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랭커 사용 설명서-114화 (114/115)

114.

유도현의 알 수 없는 말에 내가 눈썹을 찡그렸다. 아무리 현실보다 꿈이 행복하다 해도, 지금 이 상황이 현실이 될 수 없단 것쯤은 알았다. 내가 웃으며 유현재의 품을 벗어났다.

“그랬으면 진짜 좋았겠네.”

“왜 아니라고 생각해?”

“그야……. 꿈이 맞으니까 여긴…….”

내가 말을 얼버무리자 유현재가 어린아이를 달래듯 무릎을 굽히고 앉아 내 손을 잡았다.

“이게 원래 네 현실이 맞아.”

“자꾸 뭐라는 거야…….”

“이렇게 살았어야 했어, 우리는. 이게 우리의 운명이었어. 미래였고.”

“…….”

“도현이 형 때문에 모두 바뀐 거야. 엉망이 됐고. 그 형은 우리의 이 안온한 운명을 질투했으니까.”

“…….”

“네가 겪었어야 할 미래는 이렇게 따뜻했는데, 왜 그렇게 불행하게 살아야 했을까.”

“…….”

“다 형 때문이야. 유도현 때문.”

날카롭게 힐난하는 내용치고는 어조는 여전히 부드러웠다. 나는 그런 유현재를 말없이 응시했다. 그가 유도현을 저주하고 싫어하는 것은 당연했다. 자신의 삶을 통째로 앗아 간 사람이니까. 나는 유도현을 내려다보고 대답했다.

“그럼 이제 나는 원래의 삶을 살 수 있는 거야?”

“응.”

“여기서?”

“응.”

“원래 내 미래였던 이 공간에서?”

“그래. 여기서 우리는, 원래 진행되어야 했던 우리의 운명에 맞춰 살면 돼.”

나는 그제야 머리가 정리되는 것을 느끼며, 무릎을 굽히고 앉아 있던 유도현의 시야에 맞춰 쭈그려 앉았다. 유도현은 언제고 변하지 않을 것 같은 따스한 표정을 지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우리는 한참 눈을 맞추고 서로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손가락 사이로 흩어지는 검은 머리칼, 부드러운 피부 같은 것이 눈물겨울 정도로 그립고 좋았다.

“현재야.”

“응.”

“이곳은 내가 있어야 할 곳이 아니야.”

“…….”

유현재가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눈시울을 붉혔다. 그럼에도 무어라 반박하지는 않았다. 나 또한 목이 메는 것을 참으며 말을 이어갔다.

“원래 내가 살아야 했던 미래라는 건 없어.”

“…….”

“난 그걸 깨부수고 너와 행복해지려고 수없이 죽고, 살아난 거야.”

“…….”

“너는 이곳의 찬희를 지켜. 나는, 나의 현재를 지킬게.”

유현재가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동시에 그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졌다. 어떤 의미의 눈물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나는 더 이상 그를 달래지 않았다. 그는 나의 현재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

눈을 뜨기는 매우 어려웠다. 눈꺼풀에 본드라도 붙인 듯 끈끈하게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힘을 줘 겨우 눈을 뜨니, 익숙한 듯 낯선 천장이 시야 안으로 들어왔다. 고개를 돌릴 때마다 목뼈가 부서질 듯 아파왔지만 참으며 나는 누군가를 찾았다. 내가 눈을 뜨면 언제라도 내 시야에 그가 있을 것을 알았다. 예상대로 보조 침대 위에 유현재가 걸터앉아 졸고 있었다. 목소리를 내자 잔뜩 잠긴, 이상한 긁는 소리가 났다. 얼마나 누워 있었던 거지. 일주일? 한 달? 대충 가늠할 새도 없이 유현재가 잠에서 깼다. 우리의 눈이 마주쳤다. 유현재는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가만히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찬희야.”

“……응.”

유현재가 몸을 일으켜 내게 다가왔다. 그의 눈에서는 벌써 하염없이 눈물이 쏟아지고 있었다. 깨기 직전 꿈에서 봤던 얼굴과 비슷해 기분이 묘해졌다.

