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슴에 품은 한은 비수가 되어 (8/67)

가슴에 품은 한은 비수가 되어

이글레스성.

적지 않은 숫자였다.

미리 전달받은 사항에 이 같은 내용은 없었다.

망루에서 경계 근무를 서고 있는 병사는 성 아래를 향해 소리쳤다.

“군대가 몰려옵니다!”

그러자 성문 앞쪽의 경비들도 사뭇 긴장하기 시작했다.

정말 그의 말대로 얼마 지나지 않아 일련의 병력들이 줄지어 이곳으로 다가오고 있다.

‘재수 움 붙었군.’

둘의 뇌리에 공통적으로 떠오른 생각이었다.

경비 하나가 성안의 수문병에게 기별을 전했다.

“수상한 자들이 다가오고 있다. 어서 알려야 한다.”

전달에 전달을 거쳐 병력들이 우르르 몰려나왔으며 이글레스성의 기사단장인 다란 경도 모습을 드러냈다.

“하필 이런 때에 적이 쳐들어오다니. 궁병들은 어서 망루 위로 들어서라. 명령이 있기 전까지 발사는 금지한다. 마법사 분들은 오른쪽 망루를 맡아주시오. 기사들은 나를 따르라.”

이런 일이 처음인지라 다란 경도 짐짓 당황하고 있었다.

‘성문 앞에 서 있어야 할까? 아니면 망루로?’

생각은 후자로 기울었다.

그 편이 대화를 나누는 데 더 편할 것 같아서였다.

조금 우스운 꼴이 되었지만 누구도 그런 기사단장을 비웃지 않았다. 그 역시 본디 지시를 받는 입장이었으므로.

성의 영주가 자리를 비웠으니 모든 일은 그가 처리해야 했다.

제일 먼저 택한 일은 자작의 부재를 알리는 일이었다.

마법사를 통해 인근의 영지에 이 같은 사실을 고하고 혹여 모를 사태에는 도움을 받기로 하였다.

문제는 시간이었다.

가깝다 하더라도 족히 하루하고도 반나절은 걸리는 거리다.

어차피 도움은 받게 될 것이나 그동안은 영주의 자리를 대신해 성을 보호하고 책임져야 하는 것이다.

그들이 계속해서 성으로 접근하자 다란 경은 목청을 가다듬고 크게 소리를 질렀다.

“멈추시오!”

그러자 의문의 병력들은 소리가 들리는 그에게로 시선이 쏠렸다. 다란 경은 큰 소리로 말을 이어나갔다.

“어디에서 오는 분들이시오?”

그에 앞쪽의 말에 올라 있던 한 남자가 대답했다.

“그라니트성에서 왔다!”

졸지에 다란의 인상이 구겨졌다.

그라니트성이라면 발데르 공작의 성을 말함이 아닌가.

“그렇다면 우리와는 적이 될 터인데, 성을 공격하기라도 하겠다는 소리요?”

언젠가는 닥쳐올 일이었다.

그 역시 주변 정세에 귀를 민감하게 기울여 왔었으니까.

그래도 아직 마음의 준비가 되질 않았다.

영주인 조르바 자작조차 없는 이때에 가장 두려운 적이 들이닥친 것이나 다름없으니 그럴 만도 했다.

그것은 그의 표정에서도 여실히 드러났다.

긴장하는 그를 두고 상대 쪽에서 답변이 이어졌다.

아까와는 다른 목소리였다.

이번의 목소리는 이상하게 작게 얘기하는 것 같은데도 넓게 울려 퍼져 그를 지켜보던 모든 사람들이 들을 수 있었다.

“성을 접수하러 왔을 뿐, 공격할 생각은 없다.”

다란 경은 한편으로는 분노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그 목소리가 언젠가 들었었던 목소리와 흡사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러나 그것을 따지기 전 저자의 어리석음을 깨우쳐 주는 게 우선이었다.

“어찌 그런 망발을 일삼는가! 성이 무너지기 전에는 결코 그리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자 목소리의 주인이었던 자가 말을 몰아 느긋하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래, 네놈 본 적이 있지.”

그때까지 다란은 그를 확인할 수 없었다.

뒤바꿔서 말하자면 그만큼이나 그의 시력이 뛰어나다는 얘기다.

그가 점점 다가올수록 다란은 자꾸 불안해졌다.

‘서, 설마… 아니겠지.’

그 존재가 검은 머리카락을 가졌다는 것을 확인하는 데에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서서히 얼굴의 윤곽이 드러나며 다란의 걱정은 폭발하고 말았다.

“너, 너는!”

얼마나 두려웠던지 몸이 사시나무 떨 듯 떨리기 시작했다.

“알아보니 다행이군. 성문을 열어라.”

성문을 열게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는 잘 알고 있었다. 이 성엔 저 괴물을 막을 존재가 아무도 없다. 다란은 필사적으로 그것만은 막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발악하듯 소리쳤다.

“그리할 수 없다! 아무리 너라고 해도 성문을 부수지 않고는 들어올 수 없을 것이다!”

그랬다. 그가 본 존재는 언젠가 파르티잔을 따라 단신으로 이글레스성에 들어와 재앙을 안겨 준 이방인, 즉 오딘이었던 것이다.

오딘은 귀찮다는 듯 손을 들어 까딱였다.

그러자 뒤쪽에서 한 남자가 말에 올라 오랏줄에 묶인 남자를 데리고 왔다.

그는 다름 아닌 조르바 자작이었다.

다란 경은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것만 같았다.

“주, 주군!”

그는 입마저 봉해져 처연한 몸짓을 하고 있어 더욱 불쌍함을 안겨 줬다.

“이래도 열지 않겠느냐?”

“어, 어찌…….”

며칠 전, 비가 억수로 퍼붓던 날 다란은 자작이 누군가에게 잡혀갔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러나 그 대상이 누구인지를 아는 자들은 없었다.

심지어 망루병마저 순식간에 제압을 당해 쓰러져 있었다고만 했다.

이들이 혈이라는 개념을 알았다면 그라는 예상을 했을지도 모르지만, 그냥 습격을 당해 기절했다고만 느끼니 알 턱이 없었다.

또한 저자가 왜 공작의 편에 서 있는 것인지 도통 이해가 안 되었다.

그가 미적거리자 오딘은 입을 묶은 헝겊을 풀게 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조르바가 소리쳤다.

“성문을 열어라! 어서!”

눈을 뜨고도 코를 베어가는 형국이었다.

찰나의 순간에 다란 경은 여러 가지 생각을 했다.

‘이를 어찌하면 좋은가? 성문을 여는 것이 과연 옳은 선택일까? 그렇다고 해도 주군을 풀어준다는 보장은 없다. 아니, 풀어준다 하더라도 저 악마가 있는 이상 살아도 산목숨이 아니니…….’

문을 열면 모든 것이 끝장이라는 생각이었다.

그 와중에도 조르바의 성난 목소리가 들려왔다.

“뭘 하는 게냐? 어서 문을 열라고 하질 않느냐!”

수문병들은 어이할 줄을 몰라 당황하기만 했다.

정작 지시를 맡은 다란 경이 아무런 지시도 내리지 않았지만, 이 성의 주인은 그가 아닌 저 앞에 오랏줄에 묶인 조르바 자작이었다.

결국 다란 경은 용단의 결정을 내려야만 했다.

“성문을 열어라. 모든 병력은 성 아래로 내려가 주군을 맞을 채비를 하라.”

* * *

보탄 남작이 정예병들을 이끌고 입성한 후 오딘은 몇 가지 지시만을 내리고서 마법사를 통해 조르바 자작과 함께 그라니트성으로 돌아왔다.

보탄은 못내 아쉬워하는 눈치였으나 오딘에게는 따로 할 일이 있었다.

마타하리를 제자로 거두는 일이었다.

제자라기보다는 그저 조금의 조언을 해주는 것이 될 것이다.

조르바는 특별 관리 대상이었다.

오딘이 없더라도 평상시의 일과를 거쳐 지속적인 고통을 받게 될 것이었다.

마타하리는 오딘을 따라 일월진 안으로 들어서며 놀람을 금치 못했다.

“이곳은 신세계입니까?”

“본 좌가 만들어둔 진이니라.”

“진이란 무엇입니까?”

“그것까지 가르쳐 줄 생각은 없느니라.”

서운해하는 모습은 아니었다. 눈앞의 사내에 대한 놀라움이 더욱 커졌을 뿐이다.

오딘은 심법부터 가르쳐 주기 시작했는데 이것은 발데르 공작이 창안한 심법을 그대로 전수해주는 것이었다.

주의 사항이나 모든 것들을 꼼꼼하게 얘기해주었다.

마타하리의 경우는 경지에 올라 있는 상태라 다른 훈련 방식은 필요치 않은 것도 많았다. 덕분에 오딘은 자질구레한 것들을 가르쳐 주어야 하는 귀찮음을 덜 수 있었다.

