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력자
다란강 하류.
한적하던 숲 속에 풀을 밟는 소리가 들리고 시간이 지날수록 점차 커지더니 급기야는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까지 나며 난데없는 소란이 일었다.
곧 누군가의 고함 소리가 터졌다.
“반역자들이니 모두 잡아 주살하라!”
피투성이의 남자 둘이 먼저 숲을 벗어나 강기슭에 이르렀다.
이 중 젊은 남자는 갓난아기를 업고 있었고, 중년인은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의식을 잃은 한 여인을 업고 있었다.
곧 검을 든 10여 명의 사람들이 잇따라 모습을 드러냈다.
쫓기는 자들은 무기조차 빼앗겼는지 달아나기에 바빴다.
“거기 서랏!”
죽이겠다는 엄포를 듣고 걸음을 멈출 자가 몇이나 되랴.
그들은 살기 위해 도주해야만 했다.
피와 땀이 얼룩져 눈가에 스며들고 숨은 갈수록 가빠졌기에 두 사람의 표정엔 절망감만 커져 갔다.
그 와중에 중년의 남자는 앞을 향해 크게 소리쳤다.
“도망치시오!”
시선이 향한 곳에 한 남자가 있었는데, 그는 이 소란에도 태평하게 물속에 낚싯대를 드리우고 있었다.
경고까지 해주었음에도 그는 일어날 기미조차 보이질 않았다.
자신들과는 다른 모습. 바로 검은 머리카락의 젊은 이방인이었다.
하지만 그가 누구이건 간에 중요한 건 자신들 때문에 피해를 입게 될지도 모른다는 사실이었다.
“이보시오! 듣질 못하시오? 여기 있다가는 봉변을 당할 것이오.”
부주의했기 때문일까? 중년인은 그를 지나치다 돌부리에 걸려 엎어지고 말았다.
앞서 갓난아이를 업고 도망치던 남자는 깜짝 놀라 뒤로 돌아서 다급히 중년인을 부축하여 일으켜 세웠다.
“주군, 어서 이곳을 벗어나야 합니다. 그자를 신경 쓸 겨를이 없습니다.”
말 한마디가 부른 화근이었다.
추격하는 사람들과의 거리는 급속도로 좁혀졌다.
낚싯대를 드리운 이방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둘 사이에 실랑이가 벌어졌다.
“보탄 남작님, 여기서 조용히 끝을 내시지요.”
쫓던 무리 중 한 명이 중년인에게 하는 말이었다.
자신의 주군이 조롱당하는 것을 참지 못하고 젊은 남자가 목청을 높여 성을 냈다.
“닥쳐라, 이놈들! 하늘이 두렵지도 않느냐?”
그가 이렇게 흥분을 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아레인 왕국은 역도들에 의해 전복하고 말았다.
나라를 진심으로 생각하던 충신들은 부당한 권력에 대항하고자 곳곳에서 들고일어났으나 무리한 일이었다. 충신보다는 간신들이 몇 배는 많았기 때문이다.
자연 반역을 일으켜 왕위를 찬탈한 하인리히를 따르지 않는 이들에게는 무자비한 숙청만이 따랐다.
우습게도 하인리히는 이제는 죽고 없을 왕이 가장 총애하던 자였다. 그의 감언이설에 속아 넘어가 왕이 다른 신하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못한 것이 가장 큰 원인이었다.
아레인 왕국의 귀족이었던 보탄은 비통한 심정을 금치 못했다. 죽는다는 두려움보다 진정 왕국을 생각했던 충성심에 대한 억울함이 앞서 가슴이 꽉 막힐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때로 돌아간다고 하더라도 같은 결정을 내렸을 것이다.
그는 긴 한숨을 짓고는 고개를 돌려 아이를 업고 있는 젊은 남자를 향해 모든 것을 체념한 듯 말했다.
“샤르트 경, 이만 가게. 나와 부인은 이곳에서 생을 마감하겠네. 내 얼마의 시간이라도 더 끌어줄 순 있을 것 같네. 자네라도 살아야 하지 않겠나. 부디 내 딸아이라도 잘 보살펴 주게.”
격한 감정을 억누르지 못해 샤르트는 오열을 터뜨리며 애걸했다.
“그럴 순 없습니다, 주군. 제발 그 말씀만은…….”
그런 두 사람을 비웃는 소리가 들렸다. 제법 근사한 경장갑과 잘 벼려진 검을 들고 있던 추격대의 통솔을 맡은 자의 입에서 나온 소리였다.
“감상은 이만 끝내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크크큭.”
돌연 그는 웃음을 멈추고 옆에 있던 병사에게 시선을 주었다.
그러자 시선을 받은 병사가 보탄을 향해 검을 찔러갔다.
보탄은 몸을 슬쩍 비틀어 검을 피했다.
당장의 위기는 면했지만 절로 인상이 찌푸려졌다. 오는 도중 저들의 검에 베이고 찢긴 상처들이 아려 왔기 때문이다.
헛손질을 한 병사는 분을 감추지 못하고 더욱 매섭게 검을 찔러왔으며 보탄은 겨우겨우 위기를 모면하고 있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더 큰 절망이 엄습해왔다.
‘이대로라면 얼마 버티질 못할 게야. 나와 부인은 살 만큼 살았다지만 아직 젊은 샤르트 경과 갓 태어난 딸아이에게는 미안하구나.’
생각이 길었던 탓일까. 병사의 검은 곧장 보탄의 복부를 향해 날아들었다.
더 이상 피할 힘도 없었다. 이 순간에도 간신배들만 넘쳐나는 부패한 왕국에 맞설 힘이 없다는 것이 분하고 원통했다.
슬픔은 한을 담고 한 줄기 눈물로 변해 볼을 타고 길게 흘러내렸다.
그는 곧 다가올 죽음을 준비하며 질끈 눈을 감았다.
생을 포기하며 죽음을 의식했지만 일체의 고통도 없었다.
검이 살 속에 박히는 소리도 나지 않았다.
도리어 악에 받친 병사의 쌍소리만 들렸다.
“당장 검을 놓지 않으면 네 녀석의 목도 베어버릴 테다!”
보탄이 눈을 떠보자 직접 보면서도 믿기 힘든 해괴한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낚시꾼의 낚싯대에 병사의 검끝이 올려져 있었는데, 병사가 이마에 땀을 뻘뻘 흘려 가며 아무리 용을 써도 검이 빠지질 않는 듯했다.
이를 이상하게 여긴 추격대장은 다른 병사 둘에게 눈짓을 보냈다. 빠르다 할 순 없지만 병사들의 검은 각기 다른 방향에서 목석처럼 굳어 있는 이방인에게 곧장 날아들었다.
하지만 결과는 좀 전과 같았다. 이방인의 몸이 잠시 흐려지는가 싶더니 둘의 검은 앞서 당한 병사의 검과 마찬가지로 낚싯대에 걸려 좀체 움직이질 않았다.
검을 회수하려던 세 병사의 얼굴은 점점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한 번은 우연일 수 있었다. 하지만 두 번은 아니었다. 추격대장은 사색이 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예사 놈이 아니다.’
나머지 병사와 힘을 합해 이자를 제압한다고 해도 희생이 따를지 몰랐기에 그는 목청을 가다듬고 이방인에게 타이르듯 말했다.
“이보시오, 누구신지는 모르겠지만 귀하와 상관없는 일이지 않소. 나와 내 병사들은 국왕 폐하의 명을 받들어 반역자들을 숙청하고 있는 중이오. 어서 병사들의 검을 돌려주시고 이 일에서 손을 떼어주시오. 우린 귀하를 해칠 마음이 추호도 없소.”
이방인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강물에 드리워진 낚싯대만 주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검술에서라면 추격대장보다도 샤르트와 보탄 남작이 몇 수 위였다.