“울지 말고 의사나 불러…….”

유현재는 훌쩍이면서도 내 현실적인 지시에 순순히 따라 주었다. 급하게 달려온 사람은 의사를 포함한 여러 명의 관계자였다. 개중에는 전정우도 있었다. 전정우의 표정은 복잡했다. 그의 얼굴엔 다크서클이 가득했으며 뼈와 가죽밖에 남지 않은 듯 볼이 움푹 패었다.

“박사님, 오랜만이네요.”

“……의식을 회복하셔서 다행입니다.”

“근데 저 얼마나 누워 있었어요?”

“반년이요.”

반년이라는 말에 놀라 내가 눈을 크게 떴다. 꾼 꿈은 분명 짧고 간결했는데 현실 시간으로는 6개월이나 흐른 것이 너무나도 억지 같았다. 황당한 마음에 직접 달력을 확인해 보겠다며 핸드폰을 달라고 하자, 유현재는 또 제 주머니에 있는 핸드폰을 순순히 나에게 줬다.

“미친…….”

진짜네. 어쩐지 몸이 양철 로봇처럼 전혀 움직이질 않더라니, 다 이유가 있었다.

“진짜 신기하네…….”

“아픈 곳이나 문제가 있는 곳은 없나요?”

“몸이 뜻대로 안 움직여요.”

“그건 어쩔 수 없어요. 아마 재활을 좀 하셔야 할 겁니다.”

나는 바로 정밀검사에 들어갔다. 내상을 입긴 했지만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난 편이었고, 신체의 회복 또한 빠른 편이었음에도 의식이 돌아오지 않은 케이스라고 했다. 일종의 코마 상태였던 것 같다고 의사가 말했다. 나는 휠체어에 앉아 그것을 들으며 궁금했던 것을 질문했다.

“제가 쓰러지고 어떻게 됐나요?”

전정우와 유현재의 눈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그건… 지금 말할 건 아니고, 검사 끝나고 따로 이야기하시죠.”

“왜 이렇게 분위기 잡아요? 좆 된 거 있어요?”

“죽다 살아나셔도 말투는 여전하시군요.”

이후 나는 재활에 대한 길고 긴 잔소리를 1시간 내내 들어야 했다. 지금 제대로 근육과 뼈를 살려 주지 않으면 아무리 20대 초반일지라도 평생 삭신이 쑤시며 아파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나는 의사와 하루에 2시간씩 꼭 재활을 하기로 손도장까지 찍은 후에야 벗어날 수 있었다.

“손도장 초딩 때 이후로 처음이네…….”

“그러게. 열심히 재활하란 거겠지, 그만큼.”

“그래야지.”

우리는 다시 병실로 돌아왔다. 1인 병실에서 6개월이라니. 정말 돈이 썩어나긴 했나 보군, 같은 생각을 하며 나는 다시 침대에 누웠다.

“그럼 이제 말해 주시지.”

“일단 바로 직후의 상황을 말해 주자면, 네가 쓰러지고 맥박이 멈추고 나서 교수님이 게이트와 꼭두각시를 깨트렸어.”

“본인이 직접 만든 거니까 가능했던 건가.”

“애초에 교수님만이 다를 수 있는 것이었으니까.”

“한재민은?”

유현재가 살짝 눈썹을 찡그리곤 말을 이어갔다.

“한재민이 먹은 구슬은 반경 내의 소환된 물체들을 모두 자신의 것으로 만들지만…… 반대로 효력이 다하기 전에 구역을 벗어나면 문제가 생겨.”

“응. 뭐, 그래서 문제라도 생긴 거야?”

“사라졌어.”

“사라졌다고?”

“응. 게이트와 꼭두각시가 사라지면서 함께.”

“미친.”

“교수님이 다시 게이트를 만들어 보기도 했지만……. 나타나지 않더라. 아마 같은 종류의 소재로 착각하고 함께 소멸된 게 아닌가 싶어.”

“……너무 잔인한 거 아냐?”

“그러기엔 너무 흔적도 없이 사라져서. 한재민이 워낙 국내에서 거물급이기도 했고, 그 사람이 벌인 짓도 일부 드러나서…… 찾고는 있지만 진척은 전혀 없어.”

