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일어나니 이미 해가 중천이었다. 옆을 보니 이미 자리가 텅 비어 있었다. 나는 앞머리를 쓸어 올리며 잠긴 목소리로 유현재를 불렀다.
“현재야.”
“응.”
우다다 소리가 들리더니 유현재가 방문 앞까지 달려왔다. 그 모습이 귀여워 또 웃으니, 유현재도 기분이 좋은 듯 입꼬리를 씩 올렸다.
“넌 머리 안 아파?”
“한 잔 마셨는데 머리까지 아프면 난 진짜 완전 알쓰지.”
“머리 안 아파도 넌 이미 알쓰 맞는데.”
“너도 그렇게 잘 마시는 건 아니잖아!”
이불을 젖히고 침대에서 내려오자 뭔가 매콤한 냄새가 났다.
“설마 너 뭐 끓였어?”
“그러려고 했는데 실패했어.”
“그럼 이 냄새 뭐야?”
“찾아보니까 사람들은 술을 마시고 해장국을 먹는대. 그래서 이 근처 해장국 집에서 포장해 왔어.”
식탁에 가보니 반찬 몇 개와 수저가 이미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우리는 마주 앉아 해장국을 먹으며 평범하게 해장했다. 수저질을 몇 번 하다 말고, 유현재가 먼저 말을 꺼냈다.
“박사님 말인데, 내일 정도면 도착하실 수 있다고 하시더라고.”
“빠르네, 생각보다.”
“수술 전에는 와야 하지 않을까 싶어서. 그리고 한재민 이사 감시가 느슨할 때 와야 할 것 같아.”
“그럼 지금이 최적이긴 하네.”
“그래서 말인데.”
“응.”
“오늘은 뭐 하고 놀까?”
“어?”
“오늘도 시간 비잖아.”
“내일 그래도 그분 만나려면 좀 쉬어야 하지 않을까?”
“그냥 만나기만 하는 건데 왜? 찬희 네가 이 시간을 즐기자고 했잖아.”
“아니 뭐 그건 그런데…….”
해장국 이거 때려 부어도 숙취가 있어서, 라는 말은 죽어도 하지 못하겠다. 유현재가 반짝거리는 눈빛으로 핸드폰을 켜서 근교의 ‘데이트 장소’를 찾기 시작했다.
“한결이 없이 가자.”
“그래. 고한결도 어제 우리보고 당분간 부르지 말라더라.”
“장미 정원? 여기도 예뻐 보이네.”
“좀 낯간지러운데.”
“왜. 예쁘잖아, 꽃.”
나는 순간, 왜인지 모르게 아주 오래 전 나의 방문 앞에 놓여 있던 꺾인 꽃들을 떠올렸다.
“넌 항상 꽃을 좋아하네.”
“응?”
“나한테 꽃 줬던 거 기억나?”
“선별전 때?”
“응. 그때도 있지만, 아주 옛날에도 줬어.”
“음, 그러니까, 네가…….”
“죽기 전.”
“응. 죽기 전.”
“이번 생의 전에도, 그 전에도 너는 꽃을 진짜 좋아했어. 근데 나는 어떨 땐 받아 주기도 하고, 어떨 땐 받지도 않고 버리고.”
“그랬구나.”
“나쁘지?”
“아니. 이유가 있었겠지.”
“너무 맹목적으로 믿는 거 아냐?”
“이유가 있었잖아, 그치?”
“……그렇긴 하지만.”
“그것 봐.”
“왜 이렇게 당당해?”
“너를 제외하고 내가 너를 가장 잘 아니까.”
나는 유현재의 그 말에서 묘한 기시감을 느꼈다. 이전에 한재민이 했던 말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나는 너에 대해 모르는 게 없어. 네가 모르는 것조차 나는 알고 있어. 그렇다면 유현재와 한재민 중 나에 대해 더 잘 알고 있는 사람은 누굴까? 나는 생각할 것도 없이 유현재를 바라보았다.
“그래.”
“응?”
“네가 해.”
“…….”
“네가 나를 가장 잘 아는 사람 하라고.”
“알겠어.”
“그럼 나도 널 가장 잘 아는 사람이어도 돼?”
“그걸 왜 물어봐. 이미 그러면서.”
유현재가 웃었다. 나도 따라 웃었다. 아주 오랜 세월 동안 우리가 이렇게 자주 웃었던 적이 처음인 것 같았다.
“그럼 장미 축제 가는 거다?”
“……그래. 뭐.”
나쁘지 않은 데이트일 것 같았다.
*
다음 날, 유현재는 새벽 일찍 차를 타고 나갔다. 박사를 픽업하러 가기 위해서였다. 좀 더 자면 좋았을 텐데 유현재가 집을 나서니 더 이상 졸리지가 않았다. 나는 커다란 소파 위에 드러누워 천장을 바라보았다. 아무런 무늬도 없는 흰 천장이 밋밋해 스피커를 켜고 이든사우스 노래를 켰다. 순식간에 시끄러운 일렉 기타 소리가 거실을 가득 채웠다. 나는 눈을 감고 노래를 감상했다. 사실 노래를 감상했다기보단, 소음으로 상념을 덮었다는 것이 맞았다. 그러니까 유현재가 말하는 ‘시끄러운 노래’를 듣는 이유는, 대부분 이런 것들 때문이라는 걸 아마 아무도 모를 것이었다.
