉하면서 유프라는 곧장 샤르트에게로 달려들었다.
그 무렵 샤르트는 파르티잔의 말과 거의 나란히 달리고 있었다. 조금 더 거리를 좁힌 후에 팔을 뻗으면 파르티잔의 뒷덜미를 잡을 수 있을 것이었다.
파르티잔이 그것을 간파했는지 고개를 돌려 샤르트를 발견하고 큰 소리로 자비를 구했다.
“제발 날 놓아주시오! 난 그냥 자유롭게 살고 싶소. 한 번만 못 본 체해주시면 안 되겠소?”
간곡한 청이었다.
하지만 샤르트는 피도 눈물도 없는지 파르티잔의 미래를 직감하면서도 서서히 팔을 뻗었다.
그때였다.
카캉!
샤르트의 팔이 대상을 놓치고 반대 방향으로 한껏 젖혀졌다. 그의 완갑을 유프라의 검끝이 밀쳤기 때문이다.
파르티잔의 왼쪽에는 샤르트가 오른쪽에는 유프라가 있는 형국이었다.
샤르트의 눈이 그를 향했다.
꽤나 번지르르하게 생긴 미청년이었다.
훼방을 놓은 것이 달갑지 않아 다시 파르티잔과 거리를 좁히기 위해 계속 말을 달려 나가면서도 기분 나쁘게 그를 쏘아봤지만 그는 무뚝뚝한 표정으로 일관했다.
사내답지 않게 앵두같이 붉은 입술이 열리며 경고했다.
“이자는 내가 데려가겠습니다.”
“흥, 웃기는 소리!”
유프라의 말에 샤르트는 그렇게 툭 말을 내뱉고는 파르티잔을 향해 다시 손을 뻗으려 했지만, 뜻과 같지 않았다. 유프라의 검이 다시금 훼방을 놓았기 때문이다.
‘이 녀석 보통이 아니로군.’
뜻밖의 칭찬이었다.
하나를 보면 열을 알 수 있다고 했던가.
단 한 번의 찌르기를 본 것뿐이지만 샤르트는 유프라가 여태 상대해온 녀석들과는 차원이 다르다고 느꼈다.
그사이 파르티잔의 말이 곤란해했다. 앞쪽은 길이 막혀 버렸기 때문이다.
바로 리먼 백작을 위시한 바리톤의 기사들과 아레인의 병사들 및 기사들이 접전을 벌이고 있는 까닭이었다.
하는 수 없이 말을 멈춰버리자 파르티잔은 즉시 말에서 뛰어내렸다.
앞쪽엔 주인을 잃은 말 몇 필이 더 있다.
그쪽으로 달리려 했다.
하지만 그게 쉽질 않았다. 어느새 말에서 뛰어내린 샤르트가 급속도로 거리를 좁혀 파르티잔 자신의 팔목을 붙잡아서다.
사정이고 뭐고 통하지 않았다. 딱히 뾰족한 방법도 없을 것 같았다.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치달을 때 낭랑한 목소리가 득의만만해하던 샤르트를 급습했다.
“그 손 놔주는 게 좋을 겁니다.”
존대였지만 명백한 협박이었다.
유프라였다.
그 역시 말에서 내려 이들의 근처로 다가온 상태였다.
샤르트 또한 파르티잔을 잡은 손을 풀지 않고서 유프라의 아래에서부터 위로 차근히 쓸어보며 대응의 시선을 건네었다.
“보아하니 온실의 화초처럼 자라신 분 같은데, 날 제지하고 이자를 데려갈 실력이 되는 줄은 모르겠군.”
“길고 짧은 건 대봐야 알지요.”
서로를 응시하며 둘은 검을 길게 늘어뜨리고 있었다.
단지 샤르트에겐 한 사람이 더 붙어 있다.
한 팔이 자유롭지 못한 것이다.
샤르트가 먼저 검을 찔러가며 도발했다.
유프라는 가볍게 몸을 비켜섰다. 샤르트의 검은 거두어지지 않고 뻗은 상태 그대로 검로가 뒤바뀌며 유프라의 몸 안쪽으로 파고들어왔다.
유프라가 검을 곧게 세우자 쇠끼리 부딪치며 작은 불꽃을 튀기며 마찰음이 흘렀다.
카캉!
“제법인데.”
샤르트의 입에서 흘러나온 진심 어린 칭찬이었다.
겉만 번지르르해 보이는 줄 알았는데 실력도 대단하지 않은가.
“이제는 내가 공격합니다.”
유프라의 검이 춤을 추듯 파고들었다.
검로가 일정하지 않아 샤르트조차 조금 당황을 했다.
희뿌옇게 잔상이 보였다고는 하나 못 막을 정돈 아니었다.
샤르트는 그중 힘이 실린, 그리고 유독 진해 보이는 검을 쳐냈다.
그러자 유프라의 얼굴이 적잖이 사색이 되어버렸다.
‘이자… 정말 실력자다. 어쩌면 내 상대가 아닐 수도.’
불현듯 든 생각이었다.
몇 차례 샤르트와 유프라가 더 검을 섞게 되었는데 그 와중에 리먼 백작이 둘이 격돌하고 있는 것을 목격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당장 달려가려고 했지만 놀라움이 앞서버려 멍하니 그 광경을 지켜보고만 있었다.
‘이 왕자 전하께서 저런 실력을 숨기고 계셨다니…….’
한번 검을 내지르면 결코 헛되지 않았다. 또한 검술마저 왕국에서 전해져 내려오는 것이 아닌 다른 검술까지 사용하고 있다.
천재가 아니라면 불가능할 일이었다.
특히나 방금 선보인, 삽시간에 급소를 노려 세 번이나 찌르는 기술은 저자에게도 분명한 위협이 되었다.
저 기사도 그것을 미처 막지 못해 손에 붙든 노인을 방패로 사용했질 않은가.
유프라는 당장에 검을 거두고 불만을 터뜨렸다.
“비겁하오!”
그러나 상대 기사는 슬그머니 웃기만 하였다.
유프라도, 리먼도 몰랐지만 그는 아직 여유가 있음을 뜻했다.
사실 샤르트는 한 손에 파르티잔을 붙들고 있어 행동에 제약이 있는 상태가 아닌가.
다행히 유프라가 그를 데려가려는 게 죽일 목적이 아님을 깨닫고 잠시 잠깐을 해결하기 위해 파르티잔을 내민 것뿐이었다.
