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룡무제 악진
아론은 어찌해야 할 바를 몰랐다.
모든 게 자신의 탓이었다.
그저 마타하리의 힘에 놀랐고, 그의 잔인한 손속에 또 놀라 넋을 놓기는 했지만 감당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 역시 전쟁터를 누볐고 끔찍한 시신들도 많이 봐왔으므로.
그러나 이렇게 죽으나 저렇게 죽으나 죽음은 죽음이었다.
더 아프게 죽어 보였다고 해서 크게 충격을 받거나 상심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얘기다. 무엇보다 저들은 아군이 아니고 적군이 아닌가.
하지만 그가 했던 가장 큰 실수는 오딘의 명령에 따라 마타하리를 풀어놓기만 했지, 그를 제대로 관리하지 못했던 것이다.
저 많은 수의 병력들에게 섣불리 다가갈 엄두가 나질 않았다.
“큰일이다. 이를 어찌하면 좋을까? 오딘 님께 질책을 받을 것도 그렇지만 마타하리 님의 목숨이 걸린 문제가 아닌가.”
그는 결국 대단한 결심을 해버렸다.
죽더라도 저들의 앞에 모습을 드러내기로 한 것이다.
마타하리가 저렇게 앞으로 나갈 때까지 그는 아무런 제지도 하지 않았으므로 어떻게 보면 책임은 그에게 있다고 봐야 했다.
과연 마타하리는 체내의 마나가 소진되어버려 바닥에 몸을 드리우고 있었다.
울긋불긋 튀어나왔던 핏줄 역시 살 속으로 숨어버렸고 불같이 이글거리던 광망도 빛이 바래졌다.
가쁘게 몰아쉬는 숨소리만 들어도 그가 아까와는 전혀 다른 상태라는 것을 알게 했다.
저들이 마타하리의 주변으로 모여들려는 순간이었다.
아론이 용감하게 검을 빼들고 그들과 마주쳤다.
“그분의 몸에 손을 대는 자는 나 아론이 용서치 않을 것이다!”
어디로 보나 빈약해 보이는 앳된 청년이었다.
막 바닥에 몸을 드리운 거구의 사내에 비하면 풋내기 정도로밖에 인식이 안 되었다.
만만해 보여서인지 저쪽에서 한 기사가 겁도 없이 그를 향해 달려들었다.
“네놈은 내가 상대해… 크헉!”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몸을 날려 검을 찔러가는 것까지는 좋았다.
그러나 빈약해 보이던 청년의 검은 이미 자신의 가슴을 꿰뚫고 있다.
크레멘에게 일대일로 훈련받은 결과였다.
이 자리에 아론을 맞상대할 인물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그 역시 일월진을 드나들었으므로.
그러나 상황이 못 되었다. 저들과 일대일로 대결할 상황이…….
자신은 혼자이고 상대는 대군이지 않은가.
저들은 한시라도 빨리 마타하리를 죽이고 싶어 하는 눈치였고, 그 때문인지 거치적거리는 것 역시 빨리 없애고 싶어 했다.
주변의 기사들이 작당을 한 듯 아론을 둘러쌌다.
바로 그때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온몸의 힘이 소진되었다고 믿었던 마타하리가 서서히 몸을 일으키고 있질 않은가.
아론도, 그리고 저들도 크게 놀랐다.
로테노아 역시 안색이 두려움에 물들어 감히 근처로 다가서진 못하고 조심스레 그를 살폈다.
당장에라도 꺼질 듯한 안광이 희뿌옇게 빛을 냈다.
아론은 그를 보다가 그만 눈물을 쏟을 뻔했다. 마타하리는 오직 자신을 위해 모든 힘을 쥐어짜내어 일어나고 있는 것이므로.
그가 한쪽 발을 일으켜 세우고 나머지 한쪽 발마저 일으켜서 거대한 상체를 펴려는 찰나, 어디선가 그를 제지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일어설 것 없어.”
마타하리와 아론에게 들렸던 목소리는 과연 아레인의 하늘 오딘의 것이었다.
오딘은 흑색 장포를 걸치고 한 손에 흑룡검을 들고서 마타하리와 아론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아론이 뒤로 돌아 황망해할 무렵, 기사 둘이 그를 향해 달려들었다. 한 명은 아론의 목을 향해 검을 휘둘렀고, 다른 한 명은 아론의 허리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그들을 주시하며 오딘은 두어 번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길고 가는 파공성이 들렸다.
핑! 피잉!
작은 구슬들은 눈에 보이지도 않을 속도로 날아가 아론 주변의 기사들의 가슴을 관통했다.
“큭.”
“크윽.”
당장에 아론에게 제일 위협이 되던 두 기사가 외마디 비명소리와 함께 단번에 꼬꾸라졌다.
누구도 그 연유를 알 수 없었다. 그들이 검을 휘두르다가 왜 쓰러지는 것인지.
마탄지(魔彈指)였다.
물론 이 무공의 원류가 마교는 아니었다. 살상력을 떠나 이 무공은 꽤나 쓸 만했기에 여러 문파에서 비슷하게 사용했다.
마교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었다. 이 무공이 마탄지란 이름이 붙고 약간 변형되어 알려진 것은 어언 1백 년 전의 일이었다. 이는 마교의 장로급들이면 어렵지 않게 습득할 수 있었다. 그러나 파괴력과 정밀함은 내공에 비례했다.
