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왕의 몰락 (11/67)

왕의 몰락

게티롱은 바리톤 왕국을 향해 내달리는 중이었다.

‘그놈이 눈치 채는 바람에 예정된 시각이 조금 당겨지기는 했지만, 문제 될 것은 없다.’

대략적인 병력 규모와 전투 상황, 이하 여러 상황 등을 종합해보면 로테노아가 원하는 답을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무책임한 생각이었다.

게티롱이 하려는 얘기는 반 이상의 추측이 곁들어질 테니까.

로테노아는 실제 상황에 대해 듣길 원하지, 게티롱의 추측 따위를 듣고 싶어 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게티롱은 그에 관하여 실오라기만큼의 양심의 가책도 없었다.

“난 바람처럼 빠르다.”

달릴 때마다 항상 자신에게 세뇌하는 말을 주절거리며 그는 국경을 넘으려 하고 있었다.

자아도취가 심해져 부주의했던 탓일까.

공교롭게도 한 남자와 어깨가 부딪혔다.

크게 맞닥뜨린 것이 아닌 터에 볼썽사납게 서로가 나뒹구는 일은 없었지만 심히 기분이 언짢아져 게티롱은 몸을 돌리며 성질을 부렸다.

“감히 어떤 놈이 나 게티롱의 기분을 거스르는 것이냐!”

화가 나서 실쭉이 눈을 뜨고 대상의 하반신부터 서서히 올려다보았다.

기선제압을 하려던 참이었다. 그리고 저놈이 잘못을 깨닫고 뉘우치게 할 작정이었다.

하나, 작전과는 다르게 시선은 그의 장딴지 부분에서 잠시 멈추고 말았다.

‘피… 피?’

보는 그대로였다.

게티롱의 앞에 등을 돌리고 서 있는 사내는 붉은 피가 뚝뚝 떨어지는 검을 길게 늘어뜨리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하반신이 피에 젖어 있었다.

다시 게티롱의 시선이 용감하게 그자의 위로 향했는데 그때 사내의 얼굴이 반쯤 돌려졌다.

그는 희열이라도 느끼는지 초승달 모양으로 입을 벌리며 사악하게 이를 드러내 웃고 있었다.

거기에다 동공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광망을 토하는 눈을 마주치며 게티롱의 발이 의지와는 다르게 한 걸음 뒤로 내디뎌졌다.

‘미, 미친놈이로군.’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게티롱은 그 즉시 발을 떼어 거리를 벌렸다.

아니, 벌리는 게 아니라 멀어지는 게 맞았다. 그는 이 상태로 바리톤 왕국까지 달려갈 생각이었으므로.

하지만 계획과는 다르게 게티롱은 또 한 번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인근의 마을이 시체들로 뒤덮여 있었기 때문이다. 미풍이 불어와 피비린내를 코끝에 전해주었다.

어린아이, 노인, 애를 밴 여인까지… 말 그대로 몰살이었다. 산 자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어지럽게 널려 있는 주검들, 풍비박산 난 가옥들, 땅엔 구덩이가 패어 있거나 어떤 건물은 무엇인가에 잘려졌는지 쓰러져 있었다.

게티롱 역시 감정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리 특별한 마을 같지도 않은데 사람들이 죽어 자빠진 광경이 유쾌할 리가 없었다.

아니, 속에선 울분이 솟았다. 그는 나름 정의로운 사람이었으므로.

눈빛 속에 애절한 빛이 스쳤다.

곧 그 빛은 분노로 뒤바뀌었다.

이윽고 그는 뒤로 돌았다. 이 일을 저지른 대상이 누구인지 직감했기 때문이리라.

“오늘은 바쁜 일이 있어 그냥 넘어가 주마. 하나, 다음엔 내 눈에 걸리지 않는 게 좋을 것이다. 명심해라!”

게티롱은 자신이 지나쳤던 길을 돌아보며 어딘가에 있을 광인을 향해 그렇게 경고를 내뱉고는 다시 갈 길을 재촉하기 시작했다.

외람된 말이지만 이는 파르티잔에겐 더없는 행운이었다. 우연찮게도 그가 하루를 묵어가려던 마을이 이곳이었으므로.

그는 아픈 다리를 절어가며 오딘의 마수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방향을 틀어 도망친 것이다.

한 다리가 멀쩡하다며 다시 돌아오면 어쩌겠는가.

무리도 아니었다. 오딘의 지랄 맞은 성격은 언제든 발동하므로.

* * *

게티롱은 바리톤의 국왕인 로레노아를 만나는 중이었다. 그에게 왕의 알현이라는 단어는 어울리지 않을 말이었다.

여전히 게티롱의 어깨에는 힘이 들어 있었고 표정은 근엄했다. 왕보다도 더욱.

로테노아는 순간 의심이 들었다. 예상했던 시각보다 그가 빨리 돌아와서다.

“생각보다 빨리 왔구려.”

“훗.”

콧방귀로 일어난 바람이 로테노아의 안면에 닿았다.

두 번이나 이자를 마주쳤지만 영 적응이 되질 않는지 로테노아는 또다시 이맛살을 구겨야만 했다.

게티롱도 기분 나쁜 표정이었다. 좀 전의 말로 무시를 당한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였다.

