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교의 지존, 이계에 떨어지다
십만대산(十萬大山).
짙은 밤하늘 아래 한 남자가 아름다운 검무를 추고 있었다.
월영일섬(月影一閃).
검끝에서 한 줄기 달빛이 이니.
무쌍월영인(無雙月影忍).
하늘 아래 월영인을 피할 자 뉘 있으랴.
월하빙혼(月下氷魂).
영혼마저 베어낼 얼어붙은 저주의 검이여.
십삼로 흑룡패월(十參路 黑龍敗月).
달빛마저 집어삼킬 흑룡이 되리라.
그의 검에선 매초마다 엄청난 강기가 휘몰아쳤다.
기의 결집이었다.
여태의 초식으로 모인 강기들이 당장에라도 터질 듯이 팽창했다.
멀리서나마 그를 바라보던 사람들은 아름다운 검무에 넋을 잃기도 하였고, 두려운 마음이 들었던지 뒤로 물러서기도 하였다.
흑월파천무(黑月破天武).
검은 달이 하늘을 무너뜨리리라.
마지막에 이르러서는 대지가 꿈틀거렸다. 주변으로 검고 무시무시한 회오리바람이 생성되며 거대한 폭발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 * *
몇 날 며칠을 죽은 듯이 쓰러져 있었다.
눈을 떴을 땐 낯선 광경이 시야에 들어왔다.
둘레만도 족히 10장은 됨 직한 나무들이 빽빽이 들어서 있다.
악진은 의문을 지울 수 없었다.
‘교에 이렇게 큰 나무가 있었던가?’
흑룡무제(黑龍武帝) 악진.
정사마로 나뉘는 중원 무림에서 마교(魔敎)의 지존이라 불리는 자였다. 눈앞의 것들은 그가 수십 년을 넘게 마교에 몸을 담고 있었어도 결코 보지 못한 거목들이었다.
돌연 비릿한 액체가 목구멍으로 치솟았다.
“쿨럭!”
불현듯 기침과 함께 입에서 진한 핏덩이가 한 움큼 쏟아졌다.
내상을 입은 게 틀림없었다.
그는 소매 안에서 손수건을 꺼내 입가를 닦고는 곰곰이 기억을 되짚어보았다.
혼절하게 된 동기는 분명했다.
자신은 한 사람의 무림인이었다. 무공에 대한 갈망이 없었다면 어찌 강호에 몸을 담을 수 있었을까.
어마어마한 내공을 쌓았어도, 무림인들에게 꿈과 같다던 환골탈태(換骨奪胎)를 하여 젊음과 넘치는 힘을 부여받았어도, 세인들에게 감히 검존(劍尊)이라 일컬어지고 흑룡무제라는 별호를 얻어 마교의 교주로 취임되었어도 한 가지 못다 이룬 바람이 있었다.
흑월파천무(黑月破天武)란 무공이 그것이었다.
그것은 아주 오랜 세월에 걸쳐 창안되고 후대에 이르기까지 많은 고수들이 집대성해왔지만 누구도 완벽하게 재현해낼 수 없었다.
우연찮게도 그는 무림 역사상 누구도 깨닫지 못한 흑월파천무에 대해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
허나, 그것이 가져온 파장은 엄청났다. 막대한 기의 충돌로 흑월파천무는 거대한 폭발을 일으키며 검은 돌풍을 불러냈고 무시무시한 기의 소용돌이가 주변의 공간을 빨아들였다. 그 여파로 십만대산에 주둔하고 있던 마교의 무사 수백여 명이 목숨을 잃었다.
그라고 예외일 순 없었다.
강기막을 형성시켜 몸을 보호한다고 했지만 허사였다. 온몸이 부서지는 충격과 함께 그도 의식의 끈을 놓쳐 버렸다.
거기까지가 악진이 기억할 수 있는 전부였다.
이제는 여기 오게 된 동기를 추측해봐야 했다.
‘무림맹에서 작당을 하고 쳐들어왔을 리는 없다. 본 좌가 교주가 된 이래 그들과의 마찰은 극히 적었다. 그렇다면 교에 내분이라도 일어난 것일까? 그 때문에 누군가 날 이곳으로 데리고 온 것인가?’
그 역시 미심쩍은 부분이 있었다.
‘날 이곳에 데려왔다면 근처에 누구라도 있어야 할 게 아닌가. 수하들은 다 어디로 갔단 말이냐?’
악진은 곧 생각을 접어버렸다.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해 만반의 준비를 해두는 게 우선이었다. 무엇보다 지금은 내상을 입은 상태가 아닌가.
스무 걸음쯤 걷자 앞쪽의 나무에 다다랐다.
이어서 그는 앞의 나무와 좌우의 나무를 번갈아 바라보고는 중얼거렸다.
“사방위(四方位) 중 이곳을 북으로 잡아야겠군.”
그의 허리춤에는 고급스러운 검갑이 자리하고 있었는데 이 검갑의 모양새가 독특했다.
한 마리의 검은 용이 검갑의 하단부에서 상단부를 따라 검의 손잡이까지 휘감은 모습이었다.
때문에 이 검은 흑룡검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그가 흑룡무제란 별호가 생긴 것 역시 이 검과 연관이 있었다.
검을 빼들자 은은한 묵광이 일었다.
그는 검끝을 이용해 나무와 땅의 곳곳에 기하학적인 도형과 문자를 새겼다.
일단은 내상을 치료할 때까지 안전하게 몸을 숨기기 위해 기문둔갑(奇門遁甲)을 이용한 진법을 펼치려는 것이었다.
채 한 시진(약 2시간)이 흐르기도 전에 진이 완성되었다.
장소가 협소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가 진법에 관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의 경지에 이른 덕분이었다.
검끝으로 왼쪽 팔뚝을 그어 생채기를 내고서 흐르는 피를 주변에 뿌리는 의식까지 마치고서야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이렇게 주술을 겸하는 이유는 진의 위력을 높이기 위해서이다.
중원에는 내가요상술(內家療傷術)이라는 게 있다.
내가요상술은 내공을 이용해 내상을 치료하는 치료법인데 그 방법을 습득하기가 쉽지 않았고, 막대한 내공의 소모를 필요로 했다.
그는 이 내가요상술로 몸을 손볼 수 있는 몇 안 되는 위인 중 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굳이 그렇게 치료를 하여 기력을 낭비할 필요는 없었다. 이미 공을 들여 진법을 펼쳐 놨기에 이곳은 어디보다 안전하다.
