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대암흑마진
과거 중원에 있던 시절, 흠집 내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마교를 악의 집단이라 일컬었어도 악진, 아니 오딘은 정통 무림인이었다.
본성이 착하다고만은 볼 수 없겠지만, 의와 협을 중시하고 어려운 처지에 놓여 있는 사람을 목격하면 외면하지 않는 면에서 그러했다.
무엇보다 저들이 불의와 대항해 싸운다는 면이 크게 작용했다.
약자임에도 거대한 세력과 맞서 싸우려는 의지가 오딘에게 조금의 감흥이나마 불러일으켰던 것이다.
또한 나름의 계산이 있었다…….
* * *
익숙한 통로였다.
오직 발데르 공작에게만 그러했다. 저곳은 그의 선친에게로 향하는 마법진이 그려진 방이었기 때문이다.
얼마 전 오딘은 이상한 요구를 해왔다.
‘기사들을 훈련시킬 자리를 알아보거라. 비교적 안전하고 인적이 드문 곳으로……. 될 수 있으면 넓을수록 좋다. 자연 그대로의 모습이면 좋겠군. 근방에 물이 있으면 더욱 좋으니라.’
연유는 알 수 없었지만 발데르는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몇 군데 떠오르는 곳이 있었지만 모든 조건을 충족시키기에는 에르데 숲만 한 곳이 없었다.
인근의 무덤 안에 계실 선친께서 시끄럽다고 나무라실지도 모르는 일이지만 나라를 위한 일에 사용될 것이라면 크게 원망하진 않으실 것 같았다.
마법진이 그려진 방에 다다르자 미리 대기하고 있던 마법사가 고개를 조아렸다.
“기다리고 계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감옥에 갇혀 있는 파르티잔이 아니라도 공작 휘하의 마법사는 20명에 달했다. 이는 왕을 제외하고 가장 많은 수의 마법사를 보유하고 있다는 것을 뜻했다.
반란에 가담하고자 하는 귀족들이 미리 낌새를 눈치 채고 기사와 마법사들을 포함해 주력 부대와 함께 이곳을 찾은 덕분이었다.
그 수라면 기사들, 운이 좋다면 병사들까지 공간 이동을 행할 수 있을 것이다.
발데르 공작과 보탄 남작, 그리고 그들의 오른팔과 다름없는 기사 2명이 마법진으로 올라섰을 때 마법사가 모든 준비를 끝마치고는 조심히 고개를 조아렸다.
“그럼 이동하겠습니다. 텔레포트!”
그들이 에르데 숲과 인접한 마법진에서 모습을 드러냈을 때 숲의 앞쪽으로 안개가 자욱한 것을 보면서 발데르는 인상부터 찌푸렸다.
‘이럴 리가 없을 텐데? 본래 이곳은 안개를 보기 힘든 지역이다. 천지가 변하지 않았거늘, 어째서 이렇게 바뀌었다는 말인가? 정신을 바짝 차려야겠다.’
곧 오딘이 안개를 헤치고 걸어 나왔다.
“아직 준비도 되지 않은 상태에서 그대들을 이리로 부른 것은 이 진에 대해 미리 숙지해둘 필요성이 있어서다.”
“지, 진이라면 전쟁 때 펼치는?”
“그렇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니 우선 따라오도록.”
오딘이 몸을 돌려 걷기 시작하자 그 뒤를 발데르와 보탄, 그리고 샤르트와 크레멘 준남작이 따랐다.
얼마 후 허름한 문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 높이가 매우 낮아 허리를 숙여야만 들어갈 수 있었다.
문을 열기 전에 오딘은 단단히 일러두었다.
“여기가 생문이다. 나가고 들어올 때는 반드시 이 문을 거쳐야 한다. 잘 기억해두어라.”
“알겠습니다.”
한동안은 길이 계속해서 좁아져 사람의 몸 하나가 겨우 빠져나갈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그러다 어느 순간 넓은 세계가 펼쳐졌다.
저마다 입을 크게 벌리며 놀라고 있었다.
사슴들이 뛰어노는가 하면 곰이나 호랑이가 어슬렁거리며 돌아다녔다. 잠시 후엔 언제 그랬냐는 듯 사위가 칠흑같이 어두워지는가 하면 공포심을 조장하는 유령들의 울음소리가 들리기도 했다.
“마음을 다스리기 위한 관문이다. 모든 감정을 떨쳐 버려라. 다 비우라는 얘기다.”
말을 마치며 오딘이 걷기 시작하자 네 사람은 시시각각 변해가는 주변의 경관에 눈을 떼지 못하면서도 행여 놓칠세라 바삐 쫓기 시작했다.