박사가 오면 어떻게 될까. 일단 그와 이야기를 하고, 이 힘을 아예 순식간에 없애버리게 될까. 혹은 다시 유도현을 불러 그에게 짊어지게 할까. 그렇게 된다면 한재민은 어떻게 나올까. 다시 강령술을 시도해 새로운 숙주를 찾게 될지, 위로 올라갈 새로운 방법을 찾게 될지. 아무것도 몰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어느새 여기까지 달려온 나를 칭찬해 주기로 했다.
칭찬해 주기로 했다는 말은 다소 낯설었지만 기분 나쁘지 않은 어감이었다. 그러니까, 나는 그 긴 생애를 살아오며 나를 단 한 번도 칭찬하지 않았다. 고생했다고, 수고했다고 격려조차 하지 않았다.
“고생했어.”
잘했어. 나는 나를 위로하고 격려해 주었다. 스포츠 경기의 마지막에 선수들이 서로의 어깨를 두드려 주는 것처럼 아주 깊고 가볍게.
그때였다. 전화가 울리기 시작했다. 당연히 유현재일 거라 생각하고 본 발신인의 이름은 놀랍게도 전정우였다. 단 한 번도 업무 이외의 연락을 해본 적이 없어 나는 조금 낯선 기분으로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유찬희 군?]
“네. 맞아요. 무슨 일이세요?”
[지금 당장 병원으로 오세요.]
“네?”
[지금, 당장 병원으로 오라고 했습니다.]
“지금이요? 못 가요. 약속이 있는데…….”
[지금이 아니면 그 일을 할 수가 없습니다.]
“무슨 소리예요. 일주일은 걸릴 거라고…….”
[오세요. 기다리겠습니다.]
전정우는 다소 경직된 어조로 지시하듯 말을 하곤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어 버렸다. 나는 두근거리는 심장을 가라앉히고, 유현재에게 전화를 걸었다. 유현재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나는 최대한 침착하려 했다. 말을 듣지 않으면 된다. 유현재가 박사를 찾았으니 아마 새로운 방법을 강구해 줄 것이고, 그렇다면 나는 한재민의 힘 없이도 이 마나를 분리해낼 수 있었다.
문자가 온 것은 그 때였다.
[한재민: 잔머리 굴릴 생각 하지 말고 바로 와.]
내가 답장을 하지 않자, 그는 멋대로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보내기 시작했다.
[한재민: 지금 당장 오지 않는 건]
[한재민: 네 선택이야?]
네 선택이야? 나는 부모님이 죽기 전 한재민이 보낸 문자를 떠올렸다.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한재민은 또다시 한번 나의 선택을 물어보고 있었다.
[한재민: 책임질 수 있는 행동만 해.]
마른세수를 하고 몸을 일으켰다. 답장 대신 통화 버튼을 누르자, 바로 한재민이 전화를 받았다.
[머리 좀 커졌다고 판단은 빨라졌네.]
“사람을 오라 가라 할 땐 이유부터 말해. 애먼 사람 시켜서 명령하지 말고.”
[전 박사 서운해. 전 박사가 너 부르라고 한 거거든.]
“내가 거기로 가지 않는 걸 선택하면 그 사람은 어떻게 되는데?”
[그거야 네가 제일 잘 알겠지. 어차피 네가 쓸모없어지면 나한텐 이 사람도 쓸모없는데.]
“넌 진짜 악질이다.”
[너한테 그 말 듣는 거 이제 지겹다.]
“내가 가지 않을까 봐 만든 보루가 고작 그 정도야? 넌 목숨이 장난 같지?”
[필요하지 않은 목숨까지 신경 쓸 정도로 너는 여유가 있나 보네.]
“넌 진짜 랭커 했으면 큰일 났겠다.”
[긴말하지 말고 빨리 와.]
“……약속이 있어. 그것만 끝나고 갈게.”
[이게 뭐 동네 친구 만나는 약속인 줄 아나 보네.]
“…….”
[1시간 줄게.]
“…….”
[유현재가 어떤 인간을 데리러 갔는지는 모르겠는데, 현명한 선택하길 바란다.]
“…….”
나는 끊긴 전화를 여전히 귀에 댄 채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국내에 있는 한 한재민의 귀에 들어가는 것은 시간문제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나름대로 계획적으로 일을 실행했던 것치고는 허무한 결말이었다. 아직까지도 무력한 나를 자책하며 몸을 일으켰다. 사람은 살려야 했다. 나는 마지막으로 유현재에게 전화를 걸었다. 받지 않을 줄 알았던 유현재가 바로 내 전화를 받았다.
[어, 찬희야.]
“어디야?”
[나 지금 박사님 뵙고 가는 길이야. 왜?]
“나는 지금 한성병원에 갈 거야.”
[뭐라고?]
“내가 안 가면 사람이 죽어.”
[무슨 소리야? 지금 나 가고 있어. 조금만 기다려 줘.]
“1시간 안에 가야 해. 네가 오면 늦어.”
[……일단 알겠어. 파악했어. 그리고 찬희야.]
“응.”
[잘 들어.]
유현재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나도 모르게 유현재의 다음 말을 기다리며 주먹을 쥐었다.
[원래는 너랑 만나면 얘기하려고 했는데 지금 말해야 할 것 같아.]
“뭔데?”
[나는 곧 한재민을 죽일 거야.]
그 말을 하는 유현재는 단 한 치의 흔들림도 없어 보였다. 나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고, 그저 눈만 커다랗게 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