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바리톤 왕의 전언 (12/67)

바리톤 왕의 전언

왕좌에 앉아 있는 오딘에게 로테노아 국왕이 보낸 사신은 난색을 떨치지 못하고 용건을 꺼냈다.

“여왕을 뵈러 왔소.”

그의 손에는 고급스러운 파피루스로 만든 서신이 들려 있었다.

전혀 예상했던 분위기가 아니었다. 막 전투가 끝난 시점이니 아레인국은 침체된 분위기라 해야 맞을 것이다. 거기에 이웃 국에서 국왕의 서신을 들고 왔다면 긴장을 해야 한다.

왜? 국력이 쇠한 상태에서 혹시 이웃 국이 선전포고라도 한다면 어떻게 될까? 이런 걱정이 드는 것이 수순일 것이다.

하지만 이자들에게는 그런 게 없었다.

대전의 문은 활짝 열려 있었고, 계속해서 사람들이 드나들었다.

두 사람이 낑낑거리며 보기에만 해도 무거운 화병을 들고 와 왕좌에 앉아 있는 이방인에게 물었다.

“이건 여기에 놓을까요?”

“아, 그래. 거기다 놓아라.”

자신의 말이 묵살되자 사신의 인상이 찌푸려졌다.

“여왕을 뵈러 왔다고 하였지 않소.”

그 말 또한 묵살되었다.

이방인은 합동하여 조형물을 들고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다른 사람들을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신은 이방인에 대해 전혀 몰랐다. 그가 아레인 왕국에서 가장 높은 존재, 오딘이라는 것을.

오딘이 이와 같은 지시를 내리고 있는 것은 기왕 왕국을 통치하게 된 김에 과거 자신이 살던 곳의 분위기나 내볼까 해서였다.

이곳의 실내 장식과 내부 역시 마음에 들긴 하였지만 그다지 편치는 않은 느낌이었다.

하여 자신이 머무는 곳만이라도 바꾸려 했고, 이에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도리어 많은 이들이 감탄하였다.

동양의 분위기는 사람의 마음을 안정시켜 주고 섬세한 아름다움을 뽐내기에 부족함이 없다.

여러 대장장이들은 오딘이 지시한 장식품 등을 만들기 시작했다.

물론 그들은 아직 많은 것들을 소화해내지 못했다.

그 때문에 오딘은 얼마 전 대장장이에게 들었던 말을 떠올리며 아쉬운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드워프라는 녀석들이 있으면 좋겠는데 말이야. 돈을 주고서라도 데려오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군.’

비단 장식에만 소용될 것은 아닐 것이다. 이 세계에서는 자신의 기억에 있던 많은 물건들이 대단하게 비춰질 수도 있고, 그것으로 무역을 행할 수도 있다. 기호만 맞는다면 많은 돈을 거둬들일 수도 있으니 오딘은 이 일만은 꼭 진행시키고 싶어 했다.

아이디어는 자신이 내는 것이고 그들은 물건을 만들면 된다.

물론 보수는 후하게 챙겨 줄 생각이었다.

지금 당장은 많이 부족해 보이지만 오딘은 그런대로 마음에 들었는지 연방 미소를 머금고 흡족해하는 모습이었다.

자신을 오랫동안 방치해둬서인지 사신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았다.

“사람을 앞에 두고 이럴 수 있소이까!”

남의 왕궁에서 언성을 높인다는 것 자체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것이야말로 주객이 전도된 것이 아니고 무어겠는가.

하지만 사신은 그래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저자는 오래도록 자신을 상대해주지도 않았고, 또 그가 왕도 아니지 않은가. 사정을 모르기에 큰 실수를 한 셈이었다.

그래도 오딘은 평소완 달랐다.

평소였다면 지랄 맞은 성격이 튀어나왔을 가능성이 높았지만 오늘만은 예외였다. 저들이 이렇게 열심히 수고를 해주어 눈이 즐거워지고 마음이 편안해진 상황이었다.

때문에 사신을 나쁘지 않게 대했다.

“아, 그래. 할 말이 있었다고 하였지. 말해보라.”

“여왕에게 해야 하오.”

슬그머니 오딘의 기분이 가라앉고 있었다.

사신 역시 그의 기분이 나빠지려 하고 있다는 것쯤은 짐작하였다. 온화한 표정이 걷혀지고 있었으므로.

그래도 사신은 기가 죽기는커녕 당연하다는 표정을 지었음에도 오딘은 날도 날인지라 더 기회를 주었다.

“그냥 말해. 나한테 말해도 다 알아들어.”

부산을 떨던 인원들이 조심스레 분위기를 살피기 시작했다. 그의 말이 천진난만해질 때는 심사가 꼬여 가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던 것이다. 앞서 조르바 자작이나 파르티잔을 대할 때는 종종 저런 말투를 써오질 않았는가.

사신은 이 왕국 사람이 아니므로 자연히 그런 것을 알 리 없어 인상을 구겼다. 그래도 말을 전해주겠다고 하니 서신을 펼쳤다.

그리고 안에 적힌 내용을 읊조리기 시작했다.

“아레인 여왕은 들으시오. 그대들의 왕이 누가 되어야 하건 짐은 관심이 없소. 하나, 한 나라의 왕이 바뀌었다면 마땅히 이웃 국에도 알려야 하는 법이오. 이는 우리 바리톤 왕국을 무시하는 처사라고 생각하는 바이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그대가 직접 우리 왕국에 인사를 하러 오는 게 예의가 아닌가 하오. 바리톤 왕국에서 로테노아 국왕이.”

내용인즉슨 스스로 고개를 숙이고 들어오라는 말이었다. 꼬투리를 잡는 것이다. 남의 왕국 일에 감 놔라 배 놔라 하는 것이 더 예의가 아니었다. 그걸 모르고 이 같은 서신을 작성했을 리도 없다.

여기서 반발하는 말을 한다면 사신은 그대로 가 내용을 전할 것이고 로테노아 국왕은 기다렸던 일을 시행할 작정이었다.

오딘이 그걸 왜 모를까.

그래도 오딘은 마지막으로 자비를 베풀었다.

“좋게 말할 테니 그냥 가거라. 그리고 다시 이런 서신을 작성하면 후회하게 될 거라고 전해.”

사신 또한 예상치 못했던 대답이었다.

못마땅해하거나 경우를 따지는 게 정상적인 사람의 판단일 것이라고 생각했건만, 이자는 도리어 협박을 하고 있질 않은가.

도대체 지가 뭐기에.

