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딘을 찾는 자
로렌츠성.
삼십의 병력이 성을 마주 보고 있었다.
유독 한 사내가 대열에서 이탈해 더 앞으로 나와 연방 투레질을 해대며 사납게 콧김을 내뿜는 말 위에 올라 성을 향해 크게 소리쳤다.
“로렌츠성에는 겁쟁이들만 있는 모양이로구나. 나와 싸울 자는 없느냐!”
한 눈을 두 개의 작은 금색의 고리로 봉한 자였다.
마침 성 위에서도 그런 그를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또한 그를 알아보는 자들도 더러 있었다.
그곳에서 한 남자의 조롱 섞인 외침이 터져 나왔다.
“왜 외눈박이가 되셨소이까? 사이클롭스(외눈박이 거인)도 아니고 보기 흉하구려.”
“오랜만이군, 반슈타인 백작. 그래, 왕국의 개가 된 기분이 어떠한가?”
“말씀이 너무 심하시구려. 어찌 내가 개가 되었단 말이오? 왕국에 반역을 꾀한 것은 공작이지 않소이까!”
그렇다. 로렌츠성에 소규모의 병력만을 끌고 와 시비를 거는 것은 발데르 폰 그라니트 공작이었던 것이다.
입가에 여유로운 미소를 거두지 않고서 발데르는 화제를 돌렸다.
“백작의 성에는 나와 맞설 용맹한 자가 없나? 둘이 되거나 셋이 되어도 좋으니라. 그대가 전부를 내보내지 않으면 나 또한 혼자서 싸울 터. 속히 결정하라.”
반슈타인 백작도 질세라 받아쳤다.
“손님이 오려거든 미리 얘기를 해주어야 정상 아니오. 가지 마시구려. 내 맞을 준비를 하고 있사오니.”
그는 내심 흡족해하고 있었다.
호박이 넝쿨째 굴러들어오지 않았는가.
그러면서도 한 가지 의문만은 떨쳐 버릴 수 없었다.
“얼마 전 조르바 자작과 루시아노 백작의 군대가 그라니트성을 향해 출발한 것으로 아는데 그들은 어떻게 되었소? 괴멸이라도 시킨 것이오이까?”
“그들은 아직 그라니트성에 오지 않았느니라.”
달리 의심은 품지 않았다. 평소 공작의 성격에 대해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상하군. 공작이 거짓말을 입에 담을 위인도 아닐 텐데. 그럼 가는 길에 변고라도 생긴 것인가.’
그렇게 생각하는 수밖에는 없었다.
그때 성문 옆 작은 문이 열렸다. 그리고 우람한 덩치의 기사 하나가 말을 타고 뛰어나왔다. 그는 긴 강철 막대에 쇠사슬로 엮인, 가시가 박힌 철편을 들고 나왔는데 그 모양만으로 보아도 충분한 위협이 되었다.
발데르의 말은 당장에라도 뛰어나가려고 앞발을 들었다 놓았다. 발데르는 고삐로 말을 채어 끌며 다독이고 나타난 기사에게 물었다.
“못 보던 자로군. 이름이 무언가?”
“이 몸은 곧 죽을 자에게 이름을 알려 줄 정도로 너그럽지 않다. 이럇!”
기사가 말 궁둥이를 때리자 놀란 말이 발데르를 향해 매섭게 짓쳐들었다.
그는 거리를 좁혀 오면서도 철편을 빙글빙글 돌리며 원심력을 더하고 있었다.
발데르 역시 검을 고쳐 쥐며 말을 몰아나갔다.
파캉!
검과 철편이 부딪치며 불똥을 튀겼다.
그러나 어이없게도 기사가 든 철퇴는 허공에서 빙글빙글 돌며 멀어져 갔다.
무기를 놓친 것으로도 모자라 기사의 팔은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그 즉시 발데르는 기사의 말을 걷어찼다.
그러자 말이 쓰러지며 기사 역시 땅으로 나뒹굴었다.
그것은 단지 시작일 뿐이었다.
실력이 쟁쟁한 기사들을 내보내고도 결과는 별반 다르지 않았다. 일합에 목이 떨어져 나가거나 부상당해 포박되는 기사들이 속출했다.
일기토가 계속될수록 반슈타인 백작의 속은 까맣게 타들어갔다.
‘이러다간 귀한 기사들을 다 잃을 수도 있겠구나. 이럴 게 아니다.’
제일 큰 잘못은 이렇게 계속 내보내다 보면 공작의 체력이 떨어질 것이라는 생각을 품은 것이었다.
그러나 저렇게 몇 합도 겨뤄보지 못하고 무릎을 꿇는다면 이 이상의 싸움은 의미가 없을 것이었다.
그렇다고 그를 그냥 보내줄 수도 없는 노릇이다. 성엔 아직 많은 기사들과 병사들, 그리고 마법사들이 있다.
아무리 발데르 개인의 실력이 대단하고 뛰어난 기사들을 추려 왔다고 해도 고작 삼십이었다.
‘더 큰 피해를 입기 전에 여기서 종지부를 찍어야 한다.’
그렇게 생각하고 반슈타인은 소리쳤다.
“성문을 열어라!”
얼마 지나지 않아 많은 병력들이 성 밖으로 나섰다.
그때까지도 발데르는 도망가지 않았다.
그 꼴이 우스워보였는지 반슈타인은 크게 웃어버렸다.
“하하하! 공작, 제정신이오? 정말 안 가시는 게요? 설마 삼십으로 우리 모두를 어쩌시려는 작정은 아니시겠지요?”
발데르는 호흡을 크게 들이마셨다가 내쉬며 소리쳤다.
“목숨이 아까운 자는 나서지 않아도 좋다. 이제부터는 피비린내가 나는 사투가 시작될 터이니.”
그 소리가 어찌나 큰지 성 밖에 나온 모두가 들었다.
그러나 여전히 반슈타인은 코웃음을 칠 뿐이었다.
“현실을 직시하시구려. 전부터 공작은 너무 망상에 사로잡혀 있었소이다. 내 친히 폐하께 공작을 만나게 해드려야겠소.”