이 와중에도 파르티잔은 벌벌 떨었다. 계속 검이 오고 가니 겁이 날 만도 했다.
그렇다고 힘을 주어 자신을 붙든 샤르트를 쳐낼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친다고 해도 별로 충격도 주질 못할 것이며, 이 거리에서 힘을 짜내서 마법을 사용한다고 해봐야 자신에게도 피해가 돌아오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보탄 백작의 기사단장이 쉽게 마법에 몸을 대어줄 리 만무했다.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저 곱상한 녀석이 이겨 주기를 염원하는 일뿐이었다.
‘힘을 내시오. 힘을…….’
분명 그의 검술은 검술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는 파르티잔이 보기에도 자못 대단했다.
아레인 왕국에 샤르트와 맞대결을 할 자가 몇이나 되던가.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이다.
그와 십수 합을 겨룬 것만으로 칭찬을 받아 마땅했다.
돌연 샤르트가 파르티잔을 붙들고 있던 손을 놓았다.
그리고 눈빛이 더 매서워졌다.
더 이상 여유를 부릴 재간이 없었다. 인근에서 범상치 않아 보이는 사내가 더 튀어나와서이다.
한 손으로 둘을 상대하는 것은 그에게도 무리한 일이었다.
그러면서도 신경은 계속 파르티잔에게 쏠려 있었다.
‘저들에게 파르티잔이 붙잡히면 난처한 일이 벌어진다.’
그의 목숨을 빌미로 이쪽에 협박을 가할 수도 있다. 그러면 일은 불리하게 흘러갈 가능성 또한 있다. 자신의 주군이 그를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서…….
파르티잔은 기회를 잡았다며 앞쪽으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샤르트가 그를 쫓자 여태 그와 대결을 하고 있던 유프라가 소리쳤다.
“이제 와서 내빼시는 것이오?”
샤르트에게 범상치 않아 보였던 남자란 리먼 백작이었다.
그 역시 지근거리로 다가오며 소리쳤다.
“이 왕자 전하, 저도 돕겠습니다!”
리먼 백작은 자신이 나서면 능히 저자를 제압할 수 있을 것이란 계산이 들어 나서게 된 것이었다.
그러나 이럼으로 해서 일은 점점 더 꼬여만 갔다. 전투에서 조금씩 여유가 생긴 사람들이 하나 둘씩 파르티잔에게 따라붙음으로써 일이 커지게 된 것이다.
* * *
2마리의 말이 사이좋게 내달리며 보탄 백작의 진영을 향하고 있었다.
엘레느와 괴짜 노인은 오딘의 행선지라고 알려졌던 중간으로 향했었다.
그러나 군대가 대치하는 것은 목격하지 못하였다.
때문에 방향을 틀어 보탄 백작이 있을 곳을 향했다.
이쪽에 없다면 아무래도 소드마스터에 오른 발데르가 이끄는 군대보다는 보탄 백작의 군대가 더 취약했기에 오딘이 그쪽을 도와주러 가지는 않았을까 하는 추측이 앞섰던 것이다.
“이쪽에는 계실까요?”
“가보자꾸나. 그럼 알게 되겠지.”
순백의 말에 올라 있는 엘레느는 고귀함까지 풍겨 냈다. 그에 반해 노인은 조금 추해 보였다. 그런데도 묘하게 두 사람은 잘 어울렸다.
여럿의 시체들을 목격하기는 했지만 엘레느는 아무런 감회도 느낄 수 없었다. 생각이 온통 오딘에게 쏠려 있었기 때문이다.
* * *
깎아지른 듯 가파른 절벽의 위쪽이었다. 전투가 벌어지는 곳과는 그다지 멀지 않은 곳이었다. 아직도 뒤쪽에서는 끊임없이 서로 간에 마찰을 일으키며 이쪽으로 향하려는 양쪽의 무리들이 있었다.
우여곡절 끝에 파르티잔은 이곳에 다다랐다. 반은 타의로, 반은 자의로 말이다.
올 때는 비교적 경사가 완만했지만 앞쪽에는 땅이 없었다. 물도 없어 떨어지면 십중팔구 죽게 될 것이다.
파르티잔은 고뇌에 빠졌다.
‘아서라. 구차하게 연명해 무엇을 건지겠다는 말이냐? 차라리 이 두 발로 직접 생을 끝내는 게 옳지 않느냐.’
‘하지만 반도 못 살았다. 내 겉보기에는 이리 늙었지만 서른 해도 넘기지 않았다. 언젠간 해 뜰 날이 있을 수도 있다.’
그러고 보니 그런 것도 같았다. 사실 억세게 운이 없어서 저들의 손에 붙잡혀서 오게 된 거지, 그렇지 않았다면 멀리 도망갔을 것이다.
긍정적인 사고는 다른 긍정적인 사고마저 불러온다고 했던가.
지금 파르티잔의 상태가 그러했다.
‘오딘, 그 악마 놈이 날 잡으면 잡을 때마다 대바늘을 쑤셔 놓겠다고 하였다. 그 말은 곧 끌고 가지는 않겠다는 것! 그럼 대바늘을 한 대 더 맞…….’
맞으려고 마음을 먹으려 했으나 맞기는 싫었다. 덜컥 겁이 나고 치가 떨렸다.
이번엔 온몸이 불구가 되라는 법도 없질 않은가.
불구가 되어서 살면 무엇 하리!
좋게 생각하려고 했지만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생에 대한 집착, 그리고 앞에 벌어질 두려움들이 맞물려 끊임없이 자신을 핍박했다.
자신을 사이에 두고 두 패 간에 실랑이가 벌어졌다.
“죽이지는 않겠다. 우리에게 와라.”
말주변이 없어서인지 리먼은 서투른 협상 조건을 내걸고 말았다.
파르티잔이 인상을 찌푸리는 것을 목격하며 샤르트도 일갈을 놓았다.
“죽이지는 않겠다고? 그를 이용하여 우리 진영을 어려움에 빠뜨리게 하려는 수작이지 않은가. 조건이 충족되지 않으면 죽일 수도 있을 것 아닌가?”
파르티잔은 둘의 말을 듣고 서로를 저울질해야 했다.
‘어차피 도망가기는 글렀다. 샤르트 경에게 잡혀간다면 악마에게 안내될 것이고 실험 대상이 될 것이다. 만약 저들에게 간다면 어떻게 될까?’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파르티잔은 고개를 세차게 휘저었다.
