쟁탈전
일 왕자 헥토르는 국왕군과 합류하지 못했다. 느닷없이 나타난 적들 때문이었다.
지축을 울리는 말발굽 소리들에 일 왕자가 거느리는 전군이 멈춰 섰다.
아직 갈 길이 멀었거늘, 이렇게 많은 말발굽 소리들은 저들이 적일 것이라는 기대심을 불러일으켰다.
예상은 그대로 맞아떨어졌다.
그리고 앞으로 나서는 사내를 육안으로 판별했을 때에 헥토르는 묘한 기쁨에 젖어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진열에서 이탈해 머리 부위에 뿔이 달린 마갑을 걸친 흑마를 몰아 앞으로 나선 사내는 한눈을 감고 있었다.
“외눈박이 발데르다!”
헥토르의 탄성이었다.
발데르의 명성은 바리톤 왕국에까지 퍼진 상태였다.
레고타 후작은 그에 흥을 돋아주었다.
“일 왕자 전하의 바람이 하늘에 닿았나 봅니다.”
사실 그에게도 기쁜 일이었다.
내심 바라고 있었다. 일 왕자가 왕세자가 된다면 자신의 앞길에 탄탄대로가 펼쳐질 것이므로.
“그런데 수가 좀 적군요.”
레고타의 말에 헥토르는 잔인한 웃음을 드리웠다.
“그럼 어떻소. 설마 아레인 왕국을 대표하는 자가 항복이라도 할까 봐 겁이 나시는 거요?”
다소 심기를 거스를 수도 있는 소리였다.
하지만 레고타는 기분 나쁜 내색조차 하지 않았다. 이미 그의 장단점들을 꿰차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설혹 그렇더라도 국왕 폐하께서는 일 왕자 전하의 공을 높이 사실 것이옵니다. 저자가 이곳으로 온 것 자체가 일 왕자 전하께는 커다란 득이 될 것입니다.”
“하하하하!”
뭐가 그리 좋은지 헥토르는 고개를 젖힌 채 배를 거머쥐고 웃었다.
그런 모습들에 레고타가 빠졌는지도 몰랐다.
적어도 호탕하지 않은가!
헥토르는 자세를 바로 하고 말목에 몸을 숙여 팔꿈치를 대고서 손바닥으로 턱을 받쳤다. 어떻게 나오는지 구경하겠다는 뜻이다.
전투가 벌어질지 모르는 상황에서 거만하기 짝이 없는 태도였지만 레고타에게는 멋스럽게만 비춰졌다.
‘내 판단이 그릇되지 않았구나. 나머지 두 왕자님들 중에서 이런 여유를 가질 분이 어디 있겠는가.’
이들은 아직 발데르를 무시하고 있었다.
하지만 헥토르는 한 가지만은 칭찬해주었다.
“병력에 비해 군마가 꽤 많군. 흑철갑을 입힌 말이라……. 멋스럽긴 하군.”
“멋은 그냥 멋이 아니겠습니까.”
레고타는 반쯤 고개를 숙이며 조심스레 그렇게 아뢰었다.
“그렇지. 저자가 어떻게 나오나 봐야겠소. 제발 항복이 아니면 좋겠군.”
발데르가 제 성질을 못 이겨 이리저리 서성이는 말을 달래서 멈춘 후에 헥토르 군대를 향해 입을 열었다.
“바리톤 왕국에서 아레인 왕국에는 어쩐 일인가?”
그 물음에 헥토르 진영에서 한 지휘관이 일 왕자에게 아뢰었다.
“소신이 나가 대답을 해도 되겠사옵니까?”
헥토르는 거만한 자세 그대로 고개를 끄덕였다. 귀족에게 실례가 되는 행동이었지만 그는 굳이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그를 휘어잡은 것이 레고타 후작이었고, 레고타 후작이 전적으로 신임하는 것이 일 왕자 헥토르였기 때문이다.
그가 목소리가 닿을 곳까지 나가 발데르를 향해 힘껏 소리쳤다.
“그대들의 죄를 물으러 왔도다!”
“어디 들어보기로 하지. 그 죄가 무엇인가?”
“일전에 로테노아 국왕 폐하의 사신이 왕성을 방문한 적이 있다는 것을 알 것이다! 또한 그분의 신분이 삼 왕자 전하라고 전했음에도 그대들은 무례를 저질렀다!”
“흠, 그렇다면 여왕 폐하를 업신여기신 그대들의 국왕의 서신은 잘못되지 않았는가?”
아무렇지도 않게 문답하는 소리였다.
크지 않은 목소리였음에도 발데르의 목소리는 중후하게 울려 퍼져 헥토르를 포함한 바리톤 왕국의 전군이 듣게 되었다.
그에 반해 지금 발데르와 얘기를 나누는 귀족은 높은 음으로 소리를 빽빽 질러대는 바람에 목이 칼칼해졌다.
“국왕 폐하는 뜻을 전하셨을 뿐이다! 그게 어찌 무례가 된다는 말인가? 우리의 국왕께서 대노하셔 직접 이 여정에 동참하셨다! 그에 반해 그대들의 수장은 겁이 많은 모양이로다! 설마 왕성에 숨어 벌벌 떨고 있진 않겠지?”
신경을 거스르는 소리였지만 발데르는 미소를 지었다.
“공작 전하께서 말상대를 할 자가 아닌 듯합니다. 허락해주시오면 제가 대신해 답을 할까 합니다.”
발데르가 고개를 끄덕여 보이자 크레멘이 자신의 말을 끌고 나와 답했다.