어느 순간 샤르트는 한 인영을 목격하며 목소리를 더듬었다.
“어, 어머니?”
몇 해 전 돌아가신 모친이었다. 그럼에도 그의 눈에는 너무 사실처럼 비춰졌기에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돌아가신 게 아니었던가?’
그리움을 잊지 못하고 샤르트는 그만 대열에서 이탈해 그녀를 따르고 말았다.
그러나 그녀는 아들의 목소리를 듣지 못하고 모습도 발견하지 못했는지 그냥 스쳐 지나갔다.
뒤늦게 샤르트가 정신을 차려 보았을 때 그는 커다란 돌산의 언덕에 있었다.
‘아차!’
자신의 주군과 발데르 공작, 그리고 크레멘 준남작은 저 멀리 점이 되어 멀어지고 있다. 거리를 좁히려 샤르트는 사력을 다해 뛰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일까?
아무리 달려도 점점 그들과의 거리는 터무니없이 멀어져만 갔다.
한껏 목청을 높여 소릴 질렀지만 그들은 잠시 돌아서서 시선을 한 번 주었을 뿐 별로 개의치 않고 앞으로 나아갔다.
다급해진 나머지 허둥대던 바람에 샤르트는 가파른 절벽에서 발이 미끄러져 꼬꾸라지고 있었다.
“사, 사람 살려!”
그의 육신은 무서운 속도로 땅으로 곤두박질쳤다.
‘이렇게 떨어져 모든 것이 끝나는구나! 주군, 큰 힘이 되어드리지 못하고 이렇게 어이없게 생을 마감하는 못난 놈을 용서해주옵소서.’
털썩!
이 높이에서 추락했다면 필시 죽었을 것이다. 그것이 샤르트가 몸을 일으키지 못하는 이유가 되었다.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는다는 게 서글펐던지 눈가에 가느다란 눈물이 맺혀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러다 느닷없이 귓전에 다정한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엄살 그만 부리고 일어나게.”
어디선가 많이 듣던 목소리였다. 샤르트는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그러자 주군이 환하게 웃고 있는 게 아닌가.
“제, 제가 죽은 것입니까? 그래서 헛것이 보이는 겁니까?”
“하하하!”
“하하하하!”
졸지에 웃음이 터졌다. 그라니트성의 기사단장인 크레멘 준남작 역시 공작 앞에서 크게 소리 내어 웃지는 못하고 억지로 웃음을 고르느라 힘든 모습이었다.
발데르 공작이 손을 들어 옆을 가리켰다.
“자넨 저기서 넘어졌다네.”
샤르트가 고개를 돌려보자 조금 커다란 돌부리가 땅 위로 솟아 있는 게 시야에 들어왔다.
‘그럴 리가……. 분명 험준한 돌산이었다. 그럼 내가 헛것이라도 봤다는 말인가?’
그러나 아무리 주위를 둘러봐도 산이라고는 코빼기도 비치질 않았다.
자신이 얼마나 바보같이 비춰졌을까?
창피함을 금치 못하여 샤르트의 얼굴은 홍당무처럼 붉게 달아올랐다.
그 후 걷고 또 걸었지만 한도 끝도 없었다.
계속 강행군으로 걸어서인지 발바닥에서 땀이 나는가 하면 숨까지 거칠어졌지만 오딘은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다른 이들은 뒤를 따라가는 것만도 벅찰 지경이었다.
반면에 오딘은 죽죽 미끄러져 나가는 게 흡사 발 없는 유령을 연상케 했다.
벌써 하루는 넘게 걸은 것 같았다. 샤르트는 물론 보탄 남작과 크레멘 준남작 역시 그를 쫓는 것을 버거워하고 있었다.
그 기색을 눈치 채고 따스한 빛이 들어오는 곳에서 오딘은 걸음을 멈췄다.
“허약 체질들이로군. 잠시 쉬기로 하지.”
발데르가 의구심을 감추지 못하고 물었다.
“대체 이곳은 어디입니까? 벌써 에르데 숲은 지난 것 같습니다.”
“백 걸음도 걷지 않았다.”
그 말에 무리들은 충격을 금치 못했다. 몸이 녹초가 되어가는데 백 걸음도 걷질 않았다니……. 기가 찰 노릇이었다.
오딘이 말을 이었다.
“여기까지는 극히 일부분이다. 이곳은 작은 세계와도 같다. 그런 느린 걸음걸이로 돌아다닌다면 일 년을 걸어도 모자랄 것이다. 그대들을 생각해 사문은 줄여 놨지만 절대로 사문으로 향해서는 안 된다.”