“여전히 반성하는 기미라고는 없군. 그대는 욕심에 눈이 멀어 폐하를 배반하고 그릇된 자를 섬긴 것을 후회해야 할 것이야!”
발데르의 외눈이 살기를 풀풀 뿜어내고 있었다.
놀란 표정으로 샤르트는 숨도 고르지 않고 달렸다. 각 층과 연결된 계단이 나오면 위를 슬쩍 올려다보고 오르고 또 올랐다.
불과 한 달 전만 하더라도 이 정도로 움직이면 이마에 땀이 맺히고 호흡이 가빠져야 했을 텐데 이상하게도 지금은 하나도 힘이 들지 않았다.
목표 층에 다다르자 복도를 따라 뛰었다.
웬일인지 보탄 남작은 난간에 기대어 아래를 내려다보며 사색에 잠겨 있었다.
샤르트는 그 앞에 멈춰 서서 보탄 남작을 향해 다짜고짜 입을 열었다.
“고, 공작 전하께서 로렌츠성을 함락시켰다는 보고입니다.”
“알았네.”
그냥 그 말뿐이었다. 적어도 샤르트는 주군이 놀라거나 기뻐하는 기색이라도 보일 줄 알았었다.
이래서야 전갈을 받자마자 뛰어온 보람이 없질 않은가.
조금 억울한 생각이 들었던지 샤르트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주군께서는 놀랍지 않으십니까? 단 삼십 명이 성을 함락시킨 것인데 말입니다.”
“놀랍지, 놀라워.”
말은 그렇게 했지만 평상시와 다름없는 차분한 어조였고 시선도 아까와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어서 별로 놀라워하는 모습이 아니었다.
자연히 샤르트는 머쓱해졌다.
곧 거대한 성문이 열리고 하무트 남작을 위시해 많은 병력들이 빠져나갔다.
이미 자작 이상의 귀족들 간에 오고 간 얘기였다.
그라니트성이 포화 상태였으니 다른 곳을 취해야 했다. 그중 가장 인접한 로렌츠성이 타깃이 되었던 것이다.
사실 보탄은 예상하고 있던 일이었다.
공작은 이미 왕국 내에 적수를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강해졌으며 그가 데리고 나간 인원들 역시 최정예로만 추렸다.
그들을 바라보다가 보탄은 샤르트를 향해 입을 열었다.
“경은 자신이 전과 많이 달라졌다고 생각지 않나? 일월진에 들어가서 수련하기 전과 비교해보았을 때 말일세.”
“몸이 가벼워진 것 같고 불끈불끈 힘이 나는 것 같긴 합니다. 아직 전쟁터로 투입되지 않아서인지 확실히는 잘 모르겠습니다.”
“내가 말해주겠네. 자넨 이미 소드유저를 넘어서 익스퍼트 중급의 경지를 바라보고 있네. 아니, 이미 도달했는지도 모르지.”
듣기 좋은 말이었다.
은근히 기분이 좋아져 입이 합죽이처럼 벌어졌지만 확신이 없었기에 샤르트는 보탄의 의견을 부정하고 말았다.
“그, 그렇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전 아직 주군에 비하자면 한참 멀었지 않습니까.”
여러 번 일월진 안에서 대련을 했었다. 그때마다 샤르트는 보탄에게 패했다. 그러니 저렇게 생각하는 것이다.
보탄이 일깨워주었다.
“그렇겠지. 나도 검술 실력이 늘었으니. 그 증거가 있다네. 내 몇 번 자네와의 대련에서 슬그머니 검에 마나를 불어넣은 적이 있다네. 자네는 그냥 강하게 친 검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오해였다네. 그 이후의 대결은 줄곧 그랬었지. 그나저나 검에 마나를 불어넣는 것은 누구에게 배웠나?”
“주군께서 예전에 자주 말씀해주셨습니다. 또 근래에는 크레멘 준남작도 많이 도움을 주었습니다.”
“그 점을 못내 미안하게 생각했는데 잘되었군. 언젠가 준남작에게 고맙다고 해야겠어. 근 한 달 만의 일이야. 한 달 만에 이렇게 검술이 진보할 줄 누가 알았겠나.”
그것은 굳이 이 두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일이 아니었다. 진에 들어가 마나 심법으로 체내에 마나를 쌓고 벽곡단으로 끼니를 대신하며 수련을 한 모두에게 해당되는 일이었던 것이다.
* * *
며칠 후 발데르가 그라니트성으로 돌아왔다.
성에 남아 있던 잔류병들과 귀족들의 식솔 및 가솔, 성안에서 생계를 유지하며 살아가던 영지민들이 성문 주위에 모여 승전을 축하했다.
늠름하게 말을 몰고 들어서는 발데르의 왼손에는 반슈타인의 수급이 들려 있었다. 그의 수급은 공포에 젖은 표정이었고 죽음을 인정할 수 없는지 눈도 못 감은 모습이었다.
굳이 들고 오지 않아도 될 물건이었지만 이것으로나마 공주를 달래줄 생각이었다.
수급을 확인한 엘레느는 차지만 고운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 용서할 터이니 편하게 눈을 감으세요.”
곧 발데르가 투박한 손으로 반슈타인의 눈을 감겼다. 그리고 그것을 상자 안에 집어넣으며 곁에 있던 기사에게 말했다.
“사람들을 시켜 적당한 자리에 묻어주도록 하라.”
“명을 받들겠나이다.”
상자를 받은 기사는 조심스레 뒷걸음으로 물러났고 발데르는 무릎을 꿇고 엘레느의 눈을 마주하며 말을 이었다.
“신이 잃어버리신 것들을 반드시 되찾아드리겠사옵니다. 부디 그날까지 건강하게만 지내주시옵소서.”
엘레느의 입술이 살며시 치켜 올라갔다.
사실 왕국에 대한 욕심 따위는 애초부터 있지도 않았다. 그냥 이대로만 있어도 좋을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둘 중 하나는 끝나야 한다고 공작이 말했었다.