“날 뭐로 보는 게요? 난 바람처럼 빠르오.”

자신감, 그리고 의젓함이 로테노아를 압도하고 있었다.

자신보다 큰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던지 로테노아는 의심의 낯빛은 지우고 표정을 밝게 하여 그를 대했다.

“기분 나쁘게 듣지 말아주셨으면 하오. 내 그대같이 빠른 자를 못 보아서 그러니…….”

“다들 그러더군.”

말문이 콱 막혔는지 로테노아는 잠시 입을 닫았다가 정색하며 본론을 꺼내었다.

“그래, 아레인에 갔던 일은 어찌 되었소?”

“접전 중이더군.”

적어도 가보기는 했다는 말이다.

기대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한 답이었다.

조금은 긴장하고, 또 조금은 들뜬 얼굴이 되어 로테노아가 물었다.

“상세히 얘기해주겠소?”

게티롱은 로테노아의 얼굴을 쓱 훑어보고서 천천히 말을 이었다.

“두 군대가 마주했지. 그리고 서로에게 달려들었소. 피가 튀기고 어지럽게 병장기가 흩어졌지. 죽은 자가 족히 이천은 넘을 거요. 하지만 수가 달린 자들이 뒤늦게 도망치더군. 그들은 용감했지만 적들이 너무 많아 어찌할 도리가 없었던 게요. 도망치는 도중 지휘관이 사망했지. 그들의 깃발이 땅바닥에 널브러지고…….”

그가 하는 얘기는 꽤나 오래되었다.

다분히 추측뿐인 말들을 섞어놓으면서도 게티롱은 약간도 미안해하는 기색이 없었다.

게티롱은 바보가 아니었다. 수는 저쪽이 압도적으로 많았으니 자연 저쪽이 승리하게 될 것이란 가정이 들었다. 그 상황을 그대로 늘어놓고 있는 것이다.

뒤로 갈수록 수가 많은 왕국군이 유리해질 것이란 계산이 앞서 반란군이 깡그리 무너지기 시작했다는 식으로 얘기가 흘러가자 로테노아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 그렇게 상대가 안 되었소?”

“그래도 대단했소. 적은 수로 그 정도의 저항을 했다면 대단한 거요. 그대도 가서 봤어야 할 것을…….”

계산되어 있던 말이었다. 어찌 왕이 성을 비우고 이웃 나라의 전투나 구경하러 다니겠는가.

그래도 그 말이 자신을 생각해주는 것처럼 들렸던지 로테노아는 만면에 미소를 드리웠다.

“허허, 나도 일이 있는데 어찌 그럴 수가 있겠소. 들은 것만으로 만족하겠소.”

그는 시종장을 시켜 해결사 게티롱에게 잔금을 치르라는 명을 내렸다. 그러면서 눈짓으로는 더 챙겨 주라는 명을 내렸다.

시종장 역시 눈칫밥이 적지 않았던지 그 뜻을 헤아리고는 게티롱을 불렀다.

“따라오시지요.”

“에헴.”

뒷짐을 지고 그를 따라가는 게티롱. 로테노아는 그 뒷모습을 보며 정말 세상이 넓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저런 자를 내 곁에 둘 수만 있다면…….’

욕심 아닌 욕심이었다. 하는 행동으로 봐서는 어떤 제안을 해도 들어올 것 같지 않은 인물이었다.

“세상엔 가질 수 없는 것도 있다.”

그렇게 되뇌며 로테노아는 욕심을 접어야 했다.

* * *

아레인 왕성.

고대하던, 그리고 우려하던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발데르와 보탄을 위시한 귀족들에게는 고대하던 일이었다.

그에 반해 왕성에 몸을 담고 있던, 하인리히를 돕던 귀족들에게는 우려하던 일이었다. 발데르는 할라리야 평원에서의 전투가 끝남과 동시에 왕성으로의 진군을 명했다.

오는 길에 걸리는 것이라고는 정찰병들뿐이었다.

하인리히는 잔뜩 겁을 먹고 왕성의 보호에만 열을 올렸던 것이다.

“막아라. 막으란 말이다!”

수비대장은 필사적으로 소리치는 중이었다. 분명히 명령이었음에도 병사들은 물론, 기사들까지 그의 앞에 나서는 것을 꺼려했다.

그도 그럴 것이 흉흉한 오러 블레이드가 모든 것을 집어삼킬 듯이 빛을 뿜고 있다.

강철조차 잘라버리는 검 앞에선 무엇도 장애가 될 수 없었다.

“막아서는 자들은 죽음을 각오해야 할 것이니라!”

발데르가 어쩌다 외눈이 되었는지는 안면이 있던 기사들조차 연유를 알 까닭이 없었다.

하나, 그것이 더한 위협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눈을 잃어버려서인지 예의 자비로웠던 그 모습마저 사라졌다고 생각했으므로.

지금 이 순간에도 중장갑주를 걸친 근위 기사들마저 속수무책으로 쓰러지고 있질 않은가.

검을 마주치는 것조차도 어려웠다. 그 즉시 검은 두 동강이 나버렸으니까.

방어하는 자들은 악마의 현신이 있다면 이런 모습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에게 수십의 사람들이 변변한 저항조차 해보지 못한 채 차가운 바닥에 몸을 누였다.