때문에 그들은 더 큰 놀라움에 휩싸였다.
이 시대에 검을 다루는 고급 기사들의 등급은 크게 세 가지로 매겨진다.
몸에 마나를 느끼고 쌓기 시작하는 단계인 소드유저가 그 첫 번째요, 검에 체내의 마나를 불어넣을 수 있는 소드익스퍼트가 두 번째였다. 마지막으로 무형의 마나를 유형의 성질로 변환시켜 오러 블레이드를 구사할 줄 아는 소드마스터가 있었다.
하나, 아레인처럼 작은 왕국엔 마나를 느낄 줄 모르는 기사들이 부지기수였다.
샤르트는 명실 공히 소드유저 최상급이었다. 그러나 도저히 지금의 일은 납득이 가질 않았다.
‘어떻게 저 가는 낚싯대로 공격을 무마시킬 수 있단 말인가?’
반면 소드익스퍼트 중급의 실력을 가지고 있던 보탄 남작은 생각을 달리했다.
‘이자는 마나를 다스릴 줄 안다. 그것도 감히 상상하지 못할 정도의 경지에 이르렀다. 이자가 마음만 먹는다면 낚싯대로도 능히 사람을 죽일 수 있을 것이다.’
그에 반해 추격대장은 그가 검조차 가지지 않아 크게 위협이 되지는 못한다고 생각했던지 다시 한 번 충고를 거듭했다.
“뜻을 확실히 해주시오. 길을 비키겠소? 아니면 우리와 대적하겠소?”
이방인은 귀찮은지 시선도 주지 않고 입만 열어 물었다.
“왜 길을 비켜야 하지? 알아서 피해가면 될 터인데. 검을 찔러온 것은 네 녀석들이 아니던가?”
사실 그랬다. 이방인이 간섭하게 된 이유는 보탄을 무리하게 공격하려다 이방인 쪽으로 검을 찔러서였다.
그럼에도 자신들의 실수를 인정하기 싫었던지 추격대장은 나지막이 한숨을 쉬더니 병사들을 둘러보며 명했다.
“살기 싫은 모양이니 저자의 원대로 해주어라.”
나머지 병사들이 하나같이 검을 치켜세우고 동시 다발적으로 이방인에게 대들었다.
이방인이 앉아 있던 나무 의자가 그와 함께 뒤로 미끄러지듯 밀려났다.
그리고 목표를 잃고 하강하던 검들이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낚싯대 위에 차곡차곡 쌓였다. 낚싯대에 아교라도 발라놨는지 검들은 조금 전과 마찬가지로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화가 난 추격대장이 소리쳤다.
“한 팔과 다리가 있질 않느냐? 어서 검을 회수하고 저자를 죽여라!”
안 그래도 병사 하나가 이미 다리를 들고 있는 중이었다.
그때 낚싯대가 슬그머니 흔들렸다.
동시에 낚싯대에 걸렸던 검들이 하늘 위로 솟구쳤다.
다리를 들던 병사는 뒤로 세 바퀴쯤 굴러 보기 흉하게 나자빠졌다.
병사들 중 더러는 통증을 느꼈던지 팔목을 움켜쥐고 있었고, 또 더러는 너무 놀라 엉겁결에 땅에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파파파팍!
비상하던 검들이 하강하며 동시 다발적으로 땅에 꽂혔다.
병사들은 기겁을 하며 검을 회수할 생각도 못한 채 줄행랑을 쳤다.
하지만 유독 처음 잡혔던 3명은 꼼짝을 못했다. 이방인에게 혈을 눌렸기 때문이었다. 그러다 이방인이 손을 써 풀어주자 그들 역시 황급히 달아났다.
그 모습에 추격대장이 대노하여 소리쳤다.
“이 녀석들, 당장 서지 못할까!”
하지만 누구도 그의 명령을 들을 처지가 못 되었다. 자신들의 대장보다 저 검은 머리의 이방인이 훨씬 더 무서운 존재가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추격대장 역시 이방인과 멀어져 가는 병사들을 번갈아 바라보며 당황하고 있었다.
자신 혼자 무얼 할 수 있겠는가.
이방인이 서서히 고개를 돌리려 하자 추격대장은 덜컥 겁을 집어먹고는 다급히 발길을 돌렸다. 하지만 너무 당황해서였던지 다리가 꼬여 그만 사납게 땅에 코를 박고 말았다.
그는 코에서 줄줄 피가 흐르는 것도 모르고 꽁무니가 빠져라 도망을 쳤다.
이방인이 나지막한 어조로 말했다.
“이제야 좀 조용해졌군.”
그리곤 다시 못마땅한 말투로 물었다.
“그대들은 가지 않을 텐가?”
보탄과 샤르트를 꾸짖는 말이었다.
샤르트는 아직도 얼떨떨한 모습이었던 것에 반해, 보탄은 물이 닿지 않는 곳으로 걸음을 옮겨 자신의 아내를 조심스럽게 내려놓고는 돌아와 정중하게 물었다.
“귀하의 존함이라도 알 수 있겠습니까?”
“오딘이다.”
오딘.
그는 얼마 전까지 흑룡무제라는 별호와 악진이란 이름을 가지고 살아왔다.
하지만 이름을 듣는 이들이 죄다 이상하게 발음을 하는 바람에 마지못해 이름을 바꾸게 되었다.
오딘이 낚시를 하고 있는 이유는 간단했다.
이글레스성을 발칵 뒤집은 이후에도 종종 시비가 붙었는데, 일일이 다 손보기가 귀찮을 정도였다. 이러다가는 화를 못 이겨 크게 사고를 칠 것 같았기에 심신을 달래려고 했던 것이다.
물론 낚싯대엔 바늘도 달려 있지 않았다.
그저 헤엄치는 물고기들이나 구경할 심산이었다.
그러던 차에 저들이 소란을 피웠다.
원래 개입할 생각은 없었지만 이 보탄이라는 녀석의 마음 씀씀이가 맘에 들었다. 죽을 위기에 처했음에도 남을 생각하는 마음이 갸륵하지 않은가.
그것이 단지 말 한마디라도 말이다.
보탄 역시 구명의 은혜를 입은 은인에게 허리를 숙여 깊은 감사를 표했다.
“전 보탄 폰 크라이센이라 합니다. 오늘 오딘 님께 큰 은혜를 입었습니다.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몰골이 초췌하다고는 하지만 보탄은 명실상부한 귀족이었다. 그 귀족이 초면인 사람에게 이렇게 말을 높이고 허리를 숙인다는 건 좀체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오딘에게는 아무런 감흥을 줄 수 없었다. 중원을 호령하던 마교의 지존이 이곳의 왕이 와서 고마움을 표한다 한들 다를 바 없을 것이다.
그게 샤르트에게는 인상을 찌푸리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자신의 신하가 수치심에 물들어 있다는 것도 모르고 눈치 없이 보탄은 오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샤르트가 당황해하며 다가와 만류했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보탄은 고개를 깊이 파묻고 절박한 목소리로 말했다.
“외람된 말이지만, 당신의 그 힘 저희에게 빌려 주실 수 없겠습니까? 염치 무릅쓰고 이렇게 부탁드립니다.”
뜻밖의 상황이라 의아해하던 오딘은 태도를 바꿔 코웃음을 쳤다.
“힘을 빌려 달라? 말이 다르군. 조금 전에는 은혜를 갚는다고 했던 것 같은데?”
입이 백 개라도 보탄은 할 말이 없었다.
체면은 체면대로 구겨졌다. 말을 꺼내지 않았던 것보다도 못한 것이다.
주군이 자신보다도 어려 보이는 새파랗게 젊은 놈에게 조롱당하자 샤르트는 화를 참지 못하고 오딘을 나무랐다.