‘저들은 바보다. 이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을 것이라 보는가? 차라리 전투에서 패배할 녀석들에게 몸을 맡기면 후에는 죽게 될 가능성 또한 농후하다. 또 저들이 대우를 잘해준다는 보장도 없질 않은가.’
그때 유프라가 입을 열었다.
“제가 막아드리지…….”
그리 말하다 유프라는 우뚝 멈춰서고 말았다.
멀지 않은 곳에 2필의 말, 그중에서 눈처럼 하얀 순백의 말이 한 소녀를 태우고 다가오는 중이었다.
그녀를 목격하는 즉시 유프라의 심장이 살아 있다고 알리고 있었다.
두근두근-!
얼굴은 불이라도 지폈는지 화끈거리며 붉게 달아올랐다.
머릿속은 하얗게 비어가는 것만 같았다.
채 말을 마치지도 못하고 유프라는 바보처럼 그렇게 멍하니 입을 벌렸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곧 두 사람이 근방으로 다가왔다.
샤르트는 지금의 상황도 잊었는지 황송해하며 한 무릎을 꿇으며 아뢰었다.
“미천한 신이 여왕님을 뵈옵니다.”
그 순간에도 리먼의 검이 날아왔다.
사실 리먼 역시 이 의외의 상황에 놀라고 말았다. 그러나 미리 지른 검을 회수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파캉!
샤르트는 견고한 강철로 만들어진 완갑으로 리먼의 검을 쳐내고는 죽일 듯 그를 쏘아봤다.
리먼은 미안해하는 눈치가 아니었다.
아니, 고개 자체가 여왕이라는 호칭이 붙은 소녀를 향해 있었다.
육안으로 드러난 얼굴은 16, 7세 정도의 소녀로 보였다.
그녀의 아름다움은 세상 모든 것을 무색케 할 정도였지만, 그는 거기에 신경을 쓰지 않았다.
‘여왕이라고?’
파르티잔에 쏠려 있던 신경이 거두어지며 모두 그녀를 향했다.
‘저 여자만 잡으면 이 전쟁을 손쉽게 끝낼 수 있다. 그러면 이 왕자 전하에게 공이 돌아간다. 이 일이 전해지면 많은 귀족들이 힘을 실어줄 것이다. 그렇게만 되면 이 왕자 전하의 왕세자 책봉도 어려운 일이 아니겠지.’
생각을 읽기라도 했는지, 아니면 욕심에 찬 리먼의 시선을 접해서인지 괴짜 노인이 으르렁거리며 그의 뇌리 속에 자신의 의사를 전했다.
[허튼짓은 하지 않는 게 좋아. 내 손녀에게 손을 대었다간 죽지도 살지도 못하게 해줄 것이니라.]
리먼은 깜짝 놀랐다. 이제까지 노인은 시야에 들어오지 않았었다. 노인의 행색이 그녀에 비하면 하잘것없이 보였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녀가 중한 존재라는 것을 깨달아 욕심에 눈이 멀었던 탓이었다.
물론 통신 마법이라는 게 있다. 하지만 이 짧은 시간에 마법의 캐스팅조차 하지 않고 간단하게 의사를 전하는 것은 아무 마법사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노인에 대한 경계심이 곤두설 때 엘레느가 쟁반에 옥구슬 굴러가는 듯한 곱디고운 목소리로 샤르트에게 물었다.
“그, 그분은 안 오셨나요?”
수줍은 듯 내뱉은 그 목소리를 두 귀로 듣는 순간 유프라의 몸에 전율이 왔다.
의지를 조종할 시간조차 없었다. 이는 조건반사와도 같은 것이었으므로.
샤르트는 그녀가 지칭하는 대상이 오딘임을 알았다.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그녀의 표정 밖으로 오딘을 사모하는 마음이 드러나곤 했다.
또 몇몇은 그녀가 오딘의 뒤를 쫓았다는 것을 보았다는 사람도 있었으나 이는 철저히 입단속들을 시켰기에 널리 퍼지진 않은 상태였다.
이를 아는 사람이라곤 발데르와 보탄을 포함해 몇몇일 뿐이었다.
샤르트 역시 그에 속했다.
그는 내색은 않고 그녀가 묻는 질문에 대답만을 했다.
“오딘 님께서는 이곳에 당도하지 않으셨습니다.”
또 한 번의 놀라움이 있었다.
여왕에게 누군가를 지칭하는 데에 존칭을 사용하는 것은 상식 밖의 일이었다.
이 정도의 실력을 가진 기사가 그런 개념조차 가지고 있질 않는다는 것은 말이 되질 않았다. 기사들 중에는 멍청한 자들이 많았지만 그런 자들 또한 이런 것은 구별할 수 있었다.
엘레느의 얼굴이 홍조를 띠었다.
그 모습이 어찌나 아름다운지 유프라의 영혼이 자신의 육신을 버리고 그녀에게 딸려 가는 듯했다.
다리에 힘이 풀려 버려 부들부들 떠는데 이래서는 안 된다는 것을 느끼면서도 도무지 제어할 수가 없었다.
“전 전쟁터를 둘러보기 위해 온 거예요. 그분이 계시면 허락을 받고 보려고 했으니 따로 말씀하시진 말아주세요.”
더없이 기가 찬 말.
그제야 리먼은 확신이 섰다.
샤르트가 감히 말을 올렸다.
“여기 오딘 님께 드릴 선물이 있사옵니다. 그를 데려가면 무척 기뻐하실 것입니다.”
엘레느의 눈이 샤르트가 손을 들어 가리킨 대상을 쫓았다. 익히 봐왔던 사람이었다.
무정하게도 엘레느는 그의 말이 참 그럴듯하다고 여겼다. 오딘이 가끔씩 장난으로 툭툭 건드리는 것만 보아서 파르티잔이 겪은 고통 따위는 짐작도 못한 것이다.
아니, 제삼자의 입장으로 보았을 때 둘은 꽤 친해 보이기까지 했다.
“같이 가요. 그분께 데려다드릴게요.”
그 말에 파르티잔의 속이 뒤집어지려 할 때 다급히 리먼이 두 팔을 펼치며 그를 시야에서 가로막았다.
“누구 마음대로!”
괴짜 노인의 말이 그를 향해 달려갔다. 리먼은 놀랐지만 말 따위에 겁을 먹었으면 여기까지 오지도 못하였다.
“베어버리겠다.”
말은 실천으로 행해졌다.