“그분은 오신다! 그대들의 국왕은 그분의 경고를 무시하고 아레인에 발을 디딘 행동에 대해 평생토록 후회하게 될 것이다!”
그 말로 인해 헥토르 진영이 술렁거렸다.
로테노아의 진영과 마찬가지로 저들이 미치지 않았는지에 관한 생각과 말들이었다.
듣다 못한 레고타가 직접 말을 몰아 앞으로 나섰다. 그리고 간결하게 물었다.
“택해라! 전쟁이냐? 항복이냐? 설마 그 인원으로 우리와 대적하겠다는 생각은 아닐 테지?”
그에 발데르가 깃발을 들고 있는 기사에게 말했다.
“깃발을 달라.”
기사가 읍을 하며 깃발을 건네자 발데르는 그것을 수평하게 세운 후 지금 말을 건넨 레고타를 향해 힘껏 던지며 소리쳤다.
“대답은 이것이노라!”
쐐액!
발데르의 외침과 깃발이 허공을 가르는 파공성이 대기를 찢을 듯 컸다.
결코 가까운 거리가 아니었다.
아니, 지극히도 먼 거리였다.
하나, 마나가 주입되어 투명하게 빛나는 깃발은 뛰어난 궁수가 날리는 화살보다 배는 빠르게 날아갔다.
속도가 예사롭지 않음을 느낄 시간도 없었다. 레고타가 위협을 느끼고 깜짝 놀라 말을 돌리기도 전에 깃대가 ‘치익’ 하는 소리를 내며 볼 살을 찢고 지나갔다.
피가 튀겼다.
스친 것뿐이지만 상처가 지극히도 아팠는지 레고타는 생채기가 난 살을 손바닥으로 보듬고도 고통을 억누르지 못하여 허공에 대고 고래고래 비명을 질렀다.
“크아아아악-!”
앞서 나섰던 귀족이 팔을 뻗어 놀라 날뛰는 레고타 후작의 말을 진정시키고 그와 함께 진영으로 돌아가기 위해 몸을 돌리려는 찰나, 의아한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뒤쪽에 서 있던 기사가 레고타의 뺨을 스쳐 간 깃대에 꿰여져 허공을 날고 있는 게 아닌가!
주위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놀라움에 물들어 그를 향해 있었다.
헥토르마저 자세를 바로 하고 이빨을 갈며 발데르를 노려보았다.
서서히 전운이 감돌기 시작했다.
* * *
유프라의 진영에도 아레인의 군대가 찾아왔다.
1천도 되지 않아 보이는 병력이었다.
리먼 백작은 다행이라고 여겼다. 이제 더는 이 왕자가 회군 얘기를 꺼내지 않을 것이므로.
군대가 마주쳤을 때 등을 돌린다는 것은 지휘관으로서 수치일뿐더러 자격 상실이다. 아무리 유프라의 심성이 유약하다 한들 그마저 판별하지 못할 정돈 아니었다.
반면에 붙잡아온 노마법사, 파르티잔이라는 녀석은 경기라도 일으켰는지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재갈이 물려 말은 하지 못했지만 그 대신 고개를 양옆으로 세차게 저었다.
저들과 싸우지 말라는 의사 표시인 셈이다.
그가 불쌍해 보였는지 유프라는 또다시 리먼의 성질을 돋우었다.
“이제 노인은 풀어줘도 되지 않을까?”
이 왕자고 뭐고 간에 맘 같아서는 확 째려봐 주고 싶었지만 리먼은 차마 그럴 수 없기에 성질을 누그러뜨리며 작은 목소리로 아뢰었다.
“아직은 그럴 수 없습니다. 왕성에 도달하기 전까지는 풀어줘선 안 됩니다. 이 전투는 얼마 지나지 않아 끝날 것입니다. 어림잡기에도 병력이 대충 네다섯 배는 차이가 날 듯합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시옵소서.”
유프라는 더 말을 하지 않았다. 다만, 저들이 죽을 것을 염려해 미리 애도를 하는 중이었다.
‘아아, 또 사람이 죽는구나. 전쟁이 없는 세상에서 태어났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러면 이렇게 죄책감 따위는 느끼지 않았을 텐데.’
유프라다운 상상이었다.
그 역시 전투의 우세를 미리 점쳐 놓고 있었다.
단지 수로 말이다.
유약한 성격과 달리 유프라는 검술 실력은 이상하리만치 뛰어났다. 세 왕자 중에서 가장 나았다고 봐야 했다.
리먼 역시 그 점을 잘 알고 있었다. 언젠가 이 왕자 전하가 깨달음을 얻고 왕세자로 책봉되면 후에 강력한 군주가 될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유프라가 검술을 익힌 이유는 단지 심신의 편안함을 얻기 위해서였다.
유프라는 검술이 훌륭해질수록 심성은 더더욱 여려졌다. 리먼의 바람과는 먼 곳에 닿아 있는 것이다.
돌연 저들에게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레인 왕국의 보탄 백작이라고 하오. 허락 없이 대규모의 군대를 이끌고 국경을 넘어온 것은 명백한 도발 행위요. 이에 대해 책임을 묻고자 하오.”
상호 존대의 말투를 쓰고 있지만 그 목소리는 근엄하고 장중했다.
이쪽 역시 리먼 백작이 앞으로 나서 소리쳤다.
“누가 누구에게 책임을 묻는다는 말인가? 아레인 왕국에게 아직 그럴 여력이 남아 있었나?”
“도발을 인정한다는 말로 들어도 되겠소이까?”