또 혹시 모를 위협에 대비하기 위해서는 최적의 몸 상태를 유지해야만 한다.
그는 단환을 하나 꺼내 집어삼킨 후 눈을 감고 심신을 안정시키며 운공을 하였다. 그러다 보니 절로 의문이 일어 한쪽 눈썹이 살짝 찌푸려졌다.
‘어째서 이렇게 기가 충만한 것인가? 이대로라면 두 시진 안에도 치료가 가능할지 모르겠군.’
예상은 어긋나지 않았다. 한 시진이 조금 더 지나자 내상은 완쾌되었다.
중원이었다면 결코 불가능할 일이었다. 그것은 이 세계가 중원과는 다르다는 반증이기도 했다.
그렇게 그가 의구심을 떨쳐 버리지 못하고 있을 때였다.
푸드득! 푸득!
머리 위, 멀리서부터 들려오는 소리에 시선을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랬더니 얼마 후 머리 위로 집채만 한 새가 날아가는 게 아닌가.
거대한 날갯짓에서 일어난 바람으로 사람의 팔뚝만 한 잎사귀들이 사방으로 휘날렸다.
악진은 하도 어이가 없어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일평생 저런 새는 본 적도, 누군가에게 들은 기억도 없었으므로.
‘아직 낙담하기에는 이르다.’
마음을 다독여 가며 앞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오래지 않아 이상한 동물과 마주쳤다. 몸은 사람과 흡사했지만 머리는 돼지와 같았다. 거기다가 피부색이 초록색이라 도저히 사람으로 봐줄 수가 없는 것들이었다.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졌다.
‘괴조에 이어 이번엔 돼지 같은 사람이라니. 혹시 인피면구를 뒤집어쓴 건……?’
중원에도 종종 이런 무리들이 있었다. 정체가 발각될 것을 우려해 가면을 쓰고 다니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처럼 몸에까지 칠을 하며 다니지는 않았다.
당연히 악진은 이들이 오크(Orc)라는 종족임을 알 리가 없었다.
그 녀석들은 악진의 앞을 가로막고 녹슨 창을 앞세워가며 삿대질을 해댔다.
“취익~ 취이익(멈춰라, 인간).”
한 녀석이 성큼 다가서자 흑룡검이 소리 없이 검갑을 빠져나오며 번쩍였다. 오크들의 눈으로는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는 빠르기의 발검이었다.
치익!
흑룡검은 무턱대고 다가오던 오크의 옆구리 살을 찢고 지나갔다.
“꾸익, 꾸이익(아프다, 아파)!”
상처를 입은 녀석은 괴성을 지르며 난리 법석을 부리더니 뒤도 돌아보지 않고 줄행랑을 쳤다.
남은 녀석들도 겁을 먹었는지 허둥대며 달아나기 시작했다.
애초에 뒤쫓을 생각은 없었다. 악진의 시선은 시종일관 검에 묻은 피를 향해 있었다.
놀랍게도 피가 녹색이었다.
‘이해 불가한 일투성이로군. 도대체 여기는 어디란 말인가?’
날은 이미 어둑어둑해져 있었다.
불현듯 악진은 하늘 위에 떠 있는 2개의 달을 목격하게 되었다.
더는 부정할 수 없었다.
이곳은 자신이 살던 중원이 아니라는 것을.
막막했다.
담력이 크고 힘이 강하다 한들 무엇 하리.
졸지에 다른 세계에 와 있다면 누구라도 같은 심정일 것이다.
상심에 빠져 나뭇등걸에 등을 기대고 앉아 있던 악진은 돌연 일어서며 눈을 빛냈다.
“그 때문에 온 것이라면 그 때문에 갈 수도 있겠지.”
쿠쾅! 꽈르르릉!
숲을 찢어발길 것 같은 폭발이 생겼다. 놀란 동물들이 사방으로 달아나기 시작했으며, 지능이 뛰어난 오크나 오우거 같은 대형 몬스터들도 근처로 감히 접근할 엄두를 못 내고 있었다.
지축이 흔들렸으며 검은 폭풍이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폭풍이 점차 거세지며 거대한 나무들이 맥없이 쓰러지는가 하면 부서진 바위의 파편들이 어지럽게 흩날렸다.
그는 돌아가기 위해 무공을 펼친 것뿐이지만 그것이 이 숲엔 재앙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돌아가는 길은 어디에도 생기지 않았다.
결과가 만족스럽지 못했기에 악진은 근심 가득한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이 흑월파천무를 펼치는 것은 그에게도 상당히 버거운 일이었다.
기력을 쇠진했기에 운기를 필요로 했다.
하루가 지나고 다시 저녁이 찾아왔다.
또 한 번 숲에 재앙이 닥쳤다.
그 자리리에 선 채로 악진은 고뇌에 빠졌다.
‘왜일까? 왜 전과 같지 않은가?’
그때 숲의 앞쪽에서 한 사람이 걸어 나왔다.
악진은 실소를 흘렸다. 그가 자신이 거울을 보는 느낌이 들 정도로 너무도 많이 닮아 있었기 때문이다. 차이점이라곤 그의 몸 주변이 온통 초록빛을 띠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가 물었다.
-숲을 훼손시킨 것이 그대인가?
귀로 들려오는 것이 아닌 머릿속에 맴도는 말이었다. 악진은 문득 의구심이 들었다.
‘전음?’
-난 누구와도 대화를 할 수 있다. 그대 같은 이방인뿐 아니라 숲에 사는 동물들과 몬스터와도.
‘언령(言靈)인가?’
지금 악진이 생각하고 있는 게 맞을 것이다. 언령은 쓸 수만 있다면 모든 생물에게 의사를 전달할 수 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이는 상상 속에서나 존재하는 이론일 뿐, 중원에서는 누구도 이와 같은 능력을 가진 사람이 없었다.
악진 본인 역시도…….
이는 중급 정령 이상이 가진 능력들 중 하나였다.
그렇다고 해도 악진은 부러울 게 없었다. 그런 능력 따위는 애당초 관심도 없었으므로.
그가 느닷없이 자랑을 늘어놓는 것이 우스워서 도리어 비꼬듯이 말했다.
“그것 참 신기한 능력이군. 그래. 그 자랑을 하러 온 것은 아닐 테고, 용건이 뭐지?”
-숲을 훼손한 것이 그대냐고 물었다.
명백한 하대다.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는 것도 달갑지 않았는데 말투에서조차 자신을 깔보고 있다는 느낌마저 들자 악진도 기분이 상했는지 언짢은 표정으로 답했다.