리먼의 검이 사선으로 그어졌지만 헛손질로 끝나고 말았다. 노인의 말이 그를 뛰어넘어 어느새 파르티잔을 향해 쇄도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같이 가지.”
의사를 묻는 듯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노인은 손을 뻗어 도망치려는 파르티잔의 몸을 낚아챘다. 그에게 선택할 시간도 주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말은 방향을 틀어 다시 엘레느에게로 다가왔다.
엘레느는 샤르트에게 작별을 고하고 괴짜 노인과 함께 말을 돌렸다.
‘두 마리 토끼를 쫓다가는 둘 다 놓치는 수가 있다.’
생각을 굳힌 리먼이 급작스레 엘레느의 말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 순간 노인이 고개를 돌렸다.
리먼은 의지와는 상관없이 멈춰서고 말았다. 그의 눈빛을 마주하는 순간 걷잡을 수 없는 공포가 치솟았기 때문이다.
결국 그렇게 저들을 놓치고 말았다.
말들은 어찌나 빠른지 순식간에 저만치 가버렸다.
눈뜨고 당했다는 억울함도 떨쳐 버리고 리먼은 샤르트를 주시하였다.
“한 가지만 묻겠다. 오딘이라는 자가 여왕에게 존칭을 덧붙여야 할 정도로 높은 자인가?”
그에 들려오는 대답이 가관이었다.
“그분은 아레인의 하늘이시다.”
* * *
로테노아의 군대는 그야말로 상처투성이였다.
몸이 만신창이가 된 자들도 많았고 이 자리까지 따라오지 못한 자들도 많았다. 또한 목숨을 잃은 자들도 부지기수였다.
심지어 이들은 커다란 상실감까지 체감하고 있었다. 처음 아레인의 국경을 넘었을 때의 5분의 1에 달하는 전력이 전투 불능 상태에 이르렀으니 말이다.
그 고통들이 배가 되어 로테노아는 상심에 잠겨 있었다.
그래도 자신은 이들 모두의 주군이 아닌가.
‘굳센 모습을 보여 주어야 한다. 의기소침한 모습을 보여서야 되겠는가?’
이리 생각하며 몇 번 생각을 다잡아봤지만 허사였다.
군대는 둘째 치더라도 삼 왕자를 잃게 된 것은 그에게 있어 뼈아픈 고통이었다.
한 번의 패배였지만 잃은 게 너무나도 많아 좀처럼 기운을 차릴 수가 없었다.
“저들은 삼 왕자 전하를 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저희와 협상을 하려 들 테니까요.”
현자의 말이었다.
맞는 말이기는 했지만 그다지 기쁜 말은 못 되었다. 자신도 그렇게 생각하여 삼 왕자가 죽지는 않을 것이라고 여기고 있던 차였으니까.
로테노아가 궁금한 것은 그게 아니었다.
“그래, 어떤 요구를 할 것 같은가?”
현자는 조금 무거운 표정으로 답을 하였다.
“아마도 전군을 물리라는 요구를 할 것 같사옵니다.”
그는 이처럼 왕에게 아룀에 있어 망설임이 없었다.
그 점이 로테노아의 마음에 쏙 와 닿았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그는 노발대발하며 현자에게 소리쳤다.
“전군을 물리라니! 그게 될 법한 소리인가!”
잃은 게 억울해서라도 되찾아야 했다. 아니, 죄다 빼앗아야 했다. 그렇지 않고서는 도저히 화가 누그러질 것 같지 않았다.
현자는 억울해하면서 조금 움츠러든 목소리로 항변했다.
“사견을 아뢰었을 뿐입니다.”
괴로운지 로테노아는 손바닥을 펼쳐 안면을 거머쥐었다.
“짐이 지금 기분이 안 좋아 그러니 이해해주게.”
정말 현자의 사견이 맞을 것도 같았다.
미리 판단을 해두어야 했다. 최악의 상황이 될지 모르는 사태에 대비하여.
‘왕자와 군대를 물리는 것, 어느 것이 중한가? 그동안 저들은 왕자를 잡아두고 있을 것은 뻔하다. 앞서 사신으로 갔을 때도 무례를 범하지 않았던가. 제대로 된 대우를 못 받을 바에는…….’
여기까지 생각에 잠기던 로테노아는 울컥했다. 뒤에 이어질 생각이 거북했기 때문이다.
‘내 핏줄이다. 내 핏줄, 막내를 잃어야 한다?’
로테노아는 두 가지가 다 가능할 쪽으로 생각을 돌려 보았다.
‘삼 왕자만 다시 찾으면 모든 게 가능하다. 그러나, 그러나…….’
그를 찾아올 수 있는 실력이 되는 사람이 없었다.
광인이 있고 마인이 있었다.
그들을 상대할 자가 바리톤에 없다는 것은 이미 증명이 되질 않았는가.
상황을 깨닫고 그는 길게 탄식을 내뱉었다.
‘후우, 인재가 없구나. 내가 아는 자 중에서 가장 강한 자라면…….’
문득 뇌리에 떠오르는 한 사람, 그 사람의 이름이 탄성이 되어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게티롱!”
그는 즉시 게티롱을 찾아 왕성으로 데려왔던 사자를 찾아 다그치듯 물었다.
“게티롱이라는 해결사, 그를 어디서 봤었느냐?”
“하만 왕국에서 보았습니다. 하오나 국왕 폐하, 그는 행방이 묘연하여 다시 찾기 힘들지도 모르옵니다.”
과연 그랬다.
당시 그 역시 수소문을 해서 찾았지만 다시 찾을 것이라는 보장은 없었다.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았느니라. 아직 우리 왕국에서 머물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 아니냐. 우리 왕국의 마법진은 행선지가 나타나니 당장 그를 찾아보아라.”
“명을 받들어 모시겠나이다.”
사자가 듣고 보니 또 맞는 말이어서 읍을 한 후에 말을 찾았다.
로테노아가 직접 목소리를 내어 주위에 명했다.
“공간 이동에 능숙한 마법사들을 붙여 주어라. 빠르고 튼튼한 말들을 내주어라!”
그가 사라진 후에도 로테노아는 내심 기대를 하였다.
‘그가 얼마나 강한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자신감으로 보자면 오딘이라고 불리던 그 이방인에 못지않았다. 어쩌면 더 강할 수도 있다.’
그쪽 일을 처리시켜 놓고 보니 또 다른 희망이 생겼다.
‘일 왕자와 이 왕자의 군대가 있었다. 무려 만이 넘는 병력이다. 그에 비하면 오늘의 패배는 큰 것도 아니다.’
