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랭커 사용 설명서-110화 (110/115)

110.

[목표까지 97%, 달성까지 3% 남았습니다!]

[엄청난 속도로 목표에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축하드립니다!]

눈앞에 뜨는 창을 보고 눈썹을 찡그렸다. 도대체 목표 달성의 조건이라는 게 뭐지? 공연을 관람하다가, 한재민과 입씨름을 하다가 수치가 오르는 건 도대체 어떤 기준이지? 도저히 감이 오지 않았다. 어찌됐든 이 3%가 채워진 후에는 무슨 방법으로든 내가 죽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자, 나는 마음이 급해졌다.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가려 하자 문 밖에 있던 한재민의 수하들이 나를 막아섰다. 한재민은 창백했던 얼굴을 추스르고 몸을 일으켰다.

“어디 가려고.”

“어차피 지금 당장 수술 못 하잖아. 1시간만 나갔다 오게 해 줘.”

“안 돼. 삼촌, 얘 좀 묶어.”

밖에 있던 남자들이 우르르 들어와 내 사지를 들고 침대에 눕혔다. 마나라도 쓸 수 있으면 맞서기라도 했을 텐데 더 이상 무언가 하기엔 내 몸이 너무나도 불안정했다. 내가 발버둥을 치자 남자들이 귀찮다는 듯 밧줄로 침대와 내 몸을 동여매기 시작했다.

“뭐 마나 같은 거 쓸 수도 없겠지만, 밧줄에 아티팩트라도 달아놔.”

삼촌이라 불린 남자는 고개를 끄덕이곤 손바닥만 한 아티팩트를 줄에 매달아 두었다.

“수술할 때까지는 손도 까딱 못 하게 해.”

“한재민!”

“나대지 말고 가만히 있어. 삼촌, 걔네들 오는 데 얼마나 걸린대?”

“1시간 정도면 올 것 같습니다.”

“존나 느리네.”

한재민이 몸을 일으켜 병동 밖으로 나갔다. 몇 명은 여전히 내 곁을 지키고 있었고, 또 몇 명은 한재민을 따라 밖으로 나갔다. 이대로 힘을 한재민에게 뺏길 순 없었다. 나는 허공을 향해 소리 지르기 시작했다.

“야! 나와 봐!”

“조용히 해.”

“나와 보라고! 시스템!”

남자들이 어처구니없다는 듯 천 뭉치로 내 입을 틀어막았다. 목소리만 내지 않으면 해결될 줄 아는 모양이었다.

[유저의 권한으로]

[관리자님, 접속을 환영]

[유저는…….]

[관리자님,]

시스템을 불러내는 데는 성공했지만, 눈앞에는 두 개의 창이 섞여 나타나기 시작했다. 보라색의 관리자 모드와 푸른색의 유저 모드의 창은 점멸을 반복하며 시야를 어지럽혔다. 나는 속으로 계속 관리자 모드만을 반복해서 외쳤다. 평소엔 잘도 되던 관리자 모드의 접속이, 유저 모드의 방해를 받아 끊임없이 로그인되고 로그아웃되길 반복했다.

나는 안간힘을 쓰며 관리자 모드라는 단어만을 미친 듯이 반복했다. 보라색 창은 나를 놀리듯 떴다 사라지길 수없이 반복했다.

“뭐라는 거야? 시스템?”

“모르겠어. 미친 건가.”

남자 둘의 대화 소리가 일순 멈췄다. 아주 멀리서 거대한 폭발음이 들렸기 때문이었다. 어찌나 큰 폭발이었는지, 지하에 있는 이곳까지 진동이 느껴졌다. 테러라도 일어난 것일까. 나를 감시하던 남자 둘이 눈빛을 주고받은 후 천천히 방의 입구까지 걸어갔다.

“무슨 일이지?”

“로비에서 사고라도 났나?”

“테러 같은 거 아냐? 블랙랭커 같은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갑자기 왜 병원을 공격해?”

“야, 씨발. 여기 있다가 우리도 뒈지는 거 아니냐?”

“여기까지 못 내려와. 대부분은 여기 있는 줄도 몰라.”

나는 어떤 집단의 테러라도 상관없으니 나의 수술을 늦춰 줄 뭔가가 필요했다. 한동안 잠잠하던 복도에서,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어…….”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자마자, 무언가가 빠르게 날아와 남자 중 한 명의 이마를 강타했다. 총알은 아닌 듯했지만 조그만 물건이었다. 이마를 맞은 남자가 뭐라 대응할 새도 없이 복도 끝으로 빠르게 날아가 파열음을 내며 벽에 부딪혔다. 남은 한 명의 남자가 혼비백산하여 병실 구석으로 달려왔다.

“씨발, 뭐야!”

뚜벅거리는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남자가 몸을 부르르 떨더니, 이쪽으로 다가와 나를 방패 삼아 섰다. 발소리는 문 앞에서 뚝 멈췄다. 모습을 드러낸 것은 다름 아닌 유현재였다.

“찬희야.”

유현재가 잔뜩 굳은 얼굴로 내게 다가와 입에 물린 재갈을 꺼내 주었다.

“아티팩트 있어. 저거 폭발할 수도 있으니까 조심해.”

“알겠어. 괜찮아? 안 아팠어?”

“이까짓 걸로 뭐가 아프냐. 근데 뭐야? 병원 테러라도 한 거야?”

“테러까진 아니고 시선 집중 좀 시켰어. 너 데리러 오게.”

“미친놈. 깜빵 가고 싶냐?”

“별다른 방법이 생각이 안 났는데 어떡해.”