하여 사신의 표정 또한 곱지 않았다.

어떤 사연인지는 모르겠지만 왕좌에 앉아 있는 것 또한 인부들을 부리는 목적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게 결정적인 원인이 되었다.

“그게 여왕의 뜻이라고 받아들여도 되겠소?”

분명히 깔아보는 듯한 눈초리를 하고 말해왔다.

그 바람에 오딘의 표정이 크게 어두워졌다.

이어 굳은 입이 살포시 열리며 명령조의 말이 툭 내뱉어졌다.

“문 닫아.”

분위기가 차갑게 변해갔다.

발품을 마다않고 일을 하던 자들이 서둘러 대전 안을 빠져나갔다. 그리고 제일 마지막에 나가는 인원들이 큼지막한 문을 닫고 있었다.

“뭐, 뭣들 하는 거요?”

사신은 당황해하며 뒤와 앞을 번갈아 보며 물었지만 누구도 대답해주는 이가 없었다.

끼이익- 쿵!

대전 안이 다소 어두워졌다.

그제야 왕좌에 앉아 있던 인물이 일어서 계단을 내려오고 있었다.

황당함의 극치에 사신은 어찌할 바를 몰라 하다가 이방인이 위협적인 표정으로 다가오려 하자 다급히 대전 문을 향해 뛰었다.

쾅쾅!

“이보시오, 이보시오.”

뚜벅뚜벅 걷는 발소리가 내내 신경이 쓰였던지 그는 연방 이방인을 훑어보며 문을 더 강하게 두드리며 소리쳤다.

“문을 여시오. 내가 아직 못 나갔지 않소!”

왼 소매, 오른 소매를 차근히 걷으며 오딘은 아직도 분위기 파악을 못하고 있는 녀석을 조그만 목소리로 나무랐다.

“좋게 말할 때 갔으면 좋았잖아. 안 그래?”

* * *

로테노아 국왕은 어이없어하는 표정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아레인 왕국에 서신을 전하고 돌아온 사신이 목 놓아 울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는 왕에게도 실례가 되는 행위였다.

로테노아 자신에게 무례한 행위라고 느꼈음에도 그가 이렇게 우는 이유가 한편으로는 궁금했다.

“이 무슨 돼먹지 못한 행동이냐? 가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소상이 일러보아라.”

“죄송합니다. 국왕 폐하… 크흑…….”

얼마나 서러움에 목이 메었는지 사신은 팔뚝으로 눈물을 한 움큼 쓸어내고는 심호흡을 하고서 겨우 입을 열었다.

“분명히 국왕 폐하의 뜻을 전하였사옵니다. 하나, 그자가, 그자가…….”

태어나서 이렇게 아프게 얻어맞은 적이 없었다. 치료는 받았으되 너무 고통이 끔찍했던지라 기억에 각인되어 계속 괴로웠다.

아직도 몸이 흐물흐물하는 것 같고 정신 상태 또한 피폐해져서 자신의 앞에 있는 국왕, 아니 아버지를 대하기가 힘들었다.

로테노아는 주위를 물렸다.

사신이기 전에 왕위를 이어받을지 모르는 왕자이고, 자신의 아들이다.

사실 대륙에는 왕의 직계를 사신으로 보내는 일도 적지 않았다. 왕자들 또한 공을 세워 자신들의 능력을 인정받아야 후에 신하들이 잘 따르는 법이니까. 전쟁에서 무훈을 세우건, 아니면 무역이나 외교 방면에 능력을 발휘하건 간에 말이다.

로테노아는 표정을 가다듬고 왕으로서가 아닌 아버지로서 물었다.

“네가 왕자라고 말했느냐?”

사신으로 갔던 왕자는 슬픔을 주체 못해 덜덜 떨리는 입술을 길게 내밀고는 울먹이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분을 참지 못하고 로테노아는 어금니를 씹었다.

“으드득!”

얼마나 화가 났는지 차마 그는 왕자의 기분을 살펴 주지 못하고 다그치며 물었다.

“마저 얘기해보아라.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자가 누구이며 왜 널 이 지경으로 만들었는지까지!”

왕자는 그것이 무서웠던지 겨우 슬픔을 삼키고는 이실직고했다.

“그자가 누구인지는 모릅니다. 단지 검은 머리카락에 검은 눈동자를 가진 이방인이었습니다. 여왕을 만나게 해달라니까 몇 번이나 제 말을 묵살하였습니다. 해서 조금 크게 말했고 그때까지도 별탈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폐하의 서신을 읽고 난 후 제 눈초리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그자가 건방져 마음에 안 드는 시선을 건네었을 뿐입니다. 그게 죄가 됩니까? 언젠가 국왕께서도 옳고 그르고, 슬프고 기쁜 건 모두 표정에 드러난다고 하였지 않았습니까.”

왕자가 어렸을 적 자신이 많이 해주던 얘기였다.

아들이 자신을 이리 추억해주고 있으니 어찌 기쁘지 아니할까.

하지만 지금의 상황은 말이 아니었다.

해서 로테노아는 좋아지려는 기분을 떨치고 대노하여 소리쳤다.

“감히 바리톤 왕국의 왕자라는 것을 알면서도 손찌검을 해? 이놈들, 후회하게 해주리라.”

왕자는 불이 난 로테노아의 속에 기름을 끼얹었다.

“그가 말하였습니다. 다시 이따위 서한을 들고 온다면 후회하게 될 것이라고, 분명히 그렇게 말했습니다.”

“뭐, 뭣이?”

로테노아는 작금의 상황을 곱씹어보았다.

저들, 아레인 왕국은 반란이 일어나 한 번 뒤집혔고, 다시 반란이 일어나 또 한 번 뒤집혔다. 그렇다면 국력은 말도 아니게 쇠하였을 것이다.

또한 그 기간이 결코 길지 않아 국력을 신장하는 데에 신경을 쓸 여력조차 없었을 것은 꼭 보지 않았더라도 어렵지 않게 유추해낼 수 있는 일이다.

적은 수가 큰 수를 무찔렀다고 했으니 출혈은 클 것.

남은 병력이라고 해봐야 얼마 되지도 못할 것은 불 보듯 훤하다.

그런 놈들이 바리톤 왕국의 사신, 아니 왕자라는 것이 밝혀진 귀빈을 이렇게 깔아뭉개고, 거기에 더해 바리톤 왕국에 협박까지 했다는 것은 미치지 않고서는 할 수 없는 행위였다.

