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운
“모두 퇴각하라! 퇴각하라!”
아레인 왕국의 국경을 수비하기 위해 급파되었던 국경 수비대의 대장은 크게 소리쳤다. 그도 그럴 것이 국경 수비대는 얼마 되지 않는 인원이었다.
저처럼 많은 대군이 몰려오는데 어찌 감당할까.
어림잡아도 족히 몇천은 되어 보였다.
놀라울 것은 이곳으로만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총 세 방면, 보급 부대까지 모두 합친다면 1만에 육박하는 병력이었다.
국경선 부근의 병력이 썰물처럼 빠지자 그를 보며 로테노아는 크게 웃었다.
이 전투에 로테노아가 직접 가담했다. 위엄을 높이기 위해, 더 많은 존경을 얻기 위해, 저들의 어리석음을 깨우쳐 주기 위해.
귀족들은 하나같이 그를 높이 사고 있었다.
로테노아가 정벌에 가담하게 된 이유가 더 있다면 이방인 녀석의 낯짝을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감히 자신의 핏줄을 타고 태어난 삼 왕자를 핍박한 놈 말이다.
“도망치는 꼴이 가관입니다.”
“하하하!”
귀족들이 왕과 왕자의 기분을 맞춰주려 웃고 있었다.
로테노아 역시 미소를 머금었다. 가소로운 것들이라고 생각하며 말이다.
바리톤 왕국의 로테노아 국왕에게는 3명의 아들이 있었다.
첫째가 헥토르, 둘째가 유프라, 셋째가 팔테스였다.
이 세 왕자들은 성격도 달랐고, 능력 또한 달랐다.
일 왕자인 헥토르는 너무 강직한 성격이었던 것에 반해, 이 왕자 유프라는 정이 많고 성격도 부드러워 타협이라는 것을 중시하는 인물이었다.
마지막으로 삼 왕자 팔테스는 둘의 장점을 모두 갖추고 태어났다.
단, 한 가지 단점이 있었다.
막내로 자라서 그런지 왕과 왕비에게 의지하는 경향이 짙었던 것이다.
근래 들어 그나마 기를 펴려고 하여 로테노아는 더 많은 점수를 주게 되었다. 아레인 왕국에 사신으로 보낸 것 역시 배짱을 키워주기 위해서였다.
로테노아 자신이 아직 젊어 때가 아님에도 미리 점수를 매겨 놓는 것이 옳았다. 하나, 아레인 왕국에 가서 기가 팍 죽어서 오게 된 것이다.
오딘에게 줘터진 삼 왕자 팔테스 역시 로테노아의 옆에서 나란히 말을 몰아나갔다.
팔테스의 표정은 내내 침중해 보였다.
로테노아가 표정을 살피자 팔테스는 애써 덤덤한 척을 했다.
“그 녀석은 특별히 너에게 주마.”
본인은 허락도 하지 않았는데 로테노아는 멋대로 오딘을 그에게 주겠다는 약조를 해대는 중이었다.
그래서일까? 팔테스의 표정이 조금이나마 밝아졌다.
로테노아는 근방의 귀족들도 들으란 듯이 위엄을 담은 목소리로 호기 있게 말을 내뱉었다.
“실로 이해가 가질 않는 일이로다. 저렇게 겁이 많은 녀석들이 어찌하여 짐을 적으로 돌렸을꼬?”
본래 아레인 왕국과 바리톤 왕국은 마찰이 극히 적었다. 힘의 우위가 쉽사리 점쳐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근래 들어 아레인 왕국은 로테노아의 말대로 두 번의 전복을 하였고 적잖은 손실을 입었다.
그러니 넘볼 수도 있는 것이다. 자고로 세상은 힘의 크기에 따라 돌아가는 법이므로.
상대가 자비로움을 베푸는 경우보다 괴롭히고 약탈을 가하는 경우가 훨씬 많았다. 사람은 이익 앞에선 악해지기 마련이다.
양의 탈을 쓰고 괴롭히건, 아니면 이를 드러내고 괴롭히건 간에 말이다.
억울하다면 강해져야 했다.
물론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었다. 진정 성군이라면 약자를 배려하는 태도도 보였으므로.
인간이 무한의 삶을 살 수 없는 까닭에 정세 또한 변하기 마련이다. 강자에 짓밟혀 눌리거나 남에 의해 권리를 침탈당하지 않으려면 힘을 길러야 한다.
그런 면에서 보자면 지금 로테노아는 강자 측에 속했다.
자신이 그렇게 믿었다. 그러니 이렇게 대놓고 침략을 하는 것이 아닌가.
삼 왕자를 통해 여기에 명분 또한 생겨 버렸다.
일체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땅은 더 넓어지고 가진 것은 더 많아질 것이다.
‘삼 왕자의 일은 조금 안되었다만 차라리 잘된 일일 수도 있겠군. 바리톤 왕국은 지금보다 훨씬 거대해질 것이다.’
야망이 꿈틀거리는 순간이었다.
* * *
발데르가 자신을 따를 군사를 편성하는 중에 켈타스 후작이 다가와 면담을 청했다.
“긴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의아한 낯빛으로 발데르는 하던 행동을 멈추고는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
“말해보게.”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다. 코앞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가까이 있는 병사들과 기사들을 보며 켈타스는 어려워했다.
“저 여기서는 좀…….”
“그럼 자리를 옮기지. 아직 시간이 남았으니. 준남작 자네가 대신해주고 있게.”
크레멘은 기꺼이 허리를 숙이며 기대에 호응하는 태도를 내보였다.
“그리하겠습니다.”
왕성 안은 다소 부산스러웠다. 발데르와 보탄을 위시한 여러 귀족들이 전투병 편성에 여념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한적한 곳을 찾는 데 시간을 허비해야 했다.
생각해낸 게 후원이었던지 그쪽으로 걸음을 옮기려는 도중 발데르의 제지가 있었다.
“후원엔 여왕 폐하께서 계실 것이네. 그냥 여기서 얘기하면 안 되겠나? 주변엔 들을 사람 또한 없는 듯하니.”
듣고 보니 맞는 말이어서 켈타스는 그제야 걸음을 멈추고는 얘깃거리를 꺼내었다.
“공작께서도 알고 계셨던 것이지요?”
뜬금없는 물음. 발데르는 자연 되묻고 말았다.
“무얼 말인가?”
“아까 오딘 님께 드렸던 말씀 말입니다. 그것은 제라드 백작을 괘념하신 것 아니었습니까?”
조금 전 일이라 기억 못할 부분이 아니었다.
“제라드 백작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인가?”
켈타스의 표정이 굳어졌다. 헛발을 짚었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어서이다.
발데르의 눈이 묻고 있는 듯하다. 지금 무슨 소리를 늘어놓는 것이냐고. 꼭 그런 시선을 건네지 않아도 켈타스는 얘기할 작정이었다.
“그는 억울하게 누명을 썼습니다. 하인리히를 따르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왕권이 뒤바뀌었을 때 왕성 내에 감금당한 것이나 다름없다고 보시면 됩니다.”
이 같은 얘기는 발데르에게 충격으로 다가왔다. 아닌 말로 그 역시 의아하게 생각하던 부분이었지 않은가.
꼭 켈타스가 아니었다고 해도 제라드는 그가 잘 아는 귀족 중의 하나였다. 그러나 왕권이 바뀌어 연락 두절이 되었고, 왕성 내에 거주하고 있다고 들었으니 오해를 하여 그 역시 상종 못할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왜 믿었던 사람에게 등을 떠밀리면 배신감은 배가 된다지 않던가.
