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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이은 승전보 (10/67)

연이은 승전보

그날 밤.

진영으로 돌아온 왕국군의 지휘관들은 루시아노 백작을 흠집 내기에 바빴다. 믿고 따른 것인데 그를 악용해 저들에게 빌붙어 전력을 내어줬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영양가 없는 대화가 막을 내리고 지휘관들은 각자의 막사로 가서 잠을 청했다.

다음 날.

아침부터 소란이 빚어졌다.

공교롭게도 어제와 비슷한 소동이었다. 지휘관 중 하나가 또다시 자취를 감춘 것이다.

“어서 찾아보거라.”

명을 받은 병사들이 분주하게 뛰어다녔다.

비교적 늦게 모습을 드러낸 지휘관이 소란스러운 주위를 난감한 기색으로 둘러보다 앞쪽의 지휘관에게 물었다.

“이,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노릇이오?”

누구도 명확한 답을 제시하지 못했다.

생각은 몇 가지로 나뉘어졌다.

이 진영에 더 가망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저들에게 투항했을 것이라는 가설과 보고도 하지 않고 주위를 산책하고 있거나 볼일을 보러 갔을 것이라는 설, 그리고 누군가에게 납치를 당했을 것이라는 가설이 그것이었다.

한 지휘관은 한숨을 길게 쉬며 탄식을 내뱉었다.

“후우, 일이 갈수록 어렵게 되는구먼.”

병력이 아무리 많으면 뭐 하리. 그를 통제하고 지휘할 자가 없으면 제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법인 것을.

시간이 흐를수록 두 번째의 가설은 신빙성이 흐려졌다.

이렇게 되자 믿기는 싫지만 세 번째의 가설 역시 힘이 실렸다.

“경계를 강화하라. 주변으로 쥐새끼 한 마리 드나들어서는 아니 될 것이니라.”

“넵!”

철통같은 경비 체계가 이뤄졌다. 특히나 지휘관들의 막사는 몇 겹으로 에워싸였다. 경비를 서는 인원이 많아진 까닭에 오밤중에도 깨어 있는 사람이 많아야만 했다.

이는 불행의 서막일 뿐이었다.

날이 저물고 또 다음 날 새벽이 찾아왔다.

볼일을 보려 한 지휘관이 막사를 나섰다.

그래도 크게 급하진 않았는지 그는 가는 길 내내 경비들의 근무 상태를 확인하는 치밀함을 보였다.

일을 마치고 일어서서 바지춤을 올리고 천을 걷고 화장실 밖으로 나오려는데 음침한 목소리가 귀를 자극했다.

“야.”

‘누, 누구냐.’

자연히 그는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몸을 틀었다.

되도록 크게 소리를 지르려 했지만 어찌 된 영문인지 소리는 입 밖으로 새어나가지도 않았다. 어느새 기문혈(氣門穴)을 제압당해 말도 못하는 처지가 되었기 때문이다.

본래 이곳을 점혈당한다면 후관(喉管)이 잘리고, 기도가 폐쇄되어 죽음까지 이르게 된다.

그러나 꼭 그렇게만 되는 것은 아니었다. 미세한 손놀림에 의해 정도를 더 완화시킬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는 곧 온몸이 딱딱하게 굳어가는 느낌을 받으며 어둠 속 인영의 어깨에 둘러메어졌다.

땅이 뒤로 빠르게 달리고 있었다. 이상하게도 두 사람의 몸무게가 달리면 발소리라도 나야 할 텐데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그렇게 한 지휘관이 또 왕국군 진영에서 종적을 감추고 있었다.

새벽에 소란이 일어났다.

지휘관들이 잠도 못 자고 뛰쳐나왔다.

“무슨 일이냐?”

“또, 또 실종되셨사옵니다.”

“‘또’ 라니?”

보고를 하던 병사는 말하기를 머뭇거렸다. 그러나 채근에 못 이겨 사실을 털어놓고 말았다.

“멀리서 들어가시는 것을 똑똑히 확인했습니다. 그러나 한참이 되어도 나오질 않으시기에 조심히 불러보았고 대답을 하지 않으시어 천을 걷어보았습니다. 그런데 계시질 아니하였습니다.”

실종 사건, 벌써 세 번째였다.

어제의 실종자가 나오며 납치 쪽으로 차츰 가닥이 잡혀 가던 찰나였다.

이제 더는 부정할 수 없었다.

“후우, 남은 자가 이제 우리 셋뿐이구려. 전사, 아니면 납치. 끔찍하오.”

한 지휘관은 성을 냈다.

“어찌 이런 비겁한 수를 쓴다는 말이오?”

사실 비겁한 수는 아니었다.

능력이 되지 못해서 아니한 것이지, 할 수 있는데 안 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여기 있는 지휘관들 역시 언젠가 발데르를 잡아와 혼쭐을 내었으면 좋겠다고 농을 섞지 않았던가.

그래서인지 다른 지휘관은 차마 그의 말에 맞장구는 못 쳐주고 나름의 방책을 생각해냈다.

“내일 정오 중으로 사자를 보내야겠소. 내 친히 서한을 작성하리다.”

항의를 할 셈이었다.

이를 담당한 지휘관은 며칠 동안 일어난 일들이 경우에 어긋난 행동이니 그들을 돌려보내달라는 내용을 적었다.

날이 밝고 사자가 이쪽의 뜻을 전하기 위해 급파되었다.

별로 먼 거리가 아닌데도 사자는 해질녘까지 돌아오지 않았다.

밤이 되어서도 사자로 보낸 자가 돌아오지 않자 지휘관들은 모여 이를 갈기 시작했다.

“저들은 경우에 없는 행동을 하고 있소이다.”

계속해 말이 이어졌지만 모두가 저들을 비꼬는 말이었다.

얘기가 가라앉을 무렵에는 다시 불안이 싹텄다.