로테노아가 결심을 굳히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속히 각 영지를 다스리고 있는 귀족들을 불러들여 대전 회의를 열겠노라.”

* * *

조르바는 꿈에 그리던 왕궁 생활을 하고 있었다.

사실 그는 영지와 작위를 하사받는 것보다도 궁내에 거주하며 왕을 보위하는 귀족이고 싶었다.

꿈에도 그리던 왕궁 생활인데 왜 이리 기분은 언짢을까?

그것은 허드렛일이나 하는 신세로 몰락했기 때문이다.

‘망할 놈! 내 꿈을 짓밟다니.’

수백, 수천 번 더 가졌을 수도 있는 원망이었다.

누가 허드렛일을 하는 왕국 생활을 원했는가.

부푼 꿈이 이런 식으로 추락하게 될 줄이야 누가 알았으랴.

그래도 조르바는 항상 미소를 짓고 있었다.

배운 게 있다면 바로 이것이었다.

그는 비굴하게 웃으며 상대의 비위를 맞춰주면서도 속으론 남을 얼마든지 헐뜯고 비난할 수 있는 독특한 능력을 가지게 되었다.

모두가 철저한 학습의 결과에 따른 것이었다.

‘이런 생활 따윈 하고 싶지 않았다.’

비참한 인생의 말로.

과연 자신은 어디까지 추락할 것인가.

그게 궁금했다.

성과 작위를 가지고 영지를 다스리며 호의호식을 누렸던 과거의 영광.

그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되어버렸다.

차라리 그 같은 생활을 겪어보지 않았고 몰랐다면 행복했을지도 모른다. 가진 자들의 상실의 슬픔을 없는 자들이 감히 헤아리기나 할 수 있을까.

‘그저 자유롭다면, 그럴 수만 있어도 좋겠거늘.’

지금 조르바가 가지는 바람은 언젠가 파르티잔이 가졌던 바람이었다.

조르바는 늦게 들어온 관계로 지금에서야 그 바람이 간절해지는 중이었다.

그러다 보니 ‘그놈’ 생각이 났다.

‘파르티잔, 네놈은 운이 좋아 도망을 쳤구나. 하나, 나 조르바가 살아 있는 한 마음 편히 살 생각은 추호도 하지 않는 게 좋을 것이다.’

조르바와 파르티잔.

둘은 원래 주군과 신하의 사이였다. 그가 발데르 휘하에 있었을 때에는 일면식조차 없던 사이지만 하인리히의 소개로 만난 이후에 그는 자신에게 충성 맹세까지 했었다.

주군과 신하의 사이가 어디 쉽게 깨질 수가 있는 사이던가?

그러나 지금의 경우는 그러했다.

신하가 감히 주군을 능멸하고 놀려 대기까지 했다.

처음의 오해는 그런대로 풀린 상황이었다.

그러나 이후가 문제였다.

파르티잔은 정말 자신을 만만히 보기 시작했던 것이다.

개념을 분실해도 정도껏 해야 했다.

자신이 타인에 의해 원치 않는 운동을 하고 있을 때 오딘의 뒤꽁무니를 졸졸 따라다니며 파르티잔은 머리를 돌려 비웃기 일쑤였다.

어디 그것뿐인가.

점점 대담해진 파르티잔은 기회를 봐서 슬그머니 시비를 걸어오기도 했다.

그는 ‘얌마’로부터 시작된 시비조의 말을 던지는 것을 시작으로 ‘뭐 하려고 사냐? 카카카’라는 조소를 던지기까지 대담해졌다.

그간 당한 일들이 억울하고 분해 잠을 못 잔 적도 많았다.

오죽하면 그라니트성에 함께 있을 때 생을 포기하고라도 기회만 닿으면 목을 졸라 죽이고 싶었겠는가.

그놈이 달아나 그런 기회마저 가버렸으니 더한 우울함에 휩싸였다.

만약 지금 당장 죽어 환생을 하게 된다 해도 그 기억은 결코 떼어놓지 않을 작정이었다.

혹여 신이 ‘과거의 영예를 찾을 테냐? 아니면 마음에 들지 않는 한 녀석을 가질 테냐?’ 하고 묻는다면 진지하게 한번 고민해볼 작정이었다.

바로 그때 근방에서 비질을 하던 두 사람의 대화가 흘러들었다.

“이 얘기 들었어? 깊이 반성하는 귀족들에게는 다시 한 번 기회를 주시는 방안도 생각 중이시래. 부족한 영지의 귀족을 채우기 위해 원래는 크레멘 준남작님이나 샤르트 경 같은 분들이 추대되는 식이었는데 그분들이 마다했다지? 또 그분들은 따로 할 일이 있으시다는군. 오딘 님의 친위대를 만드시겠다나 뭐라나.”

“그럼 유배 보낸 귀족들도 해당되는 사항인가?”

먼저 말을 꺼낸 자가 고개를 두 번 끄덕였다.

손에 든 빗자루마저 내팽개치고 조르바는 먼저 말을 꺼낸 자의 어깨를 부여잡고 세차게 흔들며 물었다.

“그 말이 사실이냐?”

두 사람이 조르바를 심히 아니꼽게 쳐다보았다.

조르바는 그 즉시 실수를 깨달았다.

성내에서 허드렛일을 하는 사람들보다 낮은 사람이 있다면 조르바나 파르티잔이라고 했으며, 혹 그들이 무례를 저지른다면 근방의 병사나 기사에게 귀띔을 하라는 명을 내려놓았던 것이다. 그 때문에 두어 번 혼쭐이 난 적이 있었다.

뜨끔한 기분이 들었던지 조르바는 즉시 말을 바꿨다.

“아, 아니, 사실이오?”

물음에 들려오는 답변이 이러했다.

“댁은 꿈 깨시는 게 좋을 거유. 찍혀도 사납게 찍혔지 않수.”

조르바 사건은 꽤나 유명했다. 소문이 퍼지고 퍼지는 데에도 오딘은 별 신경을 쓰지 않았고, 그 때문에 그라니트성에 잔류해 있던 사람들이라면 아이들까지도 아는 소문이 되어버렸다.

그 소문은 왕국에 와서도 널리 알려졌다. 그러니 이들이라고 모를 리 없는 것이다.

좋게 말하자면 조르바 자신은 꽤 유명인이었다. 신분이 미천해서 그렇지.

그들이 가고 난 후에도 조르바는 오랫동안 빗자루를 들 생각을 못하였다.

‘어떻게 하면 그의 환심을 살 수 있을까?’

