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
교수가 만든 인공 게이트가 완전히 생성되지도 않은 시점에, 공간의 입구가 격렬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나는 불안한 얼굴로 입구를 바라보았다. 아마 유현재가 채 막지 못한 무리들이 벌써 여기까지 내려 온 모양이었다. 잠가놓은 입구를 뚫는 건 쉬운 일이었다. 문이 열리자마자 한재민의 핏발 선 눈이 가장 먼저 보였다.
“미친 새끼야, 그만해!”
한재민이 나에게 뛰어와 어깨를 잡아챘다. 주먹이 날아오려는 순간 누군가가 한재민을 거세게 밀쳤다. 공간이 확장되며 한재민이 한없이 멀리 날아갔다. 놀라 뒤쪽을 쳐다보니 거칠게 숨을 몰아쉬는 유현재가 있었다. 유현재는 피투성이가 되어 다리를 절뚝거리고 있었다. 뒤이어 한재민을 경호하는 여러 명의 경호원들이 재빠르게 유현재를 막아섰다. 유현재가 방어할 틈도 없이 마나를 담은 공격이 그를 향해 덮쳐 왔다.
“언제 끝나요? 언제 나오는 거예요?”
내가 다급하게 묻자 교수가 인상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20분.”
“단축은요?”
“안 돼. 버텨야 돼.”
공간이 멋대로 확장되며 싸움이 지속됐다. 유현재의 마나 사용을 눈으로 보는 것은 처음이었지만 잠깐만 봐도 여타 랭커들과는 확연히 다르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유현재는 평범한 사람이라면 잡아내지도 못할 속도의 공격을 피하며 상대의 빈틈을 노렸다. 다수 대 혼자의 대결이었기 때문에 최대한 방어하며 만전을 기해야 하는 것을 알고 있는 듯했다.
“쟨 대체 저런 전투 기술들을 언제 배운 거지…….”
멀리 쓰러져 있던 한재민이 비틀대며 일어섰다. 한재민은 랭커가 아니었기 때문에 내가 직접 방어해 볼 만했다.
“괜히 나서지 말고 그냥 나한테 맡겨. 내가 너보다는 사정이 나으니까.”
“교수님은 게이트 생성에 집중하셔야죠..”
교수가 한숨을 푹 내쉬며 게이트를 바라보았다.
“적당히 해. 적당히. 기껏 게이트 만들어 놓고 죽어버리기라도 하면 곤란하잖아.”
“안 죽어요.”
한재민이 여전히 몸을 가누지 못하고 휘청대며 이쪽으로 걸어왔다. 길쭉한 팔다리에 걸친 수트가 나 또한 천천히 고개를 들어 그를 마주했다.
“유찬희.”
“왜.”
“너 내가 작작 하라고 했지.”
“나야말로 경고했잖아. 너한테 좋은 거 없다고.”
“그건 내가 판단한다고.”
“뭘 어떻게 판단한다고? 네가 직접 다 겪어 보고서야 이게 잘못됐구나 판단할 거야? 그냥 내 말 들으면 되잖아. 왜? 싫어?”
“난 진짜 너 같은 새끼들이 딱 싫어.”
“뭐?”
“말 많고 조잘조잘 시끄러운 애들.”
한재민이 주머니에 있던 권총을 꺼내 망설임 없이 내 쪽으로 쐈다. 총알이 눈앞에서 파스스 부서졌다. 교수가 찰나를 캐치해 막은 모양이었다. 나나 한재민 둘 다 마나를 쓰지 않으면 모르겠지만 저 쪽에서 도구를 쓴다면 또 말이 달라졌다.
“나 죽이게? 나 죽으면 마나 어떡하려고 그래?”
“닥쳐.”