“이거야 원, 저녁에는 볼일을 보러 가지도 못하겠소.”

우스갯소리였지만 나머지 두 지휘관들도 공감하는 얘기였다.

한 지휘관이 회의에 젖은 표정으로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래도 발데르 공작이 문은 열어놓았는데.”

그에 다른 지휘관이 발끈했다.

“아니 될 소리요. 아직 우리가 남았지 않소. 저쪽으로 들어서는 순간 지위와 명예는 물론, 목숨도 사라질 수 있다는 것을 왜 모르시오. 말이야 그렇게 했다고 해도 그는 쌓인 게 많아서 결코 우리를 용서하지 않을 것이외다.”

“맞소. 저항할 수 있는 데까지는 해야지요. 살더라도 비굴한 인생을 살아서야 되겠소? 또 이제는 더 납치하지 못할 게요. 우리만 조심하면 될 일이니.”

절대적으로 믿었다. 저녁이라고 하지만 곳곳에 불을 밝혀 두어 낮이나 다름없었다. 또한 엄청난 인원들이 주위를 엄호하고 있다.

지금 지휘관들의 막사는 요새나 같았다. 제 아무리 귀신이라도 이곳을 뚫고 들어오지는 못할 것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저들이 혹 쳐들어오는 날에 대한 대안은 누구도 떠올리지 못했다.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그러다 한 지휘관이 선뜻 좋은 생각이 떠올랐는지 입을 열었다.

“이럴 게 아니라 기습이라도 합시다. 기척을 죽이고 야행을 하여 저들의 본거지로 파고드는 게요. 잘만 하면 사로잡힌 지휘관들을 빼내올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적 지휘부에도 타격을 줄 수 있소이다.”

“그것 참 좋은 생각이오. 발데르가 걸리면 더욱 좋겠구려. 제아무리 그라고 한들 준비도 못한 상태에서 적이 들이닥치면 별수 없지 않겠소?”

반면에 한 지휘관은 걱정이 앞섰던지 난색을 지었다.

“좋은 방법이긴 하지만 그러다 혹 전철을 밟게 되진 않을는지.”

“전에는 미리 정보가 새었지 않소.”

생각 없이 받아친 답변이었다.

그러나 얘기를 꺼낸 지휘관은 생각을 달리했다.

‘만약 루시아노 백작이 납치당한 것이라면 그날의 일을 다 엿들었다고밖에 볼 수 없다. 하면 오늘 또한 조심해야 할 것인데…….’

생각이 여기까지 이르자 그는 당장에 막사의 입구로 나가 사방을 매서운 눈으로 둘러보았다.

겹겹이 둘러싼 병력들을 보자 그제야 안심이 되었다.

‘후우, 괜한 걱정을 하였구나.’

그리 생각하고 들어와 다시 얘기에 열을 올렸다.

“발소리가 나면 안 되니 말은 타고 가지 않는 것으로 합시다.”

“당연히 그래야지요. 저들 역시 어두워서 추격이 힘들 터이니.”

“누가 좋겠소?”

여기서 또 대화가 잠시 멈췄다.

공통된 생각 같아서는 뛰어난 사람이 되어야 했다. 그러나 혹 저번 같은 일이 생기지 않을까 우려가 되었다.

“기사들로 해야 합니다. 병사들을 보내는 것 역시 나쁘진 않겠지만 별 피해를 못 줄 수도 있을뿐더러 타격을 입히려면 사람이 많아야 하질 않겠습니까?”

다른 지휘관이 옳다며 고개를 끄덕여 수긍해 보였다.

“그렇지요. 사람 수가 많으면 아무리 기척을 줄여도 흘러나가기 마련일 테니.”

먼저 말을 꺼낸 자는 계속 갈등 중이었다.

“만약에 실패한다면 어쩌겠소?”

“그럴 리는 없소이다. 또한 실패를 겁낸다면 어찌 이 난국을 헤쳐 나갈 수 있겠소?”

“그건 맞는 말이오. 그럼 기사단을 편성하도록 합시다. 우리 휘하의 기사들 말고 사라진 지휘관들의 기사들을 추려 보내야겠소.”

“하하, 그래야지요.”

자신들의 기사들은 아깝다는 얘기다.

“그럼 슬슬 계획을 구체화해봅시다.”

밤은 점점 어두워져 가고 있었다.

* * *

어둠 속에서 무리들의 이동이 있었다.

그들은 행여 발소리라도 흘릴세라 조심에 조심을 기하였다. 애초에 작당을 하고 움직인 것이므로 소리가 날 만한 쇠붙이들을 벗어내고 밤과 어울릴 검은 옷으로 갈아입은 채였다.

손에 든 검이 이들의 유일한 무기이자 방어구였다.

문득 한 기사가 조그맣게 입을 벌렸다.

“전방에 이상한 물체가 있습니다.”

둥근 모양의 물체였다.

그것들은 일정 거리를 두고 지그재그로 늘어서 있어 더욱 더 괴이함을 안겨 주었다.

저들의 진영에 가까워지려는 찰나여서 이들의 통솔을 담당한 기사는 눈짓으로 확인해보게 했다.

지시를 받은 기사는 다부지게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서 발소리를 최대한 낮춰 물체에 접근했다.

곧 괴물체에 다다랐다. 혹시 위험하진 않을까 염려가 되었던지 기사는 슬그머니 발로 차보았다.

툭.

너무 살살 차서일까? 아무런 소리도 나질 않았다.

기사는 발에 힘을 실어 조금 더 세게 차보았다.

툭!

그러자 물체는 즉각 반응을 보였다.

“크윽.”

흠칫 놀라 기사는 뒤로 서너 걸음을 물러나고 말았다.

생각이 정리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사, 사람?’

그랬다. 저것은 사람의 뒤통수였던 것이다.