“그렇다면?”
그는 묵묵히 말을 이어나갔다.
-난 숲의 정령 사이하드다. 이 숲은 우리들에게는 중요한 곳. 그대가 허락도 없이 이곳을 망가뜨렸기에 숲의 정령왕께서 날 보내셨다.
사이하드.
정령의 계보 표에 따르면 사이하드는 상급 정령이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자신의 존재를 이렇듯 구체화할 수 없으므로.
착잡한 심정을 감추지 못해 악진은 먼 하늘에 시선을 두었다.
“그래서 항의를 하러 온 게로군. 참 이상한 세계야. 집채만 한 새도 그렇고, 두 개의 달에다가 돼지 인간, 게다가 이번엔 숲을 보호하는 정령이라…….”
전혀 반성하고 있지 않은 태도였다.
사이하드는 이 오만한 인간을 손봐주어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론 조심스러운 태도를 보일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큰 폭발을 일으켰다면 자신이 감당하지 못할 힘을 지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이다.
그래도 마음을 먹은 일, 결정을 뒤바꿀 수는 없다. 무엇보다 인간 따위에게 기가 죽는다면 어찌 정령이라 할 수 있겠는가.
곧 사이하드는 땅속으로 스며들었다.
그러더니 악진의 앞으로 불쑥 튀어나오는 것이 아닌가.
미처 예상하지 못했지만 악진은 침착함을 잃지 않고 팔을 뻗어 정령을 밀쳐 냈다.
그 순간 땅속에서 뿌리가 솟아올라 악진의 다리를 휘감았다.
흑룡검에 손을 가져가려 했지만 이미 검은 정령의 손아귀에 들어간 상태였다. 그것은 난생처음 당해보는 공격이어서 당황한 감도 있었지만 사이하드의 빠르기가 예사롭지 않다는 것을 암시했다.
행동을 멈추고 악진은 고개를 젖혀 크게 웃었다.
“크하하하! 재미있군. 아주 재미있어. 본 좌를 이렇게 농락한 녀석은 네놈이 처음일 게야.”
쩌렁쩌렁한 소리가 숲을 한바탕 휘저어놓았다. 목소리에 바람이 실렸는지 잔가지들이 이리저리 흔들렸다.
이미 그와 거리를 벌려 놨지만 정령은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그가 앞으로 나서며 다리를 감았던 뿌리가 힘없이 끌려왔기 때문이었다.
우두둑!
늘어진 뿌리가 한 군데씩 끊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정령은 행동을 서둘러야 했다.
팔을 한차례 휘젓자 바닥에 깔린 나뭇잎사귀들이 허공으로 떠올랐다. 이어 팔을 뻗어 적을 가리키자 나뭇잎사귀들이 대상을 향해 암기처럼 날아갔다.
악진은 여유를 잃지 않고서 소맷자락을 털어 바람을 일으켰다.
그러자 기이하게도 나뭇잎사귀들은 악진의 몸에 다다르기도 전에 맥을 못 추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잔재주는 부리지 않는 게 좋아.”
-인정해야겠군. 그대의 힘은 내가 감당하기 힘든 것이라는 걸.
말을 마치며 정령은 땅속으로 자취를 감췄다.
물론 흑룡검도 함께였다.
악진의 입가에 싸늘한 미소가 번졌다.
“고얀 녀석이로군.”
지나치게 여유를 부린 탓이었다.
사실 마음만 먹었다면 다시 검을 회수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이기어검(以氣馭劍)을 구사할 줄 아는 몇 안 되는 무림인이었으므로.
지나간 일 후회하면 뭣 하리.
악진은 그 자리를 벗어나지 않았다. 아직 정리해야 할 생각들이 너무도 많기 때문이다.
사색이 길어질 무렵, 정령이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악진은 생각을 접고서 싸늘한 미소를 머금으며 그를 나무랐다.
“배짱 한번 좋군. 안 나타나는 게 신상에 이로웠을 텐데 말이야. 그래, 내 검은 어디에 두고 왔지?”
이때까지 정령은 이런 광오한 말을 내뱉는 인간이 있을 줄은 몰랐다. 하지만 이자에게는 그럴 만한 자격이 있었다.
그만큼이나 실력이 월등했기 때문이다. 상위 정령이라는 자신이 감당하지 못할 정도이니까.
어쩌면 그의 말대로 안 나타나는 게 나을지도 몰랐다. 그럼에도 다시 모습을 드러낸 건 나름의 계산이 있어서였다.
-정령계. 그곳에 숨겨 두었다.
“다시 가져오는 게 신상에 이로울 거야.”
-그리할 수 없다. 내 요구를 허락한다면 그때 돌려주기로…….
말이 끝나기도 전에 어느새 눈앞의 인간이 신형을 날리며 다가와 얼굴을 들이댔다.
너무 급작스러운 일이라 정령은 헛바람을 집어삼키다가 고통을 호소했다. 왜인지 모르게 옆구리가 베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어, 어떻게……?
냉소를 머금으며 악진은 오른손을 들어 긴 풀을 들어 보였다.
“뭔가 착각하고 있나 보군. 검이 없어도 널 쓰러뜨릴 물건은 사방에 널려 있어.”
정령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정말 풀에 마나(Mana)가 깃들어 검처럼 뻣뻣하게 서 있지 않은가.
그는 마나를 이렇게 자유자재로 다루는 인간이 있을 줄은 차마 몰랐다.
이대로라면 말을 섞는 것도 어려울 것 같아 이방인이 다음 공격을 펼치기 전 정령은 하늘로 솟구쳤다.
악진은 땅에서 손아귀에 꼭 잡히는 돌 한 개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허공을 향해 매몰차게 팔을 휘둘렀다.
쐐액!
무서운 무기로 돌변한 돌멩이가 정령의 어깻죽지를 관통하며 잔인한 소음을 유발했다.
퍼억!
그 즉시 정령의 형체는 산산이 흩어졌다.
분명 적이 사라졌는데도 악진은 돌멩이 하나를 더 집어 들고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
“다른 재주는 없느냐?”
아니나 다를까, 흩어졌던 정령이 악진의 뒤에서 다시 몸을 일으키는 중이었다.
그는 한 손으로 어깨를 감싸 쥐고 심히 고통스러운 얼굴로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순순히 패배를 시인했다.
-내, 내가 졌다.
“그럼 본 좌의 검을 가져오거라.”
여전히 일그러진 얼굴로 정령은 고개를 내저었다.