그중엔 하인리히의 총애를 받던 공신마저 있었다.

죽음이 모든 것의 해결책이 될 수는 없지만 지금 이 순간만은 막아서는 자가 있어서는 안 된다고 여겼는지 발데르는 손속에 조금의 자비도 두지 않았다.

그것이 저들에게 더 큰 공포심을 조장시켰다.

그 뒤로 보탄 남작과 기사들이 성문 진입을 시도하고 있었다.

“뚫리면 모든 게 끝장이다! 왕성을 보호하라!”

대전 안에도 난리가 났다. 하인리히가 대노하며 난폭하게 굴고 있기 때문이었다.

손에 잡히는 모든 것들은 애꿎은 근위 기사들에게 날아들었다.

깡!

“무능한 자들 같으니라고. 그것도 못 막는 게냐? 당장 여기로 쳐들어온단 말이다. 어서 발데르를 죽이라고 해라. 그렇지 않으면 네놈들이 내 손에 죽을 것이다.”

몇 차례나 그를 안정시키려고 했지만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들 중에는 그가 던진 물건에 얻어맞아 머리가 깨진 이도 있었고, 팔이 부러진 이도 있었다.

기사들의 불만은 적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근위 기사단장의 얼굴 또한 편치 않았다.

‘폭군을 왕으로 받든 내 탓이다.’

밖의 소란이 점차 커져 갔다. 함성 소리가 대전 안에까지 들리고 있질 않은가.

이는 왕성의 수비가 뚫렸음을 의미했다.

하인리히 역시 더 거칠어졌다.

당장에 보검을 빼들며 근위 기사들에게 다가왔다.

실성한 사람처럼 그는 웃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한 기사의 얼굴에 더러운 침을 뱉었다.

“퉤! 너도 내가 우습게 보이냐?”

감히 왕의 앞이라 기사는 기분 나쁜 표정조차 짓지 못했다.

그 순간,

스걱!

섬뜩하고 기분 나쁜 소리가 흘렀다.

몸에서 분리된 기사의 머리가 바닥으로 굴렀다. 목을 잃은 몸뚱이는 고통을 주체하지 못하고 부들부들 떨다가 무거운 소음을 뱉으며 쓰러졌다.

진한 붉은 피가 하염없이 흘러내려 붉은 카펫을 적시고 있었다. 하인리히가 죄도 없는 기사의 목을 베어버린 것이다.

대전 안에 있던 근위 기사들의 눈이 두려움에 물들었다.

특히나 방금 목이 떨어진 기사의 옆에 있는 자는 극도의 공포심에 휩싸였다. 왕의 시선이 자신을 향하고 있다.

여전히 음침하게 웃으며 하인리히가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검을 든 어깨를 한껏 틀었다.

또다시 베어버릴 작태였다.

그 앞에서 기사는 이렇게 죽는 것이 억울하다고 느꼈다. 하지만 모든 게 운명이라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음을 느끼고는 질끈 눈을 감았다.

콱!

이상한 소리였다. 목이 잘려 나가는 아픔 또한 없어 기사가 눈을 떴을 때 근위 기사단장이 하인리히를 잡아먹을 듯 노려보고 있었다.

“더는 못 봐주겠구나!”

노성을 터뜨리는 근위 기사단장의 손에서는 피가 뚝뚝 떨어졌다. 그 손이 하인리히의 검을 틀어쥐었기 때문이다.

하인리히는 노발대발하며 소리쳤다.

“네 이놈! 너부터 죽고 싶은 게냐? 당장 이 손을 놓아라!”

무차별적으로 발길질이 행해졌다.

하지만 근위 기사단장은 미간을 찌푸리며 더더욱 사나운 인상으로 왕을 노려보았다.

“애초에 왕이 될 자질이 없던 놈이었다. 이자의 목을 바쳐 발데르 공작의 분을 조금이나마 달래주어야겠구나.”

왕궁 안에서의 전투는 한층 격렬해졌다. 망루는 물론, 첨탑까지 발데르의 수중에 들어왔다.

“모두 멈춰주십시오. 전투를 멈춰주시기 바랍니다.”

시종들의 입에서 나오는 소리들은 전해지고 전해져서 양 진영 군사들의 귀에 차츰 파고들었다.

소란이 잠잠해질 무렵, 왕을 호위하고 있던 근위 기사대가 몰려나왔다.

그중 유독 눈썹이 짙고 백발의 머리카락을 지닌 남자가 무심한 표정으로 발데르와 눈을 맞췄다.

하인리히의 근위 기사단장을 맡고 있던 사내였다.

그는 손에 들린 하인리히의 수급을 들고 발데르에게 뚜벅뚜벅 걸어왔다.

좌중은 침묵에 휩싸였다.

“원하는 게 이것이시오?”

그가 하인리히의 수급을 내밀자 발데르의 눈은 한층 더 차가워졌다.

잠시 그를 노려보다가 발데르는 그 수급을 받아들었다. 그리고 모든 노여움을 담아 하인리히의 머리를 뚫어져라 노려보았다.

죽은 하인리히 역시 그 눈빛이 두려웠던지 눈을 크게 뜨고 있었다.

콰작!

