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권-꿈일까 생시일까 (9/67)

꿈일까 생시일까

말과 나귀를 대령해오자 오딘은 말에, 조르바는 당나귀에 올라 성을 빠져나가는 무리 안으로 섞여들었다.

왕국군과 발데르 공작이 진두지휘하는 반란군과의 전투는 한층 가열되는 양상을 띠어갔다.

병력만으로 치면 왕국군의 수가 월등히 우세함에도 불구하고 개개인의 실력 차이가 엄청나 날이 갈수록 왕국군의 군대는 움츠러들었다.

발데르의 목소리가 전장에 중엄하게 울려 퍼졌다.

“항복을 하는 적들은 생포하고, 전열을 가다듬으라.”

모두 다 죽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잘못이 있다면 그릇된 자를 섬기는 자와 그들의 팔다리가 되어주는 이들이다.’

그는 자신의 이런 생각을 몇 차례나 지휘관들에게 강조해왔다.

그 일환으로 발데르는 저들의 항복을 종용해왔다.

아이러니하게도 저들의 병사들 중 상당수가 이 싸움을 원치 않는다는 점이었다. 물론 이기는 싸움이라면 얘기가 다르게 될 것이다.

하지만 변변한 저항조차 하지 못하고 기사들도 죽어나가는 판국에 그보다 못한 자기들이 뾰족한 수가 있겠는가.

발데르란 이름만으로도 저들은 간담이 서늘해질 정도의 공포를 느꼈다.

그것은 날이 갈수록 더해져서 부러 발데르의 군대와 마주치지 않았으면 하는 자들도 많았고, 그의 군대가 들이닥치면 눈치를 살폈다가 재빨리 항복을 하는 병사들도 종종 있었다.

그 말은 저들의 진영에서도 암암리에 이 전투는 패하게 될 것이라는 관측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시일이 흐를수록 항복을 하는 이들이 많아졌던 덕분에 공작의 군대는 덩치가 늘어나는 중이었다.

그러나 발데르는 항복을 한 이들에게 싸움을 강요하지 않았다.

전투에 지친 이들을 성으로 보내 수비를 맡기라는 명을 내리자 그들은 더할 나위 없이 감사해했다. 더러는 그에 감동해 전투에 합류할 의사까지 밝혀 왔지만 발데르는 끝끝내 거절했다.

조금 전까지 동료였던 이들에게 칼을 겨누면 안 된다는 이유였다.

잠시 전투가 소강상태에 이르자 발데르는 지휘관 막사 안에서 다른 지휘관들과 회의를 가졌다.

“그대들의 노고에 고마울 따름이네. 다들 열심히 싸워준 덕분에 이렇게 단시간에 저들의 군대를 몰아붙일 수 있었네. 하나, 난 항상 생각해왔다네. 내가 지금 하려는 일이 잘하는 일인지에 대하여……. 과연 이 복수를 위해 흘린 피가 얼마인가.”

다른 귀족이 그에게 위안 삼아 말했다.

“마음을 약하게 가지시면 아니 되옵니다. 저희가 저들의 손에 희생되었다고 하더라도 이 정도 이상의 피해가 날 것임은 명백한 일입니다. 또한 저들은 잘못된 자를 따르고 있으며 더러는 용서 못할 행동을 저질러 왔습니다.”

그는 보탄이 오기 전 미리 발데르의 성에 몸을 던진 귀족들 중 하나였다.

다른 귀족도 말을 보탰다.

“하인리히는 어질지 못하였습니다. 부당하게 세를 늘려 백성들의 피를 빨아먹고 있는 자입니다. 그를 따르는 귀족들 역시 다르지 않습니다. 왕국에 사는 백성들을 위해서라도 꼭 하여야만 하는 일이었사옵니다.”

그에 안도를 하며 발데르는 웃는 낯빛이 되었다.

“허헛, 그리 말해주니 고마우이.”

유독 켈타스 후작은 말이 없었다.

그는 아직도 저들 편에 서 있었던 것에 대한 죄책감이 가라앉지 않은 모양이었다.

보탄이 그 기분을 헤아리고는 그를 달래었다.

“후작님, 여기 있는 누구도 후작님을 탓하지 않습니다. 또한 저희가 알기로는 숙청에도 동참하지 않았다고 들었사온데 어이하여 무거운 표정을 하고 계십니까.”

“그래, 그랬지.”

발데르도 옆에서 농을 섞어 보탄의 말을 거들었다.

“후작은 선택을 잘한 것일세. 그대가 성안에 군대를 모아두지 않았다면 오늘날과 같은 대승을 거두지 못했을지도 모르네. 선견지명이 있었던 것이로구먼.”

서로가 위해주니 후작은 조금 편해진 모양이었다. 얼굴에 드리웠던 그늘이 차츰 걷혀지고 있질 않은가.

화제를 돌려 보탄은 착잡한 심정을 드러냈다.

“하나, 아쉽게 되었습니다. 루시아노 백작만 없었더라도 귀족 두 명 정도는 사로잡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동석했던 귀족 중 한 명이 입을 열었다.

“참, 아쉽게 되었습니다. 과연 허명이 아닌가 봅니다. 루시아노 백작의 용병술에 아쉽게 대어를 놓친 셈입니다.”

다른 귀족이 그의 말에 맞장구를 쳐 주었다.

“비단 용병술만이 아니외다. 병력의 운용과 통솔은 정말 혀를 찰 정도지 않소이까. 비록 적이지만 그 능력만은 칭찬받아 마땅합니다.”

대화가 끊어질 무렵, 문득 켈타스 후작이 공작에게 염려 섞인 말을 꺼냈다.

“며칠 마음에 걸렸던 일이 있습니다. 항복한 병사들을 후방으로 보낸 것은 분명히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저들이 역으로 이용하지는 않을까 걱정이 됩니다.”

“물론 저들의 진영에까지 소문이 난다면 그리되겠지. 하지만 크게 염려하진 말게나. 그들을 제압할 최소한의 병력은 각 성안에 늘 상주해 있다네. 또한 규율을 내려 이 전쟁이 끝날 때까지 그들에게 무기를 들지 말게 해놓았다네.”

켈타스는 진심으로 공작에게 감복하여 말했다.

“잘하신 일입니다.”

발데르는 미소를 지어 화답하고는 가슴속에 맺힌 말을 꺼내었다.

“어서 전투가 끝났으면 좋으련만. 그것은 비단 우리뿐 아니라 모든 병력, 그리고 백성들에 해당하는 일이겠지.”