-그럴 순 없다. 내 요구를 들어줄 생각이 아니라면 결단코 돌려주지 않겠다.
악진이 뒤로 돌아서며 정령을 마주 보고 손아귀에 힘을 주었다.
그러자 손에 든 돌이 바스러지며 가루가 되어 흘러내렸다.
“내가 찾아보면 되겠지.”
그 말에는 ‘널 죽인 후에’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었다. 정령 역시 그 뜻을 모르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뜻을 굽힐 수 없었다.
-너로부터 도망칠 수도 있다. 또한 날 죽인다 하더라도 검은 찾을 수 없을 거다. 정령계는 우리 정령을 제외하고 누구도 들어갈 수 없다.
“그 말을 어떻게 믿지?”
-그곳은 이 세계에 존재하지 않는 곳. 걷거나 날아서는 도달할 수 없는 곳이다. 정 믿질 못하겠거든 그대가 검의 기척을 확인해보면 되지 않을까?
긴 세월 동안 함께해온 검이라 악진에겐 무엇보다 소중하고 친근한 검이었다. 때문에 기척을 확인하는 것은 크게 어렵진 않은 일이었다.
정말 흑룡검의 존재 자체가 느껴지질 않았다.
악진은 씁쓰름한 미소를 머금었다.
‘일이 묘하게 꼬여 가는군.’
몇십 년을 함께해온 검이다. 다른 이들에게는 매우 진귀한 보검 정도로 여겨졌을지 몰라도 그에게는 그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
홧김에 이 녀석을 없앤다면 흑룡검은 다신 찾을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 아니, 그럴 가능성이 높을 것이다. 자신이 아무리 마교의 사람이라고 하나 짧은 생각으로 일을 그르치는 인물은 아니었다.
“쩝, 어디 요구라는 것을 들어보기로 하지.”
-지금부터 일 년이다. 그 일 년 동안 네가 이 같은 파괴나 살생을 저지르지 않는다면 그때 돌려주도록 하겠다.
사실 정령은 사과를 받으려 왔다. 그러나 그것은 무리한 일이라 생각했다. 저 정도의 힘이라면 정령왕께서 정말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한 제압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의 몸속에 용솟음치는 마나들은 자신조차도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을 정도의 양이었다.
나름대로 저놈의 기분을 상하지 않게 하기 위해 생각해낸 요구였다. 그가 받아만 준다면 정령왕께는 잘 둘러대면 될 것이다.
악진은 정령의 말을 곱씹어보았다. 그는 무림인이었기에 허튼 약속을 하지 않는다. 말이나 행동엔 무게가 실려야 하며 한번 뱉은 말은 될 수 있으면 지켜야 했다.
‘일 년이라……. 조용히 사는 게 문제는 안 되겠지. 기왕 일이 이렇게 된 것 별수 없군. 오랜 세월을 함께했으니 저 녀석을 잠시 쉬게 해줄 때도 되었겠지.’
오래 생각할 것도 없었다. 그의 요구는 크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으므로.
결국 악진은 승낙의 뜻을 내비췄다.
“검이 없다고 해서 무공을 못 쓰는 것도 아니니 무리될 건 없겠지. 하나, 살생을 하지 말라는 것은 나더러 풀이나 나무껍질만 뜯어먹으라는 얘긴가?”
정령도 생각에 잠겼다. 그러다가 잠깐 기다리라는 말을 하고서 다시 땅속으로 숨어들었다.
얼마 후 그는 손에 주머니 하나를 들고 나타났다. 그리고 그것을 악진에게 건네주었다.
-숲을 나서면 사람들이 사는 곳이 나온다. 이 안엔 인간들에게 통용되는 돈이 들어 있다. 흙빛의 동전은 페소이고 은색 빛깔은 은화, 금색 빛깔이 나는 것은 금화이다. 그 안에 든 돈이라면 먹고사는 데 지장은 없을 것이다.
생각지도 않은 호의가 나쁘지 않았던지 악진은 조금 누그러진 태도를 보였다.
약간이나마 적의가 가라앉은 듯하자 정령은 욕심을 부려 아까의 호기심을 들춰냈다.
-숲을 훼손한 이유를 물어도 되겠나?
“이 무공을 펼치다 이곳으로 오게 되었다. 이곳은 내가 살던 곳이 아닌 전혀 낯선 세계라는 말이지.”
-그래서 그 무시무시한 폭발을 일으켰군. 그런데 열리지 않았나?
악진은 묵묵히 고개만 끄덕였다.
잠시 생각에 잠기던 정령이 그에 대하여 조심스레 추측을 던졌다.
-아마도 마나 홀을 건드린 모양이다.
“마나 홀?”
-그렇다. 아주 가끔씩 다른 세계와 통하는 문이 생긴다. 수십 년, 혹은 수백 년에 걸쳐 한 번씩 나타나곤 한다. 그 역시 바위 안이나 땅속, 혹은 산이나 물속에 생길 때가 많아 너희 인간들이 발견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그럼 돌아가는 방법은?”
-그건 나도 모른다.
몇 마디 대화가 더 오간 후에 정령은 미련 없이 자리를 떠났다.
홀로 남겨진 악진은 그루터기에 걸터앉아 깊은 상념에 젖어들었다.
* * *
짙은 눈썹은 은은하게 붉은빛이 감돌았으며 깊고 그윽한 눈은 뭇 여성들을 설레게 만들었다.
검은 머리카락은 강인함을, 오뚝한 콧날에 다부진 입술은 한껏 매력을 발산했다.
그중에서도 왼쪽 이마 옆에 검은 용을 그려 넣은 자문이 흐릿하게 드러났다.
그것이 사람들의 눈에 비친 악진의 모습이었다.
반면에 악진은 이곳 사람들의 외모가 크게 낯설지 않았다. 서장에서 온 승려들이나 상인들이 저런 모습들이었으므로.
‘지켜본 바에 의하면 이곳 역시 사람이 사는 곳이다. 일단은 이들과 어울려 살다가 돌아갈 방법을 모색해봐야겠다. 뭐, 눌러 사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
이 결심을 굳히기까지 무려 일주일의 시간이 흘렀다. 고뇌 끝에 내린 결정이었다. 답답하고 막막하다고 그대로 주저앉아서야 쓰겠는가.
보통 사람들 같았다면 좌절하고 절망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악진은 어떤 것에 부딪혀서도 굴하지 않았다. 바로 지금처럼…….