기사는 조심히 자신의 상관에게 다가가 귀엣말로 소곤거렸다.

“사람입니다.”

“엉?”

“혹시 소리가 흐를지 모르니 베어버릴깝쇼?”

기사라고 무조건 똑똑한 건 아니다. 머리가 텅 빈 자 또한 많다. 귀족들이야 왕에게 밉보이지 않으려면 머리도 좋아야 하고 무력도 강해야 하지만 기사들은 대부분 힘만 강하면 된다는 인식이 있었다.

충성심과 힘.

이것이 기사의 필수 조건이었다.

지금 질문을 하는 기사 또한 그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래도 이들의 통솔을 담당한 기사는 그만큼 생각이 짧지는 않았는지 팔을 옆으로 뻗어 멈추라는 시늉을 해 보이고는 머리통만 나와 있는 사람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빨리 입을 막아 소리가 새어나가는 것을 방지하고 천천히 대상을 훑어보았다.

괴머리통은 차마 말은 못하고 노기 서린 눈으로 쏘아보고 있었다.

기사는 그를 알아보며 기겁을 해야만 했다.

“헉, 주군.”

땅속에 파묻힌 괴머리통은 다름 아닌 자신들의 지휘관들이었으므로.

먼저 정체가 탄로 난 지휘관은 매우 조심스런 목소리로 그를 힐책했다.

“목소리를 낮추어라.”

그의 뜻을 헤아렸는지 기사는 고개를 연방 숙이며 자신의 경솔함을 반성하는 기미를 보였다. 그러면서도 의문을 떨치지 못하고 물었다.

“왜 이런 짓을?”

지휘관은 그 질문에 대답할 여유조차 없는지 할 말만을 내뱉었다.

“그, 그가 오기 전에 도망쳐야 한다. 어서 날 꺼내어라.”

어딘지 모르게 두려움에 질린 목소리였다.

기사는 당장에 손짓을 했고 그제야 기사들이 파묻힌 지휘관들에게 다가갔다. 저마다 놀라는 기색이 역력했다.

더러는 손으로, 더러는 검으로 땅을 찍어가며 흙을 파내기 시작했는데 그 소리가 작지 않게 흘러나갔다.

“조용히 하라고 하지 않았더냐.”

주군의 명령에 기사는 검지를 입에 대어 보이며 고개를 빙 돌렸다.

그를 간파한 자들이 서로와 수신호를 하며 주의를 준 덕분에 소음은 비교적 작아졌다. 까다로운 일이었다.

사람의 목까지 오는 흙더미를 파헤친다는 것, 그것도 소음 없이 파야 하는 것이 어디 쉬운 일인가.

그래도 자신들의 주군을 구해내겠다는 일념하에 그들은 부산을 떨었다.

제일 처음 이 상황을 간파한 기사가 눈앞의 지휘관에게 물었다.

“저… 아까 주군께서 말씀하신 그란 누구입니까?”

그 물음에 지휘관은 치를 떨었다. 하지만 그래도 대답은 해줘야겠다고 생각했는지 여전히 낮게 입을 열었다.

“오딘이라는 이름을 가진 검은 머리의 이방인, 그는 악마다. 몰랐구나. 그런 자가 발데르를 돕고 있었다니……. 어서 여기서 빠져나가야 한다. 그래야만 살길이 열릴 것이다.”

하고 있는 말이나 표정 같아서는 전투고 뭐고 다 팽개치고 도망칠 작태였다.

그때 갑자기 환한 불빛이 급습했다.

일부는 눈이 부셔 손바닥으로 빛을 가리고, 또 일부는 하던 행동도 멈추고 바닥에 몸을 납작 웅크렸다.

불빛은 거두어지지 않고 도리어 더 가까이 접근해왔다.

그리고 말발굽 소리가 요란하게 들렸다.

지휘관들에게서 이구동성으로 탄식이 뱉어졌다.

“틀렸구나. 틀렸어.”

기사들은 하던 행동을 멈춰야만 했다.

땅을 반도 못 팠으니 서두른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걸렸을 것이라는 생각이 지배적이자 저마다 서서 검을 치켜들었다.

“저희가 지켜 드리겠습니다.”

적이 얼마가 오건 대항할 태세였다.

발데르의 진영에서 기사들을 태운 말들이 곧장 이곳으로 달려왔고 횃불을 든 병사들이 그 뒤를 따랐다.

주인을 태운 말들은 한밤의 침입자들을 향해 달려오더니 이내 둥그렇게 포위했다.

이 난데없는 상황에 왕국군 진영에서 온 기사들은 심히 당황하고 있었다.

어디선가 조소가 들려왔다.

“물고기만 낚으란 법은 없지. 가끔은 사람도 낚아줘야지.”

그를 알아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횃불을 든 병사들이 양쪽으로 갈라서며 길을 터주고 있었기에 얼굴이 훤히 드러났던 것이다.

목소리의 주인은 바로 검은 머리의 이방인이었다.

야습을 하려던 기사들은 이렇다 할 저항조차 못해보고 붙잡히고 말았다.

바닥에 고정되어 있던 머리통들이 패착의 원인이었다. 저들은 실력대로 싸우지도 않고 자신들의 주군의 머리에 싸늘한 검날을 들이대며 무기를 내려놓으라고 협박했다.

기사에게 제일 으뜸갈 덕목은 충성이다. 자신들의 주군의 목숨이 위협받는데 미친 척하고 싸울 수는 없지 않은가.

덕분에 발데르 진영은 커다란 마찰 없이 이들을 생포하는 이득을 누리게 되었다.

* * *

왕국군 진영에서는 야습을 보낸 기사들이 잘해주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혹시 문제가 생긴다면 한 명이라도 빨리 돌아오라고 해놓았다. 그러니 아직까지 오지 않았다는 건 혁혁한 전과를 올리고 있을 것이라는 기대마저 안겨 주었다.

