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르바의 암울한 나날들
록스 어쌔신 길드.
“허, 뭔 놈의 비가 이리 많이 와?”
“그러게 말이다. 영락없이 오늘도 공치게 생겼구나. 이러다간 입에 풀칠하기도 힘들겠어.”
길드원들을 제외하고 길드 내에 주로 상주하는 자들은 보통 실력이 부족한 이들이었다. 이들이 찾는 일이란 그만큼 만만한 상대가 되어야 한다는 전제가 따랐다. 그런 의뢰라 해봐야 신분이 높지 않은 자들이 의뢰하는 게 대부분이었고, 당연히 보수 역시 적었다.
위험한 임무는 그만큼의 대가가 주어진다!
이것은 어쌔신 길드 내의 정설이었다.
그들 역시 사람이었기에 임무 도중 목숨을 잃는 것은 원치 않았던 것이다.
비 오는 날이면 일거리는 더욱 적다.
오늘도 마땅한 임무가 없었기에 두 어쌔신은 하염없이 떨어지는 비나 쳐다보았다.
그중 삐쩍 마른 어쌔신이 손바닥을 펼쳐 비를 담으며 주절거렸다.
“쩝, 돈만 주면 뭐든 할 텐데, 불가능한 일만 빼고.”
“간단한 건데 해볼 생각이 있나?”
분명 옆의 동료의 말이 아니었음에도 대수롭지 않아 흘려들었던지 그 어쌔신은 손바닥을 쳐 고인 물을 튕겨 내며 말을 받아쳤다.
“시켜만 주면 하지. 왜, 할 만한 일거리 있어?”
날씨만큼이나 스산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본 좌의 질문에 대답하는 것이다.”
오딘이 직접 안 와도 될 일이었다. 뭐가 좋다고 비를 맞아가면서까지 나들이를 하겠는가.
하지만 오딘은 마타하리를 시켜 자신을 제거하려 한 괘씸한 놈이 누구인지 직접 귀로 듣고 싶었다.
하여 공간 이동에 능숙한 마법사 셋과 그들을 엄호할 기사들만을 데리고 이곳에 다다른 것이다.
의외로 날은 잘 맞추어왔다.
비가 와서인지 길드 안은 한산했다.
뿐만 아니라 두 녀석이 밖에서 알짱대던 바람에 안에까지 들어가는 수고를 덜 수 있었다.
2명의 어쌔신은 오딘을 따라 한적한 곳으로 들어섰다.
나무가 우거진 숲 속이었다.
“헤, 헤헤. 얼마를 주실 겁니까?”
돈 앞에서는 하염없이 추해지는 게 인간이다.
오딘은 때리는 수고를 덜기 위해 주머니를 두둑하게 하고 왔다.
“염려 안 해도 될 것이니라. 너희들이 얼마나 성심성의껏 대답하느냐에 따라 정을 둘 것이다.”
소매에서 돈뭉치가 든 두둑한 꾸러미를 꺼내자 어쌔신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뭐든, 뭐든 질문하십시오. 아는 것이라면 모두 다 답해드리겠습니다.”
한 명은 그리 대답하고 다른 한 명은 숲 너머로 고개를 내밀며 길드를 관찰했다. 그도 그럴 것이 길드장이 길드를 통하지 않는 거래는 반기질 않길 때문이다.
오딘은 만족스런 미소를 짓고서 본론으로 들어갔다.
“얼마 전 한 이방인을 죽이라는 의뢰가 들어왔다는 것을 안다. 그 배후를 묻고자 함이니라.”
“아하, 그것이라면…….”
말을 하다 말고 어쌔신은 오딘을 유심히 보았다.
언젠가 일이 없어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길드원들 몰래 장부를 뒤적여 본 기억에 있는 일이었다.
거기엔 이방인의 외모에 대한 언급 또한 있었다.
자연히 표정이 굳어버렸다.
“다, 당신…….”
반응에 따라 오딘의 표정 또한 사악해져 갔다.
“이미 선택권은 없어. 택해라. 돈이냐? 불구가 되는 것이냐?”
진짜 그렇게 할 것 같은 분위기였다.
어쌔신들은 특유의 직업 정신을 되살려 냉정을 되찾았다.
“하나만 묻겠소. 그는 어떻게 된 것이오? 설마 당신의 손으로?”
그들은 마타하리의 가공할 실력을 높이 사고 있었다. 오죽하면 길드 내의 자존심이라고까지 불렸겠는가.
그런 그를 제압하고 이곳에 다다른 것이라면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자신들은 물론이고 이 길드마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될 가능성이 농후하니까.
오딘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딘은 그냥 제압했다는 뜻을 담고 있었지만 그들은 마타하리를 죽였을 것이라고 받아들였다.
“그, 그럴 수가!”
다른 한 어쌔신은 의문을 감추지 못하고 물었다.
“혹시 그가 죽기 전에 비밀이라도 발설한 것이오?”
오딘의 얼굴이 점점 험악해져 갔다.
“입장이 뒤바뀐 것 같군. 잘 들어라. 네 녀석들은 그저 본 좌의 질문에 대답을 하면 된다. 많은 것을 알려고 하였다간 제명에 죽지 못할 것이다.”
“꿀꺽.”
둘은 너 나 할 것 없이 주저리주저리 아는 것들을 풀어놓았다.
그들의 말에는 사주한 대상이 누구이며 어떻게 마타하리가 발데르 폰 그라니트 공작의 성으로 향하게 되었는지 그것까지도 들어 있었다.
길드는 오랜 시간 오딘을 뒤쫓았고, 여러 번 부딪혀 말썽을 일으켰다. 그를 뒤쫓던 중 초가삼간 안에서 병신이 되어버린 세 사람을 발견했는데, 그들은 이방인이 그라니트성으로 향했다고 했다.