결국 그 결심이 사람들 틈바구니에 섞여든 계기가 되었다.
그가 아직은 낯선 것이 많았던지라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던 중 앙칼진 외침 소리가 들려왔다.
“저 녀석입니다!”
악진은 그 말뜻을 알아듣지 못했지만 곧장 소리가 자신을 향했음을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
적의 어린 시선들이 쏘아보고 있었다.
모두가 무기가 될 만한 것들을 손에 지닌 채였다. 인원수만도 족히 20명은 되어 보였는데 그중 몇 명은 다리나 팔에 붕대를 칭칭 감고 있었다.
그들의 면면을 차근차근 바라보다가 악진은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내 신세가 어쩌다 이렇게 됐나.’
이 일의 근원은 얼마 전에 일어난 일련의 소동에서 빚어졌다.
그는 며칠 전 소매치기를 목격했던 일이 있었다. 본인의 일도 아니거니와 그저 사는 게 힘이 들어 그랬기로서니 하며 넘어가려 했었다.
그러나 그래줄 수 없었다. 그 녀석은 자신에게까지 손을 뻗쳤기 때문이다.
하도 괘씸해서 손을 써 몇 군데를 분질러놨었다.
그게 원인이 되었다.
다음 날은 3명이 찾아왔었다.
그리고 또 셋째 날엔 5명이 찾아왔었다.
모두 성한 몸으로 돌아가지 못했음에도 사람 수는 점점 늘어나더니 오늘에 이르러서는 이렇게 불어난 것이다.
원래 시정잡배라는 놈들이 악질인 경우가 많아 패배를 인정 못하여 수단 방법 가리질 않고 끈질기게 찾아오곤 한다. 지금처럼.
정령과의 약조만 아니었다면 아마도 이 자리에 다시 나타난 이들은 없었으리라.
오늘이 평소와 다른 점이라고는 그들보다 상위 계층의 사람들로 보이는 자들이 가세했다는 것이었다. 그중 한 명은 양철로 된 갑옷과 잘 벼린 검으로 무장하고 말에 올라 있었고, 다른 한 명은 외모상으로는 노인이었는데 두꺼운 천으로 만들어진 상하 일체형의 꽤나 헐거워 보이는 옷을 걸치고 있었다. 그는 무기 대신 꼬부라진 지팡이까지 들고 있어 절로 의구심을 들게 했다.
무리들은 한참을 소곤대더니 악진의 주위를 에워쌌다.
그러나 악진과 이미 마주쳤던 무리들은 거리를 좁히기는커녕 눈이 마주칠 때마다 기겁을 하며 뒤로 물러섰을 뿐 감히 다가오지 못했다.
악진 역시 애당초 저 녀석들은 안중에도 없었다. 대신 말을 타고 있는 자들에게 시선을 고정시켰다.
‘저 녀석들이 더 높은 놈들인 모양이로군. 뿌리를 파헤쳐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계속해서 몰려들 것이다. 감히 본 좌를 귀찮게 하다니…….’
그때 노인이 지팡이를 번쩍 들더니 크게 외쳤다.
“파이어볼(Fireball)!”
그러자 지팡이의 상단부에 불기운이 응집되더니 어느 순간 악진을 향해 빠르게 날아왔다.
분명 눈으로 포착했기에 피할 수가 있었다.
하지만 황당해도 너무 황당했던지라 멍하니 자리에 서 있었으므로 꼼짝 없이 불덩어리에 부딪혔다. 지팡이에서 불덩이가 나오리라고는 미처 예상치 못했던 것이다.
퍼엉!
폭발 때문에 자욱한 먼지가 일면서 악진의 모습이 희뿌옇게 가려졌다.
무리들은 기뻐서 아우성을 쳤다.
“와아!”
“하하하! 역시 파르티잔 님이십니다. 저 포악한 바바리안(Barbarian:이방인) 녀석도 파르티잔 님의 마법 앞에선 별수 없군요.”
마법사는 긴 수염을 쓸어내리며 만족스런 웃음을 지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네. 어쩌겠는가? 영주님께서는 저놈을 잡아오라고 하셨지만 얘기를 잘 드리면 저자의 처리를 그대들에게 맡길 수도 있네.”
뻔한 요구다. 돈을 바라는 것이리라.
자연히 소동을 일으킨 장본인과 동지들은 떳떳치 못한 직업을 가지고 있었으니 영주를 본다고 해봐야 좋을 게 하나도 없었다.
마지못해 소매치기들은 그의 비위를 맞춰 실실 웃었다.
“헤헤, 그래주신다니 감사합니다.”
제일 처음 문제를 일으켰던 청년이 품속에 손을 집어넣어 돈뭉치를 꺼내려 했다.
그 순간 안개가 걷혀지며 이방인의 형체가 드러났다.
그러나 기대 이하였다. 그는 너무도 멀쩡해 보였으므로.
오히려 이죽거리기 시작했다.
“크큭, 재미있는 놈일세. 요술을 부리다니 말이야.”
화들짝 놀란 소매치기 청년은 두려움이 앞서 돈을 건네지도 못한 채 파르티잔의 말 궁둥이 뒤로 몸을 숨겼다.
파르티잔은 미간을 찌푸렸다. 수금도 못했거니와 회심의 공격이 빗나갔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니었다.
이방인의 배 부분에는 타다 남은 불씨가 아직도 옷을 태우고 있었다.
‘어, 어떻게 저럴 수가!’
파이어볼은 어중간한 나무는 물론이요, 바위도 부술 수 있다.
그가 경악하고 있다는 사실도 모르고 소매치기 일당들은 초조한 마음으로 어서 다음 마법을 펼쳐 주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악진은 옷을 태우던 불을 맨손으로 쓸어내리며 노한 눈길로 파르티잔을 쏘아보았다.
“배짱 좋군, 본 좌의 옷을 태우다니 말이야.”
그를 일벌백계해야겠다는 생각으로 걸음을 내디디는데 양철 갑옷을 걸친 기사가 말에서 땅으로 내려서며 무거운 소음이 일었다.
악진은 기사에게 시선도 주지 않고 곧장 파르티잔을 향해 다가갔다. 그러는 동안 기사는 비장한 각오로 검을 뽑으며 거리를 좁혀 왔다.
소매치기 일당들은 숨죽여 둘의 대결을 바라보았다. 이방인이 몸이 날래긴 해도 무기나 방어구가 없으니 틀림없이 크게 다칠 것만 같았다.