그 때문에 발데르는 그와 눈도 마주치지 않았었다.
켈타스는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일전에 공작께서 절 데려오셨을 때 저도 그를 데려오고픈 마음이 가득했습니다. 하지만 그럴 여건이 되질 못했습니다. 잘못이 있다면 그때 말씀을 드리지 못한 제가 잘못입니다.”
그 입장도 이해가 갈 만했다. 근래까지도 후작은 계속 미안한 빛을 떠올렸지 않은가.
그러나 발데르는 의문부터 던졌다.
“그 말이 사실인가?”
전적으로 믿어줄 순 없는 얘기다. 한 사람의 말만 믿고 판단하는 것은 때로는 어리석음으로 남기 때문이다.
“제가 거짓을 말해 무얼 하겠습니까? 파벌을 만들 거라고 오해하고 계신 거라면 제발 그러지 말아주십시오.”
켈타스의 표정이 조금 불쾌해지자 발데르는 사과부터 했다. 그가 아는 켈타스는 그럴 사람이 아니었기에.
“내 잘못했네. 난 단지 사실을 알고 싶었을 뿐이네. 그러나 이미 유배령이 떨어졌질 않은가. 이 일을 결정한 사람은 내가 아니라 오딘 님일세. 자네도 알고 있질 않은가.”
“그래서 말씀을 드리는 겁니다. 공작께서도 아시다시피 그분은 아직 절 못 미더워하십니다. 제 의견이 어디 먹히기나 하겠습니까. 제가 골백번 청을 올리는 것보다 공작께서 한마디를 해주시는 게 나을 듯합니다.”
틀린 말이 아니었다. 하지만 발데르는 그의 요구를 수락해줄 수 없었다. 보탄과 마찬가지로 오딘에 대해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이 바로 발데르였다.
“내가 아는 오딘 님은 명확한 분이시네. 때로는 치기 어린 장난도 치시고 때로는 엄하시지. 자연히 켈타스 자네가 알고 있는 사실을 나를 통해 얘기가 흘러든다면 그분은 불쾌해하실지도 모르는 일이네. 그러니 자네가 직접 말을 하게.”
켈타스는 맥이 쭉 빠지는 것 같았다. 이래서야 이때껏 얘기한 보람이 없질 않은가.
축 처진 그의 어깨를 발데르가 두 팔로 잡고 말했다.
“서운하게 받아들이지 말게. 오히려 그분은 자네가 오는 것을 바라고 계실지도 모르네. 마음이 진실하다면 지금이라도 가보게.”
결국 켈타스는 오딘에게 독대를 청했다.
긴장이 돼서 입 안이 달싹달싹 마르고 식은땀이 흐르는 것 같았다. 안색마저 창백해져 꼴이 말이 아니었다.
2명의 왕을 모셨었지만 이 정돈 아니었다.
주위의 분위기도 그에 일조했다. 신처럼 그를 떠받들고 있으니 경외심은 더욱 커지는 것이다. 하물며 자신보다 고위직에 있는 발데르 공작 역시도 그러하니 어쩌겠는가.
너무 긴장을 하고 있는 그를 보며 오딘은 슬그머니 웃음이 나올 뻔했다.
그간 지켜봐왔었다. 다른 건 모르더라도 스스로 바른길을 찾아 동화되려는 모습은 나쁘게 보이지 않았다.
사실 이전에 발데르가 왕성을 장악했을 때 켈타스가 그분께 자신을 잘 말씀드려 달라고 말을 꺼낸 적이 있었다.
그에 발데르는 그대로 오딘에게 전했지만 곧바로 그의 말은 묵살되었다.
“볼일이 있으면 직접 오라고 그래.”
이 사람 저 사람 통하는 게 영 못마땅한 까닭이었다. 더불어 발데르까지 질책 어린 시선을 받아야 했었다.
그러나 오늘 오딘은 다른 태도를 내보였다.
“그래, 용건이 뭐지?”
“다, 다름이 아니옵고 신이 감히 청을 올리고 싶어 무례를 무릅쓰고 이렇게…….”
말이 이상하게 꼬여 가고 있었다. 너무도 긴장한 탓이다. 자신이 한심하고 부끄러워 보였다.
그럼에도 오딘은 꾸지람을 놓지 않고 그의 말을 경청해주었다.
“청이라……. 그래, 무엇인지 말해보라.”
차분한 오딘의 말을 듣고서야 겨우나마 수습이 되었던지 켈타스는 용건을 꺼내었다.
“제라드란 자가 있습니다. 저도 알고 발데르 공작…….”
발데르의 이름이 나오자 오딘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갑자기 분위기가 이상해지자 켈타스는 순식간에 혼란에 휩싸였다.
‘왜지? 왜?’
오딘은 말을 아끼려다 생각을 접고 그를 나무랐다.
“왜 그 이름을 들먹이는 것이냐. 너의 청이라고 하질 않았느냐. 그 녀석의 이름을 꺼내 환심이라도 사려는 것이냐?”
그때서야 켈타스는 자신의 어리석음을 깨우쳤다.
“신이 어리석었사옵니다. 무능함을 꾸짖어주시옵소서.”
“되었다. 마저 얘기를 꺼내보라.”
오딘의 말에 그는 정신을 바짝 차리고 마저 말을 이어나갔다. 아까 발데르에게 설명 못했던 부분들까지 섞어서 마치 굉장한 사람 하나가 죽게 되었다는 것처럼 얘기하고 있었다.
“…제라드는 아까운 충신이옵니다. 일전에 반란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유뱃길에 올랐습니다. 부디 재고하여 주시오면…….”
“발데르와 보탄을 불러오도록 하라.”
종잡을 수 없는 사람이었다. 조금 전에는 그들을 빼고 얘기한다고 하질 않았던가.
그러나 오딘은 그래야 했다. 한 사람의 말만 듣고 상황을 판단할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결국 궁내부원이 두 사람을 불러와 켈타스는 조금 전에 했던 말을 다시 되풀이해야 했다.
그리고 두 사람의 의견이 들려왔다.
“저 역시 의아한 일이었사옵니다. 제라드 후작은 보기 드문 충신이었사옵니다.”
“제가 기억하기로도 그는 욕심이 없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런 사연이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켈타스는 가슴 한구석이 따뜻해지는 느낌을 받고 있었다. 저들도 그를 알아주니 기쁜 것이다. 이제는 저 위에 계신 분의 결정을 기다려야 했다.
내내 초조한 마음이 들었던 것이 사실이다. 앞서 2명의 왕을 모셔 보았지만 신하들의 의견이 무조건 받아들여진다는 선례는 없었기 때문이다.
정말 중요한 것은 왕의 결단이었다.
곧 오딘에게서 답이 들려왔다.
“그래.”
“네?”
“그러라고. 다시 불러들이면 되지. 그러라고 해라.”
화등잔 만하게 커진 켈타스의 눈.
이렇게 쉽게 요구가 들어질 줄은 몰랐다.
얼마나 어이가 없었던지 허탈하기까지 했다.
“서, 성은에 망극하나이다.”
그는 그렇게 읍을 하면서 지금 내려준 결정에 진심으로 감사를 표했다.
기쁘기도 하고, 얼떨떨하기도 한 것이 크게 나쁜 기분이 아니었다.
대전 안을 빠져나와서도 켈타스는 자꾸만 헛웃음이 나오려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그러면서도 저 안에 계신 분을 떠올릴 때는 자꾸만 기분이 좋아지려 하고 있었다.