하인리히의 머리에 발데르의 검이 꿰여져 땅에 파고들었다. 하인리히는 이상한 얼굴이 되어 있었다.

그가 거머쥔 부귀와 영화가 오래 가지도 못하고 이런 식의 결말을 이끌어낸 것이다.

진심으로 하인리히를 따르던 사람이 없었다면 거짓말이리라.

한쪽에서는 그런 발데르를 아니꼽게 바라보고 있었다.

못마땅한 시선을 눈치라도 챘는지 발데르는 목청을 높여 소리쳤다.

“더 싸울 자는 없느냐?”

하지만 어떠한 곳에서도 대답이 들리지 않았다. 이미 힘의 차이를 실감했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끝나버린 일이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았던지 발데르는 더 크게 소리쳤다.

“더 목숨을 버릴 자는 없느냔 말이다!”

마치 용이 울부짖는 소리 같았다.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성 구석구석에 퍼졌음에도 아무런 대답이 따르지 않았다.

딸캉!

근원을 모를 곳에서 검이 땅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그것을 시작으로 여기저기에서 검을 놓는 소리가 들렸다.

기사들이 사방으로 돌아다니며 항복한 자들을 한데 모아 무릎을 꿇렸다.

마지막으로 근위 기사단장이 샤르트의 손에 의해 억지로 무릎이 꿇렸다.

근위 기사단장은 인상을 찌푸렸지만 분해하는 모습이 아니었다. 하인리히를 따르기로 했던 자신의 결정에 대해 속절없이 후회를 하고 있는 것이다.

‘부질없는 시간이었다. 한 사람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이 피를 흘려야 했나. 이 얼마나 덧없는 일이었던가.’

그게 그리도 억울했는지 근위 기사단장의 눈시울이 급속도로 뜨거워졌다.

졸지에 눈물이라도 쏟을 것 같았지만 흘리지는 않았다. 그건 자신이 감당해야 할 책임이었던 것이다.

모든 상황이 정리되었을 무렵, 발데르는 오딘이 돌아가 있을 그라니트성을 향해 오체투지를 하였다.

“모든 게 오딘 님의 덕택이옵니다. 부족하나마 이 발데르 죽는 날까지 힘이 되어드릴까 합니다.”

그리고는 일어서 하인리히의 수급에 꽂혀 있던 검을 빼들어 크게 외쳤다.

“오딘 님께 영광이!”

“오딘 님께 영광이-!”

발데르를 따라 왕성에 난입한 자들은 물론, 성 밖을 담당하던 이들 역시 검을 높게 쳐들며 크게 그 소리를 복명복창하였다.

거대한 소리가 왕성을 넘어 만천하에 드넓게 퍼지고 있었다.

궁내를 모두 장악한 후 발데르와 보탄이 켈타스 후작에게 다가왔다.

켈타스가 보는 두 사람의 표정은 매우 비슷한 것이었다. 한을 푼, 거기에서 얻은 기쁨을 주체 못하는…….

뭐가 그리 미안한지 발데르가 어려워하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후작, 뒤를 좀 부탁하네. 내 해야 할 일들이 남아 있네. 일을 벌여 놓고만 가는군.”

“아닙니다. 제가 마땅히 해야 할 일입니다.”

그는 진심으로 발데르를 존경하는 듯했다. 말투부터 전과 달라졌지 않은가.

발데르를 따르던 다른 귀족들이 근방에서 이구동성으로 외쳤다.

“공작 전하, 저희의 마음도 전해주십시오.”

그에 발데르는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알았네. 내 그리함세.”

딴에 켈타스도 용기를 내서 입을 열었다.

“저도 언젠가 그분께 정식으로 소개 좀 부탁드립니다.”

발데르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떠올리고는 그의 어깨에 손을 올려놓으며 이상한 물음을 던졌다.

“팔을 내놓을 각오는 되어 있는가?”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농담일세. 내 전해드리도록 함세. 공주님을 모시고 왕성에 입성할 생각이니 잘 좀 부탁하네.”

“염려 마십시오.”

곧 여러 필의 말들이 기사들의 손에 의해 이끌려 나왔다.

발데르는 만족하는 얼굴로 돌아섰다. 그리고 보탄 남작과 함께 말에 올라 몇몇 마법사들을 대동한 채 그라니트성과 인접한 곳으로 연결되는 마법진으로 향했다.

* * *

라투스 영지.

리먼 백작은 근방을 지나던 도중 괴이한 사건 때문에 이곳으로 왕래를 하였다.

사건이란 다름 아닌 집단 살인을 말한다.

범인을 누구도 목격하지 못했다고는 하지만 사실 본 사람이 있었다.

언젠가 로테노아 국왕의 일을 해결해준 게티롱이라는 사나이.

그러나 그는 이와 같은 일을 말도 꺼내지 않았을뿐더러 국왕에게 의뢰받은 일을 마친 후 이미 바리톤을 떠나고 없었다.

“처참하군.”

시체일 뿐이지만 보기 역겨울 정도였다.

피비린내가 진동하고, 신체에서 떨어져 나간 부위들이 이리저리 널려 있다.

냄새가 심했던지 그를 보필하고 옆에서 말상대가 되어주는 기사 역시 헝겊으로 코와 입을 가리고 말했다.