기사의 검끝이 파고드는 찰나에 악진은 비켜서며 가볍게 공격을 피하고 오른쪽 팔꿈치로 그의 가슴을 가볍게 후려쳤다.
우지직!
단 한 방이었다. 그 한 방에 기사는 어이없게 나가떨어지고 말았다.
또한 갑옷이 우그러져 있었는데 이것은 결코 악진이 사정을 봐주지 않아서가 아니었다.
양철 갑옷이라고는 하지만 지극히 얇았던 탓이었다.
또 예상이 어긋나고 말았다.
기사의 패배에 대한 충격은 일파만파 커져 가며 파르티잔은 즉시 말 머리를 돌렸으며, 소매치기 일당들도 지레 겁을 먹고는 비명을 지르며 여러 패로 갈라져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들을 바라보다 악진은 어렵지 않게 결단을 내렸다.
‘더 분질러봤자 다른 녀석들이 올 게 뻔할 테니 저 녀석을 쫓아가는 게 낫겠군.’
파르티잔은 이방인이 기사의 말을 빼앗아 뒤쫓아 오는 걸 알면서도 진로를 바꾸지 않았다. 성에 도착하면 뾰족한 수가 생길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아니, 오히려 계속 쫓아오기만을 바라고 있었다.
‘성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네놈은 죽은 목숨이다.’
파르티잔의 강고한 믿음 덕에 악진은 소리 죽여 직접 경공을 펼쳐야 하는 수고를 덜 수 있었다.
파르티잔은 차마 모르고 있었다. 자신이 영주에게 커다란 재앙을 들고 가고 있다는 것을.
* * *
이글레스성.
“으아아아아!”
“내 팔……!”
“내 다리……!”
“막아라! 막으란 말이다!”
잔뜩 겁에 질린 소리와 비명 소리들.
어떤 이는 팔을 부여잡고 괴로워하는가 하면, 또 어떤 이는 다리를 부여잡고 괴로워했다.
물론 악진은 그들의 신체 일부를 자르지는 않았다. 행여 출혈 과다로 죽게 되면 곤란할 것이니까.
끊임없이 고함 소리와 욕설, 고통을 호소하는 소리들이 들려왔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 소리들은 점차 가까워지고 있었다.
조르바 폰 이글레스 자작은 전쟁이라도 터진 줄만 알았다.
황급히 나가보자 성 아래로 처연하게 널브러진 병사들이 시야로 들어왔다.
몇몇은 고통스럽다고 비명을 질러댔지만 그렇지 못한 자들이 반수를 넘었다.
얼핏 보면 너무 평온하게 늘어져 있어 흡사 자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상했다. 적군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병사들이 한꺼번에 미쳤다거나 간이 배 밖으로 나오지 않는 이상 단체로 땅바닥에 드러누워 잠을 청할 리도 없질 않은가.
의문을 떨치지 못하고 있을 때, 돌연 한 이방인이 복도를 따라 축 늘어진 파르티잔의 멱살을 잡고 질질 끌고 오는 게 보였다.
몇몇 기사들이 검을 빼든 채 그를 죽일 듯 노려보면서도 감히 대들진 못하고 조심스럽게 따라오는 중이었다.
조르바는 눈을 부라리며 소리쳤다.
“웬 놈이냐?”
자작의 뒤쪽에도 기사들이 있어서 포위된 형국이었지만 이방인은 전혀 움츠러든 기색이 없었다.
악진도 무뚝뚝한 표정으로 그를 향해 물었다.
“네가 이놈들의 우두머리냐?”
서로가 서로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더 말을 섞는 게 불필요하다고 생각되었는지 조르바도, 그리고 악진도 입을 다물었다. 그러다 조르바는 시선을 더 멀리 두어 기사들에게 물었다.
“다른 놈은 없느냐?”
악진의 뒤쪽에 있던 기사들 중 한 명이 당황해하며 답했다.
“그, 그렇습니다.”
조르바는 더 크게 경계심을 곤두세워야만 했다.
‘혼자 여기까지 들어온 거라면 보통내기가 아니다. 일단 대화를 해봐야겠다.’
그렇게 생각을 굳히며 조르바는 뒤쪽의 기사에게 명했다.
“그것을 가져오도록.”
“네.”
기사는 머리를 숙이며 대답하고는 복도 끝으로 재빨리 달려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팬던트 하나를 들고 왔다.
“저자에게 건네주어라.”
기사는 잠시 망설이다가 악진에게 다가가 펜던트를 건네주며 목에 걸라는 시늉을 해 보였다.
악진은 별달리 경계심을 갖지 않고서 그 기사가 시키는 대로 행했다.
기다렸다는 듯 조르바 자작의 입이 열렸다.
“트랜슬레이터(Translator)라 한다. 그걸 목에 걸고 있으면 나와 의사소통이 가능할 것이다.”
악진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정말 그의 말이 목걸이를 통해서 그대로 전달이 되고 있질 않은가.
“그대는 어쌔신(암살자)인가? 누가 보내서 온 것인가?”
악진이 가벼이 고개를 젓는 것을 보며 조르바는 내심 안도했다.
언젠가 이웃 나라의 귀족에게 기사들이 한꺼번에 달려들어도 감당하지 못할 실력이 굉장한 어쌔신이 출현했다는 얘기를 들었었다.
그런데 혹시 누군가 앙심을 품어 그자를 보낸 게 아닌지 걱정이 되었었기 때문이다.
마음이 놓이다 보니 한편으론 화가 났다. 대수롭지 않은 녀석이 난동을 피웠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왜 이런 난동을 피웠는가?”
자신을 추궁하는 듯한 말이 달가울 리 없었기에 악진은 씁쓰름한 미소를 머금었다.
“네놈의 부하들이 감히 본 좌를 귀찮게 했느니라.”
물론 철저한 착각이었다. 조르바는 그런 일을 시킨 적이 맹세코 없었으므로.
때문에 그는 잔뜩 인상을 찌푸리며 언성을 높였다.
“내 수하들이 도둑질이라도 했다는 말이냐?”
“그 증거가 여기 있다.”
악진은 실신해 있던 파르티잔을 한 손으로 가볍게 던져 버렸다.
이윽고 파르티잔이 자작의 앞으로 떨어졌는데 그 충격으로 정신이 들었던지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저자가 당신이 소매치기 일당을 도왔다고 하였소. 그 말이 사실시오?”
조르바의 이 물음은 일의 자세한 경위를 따지고자 함이었다. 보고는 받았지만 그것은 파르티잔이 자청해서 한 일이었으므로.