“그리될 것입니다.”

더 이상 성을 뺏고 빼앗는 싸움이 아니었다.

전투는 어느새 전면전 양상을 띠어갔던 것이다.

평원에서의 전투.

언제 적이 기습할지도 모르는 상황이라 전투에 임하는 자들의 긴장감과 피로감은 극도로 커져 갔다.

이는 양 진영 모두에게 좋은 일이 못 되었다.

발데르가 걱정하는 이유도 무리는 아니었던 것이다.

돌연 막사 밖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공작 전하, 그라니트성에서 전령이 도착했사옵니다.”

“들라 이르라.”

곧 장막이 열리며 전령이 들어왔다.

혹시 오는 도중 기습이라도 받은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되어 발데르는 채근하듯 물었다.

“무슨 일이 있는 것이냐?”

전령은 일체 동요함이 없이 침착함을 유지하며 답했다.

“오딘 님께서 행차하신다고 하옵니다.”

그 한마디가 가져오는 파장은 적지 않았다.

저도 모르게 발데르는 벌떡 일어섰으며 다른 귀족들도 더없이 기쁜 소식이라도 접한 것처럼 크게 반겼다.

“그렇지 않아도 뵌 지 오래되었는데 정말 잘되었군요.”

이 중에서 켈타스 후작만이 소외감을 느꼈다.

한편으로는 오딘이라는 작자가 그다지 미덥지 않다고 여겨 왔다. 말로만 대단하다, 대단하다 들었을 뿐이지 직접 두 눈으로 목격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 * *

며칠이 흐르며 그라니트성에서 출발한 후발대를 포함해 오딘이 나타났다. 출진을 앞두고 있던 찰나였다.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발데르 공작을 포함한 귀족들은 일심동체로 경건한 마음을 담아 허리를 숙여 보였다.

“오딘 님을 뵈옵니다.”

괜히 이 자리에 섞여 있어 켈타스만 어색함이 가시질 않았다. 혼자 바보가 된 것 같질 않은가.

오딘이라는 작자가 하는 말은 정말 가관이었다.

“심심해서 구경이나 하러 왔느니라.”

구경을 왔다고 한다.

이게 할 말이던가?

사지를 넘나들며 전투에 임하고 있는 사람들한테 해야 할 말인가, 이 말이다.

안 그래도 그에 대해서 그리 탐탁지 않게 여기고 있었는데 생각 없이 말을 내뱉는 듯하자 조금씩 불만이 싹텄다.

그러나 감히 말을 던질 여건은 못 되었다.

다른 귀족들에게 반감을 살 것은 분명하고, 발데르 공작에게 차가운 시선을 받을 수도 있으니까.

뭐라 한마디 쏘아붙이려 말이 목구멍까지 치솟았지만 꾹 참아 넘겼다.

지금의 상황에 대하여 오딘은 보탄으로부터 간략하게 설명을 들었다.

“막 출진하려는 찰나였습니다. 하오나 오딘 님께서 친히 왕래하셨으니 조금 쉬었다가 출발할까 합니다.”

발데르의 말에 켈타스는 절로 인상이 찌푸려졌다.

‘한 사람을 접대하려 출진을 미루다니…….’

오딘 역시 그와 같은 생각인 듯했다.

“그럴 필요 없느니라. 구경을 왔다고 하였지 않았느냐.”

만면에 미소를 드리우며 발데르는 더 토를 달지 않았다.

“그럼 그리하겠사옵니다.”

발데르의 명령에 각 지휘관들이 즉각 병력들을 모으며 전투가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 * *

로테노아 국왕으로부터 청부를 받은 게티롱은 바리톤 왕국과 아레인 왕국의 국경을 지나 접전이 벌어지고 있을 장소를 향해 달려가는 중이었다.

국경을 지나는 데는 전혀 어려움이 따르지 않았다. 하인리히 국왕은 발데르 공작을 막기 위해 국경 지대의 병력까지 뺀 것이다.

사람들에게 묻고 물어 게티롱은 전투가 벌어지고 있을 할라리야 평원에 도달했다. 그리고 오래지 않아 접전을 벌이는 두 진영을 관찰할 수 있었다.

* * *

대규모의 전투가 벌어지는 동안에도 켈타스는 종종 오딘에게 시선을 돌렸다.

아닌 게 아니라 정말 구경만 하고 있질 않은가.

오딘은 그의 시선을 느꼈지만 개의치 않았다.

그보다는 이 싸움에 관심이 쏠려 눈이 팔려 있었다. 이 전투는 발데르와 보탄에게도 중요한 것이었지만, 오딘에게도 중한 일이었다. 발데르와 보탄이 아레인을 접수하게 되면 모든 것이 그의 아래로 들어오기 때문이다.

모든 게 계산된 행동이었다.

물론 발데르와 보탄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면 이 일을 시작조차 하지 않았을 테지만.

밀고 당기는 싸움.

발데르와 보탄을 위시한 최정예들이 적진을 휘저을 때면 근처의 병사들은 줄행랑을 치기 바빴다.

그나마 나은 기사라는 녀석들도 몇 번 검도 부딪혀 보지 못하고 말 아래로 굴러 떨어지는 일이 허다했다.

상대가 되질 않아 기대했던 것만큼 흥은 돋우어주지못했다.

개중에 봐줄 만한 거라고는 마법사들의 활약 정도랄까.

그래도 여러 색깔의 빛이 번쩍이며 시각적인 즐거움은 선사해주지 않는가.

돌연 오딘은 고개를 돌렸다. 시선이 향한 곳에 한 남자가 있었는데 그 역시 전투를 지켜보는 데에 골몰해 있었다.

그는 바로 게티롱이었다.

게티롱 역시 이상한 기분이 들었던지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둘의 시선이 격돌했다.

크게 먼 거리가 아니었다.

게티롱은 당장 허리춤에 달려 있을 검갑을 의식했다.

‘이것 참, 골치 아프게 됐군. 지금 손을 써야 하나?’

그리 생각하고 있을 때 자신과 눈이 마주쳤던 검은 머리의 이방인이 고개를 돌림으로써 시선이 거두어졌다.

하지만 게티롱은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대단한 놈이군. 혼자서는 날 감당하지 못할 것을 알고 태연함을 가장해 주변의 동료에게 알리려 들다니. 하나, 나 게티롱을 얕보아서는 곤란하다. 내가 그깟 술수에 당할까 보냐. 어림없다!’