밤이 깊었지만 이런 상황에 들어가 잠을 청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지휘 막사 안에서의 대화는 오랫동안 계속되었다. 시간이 적잖이 흘렀을 무렵부터 이들의 대화는 점점 긍정적인 측면만을 바라보았다.

“확실치는 않지만 저들 또한 꽤나 당황한 듯하오. 그래도 저들에게 잡혀간 분들의 기사들이 뛰어나긴 한 모양이외다.”

“우리 기사들이라고 다를 바 있겠소? 아마 그들이 갔다 해도 좋은 성과를 이루었을 것이오.”

“아직 낙관하기에는 이르오.”

모처럼 분위기가 좋아져서 두런두런 얘기를 나누고 있는 상황에 나머지 한 지휘관이 초를 치자 먼저 말을 꺼낸 두 지휘관의 표정이 슬며시 구겨졌다.

“그럼 남작은 저들이 이 야밤에 몽땅 잡히기라도 했을 거라 보시오?”

“그럴 리가 있겠소? 나 역시 잘되기를 바랄 뿐이오. 다만, ‘만약에’라는 단어를 잊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지요.”

뒤쪽에 가서는 목소리가 한결 부드러워졌지만, 두 사람은 영 찜찜해진 기분을 떨치지 못했다.

자신이 실수했다는 생각이 들었던지, 의도하지 않게 분위기를 흐려 놓게 된 지휘관은 허허로운 웃음을 지어 분위기를 누그러뜨리려 했지만 헛된 일이었다.

한번 가라앉은 분위기가 어디 쉽게 살아나겠는가.

부정적인 생각은 부정적인 결과를 불러온다는 말은 틀리지 않은 듯했다. 시간이 지나도 기사들은 돌아올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동이 틀 무렵까지 그들을 기다리다 지휘관들은 벌겋게 충혈이 된 눈으로 밤을 지새우고 말았다.

쾅!

한 지휘관이 탁자를 내리치며 분을 감추지 못했다.

“대체 그들은 왜 돌아오지 않는 거요?”

누구에게 물을 게 아니었다. 그들의 탓이 아니었으므로.

마주 앉아 있던 다른 지휘관도 화가 치솟기는 마찬가지였으나 그는 작금의 상황에 걱정이 더 컸다.

“저곳에 무엇이 있기에? 그 많은 인원이 한 명도 돌아오질 못하다니. 흡사 귀신에라도 홀린 것 같구려.”

이들의 속은 점점 더 까맣게 타들어만 갔다.

“이럴 게 아니라 국왕께 전언이라도 드려야 하지 않겠소이까?”

“큰일 날 소리! 그분의 성정을 정말 몰라서 그러시는 게요? 앞서 이웃 국에 보냈던 사자가 무능하다며 목이 베이질 않았소. 우리라고 그 꼴이 안 되리란 법이 어디 있소.”

정말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는 판국이었다.

점점 궁지에 몰려가는 느낌이 들었던지 하인리히의 성격은 날로 포악해져 갔고, 그 때문에 귀족들은 왕국에 발을 디디는 것조차 꺼려했다.

이렇다 할 성과를 가지고 가지 못한다면 그의 분노를 한 몸에 받아내야 할 것이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간밤 동안 세 사람은 저들에게 투항을 하는 게 나을 것이라는 생각까지 품었다.

무리도 아니었다. 전세는 날로 기울어져 가고 있다. 어떤 수를 써도 불이익으로만 다가온다. 이대로라면 대패를 면치 못할 것이다.

그러나 어떠한 대안도 떠오르지 않아 하는 수 없이 뿔뿔이 흩어져 각자의 막사로 돌아갔다.

다시 밤이 찾아왔다.

한 지휘관은 계속해서 막사 안을 서성거렸다.

대책 마련에 고심하고 있는 것이다. 다른 이들 또한 마찬가지일 터.

‘후, 마음 같아서는 발데르 공작을 찾아가 과거를 뉘우치고 지금의 신세에 대해 하소연이라도 하고 싶구나.’

내색을 안 했다 뿐이지 하루하루가 살얼음판을 걷는 기분이었다.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다.

그는 고개를 들어 바람이 들어오는 천장을 보며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오늘은 별이 참 많군.”

말을 하고 나니 이상했다.

천장에 구멍이 뚫려 있질 않은가.

저녁을 먹고, 오래도록 서성거렸을 때에도 막사엔 전혀 이상이 없었다.

그때 귓전으로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뭔 별을 찾아.”

막사 안에는 아무도 없어야 정상이다.

미심쩍었던 기분은 돌아서며 마주친 대상을 보게 되며 소름으로 돌변해 온몸의 털이 곤두섰다.

“유, 유령…….”

너무 놀라버려 소리를 지를 용기도 사라져 버린 듯하다.

자신이 마주하고 있는 것은 검은 머리카락의 유령이었다.

성큼 다가서는 유령을 보며 그는 양손을 휘저어가며 만류시키고자 했다.

“오, 오지 마.”

하지만 그것은 바람일 뿐이었다.

유령이라 판단되는 그것은 말을 무시한 채 냅다 다가오더니 자신을 어깨에 들쳐 메고 천장으로 솟았다.

사색이 짙었던 탓에 들려 가는 지휘관은 몰랐지만 이미 밖에는 난리가 난 상황이었다. 정체불명의 인영이 막사 위로 뛰어올라 막사를 찢고 안으로 들어섰을 때부터.

뒤늦게 남은 지휘관들이 뛰쳐나왔다.

“어찌 된 일이냐?”

“그, 그게.”

“뭘 뜸을 들이는 게냐? 어서 말해보아라.”

“남작께서 납치되셨습니다.”

그는 진영에서 멀어졌을 뿐이지만 그 결과는 나머지 두 지휘관들에게 극도의 불안함을 던져 주었다.