“입만 산 자로다! 실력도 따라주는지 기대해도 될까?”
그 물음에 보탄이 답했다.
그러나 이번은 명백한 하대였다.
“그대들의 어리석음을 한탄하게 해주리라!”
곧 리먼이 진영으로 돌아왔다.
그동안에 난리가 일어났다. 파르티잔이 살아보겠다며 줄행랑을 치고 있기 때문이었다.
아레인 진영의 보탄 역시 멀리서 그 상황을 볼 수 있었다.
천리안(千里眼).
천 리 밖을 내다볼 수 있는 눈이라고 해서 붙여진 말이었다.
오딘의 천리안 정도는 아니지만 보탄의 시력 또한 전과 다르게 좋아졌다. 덕분에 저 거리에서 난동을 피우는 자가 누구인지를 알게 되었다.
문득 보탄답지 않게 장난스런 미소가 입가에 맴돌았다.
“가져다드리면 기뻐하실지도 모르겠군.”
* * *
아레인 왕성.
전운이 감돌고 있을 곳들과는 다르게 왕성은 비교적 평화로웠다.
켈타스 후작은 그래도 만에 하나 있을 사태에 대비해 철저하게 방비를 해놓았다. 성벽의 위로는 궁병들이 늘어서 있었으며 마법사들도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며 대기했다.
망루병들은 매의 눈을 연상시키게 할 정도로 부리부리하게 눈을 치켜떠서 성 주변을 샅샅이 둘러보았고, 왕성 주변에 잠입하고 있는 척후병들은 신경을 곤두세웠다.
그렇다 해도 외성 내에 거주하는 많은 사람들은 편히 마음을 놓고 있었다. 그들의 가슴속에 듬직하게 자리하고 있는 한 사람 덕분이었다.
여왕 엘레느 역시 같은 마음이었다.
그녀는 내성 내에 따로 마련된 마법 수련장에서 괴짜 노인과 마법에 대해 논하는 중이었다. 하지만 오늘따라 그녀는 의지박약해 보였다.
“또 그를 생각하는 것이로구나.”
괴짜 노인은 그녀가 그리는 대상이 누군지를 훤히 알고 있었다.
눈치가 10단이 넘고 정신 마법까지 시행할 줄 알아 그녀가 털어놓지 않았어도 알 수 있는 일이었다.
일전에 엘레느는 그와 약속을 했다. 비밀을 말해주는 조건으로 누구에게도 비밀을 발설하지 않겠다고 말이다.
괴짜 노인은 항상 그녀를 손녀처럼 대해주었고 그녀 또한 친할아버지처럼 그를 따랐다.
그래서인지 둘 사이는 점점 더 가까워져 마음속에 간직한 고민이나 비밀까지도 털어놓을 사이가 되었던 것이다.
물론 괴짜 노인의 고민이랄 것은 너무도 이상한 것들이었다. 어제 먹은 음식이 짰다거나 별이 이상한 곳에 떠 있어 걱정이 된다는 둥, 거의 헛소리에 가까웠다.
그래도 엘레느는 재미있게라도 그의 말을 경청해주었다. 그리고 나름 생각해낸 위로의 말들을 건네기도 했다.
어쨌건 괴짜 노인이 진즉에 떠났어야 할 아레인에 남아 있던 까닭은 전적으로 엘레느 때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는 이곳에서 그토록 찾아 헤매던 진정한 행복을 맛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엘레느는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여왕의 자리에 올랐으니 부담은 배가 되었다. 그녀 자신이 권력을 탐하는 존재가 아니라서 더했다.
이는 괴짜 노인 역시 꿰뚫어 보고 있던 사실이었다.
그는 생각해볼 것도 없이 엘레느에게 아주 듣기 좋은 제안을 해왔다.
“어떠냐? 이 할아버지와 보러 가지 않겠느냐?”
“예? 전쟁터를요?”
노인은 흡족한 미소를 떠올린 채 가쁘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손녀라고 생각하는 이의 얼굴에 만족스런 미소나 웃음꽃이 피어나는 것은 그에게도 행복이었으니까.
“하지만 제가 성을 비우면 그분에게 혼이 날지도 몰라요.”
오직 그였다. 여왕인 그녀가 왕성 안에서 눈치를 보는 것도 그뿐이었다. 그가 무서워서였다. 실망 깃든 표정으로 볼까 봐 두려웠다.
“여왕은 왕성을 지키는 개가 아니지 않느냐? 강인한 면모를 보이려면 참혹한 전쟁터 역시 지켜봐야 하는 거란다.”
핑곗거리를 만들어준 셈이다.
그 말이 옳다고 여겼는지 엘레느는 정말 그래도 되겠다고 생각했다.
“그, 그럼 날아서 가주실 거예요?”
“그럴 필요 있겠느냐? 혹 네가 성 밖에 나선다고 해도 뭐라 하지 못할 것이다. 너에겐 아무런 일도 안 시켰지 않느냐.”
말은, 아니 내색조차 하지 않았지만 엘레느 역시 그것이 불만이었다. 여왕으로 앉혔으면 무엇이라도 떠맡겨야 하질 않겠는가. 이래서야 보답은 언제 할 것이며 언제 그를 기쁘게 할 것인가.
그럼에도 아직 망설임이 짙었다.
“그, 그래도…….”
“여자란 말이다. 좋아하는 남자의 마음에 들려면 자꾸 눈에 띄어야 한다. 그리고 상대가 너무 무심하다면 조금의 걱정을 안겨 주는 것도 좋지. 또 모르지 않느냐? 이 일로 그의 관심이 조금이나마 너에게 올지.”