“그렇구나.”

“혹시 죄책감이나 이런 거 느끼는 거 아니지?”

“……음.”

나는 생각에 잠겼다. 인과를 따져 보자면 한재민은 나의 사건에 연루되어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렇지만, 결론적으론.

“아니.”

“다행이다.”

“그리고 크게 달라진 건 없습니다.”

“그래요?”

“네. 한성 병원의 소동은 블랙랭커들의 침입으로 대충 일단락되었고, 지하에서 일어난 일은 뭐 사람들이 알 리 없으니까요.”

“그럼 저는…….”

“마나의 불안정으로 쓰러진 것으로 대외적으론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요?”

“……음, 보시는 것처럼 보도되겠죠.”

나는 손을 접었다 펴 보았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마나가 모두 사라졌네요.”

“네. 소량 남아 있긴 하지만…….”

“쓸 수도 없을 정도고요.”

“그렇죠.”

“뭐, 됐어요. 원하는 대로 됐네.”

나는 그제야 몸에 힘을 풀고 침대에 제대로 드러누웠다. 마나의 소멸은 예정된 것이었고 누군가에게 가지 않았다는 것만 해도 내 목표는 성공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몇 가지 의문이 더 남아 있었지만 이 두 사람에게서는 답을 들을 수 없는 문제였기 때문에, 나는 더 이상의 질문을 하지 않고 말을 아꼈다.

“대학교나 입학해서 청춘이나 즐겨야겠다. 잔디밭에서 통기타 치고 놀아야지.”

“……제가 대학 다닐 때도 잔디밭에서 통기타 치는 사람은 없었는데요.”

“그럼 요즘 대학생들은 뭐 해요? 술 먹고 노나?”

“저 같은 경우엔 4년 내내 학점 유지를 위해 공부하고, 스터디 동아리, 취업 준비 동아리 등에 가입하여 활동했었던 것 같네요.”

“……그렇게까지 공부를 해야 하나요?”

“아무래도 그런 편이죠. 생각보다 비랭커인들은 치열하게 살고 있습니다. 저를 포함해서 말이죠.”

“상상과는 좀 다르네.”

“뭐든 상상과 현실은 다르죠. 비랭커인이 랭커들은 시간 넉넉한 프리랜서라고 하는 거랑 비슷한 거 아닐까 싶습니다.”

“박사님이 평소에 그렇게 생각하셨나 보네요.”

전정우는 더 이상 대답하지 않았다. 반년이 지나도 그대로인 게 있다는 것은 나를 안심하게 했다.

“저라면 대학을 가는 대신 현재 군의 일이라도 도우며 은혜를 갚겠네요. 매일같이 병실을 드나들며 찬희 군을 간호했는데 보통 사람은 못하는 일이니까. 아니면 반포에 있는 아파트라도 사 주시던가요.”

“반년 새 성격이 많이……. 음……. 나쁜 건 아닌데 뭔가 어디서 많이 들어 본 듯하게 바뀌셨네요.”

“칭찬 감사합니다.”

“칭찬 아닌데……. 너는 왜 매일 왔어. 내가 언제 깰 줄 알고.”

“언제 일어날지 모르니까…….”

유현재가 살짝 달아오른 얼굴로 말을 얼버무렸다.

“……이리 와 봐.”

나는 유현재를 향해 다가오라는 듯 손가락을 까딱했다. 유현재가 내게 다가왔다. 얼굴을 숙이라고 하니 얼굴도 숙였다. 바로 앞에 온 얼굴은, 여전히 빈틈없이 잘생겼다. 나는 망설임 없이 유현재의 입술에 내 입술을 꾹 눌러 찍었다.

“…계속 있으실 거예요?”

내가 장난스레 묻자 전정우가 한숨을 내쉬고는 병실을 나갔다.

“찬희야.”

“응.”

“고생 많았어. 이제 다 끝났어.”

나는 대답 대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진짜 끝이 아니더라도 상관없었다. 나는 다시 나의 현재를 만났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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