생각을 마친 게티롱은 그 즉시 몸을 돌려 달리기 시작했다.

‘난 바람처럼 빠르다. 너희들이 내 정체를 눈치 챘더라도 날 따라잡기는 무리일 것이다.’

한참을 달렸지만 누구도 쫓아오지 않는 듯했다.

그럼에도 게티롱은 달리기를 멈추지 않았다.

‘날 방심하게 하려는 속셈을 누가 모를까 봐?’

게티롱은 그렇게 전장에서 사라져 버렸다.

얼뜨기 같은 놈을 바라보다가 오딘은 시선을 거두고 다시 전투를 감상했다. 그러다 유독 한 남자에게 시선이 꽂혔다. 바로 루시아노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는 백작이었다.

다른 어벙한 지휘관들과는 다르게 이 녀석은 유달리 큰 소리를 지르며 병력들을 진두지휘하고 있었는데, 그런대로 봐줄만 했다.

하지만 감상의 초점은 거기에 맞춰진 것이 아니었다.

빽빽 소리를 질러대는 그의 입에 맞춰진 것이었다.

“그 녀석 참 말 많네.”

* * *

초상집 분위기와 비스름했다.

할라리야 평야에서 전투를 거듭하던 왕국군 진영이 바로 그러했다.

연이어 패전을 하며 야반도주를 하는 병사들까지 생겨나고 있다. 의외롭게도 그에 성공한 이들은 반수 이상이 발데르 공작 진영으로 들어갔다.

각 지휘관들은 도주를 하던 이들을 잡아들여 그 자리에서 숙청해 분위기를 쇄신하려 했지만 그것도 한두 번이었다.

그에 대해서 루시아노 백작은 기가 막힌 방책을 하나 들고 나왔다.

“얼굴이 안 알려진 기사들을 병사들 복장으로 갈아입히시오. 그리고 대거 투입시키는 것이외다.”

이 자리에 있는 누구도 떠올리지 못했던 확실히 대단한 생각이었다.

사실 이 중엔 루시아노 백작 덕분에 목숨을 건진 지휘관들도 있었고, 요 근래 그의 활약으로 대패는 면해왔다.

그런 연유에서인지 점점 더 그의 말에는 힘이 실렸다.

확실히 좋은 생각이라고 인정하면서도 걱정이 들었던지 얘기를 경청하던 귀족 중 하나가 물었다.

“하지만 그리한다면 저들이 믿겠소? 아무래도 많은 수가 진영을 찾아간다면 의심을 살 것은 자명한 일인데.”

루시아노는 탁자 위에 놓인 물 컵을 들어 물을 한 모금 들이켜고는 팔뚝으로 물기가 묻은 입을 훔치며 염려할 것 없다는 듯이 말을 이었다.

“확실히 하려면 이쪽 지휘관의 목을 들고 가 저들을 안심시켜 주면 될 것이오.”

성질 급한 귀족 하나가 테이블을 강하게 내려치며 일어서 반발했다.

“그 무슨 망발이오! 설마하니 백작은 우리 중 하나를 제물로 바치자는 것이오?”

“허허, 성미도 급하시구려. 내 그러자고 하였소? 오늘 죽은 란테 자작이 있지 않소. 다행히 저들은 그를 모르고 있는 것 같소이다.”

그러했다. 란테는 분명히 전장에서는 죽지 않았었다.

부상을 입고 돌아와서 보니 상태가 제법 위중했고 끙끙 앓아누웠는데 저녁 무렵에야 숨을 거둔 것이다.

거부감이 들 만도 하건만 지휘관들은 참으로 대단한 술책이라 생각했다.

그만큼이나 이들은 절박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유독 한 지휘관은 죽은 자에 대한 미안함이 앞섰던지, 아니면 그와의 친분을 중시했던지 거세게 반발을 하고 나섰다.

“어찌 죽은 분을 욕되게 하시려는 것이오.”

루시아노는 차갑게 항변했다.

“그럼 변변히 저항조차 못해보고 다 그를 따라 죽자는 얘기요? 지금처럼 나아가다가는 승산이 없다는 것은 나를 포함해 여기 계신 모두가 알고 있는 사항일 텐데…….”

한 사람 때문에 일이 무산되길 원치 않았는지 다른 지휘관들이 루시아노의 말에 힘을 실어주었다.

“화를 낼 일이 아니지 않소. 죽은 사람은 죽은 사람일 뿐인 것을 왜 모르시오. 우리 이성을 가집시다.”

“그가 희생하여 산 사람이 모두 잘된다면 그리해야지요.”

“그럽시다. 백작의 말이 옳고 또 옳소.”

어디에나 다수결의 원칙은 있는 법이다. 소가 대를 이기는 경우는 극히 적으며, 한 사람이 모두의 고집을 꺾기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몇 차례 언쟁이 더 오갔지만 란테를 옹호하던 지휘관은 도무지 저들의 고집을 꺾을 수가 없었다.

“란테 자작의 일은 안됐지만 그래야만 합니다. 그것으로 전세를 역전시키고 저들의 죗값을 물을 수 있지 않겠소.”

이렇게 몰아붙이니 그라고 한들 도리가 없었다.

그는 무겁게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그리고 잠시 후 포기의 뜻을 분명히 했다.

“어쩔 수가 없군요.”

그것은 여기 있는 사람들에게가 아닌 죽은 란테 자작을 향한 말이었다. 죽어서나마 이 회의를 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미안함을 전한 것이다.

그가 결국 따르기로 함으로써 루시아노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닫았었던 입을 열었다.

“되도록 뛰어난 자들로 추려 주시오. 하나, 앞서도 말했듯이 얼굴이 널리 알려진 기사들은 안 되오. 만에 하나 저들에게 발각되는 날에는 우리에게 해가 되어 돌아올 것이니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 합니다.”

모두가 수긍하면서도 한쪽에선 아쉬워하는 목소리도 나왔다.

“근위 기사대가 섞였다면 좋았을 것을.”

“왜 아니겠소. 그것도 모자라 국왕 폐하께서는 신변에 위험을 느껴 후작가 이상의 가문을 죄다 불러들이지 않으셨소.”

“그래서 더 힘이 드는 겁니다.”

저마다 불평불만을 쏟아내고 있는 중이었다.

루시아노 역시 안타까운 속내를 드러냈다.