시일이 지날수록 가르침을 받는 마타하리는 오딘의 거대한 존재감에 압도되어 그를 마음속 깊이 존경하기 시작했다.

* * *

전투는 점차 거대해지고 치열하게 변해갔다.

로렌츠, 드미하란성 외에도 칼튼 남작의 노테일성까지 발데르 공작을 위시한 귀족들의 수중으로 넘어가며 더 이상 지켜볼 수만은 없는 사태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앞서 대전 회의를 거친 왕국은 각 귀족들 간의 연합군을 편성하고 그들의 다음 진로를 예상해 매복을 감행했다.

히히힝~ 히힝~!

땅에서 솟구친 동아줄에 걸려 말들이 나자빠졌다.

뒤이어 오던 말들도 따라 꼬꾸라지거나 겨우 멈췄음에도 놀라 앞발을 들며 투레질을 해댔다.

그것을 시작으로 숲 안쪽에서 병력들이 함성을 지르며 우르르 몰려나왔다.

“와아아아!”

두두두두두-!

육중한 말발굽 소리와 사람들의 발소리가 섞여들어 대지가 신음을 토했다.

갑자기 나타난 적에 당황하면서도 발데르를 따라 일단의 반란군 무리를 이끄는 켈타스 후작은 냉정을 기해 침착하게 소리쳤다.

“당황하지 마라! 각자 제 위치에서 적을 맞아 싸우도록 하라!”

후작의 군대는 그리 뛰어나진 않았다. 다만, 그를 따르는 기사들은 하나로 똘똘 뭉쳐 있어 탁월한 결집력을 자랑했다. 덕분에 기사들이 병사들을 수습하며 피해를 반감시킬 수 있었다.

병장기들이 부딪치고 마법사들의 지팡이에서 빛이 번쩍였으며 폭음이 울렸다.

여기저기에서 들려오는 비명 소리도 함성 소리와 전투에서 빚어지는 소리들에 묻혀 버렸다. 아니, 어쩌면 비명을 지를 마땅한 여건이 주어지질 않아 소리가 작게 났던 탓일 수도.

소리를 지를 기력이 있으면 창칼을 맞대야 했다.

사방으로 말과 사람들이 나뒹굴었다.

주인을 잃은 병장기들은 심하게 구겨져 바닥에 아무렇지도 않게 굴러다녔다.

후작은 난데없이 기습을 당해 인상을 찌푸렸고, 상대 진영의 지휘관은 기습이 커다란 피해를 못 주어 적잖은 실망감에 잠겨 있었다.

그러나 둘 모두 뭔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상대 진영의 것이 먼저였다.

“지원군이 온다! 더욱 공세를 높여라!”

켈타스 후작은 난색을 드러냈다.

“진열을 가다듬고 서서히 뒤로 물러나라!”

과연 명불허전이었다. 이합집산이 되어 있던 군대가 그의 말 한마디로 어려운 여건을 이겨 내고 하나 둘씩 모여들었다.

흩어진 적은 죽이기 쉽지만, 뭉친 적은 그렇지 않다.

이미 죽은 자들에게 동정을 내비칠 수는 없기에 내린 결론이었다.

서로가 명분이라는 걸 가지고 있었다.

켈타스 후작은 후퇴를 하는 상황에서도 상대 지휘관을 향해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꾸지람을 퍼부었다.

“허허, 부끄럽지 않나? 어찌 그릇된 자를 모시고 있는가?”

그쪽 지휘관도 나름대로 대꾸할 말이 있었다.

“왕권이 바뀐 지 오래인데 어찌 반란을 일으키려 하시오!”

말에 올라탄 기사들은 언제라도 도망칠 수 있게 되었지만 직접 발을 놀려 뛰어야 하는 병사들은 그렇지 못했다.

부상자들이 특히 그러했다.

그러나 전투에서 인정을 둘 수도 없는 노릇이라 퇴각을 명하려는 때에 후작의 귀로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구두둥- 구두둥-!

저들의 것이 아니었다.

기다렸던 소리에 후작은 보란 듯이 돌아섰다.

이어 굳은 각오를 다지며 검을 높이 쳐들고 큰 소리로 명했다.

“모두 돌아서라! 반격을 개시한다!”

도망치던 자들이 몸을 돌려 달려들자 멋모르고 추격전을 펼치던 병력들이 당황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도 잠시. 연이어 좌우에서 기사들의 고함 소리가 터졌다.

“좌측 앞에서 적이 몰려옵니다!”

“우측 앞에서도 적이 몰려옵니다!”

적지 않은 숫자였다.

이제는 켈타스 자신의 판단이 그릇되지 않았음을 믿는 수밖에 없었다.

적은 점점 가까워 왔고 뒤쪽에서 들리는 아군의 말발굽 소리도 가까워져 왔다.

켈타스는 뒤로 돌아 아군의 병력을 확인했다.

보통의 말들보다 덩치가 크고 근육이 발달된, 거기에 마갑까지 걸쳐 훨씬 무거워 보이는 말들.

말발굽 소리가 유달리 큰 것은 이 때문이었다.

그 위에 올라 있는 기사들은 적색으로 통일된 경장갑주에 투구까지 쓰고 있었는데 바람에 나부끼는 술들이 한층 멋스러움을 더해주었다.

그러나 단 20여 기의 기마대였다.

아무리 보기 좋고 근사하면 뭣 하랴. 전투는 수로 하는 것이지, 겉멋에 든 기사들이 좌지우지하는 게 아니라는 것을.

후작의 얼굴이 실망감으로 가득 차 이마에 골이 깊게 파이는 순간이었다. 그는 이 기마대가 소리를 높여 적을 겁주려는 의도가 아니었을까 생각했다.

그러나 당한 것은 자기 자신이라는 판단이 앞섰다.

‘아뿔싸! 내가 속고 말았구나.’

이 난국을 어떻게 해쳐 나갈지 걱정이 앞섰다.

그 기마대는 약속이나 한 것처럼 두 패로 갈라졌다.

한쪽은 좌에서 파고드는 적을, 다른 한쪽은 우에서 파고드는 적을 향해 달려들었다.

별 기대조차 하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놀랄 상황이 연출되고 있었다.

단칼에 한 명씩 적병이 꼬꾸라졌다.

적 기마대라고 해도 예외는 아니었다.

추풍낙엽처럼 적병들이 꼬꾸라지자 아군들의 환호성이 터졌다.

“와아아아아!”

기세는 더 큰 기세를 낳는다.

저들처럼 영웅이 되려는 욕심이 들었던지 켈타스 후작의 군대의 힘이 거세졌다.

정말 예측하지 못한 일이었다.

후작은 놀랄 뿐 감히 말을 못하였다.

좌우에서 몰려드는 적들이 사방을 휘젓고 다니는 기마병을 잡으려 달려들었지만 허사였다. 몰려 있으면 단칼에 2명이 쓰러졌고, 달아나는 이들은 말발굽에 채여 쓰러졌다.

돌연 기마대들 중 한 남자가 투구에 달린 술을 휘날리며 후작에게로 다가왔다.

그는 얼마 전 만났던 보탄 폰 크라이센 남작이었다.

“용서하십시오, 후작. 이글레스성도 맡아야 하기에 그리 많은 병력을 끌고 오질 못하였습니다.”

후작의 입술이 떨렸다.

“자, 자네 기마대들은 사람이 맞기는 한 건가?”

보탄은 멋쩍게 웃어 보였다.

단지 검술만 익혀서는 결코 안 될 일이었다.

이는 오딘이 중원에 있을 당시 몽고의 기마병으로부터 말 타는 법을 배웠고, 그 일부분을 저들에게 가르쳐 준 덕분이다.

그때 또 한 번의 말발굽 소리들이 대지를 진동시켰다.

구둥- 구두둥-!

눈앞의 기이한 전투에 눈이 팔려 있던 터라 그들이 지척에 이르렀을 때에나 그 소리를 듣게 되었다.

그 선두에 2개의 고리로 한 눈을 봉한 외눈박이의 사내, 발데르 공작이 있었다.

무려 오십의 기마대였다.

이들이 보탄 남작이 이끄는 기마대와 실력이 엇비슷하기만 하더라도 이 전투는 승리나 다름없었다.

거기에 더해 멀리서 보병들의 발소리가 잔잔하게 들려왔다.

미리 전투의 주역을 맡았던 두 지휘관들의 얼굴에 희비가 엇갈리는 순간이었다.

발데르는 곧장 가운데를 향해 파고들었다.

그를 눈치 챈 켈타스가 소리쳤다.

“길을 터주어라!”

그러자 병력이 반으로 갈라졌다. 그 가운데로 발데르가 탄 말이 파고들었다.

그는 걸리는 적들만 베어냈다.

그 속도가 예사롭지 않아 검을 휘두르는 것인지, 작은 나뭇가지를 휘두르는 것인지 착각이 들 정도였다.