“사람이 아닌지도 모르겠습니다. 사람이라면 조금의 인정이라도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들은 군사도 아니고 그냥 마을 사람들일 뿐인데…….”

리먼은 말 위에서 유심히 시체를 살펴보았다.

“사람이다. 검상이야. 몬스터라면 이렇게 반듯하게 자르지는 않았을 거다. 또 시체를 먹어치운 흔적조차 없질 않느냐.”

이 부근의 몬스터들은 그의 말대로 육식을 하는 녀석들이 많았다. 인간이야 같은 종족이니 스스로를 먹어치우지 않지만 몬스터의 입장에서 보면 또 달랐다. 그들은 인간들 역시 하나의 사냥감에 불과하므로.

단지 지능이 뛰어난 녀석들은 인간과 마주치길 두려워했다.

“왜 이런 짓을 벌였을까?”

리먼의 질문에 기사는 선뜻 대답할 수 없었다. 그러나 생각은 하여 성심껏 대답을 해주어야 했다. 주군의 물음을 묵살하는 것 역시 신하 된 자로서는 불경한 짓이었으므로.

“이 마을에 원한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일리가 있었다. 그러나 리먼은 좀 더 다양한 추측을 원했다.

“그게 아니라면?”

“아마도 마을에 얽힌 사연이 있을 듯합니다. 설마 살인을 즐겨 이들을 죽이지는 않았을 테니까요.”

“살인을 즐긴다라……. 그러고 보니 아주 오래전에도 이와 같은 일이 있었어. 마을 전체가 이렇게 피바다가 되어버렸지.”

“이런 일이 또 있었습니까?”

수행 기사가 모르는 것은 당연했다. 그는 그리 많은 나이도 아니었고 이 기사 직을 맡은 게 오래되질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내가 스물둘 정도의 나이였을 때였지. 어쨌거나 지금으로서는 알아볼 도리가 없군.”

그때 주변을 탐색하던 한 기사가 다급하게 달려왔다.

“이쪽… 이쪽으로 핏자국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리먼은 그쪽을 향하지 않고 고삐를 채어 말을 돌려 버렸다.

“피가 말라붙어 있다. 지금 뒤쫓는다 해도 너무 늦은 일일 것이다. 그만 가지.”

무심한 눈이었다.

어쨌거나 주군의 명이 떨어진 터라 주변에 흩어졌던 기사들이 모여들었다.

리먼은 마을 사람들이 불쌍해서 이곳에 들른 것이 아니었다. 그는 영지민들을 챙겨 주는 영주가 아니었으므로.

그저 자신의 궁금증을 달래기 위해서였다.

그들은 억울하게 죽은 자들 앞에서 결국 몇 마디 말만을 나눈 채 자신들의 성으로 향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리먼은 그가 자신의 목숨을 가져갈 인물이 되리라는 것은 미처 예견하지 못했다.

* * *

발데르와 보탄은 바닥에 몸을 바짝 웅크리고 있었다.

“불길에 몸을 집어던지라고 하셔도 얼마든지 따를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모든 것을 이루었으니 미리 약조하신 대로 소신들의 목숨은 이제 오딘 님의 것이옵니다. 이에 일체의 불만을 품지 않을 것이옵니다.”

둘을 내려다보며 오딘은 기특하게 여겼다.

사실 오딘에게는 이 둘을 도와준 것이 계약이나 다름없었다.

자기 아래의 수하를 만드는 일은 쉽지 않다. 처음 이 세계에 발을 디뎠을 때는 말도 통하지 않아 마음에 드는 수하를 구하는 것은 더더욱 무리일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어떻게 보면 이것도 기연이랄 수 있겠군.’

오딘은 그렇게 생각했다. 공포로 사람을 잡아놓는 경우도 있겠지만 마음에서 우러나 따르는 자들을 만들기란 쉬운 게 아니다.

넓게 보자면 아레인 왕국까지 꿀꺽한 것이 아닌가.

이 모든 게 오딘의 계산하에 있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애당초 정도 붙이지 않았던 이 녀석들을 도와줄 리 없었으니까.

따지고 보면 숲을 훼손하고 정령을 만나게 되어 1년 동안 살생을 금할 것에 대한 약속을 한 것 역시 득이 되어 돌아온 셈이다.

‘새옹지마라는 말이 있다더니 지금 내 경우가 그러하구나. 밉지 않은 녀석들이다.’

이들은 확실히 마교의 녀석들과는 달랐다.

마교는 힘이 지배한다. 자연히 그들은 힘을 숭배하는 것이지, 이들처럼 마음에서 우러나 따르는 경우는 드물다.

점점 이 세상에 정이 들어가고 있었다.

오딘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되었으니 일어서거라.”

발데르와 보탄은 무척이나 감개무량한 모습이었다.

“그만 가보아라.”

“네? 어디를 말씀하시는 것이신지?”

“너희 둘 다 각자 할 일이 있을 것 아니냐.”

그렇게 말하고 오딘이 돌아섰다.

발데르의 뇌리 속에는 엘레느 공주가 떠올랐다. 그리고 보탄의 뇌리 속에는 부인과 딸아이가 떠올랐다.