그가 점점 다가오며 모습을 확인한 삼 왕자 팔테스는 당장에 입을 열었다.
“아, 아바마마… 아니, 국왕 폐하, 바로 저자입니다. 저자가 저를 핍박한 그 이방인이옵니다!”
로테노아의 표정이 싹 변했다.
여태 놀라움과 두려움을 느끼다 기회를 잡았다며 조금 들떠 있던 표정이었다면 지금은 분노를 담고 있는 표정이었다. 자신의 걸음을 이곳으로 옮기게 한 장본인이 바로 그였기 때문이다.
속에 담아두었던 분의 크기가 앞서의 모든 것을 뒤덮을 만큼 컸다.
거기에는 덩치 큰 저 미친놈이 더 이상 힘을 쓸 수 없다는 사실도 일조했다. 지금은 안도를 하고 있는 상황이라는 얘기다.
오딘은 마타하리를 꿇어앉히고는 손을 뻗어 그의 등에 진기를 불어넣었다.
그러자 옅어졌던 마타하리의 눈에 다시금 광망이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그에게 한 번 크게 데였던 터라 바리톤 진영에서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화들짝 놀란 지휘관 하나가 기겁을 하며 소리쳤다.
“무, 무슨 짓을 하는 것이냐!”
오딘은 그자를 향해 입꼬리를 치켜 올리며 괴기스런 웃음을 지어주었을 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자연히 로테노아의 주변에서는 다급히 말들이 오갔다.
“어서 막아야 합니다. 저 괴물이 다시 깨어난다는 것은 상상도 하기 싫습니다.”
“당연히 그래야지요. 여봐라!”
“넵!”
한 지휘관의 부름에 근방에 있던 그 휘하 기사들이 일제히 답했다.
“저자가 이상한 일을 벌이고 있으니 당장 제지해라!”
“명을 따르겠습니다.”
그 즉시 네다섯의 기사들이 용감무쌍하게 오딘에게로 대들었다.
아론이 황급히 오딘과 마타하리를 보호하기 위해 몸을 날렸다.
하나, 전혀 그럴 필요가 없었다. 저들은 아론과 마주치기도 전에 쓰러지고 있었으므로.
아론이 놀라 뒤를 돌아보았을 때 오딘의 타이름이 이어졌다.
“본 좌의 허락 없이 끼어들지 말라.”
“죄, 죄송합니다.”
바리톤의 왕 로테노아와 삼 왕자 팔테스, 그리고 귀족들과 내로라하는 기사들도 저들이 왜 목표에 다다르기도 전에 픽픽 꼬꾸라지는 것인지 영문을 몰라 크게 뜬 눈으로 의문을 드러냈다.
그 무렵 오딘은 마타하리에게서 손을 거두었다.
그리고 아론을 향해 말했다.
“이 녀석은 안정이 필요하다. 그를 데리고 철수해라. 올 때와 마찬가지로 수레 위의 사슬에 묶어 데리고 가거라.”
“하오나…….”
아론이 토를 다는 이유 역시 당연했다.
오딘 님이 아무리 무시 못할 존재시라고는 하지만 저들은 대군이다. 아레인의 군대 또한 물러서 있는 판국이어서 절로 걱정이 들었던 것이다.
오딘에게선 때 아닌 질책이 들려왔다.
“말이 많아졌구나.”
아론의 이마에 식은땀이 맺혔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분에게 자신은 말을 섞을 처지도 못 되었었다.
주제넘은 행동을 했다는 생각에 아론은 다급히 말을 바꿨다.
“소인이 어리석었습니다. 바로 퇴각하도록 하겠습니다.”
오딘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자 그때서야 아론이 마타하리를 데리고 움직였다.
바리톤 쪽에서는 당장 움직임을 보였다.
“살려 두어서는 나중에 큰 후한으로 남을 것이옵니다. 어떤 수를 써서라도 저 광인은 숨통을 끊어놔야 할 것입니다.”
로테노아 역시 같은 생각이었다.
또 몇몇의 기사들이 나서려 했다.
그 모습이 얼마나 우스워보였던지 오딘은 허리를 젖히고 웃어버렸다.
“하하하하!”
그에 로테노아를 위시한 귀족들이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삼 왕자 팔테스가 용기 있게 한 걸음 나서며 물었다.
“왜 웃지?”
“물고기. 크큭.”
오딘의 대답이었다.
더더욱 의아해하는 바리톤의 사람들을 향해 오딘은 애써 웃음을 그치고 뒷말을 이어나갔다.
“물고기도 아니고 이 녀석들의 경우를 접하면서도 또 그러는 것이냐? 설마 뒤돌아서면 조금 전의 사실을 잊어버리는 것은 아니겠지?”
“뭐가 어쩌고 어째!”
저쪽에서 앙칼진 외침 소리가 오딘의 말을 맞받았다.
오딘이 지칭하는 녀석들이란 마타하리와 아론을 향해 달려들었던 기사들이다.
그들이 맥도 못 추고 쓰러져 버린 꼴을 보고서도 또 저런 행동을 취하니 절로 웃음이 나왔던 것이다.
그때 앞서 오딘에 의해 쓰러졌던 기사들이 힘겹게 몸을 들썩였다.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들었던지 오딘은 씁쓰름한 미소를 머금었다.