아직 앞쪽에는 마주치지 않은 적들이 있으니 그쪽을 밀 생각이었다.

발데르의 기사들은 일심동체가 되어 그를 따르며 뒤쪽에서 파고드는 적들을 가차 없이 베어버렸다.

당해낼 자가 없었다.

왕국군은 파죽지세로 밀리며 도망치는 병력까지 생겨났다.

대열이 흩어지면 진열도 무너지게 되어 있다.

결국 국왕의 명을 받드는 각 지휘관들은 퇴각 명령을 내리기에 이르렀다.

이들은 몇 패로 갈라져서 도망쳤는데 다수의 병력은 원래 통했던 숲으로 달아났다.

그러자 숲으로 향하는 자들을 쫓으려는 병력들이 더러 있었다.

보탄 휘하의 한 기사가 그를 간파하고 크게 소릴 질렀다.

“오딘 님의 명이시다. 숲으로 향한 적들은 쫓지 않는다!”

자신들의 지휘관의 목소리가 아니었음에도 병사들은 그 위세에 눌려 멈춰서고 말았다.

달아나기 바빴던 지휘관들은 할라리야 평야 맞은편까지 물러나야만 했다. 그곳에서 다시 병력이 뭉쳤는데 그 수가 원래 병력의 반도 채 되질 않았다.

지휘관들은 서로를 독려하면서도 두려운 마음을 숨길 수 없었다.

“정말 괴물 같은 자들이었소. 공작에게 저렇게 강한 군대가 있었소?”

“본인도 모르는 일이외다.”

“혹 외부의 세력을 끌어들인 것은 아닐는지.”

“큰일이구려. 어쩌다가 저렇게 강한 적과 맞닥뜨리게 되었는지…….”

“아직 낙담하기는 이르오. 국왕께서 이웃나라에 사자를 보내셨다고 들었소. 저들이 아무리 대단하다고 한들 원군 세력이 온다면 별수 없지 않겠소?”

그들은 거기에나마 한 가닥 기대를 걸고 있었다.

* * *

대전 안은 침묵에 휩싸였다.

하인리히 국왕은 진노하고 있었다. 바리톤 왕국에 사자로 보냈던 자가 아무런 성과도 거두지 못하고 돌아왔기 때문이다.

사자는 왕의 미움을 한 몸에 다 받아내야만 했다.

그도 나름 억울했다. 분명 그의 뜻을 담은 칙서를 전달했고 협조를 요청했지만 그쪽의 국왕은 들은 체 만 체했다.

명을 받았던 사자를 바라보다가 분을 억제하지 못하고 하인리히는 왕좌의 팔걸이를 강하게 내리쳤다.

그리고 대노하여 소리쳤다.

“뭣들 하느냐! 당장 저놈을 끌어내 목을 치도록 하라!”

대전 안을 메운 근위 기사들 역시 당황하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왕명을 거역할 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들에게 붙잡혀 끌려 나가면서도 사자는 억울함을 호소했다.

“폐하, 자비를 베푸소서. 폐하!”

뒤로 갈수록 목청이 높아졌다. 그도 그럴 것이 죽음을 향해 다가서고 있질 않은가.

하지만 하인리히는 콧방귀를 뀔 뿐이었다.

“무능한 자 같으니라고.”

일이 뜻대로 되질 않자 하인리히는 폭군이 되어 있었다.

얼마 전에는 자신을 쳐다보는 눈초리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시종의 목을 쳐 버린 일도 있었다.

곁에 있던 궁내부 대신이 허리를 숙이며 조심히 아뢰었다.

“폐하, 귀족들이 힘을 합쳤으니 곧 좋은 소식이 있을 것이옵니다.

“그리하여야겠지. 그리되어야겠지.”

그는 여전히 독기 가득한 눈을 하고 어금니를 씹으며 중얼거렸다.

“발데르 네 이놈. 네 명줄이 얼마나 긴지 짐의 두 눈으로 똑똑히 확인할 것이다!”

* * *

오딘이 이 세상에 온 지 어느덧 1년이 흘렀다.

기다리고 또 기다렸던 순간이었다.

이날을 위해 얼마나 많은 일을 참았던가.

한주먹거리도 안 되는 시정잡배들이 귀찮게 했어도, 같잖은 마법사와 기사, 귀족 따위가 시비를 걸어왔어도 참을 인 자를 새기며 기필코 참아왔다.

그러고 보니 흑룡무제란 별호와 악진이란 이름을 버린 지도 1년이 되었거나 그 가까이가 되었다.

한편으로는 중원에 대한 그리움도 있었다.

“그 녀석들은 잘 있나 모르겠군.”

마교의 부하들을 회상하는 말이었다.

그렇게 혼잣말을 내뱉으며 오딘은 에르데 숲으로 들어섰다.

1년 전 오늘, 이곳에서 했던 약속을 지킨 것에 대한 보상을 받을 계획이었다.

숲에 발을 디딘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앞쪽에서 초록빛의 물체가 다가왔다.

인간이 아닌 나무의 모양을 하고 있다.

외형에 대한 편견이 있어 그 녀석이 아닐 거라 생각했지만 그릇된 판단이었다.

-때맞춰 와주었군.

오딘은 우뚝 멈춰 섰다.

“네 녀석이로군. 외형도 자유자재로 바꿀 수 있나?”

-그런 셈이지. 그때는 미안하게 생각한다. 네 모습을 하고 있어서 기분이 상했다면 이해해다오.

“되었다. 검이나 돌려주도록.”

나무의 형상을 한 정령은 몸속에 손을 집어넣어서 흑룡검을 꺼내었다. 그리고 오딘에게 내밀었다.

-보관 상태는 매우 양호하다. 일 년 전의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오딘은 검을 받아들고 손잡이를 잡아 검신을 반쯤 꺼내 눈으로 살펴보았다.

묵광이 요기를 발하는 듯했다.

-놀라운 검이로군. 천 년을 넘게 사는 동안 많은 검들을 봐왔지만 모두 그대가 지닌 것보다는 못하였다.

검을 아끼는 이들은 자신의 칭찬만큼이나 검에 대한 칭찬을 듣기 좋아했다. 오딘이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었다.

표정이 밝아진 오딘은 기분이 나쁘지 않음을 피력했다.

“칭찬 일색이로군.”

-이제는 나와 약속을 지킨 것에 대한 고마움을 표시할 차례로군.

무엇인가를 또 줄 생각인 모양이다. 그렇다 해도 오딘은 별로 받을 마음이 없었다.

그러나 그가 전해주는 선물은 매우 진귀한 것이었다.

-숲의 반지다. 마법진의 도움 없이 공간 이동을 가능하게 해준다. 생각 없나?

“아니, 줘.”

탐이 나는 물건이었다.

매번 마법사들을 대동해 이리저리 옮겨 다니기가 영 불편했었는데 저것이 있다면 그럴 필요가 없질 않은가.

파르티잔에게 마법을 배우려 한 이유 중 하나기도 했다.

정령은 반지를 전해주며 부가 설명을 덧붙였다.

-단, 숲으로만 이동이 가능하다. 또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숲이라야만 한다는 제약이 따른다.

그래도 그게 어딘가.

오딘이 만족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어떻게 사용하는 거지?”

-간단하다. 반지를 손가락에 착용하고 원하는 곳으로의 숲을 떠올리면 된다. 염원을 담는 것이지.

“흠, 값비싼 선물을 주는군.”

-그럼 나는 이만 가봐야겠군.

그 말과 함께 정령은 숲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리고 오딘의 시야에서 멀어져 갔다.

* * *

확실히 흑룡검을 쥔 오딘이 오딘다웠다.

그 본연의 모습에서는 기개가 넘쳐났다.

과거 중원에서의 시절, 오딘은 진법에 능통해 있기도 했지만 무림 고수들은 그보다 그의 검을 더 무서워했다.

오죽하면 이런 말이 나돌았을까.

‘검을 든 흑룡무제와 대적한다는 것은 자살 행위나 다름없다.’

한마디로 이 검이 함께함으로써 오딘은 무적이 된 셈이다.

그라니트성으로 돌아온 오딘을 제일 먼저 찾는 이가 있었다.

그는 꽤나 당황한 모습이었다.

오딘을 숲 근처까지 안내했다가 따라 돌아온 마법사가 그를 꾸짖었다.

“무슨 일이기에 이리 호들갑이냐?”

그는 자신의 상전인 마법사에게 죄송하다는 말을 할 새도 없이 오딘을 향해 다급함을 호소했다.

“큰일이옵니다.”

“무슨 일인가?”

“일월진 안에서 변고가 일어났사옵니다.”

“변고라니?”

“마타하리가 이성을 상실한 듯합니다.”

우려하던 일이었다.

앞서 발데르 공작과 보탄 남작의 경우에는 이탈자가 생겨나지 않았거늘, 엉뚱한 곳에서 불길이 치솟은 셈이다.

생각하는 그것이 맞을 것이다.