파르티잔은 당황해하며 손을 휘저었다.
“그럴 리가 없습니다. 혹 그렇다 하더라도 그들이 그런 자들이라는 것은 결단코 몰랐습니다. 용서하십시오.”
사실 조르바 자작 역시 그를 다그칠 생각은 아니었다. 그러나 지금의 사태는 간과해서는 안 될 문제였다.
적잖은 병사들이 다쳤다. 마땅히 책임 추궁이 뒤따라야 할 것이었다.
평소 때와는 다르게 조르바 자작은 파르티잔을 모질게 쏘아보고선 다시 악진에게 시선을 돌렸다.
“만일 그 말이 사실이라고 해도 너는 큰 실수를 저질렀다. 여기는 엄연히 내 영지고 법이 있다. 그 책임을 물어야겠다. 여봐라!”
“네, 주군!”
“분부만 내리시기를…….”
기사들의 우렁찬 대답이 복도 끝까지 길게 울려 퍼졌다.
조르바는 다음 말을 이었다.
“저놈을 생포해 엄히 문책하겠다. 반항이 거세다면 이 자리에서 죽여도 좋다.”
듣는 악진으로서는 너무도 어이가 없는 말이었다. 그 때문인지 웃음이 터졌다.
“크하하하, 하하하하하!”
기이한 일이었다. 웃음소리가 점차 커지더니 급기야는 건물 내부에 쩌렁쩌렁 울리며 바닥이 흔들리는 것 같은 착각마저 일으켰으므로.
괴로운 나머지 조르바 자작과 기사들, 파르티잔까지 다급하게 귀를 틀어막았다. 그럼에도 귀청이 떨어질 것 같지 않은가.
그제야 조르바는 일이 크게 틀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악진은 표정을 가다듬고 입술을 말아 올려 윗니를 드러내며 이죽거렸다.
“뭐가 어쩌고 어째? 본 좌를 죽인다? 재미있는 말이로군. 그럼 그대들의 실력을 견식해보기로 하지.”
기사들은 조금 전 그의 웃음소리가 신경 쓰이기는 했지만 두려워하진 않았다.
저자는 맨손이고 자신들에게는 검까지 있다.
그래도 기사로서의 체면이 있는지라 제일 먼저 나선 자가 물었다.
“무기가 필요한가?”
그가 허세를 떠는 게 우스웠던지 악진은 미소를 머금은 채 가볍게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후회하지 말도록.”
기사는 말을 마치고는 곧장 몸을 날리며 어깨를 한껏 틀었다.
그 자세 그대로 베어버릴 기세였다.
그래도 될 수 있으면 생포하란 말이 있었기에 손속에 약간의 인정을 두었다.
그 순간 악진은 슬쩍 비켜서며 오른쪽 다리를 내밀었다.
쿵!
미처 예상하지 못했기에 기사는 발에 걸려 사납게 나자빠졌다.
하필 코부터 부딪혔는지 양쪽 콧구멍으로 피가 줄줄 흘러나왔다.
그는 주군 앞에서 창피한 꼴을 당한 것에 화가 났기에 서둘러 몸을 일으키려 했다.
그러나 어찌 된 영문인지 일어날 수가 없었다.
쓰러지는 순간 악진이 재빨리 승근혈(承筋穴)을 짚어놓았던 것이다.
승근혈은 경우에 따라서 온몸을 마비시키기도 한다. 그것이 기사가 일어나지 못하는 이유였다.
사태 파악을 못하고 다른 기사가 나섰다.
“잔꾀가 있는 놈이로군. 내가 상대해주마.”
하지만 큰소리친 것과는 다르게 좀 전과 상황이 똑같이 되었다.
우습게도 그 역시 먼저 쓰러진 기사의 옆에서 코피를 줄줄 쏟으며 꼼짝달싹 못하였다.
‘멍청한 녀석들 같으니라고.’
말은 안 했지만 다른 기사들은 속으로나마 멍청하게 당한 두 사람을 그렇게 욕했다.
다시 한 기사가 나오려는데 누군가가 다급하게 소리쳤다.
“경거망동하지 마라!”
목소리의 주인은 기사단장인 다란 경이었다. 검술 실력으로 따지자면 이 성내에 그를 따라올 자가 없었다.
오로지 그만이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하고 있는 듯했다.
악진은 그를 뺀 나머지를 싸잡아 비웃었다.
“크큭, 떨거지들 중에 그나마 나은 녀석이군. 빨리 본 좌를 제압하지 못한다면 저 녀석들은 출혈 과다로 죽을지도 모른다.”
물론 농이었다. 코피 좀 흘린다고 죽을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그러나 기사단장인 다란 경만은 그의 걷잡을 수 없는 무력을 실감하며 판단력이 흐려져 그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는 중이었다.
“극히 위험한 자다. 모두 합심해 쓰러뜨려야 한다. 서둘러라!”
명령을 하면서도 다란의 눈빛은 비장한 각오로 물들었다.
때문에 기사들 역시 생각을 달리해야만 했다.
동시 다발적으로 앞뒤에서 검을 빼든 기사들이 악진을 향해 짓쳐들었다.
그때까지 한발 물러선 채 다란은 틈을 엿보고 있었다. 기회를 노릴 셈이었다.
하지만 이방인은 어찌나 빨리 움직이는지 움직일 때마다 잔상을 남겼다. 조금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의 빠르기였다.
지켜보던 다란의 눈 또한 홱홱 돌아갔다. 틈을 노리기는커녕 기사들이 속속들이 쓰러지는 광경을 눈으로 좇는 것만도 버거움이 따랐다.
검을 든 다란의 팔이 부르르 떨렸다.
‘도, 도저히 대적할 상대가 아니다…….’
그가 이렇게 당황하고 있을 때 한 기사가 몸을 돌리며 일어서려 하고 있었다.
그때 악진이 한 손으로 그의 목을 땅으로 짓누르며 차갑게 웃었다.
“점혈하는 걸 깜빡했군.”
이윽고 악진의 오른 주먹이 기사의 얼굴 쪽을 향해 매섭게 파고들었다.
그 모습에 놀란 기사가 겁을 먹고 질끈 눈을 감았다.
우지끈!
꼼짝 없이 죽었다고 생각했던 기사는 심장이 터져 나갈 것같이 뛰는 것을 느끼고는 자신이 살아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러면서 두려움에 물든 눈이 조심스럽게 옆을 훑어보았다.