“납치되다니, 그게 무슨 말이냐? 이렇게 많은 병력이 깔려 있는데…….”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워낙에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눈으로 포착하는 것만도 버거울 지경이었습니다.”

허언이 아니었다. 근처에 경계를 서고 있는 자들이 하나같이 정말 얼빠진 녀석들처럼 멍한 표정이지 않은가.

옆에 있던 병사도 말을 거들었다.

“그는 하늘을 날았습니다. 그리고 지휘 막사 안에 내려앉아 순식간에 막사를 찢고 안으로 내려섰습니다. 나갈 때 역시 땅을 박차고 하늘로 뛰어올라 저희 머리 위로 스쳐 지나갔습니다.”

“하늘을 날다니, 너희가 본 게 새라도 된다는 말이냐?”

“그렇지는 않습니다. 분명히 사람이었습니다.”

더욱이 모를 일이었다.

그 옆에 선 지휘관은 계속해서 고개를 젓고만 있었다.

기사들은 턱없이 부족하다. 병사들은 많지만 지휘관은 둘밖에 되질 않는다. 이리되면 병력의 통제가 더 어려워질 것이다.

또 업혀 가지 말라는 보장이 어디 있으랴. 철통같은 경계를 뚫고 사람을 낚아채갈 정도의 실력자가 있다는 말은 더 이상의 저항이 무의미함을 시사했다.

모종의 결단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 * *

졸지에 유령에게 붙들렸다고 생각한 지휘관은 난색을 지울 수 없었다. 그러면서도 차츰 유령과 있는 시간이 많아져 조금 담담해지긴 했다. 아니, 자신을 데려가는 자가 유령이라는 생각이 차츰 가셨다고 해야 맞았다.

인영이 자신을 들쳐 메고 달리는 속도가 어찌나 빨랐던지 엄청난 맞바람이 살을 에었다.

오한을 떨치지 못한 채 그는 볼멘 목소리로 따졌다.

“나, 날 어디로 데려가는 것이냐!”

인영은 그의 말에 대답도 않고 그냥 씩 웃었다.

곧 발데르의 진영이 드러났다. 두 사람은 그곳을 향해 가고 있었다. 자의와는 상관없이 끌려온 지휘관은 목적지를 확인하며 발악하듯 소리쳤다.

“아, 안 된다!”

“안 되긴 뭐가 안 돼.”

그는 그렇게 말을 하며 자신을 매정하게 패대기쳤다.

촤아아악!

몸이 바닥으로 미끄러지며 흙먼지가 자욱하게 일었다.

자신을 이곳으로 끌고 온 사내는 근처의 기사에게 일렀다.

“끼리끼리 모아놓아라.”

“명을 받들겠나이다.”

그의 말에 좌우에서 기사들이 다짜고짜 자신의 양팔을 붙들고 한 막사 안으로 밀어 넣었다.

“이게 무슨 짓이냐!”

당장에라도 뛰쳐나가려 했지만 막사 밖에서 검끝이 콧등을 노리고 들어왔다.

하는 수 없이 뒤로 발을 빼는 수밖에 없었다.

그때 한쪽에서 소리가 들렸다.

“예상했던 대로군.”

고개를 돌리자 여러 사람들이 앉아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도 잘 아는 사람들이었다. 이자들은 며칠 전까지만 해도 같이 전장을 누비던 지휘관들이었던 것이다.

막 붙잡혀 온 지휘관이 의문을 감추지 못하고 물었다.

“누가 설명을 좀 해주시오.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한쪽에서 초연한 목소리가 흘러나와 답을 했다.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물었소? 우린 한 사람에게 농락당하고 있는 게지요. 그 이상도 이하도 없소이다.”

암울한 분위기에 맞장구라도 치려는지 한쪽에선 허탈한 웃음이 낮게 터져 나왔다.

“크크큭.”

“지금 웃을 상황이오? 어떻게 해서건 이곳을 빠져나가야 하지 않소이까. 왜들 무기력하게 구시는 게요?”

웃던 남자가 웃음을 그치고 정색하며 말했다.

“포기하는 게 좋을 거외다. 우리라고 시도를 해보지 않은 줄 아오? 불가능이란 단어는 이럴 때 쓰는 말일 거요.”

자신과 같은 생각을 가진 자를 찾으려 다른 지휘관들에게 다가가 표정을 살피기를 여러 번. 그럴 때마다 그와 눈을 마주친 지휘관들은 하나같이 고개를 돌리며 외면했다. 결코 동조해줄 수 없다는 뜻이다.

문득 어디선가 탄식이 내뱉어졌다.

“오딘이라는 자요.”

“오딘? 날 납치한 그자의 이름이 오딘이오?”

“당신을 납치한 것만이 아니고 우리 모두를 납치한 거요. 여기 있는 루시아노 백작부터 말이오.”

눈짓이 향한 곳에 과연 루시아노 백작이 있었다. 그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정신 나간 사람처럼 실실 웃고 있었다.

“헤, 헤헤헤.”

측은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다른 지휘관이 부연 설명을 덧붙여 주었다.

“어제 따로 불려 나간 후부터 저렇게 되었다오. 오딘이라는 이름만 나오면 미친 사람처럼 저러기만 하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모인 지휘관들은 그동안 겪은 일들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제야 막 합류한 지휘관은 어젯밤 보낸 기사들이 왜 붙잡힌 것이며, 루시아노 백작이 왜 저 모양이 되었는지까지 깨닫게 되었다.

그러면서도 한 줄기 희망을 떨칠 수 없었던지 이곳에서 나가자는 말을 꺼내었다.

하지만 들려오는 답변들은 하나같이 부정적이었다.

“며칠 그를 지켜봐왔지만 차마 인간이라고 생각되진 않소이다.”