* * *
좌측의 진군은 일 왕자 헥토르가 맡았다.
그는 일곱의 귀족들과 그들을 따르는 병력들을 모아 진군을 거듭해나갔다.
마지막으로 이 왕자 유프라가 다섯의 귀족들을 거느리고 우측의 길을 따라 서서히 아레인성을 향하고 있었다.
크게 내키진 않았지만 국왕께서 결정하신 일이었다.
‘좋게 말로 타일렀어도 되셨을 것을.’
물론 그 역시 삼 왕자 팔테스의 소식을 접했다.
하지만 공은 공이고 사는 사가 아닌가.
정녕 대의를 위한다면 더 큰 아량을 베풀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품었었다.
‘팔테스는 아직 어리다. 국왕 폐하의 뜻을 제대로 전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아주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근래 들어서 팔테스는 주위에서 치켜세워주자 점점 기가 살아 기고만장해지는 모습까지 보였었다.
아레인 왕국에 가서도 그런 태도를 보였다면 할 말이 없는 것이다.
사실 그랬지 않은가.
국왕은 팔테스의 말만 듣고 저들을 쳐 죽일 놈처럼 취급했다. 직접 욕을 담아 말하거나 한 것은 아니지만 눈빛이 그러했다.
“전쟁, 그리고 승리. 패배, 굴복. 또 많은 사람이 시름하겠지?”
동정이었다. 아레인 왕국에 대한 막연한 동정.
이런 모습 때문에 언젠가 로테노아는 그에게 크게 화를 낸 적이 있었다. 차라리 성직자가 어울릴 것이라고 다그쳤지만 타고난 성정은 바꿀 수가 없는 모양이었다.
일 왕자와 이 왕자에게 나눠진 병력만 보아도 이미 로테노아는 일 왕자를 더 중요시한다는 뜻과 같았다.
하지만 유프라는 그에 대해 서운하게 생각지 않았다.
죽고 죽이는 전쟁은 별로 달갑게 여기지 않았던 것이다.
유달리 부드러운 성격 때문인지 세 왕자 중에서 외모는 유프라가 가장 뛰어났다.
궁내엔 그를 좋아하는 시녀들도 꽤 된다.
그녀들의 말에 따르자면 유프라는 꽃미남에 비유할 수 있었다. 꽃처럼 아름다운 남자라고 해서 붙여진 별명이었다.
“생각 같아서는 회군이라도 하고 싶군그래.”
“그런 말씀 하지 마십시오. 국왕께서 들으신다면 진노하실 것입니다.”
바로 이자, 리먼 백작.
유프라의 전적인 힘이었다.
언제나 그의 편에 서주었고 성심성의껏 힘이 되어줬다. 국왕의 방패가 되는 것은 바로 리먼과 왕비였다.
그는 진심 어린 충언을 올리고 있었다.
“혹시 모르는 일입니다. 얘기가 새나갈 수도 있으니…….”
“아 참, 그렇지.”
유프라는 실수를 깨닫고 꽃처럼 아름다운 미소를 그렸다.
“그냥 농담이었어.”
새겨들었는지 유프라는 그렇게 말을 하고는 입을 닫았다.
그리고 근방의 경치를 둘러보며 서서히 진군하고 있었다.
우연찮게도 산을 내려오며 그들을 보는, 다리를 저는 남자가 있었다.
그는 대군이 아레인 왕국을 향해 나아가는 것을 보고 생각에 잠겼다.
“가만, 저놈들 뭐 하는 거야?”
뛰어난 머리 덕에 결론은 어렵지 않게 나왔다.
“설마 아레인으로 가는 거야? 그렇겠군, 그렇겠어. 두 번이나 무너졌던 왕국이니 욕심을 내는 것이로군.”
말을 하는 이는 파르티잔이었다.
다리 때문에 아직도 목적지에 도달하지 못하였다.
그간 마음고생이 심했던지 이마에 주름살이 하나 더 늘어버렸다.
병신이 되진 않았다. 마비가 슬슬 풀리며 상태가 조금씩 호전되고 있었으므로.
쇠침을 통해 오딘이 기를 불어넣었고 그 때문에 놀란 다리가 경련을 일으켰던 것이다. 아직 파르티잔은 오딘의 기를 감당할 수 없었던 탓이기도 하다.
멀리서 군대의 꽁무니를 보며 파르티잔은 혀를 끌끌 찼다.
“미쳤군, 미쳤어.”
그로도 모자라 조금 더 크게 소리를 냈다.
“아주 무덤을 파고 기어들어가는고만. 에라, 이 덜떨어진 놈들아!”
그만큼이나 저들이 너무 어리석어 보였다.
그러나 파르티잔이 실수한 게 있었다.
저들이 군대의 끝이 아니라는 점.
바로 그것이었다.
후발대에서 한 기사가 산 위에서 얼쩡거리는 노인네를 발견하게 되었다.
그는 곧 자신의 주군에게 일렀다.
“수상한 놈이 있습니다.”
리먼 백작이 보니 정말 그랬다.
“잡아오라.”
말이 끝나기 무섭게 기사는 말에서 내려 파르티잔을 향해 쇄도했다.
말발굽 소리와 병력들의 발소리에 파묻혀 그가 다가오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을뿐더러 파르티잔은 앞쪽의 군대에 눈이 팔려 있어 차마 그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아니, 알았다고 한들 발각이 된 이상 도망갈 도리도 없었을 것이다.
파르티잔은 곧 기사의 손에 붙들렸다.
“무엇이오!”
“네 이놈! 염탐꾼이렷다! 같이 좀 가야겠다.”
파르티잔은 기사의 손에 이끌려 억지로 산을 내려가야만 했다.
“이 손 놓으시오! 놓으란 말이오!”
파르티잔이 기사의 손을 떨쳐 버리려 두어 차례 팔을 저어댔다.
사실 그렇지 않아도 기사는 풀어줄 생각이었다. 이 많은 인원 앞에서 도망가기란 불가능에 가까울 것이므로.
그런데도 파르티잔은 몸을 돌려 갈 길을 가려 했다.
순간 여러 곳에서 병장기가 날아와 그의 몸 앞에서 멈췄다.
“허락이 있기 전엔 갈 수 없다.”
파르티잔은 현실을 직시해야 했다. 맹수한테 잡혔을 때는 원하는 먹이를 줘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던지 입을 열어 물었다.
“원하는 게 뭐요?”
리먼 백작은 가만히 파르티잔을 쳐다보았다.
역시나 그에게도 같은 느낌이 들었다.
“왜 몰래 훔쳐보고 있었나?”
“‘몰래’라니? 난 그냥 지나가는 길이었을 뿐이오.”
사실을 말하고 있음에도 때가 때인지라 파르티잔은 철저히 오해를 받고 있었다.
리먼 백작은 사람을 시켜 그를 이 왕자에게 보내기로 마음먹었다. 그렇게 하는 게 도리일 것 같았기 때문이다.
결국 파르티잔은 유프라에게로 끌려갔다.
한 미남자가 파르티잔 자신을 보고 있었다.
‘얼굴만 번지르르한 녀석이로군.’
본래의 파르티잔이라면 굽실댔을 것이다. 하나, 지금은 아니었다. 세상 시름 다 겪고 고난을 헤쳐 나갔기에 그는 강인해져 있었다.
물론 마음만 말이다.
이들 앞에서 하나 기죽을 게 없었다. 자신은 떳떳했고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으므로. 산 위에서 내뱉은 말을 들은 것도 아니지 않은가.