튼튼한 돌로 된 복도의 바닥이 사방으로 갈라져 금이 가 있었으며 그의 것으로 추정되는 주먹 자국이 선명하게 남겨져 있었다.
기사는 벌벌 떨 뿐 감히 그를 밀쳐 낼 생각을 못했다.
그마저 혈도를 짚어 꼼짝 못하게 하고서 악진은 남아 있는 두 사람에게 다가갔다.
믿기지 않는 광경들을 목격한 후라 다란은 감히 맞설 엄두가 나질 않았다. 그냥 이대로 몸이 굳어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뭐, 뭘 하는 게냐? 어서 저자를 막아라. 막으란 말이다!”
주군의 명령에 마지못해 나아가려는데 괴물 같은 이방인이 파고들었다.
뻑!
미처 피할 새도 없었다. 그저 복부에 주먹을 한 대 맞은 것뿐인데도 다란 경은 보기 흉하게 나뒹굴었다.
일어날 수 없었다. 아니, 일어서는 게 가능하다 하더라도 온몸의 마나가 흩어져 힘이 풀려 버렸으니 맞설 힘이 없었다. 이럴 땐 그냥 누워 있는 게 상책이었다.
조르바는 기겁을 하고 있었다.
믿었던 기사단장마저 단방에 나가떨어졌다. 검술에 조예가 있다고 하지만 자신이라고 별수 있겠는가.
이제 자신의 차례가 다가왔음을 직감하며 조르바 자작은 벌벌거리며 뒷걸음질을 쳤다.
그러는 동안 어느새 끔찍한 대상이 다가와 있었다.
그가 말했다.
“이제 네놈만 족치면 되겠군. 안 그래?”
“오, 오지 마.”
이제 체면 따위는 중한 것이 아니었다. 저들 같은 몰골이 되긴 싫었다. 조르바는 발악하듯 뒤로 돌아서 내달리려 했다.
그러나 악진의 손에 뒷덜미가 잡히고 말았다.
“원래 윗대가리들은 많이 봐주는 편이지. 그러나 네놈의 경우는 다르다. 각오하는 게 좋을 게야.”
“자, 잠깐! 크윽.”
뒷덜미가 잡혔는데 앞으로 나가려고 하자 목이 조여졌다.
그래도 할 말을 해야겠다고 결심했지만 이방인은 사정도 봐주지 않고 자신을 끌어당겨 팔뚝으로 목을 휘감았다. 그리고 귀에 얼굴을 들이대며 사악한 음성으로 말했다.
“최대한 목에 힘을 많이 줘야 할 거야. 꺾어지지 않으려면…….”
악진의 팔이 기울어질수록 조르바의 목은 힘도 못 쓰고 따라 기울었다.
점점 이상한 자세가 되어갔다.
목이 졸려 차마 말도 꺼내지 못하는 상황.
조르바는 하늘이 점점 깜깜해지는 것을 느꼈다.
두둑! 두두둑!
‘아아, 여기서 생을 마치게 되는구나. 이것은 내 목뼈가 부러지는 소리겠지. 지금 내 모습은 얼마나 흉할까.’
탄식과 함께 조르바의 몸이 바닥으로 쓰러졌다.
조르바는 목이 꺾어져 상당히 이상한 모습이었다.
그래도 정신은 말짱했던지 변변한 저항조차 못해보고 쓰러진 기사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애꿎은 기사들을 욕하는 것이었다.
‘멍청한 자식들. 한 녀석을 제압하지 못해 저 꼴이라니. 내 너희를 가만두지 않으리라.’
이빨이라도 갈려고 했지만 뜻대로 되질 않아 혀만 잘근잘근 씹었다.
난데없이 이방인이 쓰러져 있는 기사들에게로 다가갔다.
그러더니 팔다리 중 어느 한 군데씩 잡아 분지르는 게 아닌가.
“크아아악!”
기사들은 저마다 멀쩡한 팔로 땅을 내려치며 고통을 호소하는가 하면 고통을 참지 못하고 이리저리 몸을 뒹굴었다.
끔찍한 광경에 조르바는 질끈 두 눈을 감아버렸다.
차마 귀를 닫지 못한 터라 녀석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시끄럽다. 제일 소리가 큰 녀석은 팔다리 모두를 분질러버리겠다.”
정말 그러고도 남을 위인처럼 여겨졌는지 팔이나 다리가 부러지며 두두둑! 하는 소리가 들려도 기사들은 죽을상을 지을 뿐 감히 큰 소리로 고통을 호소하지 못했다.
“끄으으으으.”
눈을 감은 상태로 조르바는 자신에게 왜 이런 재앙이 닥쳤는지 곰곰이 되짚어보았다. 이유가 있다면 저 늙어빠진 마법사 녀석이 소매치기 일당을 도와 저 악마의 화를 돋운 일이 될 것이요, 한 가지 이유를 더 들자면 그도 저 멍청한 마법사 녀석이 악마를 끌고 와 성안으로 들인 일이 될 것이다.
그에 대항할 수 없다는 걸 깨달은 조르바는 당장에라도 파르티잔의 목을 졸라 죽이고 심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아직은 그럴 수 없었다. 또한 그래서도 안 되었다. 거사를 눈앞에 두고 있으므로.
문득 조르바의 눈두덩이 위로 시꺼먼 장막이 드리워졌다. 눈은 감았어도 앞에 어떤 물체가 가로막았다는 것쯤은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물체가 무엇이라는 것도 짐작이 가능했다.
겁이 나서, 두려워서 눈꺼풀이 찢어져라 더 꼭 감았다.
곰이야 가끔 죽은 척을 하면 돌아가 준다지만 악진은 곰이 아닌 관계로 그래줄 수 없었다.
그가 쪼그리고 앉아 조르바의 눈꺼풀에 대고 불렀다.
“이봐.”
대답이 없다. 때문에 협박이 나왔다.
“빨리 대답하는 게 신상에 이로울 거야.”
“눼… 에!”
조르바의 눈꺼풀이 번쩍 치켜떠지며 어수룩한 대답 소리가 나름 힘 있게 터져 나왔다. 목이 꺾어지며 턱까지 돌아간 상태였으니 어련하랴.
“네가 우두머리이니 책임져라. 다시 그 무리가 본 좌를 귀찮게 할 시에는 오늘처럼 간단히 끝나지는 않을 게야.”
“눼.”
혀 꼬부라지는 목소리로 답하자 악진은 그때서야 유유히 성을 빠져나갔다.
이글레스성에 분 태풍은 그것으로 잠시 끝을 맺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