“명망 있는 기사들이 죄다 왕국에 몰려 있으니 저들에게 매번 기선을 제압당해 일이 이리 어렵게 되었지요. 발데르 그놈을 제압할 기사들도 근위 기사대에 있으니 한 명이라도 빼주었으면 좋았을 것을. 사실 근위 기사대가 합류해 초반에 발데르만 제압했어도 이런 고전은 면하지 않았겠소?”

“제 말이 그 말입니다.”

“요청을 안 드려 본 것이 아니고, 매번 폐하는 불가하다고 하셨소. 한 번 더 묻는 날에는 가만히 둘 것 같질 않더이다.”

“하하하하!”

대책이 수립되어서인지 막사 안의 분위기는 한결 나아졌다.

그러나 이들은 차마 몰랐다. 이미 왕국 내에 발데르 공작을 당할 자는 물론이요, 보탄 남작을 당할 자 또한 없다는 것을…….

발데르가 오러 블레이드를 구사하지 않은 것은 오래도록 전장을 누벼야 하기 때문이다.

어차피 두세 번도 검을 섞지 않고 적을 제압할 수 있는데 불필요하게 마나를 소진하여 힘을 뺀다면 득보다 실이 많을 것이었다.

속사정을 모르니 이들이 발데르의 실력을 폄하하는 것 역시 당연한 일이었다.

지휘관들의 시선을 집중시켜 루시아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자자, 이제 마무리를 짓도록 합시다. 더 늦기 전에 행하는 게 좋겠소이다. 야행을 틈타 야반도주처럼 위장하는 게 좋을 것이오. 우리도 잠들고, 저들도 잠들 만한 그 시각에 말이오. 이 일을 누가 담당해주시겠소?”

“백작은 계책을 마련하셨으니 우리 중 한 사람이 이를 담당합시다.”

“제가 하도록 하겠습니다. 일단은 각 지휘관들께서 알려지지 않은 자들 중에서 가장 뛰어난 기사들을 추려 제 막사로 보내십시오.”

“알겠소.”

“알겠소이다.”

루시아노는 언젠가 조르바 자작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지지기반이 없으면 후에 두고두고 고생하게 될 것이라는 말.

그렇게 되지 않으려면 지금부터라도 인맥 관리에 신경을 써야 했다.

“이렇게 서로가 힘을 합치니 큰 힘이 나는구려. 그럼 적당한 때와 시간을 정해드리지요. 내일 정오에 다시 적과 조우하게 될 겁니다. 그때로 합시다. 방책은 다 예상하시리라 생각하오. 잡혔던 기사들이 후방에서, 우리가 전방에서 적을 맞는 것이외다. 아무리 그들이 뛰어나다고 하지만 예상 못한 일에는 당황하기 마련이니 일이 잘 진행만 된다면 큰 수확을 얻을 수 있을 것이오.”

흡족해하는 지휘관들을 차근차근 바라보며 온화한 표정을 떠올려 주고는 루시아노는 장밋빛 미래를 예감했다.

‘내 세상이 올 날도 머지않았구나.’

* * *

날이 밝았다.

동이 터오며 새 하루가 시작되는 중이었다.

저마다 부스럭거리며 일과를 준비하는 동안 루시아노는 게으름을 피우고 있었다.

자고로 병사들과 기사들이 달라야 하며 기사들과 귀족들이 달라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귀족은 제일 늦게까지 자도 되는 존재라고 생각해왔다.

이불을 뒤척이며 한참을 잔 후에야 루시아노는 상체를 일으켜 기지개를 켰다.

“어제보다 조금 더 잔 것 같군. 어째 몸이 뻐근한 게 간밤에 잠을 잘못 잤나?”

그러면서 양옆으로 목을 젖히고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 뭉친 근육을 풀어주었다.

“가만, 중요한 날인데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전쟁이 벌어지는 도중에도 루시아노는 남다른 여유를 가져왔다. 그러나 오늘만은 그래서는 안 되었다.

다른 지휘관들이 목 빠지게 기다리고 있을 것을 생각하니 아차 하는 마음도 들었기에 서둘러 일어서서 평상복으로 갈아입으려 했다.

그런데 이게 웬일?

없다.

갈아입어야 할 옷이 없었다.

그는 밖을 향해 근엄하게 소리쳤다.

“여봐라.”

대답도 없었다.

혹시 못 들었을까 봐 더 크게 소리쳤다.

“밖에 누구 없느냐?”

결국 답이 들리지 않아 신경질적으로 장막을 확 걷어 젖혔다.

낯선 광경이었다.

여러 명의 남자들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그 눈빛이 마치 우리에 갇힌 동물을 구경하는 것 같았다.

그들 중 한 남자는 검은 머리카락의 이방인이었는데 그는 쭈그리고 앉아서 자신을 보며 뭐가 그리 좋은지 시시덕거렸다.

나머지 사람들의 반응은 두 가지였다.

크게 놀라거나, 크게 비웃거나.

괴롭게도 이방인을 제외한 근방의 사람들은 익히 알던 사람들이었다.

서로 등을 돌리고 맞서고 있는 자들.

발데르 공작과 그를 돕는 귀족들이었다.

“어… 어……?”

그러다 하도 어이가 없어 고개를 가볍게 털며 피식 웃어버렸다.

“자, 장난? 내가 왜 이곳에 있어?

믿기 싫었는지, 아니면 아직 꿈에서도 헤어 나오지 못했다고 생각했는지 루시아노 백작은 표정을 고치고 두 눈을 비볐다.

그러나 뜨고 나도 그대로였다.

“쯧, 이런 해괴한 꿈은 또 처음이로군.”

그렇게 말하고 돌아서려는데 이방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왜? 더 자게?”

루시아노는 우뚝 멈췄다.

꿈치고는 목소리가 너무 생생하질 않은가.

또 그 목소리가 이어졌다. 달래는 어투였다.

“에이, 그만 자.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 생각도 해줘야지. 널 보고 싶어서 다들 꼭두새벽같이 일어나 기다리고 있었다고.”

뇌가 기민해져 더는 흘려들을 수 없었다.

“네, 네놈이 뭔데 그러느냐!”

“나야 그럴 자격이 있지. 힘들게 널 여기까지 업고 온 사람인데?”

주위에서 킥킥대는 소리들이 연이어 들려왔다.

근처에 있던 기사들과 병사들까지 모여든 상황이었다.

먼 곳에서도 이 이상한 광경에 눈이 팔렸는데 미처 그를 몰라보는 병사도 있어 옆의 동료에게 넌지시 물어보았다.