결백을 주장하면 풀어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잠시 진군이 멎었다.
“이 사람은?”
유프라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묻자 파르티잔을 데려온 자가 아뢰었다.
“수상한 자이옵니다. 산 위에서 저희의 동태를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해서 리먼 백작이 왕자 전하께 보내라 하였습니다.”
기가 찰 노릇이었다.
“이보시오, 나는…….”
무서운 눈초리들이 한데로 모아져 자신을 지켜보고 있었다.
특히나 곱상한 외모의 옆에 서 있는 남자의 시선이 그러했다. 당장에라도 씹어 먹을 것 같은 시선을 보내고 있질 않은가.
저들의 시선은 적대적이다.
‘감정 따위에 치우쳐 얘기한다면 더한 오해를 받게 될 것이다.’
마음을 다독이고 파르티잔은 오해를 풀기 위해 차분히 입을 열었다.
“이 근방을 지나던 중이었소. 보면 알겠지만 다리도 불편하오. 동태를 파악하려고 했다면 몸이 날랜 기사나 실력이 뛰어난 마법사를 보낼 일이지, 왜 힘도 없는 노인을 보내겠소? 잘 좀 생각해보시구려.”
귀가 얇은 유프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충분히 수긍하겠다는 의미였다.
놓아주라는 말을 하려 했으나 옆에 있던 리먼 백작이 먼저 노성을 터뜨렸다.
“닥쳐라, 이놈!”
그는 파르티잔의 의견을 받아주되 절대 넘어가지 않겠다는 강경한 의지를 내비치며 입을 열었다.
“내 모를 줄 아느냐. 네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수 없다. 부러 우리 눈을 속이려는 수작이 아니냐.”
유프라가 백작의 말을 들으니 또 그런 것 같았다. 다리가 아픈 노인이라면 달리 경계하지도 않을 것이니 틀린 말도 아니지 않은가.
사실을 눈으로 확인하지 못하는 이상 이렇다 할 결론을 내리기가 힘든 상황이었다.
유프라가 또 노인을 보았다.
“왜 내 말을 못 믿으시오. 난 결백하단 말이오.”
리먼은 땅에 서 있던 병사들을 향해 명령을 내렸다.
“저놈을 털어보아라.”
그러자 병사들이 파르티잔에게 다가서 몸을 수색하기 시작했다.
파르티잔은 짜증나는 눈으로 백작을 마주 보았다.
‘흥, 이놈. 내 몸을 뒤져서 나올 게 있을까 보냐? 빈털터리로 나왔단 말이다.’
따지고 보면 다행인 일이었다.
그래서인지 파르티잔은 더욱 떳떳한 표정을 지을 수 있었다.
그때 한 병사가 파르티잔의 옷 안감을 뒤집어 보이며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이, 이것은!”
차마 생각하지 못한 것이었다. 여태 옷을 입었어도 신경 쓰지 않았던 부분이었다.
그것은 아레인 왕국을 대표하는 표식이었다.
바늘로 떠서 새긴 글씨.
<아레인>
생산지를 나타내는 글자다.
백작의 앞으로 끌려갈 때 파르티잔은 사색이 되어버렸다.
“아레인의 직물이군. 이래도 아니라고 할 테냐?”
더는 부정할 수 없었다.
유프라 역시 속았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파르티잔 자신은 누구보다 떳떳했다. 옷을 샀다고 해도 될 일이었다. 그러나 어설프게 거짓을 얘기하다가 더한 오해를 사는 것보단 사실을 얘기하는 게 나았다. 진심은 통할 것이라 믿었기에.
“그렇소. 아레인에서 왔소. 그게 뭐 잘못되었다는 얘기요? 나도 아레인이 싫어서 온 것인데 왜 이리 사람을 괴롭히시는 게요?”
리먼이 눈썹을 모으고 물었다.
“싫어서 왔다고?”
“그렇소. 정말 끔찍이도 싫소. 이런 말까지 하기는 그렇지만 난 아레인 왕국 쪽을 향해 오줌도 갈기기 싫은 사람이오. 그렇지 않고서야 아픈 다리를 부여잡고 여기까지 온 이유가 무엇이겠소.”
“믿을 수 없다. 여봐라, 저자의 상태를 점검해보아라.”
“네.”
명령을 받은 마법사들이 파르티잔의 몸 상태를 점검하기 시작했다. 혹시 다리를 저는 것이 거짓이 아닐까 해서였다.
또 저들의 손이 몸을 더듬자 짜증이 확 치밀어 올라 파르티잔은 소리쳤다.
“놔두시오! 나라고 안 해본 줄 아시오? 내가 마법사인데.”
정말 큰 실수를 하고 말았다.
가끔 도를 넘은 감정은 일을 그르치고는 한다. 파르티잔처럼 영리한 사람이라고 해도 말이다.
마법사들은 그의 말도 듣지 않고 무차별적으로 힐링을 시전했다. 그러나 상태가 나아지지 않았다.
“이상합니다. 듣질 않습니다. 이자의 말이 사실인가 봅니다.”
“내 뭐랬소.”
파르티잔은 큰소리를 쳤지만 리먼은 기분 나쁜 웃음을 짓고 있었다.
“마법사라고 했겠다? 좋다. 지금까지의 네 말은 믿어주지. 하지만 우리와 같이 가줘야겠다. 널 데려가면 저들의 정보를 얻을 수 있을 듯하니.”
* * *
왼쪽의 공격을 담당한 헥토르는 못마땅한 심정을 드러냈다.
“이거야 원, 싸움을 할 수가 없군. 죄다 도망가 버리니.”
정말 그랬다. 그들이 오는 길목마다 마주치는 아레인국의 병사들은 하나같이 줄행랑을 쳤다.
“수도 얼마 되지 않는데 겁도 많은 모양입니다.”
“하하하하!”
헥토르는 말 위에서 고개를 젖혀 크게 웃었다.
한편으로는 걱정이 들었는지 그는 옆을 보좌하는 레고타 후작에게 자그마한 바람을 내비쳤다.
“출전을 했으면 공을 세워야 할 것인데. 분명 국왕께서 우리 셋을 모두 출전시킨 것은 떠보기 위함이 아니신가? 후작은 어떻게 생각하시오?”
“말씀은 하지 않으셨지만 속내는 그러실 것이옵니다.”
레고타는 정말 헥토르가 왕이 될 재목이라 믿고 있었다. 때문에 미리부터 그의 편에 선 것이다.
“기왕 이리될 것이라면 보다 많은 적과 마주쳤으면 좋겠는데, 그 누구? 발……?”
“발데르 폰 그라니트 공작이옵니다.”
“그래, 발데르. 그자가 내 상대가 되어주었으면 좋겠군.”
이미 얘기가 퍼진 상황이었다.
바리톤 왕국에서 그나마 신경을 쓰고 있는 자가 발데르 공작이었다. 일단 적은 수로 많은 수를 쓰러뜨렸다는 점부터 대단하질 않은가.
작금의 아레인 왕국에 가장 위협이 되는 존재가 있다면 그가 될 것이라고 이미 바리톤 왕국의 귀족들은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하오나 저들의 전력이 너무나 미비하니 먼저 출발하신 국왕 폐하의 군대에 무릎을 꿇을 수도 있을 것이옵니다.”
“쯧, 그리되면 안 되는데.”
이들은 정말 그렇게 될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했다.
그래서인지 헥토르는 더더욱 욕심을 부렸다.