“만약 그런 시도를 하다가는 루시아노 백작처럼 안 되리라는 법이 없소. 하루 종일 비명 소리가 들리더이다.”

“내 거두절미하고 얘기하지. 그가 발데르를 돕고 있소. 그자와 등을 맞댄 순간부터 우리 운명은 결정지어진 것이나 다름없소.”

다음 날이었다. 왕국군 진영은 초긴장 상태였다.

돌연 앞쪽에 선 첨병에게 양피지 한 장이 펄럭거리며 날아왔다.

꽤나 먼 거리였음에도 종이는 바닥에 떨어지기는커녕 흐물거리며 계속해서 날아오더니 그의 가슴팍에 내려앉았다.

첨병은 양피지가 땅에 닿기 전에 그것을 주워들었다.

뭔가 해서 보려 하는데 머릿속에 누군가의 뜻이 전해져 왔다.

-너희 지휘관에게 가져다주거라.

첨병은 깜짝 놀라더니 주변을 두리번거렸는데 누구의 모습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래도 뜻이 그러한지라 자신이 살펴보는 게 예는 아닌 것 같아 허둥대며 진영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한 장의 양피지는 둘둘 말려 경비를 서고 있던 병사에게, 그리고 기사에게, 마지막에는 지휘관에게 전해졌다.

공교롭게도 지휘 막사 안에는 두 지휘관이 다 있었다.

이미 상황을 전해들었던 터라 양피지를 받은 지휘관은 조금 긴장한 낯빛을 지으며 양피지를 펼쳐들었다.

“뭐라고 적혀 있소?”

“직접 보시구려.”

먼저 양피지를 펼친 지휘관이 탁자에 그것을 내려놓자 조금 엉성해 보이는 글씨가 눈에 들어왔다.

<본 좌가 더 손을 쓰랴? 스스로 오는 게 조금의 고통이라도 더는 일이 될 터이다.>

다그닥, 다닥!

멀리서 말 한 필이 근처로 다가왔다. 그리고 말 위에 탄 자는 내리기 무섭게 기사들에게 안내되어 지휘 막사 안으로 기별을 고하고 들어섰다.

놀랍게도 그는 그제 밤 특별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야습을 감행했던 기사 중 하나였다.

그로부터 그들은 궁금했던 모든 일들을 전해듣게 되었다.

“이는 모든 분들의 뜻입니다. 저항이 무의미함을 계속해서 설파하셨습니다.”

“이 쪽지를 보낸 사람은 누구더냐?”

“그자가 오딘일 겁니다. 소인이 며칠 지켜본바 역시 그를 사람이라 판단하기는 힘들었습니다. 한쪽에서는 조심스럽게 그의 정체가 드래곤이 아닐까 하는 말까지 나돌 정도입니다.”

“드, 드래곤?”

“그렇습니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몇몇의 추측일 뿐입니다.”

무시할 말이 못 되었다.

대체 어느 정도의 힘을 가지고 있기에 드래곤이라는 추측까지 하게 만든다는 말인가.

설령 그가 드래곤이 아니라 할지라도 그 같은 추측을 던져 준 것만으로 충분히 위협이 될 소지가 있었다.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그러다 문득 한 지휘관이 침묵을 깨고 의자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를 눈여겨보던 지휘관이 물었다.

“어찌할 생각이시오?”

“투항합시다. 방법이 없소이다.”

“투항이라니. 꼭 그래야만 하겠소? 차라리 왕께 돌아가는 게…….”

“왕께 돌아간다? 국왕 폐하가 우릴 가만히 둘 것 같소? 또 물읍시다. 오늘 안에 회군할 수 있다 생각하시오? 오늘 밤에는 우리 둘 중 하나가 사라질 거요. 그것을 감안하셔야지요. 너무 늦은 감이 있소. 이제라도 발데르에게 숙이고 들어가야 하오. 더 험한 꼴을 당하기 전에…….”

* * *

정중앙이었다.

이곳에서 두 진영 간의 회담이 이루어졌다.

양 군대는 길게 늘어서 그들에게 시선을 집중시켰다.

자리엔 이 전투에 참여했던 모든 귀족들이 모여 있다.

발데르 진영에 붙잡혔던 지휘관들은 기가 죽어 차마 말도 못 꺼내는 상황이었다. 오딘이 이 자리에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얘기는 주로 발데르 공작과 저들 지휘관들 간에 오갔다. 발데르와 보탄이 품어왔던 감정들, 그 해묵은 원한을 끝내는 것이 자신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아서였다.

물론 그렇다 하더라도 누구도 따지고 들지는 않겠지만.

이 회담을 요청한 왕국군 진영의 지휘관이 물었다.

“우리가 어떻게 해야 되겠소?”

이 순간을 얼마나 기다렸던가. 그간 품어왔던 감정들로는 저들 모두를 베어버려야 속이 풀릴 발데르였다.

그러나 참고 또 참았다.

사라진 것은 사라진 것. 이제는 남은 것을 신경 써야 할 때였다.

“그대들은 왕국에 반역을 저질렀다. 이는 엄벌로 다스려야 마땅할 것. 하나, 살 수 있는 기회를 주려 한다. 모든 것을 깨끗이 떨치고 새로운 마음을 가진다면…….”

발데르의 목소리는 더없이 힘이 실려 듣는 이들로 하여금 경외심마저 갖게 했다.

“기, 기회라고 하셨습니까?”

이들에게 붙잡혔던 지휘관이 당황해하며 물었다. 그것만 보아도 잡혔던 이들이 얼마나 힘의 차이를 실감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발데르를 대신해 보탄 남작이 입을 열고 나섰다.

“공작 전하께서는 그대들의 죄의 크기에 따라 벌을 내리고자 하시오. 선택은 없소이다. 그것만으로 그대들은 마땅히 감사를 해야 할 것이외다.”