주화입마에 빠졌을 것이라는 것.

처참한 광경이었다.

일월진 앞에 누워 있는 부상자는 여기저기 살이 찢어지고 뼈가 갈라지고 벌어져 있었는데 그 상태가 매우 심각해 차마 눈뜨고는 보기 힘들 광경이었다.

마법사들이 살려 보려고 연방 치료 마법을 시전했지만 마나가 새는 건지 도통 상태가 호전되지 않았다.

“들것에 올려 괴짜 노인에게 데려가라. 환자가 앞에 있는데 모르는 척하진 않을 테지.”

괴짜 노인이란 전에 마타하리를 치료해주었던 자를 일컫는다.

오딘의 불만이 이런 식으로 표출이 되고 있는 셈이다.

마법사들이 황송하게 고개를 조아리며 근처에 있던 병사들이 그들을 도와 부상자를 수습하기 시작했다.

위급함을 깨달은 자들이 근방에 있던 여러 병사들과 기사들을 데리고 진 밖으로 몸을 뺀 상태라 남아나는 사람이 많았다.

“몇몇은 성으로 돌아가 쇠사슬을 가져오너라. 되도록 굵어야 하느니라.”

그러자 힘이 센 기사들 몇과 마법사 한 명이 조가 되어 다시 명령을 이행하기 위해 돌아섰다.

유독 겁에 질려 보이는 병사가 있었는데, 그는 얼마나 두려운 장면을 목격했는지 오딘이 이곳에 당도했을 때부터 인사를 올릴 생각조차 못했었다.

쭈그리고 앉아 부들부들 떨고 있는 것이 흡사 경기에라도 걸린 것만 같았다.

오딘은 다가가서 그의 어깨를 부여잡았다.

“말해보아라! 무슨 일이 있었는지.”

겁먹은 눈이 자꾸 현실을 피하려고만 했다.

오딘은 한차례 그의 몸을 흔들어 자신에게 고정시키고는 눈을 맞췄다.

거대한 존재감이 공포를 압도해나가기 시작했다. 덕분에 병사는 충격에서 벗어나 정신을 차리고 있었다.

“무슨 일이 있었느냐!”

그때서야 병사는 정신이 번쩍 들었던지 황망하게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본 것들을 낱낱이 고해바쳤다.

“저와 그는 근방에서 수련 중이었습니다.”

그라는 것은 쓰러져 있던 대상, 즉 자신의 동료를 일컫는 말이었다. 병사는 조금 전의 일을 회상하며 겁먹은 눈으로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그러다가 돌연 한쪽에서 괴성이 터졌사옵니다. 섬뜩한 기분이 들어 다가가 보았는데 마타하리라는 분이…….”

뒷말은 듣지 않아도 알 것이었다.

그러나 병사의 말은 그치지 않았다.

“불을 담은 것처럼 안광이 빛을 발했습니다. 온통 인상이 구겨져 보기만 해도 소름이 돋을 지경이었습니다. 핏줄은 또 사방으로 곤두서 근육이 터져 나갈 듯 보였습니다. 저는 몸을 빼자고 말했지만 제 동료는 그래도 걱정이 되었던 나머지 다가가고 말았습니다. 그게 화근이 되었습니다. 검끝에 치렁치렁한 오러가 자라나 동료의 몸을 갈기갈기 찢어놓았습니다.”

사실 다행이었다. 몸이 난자당했다고는 하나, 막 주화입마에 빠진 상태라 약간의 이성이나마 남아 있어 마타하리는 손속에 사정을 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는 온몸이 분해되는 고통을 안고 명을 달리해야 했을 테니까.

오딘은 주위를 둘러보며 다그치듯 물었다.

“진 안에 다른 자들은 없느냐?”

“몇몇이 남아 있기는 할 것이옵니다. 미처 깊숙한 곳까지 들어가 알리지는 못했습니다.”

깊숙한 곳이라면 이들보다 실력이 뛰어난 이들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안심할 게 아니었다.

마스터의 경지에 오른 인물은 발데르와 마타하리 단둘뿐이었다.

거기에 마타하리는 주화입마에 이른 상태니 폭주나 다름이 없다. 안에 발데르가 있다고 하더라도 위험한 것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기사들이 오딘이 시킨 쇠사슬을 들고 왔다.

오딘은 그것들을 그들에게 들게 하고 따라오라고 시키고는 진 안으로 서서히 걸음을 들여 놓았다.

* * *

조금만 늦었어도 사단이 일어날 뻔했다.

수련을 하던 기사 몇 명이 급작스레 마타하리의 습격을 받았다.

그중 한 기사는 마타하리가 검을 휘두르는 것을 보고 즉시 몸을 날려 피했음에도 허벅지에 깊은 자상을 입어 하염없이 피가 쏟아졌다.

부욱 옷을 찢어 상처를 동여매는 동안 근처에 있던 기사들이 즉시 그를 엄호했다. 다른 한 기사가 오러가 담긴 마타하리의 검과 마주쳤지만 허사였다.

흡사 무가 잘리듯 검이 두 동강이 나버렸기 때문이다.

그것도 오러의 끝부분에 걸렸으니 망정이지 조금만 가까이 접근했다면 머리통이 날아갔을 것이다.

마타하리가 몸을 날리는 속도가 감히 이들의 눈으로도 따라잡기 힘든 것이어서 한 명은 나무 위로 올라가고, 다른 이들은 사방으로 흩어지려 하고 있었다.

바로 이때 오딘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 와중에도 기사들은 인사를 올렸지만 오딘은 들은 체도 않고 마타하리를 측은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쇠사슬을 풀어 바닥에 내려두어라.”

기사들은 즉시 가져온 것을 내려 두고는 멀찍이 물러섰다. 은근히 두려웠기 때문이다.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질 것을 염려한 행동이었다.

확실히 마타하리는 다른 곳에 눈을 두지 않았다.

본능이 가장 위협이 될 대상이 눈앞에 있는 존재라는 걸 알려 주어서였다.

눈에서 광망을 토해내며 포악한 맹수처럼 마타하리는 괴성을 지르며 오딘에게 달려들었다.

그사이에 일말의 이성조차 달아나버린 것이다.

오딘은 사악하게 입꼬리를 치켜 올렸다.

“주인을 무는 개는 달갑지 않느니라.”

마타하리의 오러가 오딘을 덮쳤으나 바람을 가르는 소리만 들렸을 뿐이다.

그 자리에 흐릿하게 남아 있던 오딘의 잔상이 서서히 흩어졌다. 이형환위(以形換位)였다.

약이 올랐던지 마타하리는 적을 찾으려고 이리저리 고개를 돌렸다. 문득 뒤에서 꾸짖음 소리가 들렸다.

“어리석은 놈. 내 그렇게 일렀거늘.”

마타하리가 고개를 돌렸을 때 눈을 아프게 할 정도의 밝은 오러가 흉흉하게 빛을 뿜었다. 흑월파천무의 일 초식, 월영일섬(月影一閃)이었다.

주위를 집어삼킬 것 같은 빛이 마타하리를 덮쳤다.

다급하게 마타하리가 검을 들어 막았지만 허사였다.

쾅!

검과 검이 부딪치며 굉음을 터뜨렸고, 흑룡검의 힘을 이겨 내지 못한 마타하리의 검은 애석하게도 저만치 나가떨어졌다.

그로도 모자라 마타하리의 손목은 부들부들 떨렸다. 단 일합도 버텨 내지 못한 것이다.

노한 눈으로 오딘을 쏘아보려 했지만 그는 이미 그 자리에 없었다.

스산한 바람이 온몸을 휘감았다.

그리고 거무튀튀한 쇠의 감촉이 살에 와 닿았다.

그것은 점차 자신의 몸을 옥죄어왔고 괴로움에 마타하리는 괴성을 토했다.

“크워어어어어!”

오우거나 낼 법한 소리, 아니 그보다도 훨씬 크고 포악해 보이는 음성이었다.

쇠사슬이 몸을 칭칭 감아 옴짝달싹 못하게 되어버리자 마타하리는 계속 성을 부렸다.

오딘이 그의 어깨에 가볍게 손을 올리고 힘을 가하자 마타하리의 하반신이 땅에 박혀 버렸다.

지금까지 이 광경을 본 기사들은 기겁을 했다.

“이리하는 수밖에는 없겠구나.”

마타하리를 향해 차갑게 그리 말하고는 오딘은 금강경 중 화무소화분(化無所化分)을 이곳의 말로 번역하여 낭독하기 시작했다.

이는 깨달음을 주기 위한 것으로 극도로 난폭해진 마타하리의 심신을 진정시켜 주기 위함이었다.

효과는 서서히 나타났다.

계속 괴성을 질러대던 마타하리가 조금씩 얌전해진 것이다.

맹호수복주인술(猛虎隨伏主人術).

익히 알고 있던 사술이었다.

말 그대로 맹호수복주인술은 난폭한 범을 엎드리고 따르게 하는 것이다.