눈시울이 붉어지는 것을 억누르고서 두 사람은 이미 시선을 두고 있지 않을 오딘이 사라질 때까지 경건하게 허리를 숙이고 있었다.

보탄은 주위의 시선을 아랑곳 않고 부인이 있을 방으로 부리나케 달려갔다.

가슴은 세차게 뛰었는데, 한발 한발 내디딜수록 더해졌다.

급기야 부인의 처소에 다다라 설렘에 터질 듯한 심장을 안고 벌컥 문을 열었다.

딸아이를 침대에 누이던 부인의 시선이 자신을 향했다.

“여보!”

감격에 겨운 목소리가 방 안에 메아리쳤다.

이미 그녀의 눈에서는 눈물이 쏟아지고 있었다. 보탄은 재빠르게 다가서 손바닥으로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울지 마시구려. 내 이렇게 무사히 왔지 않소.”

그녀는 보탄의 가슴에 얼굴을 묻으며 나지막이 속삭였다.

“당신이 정말 자랑스러워요.”

그 말엔 많은 의미가 내포되어 있었다. 한때 그녀는 속으로나마 남편을 탓했었다. 왕국도 왕국이지만 자신과 딸아이를 다른 남자한테 맡길 수 있냐고.

그에 반해 이런 생각도 들었다.

‘아가와 내 안전을 생각하지 않으셨다면 그리하지 않으셨을지도…….’

분명 그러했다.

그가 가지는 슬픔이란 자신이 가지는 슬픔보다도 더욱 컸을지 모른다. 질투심에 가슴이 찢어지는 슬픔을 안고서 전장을 누빈 부군이 아닌가.

그럴 때마다 잠시나마 그릇된 생각을 한 자신이 부끄러워져 견딜 수가 없었는데 오늘이나마 이렇게 털어놓게 된 것이다.

하염없이 흐르는 그녀의 눈물을 닦고 또 닦아주다가 보탄은 거칠고 투박한 손으로 그녀의 양손을 가지런히 잡고서 입술을 가져다댔다.

애정의 표시였다.

고생에 겨운 남편의 살갗이 와 닿자 그녀의 가슴이 미어질 듯 아파왔다.

정말 그는 고생을 많이 한 것이다.

왕국을 위해서, 자신을 위해서, 딸아이를 위해서…….

그 고생에 대한 보답이라도 해주려는 생각이었던지, 그녀는 보드라운 두 팔로 그의 목을 끌어안고 촉촉한 입술을 남편의 거친 입술에 포개었다.

이내 두 사람의 체온이 뜨거워지며 밤이 깊어가고 있었다.

그 시각, 발데르는 엘레느 공주를 알현하는 중이었다.

“그자의 것입니다!”

이렇게 떳떳하고 자랑스러워 보일 수 있을까. 정말 그의 얼굴 표정은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선물을 하는 자의 것이 되어 있었다.

그럴 만도 한 것이 지금 발데르가 들고 있는 것은 당연히 바쳐야 할 하인리히의 수급이었다.

그것을 보며 엘레느의 눈도 원망에 젖어들었다.

모든 것을 앗아간 사람.

기쁘기도 하고 슬프기도 했다.

한을 풀었다는 생각에 기뻤으며, 이자를 보자 다시 과거가 떠올라 슬펐다.

당장에라도 울음이 터질 것 같았지만 굳게 버텨 냈다. 그를 뒷받침해주는 존재를 머릿속에 떠올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울지 않을 거예요. 난 강한 여자가 될 거예요. 그래서 반드시 당신께 은혜를 갚겠어요.’

그녀의 표정을 지켜보던 발데르는 돌연 가슴이 따스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충분히 의젓하고 늠름하며 아름다우십니다. 이렇게 자라주셔서 너무나도 감사드립니다.’

엘레느는 날이 갈수록 아름다워졌다.

발데르의 선입견이 가미된 탓이 아니었다.

본래 아레인 왕국의 왕비, 즉 엘레느의 어미이자 발데르의 누이 역시 빼어난 미모의 소유자였다.

거기에 오딘이 엘레느에게 주안신마공을 익히게 하였으니 무리도 아니었다. 이는 발데르도 모르는 일이었다.

알았다고 한들 오딘이 그녀를 해롭게 하지는 않았으리라는 생각이 들었을 것이다.

그 이후 무슨 생각이 있었던지 오딘이 한 차례 더 그녀에게 찾아와 꾸준히 이것을 익힐 것을 종용하였고, 엘레느는 하루도 거른 적이 없었다.

덕분에 그녀의 피부색은 백옥같이 고와졌으며 신비할 정도로 푸른 눈망울은 사람들의 영혼이라도 앗아갈 것 같았다. 바람이 맞닿을 때마다 찰랑거리는 곱디고운 금색의 머릿결과 붉고 도톰한 입술은 너무나도 사랑스러웠다.

여신이 어렸을 적의 모습이 있다면 저런 모습이 아닐까 하는 느낌마저 들었던지, 그녀가 지나칠 때마다 사람들은 하나같이 뒤를 돌아보며 감탄하기 일쑤였다.

이때까지도 엘레느는 그것을 익히게 한 것에 대하여 일체의 의심조차 품지 않고 있었다.

몸은 더 건강해졌고 기운 또한 샘솟았으니까.