“이분은 아레인 왕국의 귀족이시오. 언행에 주의해주시오.”
“한 나라의 귀족이라는 자가 저런 자들에게 쫓겨 다닌다니 이상한 일이군.”
그가 귀를 기울이건 말건 샤르트는 자초지종을 상세히 설명했다. 역도들에 의해 왕국이 전복하고 자신의 주군이 이렇게 된 경위까지.
얘기를 다 듣고 난 후 오딘은 비웃듯 말했다.
“그럼 하나는 확실하군. 지금 자네들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 말이야.”
샤르트의 눈꺼풀이 분을 누르지 못하고 파르르 떨렸다.
그가 무례라도 범할까 우려되었던지 보탄은 선수를 쳐서 오딘에게 물었다.
“은혜를 어떻게 갚으면 되겠습니까?”
방법을 묻는 말이었다. 가능한 일이라면 뭐든 들어줄 생각이었다.
그러나 오딘이라는 자의 입에서는 뜻하지 않은 말이 흘러나왔다.
“그대들의 목숨은 나로 인해 구함을 받았으니 마땅히 내 것이 되어야겠지. 자네 둘을 포함해 저자가 등에 업고 있는 아이와 저기 누워 있는 여인까지 말일세. 저 여인은 꽤 미인이더군.”
차마 예상하지 못한 말인지라 보탄은 곤혹스런 표정을 지었다.
반면에 샤르트는 울화가 치밀어 살기등등한 눈으로 오딘을 쏘아보며 다가섰다. 그리고 근방에 꽂힌 검 한 자루를 빼들었다. 당장에라도 오딘을 찌를 기세였다.
그의 모습에 보탄이 일갈을 놓았다.
“샤르트 경! 무례해서는 안 되네. 이분이 우리의 생명을 구해주었잖은가.”
이빨을 갈며 손을 부들부들 떠는 샤르트를 두고 보탄은 겨우 항변했다.
“제 목숨이라면 얼마든지 드릴 용의가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 있는 샤르트 경이나 제 부인과 딸은…….”
여기까지 말했을 때 오딘은 의자에서 서서히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그럼 하는 수 없군. 귀찮긴 해도 그대들의 목숨을 직접 거두는 수밖에. 사용할 수 없는 물건은 버리는 게 낫지.”
보탄은 왜인지 모르게 그가 자신을 저울질하고 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그러나 생각이 마무리되기도 전에 가신 기사인 샤르트가 더는 참지 못하고 오딘에게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차마 보탄이 말릴 새도 없었다.
검은 곧장 오딘의 목을 향해 날아들었다.
그때였다. 오딘의 낚싯대가 궤적을 그리며 물 흐르듯 미끄러지더니 샤르트의 검을 밀쳐 내고는 도리어 그의 목울대 앞에 우뚝 멈춰 섰다.
만약 샤르트가 허리와 목을 뒤로 젖히지 않았다면 낚싯대는 그의 목에 틀어박혔을 것이다. 여기서 발을 뺀다면 뒤로 엎어져 다치거나 볼썽사나운 꼴이 될 것이기에 샤르트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었다.
오딘은 냉소를 머금고 말했다.
“난 기어오르는 자들은 싫어하는데.”
샤르트는 잔뜩 겁먹은 눈을 하고 있었다. 당장에 목에 박힐지 모르는 낚싯대도 낚싯대지만 그보다 더 무서운 것은 그의 눈이었다.
끝 모를 막연한 두려움이었다.
어렸을 적 맹수를 만났던 적도 있지만 지금은 그보다 더 큰 공포심이 닥쳐와 뇌리를 지배했다.
수하를 생각하는 마음이 간절했기에 자존심이 강한 샤르트를 대신해 보탄이 직접 용서를 구했다.
“그의 행동을 대신 사과드립니다. 그러니 제발 그를 용서해주기 바랍니다.”
샤르트도 뉘우치는 기색이 역력했다. 이방인에게 대들었던 것에 대한 후회가 아닌, 너무 화가 난 나머지 주군이 허락지도 않은 행동을 했던 것에 대한 후회였다.
하지만 낚싯대는 쉽게 거두어지지 않았다. 도리어 점점 더 그의 목으로 파고들어왔다. 그럴수록 샤르트는 더 기겁을 하며 상체를 점점 뒤로 젖혔다.
툭!
낚싯대가 살짝 목에 와 닿자 샤르트의 몸뚱이는 균형을 잃고 뒤로 넘어졌다.
다행히 부상은 없었다.
그 모습을 눈여겨보며 오딘은 혀를 차며 꾸짖었다.
“싱거운 녀석.”
상대할 가치조차 없다는 말이다.
순간적인 공포에 질려 반쯤 넋이 나가버린 샤르트를 보다가 보탄은 이자가 정말 감당할 수 없는 무력을 가졌을 것이라는 확신을 가졌다.
문제는 그가 했던 말이었다. 샤르트를 달래어 자신과 함께 그의 부하가 될 순 있지만 딸아이와 부인은 어찌한단 말인가.
다른 건 모르더라도 부인이 이자와 살을 섞는다는 건 정말이지 상상도 하기 싫은 일이었다.
그럴 것이라면 차라리 여기서 목숨을 잃는 게 나을 것이다. 죽어 흙으로 돌아간다면 괴로운 상상은 안 해도 될 것이므로.
하나, 깊게 생각해볼 필요가 있었다. 이 사람과 헤어지면 자신은 물론 샤르트와 아내, 그리고 딸아이까지 위태롭게 된다. 어떻게 해서든 저들의 생명은 살려야 했다.
누군가는 위하는 마음이 사랑이라고 했다.
지금 보탄의 심정 또한 그와 같았다. 아무것도 안겨 주지 못하는 질투보다야 정말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안전을 주고 싶었다.
보탄은 어렵게 입을 뗐다.
“한 가지 원이 있습니다. 이를 들어주시겠다면 당신 뜻대로 하겠습니다.”
“무리한 부탁이 아니었으면 좋겠군. 어디 들어나 보지.”
“제 길에 동행해주셨으면 합니다. 그 후엔 어떻게 하셔도 일체의 불만을 품지 않겠습니다.”
오딘은 이자가 재미있다고 생각했다. 꽤나 심각해져 버렸지 않은가. 또한 샤르트란 저 녀석이 괘씸하기는 했지만 주인에 대한 충성심만은 대단하다는 걸 부정할 수 없었다.
그런 면에서는 합격이었다.
“어디까지지?”
“발데르 공작님의 그라니트성까지입니다.”
오딘은 그의 제안을 수락했다. 설령 위협이 도사리고 있더라도 두려워할 인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 * *
엘레느는 두 언니들에게 떠밀려 커다란 광주리 속에 숨어 사시나무 떨 듯 떨고 있었다.
그녀의 나이는 올해로 11살이었다.
급작스레 사람들이 들이닥쳐 반항하던 언니들을 죽이고 그녀들의 옷을 풀어헤쳤다.
이들은 이 근방에서 악명 높은 산적들이었다.
세 여인을 이곳까지 안내해온 남자는 이들에 의해 죽었고, 운이 없게도 그녀들은 이자들에 의해 발각이 된 것이다.
한 사내가 바지춤을 내리며 못마땅한 심정을 그대로 드러냈다.
“망할 녀석, 아직 죽이진 말았어야지.”
다른 사내가 고개를 돌려 피가 흐르는 자신의 머리를 툭툭 쳐 가며 항변했다.
“조금만 빨리 오지 그랬어? 돌에 맞아서 내 이마 터진 거 안 보여? 나도 뒈질 뻔했다고.”
낡은 초가삼간 안에는 이들 말고도 한 사내가 더 있었는데 그는 뒤늦게 도착했는지 연방 투덜대며 주위를 뒤적거렸다.