그는 사랑은 나이 차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러니 엘레느를 일체 만류하지 않는 것이다.
바라면 해라. 후회를 하더라도 해보아야 제대로 된 길을 찾지 않겠느냐 말이다.
엘레느 역시 점점 생각이 뒤로 기울어갔다.
그녀의 나이 올해로 14세.
나이는 어리지만 주안신마공을 익힌 덕에 미모는 감히 범접하기 어려울 정도로 출중해졌다. 거기에 꽤나 성숙해 보이기까지 하여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16, 7세까지도 가늠케 했다.
엘레느는 결국 결단을 내렸다. 왕성을 나서 전쟁터로 향하기로…….
목적은 전혀 다른 데 있지만…….
* * *
로테노아 국왕이 총지휘를 맡은 바리톤의 군대와 가인이 이끄는 아레인의 군대 간에 접전이 벌어졌다.
이곳 물란두스는 농사를 지을 수 없을 정도로 척박한 땅이었지만 전투를 벌이기에는 무리가 없었다. 오히려 대지가 시꺼멓게 죽고 단단하기 그지없어 최적의 상태라 봐야 했다.
과연 로테노아는 적을 기만하는 우를 범하고 말았다.
“아레인 왕국의 군대보다 우리 군대가 뛰어나다는 것을 확인하고 싶군.”
이 말로 인해 바리톤은 약 천여 명의 병력만을 내보냈었다.
그러나 커다란 실수였다.
1천 대 1천의 전투는 길게 지켜볼 것도 없었다.
피해가 극심했던 것은 아니지만 로테노아는 자신의 군대가 뿔뿔이 흩어지는 꼴을 보아야만 했다.
‘한심한 놈들 같으니라고…….’
지금 보는 광경, 그것은 흡사 양몰이를 해대는 양치기들을 연상케 했다. 로테노아가 이같이 분개하는 까닭 역시 그 때문이었다.
그의 기대를 충족시켜 주려면 저 병력으로 아레인의 병력을 이겼어야 했다. 조금 밀린다는 것도 화가 날 상황인데, 저렇게 한심한 꼬락서니들을 보이니 어찌 화가 나지 않겠는가.
“병력을 더 내라.”
작은 소리였지만 노기가 깃든 목소리였다.
왕의 뜻을 알아차린 귀족들 중 하나가 말 위에서 머리를 조아리며 답했다.
“신이 저들을 벌하겠사옵니다. 기회를 주시옵소서.”
“그리하라.”
그는 자신의 병력들을 이끌고 앞쪽에서 벌어진 전투에 즉각 가담했다.
잠시 로테노아의 구겨졌던 표정이 펴졌다.
그러나 아주 잠시였다. 그도 그럴 것이 방금 다른 귀족이 합세한 후에 아레인의 진영들이 당황하는 듯 보였다. 분명 그래 보였다.
금세 승기를 잡겠다고 생각했는데 점차 상황이 바뀌어갔다.
아레인의 병력들을 통솔하는 가인은 동료 지휘관과 함께 새로운 적들이 몰려오는 것을 알고는 진열을 정비했던 것뿐이다.
바리톤국의 입장에서 보자면 진짜 어처구니없는 상황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수적으로 우월한 바리톤 군대가 저들에 의해 이리 몰리고 저리 몰리는 상황이 재개되었기 때문이다.
더 많은 양들이랄까?
그 상황에서도 쓰러지는 자들이 속출했다.
로테노아의 이마에 심줄이 툭툭 불거졌다.
한 번은 참았다. 그러나 더는 참아줄 수 없었다.
아레인의 병력들에 대한 미움이 아니었다.
바리톤 왕국의 못난 귀족들과 부실한 병력들을 탓하는 것이었다.
“저러고도 용케도 나라의 녹을 먹고 살았구나. 자격이 없는 놈들이다. 짐의 신하로서의 자격이 없는 놈들이야.”
국왕 근처의 귀족들도 기가 죽었다.
지금 나선 귀족과 그의 병력들. 그들은 변방을 담당하며 영지전을 비롯해 몬스터들과 잦은 전투를 벌였던 자들이었다.
실전 경험이 많다는 것은 이로움으로 작용한다. 꼭 수련에 전념한 자들보다도 상황 대처나 모든 면에서 월등함을 지니는 것이다.
그런데도 저리 몰리고 있으니 여기 있는 몇몇 귀족들은 자신들이 저 입장이라 했어도 상황이 달라졌을 것이라는 생각은 품지 못했다.
삼 왕자 팔테스 역시 짜증스런 기색을 떠올렸다.
‘바보 같은 작자들. 병력이 배는 많은데 양옆에서 몰아쳐야지, 왜 흩어지는 거야? 개개인이 대열에서 이탈하면 전투는 더 어려워진다는 것도 모르는 건가?’
확실히 틀린 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아직 어린 팔테스가 아는 것을 귀족들이라고 모르겠는가? 저들 또한 원해서 저러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팔테스는 몰랐다. 실력이 받쳐 주지 못해 내몰리는 것임을.
그것은 저들의 실력이 이들보다 배는 우세하다는 것의 반증이기도 했다.
“국왕 폐하, 신 클라베르 감히 아뢰고자 합니다.”
“말해보라.”
눈에 좋게 비친 현자 클라베르였으니 이 망정이지, 공작 이하의 다른 귀족이 말을 꺼냈다면 욕을 얻어먹을 수도 있었다.