같은 하늘 아래 살 수는 없다면서 말이다.
또 그래야만 돌아가신 분들이 편히 눈을 감으신다고 하였다.
아직은 너무도 어렸으므로 그게 무슨 말인지는 잘 몰랐지만 틀린 말 같지는 않았기에 그냥 따르기로 한 것이다.
어차피 해야 할 싸움이라면 어서 빨리 끝내 사람들이 평안할 수 있기를 빌었다.
나쁜 사람들이 없어져 세상에 평화롭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것이 이 작은 소녀의 소박한 바람이었다.
물론 아직까지 마음은 엉뚱한 곳에 더 가 있지만 말이다.
* * *
“공작 전하, 신 보탄이옵니다.”
“어서 오시게. 내 안 그래도 자넬 보고 싶었던 참이네.”
근래 들어서 보탄과 발데르의 사이는 매우 각별해져 있었다.
그들 편에 서 있는 몇몇 귀족들이 들으면 서운할 얘기지만 보탄은 발데르 공작을 제일 중요하게 생각했고 발데르 역시 보탄 남작을 제일 중요하게 생각했다.
모두가 오딘이라는 매개체 덕분이었다.
당사자인 오딘 역시 이 두 사람 외의 귀족은 잘 거들떠보지 않았으므로 그럴 만도 했다.
그리고 그 점이 다른 귀족들이 그들을 더욱 높이 사는 계기가 되었다.
오딘은 그라니트성내에서 절대자로 군림하고 있는 셈이었다.
평소와 다르게 보탄은 조금 걱정스런 얼굴이었다.
친한 사람끼리는 안색만 보아도 상대의 기분을 알 수 있다더니 발데르가 그러했다.
“자네 무슨 걱정이 있는가?”
보탄은 허심탄회하게 자신의 생각을 털어놓았다.
“그게……. 이번 일은 너무 서두른 감이 있는 듯합니다.”
발데르는 웃는 낯으로 되물었다.
“왜 그런가?”
“제 생각은 이렇습니다. 성을 하나 빼앗았다고는 하나 아직 열세 개의 성과 더 부딪혀야 합니다. 소식이 전해지는 대로 저들은 방비를 더 철저히 할 것입니다.”
“틀린 말은 아니로군. 그러나 언제고 해야 할 싸움이었네.”
“후우, 자세히는 모르겠습니다. 다만, 아직까지 저들과 싸우는 것은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격 같습니다. 막상 시작하니 걱정이 됩니다.”
그때 실로 엉뚱한 해결책이 나왔다.
“계란이 바위보다 단단하면 될 일인 것을.”
발데르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두 사람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 허리를 숙이며 경외심을 담아 외쳤다.
“오딘 님을 뵈옵니다.”
“그 방법은 쓸 만했느냐?”
오딘의 물음은 일기토를 가리키는 것이어서 발데르가 답했다.
“그렇사옵니다. 덕분에 피를 덜 보고도 별 무리 없이 적의 성을 취하였사옵니다.”
“너희들은 충분히 강한 것을 왜 걱정하는 것이냐? 또한 최고의 무기도 있는 것을.”
“최고의 무기라 하오시면 무얼 뜻하시는 것이온지?”
“공주가 있질 않느냐.”
순간 두 사람의 머릿속이 빛이 들어온 것처럼 밝아졌다. 뭔가가 와 닿았기 때문이었다.
그렇다. 하인리히가 즉시 왕과 왕자들을 죽인 것은 자신의 행동에 정당함을 부여받기 위함이었다. 운이 없었는지 내부의 인물에 의해 공주들이 도망쳤다고는 하지만 아무런 소식도 들려오지 않아 마음을 놓고 있던 차였다.
그 말인즉슨, 왕에게 협조하는 세력 중에 아직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귀족도 있을 것이라는 얘기다.
왕의 핏줄을 이은 사람이 살아 있다는 것을 확인한다면 심경에 변화가 올지도 모르는 일이 아닌가.
“적들 모두를 무너뜨릴 필요는 없다. 반 이상의 전력을 쓰러뜨리면 눈치 보는 자들이 많아질 것은 자명한 일인 것을…….”
“큰 가르침을 얻었습니다.”
“성은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거야. 지켜본 바로는 이 왕국에 천라지망을 뚫고 안으로 들어올 인물이 없어 보이니까.”
* * *
그라니트성의 기사가 급한 전갈을 가지고 로렌츠성으로 향하려는 중이었다.
성문 옆의 소문이 열리자 기사는 고삐를 끌어당기며 말을 몰아나가려 했다.
그 순간 밖에서 성안을 향해 비호같이 파고드는 인영이 있었다.
깜짝 놀란 기사가 침입자를 막기 위해 다급히 말머리를 돌리려 했으나 인영은 벌써 성안에 도달한 상태였다.
“웬 놈이냐?”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여기저기에서 고성이 터져 나왔다.
천라지망을 펼쳐 놓은 이래 외부인의 침입이 전혀 없었던 그라니트성에 난데없는 소동이 빚어졌다.
육안으로 드러난 외모로 봐서는 이제 30살가량의 남성이었다. 키는 매우 컸으며 온몸이 근육질이었고, 무정한 눈에 얼굴의 대각선으로 길게 아로새겨진 칼자국은 묘한 위화감마저 들게 했다.
그는 어깨에 큰 검을 메고 있었는데 검신의 너비만 해도 족히 네댓 살 어린아이의 몸뚱이와 맞먹었다.
호기심에 그를 보려던 아이들은 모두 제 부모들의 손에 이끌려 멀찍이 떨어졌다.
사람들이 비켜서며 그를 기점으로 원형의 공간이 형성되었다.
속속들이 기사들이 모여들었다.
또한 성에 남아 휴식을 취하던 마법사들도 각기 무기가 될 만한 마법 무구들을 들고 근처로 다가왔다.
불청객이 말했다.
“사람을 찾으러 왔다.”
한 기사가 앞으로 나서며 당당하게 따졌다.