이렇게 생각하고 소리쳐서 물었다.
“일 왕자와 이 왕자는 어떻게 됐느냐?”
경황이 없어 그들에게 사람을 뒤늦게 보내 아직 사람이 올 시간이 아님에도 로테노아는 조바심을 보였다.
“보낸 자들은 아직 도착하지 아니하였습니다.”
그때 먼 곳에서 말발굽 소리들이 들려왔다.
소리는 점차 커지면서 또 다른 불안을 불러왔다.
“전군, 전투태세를 유지하라!”
정찰병들이나 첨병이 오게 될 것이지만 준비는 미리 해두는 게 옳았다.
병사들도, 그리고 기사들도 부산을 떨었다. 한 번 크게 당한 뒤라 당연히 조심을 기하는 것이다.
첨병이 원하는 소식을 가져다주었다.
“일 왕자 전하의 군대입니다!”
첨병의 표정은 그리 밝지 못했음에도 로테노아의 만면에 화색이 돌았다.
‘적이 아무리 실력이 뛰어나고 괴물들이 있다지만 일 왕자의 군대와 이 왕자의 군대가 뭉친다면 아레인을 무너뜨리는 것은 일도 아니다.’
이제 걸리는 것이라고는 삼 왕자 팔테스밖에 없었다. 삼 왕자가 인질이 되어 자신들을 옭아매지 않는다면 얼마든지 전투에서 승리할 자신이 있었다.
“게티롱 그 사람만 와준다면…….”
평소의 그답지 않게 주먹을 가볍게 말아 쥐고 입에 가져다댄 채로 그 소리를 되뇌며 앞뒤로 서성거렸다.
그를 접하며 첨병은 차마 뒷말을 꺼내지 못했다. 저들의 군대가 멀쩡하지 못하다는 것을…….
얼마 지나지 않아 대군이 이곳에 당도했다.
그를 보는 로테노아의 표정은 실망 그 자체였다. 그들은 패잔병들의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너무 강직하다며 꾸지람을 놓았었던 헥토르의 얼굴 또한 평소답지 않게 하얗게 질려 있었다.
“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이냐?”
헥토르는 말에서 내렸지만 감히 입을 열지 못했다.
그게 더 화가 나서 로테노아는 그의 양어깨를 부여잡고 세차게 흔들었다.
“묻고 있질 않느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이냐고!”
“며, 면목이 없습니다. 국왕… 폐… 하…….”
뒤로 갈수록 말소리가 줄어들어 폐하라는 단어는 꼬리를 말았는지 잘 들리지도 않았다.
엉뚱한 답변만을 늘어놓는 헥토르를 대신해 레고타가 답을 하였다.
“저희 군대는 발데르와 마주쳤습니다.”
이후 계속해서 말이 이어졌다.
저들의 군대가 수는 적지만 매우 강력하고 발데르는 소드마스터에 오른 인물이라고……. 또 일 왕자 전하 또한 생명이 위태로웠다는 설명도 덧붙였다.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라 로테노아는 소리라도 지르고 싶었다.
그럴 수도 없는 형편이 더욱더 화를 돋우었다.
사방이 깜깜한 듯했다.
이 전투를 헤쳐 나갈 방도를 생각해내야 했지만 쉽게 떠오르지가 않았다.
“어떻게 해야 좋다는 말인가? 어떻게…….”
그 소리를 현자가 들었는지 또 조심스레 사견을 내보였다.
“패착의 원인은 군대를 나뉘었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세 방향으로 나누지 않았다면 저들은 저희 군대의 규모에 겁을 먹었을 것입니다. 실력이 뛰어난 자들이 있고 괴물들이 있다지만 수를 이기지는 못합니다. 만여 명의 병력들이 한 발씩만 화살을 쏘아도 만 발이 아니겠습니까?”
마지막 말은 예를 든 것뿐이었다.
로테노아도 그것을 알아들었다.
하지만 표정이 곱진 못했다. 이미 상당한 병력이 축나버렸지 않은가.
그의 속마음을 알아차리기라도 했는지 현자는 더 말을 이었다.
“아직 늦지 않았습니다. 자고로 늦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르다고 하였습니다. 국왕 폐하께서는 이를 깨우치셨습니다.”
그제야 로테노아의 표정이 조금 좋아졌다.
“이 왕자에게 다시 사람을 보내라. 이쪽으로 합류하라고.”
* * *
해가 자취를 감추고 달과 별이 세상을 밝혀 주는 밤이 되었다.
수풀이 우거진 한적한 곳에서 팔테스는 오딘의 손에 의해 바닥으로 내쳐졌다. 충격이 적지 않았지만 당장 저자의 손아귀로부터 벗어나야 했다.
성큼 다가서는 오딘을 보며 팔테스는 계속해서 다리를 뒤로 밀다가 그만 나뭇등걸에 등이 부닥쳤다.
일어서지도 못하고 몸을 돌려 달아나는데 참 한심한 꼬락서니였다.
흡사 바퀴벌레를 연상시키고 있질 않은가.
두 팔과 두 다리가 쉬지 않고 움직였다.
그러나 곧 목이 졸려 오고 두 손과 두 다리는 땅을 딛지 못하고 허공에서 바동거렸다. 어느새 오딘에게 뒷덜미가 잡혔기 때문이다.
“크, 크윽. 이거 놔라.”
그의 요구를 응해줄 생각이 전혀 없는지 오딘은 그를 든 채로 근방의 나무줄기를 잘라 길게 엮었다.
그리곤 팔테스의 몸을 칭칭 동여맸다.
팔테스는 계속해서 발악하고 소리쳤지만 오딘은 아랑곳하지 않고 줄의 반대편 끝을 제법 굵직한 나뭇가지로 넘겨받았다.
줄을 당기자 팔테스의 몸이 허공으로 떠올랐다.
“뭐, 뭘 하는 짓이냐?”
“고문.”
병력의 이동 소리가 흘렀다. 팔테스가 고개를 돌려 보니 일단의 무리가 이곳으로 향하고 있다.
아바마마의 군대이기를 내심 기대했지만 아니었다.
그들은 가인과 헤르였던 것이다.
잘되었다는 듯 오딘은 큼지막한 돌에 나무줄기를 엮어 팔테스를 고정시켜 놓고는 그렇게 자리를 떠났다.
하루, 이틀, 사흘이 흘렀다.
밥도 먹지 못하고 물도 먹지 못하여 배가 등가죽에 달라붙은 것만 같았다.