보탄 남작이 물었다.
“사문은 무엇이고 생문은 무엇입니까?”
“말 그대로 사문은 죽는 문이고 생문은 사는 문이다. 생문은 단 하나밖에 없으니 각별히 유의하도록. 피치 못해 사문으로 들어서 실종된 이가 있다면 당장 나에게 일러야 한다.”
대충 뜻을 알아들었는지 4명 모두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오는 도중 겪었던 일을 항시 상기해라. 마음이 강하지 못하면 잡생각이 늘게 마련이다. 사념을 떨쳐 버려야만 수련에 전념할 수 있다.”
“새겨듣고 명심하겠습니다.”
이들은 아직까지 이 진이 어떤 용도에 사용되는지를 몰랐다.
“힘에 부치는 자들은 여기까지다. 이곳에서 심법을 통해 내공을 쌓고 신체를 단련시킨다. 내공이 부족하다면 자연히 힘이 모자랄 터.”
“내공은 무엇입니까?”
“그대들 말로는 마나라고 하면 되겠지.”
여기 있는 사람들은 모두 마나를 느끼고 사용하는 경지에 이르렀기에 추가 설명은 필요하지 않았다.
오딘이 물었다.
“이 세계에는 내공을 따로 쌓는 비법이 있는가?”
다른 이들을 대신해 발데르가 입을 열었다.
“왕가에 내려오는 비법이 몇 가지 있습니다. 이것은 왕족에게만 허락되는 것이라 여태까지는 일반 귀족들에게조차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하오나 때가 때이니만큼 많은 이들에게 알려 줘야겠습니다.”
“시범을 보여 보도록.”
그러자 발데르는 주위를 둘러보며 망설이다가 뒤로 누웠다. 그리고 머리를 쳐들고 손바닥이 하늘을 보이게 한 후 발목을 몸쪽으로 끌어당겼다. 그 상태에서 발데르는 입을 열었다.
“눈을 지그시 감고 심신을 편하게 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일체의 사념을 가져서는 안 되는데, 그렇다고 잠이 들어서도 안 되며 자연을 느껴야 합니다. 숨은 입으로 마시고 코로 내뱉으며 느껴지는 자연의 기운을 단전으로 이동시킵니다. 이렇게 해서…….”
사실 대륙에는 조금 더 나은 마나 심법이 있었지만 대부분이 무지한 상황이었다. 그저 살아가며 운이 좋게 마나를 느끼는 이들이 그 기운을 끌어 모으려 했던 게 대다수였다. 워낙에 마나가 충만해 있어 이들에게는 따로 마나 심법이 중요치 않다는 것이 정설이었다. 가까운 예로 아레인 왕국만 하여도 그랬다.
여기까지 보고 듣던 오딘은 웃음이 나오는 것을 가까스로 참아 넘겼다.
“나쁘진 않군. 쉬운 말로 하지. 두 손과 발의 장심, 그리고 정수리가 하늘을 향해야 한다. 하지만 그 자세는 너무 불편해 보이는군.”
오딘은 가부좌를 틀고 앉아 허리를 곧게 펴고 말을 이었다.
“이 자세가 좀 더 편할 것이야. 그리고 마나를 모으기도 쉬울 것이고.”
지금 시범을 보이는 자세는 불교에서 유래한 자세였다. 달마 대사가 소림사로 건너오며 중원에 널리 알려진 자세이기도 했다.
본디 가부좌라는 게 편한 자세가 아니다. 주로 의자에만 앉아 생활하던 이곳 사람들은 따라 하기 힘든 것이다. 그러나 가부좌는 크게 어려운 자세도 아니었고 어디로 보아도 발데르의 자세보다는 나았다.
네 사람이 따라 하기 시작했지만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는 수 없이 오딘은 그들의 근육을 가볍게 풀어주며 자세를 교정해주어야 했다.
잠시 명상에 잠기던 발데르는 화색이 만연한 얼굴로 말했다.
“훨씬 낫군요.”
“그대가 이것으로 새로운 마나 심법을 창안하는 것도 좋겠지. 운기를 아침에 행하는 이유는 아침의 기운이 가장 맑고 깨끗하기 때문이다. 이곳은 항시 아침과도 같아 운기조식을 하기에는 더없이 좋은 장소이다. 더불어 이 세상은 내가 살던 곳과 비교해보았을 때 이해하기 힘들 정도로 마나가 흘러넘친다. 한 달만 제대로 수련을 하여도 큰 성과를 거둘 수 있을 거야.”
오딘은 덧붙여 말했다.