이것은 오딘이 배교의 여러 사술들을 접하며 집대성한 것이었다.

마타하리의 이마에 손을 짚고 한참 동안 글귀를 읊고 난 후에야 오딘은 지그시 감았던 눈을 떴다.

이어서 한 손으로 마타하리의 피부를 찢고 다른 한 손으로 흐르는 피를 받았다. 그리고 손바닥에 고인 마타하리의 피를 입술에 적셨다.

다시 오딘은 마타하리의 눈을 감겼다가 뜨게 하고는 사술의 마지막 내용을 읊었다.

그러자 오딘을 대하는 마타하리의 시선이 변했다.

모든 의식을 마쳤을 때 오딘은 그를 땅에서 꺼내주고는 명령조로 입을 열었다.

“따라오라.”

* * *

기사들은 이 일에 대해 얘기하는 것을 매우 조심스럽게 생각했다.

반면 병사들은 그렇지 못했다.

원래 병사들의 입단속은 어려운 법이다.

그러다 보니 성안엔 소문이 파다했다. 미쳐 버린 마타하리가 문제를 일으켰고, 그 와중에 오딘 님이 오셔서 그를 굴복시키고 따르게 만들었다는 얘기가 그것이었다.

소문은 사람들 입을 오르내리며 덧붙여지고 과장되어서 오딘 님이 바람으로 화하였다는 둥 검에서 광선을 쏘았다는 둥 별말이 다 나돌았다.

그러나 이 소문에 유독 슬퍼하는 이가 있었다.

샬로트였다.

그녀는 점점 불러오는 배를 어루만지며 슬픔에 잠겨 있었다.

소문이 사실인지 그날부터 마타하리를 볼 수 없었다.

하지만 따질 수도, 채근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자신은 시녀일 뿐이요, 상대는 귀족들마저 떠받드는 지극히 높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와 말 한마디를 섞는다는 것조차 자신에게는 무리한 일이었다.

윗분들은 분명히 엄중히 문책을 할 것이며 그리되면 자신과 마타하리의 아이마저 위태로워질 수 있었다.

크나큰 상심에 빠져 있는 이때, 기사 하나가 다가와서 입을 열었다.

“따라오시오.”

그녀는 영문도 모르고 그를 따랐다.

복도의 모퉁이를 돌자 한 남자가 난간에 기대서서 아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아…….”

그는 이 성에서 가장 높은 존재, 오딘이었다.

‘이렇게 가까이 다가왔는데.’

바짓가랑이라도 붙잡고 늘어지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녀의 머릿속엔 ‘설마 저분이 날 찾지는 않았겠지’라는 생각만이 가득했다.

자신을 뭘 볼 게 있다고 찾겠는가.

하여 미련이 담긴 시선이 그에게 오래 머물렀다.

‘이 기회를 놓쳐 버리면 볼 수 없을지도 모르는 분이다. 용기를 내야만 한다.’

애간장이 탔지만 도저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한데, 의외롭게도 기사가 그 앞에 멈춰 서서 아뢰었다.

“오딘 님, 그 시녀를 데리고 왔습니다.”

“수고했다.”

이윽고 오딘이 몸을 돌렸다.

샬로트의 머릿속은 누가 헤집어놓은 것만큼이나 복잡했다.

‘나를? 나를 찾으셨다는 말이야?’

오딘이 눈짓을 하자 기사는 근처에 있던 간이 의자를 그녀의 뒤쪽에 놓아주었다.

“앉으시오.”

하도 황송한지라 샬로트는 사색이 된 얼굴로 손을 휘저었다.

“괘, 괜찮습니다. 서 있겠습니다.”

“몸도 불편할 터이니 앉아. 얘기가 길어질 수도 있으니.”

누구의 말인가.

감히 따르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가 서 있고 자신이 앉아 있으니 마음이 편할 리가 없어 마치 가시방석에 앉아 있는 느낌이 들었다.

기사는 눈치 빠르게 고개를 조아리고는 멀리 떨어졌다.

오딘이 입을 열어 물었다.

“아이는 잘 크고 있는 모양이군.”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는 얘기리라.

샬로트의 놀라움이 더해졌다. 관심이 없었다면 모를 일이었다. 저분이 왜 자신 같은 것들에게 관심을 가진단 말인가.

모기만 한 목소리로 샬로트는 조심히 되물었다.

“아, 알고 계셨군요…….”

“알면 안 될 일이었나?”

“그, 그렇진 않사옵니다.”

잠시 미소를 떠올렸던 오딘은 정색하며 말을 이었다.

“그와 정을 통하였던 것은 알고 있었지. 그는 죽지 않았느니라. 하나, 애석하게 되었구나. 이제 그에게 이성은 없다.”

샬로트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 그것이 무슨 말씀이온지…….”

“이제 널 못 알아볼 것이란 얘기다. 더불어 배 속에 든 네 아이도.”

충격이 큰 모양이었던지 샬로트는 더 묻지 못했다.

“품어왔던 한이 이성을 넘어섰느니라. 그렇기에 그만큼 알아듣게 얘기를 했거늘.”

“다, 다시 한 번 말씀해주시오면…….”

그에 오딘은 단호하게 말했다.

“광인이 되었단 얘기다.”

* * *

샬로트는 침대에 얼굴을 파묻고 울고 또 울었다.

오딘이 그녀를 배려해 훨씬 더 좋은 방을 내주었고 하녀까지 붙여 주었지만 그녀는 도통 애절함을 달래지 못했다.

가슴이 찢어지는 슬픔에 잠겨 식사조차 거르기 일쑤였다.

하지만 그래서는 안 되었다.

자신은 죽어 사라지면 그만이지만, 배 속의 아이는 어찌한다는 말인가. 이 죄 없는 아이에게 가혹한 죽음을 안길 수는 없었다.

며칠 후 샬로트는 무례하게도 오딘을 뵙기를 청했다.

높은 분들은 그토록 어려워했지만 이상하게도 오딘은 샬로트를 대함에 있어 따스함으로 일관했다.

“며칠 사이에 많이 야위었구나.”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죄송할 건 없느니라. 그래, 무슨 일로 왔느냐?”

“한 가지 여쭙고 싶었습니다. 그는, 그는 이제 가망이 없는 것인가요?”

“내가 묻고 싶은 말이 있었다. 그날 네가 혼절해버려 묻지 못했던 말이기도 하다. 마타하리가 한을 품은 자가 누구더냐?”

“그, 그건 소녀도 모르겠습니다. 다만…….”

그녀는 들은 대로 마타하리의 원수에 대한 인상착의를 설명했지만 정확하지도 않았으므로 사막에서 바늘을 찾는 격이었다.

오딘은 씁쓰름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자가 죽는다면, 방법은 찾을 수 있다. 하지만 아직은 너무 먼 얘기 같구나. 일단은 잊도록 해라. 하늘이 너희들을 버려두지 않는다면 이루어질 수도 있을 터이니.”

너무나 먼 얘기였다. 또 와 닿지도 않을 얘기였다.

그러나 왠지 그날이 다가올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렇지 않다면 어찌 이리 마음이 편해지는 것이며, 기운이 솟는 것일까.

실로 불가사의한 일이었다.

그녀는 오딘에게 연거푸 감사의 말을 전하고는 방을 나서려 했다.

그러자 문득 오딘이 못을 박아 말했다.

“그날까지 마타하리의 주인은 바로 내가 될 것이다. 기억해두어라.”

“그것은 아이의 아버지 역시 바라고 있는 일일 것입니다.”

* * *

아론은 가까스로 정신을 차렸다. 비몽사몽간에 죽음의 문턱이 어떻게 생겼는지까지 보고 왔다. 살아 있다는 게 신기할 따름이었다.

하나, 눈을 떴을 때는 놀라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깨어났군.”

이 말을 하는 대상이 오딘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직각으로 몸을 일으켜 세웠다.

“오딘…….”

“소리 지를 필요 없어.”

‘…님을 뵈옵니다’라고 했어야 하는데 그가 끼어든 바람에 반말을 한 셈이 되고 말았다. 얼굴빛이 붉어졌고 많이 당황스러웠다.

“그래도 괴짜 노인의 실력이 대단하긴 한 모양이군. 걸레가 된 몸을 완쾌를 시켜 놓은 것을 보면 말이야. 본 좌는 인술(仁術)에는 영 조예가 없는데 부럽군.”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자신이 어떻게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는지.

괴짜 노인이라는 말은 공공연히 퍼져 나가 병사들까지도 그 노인이 공작의 손님이라는 걸 알 수 있게 되었다.

성에 노인은 많다. 그러나 괴짜 노인이라는 호칭을 가진 노인은 하나다. 어떻게 보면 오딘이 그들을 구별할 수 있게 만든 단어라고 볼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사람은 높은 양반이다.

하면 어찌하여 자신 같이 미천한 자를 치료해주었단 말인가.