“성에 볼일이 있다면 수문병을 통해야 하거늘, 어이하여 몰래 들어온 것이오?”
“말한다고 들여보내줄 것 같지 않아서였다. 너희들과는 상관없는 일이니 그를 데려와라.”
“그라고 하면 어떻게 알아듣겠소? 이름이라도 말해보구려.”
“이름은 모른다. 다만 인상착의에 대해서는 들었지. 검은 머리에 검은 동공, 그리고 이마 한 부분에 자문을 새겨 넣은 이방인.”
여기 있는 모두가 아는 사람이었다. 성내의 모든 사람들에게 추앙을 받는 오딘이 그 대상이었음을 모르는 이는 없으리라.
듣다 못한 기사 하나가 앞으로 나서며 노성을 터뜨렸다.
“어찌 그분을 함부로 입에 담느냐?”
먼저 나선 기사가 침착하게 손을 들어 그를 제지시켰다. 그리고 불청객을 향해 경계하는 눈빛으로 물었다.
“용건을 물어봐도 되겠소?”
“용건? 내 일을 하러 온 것뿐이다. 참고로 내 직업은 어쌔신이다.”
어쌔신은 주로 사람을 암살하는 일을 도맡아한다.
말인즉슨 피를 보겠다는 뜻이다.
파장은 적지 않았다.
적어도 귓구멍으로 말을 전해들은 자들의 면면에는 극명하게 적의가 드리워졌다.
삽시간에 변하는 표정들을 보며 불청객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그 자세를 보니 그놈이 여기서 신이라도 되는 모양이군.”
“적어도 네놈이 함부로 입에 올릴 분은 아니시다. 의도가 그러하다면 여기서 살아나간다는 꿈은 깨야 할 것이다.”
기사들은 너도나도 검을 빼들었다. 그리고 마법사들은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하기 시작했다.
공기가 차가워지고 있었다.
그때 뒤쪽에서 기사 복장의 한 남자가 걸어 나오며 말했다.
“제게 기회를 주십시오.”
보통의 기사들은 이러했다. 상대가 하나라면 이쪽도 하나가 되어야 한다. 물론 감당 못할 힘을 가지고 있으며 필시 막아야 할 이유가 있을 때에는 합공이 되었다.
자신의 상관이 대답하기도 전에 불청객이 짜증 섞인 얼굴로 중얼거렸다.
“어딜 가나 똑같군. 기사들의 허세는 말이야. 자기들이 대단한 줄 알더군.”
허락을 구하던 기사가 그에게로 시선을 돌리며 눈살을 찌푸렸다.
곧 허락이 떨어졌다.
기사는 검끝을 가운데로 향해 고정시키고 체중을 실어 꿰버릴 듯이 달려들었다.
물론 이 공격을 피한다면 다른 공격이 이어질 것이었다.
하나, 그는 피하기는커녕 가만히 서 있었다.
끝까지 그에게 시선을 떼지 않던 기사 역시 이상한 기분이 들었지만 멈추진 않았다.
곧 검이 살에 부딪혔다.
파각!
기이한 일이었다.
검은 마치 바위에라도 부딪힌 것처럼 살에 미세한 흠집도 내질 못하였다.
‘거, 검이 박히질 않는다?’
불청객은 긴 팔을 내밀어 놀라고만 있던 기사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그리고 상체를 틀어 손에 쥔 대상을 허공으로 던져 버렸다.
어이없게도 사람의 몸뚱이가 10여 미터는 뜬 채로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가더니 지면에 처박혔다.
구경하고 있다가 놀란 사람들이 소리를 지르며 사방으로 흩어졌다.
기사는 몸을 한차례 들썩이더니 다시 얼굴을 땅에 파묻고 부르르 떨기 시작했다.
저대로 둔다면 죽게 될 것임을 알기에 근처에 있던 마법사들이 허둥지둥 뛰어가서 그의 몸에 치료 마법을 캐스팅했다.
불청객은 쓰러진 자를 포함해 근방에 모인 기사들 모두를 비하하듯 말했다.
“이거야 원, 싱거워서. 이 성에도 실력도 안 되는 버러지들밖에 없는 모양이로군.”
기사들의 눈초리가 매서워졌다. 그러면서도 경각심을 떨쳐 버리지 못했다.
다시 2명의 기사가 달려들었지만 그들 역시 맥도 못 추고 나가떨어졌다.
도저히 상대가 안 되겠다 싶었는지 기사들은 그의 주위를 에워싸기 시작했다.
그때서야 불청객은 등 뒤에 멘 커다란 검을 꺼내들었다.
훙훙훙-!
그가 가볍게 손목을 놀리자 검이 허공에 맴돌며 바람 소리가 일었다.
이윽고 검끝을 내려놓자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고 쿵! 소리를 내며 땅이 푹 꺼져 버렸다.
그 무게가 얼마나 나가는지를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었다.
실력을 보이기에 앞서 불청객은 경고부터 했다.
“막아서는 자는 죽음을 각오해야 한다. 그래도냐?”
충분히 위협적인 말이었다.
저 검에 몸이라도 부딪힌다면 뼈가 으스러지고 말 것이다. 다행히 주위에는 치료를 해줄 마법사들이 있지만 즉사할지도 모르는 일.
그런데도 기사들은 입장을 굽히지 않았다.
“그분을 뵈려거든 우리 모두를 쓰러뜨려야 할 것이다.”
“어렵지 않지.”
곧 피 말리는 전투가 시작되었다.
단 한 명의 남자를 쓰러뜨리기 위해 열댓 명의 기사들이 힘을 합치고 있었다.
선임 기사가 옆의 수하에게 물었다. 이렇게 싸우다 죽는다면 개죽음만도 못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남작께서는 어디 계시느냐?”
“보탄 남작님과 발데르 공작님은 일부 병력을 이끌고 아침에 성을 떠나셨습니다.”
“그럼 샤르트 경과 크레멘 준남작께서는 계시느냐?”
“두 분께서는 성에 잔류해 계신 것으로 아옵니다.”