“단 중요한 것을 빼놓아서는 안 된다. 절대 서두르면 아니 될 터. 이곳의 마나는 충만하다 못해 넘칠 지경이어서 수행 중 몸속의 화기를 다스리지 못한다면 주화입마(走火入魔)에 빠지게 될 가능성이 크다.”
이번엔 샤르트가 물었다.
“그건 무슨 말씀이신지?”
“죽거나 광인이 된다는 얘기다. 살아도 적과 아군조차 분간하지 못하고 폭주 상태에 이르게 될 가능성이 농후하지. 초기에 간파할 수 있다면 바로잡겠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가 많다. 제일 크게 범하는 실수 중 하나가 복수를 꿈꾸며 운기를 할 때이다. 자네들 같은 경우는 특히 주의해야겠지. 이것은 다른 수하들을 데려올 때마다 반복해서 뇌리에 심어주어야 한다. 그럼 휴식은 이만 하기로 하지.”
아군과 적군을 구별하지 못한다면 어찌 힘이 될 수 있으랴. 모두 그 말을 되새기고 또 되새겼다.
다음 장소에 다다르기 전 샤르트의 탄성이 터졌다.
“드, 드래곤!”
윗분들 앞에서 예의가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너무 놀란 나머지 그렇게 소리를 지르는 무례를 범하고 말았다.
아닌 게 아니라 머리 위로 어중간한 성 크기만 한 새가 거대한 날개를 펴고 비행하고 있질 않은가.
다른 자들도 놀람이 적질 않았다. 그러던 중 오딘이 물었다.
“드래곤이란 뭐지?”
“대륙 최강의 생명체입니다. 직접 보지는 못했으니 외형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드리기는 어렵군요. 다만 고대 사서에나 그들의 모습이 설명되어 있습니다. 거기에는 드래곤은 네 개의 다리를 가지고 있으며 긴 꼬리와 온몸은 강철 같은 비늘로 덮여 있다고 기술되고 있습니다. 또한 마법에도 능통하여 폴리모프를 통해 몬스터나 인간, 엘프나 드워프 등으로도 변화가 가능하다고 하더군요. 일평생을 드래곤이 서식하는 근처에서 살던 사람들도 목격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고 합니다. 개체수가 워낙 적고 목격했다 하더라도 성격이 워낙 포악하여 무사히 돌아올 가능성은 희박하니까요.”
보탄 남작의 말이었다.
문득 오딘은 어떤 녀석인지 낯짝이나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도 그들의 생각을 부정해주었다.
“그렇게 보기 힘든 것이라면 아닐 가능성이 크다. 진 안에서 관찰할 땐 모든 것이 다르게 비춰진다. 저 새는 와이번일 가능성이 높겠지.”
오딘은 이곳에 도착해 정령을 만나기 전 집채만 한 새를 보았던 적이 있다. 사람들에게 물어본 결과 와이번일 가능성이 가장 높다고 했으니 알게 된 것이다.
다음의 장소에 다다랐을 때 발데르 공작을 위시한 사람들은 또 한 번 놀라야만 했다. 사람의 몸체만 한 날카로운 죽창들이 사방으로 날아다니고 있질 않은가.
보탄 남작과 발데르 공작이 차례로 물어왔다.
“이, 이건 맞으면 죽지 않겠습니까?”
“혹시 지금까지 본 것처럼 이것도 환영입니까?”
“바로 보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이것은 자그마한 나뭇가지다. 상처는 크게 나지 않을 것이지만 실제 창에 찔린 정도의 아픔을 느끼게 될 것이다. 아프지 않다면 사력을 다해 하지 않을 테니. 앞으로 나아갈수록 더 많은 창이 있으며 나는 속도 또한 빨라지게 해놓았다.”
저마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이곳은 반사 신경과 순발력을 늘리기 위한 곳이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깨달았다.
장소를 옮겨 갈 때마다 놀라움이 더해졌다.
가장 두려운 곳은 깎아지른 듯 가파른 절벽 위였다. 주변엔 사람의 몸통만큼이나 얇은 돌 봉우리 수십, 수백 개가 띄엄띄엄 자리했다.
“대련 장소다. 검 역시 옆에 준비되어 있다. 저 봉우리들은 폭이 매우 좁아 발만 헛디뎌도 떨어지게 되어 있다. 마찬가지로 여기서 떨어진다면 극심한 통증을 느끼게 될 것이다. 이곳은 균형 감각을 익히고 공포를 이겨 내기 위한 관문이다.”
여태 지나친 공간들을 생각해볼 때 하나하나 필요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한편으로 발데르는 내심 걱정이 되었다.
‘벌써 일주일은 흘렀겠군. 성문을 굳게 걸어 잠그라고 하였지만 걱정이군.’