하지만 나중에 쓸 만한 어쌔신들을 구해 그라니트성으로 보냈지만 누구도 잠입할 수 없었다. 하다못해 ‘성이 사라진 게 아닐까’라는 말까지 나돌았다.
길드장마저 포기하고 있을 무렵, 오랜만에 길드에 발을 들인 마타하리가 이 일을 자진하고 나섰다. 그곳이라면 실력이 대단한 사냥감이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이 모든 얘기가 그들이 하는 얘기에 포함이 되어 있었다. 당시 이방인에 관한 얘기가 하도 신비해서 떠돌고 떠돌았던 탓이다.
흡족할 만한 답변을 얻자 오딘은 두 어쌔신에게 각각 5닢씩의 금화를 쥐어주었다.
“이, 이렇게나 많이 주십니까?”
무리도 아니었다.
금화 5닢이면 몇 년은 족히 놀고먹을 수 있는 돈이다.
오딘은 뒤로 돌아서기 전 단단히 주의를 주었다.
“누구에게도 이 일을 발설해서는 안 된다. 만약에 그를 어긴다면…….”
그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양손을 휘저었고 그중 한 어쌔신이 부연 설명을 해주었다.
“그, 그럴 리는 절대로 없습니다. 만약 이 일이 길드 안에 흘러든다면 저희도 무사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대답을 마쳤을 때는 이미 그가 자취를 감추고 난 후였다.
* * *
조르바 자작은 큰 상심에 빠져 있었다.
“되는 일이 없어, 되는 일이…….”
또 그라니트성의 주인인 발데르 공작의 소식 또한 접했다.
“썩어도 준치라더니. 로렌츠성에 이어 드미하란성까지 그자의 손에 넘어가다니. 예상도 못했거늘.”
그러다 보니 더한 억울함이 앞서 애꿎은 탁자를 내리쳤다.
쾅!
“백작과 합공으로 반드시 요절을 낼 수 있었는데. 으득!”
쉽사리 분이 사그라지지 않았다.
무려 한 달이 넘게 엉뚱한 곳으로, 더 엉뚱한 곳으로 흘러들지 않았던가.
병사들이야 경치 좋다며 속 편히 돌아다녔을지 몰라도 조르바 자작에게는 똥줄이 타들어가는 시간이었다.
결국 하인리히 국왕에게 무능하다며 홀대를 받지 않았던가. 자작의 작위가 어울리지도 않는다는 둥 심한 책망까지 들어야 했었다.
아닌 게 아니라 이대로라면 전쟁이 종식된 후 자신은 내쳐질지도 몰랐다.
하루하루를 불안한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는 이때 문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똑똑.
‘똑똑?’
화부터 뻗쳤다.
“볼일이 있으면 말을 할 일이지, 누가 문을 두드리라더냐!”
그의 속도 모르고 다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이번엔 조금 더 크게.
똑똑!
급기야 울화통이 터졌다.
“어떤 놈이 장난질이냐?”
조르바는 자리에서 일어서 개념 없이 노크를 해댄 자를 요절이라도 낼 심산으로 문을 벌컥 열었다.
없었다.
아무도 없었다.
그 점이 더 이상했다.
당연히 영주가 거주하는 곳에는 항상 기사가 배치된다. 그들조차 보이질 않는 것이다.
사방을 둘러보다가 조르바는 곧 이유를 깨우치게 되었다.
문을 지키던 기사들은 팔자 좋게 바닥에 드러누워 있었다.
조르바의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네 녀석들을 참수해서라도 죄를 물어야겠다.”
정말 그렇게 할 생각이었던지 그는 안으로 들어가 검 한 자루를 꺼내었다.
그리고 돌아서는데 못 보던 인간이 문 앞에 떡하니 서 있는 게 아닌가.
딸캉!
떨림을 주체하지 못한 조르바의 손이 그만 검을 놓치고 말았다.
문 앞에 있는 존재는 언젠가 마주쳤던 사내. 이 성을 쑥대밭으로 만들고 자신의 목뼈를 분질러놨던 작자였던 것이다.
다행히 정도가 심하지 않아 마법사들의 도움으로 상처를 복구할 수 있었지만 그날의 일만 떠올리면 자다가도 벌떡벌떡 일어나는 그였다.
“다, 당신이 또 왜?”
“그건 가서 얘기하기로 하지.”
오딘은 사악하게 입꼬리를 치켜 올리며 성큼 다가섰다.
당황한 조르바가 떨어진 검을 주워들려고 했지만 어느새 오딘의 주먹이 그의 눈을 강타했다.
퍽!
순간 조르바의 눈앞에 별들이 떠올랐다.
“이쪽 눈이 서운할지도 모르겠군. 그러니 공평하게 해주어야겠지?”
그리고 다시 오딘의 주먹이 그의 반대쪽 눈을 때렸다.
정신이 혼미해진 조르바는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비틀거렸다.
오딘은 준비해온 자루를 꺼내 조르바를 안으로 쑤셔 넣었다. 그리고 자루를 들쳐 메고 빠르게 망루 위로 올라갔다.
안 그래도 들리지 않을 발소리가 빗소리에 잠겨 그 누구도 눈치 채지 못했다.
망루에는 이미 혈도를 눌려 쓰러진 병사 하나만이 있을 뿐이었다.
“조금 있으면 깨어나게 될 터이니 염려 말거라.”
그 말과 함께 오딘은 성 아래로 몸을 날렸다.
멀쩡한 성안의 병력들은 자신들의 주군이 보쌈을 당하는 줄도 모르고 태평한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곧장 오딘은 마법사와 기사들이 기다리는 곳으로 움직였다.