단지 그것이라고 생각했다.

결정적으로 그 사람을 믿었다. 만약 자신에게 해가 되는 것이라고 했어도 엘레느는 바보같이 그대로 따랐을 것이다.

복잡한 표정을 짓는 엘레느를 바라보고 있다가 발데르는 애써 웃음을 지었다.

“두 분께서도 이제 편히 눈을 감으실 수 있으실 겁니다.”

밤이 늦어 처소로 돌아온 후에도 발데르는 난간에 기대 오랫동안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마음을 실어 밤하늘에 나지막이 속삭였다.

“이제는 염려하지 않아도 되겠구나. 편하게 쉬려무나.”

* * *

소문은 빠르게 전해졌다. 그라니트성에 잔류했던 자들은 물론, 그들의 식솔과 가솔들, 그리고 아레인에서 살고 있던 백성들에게까지.

머지않아 이웃 국인 바리톤 왕국에까지 이 소문이 퍼져 갔다.

자연히 로테노아 국왕 역시 이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의외로군. 어떻게 왕국을 재탈환하게 되었을까? 게티롱이라는 자에게서 들은 보고로는 왕국군이 유리해 보인다고 했는데.”

의문이 들었던 게 사실이다.

간간이 저들의 소문은 접할 수 있었다. 그러나 둘의 전력을 가늠하던 자들 어느 누구도 발데르 진영이 승리를 거머쥐게 될 줄은 몰랐다.

그 때문에 왕국의 현자라는 자를 불러 독대를 하는 중이었다.

“경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신이 미루어보기에는 크게 염려하실 사안이 아닌 듯합니다.”

호기롭다는 듯이 로테노아가 되물었다.

“호오~ 어찌하여 그러한가?”

“작은 무리와 큰 무리가 부딪쳤다고 들었사옵니다. 그리고 작은 무리가 큰 무리를 쓰러뜨렸다고 전해들었습니다. 그렇다면 더 큰 손실이 일어났을 것입니다. 이는 국왕 폐하께옵서 바라시던 일이 아니고 무엇이겠사옵니까.”

로테노아는 머릿속이 확 밝아진 느낌이 들었다.

“그 말이 옳구나. 내 그대를 부르기를 천번만번 잘했도다.”

“과찬이시옵니다.”

로테노아는 확실히 기뻐하는 얼굴이었다.

덧붙여 현자라는 자가 말했다.

“때를 놓치지 마시옵소서. 시기를 놓치면 고생하는 법이라고 하였습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좀 더 경우를 따져 보고 행하는 게 옳을 일이 될 터인데 현자는 신이 나서 읽은 책 중에 그럴싸한 내용들을 막 읊조리는 중이었다.

“그대의 말이 옳고 또 옳도다. 짐은 참 복이 많은 인물이로다. 그대같이 총명한 신하를 곁에 두고 있으니…….”

하지만 천장에 매달린 샹들리에는 두 사람의 얼굴 빛만큼 밝지는 못하였다.

어쩌면 국운을 느끼고 있는 것일지도…….

* * *

아레인 왕국의 정세는 빠르게 변화했다.

그라니트성의 주력들이 왕성으로 이주했는데 본래대로라면 왕의 자리는 오딘이 가져야 했다.

그러나 오딘은 그 자리를 거절했다.

“여왕을 앉혀라. 본 좌는 그 위를 담당하겠노라.”

여왕이라면 엘레느를 일컫는 말일 것이다.

발데르와 그를 따르는 귀족들은 내심 감사해하면서도 감탄을 금치 못했다.

아직 엘레느는 왕국을 다스리기에는 미흡한 점이 많았다. 마음이 여린 소녀인 것도 한몫했다. 오딘은 말 그대로 내정간섭을 하겠다는 것이었지만 오히려 귀족들은 당연히 그래도 된다고 여겼다. 그가 아니라면 오늘 같은 성공은 없었을 것이므로.

더군다나 그 말은 그가 계속 아레인의 편에 서겠다는 말과 같질 않은가.

그들은 가장 듬직한 분을 모신 것이다.

오딘이 왕국을 거머쥐게 된 동기가 있었다.

그것은 무려 몇 해 전 이 세상에 처음 발을 디딜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어차피 돌아갈 방법이 없다면 이곳에서 새로운 세상을 펼쳐 볼 생각이었다.

중원을 호령하던 시절, 그에게 눈에 거슬리는 모습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황실의 작태였다.

권력과 돈에 의해 움직이는 간악한 무리들. 그들은 아무리 좋게 봐주려야 봐줄 수가 없었다. 배경이나 돈을 믿고 으스대는 모습들은 그야말로 꼴불견이었다.

그 때문에 오딘, 아니 악진의 눈에 안 좋게 찍혀 쥐도 새도 모르게 명을 달리한 이들까지 있었다.

하지만 직접 황실에 손을 뻗을 순 없는 노릇이었다.

자신은 마교의 교주이기 이전에 황실의 백성이었다.

만약 마교의 교주가 황실을 장악하겠다고 한다면 무림공적이 될 가능성이 농후했다. 그저 마음에 안 드는 것을 바꾸려 했던 계획은 장로들의 만류로 그만 실패로 돌아갔다.