“어서 가라. 서둘러 알려야 한다. 보통 일이 아니다.”
찰나의 시간이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였다.
그사이에 예닐곱의 기사들이 쓰러져 고통을 호소했다.
또 몇몇은 숨이 멎어 있었는지 치료를 하려던 마법사들이 좌우로 고개를 흔들었다.
‘정말 괴물이로구나. 스치기라도 하는 날에는 저와 같은 꼴이 되어버리니…….’
한 마법사가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선임 기사에게 달려가 청을 올렸다.
“싸움을 멈춰야 합니다. 이대로라면 더 큰 피해를 입을 것입니다.”
“그럼 저자에게 무릎이라도 꿇으라는 것인가? 그럴 순 없다.”
그 와중에도 한 기사가 불청객에게 목을 잡혀 허공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그때 어디선가 경고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손 놔주는 게 좋을 거야.”
돌연 불청객이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몸을 돌리며 손에 든 기사를 매몰차게 집어던졌다.
뒤쪽의 인영이 곤두박질치려는 기사의 뒷덜미를 잡아채고 속도를 반감시켜 그를 무사히 내려 주었다.
불청객은 다시 인상을 찌푸리고 말았다.
“네놈들은 사람 귀찮게 하는 재주를 가지고 있나 보군.”
나타난 사람들은 그가 찾는 이방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바로 샤르트 경과 크레멘 준남작이었다.
더 이상 자신들이 끼어들 자리가 아님을 깨달은 기사들은 서둘러 뒤쪽으로 물러섰다. 이제는 다친 이들을 수습하는 일을 해야 했다.
동료의 죽음을 목격한 기사들은 비통한 심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면서 샤르트 경과 크레멘 준남작이 꼭 저자를 쓰러뜨려 주기를 바랐다.
말수가 적은 크레멘을 대신해 샤르트가 그를 타일렀다.
“싸워봐야 알 일이지.”
근래 들어서 두 사람의 검술은 크나큰 진보가 있었다. 벌써 일월진에 드나든 지도 어언 5개월이 흘렀으니까.
두 사람이 가장 강해지게 된 것은 잘난 스승들 덕분이었다.
보탄 남작과 발데르 공작은 둘째 치고 오딘의 장난감까지 되어준 적이 몇 차례 있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결국 보탄 남작과 발데르 공작을 제외한 기사들 중에서 이 성에서 가장 강한 사람이 두 사람이 되는 셈이었다.
샤르트는 일월진 안에서 다섯, 혹은 일곱의 기사들과 검을 맞댈 정도로 강맹해졌고, 크레멘은 그보다 더한 경지에 다다라 있었다.
몇 번의 실전 경험으로 전에 없던 자신감까지 가지게 된 샤르트였으니 큰소리칠 만도 했다.
불청객이 물었다.
“이 성에서 너희들이 가장 강한가?”
“그건 왜 묻지?”
“또 손을 놀려야 하는 수고로움을 덜기 위해서다. 답해라.”
“뭐, 그렇다고 볼 수 있지.”
샤르트의 대답에 불청객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얼굴에 그렸다.
“그래. 너희들을 쓰러뜨리면 그 이방인을 만나게 해준다는 말이겠군.”
“얼마나 대단한 놈인지는 모르겠다만 그분은 네 녀석 입에 함부로 오르내리실 분이 아니다.”
“길고 짧은 건 대봐야 알겠지.”
또 한 번 냉기류가 흘렀다.
당장에 샤르트가 검을 빼고 짓쳐들려 하는데 누군가가 뒷덜미를 잡았다. 크레멘 준남작이었다.
“왜, 왜 그러십니까?”
“가볍게 볼 상대가 아닌 것 같네. 나도 돕지.”
“허! 준남작님, 저놈 덩치만 컸다 뿐입니다. 일단 제가 상대해보도록 하지요.”
그 말이 어이가 없었던지 불청객이 웃고 말았다.
“재미있는 놈이로군. 어디 발린 입만큼이나 실력도 뛰어난지 구경이나 해봐야겠어. 다만, 어줍지 않은 실력이라면 당장에라도 그만두는 게 좋을 거야.”
“네 말대로 길고 짧은 건 대봐야 알겠지.”
말을 마친 샤르트가 빠르게 파고들었다.
처음 달리는 속도는 보통의 기사들과 다를 바가 없었지만 이상하게 대상에 근접할수록 속도가 빨라졌다.
복부를 찌르려던 검이 어느새 진로를 고쳐 사선으로 다리를 베려고 하고 있었다.
파캉! 찌르르르!
불청객의 검과 샤르트의 검이 부딪쳤다. 그 충격으로 샤르트는 서너 발이나 물러서야만 했다.
그의 이마에 골이 깊게 파였다.
크기가 더 크다고 해도 같은 검이 부딪친 것뿐인데 아직도 자신의 검은 부르르 떨고 있다.
힘이나 순발력 어느 하나 뒤처지지 않는다는 얘기다.
‘저 큰 검을 저렇게 빨리 휘두르다니…….’
생각을 접고 다시 샤르트가 짓쳐들었다.
이번 역시 좀 전과 같은 공격이었다. 하지만 불청객의 검이 다시 그의 검을 쳐내려 할 때 샤르트의 검은 한 번 더 진로를 틀었다.
그리고 정확히 그의 허리를 그었다.
촤칵!
갑자기 경고 섞인 음성이 터졌다.
“피해!”
바람을 일으키며 거대한 검이 샤르트의 허리를 베어버릴 듯이 날아들었다. 다리에 힘을 주어 샤르트는 뒤로 한껏 몸을 숙였다.
그러자 무시무시한 기세로 검이 스쳐 지나갔다.
조금만 늦었더라도 큰일이 났을 것이다.
“말씀 안 해주셔도 알고 있었다고요.”
경고를 준 크레멘에게 그렇게 대꾸는 했지만 한 가지 의구심은 떨쳐 버릴 수 없었다.
‘상처가 없다. 분명 베었을 텐데?’