‘쩝, 일 년 동안이었지만 습관이 몸에 배었나 보군.’
미세한 차이였다.
분명 심장을 관통시켰을 수도 있었음에도 오딘은 자신도 모르게 손속에 자비를 두었던 것이다.
마타하리와 오딘의 등장이 잠시 저들의 진군을 멈추게 했다.
이미 시야에서 사라져 버린 마타하리.
느닷없이 로테노아는 눈앞의 이방인에게 칭찬부터 늘어놓았다.
“배짱 한번 두둑하군.”
바리톤의 대군과 한 사내가 대치하고 있음을 일컫는 말이었다.
그러나 오딘에게선 어떠한 반응도 얻어낼 수 없었다.
그는 조금 전의 광인보다 이방인을 더 가볍게 여기고 있었다. 광인이야 눈에서 광망을 발하고 사람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을 형체에다가 괴력, 그리고 무엇보다 마스터가 아닌가.
당연히 그보다 키도 작고 외형 또한 호리호리한 사내에 대해서 크게 경계심을 둘 필요가 없었다.
그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다시 오딘에게 물었다.
“저자는 그대의 명령을 받는 것인가?”
“그런 셈이지.”
그제야 로테노아는 기분 나쁜 웃음을 지었다.
“그렇다면 자네를 제압하면 저자를 가질 수도 있는 것이로군.”
로테노아의 말에 오딘을 제외한 적잖은 사람들이 놀랐다.
저 광인에 의해 죽거나 전투 불능이 된 기사들이 무려 칠십이 넘는다. 병사들도 아니고 기사들이 말이다.
이는 공작 한 명이 거느리고 있는 기사의 수와 맞먹었다.
병사들이라면 얼마든지 인원 보충이 가능하다. 왕국, 또는 영지 내에 사는 모든 백성들이 그 대상이 될 수 있으므로.
하지만 기사는 아니었다. 그들은 오랜 세월에 걸쳐 훈련을 시켜야 하기에.
그 수고로움은 둘째 치더라도 직접 정을 나눠온 주군들의 입장은 난처하기 그지없었다.
계약 기사는 그렇다 쳐도 직접 충성 맹세를 한 가신 기사들의 목숨을 앗아간 원수를 아군으로 삼으려 하는데 어찌 반가울 수 있겠는가.
그래도 왕의 뜻이니 거스를 순 없어 누구 하나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반면에 오딘은 그의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버린 것이다.
대신 삼 왕자 팔테스를 향해 한가하게 질문을 던졌다.
“네놈은 구면이로구나.”
“닥쳐라, 이놈!”
팔테스에게서 들려온 대답이 그러했다.
오딘은 계속 짓궂은 표정으로 그를 마주 보았다.
“그래, 사신으로 올 때는 혼자라서 징징 짜고 울더니, 지금은 옆에 사람 좀 있다고 겁을 상실한 거야?”
그 말을 듣는 바리톤의 귀족들은 사색이 되어버렸다. 왕에게서 이런 얘기는 일체 전해듣지 못했던 탓이다.
아무리 핍박을 받았기로서니 남의 왕궁에서 울었다는 것이 어디 될 말인가? 그것도 세 왕자 중의 한 명이 말이다.
이는 왕국의 체면을 구겨 버린 것이었다.
오딘의 말은 사실이었다.
그 증거로 팔테스의 얼굴색이 붉게 달아오르고 있지 않은가.
눈치 빠른 귀족들은 그를 바로 알아차렸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속으론 혀를 끌끌 찼다.
‘쯧, 나라 망신을 시키고 오셨군.’
‘아직 스물을 넘기지 않으셨다고 하지만 어린아이도 아니신데, 거참…….’
자연히 로테노아의 얼굴에는 노기가 드리워졌다.
그 노기가 모조리 오딘의 몸으로 향했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었다.
“아직 자신의 처지를 잘 모르고 있나 보군.”
“무슨 처지?”
“그대가 아레인에 어떤 존재인지는 모르겠지만 혼자가 아닌가?”
“그래서?”
계속 반말이었다. 하지만 로테노아는 그를 흠잡을 생각은 없었다. 다른 일로도 충분히 흠을 잡을 것이 넘쳐났으므로.
“우리가 자네를 달갑게 보고 있다는 것 또한 알겠지?”
“그래서?”
“네놈의 무지를 가르쳐 줄 생각이니라.”
“그래서?”
계속 장난스럽고 조롱하는 듯한 물음이 반복해서 들렸다.
노기가 뻗칠 대로 뻗친 로테노아를 대신해 옆의 귀족이 큰 소리를 질러 그를 나무랐다.
“닥쳐라, 이놈. 뉘 앞에서 망발이냐! 이분은 바리톤 왕국의 국왕이시다. 언행에 주의하는 게 좋을 것이다!”
“싫다면?”
왕을 대신해주었던 귀족의 안색이 붉으락푸르락할 때 로테노아 역시 위엄을 갖추고 한마디 덧붙였다.
“장난스런 대화는 그만 했으면 좋겠군.”
그에 대해 이방인에게선 더 이상한 물음이 들려왔다.
“장난이 끝나면 무서운 일이 닥칠 텐데? 이만 끝내게?”