잠조차 제대로 자지 못하여 얼굴색은 핼쑥해지고 피골이 상접한 모습이었다.
바리톤국의 왕자가 언제 이런 시절이 있었을까?
서럽고, 억울하고 분해 한스러운 눈물이 바닥으로 똑똑 떨어졌다.
쉴 새 없이 이를 갈며 저놈을 저주했다. 그러나 돌아오는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팔테스는 저자를 달래주어야 한다고 마음을 고쳐먹게 되었다.
일단 살고 볼 일이었다.
과연 그가 찾아왔다.
“지금이라도 날 놓아준다면 없던 일로 해주겠다. 그러니 당장 풀어다오.”
그 말에 오딘은 아무런 감흥도 받을 수가 없었는지 그냥 발길을 돌려 버렸다.
그리고 또 하루가 흘렀다.
팔테스는 곧 죽기라도 할 것처럼 변해 있었다. 사흘이나 입에 아무것도 못 대고 이렇게 매달려 있으니 무리도 아니었다.
“원하는 것이 무엇이오? 내 아바마마에게 부탁해서…….”
그는 말을 채 끝마치지도 못하고 실신해버렸다. 뒷말을 이을 힘조차 남아 있질 않았었던 것이다.
가까스로 정신을 차려 눈을 떴을 때는 침상 위였다. 그는 자신이 며칠이나 잠이 들어 있었는지도 몰랐다.
기다렸다는 듯이 한 남자가 시시덕거리고 있었는데 그를 보는 즉시 팔테스는 침상에서 몸을 일으키려 했다.
하지만 어찌 된 영문인지 일어날 수가 없었다.
“이게 뭐게?”
오딘이 손에 쥔 끈을 잡고 묻고 있었다. 팔테스는 이제 나무에서 풀려났다는 해방감 때문인지, 아니면 며칠 전의 일을 잊었기 때문인지 함부로 말을 늘어놓고 말았다.
“그게 뭔지는 내가 알 바 아니오.”
“그럼 놓는다?”
“놓든지 말든지. 그나저나 날 풀어주시… 허억!”
오딘이 손에 쥔 줄을 놓자 팔테스의 목을 향해 납작하고 거무튀튀한 물체가 무서운 속도로 하강했다.
팔테스는 기겁을 하고 말았다. 그것은 날카로운 칼날이었던 것이다.
다행히 칼날은 반도 내려오지 않고 멈춰서고 말았다.
오딘이 손에 쥔 줄을 내리자 칼날 또한 위로 올라갔다.
“이래도 놔?”
악마가 따로 없었다.
팔테스는 악에 받쳐 소릴 질렀다.
“이, 이게 무슨 막돼먹은 짓이오!”
그 질문으로 인해 또다시 줄이 놓아졌고 칼날이 내려왔다.
가슴이 또 한 번 철렁 내려앉는 것 같은 느낌과 함께 팔테스에게 막연한 후회가 찾아왔다. 그래도 오딘은 자비를 베풀어주었다.
“말조심해야지. 그렇지?”
“네? 네.”
공손해져 버렸다. 이러지 않으면 당장에 죽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몇 마디 대화가 더 오갔는데 느닷없이 칼날이 또 내려왔다.
뒤늦게 오딘이 줄을 잡고서 사과의 뜻을 전했다.
“그래, 나이도 어린 게 어른한테 말조심해야지.”
‘지는 몇 살이나 처먹었다고…….’
팔테스는 내색을 하지 않으려고 했지만 하도 어이가 없어 표정이 구겨져 버렸다.
그때 또 줄이 놓아졌다. 칼날이 하강하다가 우뚝 멈췄다.
“아, 미안. 줄이 미끄러워서 그만 놓쳐 버렸네.”
그는 공포에 질려 있었지만, 오딘은 뭐가 그리 좋은지 계속 키득대는 중이었다.
“헝겊이라도 가져와야 하는데…….”
그리 말하며 오딘이 돌아서버렸다. 덕분에 줄은 자유롭게 올라가고 칼날은 무섭게 내려오는 중이었다.
조금의 시간이라도 더 벌고 싶었던지 팔테스는 감히 말도 못하고 숨을 크게 들이켜며 그대로 멈춰버렸다.
“아, 내 정신 좀 봐. 이거 놓으면 안 되는 거지?”
오딘이 돌아서서 줄을 잡았을 때 칼날이 팔테스의 목젖에 닿을 듯 말 듯했다.
“제발, 제발…….”
울먹이며 팔테스가 자비를 구하는 중이었다.
그러나 오딘의 인상은 또 구겨져 버렸다.
“난 말을 짧게 하는 사람을 싫어하는데.”
성질이 났던지 오딘은 손에 쥔 줄을 확 놓아버렸다.
그러자 다시 칼날이 무서운 속도로 하강하며 팔테스의 목에 접근했다.
“아… 악!”
칼날이 팔테스의 목을 파고들기 전에 오딘은 선심이나 쓴다는 듯 줄을 잡아당겼다.
그리고 물었다.
“내가 너 목숨 몇 번이나 구해줬지?”
“목숨을 구해주시다니요?”
“은혜를 모르는군. 내가 이 줄 잡아줘서 네가 사는 거잖아. 나라고 좋아서 이 줄 잡고 있겠어? 나도 힘들어. 그냥 이 줄 놓을까?”
억지도 이런 억지가 없었다.
그러나 팔테스는 조금 전의 실수는 되풀이하지 않고 기억을 되짚어보았으나 횟수는 생각나지 않았다. 하도 경황이 없어 칼날이 몇 번 내려갔다 올라가는지 세지 않았으므로.
그럼에도 팔테스는 그의 마음에 들 답변을 내주어야 했다.
“셀 수도 없이 구해주셨습니다.”
절박한 심정으로 팔테스가 물었다.
“제가 은혜를 입었으니 마땅히 갚아야 합니다. 원하시는 게 무엇이십니까?”
오딘이 아무리 괴팍한 성격이라고는 하나 중원에서도 그가 사람의 목숨을 가지고 장난을 쳤던 적은 없었다. 하지만 이 녀석은 매우 괘씸했다.
감히 자신의 목을 요구했었지 않은가. 그것도 듣는 앞에서 말이다. 특히나 바리톤 왕의 후광을 얻어 안하무인으로 까불었다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괴롭힘의 수위로 따지자면 파르티잔이나 조르바보다 더 괴롭혀 줄 작정이었다.