그리만 된다면 모든 것을 바칠 각오가 되어 있었다. 오딘에게 핍박을 당한 게 분통했지만, 과거의 생활만 돌려준다면 그까짓 건 얼마든지 잊어줄 수 있었다.

다시 귀족이 된다면 예전의 생활을 되찾는 것은 물론이요, 사람을 시켜 파르티잔을 수소문해 마음껏 괴롭혀 줄 수도 있을 것이다.

‘기회다. 이 기회를 잡아야 한다. 남들에게 아량을 베풀 생각이라면 나에게도 아량을 베풀 수 있다. 왜 죄를 사하여 죄인들을 풀어줄 때 한꺼번에 여러 사람을 풀어주지 않던가. 과거를 반성하고 모든 것을 뉘우친다고 하자. 나 또한 오랫동안 벌을 받아왔으니 사면해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빗자루를 들고 정색하고 있는 조르바를 여러 사람들이 스쳐 지나가며 눈여겨보았지만, 조르바는 그들을 의식할 여유도 없는지 계속하여 생각만을 거듭했다.

‘이런 생활을 계속할 순 없다. 조르고 졸라서라도 반드시 이 생활은 면해야 한다. 솔직히 사면만 해줘도 어디인가. 밑져야 본전이다.’

솔직히 ‘밑져야 본전이다’는 부분은 긍정할 수 없었다. 실패는 구타와 직결될 가능성이 농후했기 때문이다. 여태까지의 상황으로 비춰볼 때는 그러했다.

조금, 아니 많이 겁이 나기는 했지만, 조르바는 마음을 모질게 먹고 점점 이쪽으로 생각을 굳혀 갔다.

* * *

로테노아가 학수고대했던 그날이 다가왔다.

대전 회의.

그는 단 한 달의 기간이었지만 연락이 늦고 거리가 멀어 늦게 입궁한 귀족들에게까지 성을 내기도 했다. 당장에라도 아레인국에 달려가 그 녀석의 숨통을 조이고 왕국에 거주하는 녀석들을 모조리 발아래 엎드리게 해야만 직성이 풀릴 것 같았다.

회의는 빠르게 진행되었다.

“내 경들을 이 자리에 불러 모은 것은 작지 않은 결단을 내리기 위해서요. 경들도 소식은 접하셨을 게요. 아레인 왕국이 두 번의 전복을 했다는 것을.”

신하들은 조심히 왕의 기분을 살폈다.

사실 이들 대부분이 기다리고 있던 얘기였다. 왕국이 번창하면 자신들에게도 이로운 점이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국왕의 말에 더욱 귀를 기울였다.

로테노아의 말이 이어졌다.

“앞서 아레인 왕국에 삼 왕자를 사신으로 파견 보낸 적이 있었소. 짐의 뜻을 전한 거요. 하나, 기가 찰 노릇이더군.”

대전 안의 귀족들은 감히 묻지는 못하고 조심히 왕의 표정을 살폈다.

로테노아는 숨을 고르고 평온을 유지하려 애썼다. 그러나 표정이 일그러지는 것만은 참을 수 없었던지 입꼬리가 치켜 올라가고 이맛살이 구겨졌다.

그 상태 그대로 노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경들은 그놈들이 어떻게 했는지 아시오? 사신을 박대하고 내쫓았소. 왕자라는 사실을 밝혔음에도 불구하고 말이오.”

로테노아는 차마 왕자가 얻어터지고 왔다는 말은 하지 못했다. 신하들에게 이 같은 얘기를 늘어놓는다면 창피함이 앞설 것이기에.

자신은 제쳐 두고라도 후에 왕자의 체면은 또 뭐가 되겠는가.

귀족들의 표정도 굳어졌다. 저마다 화가 난 얼굴이었다.

왕자라면 누구인가. 자신들이 떠받들어야 하는 존재가 아닌가. 그가 다른 나라에서 홀대를 당했다는 것은 자신들의 자존심이 뭉개지는 일이기도 했다.

“또 뭐라고 했는지 아시오? 우리 바리톤 왕국에 오히려 협박을 했소이다. 다시 찾아오면 후회하게 될 거라고 했다오.”

국왕의 말에 황당함을 금치 못하고 귀족들은 헛바람을 집어삼켰다.

상식적으로도 이해가 가질 않는 얘기가 아닌가.

귀족들 역시 아레인 왕국의 전후 상황에 대해 알고 있는 상태였다. 그리고 조만간 이 같은 일이 추진될 것이라는 것을 예견하고 미리 준비해오던 찰나였다.

그렇기에 지금 왕이 던져 주는 말들은 충격으로 다가왔다. 저들의 대담함에 놀라는 것보다는 어리석음에 놀란 것이다.

귀족들은 속으로 끊임없이 그 어리석음을 꾸짖어댔다.

‘멍청한 작자들 같으니라고.’

그 많은 입을 대변해 한 귀족이 경건하게 허리를 숙이며 왕께 아뢰었다.

“저들은 불나방 같사옵니다.”

또 한 귀족이 덧붙였다.

“국왕 폐하께서 그 어리석음을 깨우쳐 주셨으면 합니다.”

그들의 말에 로테노아의 격양된 음성이 다소 누그러졌다. 단, 표정만은 더욱 굳어져 그의 각오를 대변했다.

“안 그래도 그리할 생각이오. 이는 짐뿐만 아니라 경들의 체면 문제이기도 하오. 짐이 오늘 그대들을 부른 것은 이 일을 논의하기 위함이었소. 경들의 생각은 어떠하오?”

“국왕 폐하의 말씀이 백번 지당하십니다!”

거의가 다 그런 의견이었다.

하지만 단 한 명이 달랐다.

로테노아의 만면에 그런대로 만족하는 미소가 드리워질 무렵이었다.

한쪽에서 갑자기 우려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국왕 폐하! 신 클라베르, 감히 말씀 올리고자 합니다.”

클라베르.

전대 현자였고, 지금의 현자의 스승이 되는 자였다. 덕망 또한 높아 여러 백성들의 우러름을 받는 사람이었다.

사실 그는 귀족의 작위 또한 마다한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이 자리에 그를 부른 것은 총명하기가 이를 데 없었기 때문이다. 상왕이 그를 간파하고 대전 회의에는 꼭 참석을 시킨 이래 계속되던 일이었다.

그 까닭에 로테노아는 그의 의견만은 무시할 수 없다고 생각, 나름 존경을 해주었다.