오딘이 분명히 경고를 했음에도 로테노아를 위시한 여러 바리톤의 귀족들은 그의 말을 허세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 * *
일 왕자 헥토르는 자신이 꿈을 꾸고 있다고 생각했다.
“저, 저놈은 사람이 아니다.”
그가 지칭하는 대상은 다름 아닌 발데르.
그의 무위는 인원수를 무색케 할 정도였다.
간간이 그의 검에서 눈을 부시게 할 정도의 빛이 흘러나올 때면 어김없이 서너 명의 사람들이 차가운 바닥에 몸을 뉘었다.
그토록 마주치고 싶어 했던 발데르가 자신을 향해 점차 다가오고 있지만 전혀 달갑지 않았다.
검을 쥔 손에 땀이 흥건했다.
어려서부터 검술을 익혔다고 하지만 저놈의 상대가 안 될 것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기사를 더 내어라’, ‘내가 나서 직접 막겠다’라며 길길이 날뛰던 그였다.
그러나 저 빛을 접하며 완강하던 의지는 어디론가 숨어버렸다.
한칼에 네댓 명을 쓰러뜨린다.
그에 더해 레고타 후작에게서 거북한 목소리가 들렸다.
“마스터입니다.”
마스터.
어려서부터 자신이 꿈꿔오던 호칭이었다.
그러나 그 길은 너무도 멀었다.
그 때문에 하루를 꼬박 검술을 연마한 적도 많았지만 검술에 대해 알게 되면 알수록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라는 생각만이 커져 갔다.
몇 해 전이라지만 오죽하면 이런 생각까지 품었을까?
‘세상에 마스터가 있긴 있는 걸까?’
그 경지에 다다른 자가 저기 있다. 불가능할 것이라 생각했던 경지에 다다른 자가.
호승심 따위는 버려야 했다.
그렇게 돌아서려는데 재수가 없게도 발데르가 바짝 다가섰다.
그와 자신의 사이에는 분명 기사를 태운 여러 필의 말들이 있었다.
급작스레 발데르가 말에서 뛰어내렸다.
그리고 무서운 속도로 달려오기 시작했다.
빛을 머금은 지독히도 긴 검이 사방으로 춤을 췄다.
목이 베어지고 다리가 잘린 말들이 분수처럼 피를 쏟으며 처연하게 바닥으로 널브러졌다.
기사들이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었다.
두꺼운 중장갑주가 종잇장처럼 찢겨 나가고 벌어진 살 틈에서 혈흔이 뿜어졌다.
고통을 달래줄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기사들까지 있었다.
발데르는 분명히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아까부터 이때까지 줄곧.
헥토르가 황급히 말을 돌리려 할 때 발데르가 허공으로 솟구쳤다. 땅을 박차고 말을 태운 기사들을 뛰어넘은 것이다.
그를 누구도 제지하지 못하였다.
외눈이 헥토르의 두 눈과 마주쳤다.
공포에 사로잡히지 않으려는지 헥토르가 애써 고개를 돌렸다.
바로 그때 헥토르의 눈두덩이 옆으로 섬광이 일었다.
푸확!
레고타가 이를 목격했지만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분명 검이 닿지 않을 거리였다. 그러나 발데르의 검은 한 사람의 팔만큼이나 더 길어져 헥토르의 오른쪽 뺨을 가르고 말았다.
더 생각하고 말 것도 없었다.
레고타는 극심한 상처를 입고 바닥으로 쓰러지려는 헥토르를 한 손으로 잡고 재빠르게 자신의 말로 낚아챘다.
그리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내달리기 시작했다.
다른 귀족이 그 상황을 지켜보았는지 힘을 실은 목소리로 전장에 있는 바리톤의 병력들에게 알렸다.
“전속력으로 전장을 벗어난다. 전군 철수하라!”
* * *
기기묘묘한 살기가 흘러나왔다.
이방인의 몸에서 퍼진 살기는 주변에 있는 모든 것의 숨통을 조일 만큼이나 강력했다.
이유 없이 사람들이 쓰러지고 있다.
호흡을 멈추고 달려든 기사들이라고 해서 좋은 꼴은 못 되었다.
그가 가볍게 휘두른 팔에 얻어맞고는 저 먼 발치로 나가떨어졌다.
지금의 경우는 조금 전의 광인이 일으킨 난동과는 사뭇 달랐다.
그의 힘이 모든 것을 파괴하는 힘이었다면 이자의 힘은 모든 것을 무력화시키는 힘에 빗댈 수 있었다.
하등 거리낄 게 없었던지 차츰 다가서는 이방인을 보며 로테노아는 또 한 번 놀라야만 했다.
“저, 저놈은 무엇이냐?”
그는 저자가 마인이라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저렇게 이상한 기운을 흘리는 것이며 모든 힘을 무력화시킬 수가 있냐는 얘기다.
‘광인에 이어 이번에는 마인이라니……. 내가 모르는 사이 아레인 왕국에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가?’
불현듯 전대 현자 클라베르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아레인 왕국의 하늘엔 무서운 별이 떠 있습니다.’
그 말이 계속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각 군을 통솔하는 지휘관들은 지휘관들대로 목이 쉬어라 소리를 질러댔다.
“막아라. 적은 단 하나다. 그 역시 아까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희생을 해서라도 저자의 힘을 소진시켜야만 한다!”
그릇된 판단이었다.