그들 주위에는 하나의 공간 이동 마법진이 있었는데 이 마법진은 언젠가 조르바 자작이 발데르 공작을 애타게 기다렸던 마법진이기도 하다.
애석하게도 조르바에게 희망이 되리라고 생각했던 마법진은 절망으로 다가온 것이다.
오딘은 마법진에 몸을 들여놓으며 말했다.
“자, 가자.”
“명을 받들겠나이다.”
두 패로 나누어진 사람들은 두 번의 빛을 내며 숲에서 사라지고 없었다.
* * *
마타하리는 방문을 열고 떨어지는 빗줄기를 바라보고 있었다.
“제법 굵군.”
그 뒤로 시녀 샬로트가 다소곳이 앉아 있었는데 그녀는 빗줄기가 아닌 마타하리의 한없이 고독해 보이는 넓은 등을 바라보았다.
‘저분의 아픔이란 무엇일까? 왜 그렇게 복수에 연연해하시는 거지? 하긴 난 사연도 모르니…….’
그녀의 마음을 읽기라도 했는지 마타하리가 그 자세 그대로 입을 열었다.
“소중한 것을 빼앗겼을 때의 아픔을 아오?”
“전 잘 모르겠는걸요. 시녀라고 하지만 공작 전하께오서는 우리들을 함부로 대하지 않으셨어요. 영주님을 잘못 모시면 후회한다는 말도 많은데 저희에게는 몸종이란 말은 없었어요. 그분은 저희뿐만 아니라 성안의 사람들까지 늘 신경을 써주셨어요. 덕분에 별 고생 없이 이 생활을 하고 있답니다.”
“그럼 내 얘기도 별로 와 닿지 않겠군.”
말을 마친 마타하리는 잠시 생각에 잠기다가 다시 말을 꺼냈다.
“나 역시 평범한 가정에서 살아왔소. 배불리 먹지 않아도, 나무를 해서 입에 풀칠을 해야 하기에 마음대로 잠을 자지도 못했지만 행복했소. 그저 날 낳아준 어머니와 몸이 불편하시지만 항상 재미난 얘기를 해주었던 아버지, 그리고 하나뿐인 형제도 내겐 힘이 되었지. 단지 존재하는 자체만으로.”
도중에 말이 끊겨 궁금할 만도 했건만 샬로트는 뒷말을 물어보는 우를 범하지 않았다.
그때의 추억을 회상하며 감상에 빠져 들던 마타하리는 뒷말을 이었다.
“그 모든 것이 하루아침에 없어지더군. 내가 믿고 의지해야 할 존재가 모두 사라진 거요. 심지어 잠을 청할 오두막도 모두 불탔지.”
“그렇게 끔찍한 일이…….”
정말 샬로트는 자신의 일처럼 받아들이고 있는지 격양된 음성이었다.
“단 한 놈이더군. 그저 사람을 죽이고, 고통 어린 비명을 즐기는 녀석이었소. 사람 같지도 않은 녀석이었소.”
“그가 어디 있는지는 알고 계시나요?”
마타하리는 고개를 내저었다.
“모른다오.”
“그럼 죽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잖아요.”
“그건 아닐 게요. 내 직감이 그렇지 않다고 말하고 있소. 아직도 꿈에서 울부짖는 형제를 보곤 한다오. 그게 무려 십칠 년 전의 일인데도 말이오. 그놈이 죽었다면 왜 아직까지 나에게 한을 털어놓겠소?”
“그럼 그자를 찾는 일에 주력하셔야 하지 않을까요? 당신은 충분히 강하시잖아요.”
마타하리는 쓴웃음을 지었다.
“마스터가 아니라면 의미 없을게요. 그 당시 마스터였던 녀석이니까.”
그제야 샬로트는 마타하리가 왜 강해지려 하는지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그 뒷모습이 더욱 측은해 보이고 쓸쓸해 보이는지라 그녀는 저도 모르게 그의 허리를 껴안고 말았다.
“저라도 같은 생각을 가졌을 거예요. 너무 슬퍼 마세요. 언젠가 반드시 그날이 올 거라 믿을게요.”
* * *
뒤늦게 성에 도착한 마법사가 말했다.
“마법진을 봉해놓겠습니다.”
마법진을 봉해놓는 이유는 간단했다. 이글레스성에서의 침입을 막는 것이다.
반면 이글레스성에서 숲 속에 위치한 마법진을 봉해놓지 않은 이유는 그곳이 다른 곳과도 통하는 마법진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이미 공작이 그를 눈치 채고 폐쇄했을 거라는 가정도 따랐다.
설혹 이 경로를 통해 온다고 하더라도 이 마법진의 형태로는 대규모의 병력도 낼 수 없을 것이니 하등 두려울 게 없었다.
마법진을 그리는 데에는 많은 시간과 정성이 소모된다. 특히나 저서클 마법사의 경우에는 정도가 더했다.
그 마법진이 조르바에게 해악이 된 것만은 틀림없었다. 더 빨리 호랑이 소굴로 들어왔으니 말이다.
오딘은 제법 널찍한 공간에 가서 기사들을 시켜 자루에서 그를 꺼내도록 했다.
마침 정신이 들었던지 조르바는 사방을 둘러보며 궁금증을 드러냈다.
“여, 여긴 어디?”
“어디긴 어디야. 앞으로 네가 생활할 곳이지.”
그 광경을 보며 기사들과 마법사들은 실소를 머금었다.
“키킥.”
“크, 크큭.”
조르바는 두 눈이 멍이 들어 판다 곰처럼 시꺼멓게 바래져 있었던 것이다.