“말해보구려.”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아레인 왕국의 하늘엔 무서운 별이 떠 있습니다.”

생각지도 못한, 신경에 거슬리는 의견이 튀어나왔다.

겨우 밝아졌던 로테노아의 표정이 찬물을 확 끼얹은 것처럼 단번에 굳었다.

“무서운 별이라니?”

“소신이 말씀 올리고자 하는 것은 검은빛을 발하는 별, 즉 흑성이옵니다.”

요지를 알지 못하고 물은 말에 전대 현자가 답하는 게 이러했다. 그는 정말 하늘에 떠 있는 별을 논하고 있음이었다.

로테노아의 기분을 외면하고 클라베르는 계속 말을 이었다.

“미천한 신이 천문을 조금 읽을 줄 아옵니다. 흑성은 주위의 모든 것을 흡수하는 별이옵니다. 저 또한 아레인 왕국의 하늘에 그 별이 떠 있다는 것을 근래에 들어서 알게 되었습니다. 어쩌면 아레인 왕국이 단시간에 다시 일어설 수 있었던 것은 흑성의 등장과도 연관이 있을지 모르는 일입니다. 국왕 폐하, 간언하건대 이 일에 조금 더 심사숙고해주셨으면 합니다.”

“듣기 싫소!”

꾸지람에 이어 노성이 터졌다.

“경은 어째 뜬구름을 잡는 얘기를 하시는구려. 연로해서 판단력이 흐려지기라도 한 것이오? 어찌 하늘과 땅을 연관지어 말을 하고 계시오?”

정말 그렇게 생각했다.

자라오며 상왕으로부터 현자의 의견을 존중해야 한다는 말을 수십 번도 넘게 들었지만 이번만은 그의 말을 들어줄 수 없었다.

‘노망이 난 게로군. 제자가 훨씬 낫군.’

로테노아는 클라베르를 쏘아보며 그렇게 생각했다.

얼마 전 현자가 한 얘기는 요목조목 상황에 맞게 추론하고 납득할 수 있을 정도의 판단을 내렸지만, 지금 말을 꺼낸 전대 현자 클라베르는 그렇지 못했다.

왜 전대 현자라는 자가 사람의 일과 하늘의 일을 분간하지 못한단 말인가.

기분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내치고 싶었지만 상왕이 그 같은 사실을 알게 되면 결코 좋은 소리를 듣지 못할 것 같았다.

“경들의 의견은 어떻소? 내 판단이 그르다고 생각되오?”

“아니옵니다.”

꼭 화가 난 목소리로 묻지 않아도 귀족들은 그와 같은 입장이었다. 그 말고는 누구도 반대하는 이가 없었다.

이에 로테노아는 밀어붙이기로 했다.

“모두가 그렇다고 하지 않소. 내 그대의 의견이 틀렸다는 것을 반드시 증명해 보이겠소이다.”

그렇게 로테노아는 으름장을 놓아 그가 더 말문을 열지 못하게 만들어버렸다.

클라베르 역시 어쩔 도리가 없었다. 자신은 조언을 해줄 정도이지, 왕의 결정권을 좌지우지할 존재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아마 상왕이었다면 자신의 의사를 조금 더 존중해주지 않았을까 하고 가슴속으로나마 한탄하는 수밖에 없었다.

첨탑에 올라 밤하늘을 올려다보던 클라베르.

그는 오늘 있었던 일을 곰곰이 되짚어보았다.

‘어차피 한 번은 죽을 목숨이었다. 클라베르, 너도 참 겁이 많은 인간인가 보구나. 부질없는 목숨 따위를 보존하려 말을 아꼈던 게냐?’

그것은 분명 본인에게 하는 말이었다.

하나, 사색이 깊어질수록 부끄러웠던 낯빛은 점차 가라앉았다.

‘현 국왕께서 결정하신 일이다. 내 목숨을 던진다 한들 결정은 바꾸시지 않으실 것이다. 그럴 바엔 차라리 마음 편히 가시게 하였어야 했다. 또한 폐하의 말씀도 틀리지 않았잖은가. 사람의 일과 하늘의 일…….’

마지막 마디는 긍정해줄 수 없었다.

긴 역사가 그를 증명해왔다.

자연과 사람, 땅과 하늘은 서로 어울린다. 그 조화를 깨우침으로써 흥망성쇠를 점칠 수도 있다.

그래도 클라베르는 자신의 생각이 틀렸다고 믿고 싶었다.

기왕에 벌어질 일이라면, 또한 목숨을 던져서도 못 막을 일이라면 잘되길 비는 수밖에 없었다.

슬그머니 그의 고개가 아레인 왕국의 하늘을 향했다.

흑성은 그의 바람과는 반대로 더욱 무섭게 검은빛을 쏟아내고 있었다.

* * *

오딘은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신경 써야 할 것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하나 계획한 것, 그것은 이 대륙에 마교의 뿌리를 내리는 것이었다. 단, 무력 세력에 한해서다.

수련 장소만 마련된다면 이 일은 그리 오래 걸릴 것 같지는 않았다.

이 세계가 워낙에 마나가 충만하여 기초만 잡아준다면 금세 그들만큼 성장할 수 있을 것이란 기대에 부풀었다.

‘일해진은 위험 요소가 너무 많다. 또한 누군가 행방불명이 된다면 직접 찾으러 나서야 하니 영 귀찮아.’

하나 아쉬운 게 있었다.

‘쩝, 마법사라는 놈들을 한데 모아 부대를 만들면 좋겠는데……. 영 미련이 남는군.’

만약 그게 가능하다면 마교보다도 강력한 집단이 만들어질지도 모르는 일이다. 또한 전투를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할 것 같았다.

“괴짜 노인에게 장로 정도의 자리를 내어준다고 하고 꼬드겨 볼까?”

일월진을 만들면서 오딘은 그런 생각을 하였다.

그러나 허락하지 않을 것 같았다.

엘레느라는 꼬맹이나 좋아해줄 줄 알지, 이제는 발데르에게조차 발걸음이 뜸해지지 않았는가.

“협박이 통할 위인도 아니고…….”

근처에서 오딘을 돕던 보탄이 그 말을 들었던지 조심스레 웃음을 지었다.

파르티잔을 풀어준 후 오딘을 수행하는 마법사 하나가 있었다.

이자의 이름은 쉬바인.

일전에 발데르가 언급했던, 왕국에서 가장 뛰어난 실력을 가졌다는 5서클의 궁정 마법사가 바로 그였다.