클라베르는 조심스레 자신의 소견을 내보였다.
“저들은 이곳의 지형에 익숙합니다. 반면에 폐하의 군대는 그렇질 못합니다. 이는 불리한 싸움입니다. 한 번에 군대를 몰아 저들을 물리치는 게 나을 듯합니다.”
사실 현자가 전투에 따라오는 일은 드물었다.
그러나 클라베르는 권력을 얻고 싶어 했다. 왕의 마음에 들어 더 많은 권세를 거머쥐고 싶어 했다.
그것이 클라베르가 이 정복 전쟁에 동참하게 된 계기였다.
당연히 이 전투는 승리하게 될 것이란 계산이 밑바닥에 깔려 있었으니 하등 겁낼 이유가 없었다.
로테노아가 듣고 보니 과연 그 의견이 옳은 것 같았다.
거기다가 클라베르는 그의 자존심을 세워주는 말을 하였지 않은가.
“현자의 의견이 옳도다. 전군을 몰도록 하라!”
국왕의 명령이 떨어지자 귀족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군대를 몰아 가인의 군대를 압박해나갔다.
가인 역시 행동을 달리했다.
-포위되어서는 안 됩니다. 군대를 서서히 물리도록 합시다.
의어전성이었다.
거리가 멀고 주변의 소음이 커서 이것으로 동료 지휘관인 헤르에게 전음을 보낸 것이다.
곧 동료 지휘관에게서 답신이 왔다.
-그러도록 하지요. 군대를 물렸다고 혼내시지는 않으려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시지는 않을 겁니다. 저희는 군대를 물리면서도 얼마든지 적을 쓰러뜨릴 수 있지 않습니까.
-그것 좋은 의견입니다. 그대로 따르도록 하지요.
가인과 헤르가 주축이 되어 아레인의 병력이 뒤로 더 뒤로 물러났다.
로테노아는 그때서야 작으나마 미소를 떠올릴 수 있었다.
‘진즉에 현자의 말대로 할 걸. 내가 눈요깃거리나 즐기려고 두 지휘관들에게 괜한 고생을 시킨 것 같군.’
로테노아는 차마 모르고 있었다.
저들은 물러서면서도 자신들의 병력을 보호하고 기동이 뛰어난 정예 기사들이 퇴로를 확보하는 한편, 다가오는 적들을 추풍낙엽처럼 쓰러뜨리고 있다는 것을.
* * *
발데르군과 헥토르군의 전투 양상도 점점 가열되어갔다.
이들은 말 그대로 전면전이었다.
그래도 헥토르의 군대가 많아 발데르를 따르는 병력들은 개인당 5명 이상씩을 담당해야 했다.
일월진에 드나들지 못했던 병사들도 적지 않았지만 뛰어난 기사들이 그들의 몫까지 대신해주었다.
위험이 닥치면 여지없이 아레인의 기사가 나타나 처리를 해주었다. 뒤가 든든한 덕분에 아레인의 연약한 병사들조차 더더욱 힘을 발휘할 수 있었다.
반면에 바리톤국의 레고타 후작은 경각심을 곤두세워야만 했다.
서로와 부딪쳐 쓰러지는 것은 십중팔구 이쪽이었다.
특히나 발데르라는 저자는 말 그대로 괴물이었다.
그에겐 적수가 없었다. 하나면 하나, 열이면 열이 모두 달려들어도 죄다 쓰러지기 일쑤였다.
그 가공할 실력 때문인지 발데르를 엄호하는 자 또한 있지 않았다.
헥토르가 성을 못 이겨 검을 빼들고 달려들려 했지만 레고타 후작이 한사코 말렸다.
“일 왕자 전하, 감정에 치우쳐 일을 그르치시면 아니 되옵니다.”
돌연 어지러이 널려 있는 바리톤 왕국군들의 시신 가운데서 우뚝 서 있던 발데르가 시선을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발데르는 얼굴에 까닭 모를 미소를 걸치고 있었다.
헥토르는 기분 나쁜 발데르의 미소를 접하며 입가를 씰룩였다.
“이 손 놓으시오. 저자 역시 사람인 이상 지쳤을 게 아니요? 저자만 제압하면 당장 기선을 제압할 수 있소. 내 그를 상대하리다!”
레고타는 헥토르를 죽어도 막아야 했다.
그가 지쳐 있다면 이해나 하겠지만 호흡조차 고르지 않은가.
‘전혀 지친 기색이 아닌데 섣불리 나섰다가 무슨 변을 당하려고…….’
레고타는 머리가 다 지끈거렸다.
일 왕자도 말려야 하며, 이렇게 많은 인원이 제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것 또한 추궁해야 했다.
또 지휘가 부족한 일 왕자를 대신해 진두지휘까지 맡아야 하니 울화통이 터질 지경이었다.
‘어쩌다 일이 이렇게 엉망이 되었는가? 서둘러 진열을 정비하여 저들을 물리쳐야 하거늘, 국왕께서 이 같은 일을 아신다면 필히 진노하실 것이다. 그렇다면 일 왕자를 왕세자로 책봉하는 일 또한 어려워진다.’
모든 상황을 파악하고는 있지만 무엇 하나 손댈 수 없는 사안이었다.
저들의 무력을 감당하기 어려웠고 일 왕자 헥토르는 헥토르대로 미쳐 날뛰려 하고 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무력에서 밀려 버려 하나 둘씩 진열을 벗어나는 무리까지 생겨나기 시작했다.
이대로 두면 아무리 수가 많다고 하더라도 대패를 하게 될 것이었다.