한재민이 총구를 겨눈 곳은 묘하게 몸을 비껴간 팔, 다리 어딘가였다. 교수가 계속해서 공격을 막아 주고 있었지만 그것도 한계가 있을 터였다. 다행히 저쪽에서 먼저 총알이 떨어진 모양이었다. 잠시 총을 내린 한재민이 숨을 거칠게 쉬며 나를 노려보았다.
“이제 네 그 애새끼 같은 행동 봐줄 이유도 없으니까 아주 팔다리를 잘라내 버릴게.”
“피차 마찬가지거든. 누구는 네 그 잘난 반역 놀이에 참여해주고 싶었는 줄 알아?”
“여전히 입만 살았네. 마나도 못 쓰는 새끼가.”
“마나도 못 쓰는 새끼 마나 뺏으려는 놈이 누군데.”
설전을 벌이며 대치하고 있던 와중 뜬금없게도 허공에 보라색 창이 떴다.
[유저의 목표까지 99%, 달성까지 1% 남았습니다!]
[이제 곧 유저의 궁극적인 목표에 도달하게 됩니다! 축배를 들 준비를 하세요!]
“축배는 개뿔.”
목표 100퍼센트가 달성된다면 상황이 어떻게 변할지 알 수 없었다. 목표는 결국 나의 죽음이니 허망하게 죽어버리고 다시 이전으로 돌아갈지도, 혹은 영원한 안식을 맞이해야 할 수도 있었다. 그러니까, 이 목표가 달성되기 전에 빨리 유도현의 잔해들을 모두 게이트 안에 넣는다.
“8분 남았어.”
“견디실 수 있으세요?”
“저놈 하나면 모르겠는데, 뒤에 있는 녀석들까지 합세하면 어렵지 않을까.”
이미 바닥에는 유현재가 쓰러트린 몇 명의 랭커가 있었다. 유현재가 비틀대며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나는 그도 한계에 다다랐음을 느꼈다. 이렇게 무기력하게 유현재와 교수의 도움만 받을 수 없었다. 나는 다급하게 다시 상태창을 불렀다.
“상태창, 나와 봐.”
[관리자님, 접속을 환영합니다.]
[현재 모든 설정을 제어할 수 있습니다.]
[목표 달성율을 보시려면 1번, 유저의 크리티컬 수치를 보시려면 2번, 목표를 수정하시려면 3번, 유저의 설정관리를 하시려면 0번, 나가시려면 나가기를 불러주세요.]
“내가 관리자가 확실해?”
[현재 접속하고 계신 분은 관리자, 관리자이십니다.]
[관리자의 정보를 검색합니다.]
[이름: 유,]
유, 까지만 나오고 시스템 창이 멈췄다. 이런 적은 처음이었다. 다시 시스템을 불러보았지만 마찬가지였다. 필요한 것은 이미 확인했으므로 나는 오랜만에 마나의 기운을 모으기 시작했다. 낯설었지만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끓어오르는 마나는 이전보다 확실히 규모며 느낌이 달라져 있었다. 유도현의 것까지 이제 온전히 내가 가지게 되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지금 이 상황에서는 내가 유도현이든 유찬희든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현재야.”
나지막이 유현재의 이름을 부르자, 그가 천천히 나를 돌아보았다. 눈을 뜨고 있는 것조차 힘겨워 보였다.
“고생했어. 마무리는 내가 할게.”
“안 돼, 너 마나 쓰면 안 되잖아.”
“괜찮아. 이 망할 거 지금 쓰고 바로 버리면 되니까.”
“찬희야, 안 돼. 조금만 기다리면 되는데…….”
나는 유현재의 말을 끝까지 듣지 않고 오른손을 내밀었다. 응축된 공기 덩어리 같은 것이 빠르게 튀어나가 유현재의 뒤에 있던 랭커의 머리를 맞췄다. 마나를 한 번 쓰고 나니 몸이 가벼워지는 기분이었다. 나는 발끝에 기운을 담아 빠르게 움직이며 그들을 향해 돌진했다. 갑작스러운 나의 움직임에 한재민의 부하들이 당황해하는 것이 느껴졌다.