동료들에게 경위를 듣고 싶었지만 그럴 여건이 못 되었다.

나중에 물어보아도 될 일이다.

오딘이 선 채로 물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아론이라고 하옵니다.”

“아론이라……. 외우기 쉬운 이름이군.”

아론에게는 더없이 달가운 말이었다. 높은 분이 저리 살갑게 대해주시니 어찌 기쁘지 아니할까.

“그래, 아론. 움직일 순 있겠느냐?”

“예, 무리 없습니다.”

“그럼 옷을 걸치고 본 좌를 따라오도록.”

아론이 옷을 걸치고 나서자 또 높으신 분이 문밖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발데르 폰 그라니트 공작 전하의 기사단장을 맡고 계신 크레멘 준남작이었다.

자신이 지금 꿈을 꾸는 것인가 싶어 볼을 꼬집어보았다.

이렇듯 병사들은 높은 분을 뵙기 어려운 법이다.

그러면서도 행여 뒤처질세라 발 빠르게 오딘의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어두컴컴한 지하 뇌옥으로 향하고 있었다.

아론은 불안감이 엄습함을 느꼈다.

‘내가 이분들에게 큰 죄를 저지른 모양이다. 이를 어이하면 좋단 말인가.’

계단을 따라 내려갈수록 두려움은 더 커졌고 사색도 짙어졌다.

‘무슨 죄를 저질렀을까? 분명 마타하리 그분께 쓰러졌던 것이 기억의 마지막인데.’

다리가 오들오들 떨렸다.

바로 뒤에서 그것을 확인한 크레멘 준남작이 우스운 낯빛을 지었다.

제일 아래층으로 내려왔을 때 아론은 더한 의문에 휩싸였다.

‘마타하리 님?’

오딘은 그 표정을 읽었다.

그의 손에 죽을 뻔했음에도 아론은 결코 마타하리를 적대시하는 표정이 아니었다.

“네 마음이 나쁘지 않아 막대한 임무를 부여해줄까 한다.”

“오딘 님의 명령이라면 뭐든지 따르겠습니다.”

오딘이 없었다면 자신들은 모두 왕국군에 의해 죽게 되었을 것이라는 것을 모르는 이는 없었다.

병사들이라고 바보가 아니었던 것이다.

죽으라면 죽는 시늉까지 할 수 있었다. 아니, 죽을 수도 있었다.

그런데 임무라고 하니 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인가. 일개 병사가 제일 높은 분에게 임무를 부여받으니 말이다.

오딘은 말을 이었다.

“그는 이성을 잃었다. 누군가 돌봐주어야 한다. 그게 아론, 네가 되었으면 좋겠구나.”

“분부를 받들겠습니다.”

아론은 단지 그에게 식사를 챙겨 주고 뒷바라지를 해주라는 말로 알아들었다.

그러니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하지만 오딘의 뒷말은 기가 막힌 것이었다.

“그는 맹수와 다름없다. 일말의 이성도 남아 있지 않지. 지금은 쇠사슬로 묶어놓아서 큰 무리야 없겠지만 언젠가 그를 풀어야 할 일도 생길지 모른다. 그 역시 네가 맡아주어야 한다.”

아론은 덜컥 겁을 집어먹었다. 머릿속이 뒤숭숭했다.

저분 말대로라면 마타하리 님을 조련하라는 것이나 다름이 없는데 그럼 자신도 죽어나갈 것이 뻔하지 않겠는가.

아론은 두려움이 가득 담긴 목소리로 하소연했다.

“하, 하오나 어찌…….”

“방법을 일러주겠다.”

그와 같이 말하고는 오딘은 아론에게 사술을 시행케 했다.

마타하리가 아론을 두 번째 주인으로 인정하게 된 데에는 적지 않은 시간이 걸렸다.

몇 차례나 아론이 겁을 먹고 떨었기 때문이다.

또 마타하리의 피부에 생채기를 내어 피를 마시라고 주었을 땐 기겁을 하였다.

그렇게 어려움 끝에 의식을 마치고 오딘은 아론에게 단단히 일러두었다.

“지극히 위험한 존재다. 날이 갈수록 더해질 것. 아까도 말했듯이 아군과 적군을 구별하지 못하느니라. 혹 적과 조우하는 상황에서 그를 쓸 일이 있다면 아군 전체를 물려야 한다. 알겠느냐?”

“아, 아군 전체를 말이십니까?”

아론은 당장에 실수를 깨닫고 황급히 대답부터 했다.

“명심하겠습니다.”

“크레멘은 앞으로 아론의 지도를 담당하도록 하라.”

“분부 받들어 모시겠나이다.”

아론은 너무나 황송해서 손사래를 치며 명을 거둬주길 바랐지만 크레멘의 사나운 눈길을 접하며 말문을 닫아야만 했다.

* * *

하루 두어 차례 비밀 통로를 통해 성의 꼭대기를 찾았다.

이곳은 제법 널찍해서 혼자서 검술을 갈고닦기에도 안성맞춤이었다.

아론은 언제나처럼 마타하리를 묶은 쇠사슬을 한쪽에 걸어두고는 만면에 흡족한 미소를 떠올렸다.

“꿈만 같은 일이에요. 준남작님께 일대일로 교육을 받을 수 있게 되다니. 평소 존경하던 분이었거든요. ‘와, 나도 저분의 기사단에 들어가 기사가 될 수 있다면 좋을 텐데’라고 말이죠.”

그간은 경황이 없었다.

또 마타하리와 이렇게 정이 들어버리며 아론은 대답도 못하는 그에게 조금씩 속마음을 털어놓곤 했다.

이어서 아론은 앞쪽으로 열 발자국을 옮겨 허리춤에 꽂힌 검을 빼들었다.

스르렁.

검이 검갑을 빠져나오며 부드러운 마찰음을 흘렸다.

아론은 비스듬히 몸을 돌려 사선을 향해 검을 겨누고 치달리기 시작했다.

검끝을 따라 아론의 발도 빠르게 쫓아갔다.

허리를 크게 뒤로 틀어 반원을 그리며 제자리를 찾아갔다.

그에 맞춰 손에 들린 검이 바람을 갈랐다.

느리다 싶었던 검이 갑자기 속력을 내었으며 죽일 듯 찔렀던 검이 회수되며 직선을 잘랐다. 허초에서 실초로 뒤바뀌는가 하면 실초에서 허초로 뒤바뀌었다.

더 많은 동작들이 이어지며 하나의 검무를 연상케 했다.

그러면서 크레멘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동작은 항상 변할 수 있다. 네가 찌르는 곳에 적이 있다고 생각해야 할 것이며, 없다고 생각했던 곳에서도 적은 나타난다.’

휘영청 둥근 달이 그의 검무를 넋 놓고 바라보고 있었다.

이마에 땀이 흥건해지고 옷마저 땀으로 흠뻑 젖은 후에야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아론은 검을 검갑에 밀어 넣었다.

“하하, 또 빨아야겠네.”

찝찝한 기분이 들었던지 아론은 소매를 들어 땀 냄새를 맡아보고는 표정을 잔뜩 구겼다.

마타하리가 무표정한 얼굴로 그런 아론을 쳐다보고 있었다.

아론 역시 그를 바라보며 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그 웃음 속에는 착잡함과 안타까움 또한 묻어났다.

아론은 시선을 돌려 하늘에 촘촘히 떠 있는 별들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멀리 그들 사이로 선을 그리며 사라지는 유성에 시선을 두고는 가슴속에 담아둔 소원을 빌었다.

“저분의 원수를 찾을 수 있기를.”

* * *

바리톤 왕성.

별궁 안에서 은밀한 만남이 진행되는 중이었다.

로테노아 국왕이 일전에 심부름을 보냈던 사자에게 물었다.

“이분인가?”

“그렇사옵니다. 이분이 바로 국왕 폐하께서 찾고 계신 게티롱 님이십니다. 저 역시 이분을 찾느라 애를 많이 먹었습니다.”

“허허, 고생했네. 경이 수고해주어 내 시름을 덜 수 있게 되었군.”

그 둘의 입에서 거론된 자는 뒷짐을 진 채 턱을 들어 거만한 표정으로 별궁 안을 둘러보고 있다.

하나 기죽을 게 없다는 태도였다.

확실히 그는 왕을 두려워하고 있지 않았다.

“내 그대를 찾은 건…….”

말이 끝나기도 전에 게티롱이 손바닥을 내보이며 팔을 쭉 뻗었다.

일단 입을 닫아달란 뜻이다.

“날 이 왕국 사람으로 오인하지 말아주시오.”

왕의 눈이 그를 살폈다.

게티롱은 여전히 거만한 태도로 말을 이었다.

“비단 이 왕국에 해당하는 얘기만은 아니겠지. 어디든 마찬가지라오. 그러니 행여 나한테 존대를 받을 생각은 마시오.”

건방지게 들릴 수도 있는 얘기였다.