섬뜩한 마기(魔氣)가 하염없이 흘러나왔다. 기사들이라면 이를 악물고 그나마 버텨 냈지만 병사들은 장시간 호흡이 멎어 숨을 멈춘 이들까지 있었다.
봐줄 이유가 전혀 없었다.
이미 정령과의 계약은 끝이 난 셈이다. 더불어 저들을 죽여야 할 이유까지 있었다.
감히 오딘 자신의 경고를 묵살하고 국경을 넘었지 않은가.
저들은 하이에나들일 뿐이었다. 남의 물건에 욕심을 내어 전쟁을 일으킨 자들. 자비를 베풀어줄 까닭 또한 없었다.
흑룡무제 악진의 본연의 모습이 차츰 모습을 드러내는 중이었다.
점점 이 기묘한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많은 자들이 나섰다.
그러나 오딘의 옷자락도 건드릴 수가 없었다. 쓰러지는 것은 바리톤의 병력들이었다.
여기저기에서 처절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손을 한 번 스쳤을 뿐이지만 어떤 이들은 다리가 기형적으로 비틀어져 팔에 닿아 있었고, 어떤 이들은 가슴에 구멍이 뚫려 하염없이 피를 쏟아내고 있었다.
점차 공포가 커져 가며 바리톤에서도 수를 썼다.
수란 다름 아닌 더 많은 자를 내는 것이었다. 한꺼번에 군사들이 몰려들어 그를 압박했다.
오딘은 처음은 두 팔과 다리의 외공만을 사용해 저들을 상대했지만 그러자니 점차 귀찮아졌다.
기어코 그가 흑룡검을 꺼냄으로써 사단이 벌어지고 있었다.
검이 허공을 가를 때마다 찬란한 빛이 일렁였다.
그것들은 매우 부드럽게 곡선을 그리며 달려드는 자들을 향해 파고들었다.
살이 찢어지고 뼈가 갈라지는가 하면 피가 흩뿌려졌다. 두꺼운 중장갑주 역시 종잇장처럼 찢겨 나갔다.
멀리서 보았다면 매우 멋진 동작이라고 칭찬을 늘어놓았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이 검무가 부르는 것은 오직 피였다.
‘점점 군대가 소진되어가고 있다.’
로테노아의 눈에도 확연히 드러나고 있질 않은가.
시체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산 자들이 줄어간다. 자신이 지금 꿈을 꾸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가끔씩 그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졌다가 딴 곳에서 나타났다.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한쪽에서는 지금의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방책을 내놓았다.
“기사들을 아껴야 합니다. 어차피 저놈을 대적할 상대가 없다면 병사들로 하여야 합니다.”
말인즉슨 그들을 희생시켜 저자의 힘을 빼놓으려는 수작이었다.
로테노아가 듣고 보니 그 말이 또 옳았다.
각 지휘관들의 명을 받은 수백의 병사들이 그에게 대들었다.
그러나 이도 무리한 일이었다. 그는 병사들 자체를 상대해주지 않았으므로.
문득 로테노아의 뇌리에 이상한 말이 들려왔다.
-꼴에 왕이라고 본 좌 앞에서 무게를 잡았겠다?
당황하고 있을 무렵이라 지금의 말로 혼란이 생겨 버렸다.
‘누가 말을 하고 있는 것이지? 서, 설마 저놈이?’
분명 자신과 눈을 마주치며 웃고 있었다.
얼음처럼 차디찬 웃음이었다.
그러나 곧 그의 시선을 피할 수 있었다. 수백의 병사들이 그에게 몰려들었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소란이 잠시 멎었다.
난동을 부리던 병사들의 움직임 역시 앞쪽에서부터 점차 더뎌졌다.
“끄, 끝난 모양입니다.”
어느 한쪽에서 들려온 소리.
긴장한 빛이 역력했던 로테노아의 얼굴에 그늘이 점차 걷혀지며 조금씩 화색이 돌아왔다.
“허, 허허…….”
황당해하면서도 내심 기뻐하는 듯한 웃음이었다.
삼 왕자 팔테스 역시 얼떨떨해하면서도 좋아 어쩔 줄 몰랐다.
그는 로테노아의 기분을 살피다가 욕심이 앞서 조심스레 아뢰었다.
“폐하, 한 가지 청이 있사옵니다.”
로테노아 역시 막 표정을 가다듬고 자상한 태도를 보이며 근엄하게 말했다.
“말해보라.”
“저자의 목을 제게 주시옵소서.”
허락하려 했다. 아들의 요구를 말이다.
대답을 하기 위해 입을 벌리는 찰나에 가까운 곳에서 비아냥대는 물음이 먼저 들려왔다.
“누구 목을 달라고?”
목소리의 주인은 바로 오딘이었다.
삼 왕자 팔테스는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저지른 것이다. 말은 한번 내뱉으면 결코 주워 담을 수 없으므로.
* * *
가인과 헤르의 군대는 뒤따르는 적병들을 어렵지 않게 물리쳤다.
저들 태반이 도주하고 말았다. 뒤에서 따라오질 않았으니 오래 버틸 수가 없었던 것이다.
왜 병력이 차단되었는지조차 모르는 이들도 있었다.
바리톤의 군대 일부를 물리친 그들은 오래지 않아 아론과 마주쳤다. 마타하리를 끄는 수레에는 4마리의 말이 있었으며, 마부와 호위 기사들이 따랐다.