“저 사람 누구야?”

“루시아노 백작. 오딘 님이 업어오셨대.”

“하하하하!”

발데르 공작의 진영엔 한바탕 웃음이 떠돌아다녔다.

모두가 루시아노 백작 자신을 비웃고 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건 정말 이게 현실이라면 큰일이 될 것임은 분명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라. 그곳엔 수천의 군대가 모여 있다. 어떻게 소리 없이 날 업고 온다는 말이냐? 우롱할 생각이라면 썩 물러가라. 꿈이라도 달갑지 않으니.”

“그럼 걔네들도 데리고 와서 상봉을 시켜 주면 믿을래?”

오딘은 그렇게 묻고는 몇몇 기사들에게 귀찮다는 듯 손짓을 하며 명했다.

“데리고 와.”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기사들이 일련의 무리들을 끌고 왔는데, 그들 모두 오랏줄에 줄줄이 묶여 죽을상을 짓고 있었다.

그 무리 중 한 명에게서 격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주군!”

그랬다. 그는 바로 루시아노가 보낸 기사 중 한 명이었다.

“너, 너희들은?”

다는 알아보지 못했지만 많은 이들을 알아볼 수 있었다. 이들은 어젯밤 회의를 통해 간밤에 추렸던 인원들이었던 것이다.

믿기 싫었다. 믿고 싶지 않았다. 이 모든 것을 부정하려 루시아노는 양손으로 머리를 싸매고 소리쳤다.

“가짜다. 모두 가짜다!”

“그럼 꿈으로 믿어. 대신 평생을 꿈속에서 살면 되지.”

이방인에게서 들려온 잔인하고도 잔혹한 말이었다.

툭 내던진 한마디가 저주처럼 들려와 진짜 그렇게 될 것 같았다.

아직까지 이 어처구니없는 상황이 꿈인지 생시인지를 분간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전자로 믿고 싶었다.

아니, 전자로 믿어야만 했다.

만일 이게 생시라면 자신은 장밋빛 미래는 고사하고 깜깜한 앞날만이 펼쳐질 것이기에.

대수롭지 않다는 듯 왕국군 진영으로 몸을 돌렸다.

그리고 걸음을 내디뎠다.

벗어나기 위한 몸부림인 셈이다.

그때 기분 나쁜 이방인에게 또 조롱하는 듯한 말소리가 들려왔다.

“가려면 싹 다 벗고 가.”

“알몸으로 가란 소린가?”

오딘이 고개를 끄덕이자 루시아노는 콧방귀를 뀌며 그에 응수했다.

“흥, 꿈인데 못할 것도 없지.”

정말 그는 당장에 옷을 벗고 있었다.

기가 찬 상황에 사람들은 넋 놓고 구경하면서도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반면에 병사들로 위장하고 붙들렸던 왕국군 진영의 기사들은 크게 당황하는 모습이었다. 한결같이 너도나도 말리고 싶어 했다.

속옷만 빼고 모두 벗자 이방인의 불만족스러운 시선이 느껴졌는지 루시아노는 선심이나 쓴다는 듯 그것마저 확 내려 버렸다.

그리고 자신의 진영으로 돌아가려는데 이방인이 해서는 안 될 말을 지껄였다.

“가죽도 벗어놓고 가야지.”

루시아노는 터무니없는 말에 기가 차서 멈춰 섰다.

‘가죽을 벗으라니? 가죽을 벗으면 어떻게 걸어가라고.’

자신이 스켈레톤(Skeleton:해골 병사)이 아닌 이상 그리할 순 없었다.

“말이 되는 소릴 좀 해라.”

“왜, 꿈인데 또 못 벗을 건 뭐야. 꿈은 뭐든 가능하잖아. 해봐. 이럴 때 아니면 또 언제 벗어보겠어, 가죽을.”

틀린 말이 아니었다.

하나, 그럴 용기가 나질 않았다. 만에 하나 벗겨지지 않는다면 이것은 꿈이 아닌 생시가 될 가능성이 농후해진다.

눈치를 살피다 루시아노는 달아날 마음을 품었다.

하지만 앞쪽에 떨어진 속옷이 어른거려 바로 뛸 수는 없었다.

잽싸게 속옷을 주워들려는 순간 기사 2명이 검을 빼들고 노골적으로 협박했다.

“속옷을 주지 말라 하셨느니라.”

그래도 왠지 주워야만 될 것 같았는지 팔을 뻗으려는 찰나 서슬이 시퍼런 검날이 목울대 앞에서 멎었다.

“베어버릴 수도 있다. 설마 꿈인지 생시인지 확인하기 위해 목을 헌납하지는 않겠지?”

기사의 목소리는 루시아노의 귀에 생생히 와 닿았다. 뿐만 아니라 쇠붙이 냄새가 코끝을 자극하고 있다.

‘꾸, 꿈이 아니야. 어찌 이런 일이!’

이제야 사태 파악이 되었는지 루시아노의 몸이 벌벌 떨리기 시작했다.

자신을 어떻게 잡아왔는지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왜 잡아왔는지가 중요했다.

루시아노는 목멘 소리로 항의했다.

“나, 날 왜 잡아온 거요?”

그 물음에 이방인에게서 들리는 대답이 또 가관이었다.

“심심해서.”

하지만 그 말을 탓할 생각은 없었다.

루시아노는 처절하게 부르짖어서라도 저자의 마음을 움직여야만 했다.

“한 사람의 인생이 걸린 문제요. 날 어서 돌려보내 주시오. 이건 비겁하지 않소이까!”

섣불리 봐서는 안 될 인물이었다.

수천 명의 눈을 피해 자신을 쥐도 새도 모르게 업고 올 정도라면 그의 무력은 감히 짐작할 만한 수준이 못 된다.

또한 저 건방진 태도를 보라. 공작과 후작, 기타 귀족들도 서 있는데 혼자 쭈그려 앉을 수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 결코 가벼이 볼 존재가 아니었다.

그 말이 조금의 감흥이나마 불러일으켰는지 이방인은 주위의 귀족들을 넌지시 바라보며 질문을 던졌다.

“불쌍하니 속옷은 걸치게 해줄까?”

발데르 공작이 겨우 웃음을 참으며 대답했다.

“뜻대로 하시옵소서.”

스스럼없이 말을 높이고 있다. 그가 경칭을 붙인다면 도대체 저자는 무엇이란 말인가.