하지만 로테노아는 그 기개를 보며 내심 감탄을 금치 못했다. 자신이 없다면 감히 저렇게 말하지는 못할 것이리라.

‘역시 명불허전이로군.’

로테노아는 그 점을 높이 사 그를 존중해주기로 했다.

“좋소. 내 그에 대해서는 문제 삼지 않기로 하지. 듣기론 그대가 유능한 해결사라던데, 맞소?”

“바로 보셨소. 저 신성 제국의 대신관도 나에게 일을 부탁했었지. 스스로 이런 말하긴 우습지만 난 크레노스 제국에 몸을 담고 있는 기사단장의 고민을 씻어준 적도 있고, 심지어는 칠흑같이 검은 라테우스 산맥의 블랙 드래곤의 부탁까지 들어준 적도 있소.”

“그, 그게 정말이오?”

게티롱은 뒷짐을 진 채 고개를 끄덕여 자신의 말이 허황되지 않다는 것을 재차 증명시켜 주었다.

사자는 물론, 로테노아마저 적잖이 놀랐는지 입을 큼지막하게 벌렸다.

로테노아가 이렇게 유명한 해결사를 부른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바로 이웃 국인 아레인 왕국과 연관되는 일이었다.

새로 취임한 하인리히 국왕의 요청을 한사코 마다한 것은 이유가 따랐다.

그가 제시했던 영지 몇 개가 매력적으로 비춰지기도 했지만 넓게 볼 일이었다.

서로 치고받고 싸우면 국력이 쇠할 것은 자명한 일.

조금 더 참고 기다리면 호박이 넝쿨째 굴러들어올 판이었다.

“그대가 해줄 임무가 있소. 이웃 국인 아레인에서 한창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고 들었소.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지. 그 동태를 파악해주었으면 하오.”

“이것 참 실망이로군. 겨우 그까짓 일로 날 불렀소?”

게티롱에게는 시시한 일일지 모르지만 로테노아에게는 꽤나 중요한 일이었다. 정찰이 어디 쉬운 일인가.

자신이 너무 대단한 사람을 부른 게 아닐까 싶어 로테노아의 음성이 한풀 수그러들었다.

“그, 그렇소.”

“못해줄 것도 없지. 보수는?”

모르는 사람이 봤더라면 건방을 떤다고 여겼을지 모른다. 그러나 로테노아는 그가 그럴 만한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다.

“얼마를 드리면 되겠소?”

게티롱은 손바닥을 쭉 펴 보였다.

손가락 5개가 로테노아를 직시했다.

그에 로테노아는 적잖이 당황하며 물었다.

“그, 금화 오백 개를 달라는 말이오?”

그에 게티롱은 가볍게 고개를 저어 보이고는 짧게 말했다.

“금화 다섯 개.”

평민들에게는 큰돈일 수 있었다. 하지만 왕의 입장에서 5닢이면 잃어버려도 상관없을 돈이었다.

너무 요구하는 금액이 적은 나머지 혹 자신이 엉뚱한 인물을 부른 게 아닌가 걱정이 되었을 무렵 게티롱이 다시 입을 열었다.

“어렵지도 않은 일에 많은 돈을 요구할 수 없지.”

* * *

파르티잔은 조심히 일어섰다.

한낮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성안은 매우 한산했다. 발데르 공작과 보탄 남작이 성을 빠져나가며 적잖은 병력들이 그들을 따랐던 탓이다.

그는 대세를 점칠 수 있었다. 오래지 않아 하인리히 국왕은 무릎을 꿇게 될 것이라는 것을.

연이어 들려오는 승전보는 왕국군의 무력감이 더욱 커진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곳엔 악마가 있다. 그가 있는 한 죽었다 깨어난다 해도 전세를 뒤집을 순 없을 것이다.’

부귀도, 영화도 필요하지 않았다. 이 글러먹은 왕국에서 뭘 바랄 수 있겠는가 말이다.

바라는 것은 오직 하나였다.

오딘이라는 악마의 손으로부터 벗어나는 것.

때를 기다리며 참 오래도 참아왔었다.

이 기회를 놓친다면 영영 그를 주인으로 섬기며 종으로 살아야만 할지도 모른다.

탈출이 실패한다면 무지막지한 구타로 인해 다시 지옥을 경험하게 될 것이요, 느슨해졌던 경계가 삼엄해질 것은 자명한 일.

이후의 시도는 더욱 어려워진다.

그러므로 더더욱 신중을 기해야 했다.

모퉁이를 돌기 전 파르티잔은 벽에 몸을 바싹 기대고는 살짝 고개만 내밀어 엿보았다.

‘앞쪽에 두 놈. 극히 위험한 놈들이다. 어설픈 마법으로 저 녀석들을 쓰러뜨리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이를 어쩐다?’

운이 좋았던지 오는 길마다 경비들이 돌아서거나 볼일을 보러 가는 바람에 여기까지 다다를 수 있었다.

어렵게 온 찾아온 기회를 저 두 녀석 때문에 포기할 순 없었다.

그는 침을 꿀꺽 삼키며 마음을 다잡고 조심히 걸어갔다.

발자국 소리를 듣지 못했는지 그들은 성 아래나 하늘에 떠 있는 뭉게구름들에 시선을 둔 상태였다.

“날씨 조오타~”

느닷없이 들려온 소리에 파르티잔은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줄만 알았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바로 녀석의 뒤에 있는 상황이질 않은가.

걸리면 즉시 오딘에게 끌려갈 것이고 뼈도 못 추리게 될 것이다.

더 늦기 전에 한 발자국이라도 더 내디뎌야 했다. 그리하여 거리를 더 벌려 놓아야 했다.

조금이라도 더 먼 거리를 둔다면 저 녀석들이 뒤쫓더라도 조금이라도 더 나아갈 수 있질 않겠는가.

다행히 녀석은 돌아서지 않았다.

천운이 따랐던지 저들의 눈에 발각되지 않고 마법진 근처에 다다랐다.

그리고 황급히 그 위에 몸을 실었다.

바로 그때 경비를 서고 있던 기사와 눈이 마주쳤다.

“너, 너!”

파르티잔은 다급해졌다.

마나의 재배열을 마치기도 전에 벌어진 일이라 심장이 벌름거렸다.

당장에라도 검을 들고 다가오려는 기사들을 보며 파르티잔은 믿지도 않던 신께 빌고 또 빌었다.

‘제발, 제발 이곳을 빠져나가게 해주시옵소서.’

천만다행한 일이었다. 기사들이 매섭게 짓쳐오며 마법진에 다다를 무렵, 눈부신 광채가 몸을 감싸며 공간 이동이 캐스팅되었기 때문이다.

사방이 확 트인 숲이었다.

파르티잔은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휴.”

선선한 바람이 불어왔다.

막혔던 가슴이 뻥 뚫린 것만큼이나 상쾌했다.

그는 이 기쁨을 만끽이라도 하려는지 두 팔을 뻗어 하늘에 대고 들으란 듯이 소리쳤다.

“자유다. 이제 난 자유야!”

오직 오딘의 마수로부터 벗어난 것에 대한 해방감이었다.

그간의 일들을 회상하다 보니 눈물이 앞을 가렸다.

그러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참, 내가 없어진 걸 안다면 당장 이리 올 것인데……. 큰일이 날 뻔하였구나.”

파르티잔은 어리석은 자신의 머리통을 한 대 휘갈기고는 서둘러서 그곳을 벗어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도 앞으로의 행보에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필히 왕국은 몰락하게 될 것이다. 그러면 아레인 왕국은 그 악마의 손아귀에 들어가겠지. 이 왕국의 미래는 없어. 내가 이곳에 머문다면 그의 수하들에게 발각이 될 가능성이 높다. 일단은 이곳을 뜨는 게 급선무이겠군.”

한편으로는 걱정도 앞섰다. 인생이 원점으로 돌아왔기 때문이다. 쌓아온 명성도, 지위도, 기반도 없다.

‘어쩌다 이런 신세가 되어버렸을까.’

답은 오직 하나였다.

오딘, 그 녀석 때문에 인생이 이리 꼬여 버렸다.

“으드득! 나쁜 놈, 치사한 놈, 더러운 놈, 극악한 놈, 인정머리도 없는 놈…….”

그렇게 욕을 퍼부었지만 남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시간이 흐르며 마법진도 더 멀어져 가며 숲을 벗어날 찰나였다.

“응? 나무에 웬 양피지가 붙어 있지?”

이상하게 생각되어 다가가서 보았다.

그 양피지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다.

<내 그늘을 벗어날 땐 각오하는 게 좋을 거다. 지금 이 시간부로 잡힐 때마다 네 몸뚱이에 대바늘을 하나씩 박아 넣겠다.>

“히익!”

그 대상이 누구라는 것쯤은 충분히 짐작이 가능했다.

그놈을 피해 여기까지 다다른 게 아닌가.

기겁을 하며 파르티잔은 뒤로 물러서다 바닥에 궁둥일 찧고 말았다.