그중에는 가인 자신의 휘하 기사도 있었다.
“이제 오는가?”
가인의 물음에 기사가 답했다.
“그렇습니다.”
그러나 가인의 질문은 아론을 향한 것이었다.
그래도 자신 휘하의 기사에게 무안함을 주지 않기 위해 눈웃음을 건넨 후에 말에서 내려 아론에게 다가갔다.
“다친 데는 없는가?”
그가 직접 아론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걱정을 담아 묻고 있다.
아론은 크게 황송해하며 읍을 하고는 답했다.
“전 괜찮습니다. 마타하리 님이 상태가 좋지 않아 오딘 님께서 성으로 돌려보내라고 하셨습니다.”
가인은 크게 놀랐다.
“앞쪽에 오딘 님이 가계시다는 말인가?”
뒤쫓겠다는 말은 했었다. 그러나 단신으로 저들에게 가실 줄은 정말 몰랐었다. 말 한마디면 될 일이었음에도, 아니 전음으로 의사를 전달할 수 있었음에도 오딘은 별말 없이 저들에게 향했다.
그러나 사실을 들추어내자면 그게 아니었다.
오딘은 근방에서 가인과 헤르가 싸우는 모습들을 봤었으며 때에 맞춰 아론을 시켜 마타하리 또한 내보냈다.
따지고 보면 오딘은 이들을 시험한 셈이었다.
오래전에 발데르와의 계약.
왕성을 차지한 후 모든 것이 자신의 아래 복속된다고 했었다.
자신의 것을 시험하는 데에 누가 뭐라 하겠는가.
확실히 마교의 교주를 지낸 자다운 발상이었다.
괴팍하고 엉뚱하기 그지없으며 안하무인이질 않은가.
그러나 여기 있는 누구도 그를 탓하지 않았다. 그는 아레인의 법이었으므로.
무엇보다 마타하리의 상태를 봐야 했으며, 아론이 그를 잘 부릴 수 있는지 시험해봐야 했다.
일이 생길 때마다 매번 자신이 나서 일처리를 할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무턱대고 그를 풀어놓은 것은 괘씸한 놈들에게 공포심을 심어주어 무서움을 느끼게 하기 위해서였다.
전쟁터에 몸을 담았다면 죽음쯤은 각오했어야 할 일이 아닌가.
이런 오딘의 속내까지는 파악할 수도, 그럴 겨를도 없었다. 당장에 가인은 뒤쪽의 말에 올랐다.
“부디 그 사람을 왕성에 잘 들여보내주게. 나와 헤르 이 사람은 오딘 님께 가보아야겠네. 그럼 건투를 비네.”
그렇게 말을 하고 가인은 헤르와 함께 군사를 몰아 바리톤의 국왕이 있을 곳을 향해 치달리기 시작했다.
* * *
바리톤 대군과 한 남자의 대결을 바라보는 두 존재가 있었다.
이들에게선 꽤나 멀리 떨어진 곳의 숲이었는데, 한 존재는 나무였으며 다른 한 존재는 느낌만 날 뿐 모습이 보이질 않았다.
-저자가 그입니다.
지금 말을 하는 이는 숲의 상급 정령 사이하드.
오딘이 처음 이 세상에 도달했을 때 모종의 거래를 했던 자이다.
그에 대답이 들려왔다.
-도저히 인간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군.
나무가 몸을 돌려 물었다.
-그렇게 엄청납니까?
그에 투명한 존재에게서 대답이 들려왔는데 질책의 성질을 띠고 있었다.
-힘을 쓰지도 않는데 구태여 모습을 보일 필요가 있을까? 저자가 이쪽을 주시한다면 널 볼 수 있을 것이다.
상급 정령인 사이하드가 말을 높일 존재는 누구일까?
해답은 매우 간단했다.
존대를 받는 이는 숲의 정령왕 드라이어드였던 것이다.
숲의 정령왕 드라이어드가 이곳에 나타난 것만으로도 보통 일이 아니었다. 정령왕이 인간사에 관여하는 것 자체가 웃기는 일이므로.
-조심하도록 하겠습니다.
자신이 큰 동작을 보였음을 뉘우치는 말이었다.
그러나 드라이어드는 그것을 계속 문제 삼을 생각은 없었던지 다시 좀 전의 대화를 이어나갔다.
-내가 아는 인간 중에 저런 인간은 없었다. 무려 수천 년 동안 이 세계를 지켜봐왔지만 말이다. 혹 모르지. 지금은 있을지도…….
그와 관계가 있던 인간들을 일컫는 말이었다.
이런 대화 자체를 한다는 것 때문인지 사이하드는 조심스레 그의 속마음을 떠보았다.
-세상에 위협이 될 존재입니까?
-질문이 많구나.
웃는 말투였다.
원래 숲의 정령이란 포악한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따라서 상급 정령이 조금 무례하게 굴었다고 해서 화를 내지도 않았다.
-죄송합니다.
-죄송할 것은 없다. 내 저자를 보고자 한 것은 단지 궁금했을 뿐이다. 지금처럼 사람을 죽인다 해도 관여할 것이 아니지. 앞서 너에게 시켰던 일은 그 때문이었다. 그 숲은 너도 알다시피 우리에게 중요한 곳이니라. 그래도 저자는 중간에도 매우 조심을 해주었더구나. 그의 적으로 보이는 자들이 숲 속으로 들어왔는데에도 그의 부하들이 제지했었다. 그럴 필요까지는 없었는데 말이지.