“제길, 왜 두 명뿐이야?”
말하는 투로는 죽은 여인이라도 상대만 있다면 괜찮다는 것 같았다. 한참 부스럭대며 사방을 헤집고 다니던 그는 광주리의 덮개를 열어보고는 득의만만한 표정을 지었다.
“크큭, 산 년이야. 산 년이라고.”
그에게 머리채를 잡혀 끌려나오는 사람은 다름 아닌 엘레느였다. 심히 고통스러운 얼굴을 하면서도 어찌 된 영문인지 그녀는 입만 뻥긋거릴 뿐 비명도 지르지 못하였다.
장성한 사내다. 산적질을 하던 자들이라 힘 또한 강했다. 게다가 여성의 힘은 남성의 힘에 못 미친다는 게 보편적인 상식이었다.
거기에 어린아이였으니 사내는 어렵지 않게 그녀를 쓰러뜨릴 수 있었다.
그걸 보며 한 사내가 인상을 찌푸렸다.
“아직 애야!”
하지만 그는 어디서 개가 짖냐는 듯 귀를 후비며 들은 체 만 체했다.
의외롭게도 다른 병사는 그를 편들어주었다.
“우리가 이럴 때 아니면 언제 이런 귀한 분들을 안아보겠어? 다음엔 나다. 나야!”
그녀들이 아무리 허름한 옷을 걸쳤다 한들 제법 귀티가 흘렀다. 이런 산중에서는 보고 싶어도 볼 수 없는 귀한 신분의 여인들이었다.
미리 약속이라도 받으려는지 그는 두 번 세 번을 물어 엘레느의 앞에 있는 사내가 고개를 끄덕이게 했다.
얼마나 겁을 먹었던지 엘레느는 이빨을 딱딱거리며 그의 손아귀에서 빠져나가려 앞으로 엉금엉금 기어갔다.
그러나 사내의 손에 발목을 잡혀 맨땅의 지푸라기와 함께 힘없이 끌려왔다.
공포와 절망으로 얼룩진 두 눈에서는 눈물이 하염없이 쏟아졌다.
안타깝게도 그 슬픔은 이 사내에게 더 큰 쾌락만 안겨 주는 듯했다.
“살다 보니 이런 날도 오는구나. 히히히.”
사내의 손이 엘레느의 상의를 더듬는 찰나 나무문이 부대끼며 소리를 냈다.
끼이이이!
어두컴컴한 내부에 밝은 빛이 들어왔다.
그리고 한 사내의 실루엣이 드러났다.
남자의 눈은 한가득 눈물을 머금은 엘레느의 커다란 눈동자와 마주쳤다.
갑자기 한 사내의 불만 가득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또 누구야?”
오랫동안 빛을 안 보다가 보게 되면 눈이 어두워지는 법이다.
이들은 저자가 자신들의 동료일 것이라고 추측했었다. 또한 반나체로 있어 창피한 감도 없질 않았다.
거기에다가 혹시 근방에 있을지 모르는 두목이나 부두목의 눈에 발각이라도 되면 십중팔구 질책을 받게 될 것이다. 이런 물건이 있으면 먼저 상납하는 게 그들 간의 예의였으므로.
“빨리 문 닫아!”
그러나 대상은 그 말을 전혀 귀담아듣지 않았는지 서서히 걸음을 옮기며 팔을 뻗고 있었다.
* * *
보탄 남작은 산중에서 발목이 붙들리고 말았다. 오딘이 잠시 기다리라는 말만을 남긴 채 나무숲 사이로 사라졌기 때문이다.
다행히 오는 도중 뿔뿔이 흩어졌던 자신의 휘하 기사 다섯과 병사 20여 명을 만나 합류했으므로 초조함은 줄어들었다.
그러나 샤르트만은 오딘에 대한 두려움과 적개심을 떨쳐 버릴 수 없었다.
걱정이 태산 같았다.
단지 낚싯대를 휘두르던 실력이 겁나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오딘의 두 눈에서 끝 모를 자신감과 여유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 눈을 마주치는 순간엔 알 수 없는 두려움까지 솟구쳤었다.
적어도 자신이 아는 주군은 남을 속여 뒤통수나 칠 인물은 절대로 아니었다. 그러니 더 염려가 되는 것이다.
‘말해야 한다. 목적지에 다다르면 필시 무례한 요구를 할 것이다. 성안으로 들어선다면 그를 제압하는 것이야 어렵지 않겠지만 주군이 다치실지도 모르는 일. 지금 주군을 설득해 먼저 발데르 공작님의 성으로 들어가 성문을 굳게 걸어 잠그면 아무리 그라도 못 들어올 것이다.’
하지만 그 말은 계속 입 안에서만 맴돌았다.
‘분명 이 같은 사견을 올린다면 주군은 날 질책하실 것이다. 그렇다고 충언을 드리지 못한다면 어찌 신하 되는 자라 할 수 있겠는가.’
어렵게 결심을 굳히며 주군에게 다가가려는데 오딘이 향했던 나무숲 안쪽에서 찢어질 듯 영혼을 쥐어짜는 듯한 비명 소리들이 들려왔다.
“크아아아악!”
놀란 새들이 날갯짓을 하며 하늘로 날아올랐다.
보탄은 즉시 허리춤에서 검을 빼들고 주위를 둘러보며 명했다.
“그대들은 여기 남아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라. 샤르트 경만 날 따라오도록.”
그리고 오딘이 있을 곳을 향해 부리나케 달려갔다. 샤르트 역시 당황한 기색으로 뒤를 따랐다.
오딘은 피로 얼룩진 두 여인을 들쳐 메고 어린 소녀를 한 팔로 안고 있었다.
소녀는 멀리서 다른 사람이 다가오는 것을 보고 두려웠던지 오딘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고 부들부들 떨었다.
오딘을 흘겨보는 샤르트와는 다르게 보탄은 재깍 다가가 한 여인을 받아들었다. 주군이 거드는데 신하 된 자가 어찌 가만있을 수 있겠는가.
샤르트 역시 성큼 다가서 거들었다.
얼굴이 온통 흙먼지와 피가 뒤범벅이 돼서 본래의 생김새를 알아보기란 쉽질 않았다. 또한 그녀는 평민들이나 걸칠 누더기 옷을 걸친 상태였다.
숨이 멎었던 나머지 표정 역시 굳어 있어 원래의 얼굴을 알아보기란 더더욱 힘들었다.
지저분한 그녀의 얼굴을 소매로 닦아주던 보탄의 얼굴은 점점 굳어갔다.
그는 행여 피부에 흠이라도 생길까 걱정이 되었던지 땅에 조심스럽게 그녀를 눕혀 두었다.
그리고 재빨리 샤르트에게 다가가 여인의 상태를 살펴보았다. 그녀 역시 생이 다했는지 몸이 차갑게 식어 있었다.
원통한 표정이 더해졌다.
눈 가장자리에 맺힌 눈물을 훔치며 보탄은 애써 밝은 얼굴로 고쳤다. 그리고 오딘이 안고 있는 소녀를 향해 다가가 황망히 무릎을 꿇으며 격정 어린 탄성을 토해냈다.
“신 보탄 폰 크라이센, 엘레느 공주님을 뵈옵니다.”
그의 눈에는 슬픔과 기쁨으로 얼룩진 물기가 가득 맺혀 있었다.
그 순간에도 초가삼간 안에서의 비명 소리는 끊이지 않고 들려왔다.
보탄은 모든 감정을 억누르고는 일어섰다.
독기 어린 눈이 비명 소리의 근원지를 향했다.