생각을 읽기라도 했는지 한쪽에서 우려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강철 같은 피부를 가진 자입니다.”
크레멘이 검을 빼들고 다가서며 합류할 의사를 밝혔다.
“서둘러 끝내야 하네. 이 일을 오딘 님이 아신다면 좋은 말은 듣지 못할 것이니.”
“뜻에 따르겠습니다.”
샤르트가 차분히 검에 마나를 불어넣자 불청객은 그를 쉽게 간파했다.
“익스퍼트로군. 그것도 상급.”
그리고 크레멘을 건너다보며 말했다.
“이쪽은 최상급이로군.”
“그럼 스스로 굴복해야 한다는 것도 알겠군.”
말을 마친 샤르트가 다시 매섭게 파고들었다. 이때부터는 불청객 역시 태도를 달리했다. 검에 마나를 불어넣는다면 경우에 따라서는 강철도 찢을 수가 있기 때문이다.
소드 익스퍼트 상급과 최상급이라는 것은 거저 얻은 호칭이 아니었다.
그들이 움직이는 속도는 범인들의 눈으로는 감히 따라잡기도 힘들 정도였다.
다람쥐처럼 순식간에 들러붙었다가 멀어지면서 검을 내지르고 휘두르는 속도는 실력이 쟁쟁한 기사들 역시 혀를 찰 정도였다.
더욱 놀라운 것은 불청객이 모든 공격을 다 막아내고 있다는 점이었다.
하나, 샤르트와 크레멘 준남작 역시 이게 전부가 아니었다.
협공이 손발이 맞아떨어지자 둘은 조금 더 자유롭게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는데 그런 모습이 마치 춤을 추는 것처럼 비춰졌다.
점점 수세에 몰리는 것 같았던 불청객은 몸을 크게 회전시키며 검을 휘둘러 두 사람의 검을 차례로 튕겨 냈다.
그 힘이 엄청난 것이라 샤르트는 세 걸음을, 크레멘은 두 걸음을 물러섰다.
돌연 불청객의 입에서 커다란 웃음소리가 터졌다.
“흐하하하!”
뚝 웃음을 그치고 불청객은 느닷없이 칭찬을 늘어놓았다.
“여태 사냥해온 녀석들 중 제일 낫군.”
그 뒷말은 협박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지금부터는 너희들 역시 죽음을 각오해야 할 것이다.”
이때까지 오딘은 성의 뒤뜰에서 파르티잔과 장난질만 치고 있었다.
“그래, 이렇게 하면 불덩이가 나간다는 말이지?”
“예, 그렇습니다. 덧붙여서 시동어라는 게 있는데 이게 또 중요합니다. 지팡이를 내밀면서 ‘파이어볼!’ 하고 외치는 겁니다.”
오딘이 윗니를 드러내며 씩 웃었다.
“아, 네놈이 내 옷을 개념 없이 태워먹은 그 마법이구나.”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은 말에 파르티잔은 식은땀을 훔쳤다.
“그때는 죄송했습니다. 깊이 반성하고 있습니다.”
“아냐. 모르고 한 일인데, 뭐.”
“이해해주시니 감사합니다.”
“그런데 그때 무슨 생각으로 불덩이를 쏜 거야? 설마 죽일 생각으로 쏜 건 아니지?”
“그,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오딘이라는 이놈 앞에서는 간이고 쓸개고 다 빼놔야 했다. 항시 웃으면서 얘기하지만 수틀리면 악마로 돌변하는 인간이었다.
지금처럼 말이다.
긴장은 필수 요소였다.
하루하루 살아가는 게 마치 살얼음판을 걷는 기분이랄까.
‘인생이 꼬여도 이렇게 꼬일 수가……. 좋은 시절은 다 갔어. 내 팔자도 참 기구하지.’
파르티잔은 그렇게 속으로 탄식을 내뱉었다.
그러나 울어선 안 되었다.
요 며칠 전에도 신세를 한탄하며 울었다가 된통 얻어맞지 않았던가.
퍼엉.
아주 작은 폭음이었다. 파르티잔의 귀에는 들리지도 않을 정도의…….
문득 지팡이를 들고 표적을 바라보던 오딘이 지팡이를 내던지며 돌아섰다. 그리고 땅을 박차자 그의 몸이 화살처럼 쏘아져 나갔다.
먼지가 스며들었는지 파르티잔이 잠시 눈을 비볐다 떴을 때 그의 몸은 작은 점이 되어 있었다.
* * *
샤르트와 크레멘은 아연실색했다.
‘이럴 수가! 검이 닿지도 않았는데 피부가 찢기다니…….’
정말 그랬다.
그가 검을 휘두르는 것을 보고 사정거리 밖으로 피했는데 샤르트는 허벅지에 깊은 자상을, 크레멘은 뺨에 자상을 입었다.
‘조금 전 그것은 뭐란 말인가? 검에 장치라도 되어 있었을까?’
확실히 크레멘은 샤르트가 보지 못한 것을 목격하였다.
몸을 날려 피하는 상황에서 검을 통해 발출된 물체.
자신들은 그것에 당했다.
아주 살짝 피부에 스쳐 갔을 뿐인데 이런 꼴이 되었다. 거기에 더해 그 물체들이 지면으로 파고들었을 땐 폭발이 일었다.
의문을 감추지 못하고 크레멘이 물었다.
“그것은 무엇이었나?”
“날 쓰러뜨리면 가르쳐 주지.”
전투는 한층 격해졌다. 여러 차례 샤르트가 간발의 차이로 위험에서 벗어나고 크레멘 역시 수세에 몰린 상황이었다.
앞쪽에 있던 적의 모습이 사라져 당황하고 있을 때 불청객은 뒤에서 샤르트를 양단 낼 심산으로 커다란 검을 내리그었다.
몇 번 샤르트를 위기에서 구해주었지만 이번은 예외였다. 거리가 너무 떨어져 있어 차마 도와줄 형편이 못 되었다.
“피해!”