“후작, 좋은 방책이 없으시오? 국왕께서 모든 일을 처리하신다면 내 이곳에 온 이유가 없질 않소.”
따지고 보면 그랬다.
로테노아가 이 같은 대군을 몰고 온 것은 저들로부터 힘의 차이를 실감하게 하여 겁을 줄 생각이었다. 어른을 몰라본 아이에게 따끔하게 훈계하듯이 말이다.
그러나 헥토르는 욕심이 많은 인물이었다. 더 큰 공을 세워 자신의 능력을 인정받고 싶었다. 아직 둘째와 셋째 사이에 저울질을 당하고 있다는 게 못내 마음에 걸리던 차였다.
후작이 입을 열었다.
“때가 되어보아야 알겠습니다. 저 역시 일 왕자께서 혁혁한 무훈을 세우시길 바라고 있습니다.”
“일단 서두르도록 하지. 늦지 말아야겠어. 우리가 속도를 낸다면 얼마의 활약이라도 할 수 있을 테니까.”
헥토르는 발데르의 목을 취할 생각이었다. 그러면 가장 큰 공을 세우는 사람이 자신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지금이 기회다. 셋째는 아직 어리고, 둘째는 유약하다. 이 전투에 우리 세 왕자를 다 출진시키심은 우리 세 형제를 저울질하기 위하심이 아니던가. 장래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으니 지금 점수를 따놓아야 한다. 가능하다면 그 녀석의 목은 내가 베는 게 낫겠지. 그리하면 내 입지를 확실히 굳힐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녀석과 마주치느냐다. 그는 필히 제일 위협이 될 중앙을 향해 나아갈 것. 한시바삐 움직여서 길목을 차단해야겠다. 어차피 누군가에게 죽을 것이라면 나 헥토르에게 대들어라.’
지금 그는 발데르를 자신의 희생양, 그 이상으로 쳐주지 않았다.
자비를 베풀 생각이라고는 눈곱만치도 없었는지 그의 입가엔 사악한 미소가 어렸다.
그 까닭에 조바심을 내어 진군의 속도를 높이는 헥토르였다.
* * *
아레인 왕성.
국경 수비대장이 한쪽 무릎을 굽혀 땅에 대고 아뢰었다.
“말씀대로 병력은 모두 물려 놓았습니다.”
“그래, 잘했다. 쓸데없는 피를 흘리게 할 순 없지.”
오딘은 그리 생각했다.
“가만, 총 세 방면으로 온다고 했었나?”
“그러하옵니다.”
이미 전반적인 보고는 들은 상황이었다. 지금도 수시로 정찰병들을 파견해 군대의 규모와 크기를 포함해 여러 세부 사항 등을 전해듣는 중이었다.
오딘은 귀족들을 둘러보았다.
“그럼 이쪽도 병력을 셋으로 나누어야겠군.”
말은 안 했지만 귀족들 모두 자신을 보내달라고 하는 눈치였다.
“모두 다 갈 순 없는 입장. 누군가는 남아서 왕성을 지켜야 한다. 후작이 그를 맡아줬으면 좋겠군.”
저들의 토벌에 빠지게 된 것에 대하여 싫은 내색을 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지목을 받은 켈타스 후작은 황망히 허리를 숙였다.
“명을 받들어 모시겠나이다.”
“왕성이란 나라의 상징이다. 혹시 모를 사태에 철저히 대비하도록.”
“염려 마시옵소서.”
오딘은 켈타스를 제외한 귀족들을 짝지어주며 우측은 발데르에게 총지휘권을, 좌측은 보탄에게 총지휘권을 주었다.
물론 가운데는 오딘이 되었다. 이에 대해 아무도 불만을 피력하지 않았다.
켈타스는 성을 나서는 보탄을 마중하며 아쉬운 속내를 드러냈다.
“나 역시 눈치는 있다네. 내 군대는 자네의 군대만큼 강하지가 않아. 크게 활약을 못할 바에는 차라리 왕성을 지키는 게 낫지.”
보탄이 뭐라 위로를 하려는 찰나, 켈타스가 선수를 쳐서 계속 말을 이었다.
“그래도 그분은 말일세, 뒷말을 해주시더군. 내 임무가 막중하다는 것을 느끼게 말이야. 나쁘지 않은 기분이었어.”
그제야 보탄이 답을 해주었다.
“조만간 그리되실 것이옵니다. 후작님의 군대 또한 강맹해질 것입니다.”
“그게 무슨 소린가?”
“발데르 공작님께 듣기론 왕성 인근에 오딘 님께서 여러 진을 설치하고 계신다고 들었습니다. 아마도 저희 모두를 강하게 만드시려는 모양입니다. 그 때문에 많이 지쳐 보이셨습니다.”
진을 만든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도 절대암흑마진의 일월진이 아닌가. 아무리 오딘이라 해도 이런 것을 여러 개 만드는 데 힘이 들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어쨌건 켈타스 후작에게는 너무나 반가운 말이었다.
“그게 정말인가?”
“제가 어떻게 거짓을 논하겠습니까.”
“고맙네, 고마워. 백작, 내 잊지 않음세.”
전쟁이 끝난 후 보탄은 백작이 되어 있었다. 작위는 물론 엘레느 여왕이 직접 하사했다고는 하나 이는 오딘의 뜻과 같았다.
켈타스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큰 소외감을 느껴 왔었다.
독대에 응해주고 요구를 쉽게 받아들여 준 덕분에 그나마 기분이 좋아졌지만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는지 아직 아쉬운 부분이 남았다.
그의 가문은 오랫동안 강력한 군대를 가졌었다. 오랜 역사 동안 반란을 진압할 목적으로 그래왔었고, 실제로도 반란을 진압한 사례가 있었다.
켈타스 역시 아직도 후작의 작위를 가지고 있지만, 지금 왕국 내에서 가장 약한 군대를 꼽으라면 자신의 군대가 되었다.
자신의 군대가 약해진 게 아니라 다른 군대가 강해진 것이다.
그러나 앞서 제라드 건을 꺼내어서 또 한 번 아쉬운 소리를 할 수도 없었던 찰나에 지금 보탄이 내어준 답은 큰 기쁨으로 와 닿았다.
설레는 아이의 표정만큼이나 그는 매우 들떠 보였다.
* * *
그들이 모두 나간 후에 대전 안에는 오딘과 궁내부 대신만이 남아 있었다. 대전 문은 활짝 열려 있었고 오딘도 나갈 채비를 하는 중이었다.
사삭!
그때였다. 대전 안에 비호같이 파고드는 인영이 있었다.
그 동작이 어찌나 빨랐던지 궁내부원들은 차마 그를 제지하지 못했다.
대전을 파고든 인영은 다름 아닌 조르바였다.
대상을 확인하고서 오딘이 의외롭다는 듯 물었다.
“응? 놀아달라고?”
궁내에 있던 사람들이 여기까지 그가 들어왔음에도 달리 제지하지 못한 까닭도 있었다. 오딘은 시도 때도 없이 그를 불러들였으므로.
조르바는 오딘의 앞에 멈춰서 다짜고짜 몸을 숙이고는 바짓가랑이를 잡고 매달렸다.
“저에게도 기회를 주지 않으시렵니까?”
정말 의외인 상황이었다. 지금 그가 하는 행동은 겁을 상실한 행동이었으므로.
앞서 파르티잔의 경우만 봐도 그러했다.