나와 유현재의 대화를 듣고 있던 남자가 천천히 뒷걸음질 쳤다. 유현재는 여전히 내게 묶인 밧줄을 푸느라 여념이 없었다. 의외로 유현재는 남자가 도망가는 것을 잡지 않았다.

“저 사람 도망가도 괜찮은 거야?”

“어차피 엘리베이터 고장 났어.”

“계단 있잖아.”

“계단엔 다른 사람 있어.”

“다른 사람?”

곧이어 계단에서 쿵, 하는 커다란 소리가 들려 왔다. 나는 놀란 얼굴로 유현재를 쳐다 보았다.

“응. 저번에 모시고 오겠다고 한 분.”

“와……. 그분도 싸움 좀 하시나 보네.”

“랭커니까. 다 풀었다.”

유현재가 내 몸을 일으켜 세워 주었다.

“피라미 처리까지 맡기고. 내가 이런 대접 받으려고 여기 온 건 아닌데.”

“죄송해요, 교수님.”

“그래도 도망가는 새끼는 잡아 줬어. 죽이진 않았지만.”

“네. 한국은 랭커의 살인 감면이 까다로워요.”

“짜증나는 국가네.”

교수라고 불리는 사람 치고는 제법 젊은 외모였다. 강령술 연구원이라고 하기에, 제법 나이가 지긋한 노인으로 상상했던 나는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왜? 생각보다 어린 여자애라 놀라워? 그런 얘기 많이 듣긴 했어.”

“보통 교수라 불리는 직업까지 가려면 많은 시간이 필요하니까요.”

“내가 교수인 이유는 정식 교수라서가 아니야. 다들 그렇게 나를 부를 뿐이지. 알겠니? 그리고 나는 실제로도 나이가 많아.”

교수는 대답을 끝내고 병실 내부를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뭔가를 찾는 듯한 느낌이기도 했다.

“여기 마나 훈련장 같은 건 없는 거야?”

“병원이라 없을 거예요. 전 박사님 말로는 두 층 아래에 마나 확장 공간은 있다고 하더라구요.”

“오, 좋아. 거기로 가자.”

유현재가 내 손을 잡고 달릴 수 있겠냐고 물어봤다. 교수는 달릴 필요까진 없을 것 같다며, 천천히 복도를 구경하며 가자고 제안했다.

“그래서, 네가 말하던 지켜야 할 사랑스러운 소년이 이 친구였던 거야?”

“그렇게까지 말한 적은 없어요.”

조금 부서진 벽을 지나치며 유현재가 얼굴을 붉혔다.

“이름이 찬희 맞지?”

“네.”

“맞네, 왜 거짓말이람.”

“그, 찬희야…!”

유현재가 내 쪽으로 몸을 돌려 황급하게 말을 끊었다.

“어? 어…….”

아무렇지 않은 척 대답하려 했는데 목소리에서 삑사리가 났다. 교수는 재밌다는 듯 깔깔 웃었다. 유현재가 귀를 붉힌 채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말했다.

“일단 계획한 것을 말해 줄게. 그대로 하면 돼.”

“잠깐. 도청장치 같은 거 있으면 어떡해?”

“걱정 마. 애초에 연구층은 그런 걸 할 수 없도록 돼 있어. 그걸 역이용하는 거지.”

“그것도 전 박사가?”

“응. 전 박사님이 말씀해 주셨어.”

“알겠어.”

우리는 엘리베이터가 있는 로비 공간으로 가기 직전 복도에 서서 작전에 대해 얘기하기 시작했다. 유현재가 조심스럽게 말을 이어갔다.

“일단 상주해 있는 보안 랭커들은 내가 상대할 거야.”

“뭐? 너 혼자?”

“응. 지금 폭발 때문에 정신없고 중요 인력들은 대부분 한재민이랑 함께 있어서 괜찮아.”

“아무리 그래도 너 혼자는 좀 무리 아냐?”

“혼자는 아니야. 김구현 부장님이 지금 전투부 인력 데리고 오는 길이거든.”

“뭐? 김 부장님이?”

“응. 전투부 쪽도 어차피 한재민 쪽 주시하고 있었고, 김 부장님이 나한테 연락 와서 널 돕고 싶다고…….”

“황당하네.”

“황당하긴 하지만, 이용해야 할 건 해야 하니까.”

“그럼 완전 개싸움 되는 거 아냐? 감당 가능해?”

“영역을 크게만 안 쓰면 돼. 어차피 1급들은 게이트에 가 있거나 이런 싸움에 끼는 거 싫어하거든. 해봤자 2~3급이고, 그 사람들이 마나 좀 쓴다고 해서 건물 자체가 붕괴되거나 하진 않을 거야.”

“그럼 나는 뭘 하면 되는데?”

“교수님이랑 아래층으로 내려가서,”

“……내려가서?”

“하려던 걸 하면 돼.”

벽에 기대어 서 있던 교수가 고개를 까딱했다. 한국어를 알아듣진 못하지만, 내가 이제 상황 파악을 끝냈다는 건 눈치챈 것 같았다.

“목표는 하나야.”

“…….”

“살아서 만나자. 이왕이면 행복하게.”

나는 대답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유현재의 소매 끝자락을 잡은 손이 쉽사리 떨어지지 않았다. 유현재가 그대로 손을 가볍게 잡고 자신의 입술로 가져가 가볍게 입 맞췄다. 우리의 손이 떨어지자마자 유현재는 뒤돌아 계단이 있는 층으로 뛰어 올라갔다.

“얼른 가자.”

교수가 망설임 없이 내게 말했다.

“시간이 얼마 없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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