다시 생문을 통해 빠져나왔을 때 발데르는 기다리고 있던 마법사와 마주쳤다.
자세한 시간을 알지 못해 마법사의 귓전에 대고 속삭이듯 물었다.
“오랜 시간 동안 성을 비우고 말았군. 며칠이나 흘렀는가? 성에서 전갈은 없었는가?”
그 물음에 마법사도 당황한 기색이었다.
“공작 전하께서 안으로 들어가신 후 반나절도 흐르지 않았습니다.”
“그, 그럴 리가!”
너무도 놀라버려 그 자리에 석상처럼 굳어 있는 발데르에게 오딘이 앞으로 나서며 의문을 해소해주기 시작했다. 평소처럼 낮은 어조의 목소리였지만 내공이 실려 모두가 다 들을 수 있었다.
“내가 펼친 것은 절대암흑마진(絶對暗黑魔陣) 중 일월진(日月陣)이다. 다른 곳에서의 하루가 이곳에서의 한 달과 같다.”
진으로 들어섰던 이들은 하나같이 깜짝 놀랐다.
그러다가 보탄 남작이 우스갯소리로 물었다.
“그럼 하루를 일 년처럼 가게 할 수도 있습니까?”
“가능한 일이다. 일해진도 있지만 시간이 너무 걸리는 일이니……. 그리고 단시간을 잤어도 길게 꿈을 꾼 적이 있을 것이다. 진은 이처럼 머릿속을 자극해 무한한 힘을 발휘한다. 본래의 절대암흑마진은 살상용으로 쓰이지. 그러나 수련에 사용되는 곳이니 위험 요소는 극히 배재시켰다. 이것을 받아라.”
각자 오딘에게서 받은 무엇인가를 살피기 시작했다.
“이것은 성에 있던?”
발데르의 추측대로 이것은 언젠가 오딘이 부탁한 것들을 상인들에게 부탁하여 장만해와 만든 것들이었다.
“그렇다. 벽곡단이라 한다. 물과 함께 한 끼니에 하나씩 천천히 꼭꼭 씹어 먹어야 한다. 제때에 꾸준히 복용한다면 무공의 진전에 상당한 도움이 있을 것이다.”
한 끼니에 하나씩이라면 보유한 양으로 미루어볼 때 자신들은 물론이요, 수련에 임할 기사들 것까지 충분한 양이 될 것이다.
솔직한 심정으로 발데르는 여태까지는 반신반의했었다. 힘을 실어주는 것도 아니요, 길만 알려 준다고 했었다.
정말 이 정도로 크게 도움을 받을 줄은 몰랐었다.
이 진에서 훈련만 잘하게 된다면 복수도 어쩌면 꿈이 아닐 것이라 생각되었다.
고마움이 너무 커서 보탄 남작과 발데르 공작의 눈에 눈물이 다 고일 지경이었다.
그들은 더는 자신들이 가장 듬직한 아군을 만나게 되었음을 의심치 않았다. 존경심이 마음속에서 우러나는 순간이었다.
‘도대체 저 안에 뭐가 있기에……?’
하나같은 생각이었다.
일월진의 생문으로 나오는 이들 중 멀쩡해 보이는 이가 없었다. 큰 상처는 없었지만 세상 시름 다 겪은 사람처럼 얼굴이 샛노래져 사색이 되어 있질 않은가.
개중엔 명성이 자자한 기사들 또한 드문드문 섞여 나왔다.
이러니 차례를 기다리는 기사들은 덜컥 겁부터 집어먹게 마련이었다. 얼마나 수련을 혹독하게 하면 저리될 수 있을까.
“다음 줄 앞으로.”
훈련 교관인 샤르트의 목소리에 차례가 된 기사들은 엉덩이가 무거워지고 입 안이 바싹바싹 타들어가는 모양이었다.
“서두르시오. 시간이 금과 같다는 것을 왜 모르시오!”
굼벵이 같은 그들의 동작이 못마땅해 샤르트는 호통을 쳤다. 그를 몇몇 기사는 못마땅하게 여겼던지 실쭉이 째려보았다.
그때 안쪽에서 크레멘 준남작이 걸어 나왔다.
“자네 차례가 되었군. 교대 시간이네.”
어딘지 모르게 못내 아쉬워하는 목소리였다.
그의 기분을 십분 헤아리는지 샤르트는 위로하듯 말했다.
“그러고 보면 준남작님과 저는 참 운이 없는 모양입니다. 이러다가 휘하의 기사들이 치고 올라오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저희들이 가장 큰 힘이 되어드려야 할 텐데 말입니다.”