남들이 비웃는 데 신경 쓸 겨를도 없었다.
공포의 대상이 눈앞에 있다는 것과 낯선 환경이 압박을 더해주며 그는 매우 초조해했다.
웃음을 그친 기사 하나가 조르바의 궁금증을 해소해주었다.
“그라니트성이외다.”
조르바의 얼굴은 금세 사색이 되어버렸다.
“뭐, 뭐라고?”
“발데르 폰 그라니트 공작 전하의 성이란 말이오.”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조르바는 온몸의 털이 다 곤두서는 것 같았다.
“사, 사실이 아니라고 말해주시오. 제발.”
왜 모를까. 공작의 성에 왔다면 자신의 운명 또한 끝난 것을.
애절함에 간절함을 더해 말했지만 기사는 냉랭하게 답했다.
“맞으니 맞다고 하지, 왜 아니라고 하란 말이오. 날더러 거짓말이라도 해달란 말입니까? 참 이상한 분이시네.”
오딘이 한 기사를 보며 명했다.
“그 녀석 불러와.”
기사는 그 녀석이 누굴 지칭하는지 단번에 깨닫고 허리를 굽혔다.
“명을 받들겠나이다.”
조르바는 조르바대로 조급해졌다.
“이, 이러지 마시오. 저번에 이미 화풀이는 할 만큼 했지 않소. 이제 와서 또 화풀이를 한다는 건 남자답지 못한 행동이오.”
“저번 일보다 이번 일이 더 심각한 것은 모르나 보군.”
“이, 이번 일이라니? 그건 또 무슨 말이오?”
오딘은 일단 입을 닫았다.
교육부터 하고 심문할 작정이었다.
얼마 후 한 사람이 기사를 따라 이곳에 당도했다.
조르바도 익히 아는 사람, 파르티잔이었다.
“자, 자네!”
시선이 꽂힌 파르티잔은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눈을 마주치기 어려워하고 있질 않은가.
이 어색한 분위기를 깨치려 오딘이 중재에 나섰다.
“새삼스럽게 왜들 그래, 잘들 알면서 말이야. 자, 인사부터 해야지.”
파르티잔은 즉각 반응을 보였다. 하나, 꽤 어수룩한 인사말이었다. 하도 얼떨떨해하는 상황에서 난데없이 명령이 떨어지자 생각 없이 말을 뱉은 탓이다.
“아, 안녕하십니까?”
안녕하냐니. 이게 안녕해 보이는가. 염장을 질러도 유분수지.
당연히 기분이 좋을 리 없었다.
추측은 추측대로 계속되어 하나의 결과를 내어놓는 중이었다.
‘저놈이 설마, 날 음해하여 이곳으로 오게 만든 것인가?’
화가 뻗치자 조르바는 악에 받쳐 소릴 질러댔다.
“네 정녕 날 죽일 참으로 이곳에 불렀더냐?”
이리 말하자 파르티잔은 파르티잔대로 난감할 따름이다. 아니, 왜 자신과 연관을 시킨단 말인가. 자신 역시 자작이 온 게 의아할 뿐인데.
“오, 오해입니다. 전 자작님에 대하여 얘기하지 않았습니다.”
그 말로 오해가 눈 덩이처럼 불어났다.
“이놈, 스스로 죄를 인정하고 있구나.”
그들의 분위기에 눌려 오딘도 끼어들 틈새를 못 찾고 있었다.
더 지켜봤다가는 주객이 전도될 것 같아 오딘은 역정을 냈다.
“쯔쯧, 인사를 하라고 했더니 싸우고들 있네. 맺힌 건 바로바로 풀어야 하니 서로에게 기회를 주는 게 낫겠지. 파르티잔, 이리 와.”
“예, 주인님.”
‘주인님?’
조르바는 더 황당해하는 모습이었다. 이거야말로 저 녀석이 자신을 속여 왔다는 증거가 아니고 뭐겠는가.
파르티잔을 씹어 먹기라도 할 것처럼 조르바는 으르렁거렸다.
“네놈이… 기어코…….”
노기가 충천해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고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죽여야 한다. 내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저놈은 죽여야 한다.’
그 생각이 의지가 되어 조르바는 분연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파르티잔을 향해 대들려는데 옆에 있던 기사들의 만류에 몸이 멈추고 말았다.
대신 악에 받친 쌍소리들이 튀어나와 파르티잔에게 쇄도했다.
“주인을 능멸해도 정도가 있거늘, 네놈을 죽이지 못한다면 천추의 한이 될 것이다. 사지를 찢어발겨 놓으리라.”
원래는 자신이 파르티잔의 주인이었다. 속사정을 모르고 한참을 오해의 늪에서 허우적대고 있으니 이리 말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오딘은 주눅 든 파르티잔이 불쌍해 보였던지 기사들에게 조르바를 붙든 손을 놓지 말라고 당부부터 해놓았다.
그리고 그를 데리고 조르바 앞에 서게 했다.
“나쁜 놈이로군. 왜 멀쩡히 서 있는 애를 욕해? 억울하지?”
“어, 억울합니다.”
진심을 담아 말하고 있음에도 조르바는 더 화가 치밀었다.
오딘이 말했다.
“자, 억울한 건 풀어야지. 속이 풀릴 정도로 때려.”
“예?”
파르티잔이 말뜻의 요지를 깨우치지 못하고 되묻자 오딘은 주저할 것 없이 재차 설명해주었다.
“때리라고. 뺨을 때리면 더욱 좋겠군. 그럼 정신이 번쩍 들 테니까 말이야.”
은근히 살기를 담은 눈빛을 건네자 파르티잔은 덜컥 겁을 먹고는 떨리는 손을 들어 조르바의 뺨에 가져다댔다.