단지 그 소리만이 그에게 구원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 소리를 듣지 못했는지 샤르트는 미처 몸을 빼내질 못하였다.
크레멘의 뇌리에 샤르트 경이 죽게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였다. 어디선가 장력이 날아들어 불청객의 검에 부딪혔다.
펑!
검을 든 불청객의 팔이 한껏 틀어졌다.
덕분에 샤르트는 죽음을 면할 수 있었다.
불청객이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주변 사람들 역시 그의 시선을 쫓았다.
성안의 백성들은 황망히 허리를 조아렸으며 기사와 마법사들은 부복하며 소리쳤다.
“오딘 님을 뵈옵니다!”
꽤나 이색적인 광경이었다.
마치 절대자를 대하는 느낌이 들기까지 했기에 불청객은 난데없이 나타난 오딘을 직시하고 조롱하듯 입을 열었다.
“이렇게 높은 양반일 줄이야…….”
사실 오딘이 이곳에 다다른 것은 조금 전의 일이었다. 다만, 둘의 실력이 얼마나 늘었는지 구경도 할 겸 한쪽에 서서 구경을 하고 있던 차였다.
그러다 더 이상 저 녀석을 감당하기는 힘들 것이란 판단이 들었기에 몸을 드러낸 것이다.
오딘 역시 의외라는 투였다.
“검기 발출이라. 이 왕국에 이런 인간이 있을 줄은 몰랐군. 천라지망을 뚫고 들어온 것도 대견하고 말이야.”
피가 철철 흘러나오는 다리였음에도 불구하고 샤르트는 억지로 한쪽 무릎을 굽히며 아뢰었다.
“귀찮게 해드릴 생각은 없었습니다. 지금이라도 기회를 주신다면 저 불청객 녀석을 잡아 무릎을 꿇리겠습니다.”
“아서, 네 상대가 아니야. 괜히 비명횡사하고 싶지 않다면 그만두는 게 좋아.”
다른 이가 말했으면 충분히 기분 나빴을 말이었건만 오딘이 하는 말이기에 샤르트는 순순히 수긍하고 물러섰다.
오딘이 그렇다면 그런 것이다.
문득 오딘은 무리들을 죽 둘러보다가 누더기를 걸친 노인과 눈을 마주쳤다.
시선은 거두어졌지만 오딘의 의사는 노인의 뇌리에 정확하게 전달되었다. 일정 수준 이상의 고수들이나 사용하는 전음이었다.
전음이란 꼭 말을 통하지 않고도 생각만으로 대상에게 자신의 뜻을 전달하는 의사소통 방법이었다.
-어떤가? 노인. 끼어들 생각이 있는가?
노인은 흠칫 놀라는 기색이었다.
하나, 그도 보통 인물이 아니었던지 자신에게 말을 거는 대상이 오딘이라는 것을 알아채고는 거부의 뜻을 분명히 했다.
“아닐세.”
주변에서는 그런 노인이 누구와 얘기하나 의아해하는 눈치였다.
창피했던지 노인의 볼이 후끈 달아올랐다.
-아쉽군. 보기엔 이 녀석보다 당신이 더 흥미가 있을 것 같은데 말이야.
불평하는 오딘에게 곧 노인도 뇌리로 자신의 의사를 전달해왔다. 하지만 그가 쓰는 것은 전음이 아닌 일종의 통신 마법이었다.
[허허, 자네 참 사람을 난처하게 만드는군. 주위에서 나를 이상하게 보고 있질 않나. 그건 그렇고 자넨 왜 이 노인네가 흥미가 있다고 하는 것인가?]
-느낌이 그래. 여기 있는 사람들 중 당신이 가장 위험하다고 말이야.
[난 나쁜 사람이 아닐세. 믿어주게. 싸움구경 좀 할까 했더니 틀렸군. 어쨌건 우린 조만간 보게 될 걸세.]
불청객은 불청객대로 자신을 앞에 두고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고 있는 오딘에게 투정을 부렸다.
“언제까지 기다려 줘야 하는 거지?”
노인이 사라지자 오딘은 자세를 바르게 했다.
“아주 재미난 녀석이 들어왔군. 그것도 제 발로 말이야. 안 그래도 무료한 참이라 이것저것 취미를 갖고 달래고 있었거든.”
“네놈이 이글레스성을 단신으로 쳐들어가 휘저었다는 놈인가?”
“그런 적이 있었지.”
불청객의 입가에 싸늘한 미소가 번졌다.
“잘되었다. 최소한 헛걸음은 하질 않은 것 같으니. 그럼 시작할까?”
오딘은 해맑게 웃어 보였다.
수긍을 한다는 뜻이리라. 그러나 정작 웃음이 끝났을 때는 상대를 잡아먹을 것 같은 기기묘묘한 살기가 흘러나왔다.
불청객이 검을 들고 기세등등하게 다가서며 물었다.
“무기라도 들어야 하지 않겠나?”
“일단 실력을 견식해봐야겠군. 내게 무기를 들게 할 자격이 있는 놈인지.”
“칼춤이라도 추라는 것이냐?”
“실력이 미진하다면 그렇게라도 하여야겠지.”
툭툭 쏘아붙이는 오딘의 말에 불청객은 점점 약 오르는 얼굴이 되었다.
“입만 산 놈이 아니길 바란다.”
후웅!
거도가 힘차게 바람을 가르며 오딘에게 날아들었다.
여전히 뒷짐을 진 채 가볍게 옆으로 물러서며 오딘은 기사들을 향해 명했다.
“사람들을 물려라. 결코 보기 좋은 광경은 연출되지 않을 터이니.”
“명을 받들겠나이다!”
곧 멀쩡한 기사들이 모인 사람들을 돌려보내기 시작했다.
몰려들었던 인파가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동안에도 어쌔신은 맹공을 퍼부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의 몸은 고사하고 실오라기 하나 건드릴 수 없었다. 그의 검은 애꿎은 허공만을 가르는 꼴이 되었다.
‘뭐지? 이 녀석은? 마치 허상과 싸우는 느낌이 든다.’