침묵으로 일관하던 오딘이 낮은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더 손보지 않는 편이 좋을 것이니라, 분근착골수(分筋錯骨手)로 사지를 뒤틀어놨으니. 목숨을 앗는다면 오히려 그대에게 고마움을 느낄지도 모르는 일이지.”
그래도 분노를 감당하지 못해 검을 빼들고 그들에게 다가가던 보탄은 기겁을 하고 말았다. 3명 모두의 팔다리가 기형적으로 뒤틀려 있었기 때문이다.
* * *
오딘과 보탄 일행은 엘레느와 숨이 멎은 두 공주를 데리고 그라니트성에 도착했다.
발데르 폰 그라니트 공작은 보탄 남작이 도착했다는 얘기를 듣고 몸소 마중을 나왔다.
“어서 오시게. 용케도 살아 있었군.”
“이렇게 살아서 다시 뵙게 되어 다행입니다.”
“그래, 다친 덴 없는가? 몰골이 말이 아니로군. 고생이 심했겠어.”
그 말이 보탄은 결코 빈말이 아님을 알았다. 그의 말은 언제나 진심이 담겨 있었다.
보탄이 아는 발데르 공작은 권력에 크게 욕심을 두지도 않았을뿐더러 뭇 귀족들을 생각해주는 편이었다. 때문에 진심으로 따르는 이들이 많았고 자신 역시 그에 속했다.
상대가 이토록 살갑게 맞아주는데 어찌 인상을 찌푸릴 수 있을까. 부상을 입어 아픈 것도 잊었는지 보탄은 화색을 지어 답했다.
“괜찮습니다. 그보다 공주님이 와 계십니다.”
발데르의 몸은 일시에 굳어버렸다.
공주들은 왕의 딸들이기도 했지만 그들 중 막내 공주는 발데르 공작의 조카가 되기도 했다. 첫째 왕자와 막내 공주를 낳았던 왕비는 그의 누이였던 것이다.
왕자는 권위욕이 강했던 것에 반해 막내 공주는 어리고 귀엽기만 한 존재였다. 자연히 발데르 공작은 막내 공주인 엘레느 공주를 더 가까이했었다.
거기다가 왕자들은 모두 죽었다는 말을 전해들었으나 공주들의 신변에 대해서는 별다른 말이 들려오지 않았기에 보탄 남작이 한 말은 헛말이 아닐 가능성이 높았다.
뒤쪽으로 걸음을 옮기면서도 발데르 공작은 내심 그녀이기만을 바랐다.
곧 그는 한 이방인의 목에 팔을 걸고 안겨 있는 어린 공주를 발견할 수 있었다.
얼굴에 환희의 빛이 떠올랐으나 표정을 고치고 발데르는 그녀를 지나쳐 싸늘히 식어 있는 2명의 공주들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주검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애도를 표했다.
“신이 무능하여 지켜 드리지 못하였사옵니다. 못난 신하를 용서하시고 부디 아픔 없을 좋은 곳에 가셔서 행복하시길 빌겠사옵니다.”
아직도 엘레느는 오딘의 목에 팔을 걸고 안겨 떨어질 줄을 몰랐다.
그녀의 두 눈에는 아직도 눈물이 마르지 않았다. 그 눈물이 흘러들어 오딘의 소매를 흠뻑 적셨다. 그럼에도 오딘은 불쾌한 내색을 하지 않았다.
침통한 표정을 애써 정리하며 발데르는 오딘에게 다가가 그녀를 넘겨받았다.
“살아주셔서, 살아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이제는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신이 목숨을 걸고 지켜 드리겠습니다.”
감격에 겨워 떨리는 목소리였다.
보탄은 보탄대로 죽은 공주들에 대하여 애도를 표했다.
“피신해 계셨던 모양입니다. 조금만 더 빨리 알았더라면, 그랬더라면…….”
발데르는 이미 왕국이 전복되었음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왕비와 왕, 왕자들을 포함해 공주들마저 소식이 끊어져 죽었을 것이라고 한탄했었다.
목적도 잃어버려 이렇게 저항만 하다 모든 것이 끝나게 될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그런 그에게 엘레느는 꺼져 가던 희망에 불을 밝혀 주고 목적을 심어준 셈이다.
한껏 감상에 젖어들어 있던 그에게 보탄 남작이 말했다.
“그 역시 이분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을 겁니다.”
시원한 이마에 또렷한 눈을 가진 이방인이었다.
“자세히 설명해주겠나?”
공작의 요구에 보탄은 오면서 겪은 일들을 얘기했다.
얘기를 다 듣고 난 후 발데르 공작은 오딘에게 감사의 뜻을 표했다.
“뭐라 감사의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부족한 것이 있다면 제가 도움을 드릴까 합니다. 일단 먼 길을 오셨을 테니 저희 성에서 잠시 쉬어 가시겠습니까?”
나쁠 일도 아니었다. 마땅히 할 일도 없어 보탄 남작이라는 자와 샤르트라는 녀석의 반응을 보기 위해 여기까지 따라왔었다.
보통 놈들 같았다면 파르티잔과 같은 우를 범하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 녀석들은 달랐다.
한편으로는 은혜를 아는 놈들이란 생각이 들어 성의를 그대로 받아들였다.
“그러도록 하지.”
상대가 마음을 받아들여 준 것이 고마워서인지, 아니면 공주를 구해준 구명의 은혜에 감사할 따름인지 오딘이 자신에게 말을 낮추고 있다는 것은 전혀 문제 삼지 않았다.
그 후 발데르는 여러 가지의 지시를 내렸다. 두 공주의 장례를 준비하도록 했고, 엘레느 공주에게 시종들을 보내 최대한 편히 쉬게 해주라는 명을 내렸다. 또 보탄 남작의 식솔과 가솔, 기사와 병사들에게 적당한 거처를 마련해주고 대접에 소홀하지 말라는 명까지 내린 후에 응접실에서 보탄 남작과 오딘이라는 이방인과의 삼자대면을 가졌다.
“어디에서 오신 분인지?”
보탄도 죽 궁금했던 질문을 발데르 공작이 하고 있었다.
오딘은 짧게 답했다.
“중원.”
“처음 듣는 곳이군요. 보탄 남작과는 어떻게 아시게 된 건지요?”
그 질문은 보탄이 대신 답했다.
“추격을 받던 중 저와 샤르트 경이 이분의 도움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렇지 못했다면 여기까지 오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자네도 이분께 도움을 받았군. 가만, 이럴 게 아니군.”
발데르는 재깍 일어서 한 곳으로 걸어가 몸통 크기만 한 철제 상자 하나를 들고 돌아왔다. 그리고 오딘 앞쪽에 내려놓으며 뚜껑을 열었다.
갖가지 보석들이 휘황찬란하게 빛을 내뿜고 있는 것으로 보아 시장에 내다판다면 아마 꽤 큰돈이 될 것이었다.
“약소하나마 이것을 받아주십시오. 감히 사람 목숨과 맞바꿀 정도의 가치는 없사오나 최소한의 성의라고 생각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솔직히 오딘이 이런 보석에 눈이 뒤집힐 인물은 아니었다. 이보다 더 많은 보물을 싸들고 온다 하더라도 눈 하나 깜짝할 위인이 아니다.
중원에서 그가 가졌던 권위는 가히 절대적인 것이었다.
그런 생활을 오랜 동안 영위해왔으니 이런 물건이 눈에나 차겠는가.
그러나 이 녀석은 은혜를 아는 인간이었다. 거기다가 공작이란 작위는 꽤 높은 것이라고 들었거늘 이자는 스스럼없이 자신을 낮추고 있다. 또한 살갑게 대하는 태도도 마음에 쏙 들었다.
다시 발데르가 말을 이었는데 그 목소리엔 처연함이 녹아 있었다.