발데르는 오딘이 마법에 관심이 깊은 것을 알고 수하들에게 다소 피해가 따르더라도 그를 생포하라는 명을 내렸었다.

결국 그는 붙잡혔고 유배를 가지 않는 대신 오딘의 수행을 맡았던 것이다.

“이봐, 세상엔 그보다 뛰어난 마법사도 있느냐?”

쉬바인은 조심스레 고개를 숙여 보이고 자신이 생각하는 바를 털어놓았다.

“제가 그분의 마법을 견식하지 못하여 헤아릴 줄은 모르옵니다. 다만, 마법을 창시한 것은 인간이 아니라고 하옵니다.”

“인간이 아니라니? 그럼 누가 만든 것이지?”

“아마도 드래곤일 것으로 사료되옵니다.”

“드래곤?”

“그렇사옵니다. 저 역시 귀동냥으로 듣기만 했사오니 정확한 바에 대하여서는 모르옵니다. 다만, 듣기로는 드래곤이 마법의 시초이고 그 마법은 엘프에게 전해졌으며, 인간과 살을 섞은 엘프에 의해 마법이 점차 인간 세상에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럼 원류는 드래곤이라는 얘기로군. 그렇다고 그들의 마법이 가장 뛰어나다는 것인가?”

“말씀드리자면 그렇습니다. 마법이란 것이 여러 갈래로 나뉘기는 했습니다만 드래곤에 비교할 것은 못 되옵니다. 엘프나 인간들이 그들이 떠올리지 못하는 마법들을 종종 만들어 보여 주었다는 얘기가 있사온데, 그럴 때마다 그들은 코웃음을 쳤다고 합니다. 또 신체 구조상 인간들은 그들을 이기지 못할 이유가 있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지?”

“드래곤이 애초에 엘프에게 마법을 전수해준 것은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인간들이나 엘프들은 드래곤보다는 머리가 나쁜 것이 사실입니다. 고서클의 마법으로 올라갈수록 점점 더 복잡해져서 인간의 두뇌로는 행하기 힘들다고 하옵니다. 고서클의 마법사가 적은 것은 그 때문이겠지요. 그 외에도 한 가지 이유가 더 있사옵니다.”

“말해보라.”

“이른바 용언 마법이라는 것이옵니다. 이는 그들만의 마법입니다. 인간이 드래곤들 사이의 말을 하지 못하는 이상 용언 마법을 펼칠 수가 없습니다.”

“그 용언 마법이라는 게 그렇게 대단한 것인가?”

“그렇다고 들었습니다. 마법을 시전하는 데에 시간도 적게 걸릴 뿐만 아니라 인간의 언어로 불가능한 마법들까지 펼칠 수가 있다고 하옵니다.”

여기까지 들었을 때 오딘은 드래곤이란 녀석들이 자못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엉뚱한 호승심도 솟구쳤다.

“드래곤들은 하나같이 그렇게 강한가?”

“그건 아닐 것이옵니다. 그들 종족은 정령처럼 몇 가지로 나뉜다고 들었습니다. 그린 드래곤과 골드 드래곤, 레드 드래곤과 실버 드래곤, 그리고 블랙 드래곤으로 나뉜다고 합니다. 그에 따라 힘의 강하기도 차이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또 그들은 수천 년을 사는 동안 세 단계로 성장한다고 합니다. 처음의 상태는 헤츨링이라고 했습니다. 그 후가 웜급 드래곤, 그리고 그 후가 에이션트급이라고 합니다. 헤츨링 때는 약하지만, 웜급의 드래곤 정도만 되어도 능히 한 도시를 박살낼 수 있다고 하옵니다.”

정말 달변이었다.

그럴 만도 했다. 쉬바인은 그만큼이나 드래곤을 신봉하고 있었다. 아직도 아는 것을 풀어놓으라면 반나절은 더 얘기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가 본 것은 책에서의 묘사뿐이었지만, 그 늠름함과 아름다움에 매료되었던 것이다. 아주 어릴 적부터 말이다.

“한번 만나봤으면 좋겠군. 아는 놈 없나?”

뜬금없는 오딘의 물음에 쉬바인은 입을 크게 벌렸다.

“드래곤을 알다니요? 그건 불가능에 가까운 얘기입니다.”

“왜?”

쉬바인은 주저하지 않았다. 이 사람에 대해서는 들을 만큼 들어서이다. 잘못 보이면 국물도 없다는 것쯤은 파악해놓았다.

얼마 전 마주친 조르바 자작의 얘기로는 표정 관리에도 신경을 써야 한다고 했다.

하여 그는 지금 왕을 대하는 표정으로 대하는 중이었다.

“인간을 별로 반기질 않는다고 하옵니다. 비단 저희 종족뿐만 아니라 다른 종족, 그리고 다른 개체들까지 그렇다고 하였습니다. 종류에 따라 유순한 성격도 있다고 했지만 인간을 친구로 맞아줄 드래곤은 없다고 들었습니다. 그린 드래곤이 그나마 너그러운 성격이라고 하였고, 가장 포악한 드래곤은 블랙 드래곤이라고 하였습니다.”

“누가 친구로 맞아달라느냐? 본 좌 또한 이상한 동물을 친구로 받아주고 싶은 생각은 없느니라.”

쉬바인은 오딘이 정말 세상 물정 모른다고 생각했다.

‘드래곤이 들었다면 큰일 날 소리를 하시네.’

한술 더 떠 오딘은 이런 말까지 내뱉었다.

“본 좌는 돈이 된다고 해서 생명을 하찮게 여기는 인물은 아니니라.”

쉬바인이 듣기에는 너무도 어처구니가 없는 얘기였다.

‘누가 누굴 잡습니까. 드래곤이 사람을 잡지, 사람이 드래곤을 잡는답니까. 아무리 세상 물정을 모른다고 하시지만 너무하시네, 정말.’

언젠가 정말 드래곤을 찾아갔다가 객사할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 들었던지 쉬바인은 걱정을 담아 조심스레 말을 올렸다.

“몇몇 인간들이 욕심을 부려 드래곤을 사냥했던 일이 있었습니다. 물론 성공했던 사례가 없는 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힘이 미약한 드래곤들에 한해서였습니다. 괜히 드래곤을 잡겠다고 나섰다가 오히려 드래곤의 분노를 사 왕국이 몰락한 기록들은 아직도 뚜렷이 남아 있습니다.”

“누가 잡는다고 하였더냐? 그냥 본다고 하질 않았느냐.”

오딘의 심사가 점점 꼬여 가고 있었다.