경계심이 곤두섰다. 비록 전력을 다하지는 않았다고는 하나 결코 느리지 않은 속도로 공격을 감행했었다.
“이제 다 빠져나간 것 같군. 그럼 네놈의 실력에 대해 논해보기로 할까?”
어쌔신은 눈앞의 이방인이 방금 자신과 싸우던 자였는가 하는 착각이 들었다.
그렇다고 하기에는 너무 차가워 보였다.
서서히 퍼지는 살기가 온몸을 옥죄어오는 듯했다.
오딘이 성큼 다가섰다. 어쌔신도 검을 고쳐 쥐고 죽일 듯이 그를 노려보며 걸음을 내디디며 거리를 좁혀 갔다.
이윽고 두 사람 사이가 손을 뻗으면 닿을 위치까지 줄어들었다.
어쌔신은 코웃음을 쳤다.
“배짱 하나는 알아줘야겠군. 맨몸으로 이 거리까지 다가오다니.”
오딘은 싸늘하게 웃으며 가볍게 손바닥을 뻗었다.
그러자 어쌔신의 검도 무서운 속도로 파고들었다.
쩡!
검은 오딘의 몸에도 닿지 않고 밀려나버렸다.
지켜보는 기사들은 연유를 몰랐지만 어쌔신은 그 이유를 알고 있었다.
“손바닥에서 바람을 일으킨다?”
“장력이라고 하지.”
“이상한 재주를 부리는군. 아까 검을 쳐낸 것 역시 이것이었군그래.”
장력에 밀려 물러섰던 어쌔신의 품으로 오딘이 파고들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어쌔신은 자신의 신체에 대한 우월함이 있었다. 설마 맨손으로 해를 끼치기야 하겠느냐는 안일한 생각이 깃들었던 탓이다.
자신의 복부에 이방인의 손바닥이 와 닿았다가 떨어졌다.
배에 약간의 진동이 느껴졌지만 외상도 없고 아무렇지 않았기에 어쌔신은 크게 웃어버렸다.
“하하하, 저놈들보다 못하잖아. 이거 괜히 먼 길을 온 게 아닌가 모르겠… 크헉!”
말을 하다 말고 어쌔신은 무릎을 꿇으며 주저앉아버렸다. 그를 보며 오딘이 차갑게 비웃었다.
“멍청한 녀석. 되지도 않는 실력으로 본 좌를 찾아온 것이더냐?”
어쌔신은 검을 땅에 찍고 일어서며 입 안에 고인 피를 뱉어냈다.
“얕잡아보았던 게 실수였다. 인정하지. 혼자서 성을 휩쓸었다는 건 거짓이 아니로군. 지금부터 자비를 구할 생각은 말아라.”
그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조금 전보다 몸놀림은 훨씬 빨라졌으며 검을 휘두르는 속도 또한 매서워졌다.
그 증거로 검이 일으키는 풍압에 오딘의 옷자락과 머리카락은 물론이요, 다소 멀리 떨어진 기사들의 머리카락까지 휘날렸다.
근처에만 가도 갈기갈기 찢어질 것처럼 느껴졌다.
그런데도 오딘은 그를 향해 뚜벅뚜벅 걸어가는 게 아닌가.
지켜보던 기사들 대부분이 끔찍한 광경을 보게 될까 두려워 눈을 돌려 버렸다. 다만, 샤르트와 크레멘은 한 동작이라도 놓칠세라 눈을 떼지 못하였다.
이윽고 검과 오딘의 몸이 맞닿았다.
당연히 오딘의 몸이 찢어지리라고 예상했던 것과는 달리 여러 개의 검의 잔상만이 사라졌다. 오딘이 팔뚝으로 검 면을 막아 검로를 차단시켰기 때문이다.
그 자세로 오딘은 나지막이 어쌔신을 타일렀다.
“자, 다시 해봐라. 마나를 쏘든가. 그것은 네 자유다. 다만 이번이 마지막 기회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다시 그가 대여섯 걸음을 물러서주었는데도 어쌔신은 선뜻 용기가 나질 않았다. 이 인간은 자신의 상식을 뛰어넘는 존재였기 때문이다.
미적대는 모습이 오딘의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었다.
“어서!”
소리에 놀란 어쌔신이 힘을 다해 검에 기를 불어넣었다. 그리고 크게 검을 휘두르자 검끝에 뭉친 마나가 오딘을 향해 쏘아졌다.
그 순간 오딘 역시 소맷자락을 털었다.
그러자 무시무시한 바람이 검이 발출한 마나와 맞부딪쳤다.
일체의 폭음도 없었다.
오딘의 몸이 멀쩡한 것은 마나가 소멸되었음을 의미하는 것.
자신의 최대한의 공격 수법으로도 쓰러뜨릴 수 없다는 것을 깨닫자 어쌔신의 얼굴에는 패색이 짙게 드리워졌다.
“아직 한참이나 미숙하군, 쯔쯧. 그럼 약속대로 널 손봐줘야겠다. 본 좌를 찾은 이유도 물을 겸.”
오딘이 다가설수록 그 큰 덩치가 겁에 질려 한 걸음씩 뒤로 물러났다.
하나, 얼마 못 가 붙잡히고 말았다. 마지막 발악이라도 하려는 듯 어쌔신은 온 힘을 다해 검을 휘두르려 했다.
콰작!
“크악!”
정강이뼈가 으스러지는 소리였다. 아마도 그가 걷어찬 모양이었다.
더 이상 제 기능을 못하는 다리. 한쪽 다리로나마 서 있으려고 했지만 나머지 다리마저 같은 충격이 가해졌다.
비명을 지르며 어쌔신은 땅에 무릎을 꿇었다. 그럼에도 신음 소리는 그치질 않았다.
“끄으으으~”
오딘은 한 손으로 그의 목을 움켜쥐어 힘 하나 들이지 않고 가볍게 들어올렸다.
“말해보거라. 누가 널 보냈느냐?”
“마, 말할 수 없다.”
“그럼 고문을 시작해야겠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