탈출만이 유일한 능사임을 느끼는 게 괴롭힘을 당했던 보통의 사람들이었던 데 반해 지금의 조르바는 이상하게도 그렇지 않았다.
그 때문인지 오딘은 잠시 생각에 잠겨야만 했다.
그러다 물었다.
“기회? 무슨 기회?”
“저도 왕국을 위해 일하고 싶습니다.”
그러다 조르바는 재빨리 말을 바꿨다.
“아니, 오딘 님을 위해 일하고 싶습니다.”
“지금도 하고 있잖아. 그게 왕국을 위한 거지. 왕성을 깨끗이 하고 내 눈도 편하게 해주고 있는데?”
조르바는 환장할 지경이었다.
이리도 사람의 마음을 몰라준다는 말인가?
실망을 제쳐 두어서라도 표정을 달리해야 했다. 오딘의 마음을 흔들려면 더욱더 애절해져야 할 필요성을 느꼈기 때문이다.
“모든 감정을 떨치고 어렵게 용기를 내었습니다. 과거를 뉘우치고 새 삶을 살고 싶습니다. 부디 아량을 베푸셔서 넓게 헤아려 주시옵소서.”
“넓게라…….”
정말 오딘은 한 번 더 생각해보는 듯했다.
“음, 그러면 식사 당번을 해보는 건 어떠냐?”
원래 마교 출신의 사람들은 괴팍한 성격이 많다. 자연히 집단 내의 분위기에 따라가는 것이다.
오딘 역시 꽤나 괴팍한 성격이었다. 한번 찍힌 놈들은 어지간해서는 용서를 하지 않는다.
차라리 죽이면 덜할 것이다. 그러나 오딘은 한번 찍힌 놈들은 두고두고, 오래오래 괴롭혀 주어야 흥미를 느끼는 인간이었다. 그러니 파르티잔과 조르바가 이렇게 생고생을 할밖에.
조르바는 대답이 없었다. 닭똥 같은 눈물을 바닥으로 뚝뚝 떨어뜨릴 뿐.
연극이 아니었다. 이렇듯 매몰차게 대하니 서러운 마음이 겹쳐 눈물이 나오게 된 것이다.
“어? 울지 말라고 했던 것 같은데?”
참 우습게도 조르바 역시 오딘 앞에서 엉엉 울었었다. 비참하고 창피한 꼴은 다 보인 것이다. 귀족이…….
오딘은 계속 다그쳤다.
“이 카펫 네가 청소할 거야?”
그래도 조르바는 눈물을 거둘 수 없었다. 팔뚝으로 몇 번 훔쳐 내기는 했지만 계속 쏟아지는 것을 어찌하란 말인가.
완전 애였다.
이 순간만은 맞는 한이 있더라도 진심을 보이고 싶었다.
그러면서도 마음속으로 직감하고 있었다.
“글렀구나. 피도 눈물도 없는 이 사람에게 그런 것을 바란 게 잘못이었다.”
속으로 해야 하는 말이었다. 하지만 슬픔이 앞서서인지, 그간의 심정이 괴로워서인지 판단력이 흐려져 모르고 독백을 해버렸다.
두 귀로 똑똑히 말을 전해들은 오딘은 버럭 성을 냈다.
“뭐가 어쩌고 어째?”
이미 틀려 버린 일.
맞을 때 맞더라도 조르바는 진심을 담아 속내를 들춰냈다.
“꿈이었습니다. 오래전부터 왕국을 위해 일을 하는 것이 꿈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왕궁에 왔는데, 지금 제 신세가 너무 처량합니다. 두서없이 말을 늘어놓아 죄송합니다. 흑흑.”
호흡을 겨우 가다듬고 그는 덧붙여서 입을 열었다.
“저 조르바, 그렇게 나쁜 놈은 아닙니다. 오딘 님과 악연으로 얽히고설켜 일이 그릇된 것이지, 결코 본의가 아니었습니다. 왜 이런 말도 있잖습니까. 환경이 사람을 만드는 것이지, 사람이 환경을 만드는 게 아니라고 말입니다. 강한 힘이 아니라면 환경을 뒤바꾸기 어렵다고 했습니다. 오딘 님은 그런 힘이 있으시지 않습니까. 저 조르바 마땅히 그에 따를 수 있습니다.”
다 틀린 말이 아니었다. 그리고 조르바는 정녕 진심을 담아 얘기하고 있었다.
진실된 마음이 강하다면 뜻이 전해진다는 말도 있다.
그러나 오딘에게는 아니었다.
“그러고 보니 넌 얼마 전 농땡이를 피운다는 소리도 있었어. 정신 상태가 해이해진 거야? 내가 조금 바쁘니 누가 이 녀석과 함께해줄래?”
“제가 하겠습니다.”
당장에 곁에 있던 기사가 대답을 하였고 조르바를 오딘에게서 떼어냈다.
조르바는 직감할 수 있었다. 지금의 일로 돌아올 것은 구타라는 걸. 그리고 함께해주라는 말은 그것을 지칭하는 것이라는 걸.
* * *
유프라 진영.
대규모의 병력이 아레인의 국경에 다다르고 있었다.
그럴수록 파르티잔의 얼굴은 샛노랗게 질려 갔다.
“나, 날 보내주시오. 제발…….”
거의 울먹이는 수준이었다.
“듣기 싫다!”
리먼 백작이 화낼 만도 했다. 파르티잔은 수십 번도 넘게 같은 소리를 반복했으므로.
절망이 커져 버린 까닭이었다.
그러나 백작과는 달리 유프라는 엄한 사람을 끌고 오는 것 같은 생각이 들어 미안한 마음이 드는 모양이었다.
“이유가 뭐지? 가서는 안 될 이유.”
침착한 목소리로 물었음에도 파르티잔은 성을 내며 되받아쳤다.
“댁들이 지금 누구에게 가는 줄 알기나 하슈? 악마요. 악마란 말이오. 악마에게 쳐들어간다니!”
이들이 하도 한심해서 하는 말이었다.
백작은 그 말을 믿어줄 수도 없고 들어줄 수도 없었다. 그저 말투를 문제 삼을 뿐이었다.
“네 이놈! 뉘 앞이라고. 말조심해라!”
“왜? 내가 틀린 말했수? 난 아레인 왕국 사람이지, 바리톤 왕국 사람이 아냐!”
리먼이 뭐라 한마디 쏘아붙이려는 것을 유프라가 제지시켰다.
파르티잔은 하늘이 야속했다.
억울할 만도 하질 않겠는가.
그 고생을 하며 여기에 도달했는데 생각지도 못한 이들의 손에 붙들려 다시 아레인으로 돌아간다니…….
모든 게 원점으로 돌아가게 된 것이다.
덧붙여 오딘은 보일 때마다 쇠침을 박아 넣겠다고 했었다. 확실히 그라니트성에서 도망친 후 목격했던 양피지에는 그렇게 적혀 있었다.
그건 분명 오딘의 글씨체였다.
다리가 불구가 될 뻔했다.
다음에 마주칠 땐 무슨 불상사가 일어날지 장담 못하는 상황이다.
그놈의 얼굴을 떠올리기도 싫었다.
극악한 짓거리들은 뭐 그리도 많이 아는지 하는 짓들마다 상상을 초월한다.
‘몸에 쇠를 박아 넣어 날 병신을 만들려는 수작이다.’
정말 파르티잔은 그리 생각하는 듯했다.
오딘이 아무런 설명도 해주질 않았으므로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몰랐다.
그런 까닭에 지금 파르티잔의 눈에는 뵈는 게 없었다.