크레멘도 샤르트의 어깨에 손을 올려놓으며 동질감을 표했다.
“어쩌겠나. 윗분들의 결정인 것을.”
그들의 대화에 한 사람이 끼어들었다.
“보탄 남작과 이미 얘기를 마쳐 놓았네. 자네들 같은 옷을 입은 자들이 오면 순번을 정해 교대하기로 하게.”
발데르 공작이었다. 그는 종종 시간을 쪼개어 이곳을 찾았다. 덕분에 매우 건강해 보였으며 전보다 더 젊어진 것 같았다.
듣던 중 반가운 소리에 크레멘과 샤르트는 기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성엔 나 혼자 갈 테니, 크레멘 준남작은 더 머물러도 좋네. 부디 우국충정이 어린 그 마음 변치 마시게들.”
공작의 말에 두 사람은 황송해하며 고개를 조아렸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마법진으로 걸음을 옮기며 발데르 공작은 아쉬운 듯 입맛을 다셨다.
‘아쉽군. 일만 아니라면 여기서 수련에 매진하면 좋으련만.’
그 역시 검술에 대한 미련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 * *
발데르 공작의 개인 서재와는 별도로 그라니트성에는 그리 크지 않은 규모의 도서관이 하나 자리하고 있었다.
왕국에 있는 도서관에 비할 바는 못 되었지만 발데르가 어릴 적부터 책을 좋아하는 것을 알고는 그의 선친이 많은 책들을 들여왔었다.
도서관의 한쪽에 마련된 책상 앞에 앉아 오딘은 책읽기에 골몰해 있었다.
그가 보는 책들은 주로 마법에 관련된 것들이었는데 이것들을 보느라 밤샘도 마다하지 않았다.
이 세상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은 관계로 아직 글을 깨우치지 못해 옆의 사서가 읽어주면 모르는 단어들을 종이에 적어두며 참고하여 보곤 했다.
쉴 새 없이 입을 놀리는 통에 사서는 피곤할 만도 하건만 싫은 내색 한 번 하지 않았다.
감히 누구의 손님이라고 짜증을 부리겠는가.
엄밀히 말하자면 공작 전하의 상전이었다. 분명 공작 전하가 이곳의 사서들을 따로 불러내어 그리 말씀을 하셨으니까.
마법에 관해서는 이해가 어려운 내용들이 많았다.
‘호문쿨로스, 호문쿨로스라……. 중단전을 일컫는 것인가?’
여기까지 보던 오딘은 책을 덮고 일어섰다.
‘아직까지 있었군.’
아까 전부터 느껴졌던 인기척이었다. 또한 이 성에 온 이후부터 종종 느꼈던 인기척이기도 했다.
오딘은 그 인기척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길게 따 내린 금발 머리의 귀여운 소녀라는 걸.
발길을 돌려 도서관을 나서려고 하자 소녀도 허둥지둥 멀어져 갔다.
여태까진 모르쇠로 일관해왔다. 하지만 오늘은 장난이 치고 싶었던지 오딘은 멀어져 가는 그녀의 뒤를 밟기 시작했다.
‘간 걸까?’
소녀는 기둥 뒤에 숨어 물끄러미 고개를 내밀었다.
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오늘도 이렇게 하루가 가는구나.’
작고 앙증맞은 입술 사이로 까닭 모를 한숨이 배어나왔다.
이 소녀의 정체는 얼마 전까지 왕국 내의 모든 사람들이 공주님이라 떠받들던 엘레느였다. 그녀는 마음의 상처가 채 아물기도 전에 원인 모를 감정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그 감정은 두 언니의 장례를 치르고 난 후에 더 부풀어 오르더니 급기야 근래 들어서는 그만 보고 있으면 모든 과거를 까맣게 잊어버리게 될 정도가 되어버렸다.
이래서는 안 된다고 몇 번이나 되뇌었지만 소용없는 짓이었다. 오히려 그렇게 발버둥을 치면 칠수록 더 깊은 수렁으로 빠져 들었다.
생각이 깊으면 깊을수록 자괴감만 따랐다.
‘어딜 봐도 난 꼬맹이인걸. 거기에다가 이제는 벙어리가 되어버렸잖아.’
그렇게 한숨을 쉬며 돌아서는데 뭔가가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아아, 아아아…….’
정신이 혼미해지고 있었다. 눈앞에 있는 대상은 바로 그 사람, 오딘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다가서자마자 대뜸 자신의 가슴에 손을 올려놓았다.