죄가 큰 순서를 꼽으라면 당연 루시아노 백작이 될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정신착란마저 일으켜 반실성한 상태였다. 지금도 몸을 낮게 숙이며 오딘의 눈치를 보고 있질 않은가.

죽음이라는 것을 맞게 해주는 것보다 자신의 과오를 깨닫게 해주는 게 더 나은 형벌일지도 모른다.

발데르 역시 그렇게 생각했다.

‘죽음은 사람의 목숨만을 앗아갈 뿐, 무조건적인 해결책은 되지 못한다.’

요 며칠 오딘은 발데르와 이쪽 귀족들에게 그것을 일깨워주었다. 꼭 피를 흘리지 않더라도 전투에서 승리하는 법과 함께.

“그대들을 벌하는 것은 왕국을 되찾은 후가 될 것이니라.”

적대 관계에 있던 귀족들이 수긍하는 태도를 보임으로써 발데르를 위시한 반란군과 일부 왕국군의 할라리야 평야에서의 전투는 막을 내리게 되었다.

* * *

파르티잔의 신세는 그야말로 처량했다.

성을 나설 때 돈도 들고 나오지 못해 하루 이틀을 굶다 보니 사는 게 사는 게 아니었다.

잠자리는 또 어떠한가.

야외에서 잘 때는 야생동물이나 몬스터의 습격을 받을지도 몰라 이상한 소리가 들릴 때면 자다가도 벌떡벌떡 일어나야 했다.

뭐 하나 제대로 된 생활이 못 되었다.

결국 배고픔을 견디다 못해 토끼나 야생동물을 잡아 구워먹기도 했으며, 몰래 민가에 숨어들어 허름한 창고나 마구간에서 잠을 청하기도 했다.

마법이 있는데 왜 생고생을 할까.

이유는 간단하다.

물의를 일으켰다는 소문이 들면 오딘의 귀에까지 흘러들지 모른다.

굶거나 추워서 죽으면 죽었지, 다시 그 생활을 하긴 싫었다.

사람이 사는 게 사람다워야 하질 않겠는가.

간, 쓸개 다 내어주고 실실거리는 게 어찌 사람의 행태일까.

하지만 지금 사는 것 또한 그리 사람 사는 것 같지는 못했다.

행여나 그 생활이 더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을 땐 모질게 자신을 채찍질했다.

“아서라! 네 악마 같은 놈에게 돌아가 뭘 어쩌겠다는 것이냐. 이번에 잡히면 무사하지 못할 것이다. 난 탈옥을 했다.”

누구도 들을 수 없는 소리였다.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으므로.

그와 생활하며 이미 조심성이 몸에 밴 까닭이다.

그런데 오늘따라 이상하게도 오한이 돋았다. 한낮인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날씨가 영 을씨년스럽구나.”

산바람이려니 생각하고 소로를 따라 산을 올랐다. 정상에 서서 보니 먼 곳의 경치가 한눈에 들어왔다.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 마을이 자리하고 있었다.

“여기만 넘으면 이 고생은 끝이다.

저곳이라면 조금 얻어먹거나 하루쯤 쉬어가게 해달라고 해도 될 것 같았다. 엄연히 바리톤 왕국의 영지가 아닌가.

또한 일을 해서라도 얼마의 돈을 얻어 마법진을 이용해 점점 더 멀리 이동하면 새로운 삶도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절로 기대에 부풀었다.

여기까지 오면서 아레인 왕국의 마법진들에 발을 들여 놓지 못한 이유가 있다. 그 뒤로 오딘이 사람을 풀어놓았는지 각 마법진마다 지키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마법진을 그릴 도구조차 준비하지 못했다. 모든 걸 압수당했으므로. 매우 비싼 돈을 들여 구입한 전의 아티팩트 지팡이까지 말이다.

고생을 많이 해서인지 파르티잔의 정신세계는 한층 성숙해졌다.

“태어날 때 어차피 빈 몸, 새 삶을 허락받았으니 그깟 것 다시 모으면 그만이다.”

들뜬 마음으로 경사가 완만한 곳을 둘러보던 중 의문의 목소리가 머릿속을 울렸다.

-난 허락해준 적이 없는데.

언젠가 ‘그’로부터 들었던 얘기가 떠올랐다.

‘의어전성(蟻語傳聲)이라는 게 있지, 이게 전음술(傳音術)의 기본이야. 그다음이 전음입밀(傳音入密)이고 그 위가 천리전음(千里傳音)이야. 그보다 더한 게 육합전성(六合傳聲)이고 이 모든 것보다 훨씬 뛰어난 게 혜광심어(慧光心語)야.’

자신에게는 의어전성을 읊어주었는데 그게 끝이었다. 한 번 가르쳐 줘놓고 해보라 하니 어디 되겠는가.

입을 고생시켰다는 대가로 알밤을 한 대 맞았는데 그 통증이 무지막지했다. 오딘은 더 가르쳐 주겠다는 호의를 보였지만 자신은 통신 마법으로 대체하겠다며 한사코 마다했다.

사실 오딘은 꼬투리를 잡은 것이었다.

이처럼 지랄 맞은 성격은 시도 때도 없이 발동해 자신을 핍박했다. 이러니 도망을 안 치겠는가.

그의 말에 따르면 자신은 혜광심어를 할 줄 안다고 했다. 대상이 어딜 가건 오딘 자신의 생각을 전할 수 있다는 것이다.

지금 와서 하는 얘기지만 순전히 지 자랑이었다.

그래도 아직 공포가 남아 있어 함부로 입을 놀릴 순 없었다. 만약, 아주 만약이지만 붙잡힌다면 뼈도 못 추릴 것이므로.

불쑥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전음이라는 게 멀리 있는 사람 말도 들을 수 있는 건가? 내가 어딜 가건? 그럼 평생 눈치를 보며 살아야 한다는 말인가?’