공작의 위에 있을 사람은 왕이 아니던가.

그가 무소불위의 권력을 지니지 않고서야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혼란에 혼란을 겪으며 루시아노의 정신세계는 피폐해져 갔다.

결국 오딘은 큰 아량을 베풀어 루시아노가 속옷을 걸치는 것만은 허락해주었다.

이어 기다렸다는 듯 기사들은 그를 데리고 가 초라한 막사 안에 밀어 넣었다.

켈타스 후작 역시 이와 같은 상황을 모두 지켜보았다.

그는 우스운 상황에 웃지도 못하고 놀라움에 압도되어 석고상처럼 서 있었다.

오딘이 재미난 것을 구경시켜 준다면서 이 막사 앞으로 귀족들을 데리고 왔을 때는 별생각 없이 따라왔었지만, 막상 적 진영의 지휘관인 루시아노를 접하자 머릿속이 하얗게 비어버린 듯했다.

‘진영 간의 거리가 멀고 말고를 떠나 도무지 이해가 불가하구나. 어떻게 그 많은 병력들의 눈을 속여 감쪽같이 그를 데려왔다는 말인가.’

언젠가 보탄 남작과 발데르 공작이 했던 말들이 결코 허언이 아니었음을 조금이나마 깨닫게 된 것이다.

이 일로 인해 오딘의 걷잡을 수 없는 존재감에 짓눌려 켈타스 후작은 점차 경외의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 * *

왕국군 진영.

사방에서 소리치는 중이었다.

“루시아노 백작, 어디 있는 게요?”

“백작님~!”

그야말로 난리였다. 각 지휘관들은 병력들을 분산시켜 그를 찾아오라는 명을 내렸다.

다른 날도 아니고 오늘 같은 날 자리를 비우면 어쩌자는 말인가.

오래도록 그를 찾을 수 없자 애가 타서 서로가 발만 동동 굴렀다.

그때 지휘관들이 모여 있는 쪽으로 한 병사가 숨을 헐떡거리며 달려왔다.

“여러 곳 다 둘러봤사온데 화장실에 빠지진 않으신 것 같사옵니다.”

대륙의 하수처리 시설은 비교적 잘 발달해 있었다. 그게 습관이 되어 이렇게 야영을 하고 있는 중에도 땅을 깊게 파 볼일을 볼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는 것은 필수였다.

오랫동안 백작을 찾을 수 없자 지휘관 하나는 그가 볼일을 보다 구덩이에 빠지지는 않았을까 걱정이 되어 병사를 시켜 살펴보라고 했었다.

비교적 멀리까지 갔던 병력들도 하나 둘씩 돌아왔지만 누구도 그를 보았다는 사람은 없었다.

* * *

루시아노의 막사 주변으로 4명의 병사가 각기 방향을 점하고 철통같은 경계를 섰다.

본래 경비는 2명뿐이었다.

이곳이 진영의 중앙 근처에 위치해 있는 데다 아침에 이미 그의 얼굴이 많은 이들에게 알려졌기 때문에 도망칠 방도는 없었다.

그럼에도 켈타스 후작은 경비 2명을 더하여 그를 감시하게 했다.

이는 루시아노라는 존재가 매우 위협이 된다는 생각 때문이기도 했고, 잡아들인 기사들을 추궁해 그가 낸 꾀를 다 들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다른 이들은 크게 내색을 하지 않았지만 켈타스 후작만은 모골이 송연해짐을 느꼈다.

자칫하면 앞뒤로 협공을 받을 뻔하지 않았는가.

그리되면 피해는 엄청나게 커질 것이었다.

‘이런 자를 놓친다면 두고두고 후회로 남을 것이다.’

틀린 생각은 아니었다. 혹 그가 이 전투에서 살아남아 왕성으로 돌아간다면 성문을 뚫기란 더 어려워질 것은 자명한 일.

후한이 될 것은 미리 막아야 했다.

그 때문인지 켈타스는 아침부터 벌써 세 차례나 이곳에 들러 경비 상태를 철저하게 점검했다.

바로 그때 한 기사가 비무장의 한 사람을 데리고 와 막사 안에 밀어 넣었다.

자연히 막사 안에서는 두 사람의 만남이 이어졌다.

루시아노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지금 들어온 사람은 익히 알고 있던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자, 자작… 당신!”

“오랜만이오.”

모든 걸 체념한 듯한 표정을 짓는 남자는 언젠가 자신과 함께 그라니트성 주변을 떠돌던 조르바 자작이었다.

루시아노의 놀라움은 분노로 변하였다.

그리고 그 같은 감정을 안겨 준 눈앞의 대상에게 다가가 다짜고짜 멱살을 움켜쥐며 이빨을 부드득 갈았다.

“그랬군, 그랬었어. 당신이 왜 왕국군에 합류를 하지 않나 생각했지. 진작부터 저들에게 줄을 대고 있었다니. 당신이 밀고했군. 아니, 당신이 협조했어.”

조르바는 자신의 멱살을 쥔 그의 손을 신경질적으로 쳐내며 성깔을 부렸다.

“생사람 잡지 마시오. 나도 피해자란 말이오.”

“웃기는 소리. 그렇지 않으면 내가 왜 여기에 있어!”

“당신이 여기 있는 이유를 내가 어떻게 아오.”

둘의 눈에선 금방이라도 불꽃이 튀길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멀쩡하게 옷을 차려입은 조르바와 달리 속옷만 걸치고 있는 루시아노의 행색은 우습기 짝이 없었다.

그 행색을 보자니 우스워서 조르바는 참지 못하고 그만 피식 웃음을 흘려 버렸다.

그게 도화선이 되었다.

루시아노는 초원에 아무렇게나 풀어놓은 맹수처럼 사납게 돌변하여 조르바를 덮쳐 쓰러뜨렸다.

“죽여 버리겠다!”

눈앞에 뵈는 것이 없을 만도 했다. 하루아침에 이런 꼬락서니가 되었으니…….

조르바 역시 가만있지는 않았다.

입가를 씰룩이며 위협을 표하고는 팔에 힘을 주어 그를 밀쳐 냈다.

다른 것은 몰라도 조르바는 힘이 매우 강해져 있었는데, 그것은 그라니트성에서 기사에게 잡혀 매일 하던 운동 덕분이었다.

그는 도리어 루시아노의 위로 올라타 목을 조르며 이죽거렸다.

“잘 들으시오. 당신이나 나나 원치 않게 이곳에 오게 된 거요. 잘못이 있다면 그의 눈 밖에 난 것뿐이야.”