엘레느의 얼굴은 화끈 달아올랐다. 걷잡을 수 없는 충격에 휩싸여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오딘은 자신이 오해를 받고 있다는 것을 알고 코웃음을 쳤다. 그러나 해명을 하지 않았다. 애초부터 이 맹랑한 아가씨를 놀래주려는 목적이었으니까.
사념이 있을 턱이 없었다. 그는 자신의 기를 조금 나누어주며 동시에 막힌 혈도를 뚫어주는 것이지, 아이의 신체를 더듬거리는 목적이 아니었다.
오딘 정도라면 눈을 감고도 혈을 짚을 순 있지만 상대는 신체가 극도로 예민해져 있으며 허약한 상황이다. 섣불리 손을 댔다가는 역효과만 일으킬 것이므로 이렇게 신중을 기한 것이다.
엄밀히 따지면 이것은 단순히 체내에 기를 불어넣어주는 격체전공(隔體傳功)과는 달랐다.
주안신마공(朱顔神魔功)이라 보아야 했다.
주안신마공.
이것을 익히면 피부색이 백옥같이 희어지며 피부가 매끄럽게 변한다는 얘기가 있다. 따라서 중원의 여고수들은 미인계를 익힐 때 써먹으려 무리를 해서까지 배우려고 했지만 쉽지 않은 일이었다.
왜냐면 이것은 혼자서 익히는 것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즉, 타인의 도움이 필요했는데 마교에서도 장로급 이상의 심후한 내공을 가진 자만이 가능한 일이었다. 애초에 이것을 창시한 작자가 조금 음흉한 자였으므로 혈도를 푸는 방법 역시 이 방법밖에는 없었다.
곧 엘레느의 몸은 불덩이처럼 뜨거워졌다. 결국 더 견디지 못한 육신이 힘을 잃고 축 늘어져 버렸다.
오딘은 그녀를 들쳐 메고 복도를 따라 그녀의 숙소로 향했다.
그러던 중 발데르의 원망 서린 눈과 마주쳤다.
이 순간만큼은 발데르는 오딘을 탓하고 있었다. 그가 무슨 행동을 했던 간에, 또 하건 간에 다 눈감아줄 용의가 있었다.
하지만 엘레느 공주만은 예외였다.
한 번도 그에 대한 실망을 하지 않은 까닭에 실망은 배가 되었다.
무심코 옆을 지나치는 오딘을 향해 발데르는 낮게 중얼거렸다.
“왜 그러셨는지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철저하게 오해를 받고 있는 판국이었음에도 오딘은 마치 이 상황을 즐기기라도 하듯 사악하게 윗니를 드러내며 이죽거렸다.
“언약을 잊었더냐? 그댈 포함한 이 성의 모든 것은 내 것이라고. 마찬가지로 이 아가씨도 내 것일 터.”
오딘이 사라진 후에도 발데르는 허탈한 표정으로 먼 하늘만 주시할 뿐이었다.
* * *
따그닥, 따닥따닥, 따다닥.
각자 다른 주인을 태운 말 2마리가 사이좋게 머리를 들이밀었다가 내빼기를 반복하며 앞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그 뒤로도 많은 군마들과 병사들이 선두에 있는 2마리의 말의 뒤꽁무니를 쫓았다.
앞장서 가는 두 사람 중 한 사람은 얼마 전 공작을 생포하라는 명을 받았다가 허탕만 쳤던 조르바 자작이었고, 다른 한 사람은 현 국왕의 총애를 받고 있는 루시아노 백작이었다.
루시아노 백작은 외형상으로 나이는 조금 되어 보였지만 군대의 운용이나 통솔 면에서는 누구 못지않게 뛰어났다.
따지고 보면 하인리히 국왕이 집권한 이래 반란자들의 숙청에 가장 큰 공헌을 한 것도 이 루시아노 백작이었다.
평소 그 능력을 높이 산 하인리히 국왕은 이번 역시도 그를 앞세워 그라니트성으로의 진격을 명했다.
“국왕 폐하께서 자작을 보내셨지만 이 일은 나 혼자 해도 될 일이었소.”
정말 안 와도 될 일이었다. 그러나 대전 안에서 조르바 자작은 여러 귀족들이 보는 앞에서 자신 역시 그 길에 동참하게 해달라고 왕에게 직접 간청을 올렸다. 여태 공을 못 세워 안달하던 조르바였으니 그의 입장에서 보자면 그럴 만도 했다.
지금 하인리히에게 제일 문제가 되는 것은 바로 발데르 폰 그라니트 공작이었다.
대전 안에 모인 귀족들 중에서도 발데르의 존재를 찜찜해하는 귀족들이 더러 있었으니 말이다.
그저 양심의 가책 같은 것이었다.