생각이 더해지며 소름이 확 끼쳤다.

“헉! 그럼 성을 떠나온 후 했던 욕들을 다 들었다는 건가? 끔찍하구나. 읍.”

급작스레 당황해 생각을 말로 표출하다가 다급히 두 손으로 입을 막았다.

아무리 혜광심어가 대단하다고는 해도 어찌 행방이 묘연한 대상의 소리까지 들을 수가 있겠는가. 그럼에도 파르티잔은 오딘이 사람이 아닐 것 같은 느낌이 강하게 들어 정말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나 없는 사이 욕도 많이 했구나. 그래, 속에 있는 것을 훌훌 털어버리니 속은 좀 시원하냐?”

뜨끔한 말이었다. 여러 번 들어온 목소리기는 한데 전혀 반갑지 않은 목소리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한 남자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그게 그리도 싫었을까?

파르티잔은 산 아래로 몸을 던지려 하고 있었다.

자의가 아니었다. 두려움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뒤로 걷다 보니 발을 지탱할 땅이 없었다. 균형조차 잃어버렸기에 그의 몸은 기우뚱하며 뒤로 더 기울어졌다.

한데, 자유롭게 하강하려던 파르티잔의 몸이 누군가의 손에 붙들렸다.

“주인 허락도 없이 집을 나가더니, 이젠 주인 허락도 없이 네 멋대로 죽게? 얼마 못 본 사이에 간이 많이 부은 모양이구나?”

짐작대로였다. 자신을 붙든 건 바로 오딘이었다.

생명을 구해주었다는 고마움도 잊은 채 파르티잔은 모든 게 틀렸음을 깨닫고 그 즉시 무릎을 꿇어 손바닥을 싹싹 비벼 대며 자비를 구했다.

“살려만 주십시오. 제가 멍청했습니다.”

듣는 오딘은 참 어이가 없는 말이었다.

“무슨 소리야? 죽으려는 널 살려 준 게 난데. 내가 안 잡았음 죽는 거 아녔어? 그런데 이제 와서 살려 달라니?”

사람이 악독해도 저리 악독할 수 있을까 생각하는 파르티잔이었다.

이렇게 급작스레 나타나지만 않았더라도 발을 헛디뎌 산 아래로 떨어질 일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차마 그 말들은 입 안에서 맴돌 뿐 나오지 않았다. 입 밖으로 나오는 건 마음에 없는 소리일 뿐.

“맞습니다. 그랬습죠. 구명의 은혜를 베풀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오늘도 오딘 님께 하해와 같은 은혜를 입게 되어 백골난망하옵니다.”

파르티잔은 엎드려서 두 손을 땅에 붙이고 거푸 땅에 머리를 붙였다 떼며 고마움을 표하는 중이었다.

이대로라면 하루 종일 절만 할 것 같았는지 오딘이 화제를 돌려 물었다.

“그건 그거고 경고문을 보았겠지?”

파르티잔의 머리가 번개만큼이나 빠르게 회전했다.

‘안 보았다고 하면 또 죽으라고 팰 것이다. 일단은 저놈이 마음에 드는 대답을 해주어야 한다. 보았다고 하자. 이후의 일은 이후의 일이다.’

생각을 굳히고 바로 대답했다.

“보았습니다. 이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습죠. 정말 명필이셨습니다.”

또 마음에 없는 소리였다.

그러나 오딘은 아무런 감흥도 받을 수 없었는지 그의 대답이 끝나기 무섭게 일전에 대장장이가 만든 쇠침을 꺼내었다.

그걸 보는 파르티잔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자, 기왕 받는 벌이라면 달게 받아라. 오늘은 네 태도가 나쁘지 않아 이것만 박아주마.”

따로 손을 쓰지 않겠다는 소리다.

하나, 파르티잔은 기뻐할 수 없었다.

무려 한 뼘이 넘는 쇠바늘.

저걸 다 몸에 찔러 넣으면 죽을 것 같았다. 오딘이 누우라는 자세로 눕고서도 차마 걱정이 앞서 조심히 물었다.

“다, 다 박으시렵니까?”

“그럼 남기나?”

크게 이상한 광경은 아니었다. 노인이 누워 있고 청년이 대바늘을 음흉한 눈으로 보아서였지, 엉뚱한 상상을 유발케 하는 광경은 절대 아니었다.

쇠바늘이 살을 파고들어갔을 때 파르티잔은 비명을 질러댔다.

“끄으으으윽!”

“꾀병 부리지 마. 그리 아픈 게 아니니까.”

오딘이 그와 같이 말했는데 정말 크게 아픈 건 아니었다. 살 속으로 비집고 들어오는 쇠의 감촉이 이상했을 뿐이었다.

무엇보다 쇠가 얇은 게 한몫했다.

그동안 얻어터진 것에 비하면 이깟 고통쯤은 얼마든지 참아줄 수 있었다. 더군다나 오늘은 이것으로 끝내겠다지 않은가.

이상했다. 숨소리조차 죽이고 있는데 오딘의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고개를 돌려 보니 그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이어 조심히 일어서려 했는데 하반신이 뻣뻣했다.

침을 잘못 놓은 까닭이었다.

매정하게도 오딘은 미안하단 말도 하지 않고 그렇게 사라져 버린 것이다.

파르티잔도 바보가 아니었다.

여태 멀쩡했던 한쪽 다리가 마비되어 거동이 불편해졌다. 저놈이 쇠침을 박은 후부터 말이다.

속으로 온갖 욕설이 떠올랐지만 단 한마디도 내뱉지 못했다.

어디에서나 자신의 말을 훔쳐 들을 수 있다는 것은 착오였다고 해도 혹시 어딘가에서 자신을 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던지 조르바가 가진 능력과 같은 능력을 사용했다.

환하게 웃으며 속으론 끊임없이 욕지거리를 뱉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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