“글쎄, 아직 생각해본 게 없네. 생각나면 말해줄게.”
그의 손에 저 줄이 있는 이상 팔테스의 목숨은 살아도 산 게 아니었다.
팔테스는 생애 최악의 상황에 처해 있었다.
* * *
유프라의 군대는 국왕군과 합류했다.
로테노아는 두 왕자와 따로 대면을 가지기 위해 막사 안으로 들어갔다.
자연히 지휘관들만의 시간이 주어졌다.
리먼 백작의 표정은 그리 좋지 못했다.
그를 이상히 여긴 레고타 후작이 물었다.
“나야 일 왕자 전하를 제대로 보필하지 못해 실망을 안겨 드렸다지만, 백작은 왜 그러한가?”
이 왕자 유프라와 리먼 백작이 거느렸던 군대는 로테노아 국왕과 일 왕자 헥토르의 군대의 피해보다는 훨씬 적었다.
파르티잔이라는 마법사를 쫓는 데에만 혈안이 되어 있었지, 어디 제대로 된 전투나 해보았는가.
서로가 그를 원하고 있었다. 파르티잔에겐 그것이 부담으로 다가왔지만 말이다.
어찌 됐건 리먼은 큰 후회를 하는 중이었다.
‘내가 병력을 잘 다스렸다면 분명 그를 생포할 수 있었다. 아쉽구나. 아쉬워……. 또 여왕은 어떠한가? 어이없게 노인의 눈빛에 놀라 멈춰 서지만 않았더라도 분명히 그녀를 사로잡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 같은 사실을 후작에게 고해봤자 돌아오는 것은 질타일 것이었다.
어디 그뿐이랴. 이 일은 국왕의 귀에까지 들어갈 것이고 그렇다면 모진 질책을 받게 될 것이다.
분명한 것은 후작과 자신이 그리 좋은 관계가 못 된다는 사실이다. 각자 왕세자 책봉에 열을 올리며 사이 또한 예전보다 더 소원해졌다.
자신을 눈엣가시로 여기고 있을 텐데 불리한 얘기를 해서 뭣 하리.
“그냥 피곤해서 그렇습니다. 전투는 어땠습니까?”
후작에게선 한숨부터 나왔다.
“사정이 좋질 못하다네. 대패라고 할 수 있겠지. 일 왕자 전하가 그렇게 원하시던 발데르와 마주쳤다네.”
리먼은 조금 놀랐다는 듯한 반응이었다.
“그렇습니까? 그자가 일 왕자 전하에게 향했습니까?”
“그렇다네. 저들을 얕잡아봤던 것이 패전의 원인이었네.”
그는 거리낌 없이 오늘 있었던 얘기들을 풀어놓았다. 이미 국왕의 귀에까지 들어간 부분이니 얘기를 꺼냄에 있어 망설일 필요가 없었다.
“그자가 소드마스터더군. 아무도 당해낼 수가 없었지.”
레고타는 눈을 커다랗게 떴다.
소드마스터에 대해선 익히 들어 알고 있었고, 직접 목격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아레인에 소드마스터가 있을 줄이라고는 꿈에도 몰랐다.
“정말입니까?”
“그렇다네. 오러 블레이드가 그렇게 무서운 것이더군. 아군이라면 한없이 듬직하겠지만 적군일세. 그것도 저들의 수장이나 다름없으니……. 일 왕자 전하의 목숨 또한 위태로웠다네. 내가 아니었다면 큰일이 날 뻔했지.”
사실이었으나 자신을 추켜세우는 말인지라 리먼은 그리 곱게 받아들여 주지는 않았다. 그리고 잠시 묵혀 두었던 질문을 꺼내었다.
“그럼 국왕 폐하께옵서는 어떤 적과 마주쳤습니까?”
여기까지 오며 미리 들은 얘기가 있었다. 국왕군과 일 왕자의 군대가 모두 크나큰 출혈을 입었다고 말이다. 발데르가 일 왕자에게 갔다면 국왕의 군대는 왜 패전을 겪었을까 하는 의문이 들어 던지는 질문이었다.
“직접 목격하지는 못했지만 자네가 오기 전 다른 지휘관들에게 들은 얘기가 있다네. 그쪽은 광인이 있었다고 하더군. 또 정체불명의 이방인과…….”
말이 끝나기 전 이상한 생각이 들었던지 리먼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삼 왕자 전하께서는 괜찮으십니까?”
“그분은 납치되셨다고 하네.”
* * *
로테노아의 표정은 그리 좋지 못했다.
오늘 겪은 일만도 짜증이 나는데 왕자라는 녀석들이 한 녀석은 패배를 겪었다고 의기소침해 있고, 한 녀석은 넋이 나가 있으니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그가 본 대로 이 와중에도 두 왕자는 딴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토록 마주치고 싶었던 자가 발데르였는데, 솔직한 심정으로 이제는 다시 마주치게 될까 봐 두렵다.’
원래 강하던 것이 부러지기 십상이다. 그래서인지 난생처음 적에 대한 공포를 체험한 헥토르의 자신감은 쉽게 회복되지 않았다.
반면에 유프라는 감상에 빠져 있었다.
‘그녀… 그녀의 이름은 무엇일까? 아직도 가슴이 진정이 되질 않아.’
유프라의 증세는 꽤나 심각했다.
로테노아가 그것을 어렵지 않게 간파하고는 곱지 않은 시선을 건네며 물었다.
“대체 무슨 생각을 그리하고 있는 것이냐?”
분명 유프라를 보고 묻는 말이었음에도 아무런 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
헥토르가 그를 대신해 유프라를 다그쳤다.
“아바마마께서 묻고 계시질 않느냐!”
그때서야 정신이 돌아오는지 유프라는 로테노아를 향해 물었다.
“잘 못 들었사옵니다. 다시 한 번 말씀해주시오면…….”
이번만이 아니었다. 벌써 세 번째라 로테노아는 더 참아줄 수 없었다.
이렇게 열불이 나는데 속을 썩이고 있으니 미치고 환장할 지경이었다.
그래도 이런 상황에 화를 내게 된다면 걷잡을 수 없을 것 같았는지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 장막을 확 걷고 나가버렸다.
헥토르는 자신의 잘못은 생각도 하지 않고 아우를 나무랐다.
“멍청한 녀석. 아바마마께서 힘드실 때 너까지 그런 모습을 보이다니. 대체 뭐냐? 무슨 일이 있었기에 얼빠진 표정으로…….”