결국 이 세계에 와서 계획한 것이 세상을 자신의 발아래 두는 것이었다. 그렇게 된다면 마음에 안 드는 꼴들은 보지 않아도 될 것 같았으므로.

그러나 이 일은 오랜 시간을 준비하여야만 할지도 몰랐다.

이런 관점에 비추어볼 때 보탄과의 만남은 그의 말대로 기연이 되어버린 것인지도 모른다.

“나라고 황제가 되지 말란 법도 없지.”

지금 뱉는 말은 그가 제국을 꿈꾸고 있다는 일종의 암시였다.

* * *

하인리히를 따르던 귀족들에게는 유배령이 내려졌다.

먼 길을 떠나는 귀족들은 그것도 다행이라고 여겼다. 적어도 목숨을 잃지는 않았으므로.

더러는 더 욕심을 부렸지만 덤덤하게 받아들이는 이가 더 많았다.

그중에서 죄인을 호송하는 수레 하나가 오래도록 왕성의 입구에 머물러 있었다. 그 안의 죄인은 켈타스 후작을 만나고 있었으므로.

“그런 눈으로 보지 마시오.”

수레 안의 죄인은 헐거운 옷을 걸치고 머리조차 풀어헤쳐져 있어 초라하기 짝이 없었지만 애써 웃음을 지었다.

그의 이름은 제라드.

얼마 전까지 왕국에서 백작의 작위를 지녔던 남자였다. 그 이전엔 켈타스와 같은 후작의 작위를 지녔었다.

그가 백작으로 강등되었던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하인리히가 왕국을 뒤엎을 때 그다지 도움이 되질 않았다는 까닭이었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하인리히는 그를 의심하여 왕성에 머무르게 하였다. 영지를 모두 몰수하고 말이다.

따지고 보면 하인리히는 그를 신임했다기보다는 경계하고 미워했다고 봐야 옳았다.

“솔직하게 말해보시오. 당신은 하인리히보다는 발데르 공작을 더 믿었었지 않소. 억울하지 않소?”

“억울할 일도 없소. 자업자득일 뿐이지. 좋든 싫든 난 그를 따랐지 않소. 마땅히 벌을 받아야 하오.”

그는 모든 것을 겸허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하물며 발데르에게 추궁을 받을 때에도 싫은 내색 한 번 하지 않고서 그 어떤 죄인보다도 뉘우치는 기색을 보였다.

켈타스는 제라드와 남다른 친분을 가져 왔었다. 그러니 더 애석한 것이다.

“내가 지금이라도 공작께 잘 말씀드려 보겠소. 사실을 말해주시오. 당신도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는 말 한마디면 되오.”

제라드는 켈타스의 눈을 마주하며 미소를 짓고는 양옆으로 고개를 저었다.

답답한 태도를 보이는 그를 보자 켈타스는 울화통이 터질 것만 같았다.

엘레느 공주가 살아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 그라니트성으로 갔을 때에도, 그리고 그를 도와 왕성에 진입하기까지 켈타스의 마음속엔 걸리는 게 있었다.

바로 제라드이었다.

친분은 둘째 치고라도 놓치기 아까운 인재였다.

깊게 파고들진 않았지만 그는 다방면에 많은 지식을 지니고 있었고 검술로 따지고 볼 때는 왕국 최고의 실력자였다.

적어도 발데르가 일월진에 드나들기 전에 최고의 검술 실력을 가진 사람은 바로 그였다. 그 때문에 여러 번 그를 데려오고 싶었지만 형편이 허락지 않았다.

자신에게 잘못이 있다면 이 일을 발데르에게 말조차 꺼내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 역시 여태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으니 무리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가 유뱃길에 오르게 되자 더는 참지 못하고 이렇게 나서게 된 것이다.

도저히 보내줄 표정이 아니어서 제라드는 그를 설득시키기로 마음먹었다.

“그렇게 다정한 표정을 지으면 오랜 친구가 어찌 편히 쉴 수 있겠소? 내 가서 반성해야 하니 이제 그만 놓아주시구려.”

우스갯소리에 난데없이 켈타스의 목청이 높아졌다.

“반성은 무슨 반성! 당신은 잡혀 있던 거나 다름없지 않소!”

“아니요. 난 부끄럽기 짝이 없소. 내 국왕에 대한 충성이 남아 있었다면 미흡한 힘이나마 보태어 반란을 일으켰을 것이오.”

그는 거짓을 말하고 있었다. 그가 오랜 기간 몸을 웅크린 것은 때를 노리기 위함이었다. 하인리히의 손에 모든 것이 들어갔다고는 하나 자신을 따르는 이들이 많았었다.

그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였던지, 아니면 그가 거짓으로나마 이렇게 놓아달라는 말을 해서인지 켈타스는 가슴이 뜨거워지는 듯했다.

결국 제라드가 수레를 담당한 이들을 재촉하여 성을 떠나고 있었다.

그는 친우를 대하는 눈빛을 하고서 속에 있는 말을 꺼내었다.

“언제 여유가 되시면 들러주시구려. 지난 얘기나 합시다.”

그렇게 제라드는 떠나갔다.

켈타스는 겨우 감정을 떨쳐 내며 허탈하게 억지웃음을 지었다.

“꽉 막힌 것은 여전하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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