그를 보는 유프라와 리먼 두 사람의 시선이 각각 달랐다.
유프라는 정말 악마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반면에 리먼은 무서워하는 사람이 있겠거니 생각할 뿐이었다.
둘에게 공통점이 있다면 그가 말한 악마가 누구인지 궁금해한다는 점이었다.
“그가 누구?”
“그가 누구… 냐?”
유프라와 리먼이 동시에 말을 하는 바람에 중간에 말이 잠깐 멈칫했다.
잠시 어색한 분위기가 되어버렸다.
그러나 파르티잔은 그들의 분위기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그들이 원하는 답을 줄 생각이었다. 그리하여 경각심을 일깨워주고 저들에게 회군을 하게 만들어야 했다.
지극히 기억하기 싫은 일을 떠올리며 파르티잔의 표정이 겁에 질려 갔다.
이윽고 두려움에 사무친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오딘이라는 자이외다. 검은 머리카락에 검은 동공의 이방인이오. 뚜렷하진 않지만 한쪽 이마 옆에 이상한 모양의 동물이 양각되어 있소. 화가 나면 꿈틀거리지. 당장에라도 뛰쳐나올 듯이……. 바람을 일으키오. 또한 검은 기운을 불러내지. 사람이라고 볼 수 없소. 그는 사람이라고 볼 수 없소.”
말은 와전되어 정말 오딘의 모양새가 괴물처럼 여겨지긴 했다.
파르티잔이 너무 겁을 집어먹는 바람에 두 사람에게 뜻은 전해주었다.
귀가 얇았던 탓에 유프라는 그자가 정말 악마의 탈을 쓴 인간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으나 리먼은 아니었다.
“흥, 흑마법사라도 되는 모양이로군.”
그에 응수해 파르티잔이 코웃음을 쳤다.
“흑마법사? 내가 마법사인데 그걸 못 알아보겠소? 절대 아니오.”
유프라가 놀라 물었다.
“흑마법사가 아닌데도 검은 기운을 불러내고 바람을 일으킨다고?”
“그렇소.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내 말이 결코 과장되지 않았다는 걸 깨우쳐야 하오. 사자의 입에 머리를 들이미는 것보다도 위험한 일이오. 어서 군대를 물리시오.”
주객이 전도되고 있었다.
누가 보았다면 이 군대를 총지휘하는 사람이 파르티잔이라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만한 상황이었다.
꼭 그런 이유가 아니라도 리먼은 충분히 성이 나 있었다. 괜한 공포심을 조장시켜 분위기를 흐리고 있질 않은가.
결국 또 한 번의 노성이 터졌다.
“네 이놈! 대체 무슨 수작이냐? 설마하니 아레인이 불리하다는 것을 알고 군대를 물리게 하려는 수작이렷다!”
보통 사람 같았다면 말문이 막혔을지 모른다.
하지만 파르티잔은 그에 답할 재간이 있었다.
“왜 진실을 못 보는 거요? 그럼 날 풀어주면 될 거 아니오! 그럼 당신들이 가든 말든 아무 상관 안 하겠소!”
확실히 파르티잔의 목소리가 더 컸다.
듣고 보니 틀린 말도 아니었다.
말이 이렇게 되어버리자 유프라가 도리어 오버했다.
“그가 하는 말이 틀리지 않은 모양이니, 진지하게 생각해봐야 할 것 같아. 잠시 군대를 물리고 국왕 폐하께 말씀을 드려야 하지 않을까?”
질문을 받은 리먼은 속으로 탄식하며 분노의 화살을 노마법사 파르티잔에게로 돌렸다.
“네놈이 이 왕자 전하께서 마음이 여리시다는 것을 알고 허언을 하여 심란하시게 만드는구나. 오래 살고 싶다면 당장 그만두는 게 좋을 것이다.”
사실 알고 있지 않았다.
지금 리먼이 하는 말을 들어보니 정말 그런 것 같아 파르티잔은 유프라를 향해 또박또박 말을 내뱉었다.
“잘 들으시오. 그는 악마요. 사람이 아니고 악. 마. 란 말이오.”
파르티잔의 목에 당장에 칼이 들어왔다. 리먼이 노기충천하여 함부로 지껄이는 그를 위협한 것이다.
“네 이놈! 정녕 죽고 싶은 게로구나.”
“그럼 날 풀어주면 되지 않소? 내가 나만 살자고 이런 건 줄 아시오? 그가 마음만 먹는다면 여기 있는 모두를 도륙 낼 거요!”
“그래도 이놈이…….”
정말 베어버릴 기세였다.
급박한 상황에 유프라가 부드러운 말로 그를 달래었다.
“이자가 거짓을 말하는 건 아닌 것 같아. 내가 회군을 명령하지 않을 테니 그 검은 치워줄 수 없을까?”
리먼은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잔뜩 열이 뻗쳐 화를 코로 내뿜으며 씩씩거렸다.
평소답지 않은 행동이었다.
따지고 보면 데리고 오자고 한 것 역시 자신이 아닌가.
생각 같아서는 요절을 내지 못할 바에야 당장에라도 놓아주어버리고 싶었지만 그래서는 안 되었다. 많은 부하가 보고 있는 데서 자신의 판단이 그릇되었다는 것을 인정하는 셈이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말투를 문제 삼아 죽이자니 이 왕자의 눈치를 봐야 할 상황이라 짜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사실 그가 심정이 어떻든 간에 파르티잔만 하겠는가.
그는 정말 똥줄이 타들어가는 심정이었다.
“제발 날 놓아주시오. 제바알…….”
애원하듯 말해봤지만 누구도 들어주지 않았다.
“시끄럽구나. 뭣들 하느냐. 당장 저자의 입을 봉하라.”
리먼의 명을 받은 기사가 다가오는 동안에도 파르티잔은 끊임없이 중얼거렸다.
“진짜 후회할 거라지 않소. 그가 어떤 자인지 내 다시 한 번 설명… 읍.”
결국 입에 재갈이 물려서야 파르티잔은 말을 멈추게 되었다.
유프라가 보기에도 리먼은 매우 화가 나 있었다. 지금은 불쌍한 저자의 편을 들어주는 것보다 그의 기분을 헤아려 주는 것이 도리였다.
그런 까닭에 유프라 역시 제지를 하지 않았다.
리먼은 손이 묶이고 입마저 틀어 막힌 파르티잔을 쳐다보고는 속으로 굳게 다짐했다.
‘이제야 조용해졌군. 망할 녀석. 부하들과 이 왕자 전하 앞에서 내 체면을 구기다니……. 이 전투가 끝나는 즉시 내 손으로 처결하고 말겠다.’
* * *
“폐하, 첨병에게서 연락이 왔습니다. 아레인 병력이 이곳을 향해 다가오고 있다 합니다.”
보고를 받은 로테노아는 여유 가득한 미소를 떠올렸다.
“그래도 싸우긴 할 모양이군. 적은 얼마나 된다던가?”
“어림잡아 일천 정도라고 들었사옵니다.”
로테노아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일천? 겨우 그것이라던가?”
“그렇사옵니다.”
실망 가득한 낯빛이었다. 이곳의 병력만도 족히 5천은 넘는다. 순 전투 병력들만 따져 보았을 때 말이다.
무려 5배의 전력 차이.
이래서야 싸우고 말고 할 것도 없질 않은가.
측은지심이 들었다.
또한 나름의 걱정도 생겼다.
“아레인이 그 정도로 쇠하였나? 이거야 원, 남들이 본다면 어린아이를 괴롭힌다고 놀려 대겠군.”