끔찍한 미래가 머릿속에 그려졌다.
그에게 다행인 일이 있다면, 정중앙을 담당한 국왕군 또한 그리 사정이 좋질 못하다는 점이 될 것이다.
* * *
이 왕자 유프라의 군대와 대치하고 있던 보탄 백작은 샤르트에게 특별 임무를 부여했다. 바로 파르티잔을 생포하라는 명이 그것이었다.
오딘 님이 파르티잔을 일부러 풀어줬다는 얘기는 이미 들어 알고 있었다. 그러나 파르티잔을 잡을 때마다 장난을 치실 것이라는 얘기 또한 알고 있었다.
그를 잡아 작은 기쁨이라도 드린다면 보탄은 크게 만족할 수 있을 것 같아 이런 명령을 내리게 된 것이다.
샤르트는 날랜 말에 올라 파르티잔이 있을 곳을 향해 내달렸다.
그 점이 더 리먼을 의심케 했다.
‘저놈이 아레인 왕국에 중요하긴 한가 보군. 연유야 어찌 되었건 그를 잡으러 범상치 않아 보이는 기사가 나오질 않는가.’
파르티잔은 멀리 도망치지 못하고 리먼의 수하에게 붙잡혔다.
그와 실랑이를 하고 몸부림을 치는 과정에서 재갈이 운 좋게 떨어졌지만 기뻐할 게 못 되었다. 아직도 두 팔은 등 뒤로 묶여 있으므로.
‘믿을 건 두 다리밖에 없다.’
그 생각으로 파르티잔은 한계를 뛰어넘었었다. 그러나 아주 잠시 잠깐이었다. 곧 저들의 손에 붙들렸으므로.
다시 저들의 진영으로 향하게 되려는 찰나, 가늘고 긴 파공음이 귀에 들렸다.
피잉.
그 소리는 곧 둔탁한 소리로 뒤바뀌었다.
퍼억!
자신을 붙잡아가던 기사의 몸이 허공으로 솟구쳐 잠시 날아오르더니 뒤쪽에 꼬꾸라졌다.
파르티잔은 그가 화살에 당했단 것을 간파했고, 그 화살을 쏜 이에게 시선을 돌렸다.
말에 올라 이쪽으로 질주해오고 있는 것은 보탄 백작의 기사단장 샤르트였다.
더 생각하고 말 것도 없었다.
잠시 자유로워진 파르티잔은 다시 자신의 두 다리를 믿어야만 했다.
재깍 몸을 돌려 달아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진로를 마음대로 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쓰러진 기사를 대신해 다른 기사들과 병사들이 득달같이 달려들어 자신을 잡아가려 했으므로.
‘잡히면 모든 게 끝장이다!’
도주하는 자와 그를 잡으려는 자들.
일이 묘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유프라 진영에서 리먼이 보낸 자들이 적지 않았던지라 보탄 역시 샤르트의 뒤를 받쳐 줄 정예들을 내보냈다.
곧 전쟁이 터질 곳에서 난데없는 술래잡기가 벌어져 우스꽝스러운 광경이었지만 누구도 웃지 않았다.
저들과 거리가 가까워지며 샤르트는 활을 등에 걸고서 검을 빼들었다.
리먼의 수하들이 그를 막기 위해 달려들었지만 무리한 일이었다.
샤르트의 검이 궤적을 그리며 이리저리 휘둘릴 때마다 리먼의 수하들은 맥도 못 추고 꼬꾸라졌다.
삽시간에 5명이 피를 뿌리며 차가운 바닥에 몸을 드리웠다.
리먼 백작의 눈살이 절로 찡그려졌다.
더 많은 수의 병력들이 샤르트와 파르티잔을 향했다.
그러는 동안 보탄 백작 역시 사람을 더 보냈다.
참 어이없는 상황이었다. 파르티잔을 주축으로 일이 커지고 있으니 말이다.
그럴수록 리먼은 그가 매우 중요한 존재라는 것을 깨달아가는 중이었다.
‘저놈이 대체 뭐기에 사람을 저리 많이 보내는 것인가?’
무리도 아니었다. 보탄은 아예 병력 전체를 들이붓는 중이었다.
그리고 자신도 그에 가담하고 있었다.
아레인 왕국을 빌미로 전쟁이 벌어지는 것이 아니라 파르티잔을 빌미로 전쟁이 벌어지게 된 것이다.
당사자인 파르티잔은 황송하기는커녕 환장할 지경이었다.
‘이놈들이 아주 날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구나.’
살기 위한 도주였음에도 그는 닿을 듯 말 듯했다.
바리톤 병사의 손에 뒷덜미가 잡힐 뻔했는가 하면 샤르트 경의 손에 소매 깃이 잡혔다가 바리톤 기사의 방해를 받고 풀려나기도 했다.
말 그대로 개판이었다.
결국에 가서는 모든 인원들이 파르티잔에게로 집중되었다.
“매우 중요한 놈이다! 결코 놓쳐서는 안 된다!”
“오딘 님께 선물로 드릴 것이다! 그를 꼭 생포해야 한다!”
리먼 백작과 보탄 백작.
한쪽은 전투에서 더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기 위해!
다른 한쪽은 한 사람을 기쁘게 만들기 위해!
둘은 목적이야 달랐지만 원하는 것은 같았다.
뺏고 빼앗기는 싸움이 계속되었다.
전투의 핵은 바로 파르티잔이었다.