“전쟁 중이라 밖이 꽤 소란스럽습니다. 하나, 신변에 염려가 갈 일은 없을 것입니다. 이 성엔 여러 마법사들이 있으니 문제가 생긴다 하더라도 성 밖까지 무사히 안내해드릴 수 있으니까요.”
여기까지 말을 마쳤을 때 집사 하나가 다가와 발데르에게 조용히 아뢰었다.
“공작 전하, 떠나실 시간이 되었습니다.”
“벌써 시간이 되었나?”
“조금 전부터 저희 마법사가 대기하고 있었습니다. 지금쯤 공간 이동 마법진이 완성되었을 것입니다.”
“알겠네. 집사는 이분과 보탄 남작에게 쉴 만한 곳을 안내해드리도록 하게.”
“명을 받들겠습니다.”
이윽고 일어서 외투를 걸치는 발데르를 보며 보탄이 따라 일어서며 물었다.
“어디를 가시는 길입니까?”
공작은 만면에 환한 미소를 떠올렸다.
“선약이 있다네. 이 일이 잘 성사된다면 우리가 꿈꾸는 일이 불가능한 일만은 아닐 것이네.”
주인이 없는 곳에 손님이 머무를 순 없는 법.
자연히 오딘과 보탄 남작 역시 그 뒤를 따랐다.
갈림길이 나오기 전 그들은 함께 이동할 마법사와 발데르 공작을 보필할 기사들과 마주쳤다.
그중 로브를 걸친 사람은 오딘에게도 낯익은 얼굴이었다. 얼마 전 소매치기를 도와 대들던 파르티잔이라는 마법사였던 것이다.
조르바 자작의 이글레스성에 있어야 할 파르티잔이 왜 이 성에 나타났다는 말인가.
이유는 그렇게 복잡하지 않았다.
본래 파르티잔은 발데르 공작 휘하의 마법사였다.
얼마 전 일이 있어 성을 나섰다가 쥐도 새도 모르게 왕국으로 끌려갔고, 새로 왕이 된 하인리히에게 협조하라는 협박을 받았다.
본래 파르티잔은 충성 따위에 연연하는 인간이 아니었으므로 하인리히의 뜻을 따르기로 했다.
물론 이 일이 성공한다면 부귀영화를 책임져 준다는 약조를 받았다.
그 이후로 파르티잔은 이따금씩 이글레스성에 오가며 조르바 자작과 은밀한 내통을 했다. 일전에 조르바가 화가 머리 꼭대기까지 치솟았음에도 파르티잔을 죽이지 못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단 하루만 협조하면 될 것이었다.
크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발데르의 공간 이동을 다른 좌표로 시키면 끝날 일이므로.
이미 마음은 돌아선 상태였다.
재수가 없게도 하필 그날, 그 순간이었다. 발데르 공작을 감쪽같이 속여 조르바 자작의 성 인근으로 공간 이동을 시키려던…….
오딘이 그 모든 상황을 알 리는 없었다.
아니, 알았다고 한들 저자의 사정 따윈 안중에도 없었을 것이다.
오딘이 노기 어린 눈으로 그를 쏘아보며 다가서자 파르티잔은 기겁을 하며 뒤로 물러섰다.
“분명히 내 눈에 띄지 말라고 했을 텐데.”
발데르 공작과 보탄 남작은 영문을 몰라 두 사람을 살피기를 반복했다.
그러던 중 의아한 낯빛을 감추지 못하고 보탄이 물었다.
“서로 아는 사이입니까?”
“얼마 전 이글레스성에서 마주쳤던 적이 있다. 꼴에 주인을 둘이나 섬기는 모양이군.”
오딘은 바보가 아니었다. 한 달 넘게 대륙 생활을 하며 잡다한 지식들은 이미 습득해놓은 상태였다. 당연히 한 성에는 한 명의 군주가 있고 그를 따르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쯤은 자연스레 알게 되었다.
따라서 파르티잔이 이곳에도 모습을 드러냈다는 것은 모종의 음모가 있다는 것을 암시했다.
물론 그것까지 집어낼 생각은 아니었지만 이죽거리다 보니 저도 모르게 말이 튀어나왔다.
안색이 파래져 파르티잔의 이마에는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어째서 저 인간이 여기 와 있는 거지?’
큰일이 날 것임이 뻔했다. 당장 달아나야 목숨을 건지는 위기에 처한 것이다.
그러면서도 속아주길 바랐는지 그는 넌지시 발뺌을 했다.
“비, 비슷한 사람과 착각을 하시는 거겠지요. 세상에 비슷한 사람이 어디 한둘이랍니까?”
우선은 저들을 안심시키고 틈을 봐 달아날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 말은 오딘의 분노만 사고 말았다.
오딘은 사악하게 입꼬리를 치켜 올리고 이죽거렸다.
“이제는 농락까지 하려 드는군. 그럼 그때의 상황을 재연해볼까?”
오딘이 한 걸음 다가서자 파르티잔은 당장 몸을 돌렸다. 더 생각하고 말 것도 없었다. 저놈의 성정이 지랄 맞은 것을 여기 있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에 택한 행동이었다.
‘일단 마법진까지 달려야 한다. 붙잡히면 뼈도 추스르지 못할 게야.’
등 뒤로 발데르 공작의 고함 소리가 터졌다.
“저자를 잡아라!”
기사들이 앞 다투어 파르티잔의 뒤를 따랐다.
애초부터 무리한 일이었다. 마법을 사용할 줄 안다고 하지만 신체가 단련된 기사들보다 빠를 수는 없었다.
윈드 워크(Wind Walk)나 헤이스트(Haste)라는 마법이 있음에도 캐스팅하지 못한 것은 그만한 여유조차 없었기 때문이다.
달리는 도중 파르티잔의 지팡이에 불길이 치솟았다. 그리고 돌아서며 지팡이를 내리긋자 화염 덩어리가 쏘아졌다.
불길은 기사들을 향해 맹렬하게 파고들었다.
펑!
미처 피하지 못한 기사 하나가 불길에 잠식되어 나뒹굴었다.
순간 캐스팅이 가능했던 것은 이 지팡이가 불에 특화된 아티팩트(Artifact)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시 불의 기운을 집어삼키려면 시간이 필요하다. 더는 무리였다.
결국 얼마 가지도 못해 파르티잔은 기사들의 손에 붙들리고 말았다.
그를 노려보며 발데르 공작은 착잡한 표정을 떠올렸다.
“스스로 죄를 인정하는군.”
촤악!
차디찬 물줄기가 얼굴에 와 닿으며 파르티잔은 저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렸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철제 의자에 묶여 있어 달아날 수도 없었다.
눈앞으로 아주 화가 난 모습의 사람들이 보였다. 그들은 발데르 폰 그라니트 공작이 앉은 의자 주위에 모여 자신을 사나운 눈초리로 노려보았다.
당장에 겁부터 났다.
‘아뿔싸, 꼼짝없이 죽게 생겼구나.’
초점 없는 동공이 시선을 둘 곳을 몰라 망설였다.
발데르 공작이 노한 목소리로 질책했다.
“이리될지는 몰랐겠지. 나 역시 깜빡 속아 넘어갈 뻔했으니.”
파르티잔은 대의에 연연하는 인간이 아니었다.
일단은 자신이 살고 봐야 할 일이다. 그리고 자신이 잘 되고 봐야 할 일이다. 그 두 가지는 그의 인생철학과도 같았다.
돌려 말하자면 이렇게 공포 분위기까지 조성해놓지 않아도 묻는다면 알아서 불 것이었다.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그는 묻기도 전에 입을 열었다.
“다, 다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래줘야 할 걸세. 몇 년이나 내 곁에 머무르며 속여 온 사실에 난 매우 화가 나 있으니까.”