“형님은 모르십니다.”
“뭣이!”
쾅!
헥토르가 분개하여 테이블을 내려치며 벌떡 일어섰다.
그러나 유프라는 놀래는 기색도 아니었고 겁을 먹은 모습도 아니었다. 다시 그녀에게 생각이 가 있었기 때문이다.
비록 순간이었지만 유프라는 그 잠시의 시간을 회상하며 감상에 빠져 들었다.
“아직도 정신이 몽롱하군요. 그렇게 아름다운 여인은 난생처음이었습니다. 세상 모든 것을 무색하게 할 정도였거든요.”
헥토르의 반응 따위는 살피지도 않고 유프라는 여전히 감상에 빠져 멋쩍은 미소를 흘리고서 계속 말을 이었다.
“그녀를 보는 순간 영혼이 송두리째 날아가는 느낌까지 받았습니다. 그리 긴 시간을 살아오진 않았지만, 이제는 확신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제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는 바로 그녀 때문이라는 걸요.”
더 들을 것도 없었다. 헥토르는 유프라의 한심한 모습에 욕지거리를 뱉어냈다.
“이 미친 녀석아, 네놈이 지금 사랑 놀음을 할 때냐? 네놈은 여자 꽁무니나 쫓아다니느라 그나마 피해가 적었겠지만 아바마마와 내 군대가 적지 않은 피해를 입었다.”
여태 유프라는 영문도 몰랐었다. 왜 자신을 불러들였는지부터.
로테노아 딴에는 창피한 마음이 들었을 것이다. 그 얘기를 헥토르가 대신하는 중이었다.
“어디 그뿐이냐? 막내가 저들에게 납치당했다.”
유프라의 눈이 그제야 크게 떠졌다.
“뭐, 뭐라고 하셨습니까?”
“팔테스가 납치당했다는 말이다.”
보통 일이 아니었다. 삼 왕자와의 사이가 그리 좋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유프라의 동생이다. 좋고 나쁨을 떠나 유프라는 팔테스가 어려서부터 크는 것을 봐왔으므로 그 녀석이 잘못된다면 마음이 크게 아플 것 같았다.
여전히 헥토르는 무거운 낯빛을 짓고 있었지만 희망이 담긴 말을 꺼내었다.
“그만 불러오면 이 난국을 헤쳐 나갈 수도 있을 것 같은데…….”
“‘그’란 누구입니까?”
이제야 대화를 진지하게 받아들이기 시작하는 유프라를 보며 헥토르는 말 못할 것도 없다는 듯이 답을 해주었다.
“얼마 전 너도 들었을 것이다. 앞서 국경을 넘어 저들을 정찰한 사람에 대해서. 이름이 아마 게티롱이라고 했지?”
“드, 들은 적이 있군요.”
“아바마마께서는 벌써 그 사람에게 사자를 보내셨다.”
“그렇습니까?”
유프라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묻자 헥토르는 못 미더워하는 눈길을 하고서 그를 쏘아봤다.
“다소 시일이 걸릴 것이다. 정신 똑바로 차리지 않으면 네 목숨이라고 해도 달아날 수 있으니 조심해라.”
사실 세 왕자에게 형제간의 우애란 별로 없었다. 그러나 헥토르는 지금은 유프라도 제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상대는 강대한 적. 한 사람이라도 도와야 했다. 만에 하나 게티롱이라는 사람이 도착하기도 전에 이번처럼 대패를 하게 되거나 국경 밖까지 군대가 밀려 버리면 그때는 다른 도리가 없기 때문이다.
* * *
로테노아가 게티롱을 찾아오라며 보낸 사자 일행은 수소문 끝에 라테우스 산맥을 향하는 중이었다. 이 역시 어려운 일이었다. 당장에 급했던지라 그들은 돈을 뿌리다시피 하며 그의 행방을 추적했다.
사자는 감탄의 뜻을 내비쳤다.
“허명이 아니었나 봅니다. 그분이 라테우스 산맥에서 사실 줄은 몰랐습니다.”
운이 좋게 알아낸 것이었다.
끼니를 해결하기 위해 잠시나마 머물렀던 식당에서 그를 알고 있다는 주정뱅이를 만나서였다.
먼 거리는 아니었다. 라테우스 산맥은 산세가 험하고 빛도 잘 들지 않아 대지마저 메마른 곳이었다.
어디 그뿐인가? 몬스터들이 우글거린다는 소문이 있는가 하면 성질이 난폭하기로 유명한 블랙 드래곤이 산다는 얘기가 나도는 곳이었다.
“헛된 소문이 아닐까 하는데……. 라테우스 산맥에 사람이 살 리가 있겠소?”
일행 중 하나에게 들려오는 말에 사자는 고개를 저으며 애써 그의 의견을 부정했다.
“일전에 국왕 폐하의 곁에서 얘기를 들었던 적이 있습니다. 그분은 신성 제국 대신관의 부탁도 들어주셨다고 했었고, 크레노스 제국 기사단장의 고민을 씻어준 적도 있다고 했습니다. 또 이 라테우스 산맥의 블랙 드래곤의 부탁까지 들어준 적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일행들이 놀라서 되물었다.
“그, 그게 정말이오?”
“정말입니다. 이 귀로 똑똑히 들었습니다.”
돌연 한 사내가 태도를 바꿔 따지고 들었다.
“드래곤의 부탁을 들어주다니, 그게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오? 아무래도 거짓 같소이다.”
그에 다른 사내가 의견을 들고 나왔다.
“나도 그 점이 좀 의심스럽군. 혹시 그가 폴리모프한 드래곤이 아닐까 하오.”
“만약 그 말들이 다 사실이라면 그럴 가능성도 있겠지요. 드래곤이 드래곤의 부탁을 들어줬다는 것은 있을 수 있는 일일 테니.”
사자가 말했다.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분은 자신이 인간이라고 하시진 않으셨습니다. 거만하기로 따지자면 오딘이라는 그자보다 훨씬 거만했습니다. 국왕 폐하께서 말씀하시기를, 그럴 만한 자격이 있는 자니까 거만할 거라고 하셨습니다.”
다른 일행들도 크게 동의했다.
“그렇다면 그분만 데려간다면 의외로 일은 쉽게 풀릴 수가 있겠군요.”
“어디 그뿐이겠습니까? 아레인을 삼키는 일도 무리가 따르지 않겠지요.”
희망이 생겨서인지 분위기는 점점 화기애애해지고만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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