“요, 용서하십시오.”
-뭔 잔말이 많아? 그리고 한 번 더 존대를 했다간 편치 못할 것이니라. 어려우면 일단 맞고 시작할까?
머릿속으로 전해지는 전음이었다. 그 호통에 못 이겨 파르티잔은 마지못해 조르바의 뺨을 때렸다.
툭.
아프고 말고를 떠나 조르바는 눈이 뒤집히기 일보 직전이었다.
어중간한 건 안 하느니만 못하다는 말이 있다.
정말 그랬다.
괜히 어중간하게 때렸다가 오딘의 노여움만 사게 되었다.
파르티잔은 눈을 질끈 감았다.
조르바의 눈에서 광선이라도 쏠 것 같아 마주 보고 있는 것만도 부담스러운 지경에 뺨까지 때리라고 하니 어디 뜻대로 되겠는가.
그의 어깨가 한껏 틀어졌다.
‘저놈에게 맞아죽는 것보다야 낫겠지. 일단 내가 살고 봐야 할 일이다.’
생각이 끝났을 때 조르바의 뺨과 파르티잔의 손바닥이 마주치며 소음이 들렸다.
철썩!
얼마나 세게 때렸는지 부근에 메아리가 칠 정도였다.
조르바는 넋이 탈출하는 느낌마저 들었는지 석고상처럼 굳어서 멍한 표정을 하고 있을 뿐이었다.
따귀를 맞은 볼이 발그레해져서 퉁퉁 부어올랐다.
“미, 미안하오.”
나가려던 혼이 한을 떨치지 못해 몸 안으로 스며들었는지 조르바의 두 눈이 살기등등하게 빛났다.
“하오? 으드득, 네 이놈. 이젠 대놓고 본색을 드러내는구나.”
앞서 오딘이 말을 높이면 가만두지 않는다고 으름장을 놓았기에 행한 일이었다.
나름 억울했다. 시켜서 한 걸 어쩌라고.
오딘은 원래 악마 같은 놈이라 눈 밖에 나게 되면 어떠한 일이 벌어질지는 잘 알고 있었다.
또한 자신은 잘못도 하지 않았는데 조르바 자작은 대놓고 의심부터 하질 않았던가.
한편으로는 이제는 소용없어진 영주보다 오딘의 말을 따르는 것이 백번 현명한 일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내가 하는 말을 똑같이 따라 해라.
그렇게 명하고 오딘은 전음으로 파르티잔에게 지령을 내렸다.
뒷말을 듣는 즉시 파르티잔의 얼굴은 사색이 되었지만 차마 거절할 수 없는지라 그대로 따랐다.
“왜? 떫으냐?”
“아아아악!”
조르바는 기사들에게 붙들려 다가서지도 못하고 발만 동동 굴렀다.
그렇게 한창 재미있어지려는 이때, 한 기사가 부리나케 달려와서 말했다.
“오, 오딘 님! 큰일입니다.”
“무슨 일이냐?”
“공작님께서 쓰러지셨습니다.”
비는 어느덧 그쳐 있었다.
오딘은 기사를 따라 일월진 안으로 들어섰다.
“이쪽입니다.”
그를 따라 얼마를 가니 발데르를 발견하게 되었다.
기사는 당황한 낯빛을 지었다.
“부, 분명 쓰러져 계셨습니다.”
말과는 다르게 발데르는 평정을 잃지 않고 묵묵하게 앉아 있었다.
눈을 감고 있는 것으로 보아 명상을 하는 모양이었다.
자신은 분명히 헛것을 보지 않았는데 일이 이렇게 되자 질책을 받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기사는 가슴이 답답해졌다.
“미, 믿어주십시오.”
“널 탓하려는 게 아니다. 소란 피우지 말거라.”
오딘은 그와 같이 말하고는 가만히 발데르를 지켜보았다.
얼마 후 발데르가 눈을 떴다. 그리고 눈앞에 있는 대상을 확인하고는 침착하게 일어섰다.
그때서야 오딘은 걸음을 떼어 그에게 다가갔다.
“뭔가 깨달은 게 있는 모양이군.”
“그러하옵니다.”
오딘은 만면에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말했다.
“보여 다오.”
그러자 발데르가 땅에 박힌 검을 빼들었다.
제법 긴, 발데르에게는 나름 인고의 시간이었다.
적잖은 고통도 밀려왔는지 인상이 찌푸려지려는 것을 사념을 떨쳐 버리고 평정을 유지하며 견뎌 냈다.
서서히 변화가 일었다.
몸을 따라 돌던 마나가 팔에서 검으로 이동했고 희뿌옇게나마 빛을 냈다.
빛은 조금씩 강렬해지며 검끝으로 갈수록 환해지기 시작했다.
이윽고 무형의 기운이 생성되고 있었다.
검끝에서 물기가 맺히는가 싶더니 길이가 점차 늘어나는 게 아닌가.
멀리서 그를 지켜보던 기사는 얼마나 놀랐는지 하마터면 소릴 지를 뻔했다.
한 뼘만큼이나 검 밖으로 밀려나온 마나의 덩어리.
검을 쥔 발데르의 손이 부들부들 떨리자 오딘은 그를 제지하려 입을 열었다.
“되었다. 욕심을 부리지 말거라. 일에는 순서가 있는 법. 수련을 게을리 하지 않는다면 불가능해 보이던 많은 일들이 가능해질 것이니라.”
발데르는 감정을 억누르지 못하고 바닥에 납작 몸을 웅크려 크게 절을 했다.
“하해와 같은 은혜에 어찌 다 보답하나이까.”