“그, 그것은 사실이 아니옵니다. 제가 이 일을 맡게 된 것은 얼마 전의 일이었습니다. 두 달 전 지인의 소개로 하인리히 폐하를 뵙게 되었습니다. 그날…….”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발데르가 노여움을 금치 못하고 눈을 부릅뜨며 호통을 쳤다.
“내 앞에서 감히 그자를 폐하라 부르는가!”
그 소리가 어찌나 컸던지 내부에 쩌렁쩌렁 울렸고, 균열이 가 있던 천장에서는 흙먼지가 내려앉았다.
파르티잔은 고양이 앞의 쥐처럼 고개를 숙이며 어쩔 줄을 몰랐다. 발데르가 지금의 왕을 얼마나 싫어하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다시 그자의 이름을 거론할 시에는 편히 눈을 감지 못할 것이다. 알겠느냐?”
“예! 예! 소인이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계속해보아라.”
“그때 미리 오늘의 일을 계획해두었습니다. 제 뜻은 아랑곳하지 않고 폐하, 아니 그자가 제가 공작 전하의 휘하에 있다는 일을 알고서……. 조르바 자작의 휘하에 있게 된 것은 그 이후였습니다.”
“되었다. 하면 왜 오늘이더냐?”
“얼마 전 공작 전하께옵서 타 왕국에 보낸 사신이 있었습니다. 물론 그는 오는 도중 붙잡혀 죽었다고 했지만 아직 살아 있습니다. 저들에게 잡혀 모두 털어놓았습지요. 해서 폐, 아니 지금 왕 행세를 하고 있는 그자가 제게 이와 같은 일을 부탁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일이라니? 알아듣게 설명해보아라.”
“공작 전하를 그 왕국이 아닌 조르바 자작님의 이글레스성으로의 공간 이동을…….”
듣고 있던 발데르는 다리에 힘이 풀리고 망치로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것처럼 멍한 기분이 들었다.
만일에 그랬다면 지금쯤 볼모로 붙잡힐 뻔하였지 않은가.
본래 공작이 직접 상대국을 방문한다는 것도 이례적인 일이었다. 하지만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저들이 어디 거들떠나 보겠는가.
그 생각이 하마터면 자신의 생명은 물론이요, 이 성에 있는 많은 생명을 앗아갈 뻔했다.
괴로운 듯 발데르는 이마를 짚었다.
‘아아, 그자가 아니었다면 큰일 날 뻔하였구나. 나 또한 그에게 은혜를 입게 되었구나.’
사실 오딘이 이들에게 잘 보이고 싶어서 호의를 베푼 건 절대로 아니었다. 보탄 남작을 도와주게 된 것은 제일 처음 병사가 자신 쪽으로 검을 찔렀기에 그들의 일을 훼방 놓은 것이었고, 엘레느 같은 경우야 아녀자를 희롱하는 것들이 꼴불견이라 손봐준 것이었다.
또 지금의 경우는 어떠한가. 다시 눈에 띄면 가만 안 두겠다고 엄포를 놓은 놈들 중 하나가 눈앞에 드러났으니 당연히 꾸지람을 했어야 했다.
그런 사실을 알 리 없는 발데르는 고마움에 어쩔 줄을 몰랐다. 그러다가 파르티잔과 눈이 마주치며 심문 중이라는 것을 자각하고는 다그쳐 물었다.
“그와는 어떻게 알게 되었나?”
“그라면? 혹시 검은 머리의……?”
“그렇다.”
생각하기도 싫은 대상을 떠올려서인지 파르티잔의 이마에 주름살이 더 늘어버렸다. 그래도 대답은 해야 한다.
“그, 그는 요 며칠 전에 만났습니다.”
공교롭게도 그가 이방인, 아니 오딘을 만났던 건 볼일 좀 보겠다며 나간 것이 원인이 되었다. 때마침 돈벌이가 생겼기에 냅다 소매치기 일당들의 요구를 수락한 것이다.
자신 역시 그게 그렇게 큰일이 될 줄은 몰랐었다.
나중에 다른 마법사들로부터 치료를 받기는 했지만 조르바 자작은 분을 억누르지 못해 파르티잔에게 일벌백계를 해야 한다며 고문까지 행했었다.
그래도 성이 발칵 뒤집힌 것치고는 가벼운 처벌로 끝났다. 파르티잔은 왕명을 받고 있는 상태였으므로.
또한 그 일은 조르바 자작에게도 중한 일이었다. 공작을 잡아 왕에게 바치면 커다란 공을 세우는 일이 될 테니까 말이다.
‘난 죽게 되겠지?’
이 와중에도 파르티잔의 머릿속엔 엉뚱하게 걱정이 앞섰다. 다 불고 나도 공작이 자신을 살려 줄 리는 만무하다.
사색이 길었던 탓인지 공작의 목소리가 커졌다.
“왜 얘기를 하다 마는 것인가!”
“마, 말씀드리겠습니다. 티아르 마을에서 그와 마찰을 빚었습니다. 저 역시 몸을 건지기 위해 그를 데리고 이글레스성으로 향했습니다. 설마 했는데 그는 절 따라 성안까지 쫓아오더군요. 다행히 한시름 놓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사람이라고 보기에는 힘들었습니다. 달려드는 병사들이 원인도 모르게 꼬꾸라졌습니다. 남은 병사들은 줄행랑을 치기 바빴습니다. 자작을 보필하는 기사들이라고 예외는 없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자신을 귀찮게 하지 말라는 말을 남기고는 트랜슬레이터를 들고 성을 빠져나갔습니다.”
더 생각하기도 싫은지 파르티잔은 아주 치를 떨고 있었다.
“그 말고 동행은 없었나?”
“없었습니다. 혼자였습니다.”
“호, 혼자?”
발데르답지 않게 말을 더듬거렸다. 그의 주위에 있던 사람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저마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파르티잔을 의심하는 눈치였다.
“그렇사옵니다.”
뭘 잘못 먹었는지 발데르의 입은 점점 더 벌어졌다. 그리고 그 상태로 굳어버렸다. 흡사 조각상이 된 것처럼…….
손톱을 물어뜯으며 발데르는 서재 안을 서성거렸다. 그러다 멈추고, 다시 창밖에 떠 있는 별을 건너보다가 서성거리는 동작을 반복했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그는 도대체 어느 정도의 무력을 지녔다는 말인가?’
발데르의 검술 실력은 매우 뛰어났다. 왕국 내의 모든 귀족들과 기사들을 포함시켜 비교해본다고 하더라도 충분히 다섯 손가락 안에 들었다. 그것은 아레인 왕국에서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만일 자신이 오딘과 같은 상황이었다면 단신으로 성에 쳐들어간다는 건 엄두도 나지 않을 일이었다.
누가 그 같은 대담한 생각을 품을 수가 있을까.
실력은 둘째 치더라도 배짱부터가 남다르질 않은가.
보탄 남작의 말과 파르티잔의 말을 종합해볼 때 점점 더 그의 힘을 가늠할 수 없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분명 검을 지니지 않았다고 하였다. 맨손으로 들어가 성을 뒤흔들었다는 게 가당키나 하다는 말인가? 도저히 믿기지가 않는군.’
하지만 파르티잔이 그 상황에서 거짓을 고했을 리가 없다.
거기다가 본인도 사연이 있어 검을 가지고 다니지 않았다고 하였으니 의심할 여지조차 없었다.
‘보탄 남작까지 포함해 무려 세 번이나 큰 은혜를 입었다. 더 그를 귀찮게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하나, 그가 가세하여 준다면 우리에게 큰 힘이 될 것이다. 이를 어이하면 좋을꼬. 부탁을 한다면 그는 내가 자신을 이용해 먹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는 노릇이거늘.’