숨통이 조여 답도 못하고 루시아노는 끅끅 소리만 내뱉었다.

“캐, 캐엑.”

조르바는 여전히 사나운 인상을 하고 그에게 현실을 일깨워주었다.

“멍청하게 생사람 잡지 말란 말이야. 이제 우리는 귀족도 뭣도 아니야. 알아들어?”

생각하고 말고 할 것도 없었다. 이러다가는 저들의 손에 죽기도 전에 목이 졸려 죽게 되었으니 무조건 그의 말이 옳다고 해야 했다.

루시아노가 어렵게 고개를 끄덕이자 그제야 조르바는 목을 조이던 팔뚝에 힘을 풀어 거두어들였다.

조르바는 옷에 뭍은 흙을 털며 일어났고 루시아노 또한 상체를 일으켜 세워 엉덩이를 깔고 앉았는데 그 모양새가 너무 초라했다.

“허허, 허허허.”

헛웃음이었다.

분명 웃기는 하는데 루시아노의 눈시울은 금세 눈물로 찼다.

울기만 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던지 팔뚝으로 눈물을 훔쳐 내고 조르바에게 물었다.

“그가 누구요? 왜 우릴 잡아온 거요?”

그가 제정신으로 돌아왔다고 생각이 들었던지 조르바 역시 말을 높였다.

“당신의 일은 모르오. 내 경우에는 그럴 만한 일이 있었소.”

“얘기를 해줄 순 없겠소?”

못할 것도 없었다.

조르바는 오래 묵혀 두었던 얘기들을 꺼내었다.

파르티잔이라는 마법사에 관계된 얘기부터 자신의 성을 발칵 뒤집고 간 이방인에 관한 얘기, 그리고 분을 못 이겨 어쌔신 길드에 청부를 한 사실까지.

다 듣고 난 루시아노는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그럴 만했군.”

조르바 역시 할 말은 없었다. 지금에 와서 느끼는 거지만, 자신이 오딘과 같은 힘을 가지고 있고 남이 이렇게 귀찮게 했더라면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독하게 남을 괴롭히는 것은 아직도 이해 불가한 일이었지만.

괜히 과거를 떠올리자 짜증이 났던지 조르바는 질문자의 입장이 되어 루시아노에게 물었다.

“백작은 그에게 밉보인 게 뭐요?”

“난 처음이었소. 오늘 아침 처음 봤단 말이오. 어이없게도 자고 일어나니 이곳이었소. 난 자작처럼 그런 사연 또한 없소이다. 아침에 그러더군. 왜 잡아왔냐고 물었더니 심심해서 잡아왔다고.”

하소연은 계속되었다.

“여타 지휘관들도 힘을 실어주어 조금 있으면 내 세상이 올 것 같았소. 곧 국왕 폐하에게 인정을 받게 되고, 또 자작의 말대로 귀족들에게 신임도 얻고 있던 찰나였소. 그런데 이게 뭐요? 하루아침에…….”

조르바가 그의 말을 도중에 끊어버렸다.

“참 꿈도 야무지셨소.”

루시아노는 눈알을 부라리며 으르렁거렸다.

“상황이 이렇다고 막가자는 것이오?”

노한 눈길을 접하면서도 조르바는 침착하게 입을 열어 대꾸했다.

“내가 비꼰다고 뭐라 할 게 아니오. 왕국은 이미 희망이 없소. 사리판단이 밝으신 분이 어찌 그걸 모르시오.”

“그게 무슨 말이오? 아직 전투는 끝나지 않았거늘. 자고로 길고 짧은 건 대봐야 하지 않소.”

갑자기 조르바는 루시아노에게 바짝 다가섰다. 그리고 귀엣말로 조용히 속삭였다.

“그렇게 믿고 싶은 것이겠지요. 오딘 저 악마가 있는 한 당신의 바람은 일장춘몽에 불과하오.”

“그, 그가 악마요? 악마가 왜 인간의 일에 관여를… 웁.”

반문을 하는 소리가 느닷없이 커지려 하자 조르바는 손을 뻗어 황급히 그의 입을 틀어막았다.

“조용히 하시오. 들키면 난 죽소이다. 저자의 귀가 얼마나 밝은지 아시오? 여기서 우리가 하는 얘기를 모두 듣고 있을 거요.”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던지 루시아노는 소리가 나도록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조르바가 뒷말을 이었다.

“본론을 말하겠소. 난 백작에게 충고를 하러 온 것이오. 그가 얼마나 무서운 사람인 줄 모를 거요. 난 겪어봐서 잘 알고 있소. 무슨 말을 하든지 무조건 그의 말을 따르는 게 좋을 것이외다. 부디 눈 밖에 나지 마시오.”

“그가 무슨 말을 할 것 같소?”

“그야 나도 모르지요. 다만, 이 전투는 발데르 공작의 승리로 끝나게 될 터이니 그쪽과 연관이 있지 않을까 하오만.”

그때서야 그가 하려는 말을 어렵지 않게 유추해낼 수 있었다.

그러나 루시아노는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허탈함을 감추지 못했다.

“모두 버리시오. 하나라도 가지려고 들다가는 죽음보다 더한 고통이 찾아올 터이니. 경험자라 하는 얘기외다.”

그 말을 하고 조르바는 장막을 걷고 밖으로 나갔다. 그런데 그의 태도가 금세 변했다.

안에선 본연의 귀족 같은 모습이었다면 밖에서는 배알도 없는지 간, 쓸개 다 내놓은 것처럼 비굴하게 굴었다.

이는 철저한 학습의 결과였다.

혹시 근방에 기사들이 오늘 그의 태도가 조금 건방져 보였다든가 하는 말을 오딘에게 전하는 즉시 무자비한 구타가 이뤄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루시아노는 그 같은 행동을 눈여겨볼 여유가 없었다. 조르바의 마지막 말이 머릿속에 계속해서 맴돌고 있었으므로.

* * *

루시아노가 빠진 귀족 연합은 결단을 내려야만 했다. 어렵게 잡은 기회인데 놓칠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하는 수 없이 그를 빼고 전 병력을 평야 앞으로 이동시켰다.

예상했던 정오 무렵에 두 군대는 양쪽으로 길게 늘어서 보기 드문 장관을 연출했다.

하나, 의외로운 광경이 있었다.