오딘은 뒤쪽에 있는 기사를 향해 마땅히 웃어 보였다.
“축하한다. 네 주군이 마스터가 되었구나.”
* * *
단 하루 동안이었지만, 고초는 이루 말도 못할 정도였다.
조르바는 떠올리기도 싫은 어젯밤의 일이 또 머릿속에 그려졌다.
“네가 시켰지?”
“아니요.”
“문 닫아.”
오딘이라는 녀석의 명에 사서들이 문을 닫았고 그는 정신이 혼미해질 때까지 얻어터졌다.
태어나서 몰골이 제일 비참했던 때가 있다면 바로 이때일 것이라는 느낌마저 들었다.
녀석은 똑같은 질문을 던졌다.
“네가 시켰지?”
“아니라고 했지 않소.”
그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자 사서들은 알아서 문을 닫았다.
녀석의 발길질이 무차별적으로 시작되며 또다시 신체가 비명을 질러댔다.
더 어이가 없었던 것은 파르티잔이 키득거렸다는 점이다. 조르바 자신은 그것을 똑똑히 목격했다. 죽는 순간까지 잊기 힘든 장면이었다.
세 번째 같은 물음이 던져졌을 때 결국 시인하고 말았다.
그러나 대답이 늦고 말이 짧다는 이유로 또 모진 구타를 감내해야 했다.
몸이 이리저리 흐느적거리는데 마치 연체동물이 된 것 같은 착각마저 들었다.
맞는 동안에는 차라리 죽었으면 하는 간절한 바람마저 생겼었다.
막상 구타가 끝났을 때에는 미련하게도 생에 대한 집착이 새록새록 자라났다.
파르티잔은 세 번을 터지는 동안 하루 동안 혼수상태에 머물렀지만 확실히 조르바는 달랐다. 그는 검술을 익힌 덕분에 마법사보다 육신이 튼실했던 것이다.
늦은 새벽이 되어서야 잠을 잘 시간이 주어졌지만 눈물이 앞을 가려 도저히 잠을 잘 수 없었다.
뛰어내리려 창을 건너보기를 수어 번.
도저히 스스로 목숨을 끊을 용기가 나질 않았다.
인간이 이토록 어리석은 존재라는 것을 새삼 깨달으며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날이 밝아왔다.
아무렇게나 뜯은 빵 조각들, 이물질이 들어갔는지 아니면 상했는지 모를 색이 변질된 우유.
그것이 아침 식사였다.
조르바는 저절로 불평부터 나왔다.
“이건 개한테나 주는 식사인데…….”
하지만 눈치 없이 배는 끊임없이 음식을 넣어달라고 소리를 내어 신호하고 있다.
매일 맛난 음식과 과일, 신선하고 영양가 만점의 식사만을 먹어온 그로서는 선뜻 저것들을 입에 댈 엄두가 나질 않았다.
망설이는 동안 근처에 있던 기사가 시간을 재는 듯하더니 얼른 식사를 빼앗아갔다.
그리고 점심.
또 비슷한 이상한 식사가 나왔다.
음식이 코앞에 있는지라 배는 더 크게 역정을 냈다.
‘참아라. 어찌 저따위 음식을 입에 대느냐?’
하고 달래봤지만 허사였다. 배는 당장에라도 등에 붙어버리겠다며 협박을 하는 듯했다.
당연히 조르바에게 갈등이 다가왔다.
‘먹어야 산다. 또한 살아야 미래를 본다. 언제고 기회는 찾아올 것이다. 나 조르바의 인생이 이렇게 끝나서는 아니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순간 조르바의 눈에 독기가 흘러넘쳤다.
우격다짐으로 음식을 입 안에 쑤셔 넣었다. 목을 축이려 이상한 우유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사실 이상한 음식은 아니었다. 그냥 오딘이 장난기가 발동해 식사를 준비하는 담당에게 일러 부러 색을 변질시키고 이상한 식단을 내라는 요구를 해놓았던 것이다.
그러나 시각도 미각에 속하는지라 조르바는 이 음식이 차마 입에 못 댈 음식이라고 여겼다.
무리도 아니었다. 항상 좋은 것만 먹다가 평민들이 먹는 음식을 먹으니 어찌 입에 맞을까.
먹으니 조금 기운이 났다.
기사는 알 듯 모를 듯한 미소를 머금더니 조르바의 목에 목줄을 달아 성 아래 마당으로 끌고 나갔다.
“밥을 먹었으니 운동을 해야 한다.”
한낮의 뻘짓이 시작되었다.
기사는 별 이상한 자세를 다 만들어 시키면서 조르바를 핍박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땀이 비 오듯 쏟아지고 근육이 결려 삭신이 안 쑤시는 곳이 없었다. 어젯밤 치료를 제대로 해주지 않은 것도 한몫했다.
“양팔을 벌려 바닥에 붙이고 목을 빳빳이 세운다. 두 다리는 들되 굽혀서는 안 된다.”
가장 어려운 동작 중 하나였다.
태양은 왜 이리 쨍쨍하며 구름들은 다 어디로 갔단 말인가.
뙤약볕이 고통을 살포시 더해주었다.
그의 시선에 돌연 발데르 공작의 모습이 들어왔다.
그리고 그 뒤를 한 남자가 따르고 있었다.
조르바는 그 남자가 누구인지 대번에 알아차렸다.
바로 켈타스 후작이었다.
복부가 팽팽하게 당기고 모가지가 아파왔지만 초인적인 인내로 버텨 내면서 조르바는 사념에 젖어들었다.
‘왜 후작이 공작의 성에 와 있단 말인가? 설마…….’
설마가 던져 주는 가정이 맞을 것이다.