유프라 역시 이리저리 몰려가는 사람들을 보며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이,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 * *
가인은 적지 않게 바리톤의 전력을 축내었다. 그러나 보병들이 문제였다. 쉬지 않고 달린다는 것은 체력에도 무리가 오게 마련이다.
특히나 일월진에서 수련을 하지 못했던 병사들이 그에 해당했다. 그래서인지 가인은 동료 지휘관인 헤르에게 말했다.
“이쯤에서 돌아서 크게 한번 전투를 벌입시다.”
“그 말을 기다리고 있었소이다!”
둘의 지휘에 퇴각하던 병력들이 돌아서며 대단위의 전투가 벌어졌다.
실력으로 따지자면 아레인 왕국이 몇 수 위였다.
그러나 저들의 인원은 감히 무시할 수준이 못 되었다.
쓰러뜨리고 또 쓰러뜨려도 끊임없이 몰려왔다.
이 자리에 있는 아레인의 병력들이 모두 정예였다면 간단히 끝날 싸움이지만 정예들은 소수였다.
그러니 퇴각을 했으며 작전을 짜야 하는 것이다.
기회를 봐서 다시 퇴각을 결정할 가인이었다. 또한 헤르 역시 그 말이 올 것을 예상하며 대기하는 중이었다.
그때 멀리서 괴성이 터졌다.
“크워어어어~!”
흡사 몬스터를 예상케 하는 소리.
아레인의 병력들은 그것이 무엇이라는 것을 대부분이 직감하는 것에 반해 바리톤의 병력들은 그렇지 못했다.
그 대상이 가까워지며 수레바퀴가 바닥을 구르는 소리까지 들려왔다.
가인과 헤르는 침을 꿀꺽 삼켰다.
“구, 군대를 물려주십시오!”
떨리는 목소리의 주인은 아론.
이런 일이 처음인지라 긴장한 탓이었다.
미리 오딘에게서 말이 있었던 터라 아론의 명령이 떨어지기 무섭게 가인과 헤르 두 지휘관들은 서둘러 병력을 철수시켰다.
“무조건 퇴각하라! 명령이 있기 전까진 뒤를 돌아보지 말고 달아나야 한다!”
두 지휘관들의 군대는 두 갈래로 갈라져 빠른 속도로 퇴각하기 시작했다.
바리톤 왕국의 군대는 태반이 그들을 쫓으려 했는데 상당수가 그러지 못했다.
한 남자, 아니 괴물과 마주하게 되어서이다.
우락부락한 근육을 가진 거구의 사내.
핏발이 이리저리로 곤두서 당장에라도 터질 것 같아 보였다.
사람의 형상을 하고 있지만 눈구멍에서 빛을 발하는 괴물이었다.
마나들이 흘러넘쳐 신체 주변에 아지랑이가 피어났다. 한 팔에는 거대한 검이 들려 있었고 그 검에는 가공할 마나들이 뭉쳐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속박에서 풀린 광전사 마타하리였다.
* * *
바리톤 국왕 로테노아는 기겁을 하고 있었다.
한 남자의 등장이 자신을 이리 놀라게 할 줄은 진정으로 몰랐었다.
피에 굶주린 악마!
그것이 로테노아가 보는 남자에 대한 소감이었다.
“뭐, 뭐냐? 저놈은 대체 무엇이냐?”
비단 그만이 놀라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근방의 귀족들 역시도 잔뜩 움츠러들어 있었으므로.
그의 손속은 너무도 잔인했다.
인간을 종잇장 찢어버리듯 갈라놓는 거대한 검. 그리고 손에 잡히는 것들을 허공으로 모조리 날려 버리는 무시무시한 괴력.
밖으로 밀려나온 마나 덩어리로 인해 검은 웬만한 사람의 키만큼이나 길어졌다.
그에 닿는 모든 것이 잘려져 나갔다.
그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 바위 뒤에 다급하게 몸을 숨겼던 기사 역시 바위와 함께 양단되어 땅에 몸을 뉘었다.
쿠콰쾅!
오로지 그를 쓰러뜨리기 위해 작당을 하고 몰려든 무리 쪽으로 마나 덩어리가 쏘아지며 일으킨 폭발이었다.
몰려 있던 예닐곱의 사람들이 피떡이 되어 처참하게 널브러졌다.
그로도 모자라 바닥에는 거대한 구덩이가 형성되었다.
마타하리는 저들에게 충분한 공포를 심어주고 있었다.
얼마나 놀랐는지 눈도 못 감고 죽은 자들도 태반이었다.
보통 때 같았으면 귀족들이 자신들의 기사를 내어서 제압하겠다고 했을 것이다.
그러나 저자는 아니었다.
그에게 간다는 것 자체가 자살 행위였다.
한쪽에서 탄식이 들려왔다.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저 광인은 소드마스터입니다.”
그 말에 여러 귀족들이 흠칫 놀랐다.
마스터가 무엇인가.
검술을 사용하는 자들의 정점에 올라 있는 자들을 소드마스터라 일컫지 않던가.
불행하게도 바리톤 왕국에는 소드마스터가 단 한 명도 없었다.
하지만 바리톤 국왕은 소드마스터를 목격했던 일이 있었다.
때문에 들려오는 말에 버럭 성을 냈다.
“누가 마스터임을 몰라서 묻는 소리인가? 어디서 저런 광인이 튀어나왔냐는 말이다!”
당장에 불행을 지켜보다 보니 귀족들의 체면을 생각해줄 여력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 말에 누구도 답하지 못하였다. 꿀 먹은 벙어리들처럼 조신하게 굴 뿐이었다.
삼 왕자 팔테스 역시 반신반의하며 의문을 품고 말았다.