쉬바인의 드래곤에 대한 맹목적 우정과 오딘의 기분과의 대결이었다.

그래도 드래곤이 알아주지도 못할 우정을 지키다가 흉한 꼴이 되기는 싫었는지 쉬바인은 고개를 숙이며 자신의 실수를 인정했다.

“소신이 주제넘었습니다.”

“알면 됐느니라.”

오딘이 뒤로 돌아섰을 때 쉬바인은 속으로나마 그를 나무랐다.

‘목격하는 것만으로도 목숨을 잃으실지 모릅니다. 아까 난폭하다고 저는 분명히 말씀을 드렸습니다. 죽어서나마 절 탓하시지 마십시오.’

* * *

아론은 왕성으로 이주했다. 물론 마타하리 또한 함께였다.

그가 성을 나설 때 샬로트는 다시 한 번 크게 울었지만 달리 쫓지는 않았다. 근처에 있으면 슬픔을 주체하지 못할 것 같아서다.

마타하리와 그녀의 아이는 사내아이였다.

우량아는 아니었다. 마타하리를 닮지 않았는지 뼈대가 비교적 얇았으며 젖도 잘 물지 않았다. 그것이 그녀로부터 결심을 다지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정성을 다할 생각이에요. 나와 당신의 아이는 밝게 자라게 하겠어요. 당신 같은 슬픔이 없게…….’

아론 역시 스승인 크레멘 준남작을 통해 그녀의 사연을 접하게 되었다. 그래서인지 측은한 마음이 더했다.

그럴수록 아론은 검술에 더욱더 열을 올렸다. 어리석게도 마타하리를 지켜 줄 사람은 자신밖에 없다고 믿었던 것이다.

일월진에 드나드는 데에는 무리가 없었다. 이곳에서 그곳으로의 공간 이동 마법진이 지금 막 완성되었으니까.

다만, 마법사들에게는 조금 더 피곤한 일이 되었다. 훨씬 먼 거리이다 보니 더 많은 마나를 소모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크게 걱정할 일도 아니다. 전보다 훨씬 많은 마법사들을 보유하고 있었으므로.

앞으로 죽 서 있던 사람들의 줄이 줄어들며 이제 아론 자신의 차례가 되어 설레는 마음으로 마법진에 발을 올려놓으려는 찰나, 누군가가 숨을 헐떡거릴 정도로 바삐 뛰어와서 말했다.

“오딘 님께서 찾으십니다!”

“저, 저요?”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키며 묻는 아론을 보며 뛰어온 사람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렇습니다. 같이 가주셔야겠습니다.”

* * *

뜻밖의 일이었다.

하지만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일도 아니었다. 앞서 바리톤국의 사신이 왕성을 방문했으므로.

오딘은 대전에서 발데르와 보탄, 그리고 여러 귀족들과 이 문제에 대해 논의를 거듭하는 중이었다.

오딘은 왕좌에, 그리고 귀족들은 가운데 붉은 카펫의 양옆으로 늘어서 있다.

그렇다 해도 귀족이 얼마 되지 않는 상황이었다. 죄진 놈들을 다 유배를 보내버렸으니까.

“안이 조금 썰렁하긴 하군.”

“소신 깊게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원하신다면 그들을 백의종군시킬까 합니다.”

놀랍게도 발데르의 입에서 나온 소리였다.

오딘이 의외라는 듯 바라보았고, 보탄을 포함한 그라니트성에 있던 다른 귀족들은 미리 짐작했다는 눈치로 보였다.

반면 켈타스는 깜짝 놀라 반대편에 선 공작의 면면을 훑어보았다. 거짓을 말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안 그래도 뇌리 속에 제라드가 떠오르던 차였다.

단지 오딘은 아직 자신을 편히 대해주지 않았으며 다소 거리를 벌여 놨기에 이렇다 할 말도 못 꺼내는 실정이었다.

어찌 기쁘지 아니할까.

어찌 반갑지 아니할까.

이 얘기로 인해 그의 뇌리에 떠오른 한 사람이 있었으니, 얼마 전 유뱃길에 오른 제라드였다.

대화의 물꼬를 터주자 켈타스는 고마움이 담긴 시선을 건넸는데 발데르는 그 연유를 알 수가 없었다. 그저 그가 따스한 미소를 건네는 듯하자 마주 웃어주었을 뿐이었다.

‘공작께서 그를 가엽게 여기시는 것이었구나. 내 여태 그것도 모르고 가끔 무정하다는 눈길로 바라보고는 했으니 미안하기 이를 데가 없구나.’

켈타스의 이런 생각은 철저한 오해였다.

그들에게 원한이 제일 깊은 자가 있다면 바로 발데르인 것은 맞다.

그럼에도 발데르가 이와 같은 말을 아뢰게 된 데에는 전적으로 오딘을 생각해서였다. 손발이 되어주어야 할 신하들이 모자라면 수장이 고생하기 마련이지 않은가.

이는 자신의 기분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겠다는 얘기와 같았다.

왕좌에 앉은 인물을 위해서라면 모든 것을 내어주어도 아깝지 않다는 표현이기도 했다.

그러나 발데르와 달리 오딘은 아직 그럴 마음이 없었다.

발데르의 마음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하는 행동과 말이 기특하기 그지없으니 도리어 그의 기분을 살펴 줄 생각이었다.

“아직 반성도 하지 못한 놈들을 데려와서 어쩌겠다는 말이냐. 그 일은 차후 의논해보기로 하지. 일단은 저들의 전력을 알고 싶구나. 누가 대답해보겠느냐.”

번개처럼 켈타스의 머리가 빠르게 회전했다.

‘지금이 기회다. 저분과 말을 많이 섞어봐야 한다. 발데르 공작도, 보탄 백작도 처음엔 소원한 관계였을 것. 내 존재를 각인시켜 주어야 후에도 발언권을 행사할 수 있질 않겠는가.’

자신이 잘되겠다는 심보는 절대로 아니었다. 그저 아까운 사람, 억울한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였다.

가히 놀랄 만한 속도로 생각을 마치고 켈타스가 반걸음을 내디뎌 조심히 허리를 숙이며 아뢰었다.

“신 켈타스, 감히 말씀 올리고자 합니다.”

“말해보라.”

“본래 바리톤 왕국의 전력은 아레인 왕국과 비슷하였습니다. 그 때문에 대규모의 전쟁은 일어나지 않았사옵니다. 지금 저들이 노리는 것은 바로 그것일 것으로 사료되옵니다. 두 번의 전복으로 인해 저희 쪽의 병력이 크게 축났다고 알고 있는 듯하옵니다.”