쓰러진 랭커 앞으로 달려가 총을 주운 나는 빠르게 가장 앞에 서 있던 놈의 양 허벅지를 맞췄다. 단말마의 비명과 함께 한 명이 허무하게 쓰러졌다.
“동시에 공격해!”
한재민의 지시에 랭커들이 일사불란하게 내게 달려오기 시작했다. 그래도 교육을 허투루 받은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나는 가장 왼쪽에 있는 녀석의 옆구리를 있는 힘껏 걷어찼다. 빠득, 하고 갈비뼈 부러지는 소리가 들리더니 녀석에게 밀린 나머지 두 명이 함께 저 멀리로 굴러갔다. 공간 확장의 한계가 어디까지인지 몰라도 시야에 잡히지 않을 정도였다.
“와. 유도현 힘 미쳤네.”
“찬희야, 너…….”
나는 그제야 내 코에서 피가 흐르고 있음을 깨달았다.
“괜찮아. 적어도 지금은.”
유현재가 내게 걸어오려다 쓰러졌다. 나는 그를 안아 옆쪽에 눕혀 두었다.
“빨리 끝내고 다시 돌아올게.”
내 속삭임에 유현재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이제 2분 남았다는 교수의 외침에 몸을 일으켜 게이트로 다가갔다. 게이트에는 이제 희미한 형체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이제 곧 나오는 건가요?”
“그래. 어차피 유도현의 모습을 한 꼭두각시일 뿐이니 어설픈 소통 같은 거 할 생각 말고 마나나 내보내.”
“근데 중요한 문제가 있어요.”
“뭔데?”
“저는 마나 추출하는 법을 몰라요.”
내가 속 빈 사람처럼 하하 웃자 교수가 이마를 짚었다.
“애초에 게이트와 저 꼭두각시 모두 흡수체로 만들어진 것이니 어디든 살만 맞닿으면 돼.”
“그렇군요.”
“그래. 꼭두각시이긴 해도 그 인형엔 내가 기억하고 있는 유도현에 대한 정보값이 어느 정도 남아 있어. 그래야만 인간이란 모양을 만드니까. 그가 무슨 말을 지껄이든 신경 쓰지 말고 너는 그냥 얼굴이나 콱 쥐어버리면 돼.”
“한 대 때려도 돼요?”
“상관없지. 물론 만든 내가 마음 아프겠지만.”
“알겠어요, 안 할게요.”
나는 깔끔하게 한 대 때리겠다는 각오를 포기하고 게이트를 바라보았다. 이제 게이트 속에 있는 형체는 점점 짙어졌다. 확실히 이전의 강령술과는 달랐다. 강령술을 실행했을 땐 유도현이 저 멀리서 걸어오는 듯한 모습이었는데, 여기선 마치 진흙이 뭉쳐져서 만들어지듯 생성되었다. 이제 유도현의 얼굴이 그럴듯하게 만들어졌을 때쯤, 뒤에서 달려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나는 반사적으로 마나를 사용해 그를 제지했다.
“마나를 절대 주지 마!”
“이제 그만해. 다 끝났어.”
나는 한재민을 차갑게 바라보았다.
“내가 알아듣기 쉽게 말했잖아. 너한테는 유도현의 마나와 시스템이 필요 없어. 가지고 있어 봤자 독이야. 그냥 사라지는 게 맞다고. 근데 왜 필요한 거야?”
“알 필요 없잖아. 넘겨! 넘기라고!”
“안 돼.”
“……내 회사를 줄게.”
“뭐?”
“가지고 있는 것 중 필요한 것이 있으면 모두 줄게. 그러니까 넘겨…….”
“미친놈. 왜 이게 가지고 싶냐고. 랭커도 아니면서.”
“내놔. 줘. 그래야 돼…….”
한재민의 표정에 절박함이 서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