‘그, 그래도 우리가 지진 않겠지? 저런 놈은 단 한 명이잖아? 이 많은 인원이 그를 어쩌지 못하는 건 아닐 거 아냐. 저자도 사람일 것이니 언젠가는 지쳐 쓰러지겠지.’
밑도 끝도 없는 바람이었다.
하지만 그가 보는 소드마스터가 그리 체력이 빈약하지는 않았다.
그 때문에 죽은 자들이 졸지에 수십에 달하여 기사들이라 할지라도 감히 다가갈 엄두를 못 내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었다.
마타하리는 눈에 보이는 자들 모두를 적으로 인식했기 때문이다.
“화살을 쏘아라! 화살을 쏘아 저자를 꿰어버려라!”
어디선가 명령이 들려오고 화살들이 그를 향해 날았다.
이는 아군을 배려치 않은 행동이었다.
그 까닭에 애꿎은 아군들부터 죽어나갔다.
아군들이 쓰러지며 주위에 방해물들이 없어지자 화살들은 곧장 마타하리를 향해 날아갔다.
퍼퍼퍼퍽!
단지 그뿐이었다.
크게 먼 거리에서 쏘지 않았음에도 화살들은 그의 몸에 부딪혀 바닥으로 떨어지거나 단단히 박히질 못하고 살집에 겨우 꽂혔는지 대롱대롱 흔들렸다.
놀라움들은 경악으로 뒤바뀌었다.
로테노아 역시 의문을 금치 못했다.
‘소, 소드마스터가 저리도 대단한 것이었던가? 몸에 병장기가 먹히지 않을 정도로?’
확실히 의문이었다. 그가 봤던 소드마스터는 저렇게 강하지 않았으므로.
조금 전에도 용감무쌍하게 그의 뒤나 여러 곳을 점했던 기사들과 병사들이 그의 피부를 그었었지만 생채기도 내질 못하고 꼬꾸라졌었다.
로테노아는 목표를 제대로 찌르거나 베지 못한 것이라고 단정을 지었었지만 이번으로 인해 확신이 서게 되었다. 그들이 실수를 했던 게 아니라 저자의 몸이 강철같이 단단하여 병장기가 듣질 않았다는 사실을.
그때 로테노아의 근방에 있던 기사 둘이 말 옆구리를 발로 차며 마타하리를 향해 힘 있게 내달렸다.
“이럇!”
“이럇!”
그들은 굵은 밧줄을 쥐고 있었는데 서로 끝과 끝을 잡고 있었다.
이것으로 저자를 쓰러뜨릴 심산이었다.
확실히 훌륭한 계책이었다.
두 기사가 불같은 안광을 내뿜는 마타하리를 사이에 두고 스쳐 지나갔다.
분명히 밧줄은 그의 가슴팍에서 멈추었다.
하지만 예상은 어긋나고 말았다. 들려오는 것은 말들의 투레질 소리였다.
히히히힝!
바위에라도 부딪혔는지 말들은 도리어 뒤로 자빠져 버렸다.
말 2마리가 두 발로 서 있는 한 남자를 쓰러뜨리지 못한 것이다.
다시 이쪽에서 말에 오른 기사들이 연거푸 출진했다.
날랜 말을 이용해 저자를 교란시킬 작전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마타하리의 화를 돋우는 일밖에 되지 않았다.
마타하리의 벌려진 입에서 연기가 흘렀다. 그는 근처에 있던 말의 다리를 한 팔로 잡고 몸을 크게 회전시켰다.
그러자 말이 궤적을 그리며 돌기 시작했는데, 그 바람에 인근에 있던 2필의 말과 기사들이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나뒹굴었다.
마타하리의 손에 발목이 붙들린 말은 무서운 속도로 회전하며 바람 소리를 동반했다.
윙윙윙윙윙-!
의지와는 상관없이 빙글빙글 돌던 말은 로테노아의 본진 쪽을 향했다.
원심력이 더해진 육중한 몸무게의 말이 빠르고 무섭게 날아들었다.
상당한 거리였음에도 그 큰 말의 몸뚱이가 로테노아에게 근접하고 있었다.
기겁을 한 귀족들과 기사들이 미처 피하지 못한 왕을 보호하기 위해 앞으로 몸을 날렸다.
콰콰콰콰콱!
여럿의 기사들과 말들이 그 말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고 사방으로 나가떨어졌다.
그로도 모자라 안광에서 빛을 발하는 괴물이 로테노아를 향해 뚜벅뚜벅 걸어오고 있었다.
“폐하, 어서 이곳을 빠져나가셔야 합니다.”
너무도 놀라 얼이 빠졌는지 로테노아는 행동을 취할 생각도 잊어버린 채 그 자리에 굳어 있었다.
다행히 옆의 귀족이 일깨워줬으니 망정이지, 하마터면 저들과 같은 신세로 전락하게 될 뻔했다.
후발 부대가 받쳐 주지 않아 가인이라는 귀족 녀석과 대적하고 있을 병력들을 걱정할 여유는 사라지고 없었다. 또 금세 해치우고 저들을 쫓아가 요절을 내겠다는 바람 역시 사라진 지 오래였다.
단 한 명의 인간, 아니 인간일지 괴물일지 의심이 가는 존재가 던져 준 파장은 이토록 엄청났다.
서둘러 로테노아는 이 자리에서 내빼야 했다.
그에 그가 말을 돌리려 할 때 의아한 일이 일어났다. 공포의 장본인이 땅에 무릎을 꿇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