더 이상 놀라고 말고 할 것도 없었다.

사방이 도망칠 곳이다. 어디를 통하건 한시바삐 이곳을 벗어나야만 한다.

“사람 살려어~!”

도와줄 사람이 있기나 할까.

파르티잔이 사라진 후 근방에서 두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들은 그라니트성의 기사들이었다.

“왜 도망치게 놔주셨을까? 오딘 님께선 이제 저 녀석한테 흥미가 떨어지신 걸까?”

“모르지. 명령하셨으니 행한 일인데……. 그분의 속내를 낸들 어떻게 알겠어.”

* * *

땅! 땅!

너르고 편편한 모루를 내려치는 망치 소리가 균일하게 들려왔다.

얇게 잘린 쇳덩이를 둥글고 고르게 펴는 작업을 하는 대장장이의 이마엔 연방 땀방울이 묻어났다.

한쪽에서 턱을 괴고 앉아서 작업 과정을 지켜보던 오딘은 성에 차질 않은지 작은 불만을 담아 말했다.

“그것보다 더 얇아야 하는데.”

“이것보다 더 말씀이십니까?”

오딘은 고개를 끄덕이며 원하는 모양을 주문했다.

“바늘만큼 얇게. 그리고 길이는 한 뼘 정도면 좋겠군. 무리한 주문인가?”

“그럼 조금 더 깎아 길게 펴면 되겠군요. 어렵진 않은 일입니다.”

조금 지나자 대충 원하는 모양이 차츰 윤곽을 드러냈다.

오딘은 그것을 받아들고 흡족한 미소를 떠올렸다.

“그래, 이런 모양이야. 조금만 더 다듬어주면 되겠는데. 단, 끝이 더 날카로워야 한다. 땀구멍에 찔러 넣을 수 있게 말이야.”

“그리하겠사옵니다.

완성된 물건을 받아들고 오딘은 기꺼이 칭찬을 늘어놓았다.

“자넨 쇠를 다듬는 데에 탁월한 재능이 있군.”

대장장이는 화색을 지었다.

언제 오딘을 위해 일을 할 기회를 얻겠는가. 거기다가 칭찬까지 들었으니 이것이야말로 가문의 영광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하지만 그는 이내 표정을 가다듬고 겸손의 태도를 보였다.

“이리 칭찬해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하나, 쇠를 다루는 데에는 아직 많이 미숙합니다. 인간이 아무리 공예품을 잘 만든다 하여도 드워프보다 뛰어날 수는 없으니까요.”

“드워프?”

“그렇사옵니다. 알려진 바로는 드워프라는 종족은 키가 작은 대신 힘이 강하고 섬세하며, 금속을 다루는 재주 또한 뛰어나 못 만드는 것이 없을 정도라고 하옵니다.”

“흥미로운 얘기로구나. 그래, 그들은 어디에 가면 만날 수 있느냐?”

“송구하오나 저 역시 한 번도 만나보지는 못했사옵니다. 다만, 전해지는 얘기로는 사시사철 눈으로 뒤덮인 산과 대륙 구석의 사화산 주위에 나뉘어 산다고 합니다.”

“그들은 왜 대륙 한가운데에 살지 않고 후미진 곳에 사는 것이냐?”

“인간이 고향을 못 버리는 이유와 비슷하다고 여기시면 될 것이옵니다. 나뉘어 사는 이유 역시 종이 다르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듣고 보니 재미있는 얘기들이었다.

이 세상에 온 지 1년이 넘었지만 아직까지 모르는 게 많았다.

그나마 접한 책들도 주로 마법에 관련된 것들이어서 다른 방면으로는 까막눈이었던 것이다. 드래곤에 대해서는 이미 들었었고, 그 때문에 호기심이 생겨 관련 서적들을 눈여겨보았지만, 엘프나 드워프, 여러 몬스터들에 대한 지식은 전무후무한 상황이었다.

언젠간 보게 되겠지란 생각을 가지고 오딘은 손에 든 길쭉한 쇠를 다시 대장장이에게 건네며 마지막으로 한마디 더 덧붙였다.

“하나는 되었구나. 이와 같이 네 개를 더 만들어다오. 어느 정도 걸리겠느냐?”

“정오 안에는 다 완성이 될 것이옵니다. 하나 궁금한 게 있는데, 감히 여쭤보아도 괜찮겠습니까?”

“물어보거라.”

“이 쇠는 어디에 사용되는 것인지?”

“침(鍼)으로 사용하려고 한다. 본 좌가 온 중원에는 이와 같은 의학이 발달하였지. 신경을 자극하여 삭신이 쑤시거나 골병이 든 사람도 침술로 치료할 수 있다 하였다.”

대장장이는 많이 놀라는 눈치였다.

사실 오딘이 파르티잔을 풀어준 이유가 이 때문이다.

도망치게 하되 빌미를 제공하여 침을 쑤셔 넣어볼 생각이었다.

말하자면 시험 대상인 셈이다.

오딘은 마법 책을 보고 파르티잔이 왜 노화하게 되었는지에 대해 알게 되었다.

그리고 연구에 연구를 거듭한 끝에 중원에서의 침술이 그에 효과를 거둘 수 있을지 시험해보기로 했다. 이론상으로는 터무니없는 얘기일 수 있지만 여기에 기를 불어넣는다면 불가능할 것 같지도 않았다.

사실 노화를 억제시켜 준다는 침술 정도는 있질 않은가. 돌팔이들이 많아서 그렇지.

물론 오딘은 침술에 조예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그저 어깨 너머로 몇 번 살펴본 정도랄까.

그래도 인체의 주요 혈과 사람 몸의 구조에 대해서는 꽤나 잘 알고 있는 편이어서 크게 무리가 갈 것 같지는 않았다.

‘혹시 될 수도 있겠지.’

라는 무책임한 생각이었다.

괴짜 노인이 하도 목에 힘을 주어 으스대고 다니는 바람에 이와 같은 생각을 품었던 것이다.

그 바람에 파르티잔만 괴롭게 되었다. 침을 잘못 맞으면 평생 불구나 병신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거기에 더해 쫓긴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을 테니 얼마나 두려우랴.

하지만 오딘은 매정하게도 그에 대해서 일말의 죄책감도 품지 않았다.

중원에 발달한 침술은 가끔 불가능한 치료까지 가능케 했다.

그러나 지금처럼 쇠침을 사용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쇠는 인체에 거부감부터 불러오기 때문이다.

주로 사용되는 것이 금, 은, 백금 등이었는데 이는 구하기 어려운 것은 아니었다.

이 세계에도 그 세 가지는 보물 취급을 받아 여러 공예품들이 저런 것들로 이루어져 있기에.

가까운 곳에서 찾자면 과거 오딘이 발데르에게 감사의 표시로 받았던 패물 상자 안에도 꽤 들어 있었다.

조금만 주의를 기울였다면 알 수 있는 일이었겠지만, 여태 오딘은 인술에 조예도 없었을뿐더러 관심조차 가지질 않았었다.

소독이 안 된 쇠침은 파상풍균을 불러올지도 모르는 것이고, 다른 부작용도 불러올 수 있다.

그저 쇠붙이이겠거니 생각하고 쇠를 깎아달란 말을 해놓았으니 파르티잔에게는 안된 일이었다.

지금은 오딘의 마수로부터 벗어났다며 좋아하고 있겠지만 이는 현실을 모르는 것이었다. 오딘의 명을 받은 기사들이 먼발치에서 계속 그를 미행하고 있는 중이므로.

과연 정오 안에 5개의 긴 쇠꼬챙이가 만들어졌다.

오딘은 그것을 품 안에 잘 갈무리하여 넣어두고는 대장장이에게 고마움의 표시로 작은 보석 하나를 건네주었다.

언젠가 발데르로부터 고마움의 표시로 받은 패물 상자 안에 든 것 중 하나였다.

“이러시지 않으셔도 되옵니다. 부디 손을 거두어주시옵소서.”

“본 좌는 이 같은 것이 필요 없느니라. 내 언제고 또 필요한 것들이 있으면 들르도록 하겠다.”

그리 말을 하며 돌아서는데 일단의 병력이 성 밖을 빠져나가는 게 보였다.

성의 마당에는 한 기사에 의해 강압적으로 운동을 하고 있던 조르바가 있었다.

오딘은 그를 데려오라고 말하고는 근방에 있던 시종에게는 마구간에서 말과 나귀를 하나씩 내오라고 지시했다.

조르바는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의문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어, 어딜 가시는 길이옵니까?”

“성안에서만 있으면 답답하지 않느냐? 오랜만에 나들이나 시켜 주겠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운동을 면하게 해준다는 것만으로 조르바는 연거푸 고개를 조아리며 좋아 어쩔 줄 몰랐다.

그러나 오딘은 그냥 장난감이 필요했다.

어디를 가건 자신을 심심하지 않게 해줄 장난감…….

2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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