-그런 일도 있었습니까?
또 질문이었다.
이렇듯 질문이 많은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사이하드와 달리 드라이어드는 숲에서 일어난 모든 일들을 알고 있으므로.
사실 오딘은 숲 속에서의 행동에 조심을 기한 것뿐이었다. 혹시 그것 가지고 꼬투리를 잡으면 어찌할까 하는 생각이 있었던 것이다.
오딘이 애초부터 무리한 거래를 요청한 정령이 뭐가 귀엽다고 숲을 지켜 주겠는가.
-얼마 동안 저자를 지켜봐왔었다. 조금 괴팍한 성격이기는 하다만 네 예상처럼 세상에 해악을 끼칠 인물 같지는 않구나.
* * *
단 한 사람을 제압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무례한 이방인은 그 성격보다도 실력이 훨씬 뛰어났다. 앞서 광인의 존재를 까맣게 잊어버릴 정도로…….
병사들을 방패삼아 마법사들이 마법을 난사했지만 소용없는 짓이었다. 공격 마법은 괴이하게도 그의 몸에도 닿기 전에 소멸되었다.
“큭큭, 파르티잔 같은 녀석들이 꽤 많군. 다 데려가고 싶다만 오늘은 한 녀석만 데려가기로 하지.”
한 녀석이란 다름 아닌 팔테스를 일컫는 말이다.
오딘이 성큼 그에게 다가섰다.
팔테스가 놀래 말을 달려 기를 쓰고 이리저리 빠져나가려 해도 자꾸 이방인과 맞닿았다.
또한 그놈의 말이 문제였다.
저 이방인이 무섭다는 것을 알아차리는지 그가 모습을 드러낼 때마다 투레질을 치며 앞발을 들어올리는 바람에 허리가 다 지끈거렸다.
병사들은 더 이상 그를 제지할 수 없었다.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는 놈을 무슨 수로 따라잡는다는 말인가.
기마병들이 대신하려 했지만 그들은 눈치가 너무 느렸다.
하는 수 없이 말을 탄 기사들이 대신해야만 했다.
삼 왕자가 위기에 몰릴 때마다 로테노아는 고래고래 소릴 질러대는 바람에 목이 쉬어버렸다.
“저… 이다. 뭘 하느냐. 어서 잡… 않고.”
이처럼 그의 목구멍에서 표출된 말은 목이 칼칼해져 제대로 된 의사소통이 불가했다.
사실 오딘이 팔테스를 잡으려면 얼마든지 잡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와 같이 시간을 끄는 것은 난처해하는 저 녀석들의 표정이 재미있어서였다. 더없이 괴롭혀 줄 생각이었다.
구두둥- 두둥-!
이쪽의 소란 소리에 파묻혀 군마들의 말발굽 소리들이 비교적 적게 흘렀지만 그를 못 알아차릴 사람은 없었다.
‘큰일이다.’
그 무리들이 누구인지는 모두가 직감했다.
아레인의 병력들.
십중팔구 그들일 것이다. 저들을 쫓은 자들은 얼마 되질 않았으므로.
로테노아의 이마에 주름살이 가득 늘었다.
한 녀석을 어쩌지 못해 삼 왕자를 내버려 두고 갈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곧 전투가 벌어질 것이다. 그에 대비하라!”
전력이 분산되는 것은 더한 손해를 낳게 된다. 그럼에도 삼 왕자를 포기할 수 없어 그들에게 뛰어난 기사들을 배치했다.
곧 가인과 헤르가 당도했다.
그들은 말 위에서 팔을 굽혀 읍을 하고는 우레와 같은 목소리로 아뢰었다.
“신 가인, 오딘 님을 뵈옵니다!”
“신 헤르, 오딘 님을 뵈옵니다!”
이어서 병력 전체가 그를 향해 소리쳤다.
“오딘 님을 뵈옵니다!”
1천에 가까운 병력이 한결같이 입을 모아 내뱉는 소리가 어찌나 큰지 땅이 울릴 정도였다.
말 위에 있는 자들은 한 팔을 굽히는 것이었고, 땅에 발을 디디고 서 있는 자들은 허리를 숙이는 동작이었다.
단 한 동작이었지만 절도 있고 합일된 동작이었다.
소리와 일체된 동작에 한 번 놀라고, 저들이 그를 높이 여기는 것에 대해 한 번 더 놀랐다.
한 나라의 왕에게 저렇게 소리치는 자들은 없다. 또한 귀족들에게도 그렇지 않다. 대륙을 통틀어 봐도 없을 것이었다.
바리톤에서 온 사람들은 이제 저자의 정체가 궁금해졌다.
‘대체 저자가 무엇이기에…….’
여럿의 머릿속에 떠오른 의문.
그러나 이 자리에서 물을 만한 사항도 아니다.
그러는 동안에도 오딘은 팔테스를 핍박하고 있었다.
“저리 가! 저리 가란 말이다!”
짜증이 확 나는 표정이었다. 그 표정이 절박하게 변해 있었다. 앞서 이자의 실력을 보았기에 그러했다.
사람을 눈 한 번 깜짝하지 않고 도륙 내는 잔인함과 가공할 힘.