발데르 공작이 이끄는 부대의 무리 틈에서 한 사람씩 나오기 시작했는데 그들은 모두 한 줄로 엮인 채였다.

마치 약속이나 한 듯 그들은 가로로 길게 늘어섰는데 그 수만도 족히 오십은 넘었다.

비교적 뒤에 서 있던 지휘관이 의아하게 생각하며 말을 몰아 앞쪽으로 나서며 선두의 지휘관에게 물었다.

“뭐요?”

“포로인가 보오.”

곧 발데르의 마나가 실린 목소리가 전장에 드넓게 울려 퍼졌다.

“귀관들은 들어라. 이들은 어제 그대들이 야반도주하는 병사들로 위장하고 보낸 기사들이니라.”

그 말이 던져 주는 파장은 적지 않았다.

저들은 여기 모인 왕국군의 주력이나 다름없었다.

지휘관들은 곧 일의 심각성을 알아차렸다. 이렇게 되면 이제부터의 전투는 더 큰 혼란이 야기될 것이다. 그나마 실력이 되는 기사들이 적지 않게 빠져나갔으므로.

절치부심의 심정이었다.

발데르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아울러 루시아노 백작 역시 우리의 진영에 와 있느니라.”

이 말이 흘러들자 왕국군 지휘관들의 당황은 둘째 치고 기사들, 심지어 병사들까지 수군대기 시작했다.

“일이 어쩌다가…….”

“설마 백작이 우릴 지금까지 속여 온 것은 아니요?”

“그게 무슨 말이오?”

“생각해보시오. 그렇지 않다면 스스로 저들 진영으로 투신하지 않았을 것이오. 발데르 공작과 모종의 거래를 해온 것이 틀림없소. 이때까지 우리 눈을 속여 귀한 전력을 골라서 빼어간 게 아니면 무엇이겠소.”

유독 성격 급한 지휘관이 믿었던 사람에 대한 배신감에 치를 떨었다.

“망할 작자 같으니라고!”

“의심의 여지가 없군.”

“내가 뭐라고 했소이까. 엊저녁 란테 자작의 목을 베자고 했을 때부터 말리지 않았소.”

지휘관들 간에 설전이 한참이나 벌어지는 동안 저들의 진영에서 보탄 남작이 루시아노 백작을 데리고 무대의 중앙으로 걸어 나왔다.

“대화를 하고 싶은 자는 가까이 와도 좋다. 단, 말에서 내려야 하며 허락 없이 서로의 몸에 상처를 입히는 것은 금한다.”

왕국군 진영에서도 2명의 지휘관이 나섰다.

그들을 보자마자 루시아노는 침중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운이 없어 이렇게 되었소. 내 정말 면목이 없소.”

반면에 어제까지 한솥밥을 먹었던 지휘관 중 하나가 이맛살을 구기며 그를 모질게 나무랐다.

“닥쳐라, 이놈! 어디서 더러운 주둥아리를 함부로 놀리느냐!”

루시아노는 환장할 지경이었다.

끌려온 것만도 억울한데 이제는 오해까지 받고 있다.

어떻게 해서든지 해명을 해야만 했다.

“나, 난 정말 억울하오. 납치를 당했단 말이오.”

“납치를 당했다니, 그 말을 믿으라는 것이냐? 우리를 바보로 봐도 유분수지.”

누가 들어도 납득하기 어려운 얘기이기는 했다.

하지만 진심을 담고 있음을 이리도 몰라준단 말인가. 루시아노는 너무도 억울해서 복장이 터질 지경이었다.

“믿어주시오. 정말이란 말이오. 보탄 남작, 진실을 말해주시오. 내가 납치를 당했다고 말이오.”

보탄은 슬그머니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러나 저들은 도무지 믿을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흥, 같은 패거리라는 것을 모를 줄 아느냐. 천하에 더러운 놈 같으니! 네놈은 예전부터 간사해서 유리한 곳만 찾아 이리 붙었다 저리 붙었다 하였지.”

저들이 계속 깔보면서 얘기하자 루시아노 역시 말을 놓고 울분을 토해냈다.

“그 말이 맞다고 치자! 네놈들 말대로라면 내가 이득도 없는 곳에 왜 몸을 담았겠느냐? 이쪽이 승리할 것은 자명한 일인데 왜 되지도 않는 싸움에 목숨을 거는 것들이냐?”

“뭐, 뭣이 어째!”

목소리가 커지고 한바탕 소란이 일어났다.

당장에 그의 멱살을 쥐려는 지휘관을 보탄이 뜯어말리는 중이었는데, 멀리서 그 광경을 보며 오딘은 따분한지 말 위에서 다리를 꼬고 앉아 턱을 괴고 중얼거렸다.

“항복을 받아내라고 했더니……. 기대한 게 잘못이로군.”

그리고 바로 앉아 고삐를 채어 말을 돌리며 발데르에게 전음을 보냈다.

-군대를 물려라.

곧 발데르에게서도 전음으로 대답이 왔다.

-그리하겠사옵니다.

자신의 세력이고, 자신의 재산이다. 자신의 신하들이고, 자신의 부하들이다. 이들이 충정을 내비치니 오딘은 일월진에 종종 들러 그들에게 따로 무공을 사사하고는 했다.

특히 발데르와 보탄이 주 대상이 되었다.

이는 오딘이 두 사람을 자신의 왼팔과 오른팔로 생각하고 있음이었다.

전음 역시 한 방편이었다.

시끄러운 전장에서 지휘관들의 소리를 전하기란 쉽지가 않다.

이때 전음을 할 줄 안다면 지휘관은 더한 통솔력을 얻게 되는 것이다.

아직은 발데르와 보탄 외에 이것을 익힌 사람이 없었지만, 조만간 그 둘에 의해 전음이 다른 지휘관들에게까지 알려지게 될 것이다.

발데르는 시선을 돌려 보탄 남작과 루시아노 백작을 불러들이고는 적 진영에 자신의 의사를 전달했다.

“오늘은 이만 돌아가겠다. 귀관들에게 생각할 시간을 줄 터이니 잘들 생각해보라. 결정이 선다면 언제든 우리 진영으로 오라.”

그들이 퇴각을 하고 있는 동안에도 왕국군 진영은 움직임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주력의 일부가 빠져나갔으니 지금 격전을 벌인다고 해도 피해만 극심하게 날 것이다.

대안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루시아노를 잡기 위해 애를 쓰던 지휘관도 씩씩거리며 그들의 군대가 멀어져 가는 것을 지켜만 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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