“그렇진 않을 것이옵니다. 도발을 한 것은 저들이옵니다.”
“그것도 그렇군.”
반대쪽에 있는 귀족이 감히 말을 올렸다.
“혹시 저들이 항복을 하러 오는 것은 아닐까 하옵니다.”
“그럴 수도 있겠군.”
로테노아는 이처럼 허허로운 말투로 여러 귀족들의 말을 다 받아주는 중이었다.
여유가 흘러넘친 까닭이었다.
한쪽에선 조심스러운 의견도 있었다.
“저들의 전력이 천이라는 것은 조금 의아한 일이옵니다. 아무리 왕국이 몰락했다고 하나 그 정도 병력은 이해가 가질 않습니다. 혹 여러 방면으로 군대를 나눈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얼마 전 로테노아의 고민을 해결하여 준 현자, 즉 전대 현자 클라베르의 제자의 말이었다.
로테노아는 다른 귀족들과 다르게 그의 의견을 높이 사서 생각을 거듭해 대답에 나름의 정성을 깃들였다.
“신빙성이 있는 의견이로다. 하나, 이쪽에 천을 보냈다는 것은 일 왕자나 이 왕자의 쪽에 전력을 투입하지 않겠다는 계산이 아닌가?”
“그럴 것이옵니다.”
“아직은 속내를 모르겠군. 설마 다섯 배의 병력 차이를 무릅쓰고 전쟁을 벌이는 것은 아닐 테지?”
생각 짧은 귀족 하나가 언행에 주의하지 않고 속마음을 그대로 들춰냈다.
“미친 작자들이 아니고서야 그럴 리는 없을 것이옵니다.”
이는 왕에게 실례가 되는 말이었다.
하지만 때가 때인지라 로테노아는 그에 대해 힐책도 하질 않았다. 오히려 전장에선 거친 행동이나 언어 또한 필요하다고 생각해 그의 의견을 높게 사주었다.
“그랬으면 좋겠군. 전쟁이라고 하지만 짐 또한 군대를 축내기는 싫다. 싸우지 않고 이기는 방법이야말로 최선의 해결책이 아닌가.”
“그렇사옵니다.”
현자의 대답이었다.
로테노아가 이렇게 대군을 끌고 온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기를 죽여 싸우지 않고 승리하기 위함, 바로 그것이었다.
멀리서나마 군마들이 땅을 짓누르는 소리들이 들려왔다.
소리는 더욱 크게 들렸다.
저들의 병력이 다가오고 있음이다.
그렇다고는 해도 이쪽의 지휘관이나 로테노아 국왕, 심지어는 삼 왕자 팔테스마저 전혀 기죽은 모습이 아니었다.
이미 적의 규모를 확인해서였다.
그들은 차분히 기다리고 있었다.
곧 아레인의 병력들이 도달했다.
대규모의 전투가 벌어지기 전에는 이렇듯 멀리 거리를 두고 신경전을 벌이는 게 우선이었다.
아레인 진영에서 한 남자가 나서 허공에 대고 크게 외쳤다.
“나는 아레인 왕국의 수비대장을 맞고 있는 가인 자작이라고 하오!”
그 목소리가 어찌나 쩌렁쩌렁 울리는지 로테노아 국왕은 감탄을 금치 못했다.
“허, 그놈 목소리 한번 크도다.”
그러나 감탄은 가인의 뒷말로 인해 무색해져 버렸다.
“그대들이 아레인 왕국의 국경을 넘어 이곳에 온 이유를 물을까 하오!”
바리톤국의 여러 귀족들이 생각했던 항복이 아니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저렇게 경우를 따지지는 않을 테니까.
조금씩 로테노아의 얼굴에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국왕의 기분을 살피다 한 지휘관이 앞으로 나서 그에 맞대고 소리쳤다.
“귀국은 바리톤 왕국에게 무례를 저질렀소. 이에 대해 우리 바리톤 왕국의 국왕 폐하께서는 진노를 하셨소이다. 오늘 그 책임을 묻고자 하오니 뜻을 분명히 해주시는 게 좋을 것이오. 택하시오. 전쟁이오? 항복이오?”
그 역시 마나를 다룰 줄 아는 자여서 나름 목소리가 크게 흘러나가 적어도 앞쪽에 나서 소리를 질러대던 가인의 귀에 똑똑히 파고들었다.
가인은 잠시 돌아서서 무리들에게로 돌아갔다.
그리고 잠시 다른 지휘관으로 보이는 한 사내와 말을 나누더니 다시 말을 돌려 앞쪽으로 나와 목소리에 마나를 실어 크게 소리쳤다.
“오딘 님의 말씀을 대신하노라!”
찰나의 순간 로테노아는 의문이 들었다.
공주, 아니 여왕의 이름은 엘레느라고 전해들었다. 로테노아가 궁금했던 것은 여왕의 이름이었을 뿐이다.
지금 저자의 입에서 거론된 자의 이름에 관해서는 일체 들은 기억이 없었다.
뒷생각이 이어지기도 전에 가인의 입에서 분기탱천한 엄포가 튀어나왔다.
“그분께서는 ‘아레인을 탐내는 자들을 용서치 말라’ 하셨느니라!”
분명한 하대였다. 이곳에 모인 바리톤 병력 전체, 병사들과 기사들, 귀족들을 포함해 로테노아 국왕까지 싸잡아 아랫것들로 대하는 말투다.
로테노아를 위시한 바리톤 왕국의 군대가 숨죽여 뒷말에 귀를 기울이다가 한순간 안색들이 확 변해버렸다.
귀족들은 왕의 앞이라 감히 욕지거리를 뱉지 못할 뿐 얼굴을 붉혔으며, 후미진 곳에 있던 병사들은 조그만 말로 저들의 어리석음을 나무랐다.
“미친 것 같아.”
“그럴 수도…….”
긴장감은 점점 고조되었다.
수천의 병력들이 오로지 상부로부터의 명령만을 기다리고 있다.
굳어 있던 로테노아의 입이 서서히 열렸다.
“저자의 목을 가져오는 자에게 후한 상을 내리겠다.”
공에 목이 말라 있던 귀족들에게 단비 같은 소식이었다.
순간 귀족들의 눈이 살기로 번뜩였다.
삼 왕자 팔테스 또한 노한 낯빛을 지었다.
그는 지금 이 순간만큼은 강자였다.
철석같이 믿고 있는 아바마마, 아니 국왕 폐하와 여러 대신들이 자리하고 있으며 수천의 병력들이 밀집해 있다.
자신은 저들의 어리석음을 충분히 가르쳐 줄 수 있는 상황이라고 여겼다.
‘어리석은 놈들. 절대로 용서치 않으리라. 너희들을 죄다 몰살시키고 직접 왕궁으로 찾아가 날 핍박한 이방인의 목을 가져야겠다. 아바마마를 졸라서라도 그 목을 내 방 안에 두리라. 반드시 그러도록 하겠다.’
지금 꿈꾸고 있는 것, 그것이 꿈과 같다는 것을 팔테스는 전혀 짐작조차 못하고 있었다.
가인의 말은 더 이어졌다.
“이는 오딘 님의 뜻이시니.”
이 자리에 있는 바리톤국의 모든 병력들이 자신을 잡아먹을 듯 노려보고 있다는 시선을 외면한 채 가인은 나머지 말을 힘 있게 덧붙였다.
“아레인 왕국 전체의 의견이라 봐도 무방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