“다른 의견은?”

오딘의 물음에 여럿이 대답했다.

“신들 역시 그와 동일한 생각이옵니다.”

“아레인은 전력이 얼마나 쇠했느냐?”

지금 오딘이 모르고 있는 상황도 있었다.

바로 이제는 죽고 없을 하인리히를 통해 일어난 첫 번째의 전복이다.

발데르가 알기 쉽게 설명했다.

“이전의 전투보다 더 치열했사옵니다. 열을 놓고 보았을 때 넷이 빠져나갔다고 보시면 될 것이옵니다.”

“그럼 반도 남지 않았다는 얘기로군.”

“이번의 전투에서 발생한 부상자까지 합친다면 그렇게 보시면 되실 것이옵니다.”

사실 이것도 많이 남은 것이다.

적어도 로테노아 국왕은 아레인의 전력이 상당 부분 날아갔다고 믿었다.

이 이야기를 엿들었다면 전쟁을 벌이기 전 몇 번쯤은 더 생각했을 것이고 준비 또한 철저하게 했을 것이다.

대책 마련을 위한 회의라고는 하지만 너무나도 안이한 분위기였다.

일단 대전 회의를 주최한 오딘부터가 그러하지 않은가.

그는 다리를 쩍 벌리고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여 오른손으로 광대뼈를 받치고 있다.

일을 심각하게 생각한다면 저렇게 거드름을 피울 수도, 여유로울 수도 없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더더욱 여유로울 수 없는 것이었다.

“반도 남지 않았다고 하지만 저들의 병력을 모두 활용할 수도 없겠구나.”

유배를 보낸 지휘관들, 그들 휘하의 병력을 말하고 있음이었다.

사실 그랬다.

계약 기사들은 몰라도 가신 기사들은 주군에 대한 충성심을 우선으로 생각한다. 그러니 자신의 주군이 무력해지고, 자리에서 이탈을 했다고 해도 한동안은 상처가 있기 마련이다. 그자들이 뜻대로 움직여 준다는 보장은 없었다.

하물며 생사를 넘나들어야 하는 전쟁터에서는 오죽할까.

이 말을 보탄이 아뢰고 있었다.

“저들과 대적하는 데에 있어서 많은 수가 필요할 것 같지는 않사옵니다. 앞서의 전투로 저희는 단지 수로써 싸움의 승패가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배웠습니다. 이는 오딘 님께서 가르쳐 주신 일입니다.”

교묘한 말이었다. 오딘을 향하는 것 같으면서도 여러 신하들에게 일방적으로 가르치는 듯한 말.

발데르는 그가 참으로 뛰어나다고 여겼다. 다른 신하들 역시 그리 생각하였다.

오딘은 마땅히 웃어 보였다.

“본 좌가 수장으로 있던 곳도 보탄이 말하고 있던 것과 같았다. 수십의 무사가 수백, 수천의 무리를 능히 이겨 내었다.”

오딘이 거론하고 있는 무리 역시 일반 사람으로 보아서는 곤란했다. 그들도 문파나 집단에 소속되어 있던 뛰어난 자들이었으므로.

요 근래 오딘이 근방에 일월진을 설치하기 시작했던 것은 다 이런 이유였지 않은가.

믿을 수 있는 자들 모두를 정예로 만들어 최고의 힘을 가지겠다는 욕심.

켈타스가 들으면 서운해할지도 모르지만 그는 아직 오딘의 신임은 고사하고 믿음도 받지 못했다.

어쨌거나 지금 보탄의 말은 켈타스에게는 맥이 탁 풀리는 소리였다. 그로 인해 대화의 방향이 비뚤어졌다. 어렵게 찾아온 기회였는데 이런 식으로 흘러가버리니 달가울 리가 없었다.

보탄 백작이 야속하고 은근히 미워지기까지 하려 했으나 내색은 하지 않았다. 그가 틀린 소리를 한 것도 아니었으므로.

제라드를 불러오기까지 많은 난관이 함께할 것이란 생각에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의 기분과는 상관없이 다시 오딘의 말이 이어지려 했다.

“그럼…….”

여기까지 말했을 때 대전 밖에서 궁내부원이 기별을 고했다.

“하명하신 자를 찾아왔습니다.”

오딘은 말을 끊고 그부터 불렀다.

“들라 해라.”

곧 대전 문이 열리고 아론이 황망하기 이를 데 없는 표정으로 난감해하며 한 발자국씩 들어섰다.

궁내부원이 슬쩍 눈치를 주었다.

그때서야 아론은 기죽은 표정으로 문이 닫힐 위치까지 걸어갔고 곧 대전 문이 닫혔다.

그 모습이 보기 나쁘진 않았는지 오딘은 얼굴에 미소를 그리고는 그를 향해 말했다.

“아론, 넌 좀 남아 있어라.”

“네!”

곧게 뻗은 나무처럼 자세를 바로 하며 아론은 크게 대답했다.

궁 안, 그것도 대전 안에서는 실례인 행동이었지만 몰랐으니 그런 것이라고 생각했다. 여기 있는 귀족들 모두가 말이다.

오딘이 고개를 슬며시 틀며 눈짓을 보냈다.

그가 가리키는 쪽은 귀족의 옆이었다.

하도 황송해 감히 따르기도 그랬지만, 아니 듣는다면 질책이 들려올 것.

아론은 엉성하게 자리를 점하여 다른 자들의 서 있는 모습을 곁눈질로 훔쳐보며 비슷하게 따라 섰다.

오딘은 이내 회의를 속개시켰다.

“어쩌면 잘된 일일 수도 있겠구나. 스스로 나라를 가져달라고 오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느냐.”

누구도 그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여기 모인 모두가 오딘의 가공할 존재를 높이 샀기 때문이다.

마스터만 2명, 거기에 당사자인 아론은 몰랐지만 발데르와 보탄은 오딘이 아론을 이 자리에 서게 한 것을 짐작했다.

‘마타하리를 투입하실 모양이구나.’

직접 오딘이 손을 쓰지 않아도 마스터가 2명이다.

거기에 최정예의 병력들. 그들만으로 저들을 위협할 수 있었다.

앞서 전투를 경험하며 그러했지 않은가.

바리톤 왕국의 전력이 자신들이 기억한 그대로라면 저들은 무덤을 파고 들어왔다고 생각했다. 여기 모인 귀족 모두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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