자고로 사람의 마음이란 갈대와 같아 흔들리기가 쉽다는 것을 잘 알고 있던 터였다.
이미 위협이 될 요소는 많이 줄어든 상태여서 꼭 제지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해 하인리히는 자작의 의견을 따라주었다.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는 생각도 작용했다. 한 명이라도 더 가면 일이 더 수월해질 것이란 계산이 앞섰던 것이다.
허락이 떨어지자 조르바는 뛸 듯이 기뻐 황송하다며 연거푸 머리를 조아렸다.
그러니 루시아노 백작의 입장에서 보자면 못마땅한 것이다. 혼자 독차지해도 될 공을 그가 조금 가로채가려고 하니 말이다.
괜히 다툼을 벌여 봐야 좋을 것은 없기에 조르바 자작은 그를 달래기로 했다.
“백작께서 제 처지를 생각해서 조금 양해해주시지요. 근래 들어서 좋은 일이라고는 하나도 없었습니다. 또 국왕께서는 이미 루시아노 백작을 높이 쳐주고 있지 않습니까. 공이 너무 과하면 다른 귀족들에게 시기와 질투를 받으실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따지고 보면 틀린 말은 아니었다. 작위도 중요하지만 타인들과의 유대 또한 중요했다. 기반이 없는데 어찌 권세나 영화를 누리겠는가. 괜찮은 작위를 부여받더라도 주위의 눈치나 보고 살기는 싫었다.
그래서인지 루시아노의 태도는 한결 누그러졌다.
“틀린 말은 아니오. 내 너무 앞만 보고 달려왔소이다. 그러다 보니 주위에서 종종 시샘하는 눈길들을 느꼈었지.”
속으로 조르바는 코웃음을 쳤다.
‘이자가 귀가 얇다더니 정말이로구나. 실력이 뛰어나면 뭐 하나. 사리분별도 못하는 덜떨어진 인간아. 쯔쯔쯧.’
문득 루시아노 백작은 뒤쪽을 쳐다보고는 걱정된다는 듯이 물었다.
“그나저나 너무 무리한 게 아니요? 내 자작의 병력 규모를 대충 알고 있소만, 이 정도의 병력을 끌고 오셨다면 대체 성은 누가 지키는 것이오?”
지적은 정확했다. 만약 인접한 영지에서 전쟁이라도 벌여 온다면 이글레스성은 속수무책으로 당하게 될 것이었다.
바꿔 말하면 조르바 자작은 그만큼이나 이 일에 사활을 걸고 있단 뜻이었다.
아픈 데를 찔러오자 조르바의 얼굴이 묘하게 구겨졌다.
“백작께서 상관할 일이 아니지 않습니까!”
저도 모르게 성을 내어버린 그를 두고 루시아노 역시 툴툴거렸다.
“그렇다고 소리 지를 것까지는 없잖소.”
어처구니없게도 다시 둘의 관계는 원점으로 되돌아가버렸다.
둘은 침묵을 유지한 채 멀리 있을 발데르 공작의 그라니트성에 시선과 마음을 옮겨 가고 있었다.
* * *
후원을 거닐던 오딘은 자신을 의식하는 시선을 느꼈다. 그리고 그 대상이 엘레느라는 꼬맹이라는 것을 곁눈질로 확인할 수 있었다.
그녀는 난간 사이로 빠끔히 눈만 내밀어 자신을 계속 훔쳐보고 있었던 것이다.
‘정말 못 말릴 아가씨로군.’
참으로 이상한 녀석이었다. 그렇게 당했으면 응당 멀리하여야 정상일 텐데 뭐 하려고 계속 관심을 가진단 말인가.
처음엔 그저 목숨을 구해준 것이 고마워 그러려니 했었다. 그러나 그녀의 저런 행동을 목격하면 목격할수록 확고해져 갔다. 그녀가 품은 감정은 남녀 간에 오고 가는 애정이라는 것임을…….
한편으로는 측은한 생각이 들었다. 사랑이란 감정은 자기가 떨친다고 해서 쉽사리 떨칠 수 있는 게 아닌 거의 불가항력에 가까운 것이므로.
어쩌다가 자신에게 흠모하는 감정을 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래서는 안 되었다.
당연히 아무런 감정이 없었고, 혹 있다 하더라도 양심이 허락지 않을 것은 불 보듯 뻔한 일.
자신이 환골탈태를 거쳐 젊어졌다고는 하지만 이 모습으로도 그녀와의 나이 차는 극복하기 어렵다.
오딘은 모종의 결단을 내려야만 했다. 저 아가씨를 떼어놓을 극단의 방책을 시행할 작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