후작이 공작과 손을 잡았을 것이라는 얘기다.
‘그렇다면 큰일이다. 이 일을 당장 국왕 폐하께 알려야만 한다.’
이 상황에 어울리지 않게 기대도 생겼다.
‘그렇게만 된다면 폐하는 필히 날 칭찬하실 것이다. 공이 없는 게 아니라는 얘기다.’
환희와 고통이 뒤엉킨 표정이었다.
* * *
몇 날 며칠을 지옥처럼 살아왔다.
그러면서 조르바는 기회를 엿보았다. 식사 역시 꼬박꼬박 챙겨먹고 운동 또한 열심히 했다.
그리고 어느 날 밤.
유난히 조용한 날이었다.
조르바는 조심스럽게 이불을 걷고 일어났다.
행여 발소리가 샐까 봐 뒤꿈치를 들고 문을 향해 걸었다.
그리고 감각을 살려 소리 없이 문을 열고 나갔다.
더러 경비들이 있었지만 침착함을 잃지 않은 덕분에 눈을 피할 수 있었다.
성 아래에 내려서자 더 많은 자들이 돌아다녔다.
‘철통같은 경비. 하지만 여기를 빠져나가야만 한다. 그래야만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있다.’
발소리를 최대한 낮춘 덕분에 가까스로 그들의 눈을 피하고 성문 옆의 소문으로 다가갈 수 있었다.
언제나처럼 소문 옆에는 창을 꼿꼿이 세우고 서 있는 수문병이 있었다.
숨소리마저 죽이고 그 뒤를 노리고 다가갔다. 그리고 그놈의 입을 막고 목을 비틀었다.
풀썩.
수문병은 힘없이 쓰러졌다.
이제부터가 중요했다. 소문을 여는 데에는 당연히 적지 않은 소리가 퍼질 것이다.
살그머니 문을 열었다.
다행히 별 소리가 새지 않는 듯했다.
하늘이 도우려는 것일까.
의외로 일이 순순히 풀려 주었다. 성문 앞에 주인을 기다리는 말 한 마리가 있질 않은가.
‘말 주인은 볼일을 보러 간 모양이군.’
생각을 접고 당장 말 등에 올라탔다.
“이럇! 이럇!”
그는 손이 얼얼할 정도로 말 궁둥이를 치며 사정없이 내달렸다.
한참을 달리고 또 달렸다.
넓은 평야를 지나 익히 기억하고 있던 귀족들의 성을 지나쳤다. 머잖아 아레인 왕성이 눈에 들어왔다.
근처에 말을 매어두고는 수문병들과 경비들의 조아림을 뒤로하고 대전을 향해 득달같이 달려갔다.
마침 대전 안에 하인리히 국왕이 있어 단번에 그를 알현하게 되었다.
조르바는 한쪽 무릎을 땅에 대고 아뢰었다.
“폐하, 큰일이옵니다.”
“무엇이 큰일이란 말인가?”
“켈타스 후작이 저희에게서 돌아서 반란을 꾀하고 있사옵니다.”
“그게 정말인가?”
“어느 안전이라고 거짓을 아뢰겠습니까. 이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사옵니다.”
국왕은 꽤나 놀란 기색이었다.
이 놀라움은 자신에게 공으로 다가올 것이라는 기대에 절로 들떴다.
하지만 국왕은 너무나 많이 놀랐다.
놀라움이 너무나 컸던 탓에 표정에 영향까지 끼치고 있다.
왕의 얼굴이 묘하게 일그러져 갔다.
이윽고 그의 얼굴이 흐릿해지나 싶더니 오딘으로 바뀌는 게 아닌가.
목소리가 들렸다.
불행하게도 왕의 목소리가 아닌 오딘의 목소리였다.
“내가 폐하로 보이냐?”
오딘은 조르바의 눈꺼풀을 손가락으로 벌려 눈을 살피는 중이었다.
“허걱!”
깜짝 놀라 조르바는 몸을 벌떡 일으켰고 오딘은 슬그머니 비켜섰다.
그때서야 조르바는 깨달았다.
모든 게 꿈이었다는 것을.
분하고 원통했다. 이제 이 지옥 같은 곳을 벗어나고 왕에게 공로를 치하받으려는 참이었는데…….
한편으로는 야속하기까지 했다.
‘꼭 깨워야 했소이까? 그래야만 했소?’
그렇다고 눈빛에 원망을 담을 순 없었다. 감정과는 다르게 조르바는 순한 양의 표정을 지었다.
참 어이없다는 눈빛으로 오딘이 마주 보고 있었다.
“뭔 놈의 폐하를 찾아. 이상한 놈 같으니라고.”
막 잠을 깬 그에게 오딘은 보채기부터 했다.
“어서 옷 입어.”
평상시보다 이른 시각에 깨우는 데에서 의문이 초래되었다.
“예? 왜요?”
“왜요는 콱! 입으라면 입을 것이지, 뭔 말이 많아.”
오딘이 당장에라도 때릴 것처럼 다가섰기에 조르바는 잔뜩 몸을 웅크렸다가 그의 자세가 풀어지는 것을 보고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실상 그의 일상은 노예와 다를 바 없었다.
까라면 까야 하는 처지에 놓인 것이다.
조르바는 손이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옷을 갈아입고 오딘을 따라 방문을 나섰다.
문밖에는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중 한 명은 익히 알던 인물이었다.
보탄 폰 크라이센 남작.
아직까지 그가 살아 있다는 게 신기했다.
별로 대단한 자는 아니었다. 그리고 하인리히 국왕에게로 돌아서지도 않았기에 죽었을 것이라고만 생각했었다.
하나, 눈앞에 서 있는 모습은 너무나도 당당했고, 늠름해 보였다.