오딘이 이쪽으로 가세해준다고 해서 왕국을 뒤엎을 수 있을 것이란 확신은 당연히 없었지만 그래도 최대한 저항은 해볼 수 있을 것 같았다.
덧붙여 자신이 반란군들을 모으고 이웃의 왕국에 아는 귀족들에게 연락을 넣어 힘을 빌리는 것이 가능하다면 왕국의 재탈환도 꿈은 아닐 것 같았다.
점점 생각은 뒤쪽으로 기울어갔다. 염치를 무릅쓰고라도 분명 협조는 청해보아야 한다. 머릿속이 오직 복수를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으로 가득 찼기 때문이었다.
왕비가 되었던 누이는 그가 끔찍이도 아끼고 사랑했던 존재였다.
그녀의 죽음을 전해들었을 때는 하늘이 무너지는 줄만 알았었다.
왕국이 몰락했다는 것보다도 그에게는 누이의 죽음이 더 큰 아픔을 던져 주었다. 이제는 사는 것보다 복수를 해야 한다는 일념만이 가득했다.
불현듯 문밖에서 집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보탄 남작께서 공작 전하를 뵙기를 청하십니다.”
안 그래도 그를 떠올리고 있던 찰나였다. 오딘이라는 자와는 몇 마디 섞어보질 못했기에 그와 상의를 해보아야 했다. 마침 잘되었다며 발데르는 확 펴진 안색으로 말했다.
“어서 들라 이르라.”
보탄이 들어서기 무섭게 발데르는 그의 손을 두 손으로 부여잡으며 소파 쪽으로 끌고 왔다. 그리고 그를 앉혀 두고는 채근하듯 물었다.
“그는? 그는 아직 성안에 있겠지?”
막상 보탄은 전해들은 게 없었기에 공작이 체신머리도 잊어버리고 왜 이렇게 호들갑을 떠는 줄 몰랐다.
“오딘… 님 말씀이십니까?”
발데르는 밝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물어왔다.
“그와 얘기를 좀 할 수 있게 해주겠나?”
* * *
한편, 조르바 폰 이글레스 자작은 파르티잔 경이 잡힌 것도 모른 채 마법진 근방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수십의 사람들이 주위를 에워싼 덕에 온기가 더해져 추위는 덜했지만 그래도 새벽의 찬바람은 살 속을 비집고 들어왔다.
다란 경마저 오한이 돋았는지 한차례 몸을 떨었다.
기사단장은 주군의 명령을 받들기도 하지만 다른 기사들의 애로사항을 대변해줄 입장 또한 있었다.
“무슨 일이 생긴 모양입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에 대해 조르바는 노한 목소리로 질책했다.
“폐하의 어명이시다. 아직 하루도 지나지 않았는데 왜 그리 호들갑이냐?”
비단 기사들만이 아니었다.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해 주변으로는 명중률이 뛰어난 궁수들과 마법사들이 이중 삼중으로 배치가 되어 있었기에 마법진 근처에는 쥐새끼 한 마리 빠져나가기도 힘들 지경이었다.
이 기회를 잘만 잡으면 하인리히 국왕의 총애를 받게 될 것이다. 조금 더 기다린다고 해서 나쁠 것은 없었다.
이때까지 오지 않았다면 필히 뭔 일이 생겼다고 봐야 하거늘, 조르바 자작은 하늘에 반짝이는 별을 바라보며 마음속의 염원을 간절히 되뇌고 있었다.
‘제발 와다오. 제발…….’
* * *
이곳엔 오딘과 보탄, 그리고 발데르 공작만이 있었다. 어찌 된 일인지 서재 안은 쥐 죽은 듯 고요했다.
얼마나 적막감이 흘렀던지 발데르 공작의 심장 뛰는 소리와 보탄 남작의 침 삼키는 소리가 다 들려왔다.
미풍에 흔들리는 촛불이 지금의 상황을 설명해주고 있었다.
탁자 위에는 얇고 긴 장검이 검갑째 놓여 있었고 잔뜩 긴장한 표정의 발데르와 그를 재미있다는 듯 바라보는 오딘의 표정이 상당히 대조적이었다.
“왜? 팔까지는 무리인가?”
그 물음에 발데르의 안색이 더욱 새파래졌다.
오딘은 무리한 요구를 하고 있었다.
자신의 힘을 빌리려면 그에 맞는 각오를 보여 주어야 한다며 한 팔을 내놓으라는 얘기를 해놓았기 때문이다.
이 난감한 상황을 어찌해야 좋을지 몰라 보탄도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몇 차례 오딘을 설득시키려 했지만 욕만 얻어먹었다.
‘팔, 팔이라……. 한 팔을 내놓으라? 후우~’
입 안에서 수십 번도 넘게 맴도는 소리였다.
남작을 통해 그를 불러내기는 했지만 이런 요구를 하리라고는 예상도 못했었다.
죽음보다 더한 치욕이었다. 성의 많은 수하들을 무슨 낯으로 본단 말인가.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 팔 하나를 내놓았다는 얘기가 흘러나가지 않는다면 그나마 다행이지만.
망설임이 길어지자 오딘은 차가운 눈빛으로 발데르를 쏘아봤다.
“사람을 꽤나 지치게 하는군. 왕국을 되찾는 것보다 그대의 팔이 더 중요한가 보지? 그런 정도의 각오라면 하지 않는 게 좋아.”
발데르는 발데르대로 자신을 채찍질했다.
‘목숨까지 버릴 위기에 처했는데 이깟 팔이야 대수겠는가. 복수만 도와준다면 영혼까지 바칠 수도 있다고 맹세하였지 않았나. 죽기를 각오했는데 뭔들 못할쏘냐.’
더 이상 기다리지 못해 오딘이 일어서려는데 발데르의 목소리가 그를 멈추게 했다.
“하겠소.”
심경의 변화가 있던 모양이었다.
찰나의 순간, 발데르는 어느새 검을 뽑아 자신의 팔을 내려쳤다.
애석한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보탄 남작은 고개를 돌려 버렸다.
솨악!
바람 소리가 일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비명 소리는 없었다.
그러자 보탄의 고개가 천천히 돌아갔다.
이윽고 그는 두 손가락으로 검끝을 잡고 있는 오딘을 발견할 수 있었다.
‘저, 저럴 수가!’
발데르의 검은 왕국에서 드문 명검이다. 날에 머리카락만 떨어뜨려도 잘려지는 검이거늘, 그 검을 맨손으로 잡고 있으니 이리 놀라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오딘은 허리를 펴고 크게 웃었다.
“하하하하하!”
그 소리가 서재를 온통 뒤흔들었다.
책장이 흔들리다 못해 헐겁게 꼽혀 있던 책들이 위태위태하게 흔들렸으며 바닥에 지진이 일어난 것처럼 들썩거렸으나 이상하게도 촛불은 꺼지질 않았다.
소리가 어찌나 컸던지 보탄과 발데르의 귀가 아리다 못해 머리가 띵해지는 느낌마저 들었다.
‘저, 정말 괴물이구나. 이자는 사람이 맞기는 맞는 걸까?
두 사람의 뇌리에 공통적으로 떠오른 생각이었다.
검을 치우며 오딘은 만족스런 미소를 지었다.
“그래, 그 정도의 각오는 보여 주어야 움직일 맛이 나지.”
보탄도, 그리고 발데르도 얼떨떨한 표정이었다.
오딘은 말을 이어갔다.
“좋아, 도와주지. 그러나 왕국을 되찾는 것은 그대들의 몫이 돼야 할 터. 분명히 기억해두어라. 오늘부터 그대들을 포함해 이 성에 있는 모든 것이 나 오딘의 아래 복속된다.”
“그렇게만 된다면 어떤 요구든 들어드리겠습니다. 하지만 어떻게……?”
“우선은 그 길을 알려 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