솔직한 말로 모든 게 두려웠다.
땅 위에서 움직이는 사람을 잡기 위해 기사들이 말을 달려 제지하려 했지만 쉽지 않았고, 그와 거리를 좁힐 때면 어김없이 말과 함께 나뒹굴었다.
그저 그 방향으로 손을 뻗은 것뿐인데도 말이다.
이러자 일은 더 커지고 말았다.
팔테스를 구해오라고 보낸 기사들이 속절없이 쓰러져 수가 부족해지니 더 충원을 해줘야 할 것이다. 거기에 무시 못할 군대가 앞쪽에 떡하니 버티고 서 있다.
로테노아는 쉰 목소리로 근방의 지휘관에게 명했다.
“짐… 이 소리… 를 못 지르니 대… 신 해주라. 삼 왕자… 에게 이곳으… 로 오라고.”
벌써 여러 번 했던 말이었다.
하지만 어디 쉬운 일인가? 팔테스 또한 그리하려 했었다. 무리 속에 숨어들면 제아무리 귀신이라 하더라도 못 잡을 거라고.
다만, 뜻대로 되질 않았을 뿐이다.
자신의 아버지라면 최고라고 생각해왔다. 그 위에 있는 사람은 없으며 그의 힘이 모든 것을 짓누를 수 있다고 여겨 왔다.
적어도 바리톤 왕국에서 그랬으며, 아레인 왕국에 발을 디딜 때까지만 해도 이곳 또한 국왕의 후광을 얻고 있는 자신을 어쩔 사람은 없을 거라고 여겼다.
그런데 그 판단이 서서히 금이 가고 있었다.
이자는 저들이 인사를 하는 것에는 신경도 쓰지 않고 아직도 자신에게 팔을 뻗치고 있다. 닿을까 말까 한 거리여서 더없이 긴장을 해야만 했다.
자신에게 보내지는 기사들 또한 줄어들었다.
그를 대신하려는지 돌아오라고 재촉하는 소리만 잦아졌다.
“삼 왕자 전하, 어서 이쪽으로 향하십시오!”
여럿이서 하는 말들이었다.
누군 가기 싫어서 안 가는 것처럼 말을 하자 팔테스는 속이 확 뒤집어졌다.
대뜸 말을 멈춰 소릴 지르려는 찰나에 타고 있던 말이 멈췄다. 말고삐가 이방인의 손에 잡힌 것이다.
이방인은 잔인한 미소를 드리우고 씨익 웃었다.
언젠가 아레인 왕국에서 마주했던 소름 끼치는 그 웃음이었다.
“놔, 놔라!”
고삐를 뺏으려 손을 내밀었는데 그 바람에 이방인에게 손을 덥석 잡혔다.
팔테스는 기겁을 했다.
말은 요지부동. 이자의 기에 질려 움직일 생각도 못하고 있다.
그가 팔을 가볍게 당기자 말에서 자신의 몸이 떨어졌다.
눈앞이 깜깜했다.
“폐, 폐하! 아… 바마마…….”
발악하듯 소리쳤지만 소리는 점차 멀어져 갔다.
뒤에서 말을 타고 기사들이 자신을 쫓았다.
참으로 아리송한 일이었다.
기사들이 자신을 포기했는지, 아니면 이 이방인이 달리는 속도가 말보다 빠른 것인지 좀체 판단이 서질 않았다.
후자는 전혀 상식 밖의 일이었다.
그러다 생각이 곧게 섰다.
지금은 그런 것을 따지고 있을 때가 아니라는 걸.
이자의 손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선과제인지라 주먹으로 그의 등을 강하게 내리쳤다. 허리춤에는 보검이 달려 있지만 그것을 뽑을 여건이 안 되었기 때문이다.
그의 등을 가격할수록 이방인에게도 경고성의 말이 들려왔다.
“어? 쳤어? 한 대… 두 대… 세 대…….”
-이 녀석을 데리고 먼저 돌아가겠다. 뒤는 알아서 처리하도록. 단, 국왕을 죽여서는 안 된다. 한 번에 몰아쳐서 쫓아버려라.
그것이 가인과 헤르에게 들려왔던 오딘의 전음이었다.
마침 삼 왕자를 되찾기 위해 여러 병력들이 대열에서 이탈하고 있었다.
때를 놓치지 않고 가인과 헤르 역시 행동을 개시했다.
“공격하라!”
졸지에 바리톤의 군대는 혼란에 빠져 버렸다.
“우왕좌왕하지 마라!”
“적을 맞을 채비를 하라!”
지휘관들이 채근을 하여 각자의 부대를 정리하며 당장 대처를 하긴 했지만 제대로 된 수습은 불가한 상황이었다.
그사이 가인과 헤르를 위시한 아레인의 군대가 질풍처럼 파고들어왔다.
“와아아아아!”
노도와 같은 함성 소리와 기개에 바리톤의 군대는 변변한 저항조차 못해보고 뒤로, 더 뒤로 밀려만 갔다.
살겠다고 앞쪽에서 뒤로 내빼니 대열은 흐트러지게 마련이었다.
2시간을 넘기지 못하고 로테노아는 결단을 내려야만 했다.
목이 쉰 그를 대신해 옆의 공작이 명을 대신했다.
“모두 퇴각. 퇴각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