그는 엷게 미소를 띠고는 자신을 마주 보며 비아냥거렸다.
“오랜만이오, 조르바 자작.”
같은 귀족이었거늘 자신은 이 무슨 꼴이란 말인가.
수치심을 억누르지 못해 조르바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그때 오딘이 끼어들었다.
“알던 사이였군.”
“그러하옵니다.”
조르바는 꽤 눈치가 빠른 인물이었다. 남작 보탄뿐만 아니라 발데르 공작, 심지어 엘레느 공주까지 오딘을 상전 모시듯 하고 있다는 걸 파악했다.
그가 말을 높이는 게 이제는 놀랄 일도 아니었다.
하나, 이해할 수 없는 점이 있긴 했다.
단지 무력이 강하다고 해서 이들이 무릎을 꿇고 스스로를 낮췄을까 하는 의문이었다.
그렇다고 물을 수도 없는 노릇이니 이 의문은 계속 안고 가야 했다.
이들의 관계 속에 여러 사연들이 있었음을 간파하지 못했기 때문이고, 설혹 그가 저들이 입장이었다면 분명 오딘의 발아래 엎드리지 않았을 것이다.
그것이 보탄 무리와 조르바의 차이점이었고 운명을 달리하는 계기가 된 셈이다.
“지금쯤이면 선발대와 일부의 병력들이 이글레스성에 다다랐을 것으로 사료되옵니다. 주군, 더 늦기 전에 출발하도록 하겠습니다.”
샤르트의 목소리에 보탄은 오딘의 표정을 살폈다.
그가 고개를 끄덕여 보이자 일행들은 조르바를 데리고 마법진이 위치할 장소로 이동했다.
멀리서 그들의 뒷모습만 바라보고 있던 엘레느는 서운한 표정이 되었다.
‘금세 다시 오실 것인데…….’
자신이 생각해도 참 한심해 보였다.
방으로 돌아가려 뒤로 돌아서다가 그녀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한 노인이 헤벌쭉 웃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도 봤던 노인이었다. 바로 발데르 공작의 지인이며, 얼마 전 마타하리라는 남자를 치료해주었다는 그 노인이었다.
“꼬마 아가씨, 얼굴에 수심이 가득하군.”
“그, 그걸 어찌 아세요?”
“사람의 얼굴에는 표정이 가득해서 뭘 하려 해도 뻔히 다 드러나게 되어 있지.”
엘레느는 부정하지 않았다.
창피한 생각도 들었던지 고개를 푹 수그렸다.
노인은 위로라도 해주고 싶은지 인자한 얼굴로 그녀를 마주 보았다.
“이 늙은이가 재미있는 경험이라도 시켜 주랴?”
“재미있는 경험요?”
“그래. 저 하늘을 날아보면 어떻겠느냐?”
“하늘을 날아요? 사람이?”
“해볼 테냐?”
“에이, 제가 어리다고 지금 절 놀리시는 거죠? 사람이 하늘을 난다는 얘기는 못 들어봤는걸요.”
노인은 갑자기 그녀에게 다가섰다. 그리고 작은 허리를 껴안고 상공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에비에이션(Aviation)!”
두 사람의 발이 두둥실 떠올랐다.
그리고 서서히 땅이 멀어지고 있었다.
너무 놀라 엘레느는 멍한 표정으로 입을 벌렸다.
밑에서 자신을 본 사람들이 손가락을 들어 위를 가리켰다. 그 주위로 더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어 고개를 뒤로 젖혀 시선을 모았다.
더 위로 올라가자 그 커다란 성이 한눈에 들어왔다.
한편으로는 무섭기도 했다.
“이러다 떨어지면 전 죽나요?”
“허허, 당연히 떨어지면 죽겠지.”
그게 겁이 났던지 엘레느는 노인의 옷깃을 꽉 부여잡았다.
다소 안심이 되자 그녀는 조금 욕심을 내어 물었다.
“구름 위로도 갈 수 있어요?”
“있지. 하지만 구름은 차갑단다.”
“왜요? 저렇게 푸근해 보이는데요?”
“보이는 게 전부는 아니야. 저건 수증기 덩어리야. 그래도 한번 가보겠니?”
주저할 것 없다는 듯 그녀는 다부지게 대답했다.
“네.”
노인의 몸이 더 위로 솟구치며 구름에 닿았다.
수증기 덩어리가 금세 두 사람의 몸을 흠뻑 적셨다.
“깔깔!”
그리도 좋은지 엘레느는 함박웃음을 지었고 노인도 그녀가 밝은 모습이 되자 만면에 미소를 드리웠다.
“안 힘드세요?”
“힘들지. 늙은이가 무슨 힘이 있겠느냐.”
“피, 거짓말. 이렇게 쌩쌩하시면서. 그럼 우리 내려가요.”
다시 두 사람의 몸이 아까 떠올랐던 그 자리로 내려왔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놀라움을 떨치지 못했는지 그들에게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엘레느에게는 더없이 진귀한 경험이었다. 그러면서도 기분을 달래준 이 노인에게 친근함이 들었던지 앙증맞은 목소리로 물었다.
“할아버지, 이름은 어떻게 되세요?”
“궁금하느냐?”
“네.”
“못 가르쳐 줄 것도 없지. 잘 듣거라. 이 늙은이의 이름은 츠카불타 라바 고르다노스 파라놀로 가이제스라마하다.”
“풉.”
터져 나오는 웃음을 주체 못하고 엘레느는 킥킥거렸다.
그녀에게 할아버지가 살아 있다면 아마 이런 느낌이었을까? 지금 노인이 가져다주는 행복은 마치 그것과도 비슷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