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
“그래서.”
고한결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팔짱을 끼고 우리를 바라보았다.
“남들은 어떻게 노는지 모르겠으니 가르쳐 달라고?”
“응.”
“너네도 참 불쌍하다. 나 같은 놈한테밖에 그런 거 못 물어본다는 게.”
“에이, 한결이 네가 어때서. 너 완전 잘 놀잖아. 콘서트에서도 진짜 난리던데.”
“현재 너는 말을 하면 할수록 못 노는 거 티 내는 타입이구나.”
“유현재가 그런 경향이 있긴 한데 너 좀 직설적이네.”
“뭐,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어서 나한테 이러는지는 모르겠다만 노는 건 가르쳐 주는 게 아니거든.”
고한결이 한숨을 내쉬며 몸을 일으켰다. 나와 유현재는 솜사탕을 물에 씻은 너구리처럼 고한결을 쳐다보았다. 비싼 밥까지 사다 바쳤는데 돌아오는 게 아무것도 없다니. 고한결은 익숙하게 우리 집 냉장고 문을 열어 주스를 꺼내 원샷한 후 우리를 돌아보았다.
“뭐 해? 옷 안 입고.”
“어? 안 가르쳐 주는 거 아니었냐?”
“가르쳐 주는 게 아니라니까? 그냥 같이 노는 거지.”
나와 유현재는 기다렸다는 듯 기립박수를 치며 고한결을 치켜세워 주었다. 말은 저래도 내심 기분이 좋아서 머릿속으로 어디에 갈지 생각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진짜 네 말대로 하니까 한결이 기분 좋나 보다. 유현재가 웃으며 내게 살짝 귓속말 했다. 나는 그게 괜스레 간지러워 어깨를 움츠렸다.
“원래 이 나이대 남자애들은 그냥 두 군데야.”
“두 군데?”
“어. 노래방 아니면 피시방.”
“와…….”
둘 다 가 본 적도, 딱히 가 보고 싶지도 않은 곳이었다. 내가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니 고한결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말을 이었다.
“관심 없을 줄 알았어. 그래서 후보에 넣지도 않음.”
“그럼 어디 가는데?”
“그럼 너네는 너네 나이대 남자애들이 흔히 생각할 법한 데이트 장소가 어디라고 생각하냐?”
“그…….”
“당연히 모르겠지.”
“넌 알아? 너도 연애 안 해봤잖아.”
“어이없네. 니들이 랭커로 지지고 볶고 할 때 나도 내 나름대로의 인생을 지지고 볶았다고.”
“뭐? 진짜?”
“당연하지. 사람 무시하네. 아무튼.”
“어딘데, 그래서?”
“놀이공원, 그리고 축제.”
“축제?”
“무슨무슨 축제 이런 거 많잖아.”
“그래서 지금 축제를 가자고?”
“보니까 이 근처에서 하는 건 없더라고.”
“그럼?”
“근데 대학 축제는 해.”
“대학 축제?”
“어. K대 축제 하더라고.”
“K대면 이 앞에 있는 거기?”
“오늘 가수도 온대. 무슨 아이돌이랑 래퍼도 온다던데.”
“대학교 축제에 우리가 가도 돼?”
“당연하지. 상관없대.”
‘대학교’라는 말을 들으니 괜스레 가슴이 두근대는 기분이었다. 유현재와 대학생 기분을 내며 사진을 찍던 일도 생각났다. 나는 아무 대답 없이 슬쩍 유현재의 눈치를 보았다. 유현재도 비슷한 생각을 한 건지 우리의 눈이 허공에 마주쳤다.
“갈래?”
“가자.”
“오케이.”
“근데 가도 될까? 나 뉴스에 대문짝만하게 실려가지고.”
“뭐 좀 소문 날 수도 있지. 근데 대학교 축제에서 노는 게 문제가 돼?”
“아니, 뭐 욕먹을 수도 있고.”
“네가 언제부터 그런 거 신경 썼다고?”
“그건 그렇네.”
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외투를 다시 주워 입었다. 나는 대학생들은 보통 어떤 옷을 입는지 잠시 고민했다. 지금 입은 옷은 너무 어른 같나? 혹은, 너무 대학생이 아닌 것 같지 않나 하는 생각 정도. 고한결이 내 머릿속을 읽은 모양인지 대충 내 옷차림새를 훑어보아 주었다.
“다들 꼴아서 어차피 분간도 안 될 걸. 대충 입어.”
“뭐야, 거기서 술도 마실 수 있어?”
“당연한 걸 왜 묻지. 진짜 너는 스무 살 돼서 뭘 배운 거냐.”
“그딴 걸 누가 가르쳐 줘.”
“대학생들이 직접 주점 만들어서 전도 부치고 술도 팔고 그래요, 아저씨. 이 정도는 꼭 알고 가세요. 네?”
“그럼 우리 거기 가서 술 마셔?”
“한잔하고 싶으면 하든가.”
“그럼 차 안 끌고 가게.”
“이참에 그냥 뚜벅이 대학생 체험이나 해 봐. 애초에 평범한 스무 살 대학생은 차 끌고 간다 만다 걱정도 안 한다고.”
나는 자연스럽게 마스크를 착용했다. 언제부턴가 외출을 할 때 생긴 습관이었다. 유현재가 그런 나를 보더니, 본인도 자연스럽게 마스크를 착용했다. 어딘가 수상쩍은 듯한 모습이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무어라 잔소리를 할 줄 알았던 고한결도 크게 별말 하지 않아 우리는 그대로 지하철역까지 걸어갔다.
“진짜 오랜만에 나온다.”
“며칠 만에?”
“한 3일? 편의점 가거나, 산책 정도만 나왔지 여기까진 걸어서 와 본 적도 없는 것 같아.”
내 말은 과장이 아니었다. 나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한재민이 허용한 정식 외부 활동 이외엔 개인 시간을 절대 밖에서 보내지 않았다. 꼭 그래야 했다기보다는 스스로의 피해의식이었다. 괜히 함부로 움직였다가 무슨 말이 나오는 것보다는 그럴 일을 사전에 차단하는 게 낫다는 생각이기도 했다. 바깥 날씨는 생각보다 좋았다. 막 겨울에 진입하기 전임에도 나무는 여전히 푸릇푸릇함을 유지하고 있었다. 발걸음이 가벼워졌다. 아무 생각도 하지 말자고 다짐하니 정말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았다.
지하철에 타자 사람들이 앉아 있거나 서 있었다. 모두 TV에서나 보던 장면이었다. 유현재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유찬희는, 학창시절부터 등하교도 무조건 자가용으로 하던 도련님이었으니까.
지하철이 어느 역에 도착하자 사람들이 물밀듯 쏟아 들어왔다. 나는 깜짝 놀라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고한결은 어느새 쏙 자리를 잡아 앉은 후였다. 밀려드는 인파에 자연스럽게 문 쪽으로 뒷걸음질 쳤다. 이렇게까지 많은 사람이 탄다고? 이걸 맨날 반복하는 거야? 나는 마스크 아래로 인상을 찌푸리며 계속해서 몸을 구겼다.
“그……. 찬희야.”
“왜.”
“이렇게까지 안 해 줘도 되는데……. 힘 풀어. 힘들잖아.”
나는 팔꿈치를 지하철 벽에 댄 채 몸에 힘을 주었다. 유현재는 정확히 내 가드 안에 서 있었다. 마치 어느 드라마의 남자 주인공이 여자 주인공을 버스에서 보호해 주기 위해 하던 자세와 똑같았다. (물론 내가 남주고 유현재가 여주다) 의도한 건 아니었는데 뭔가 이런 곳에서 유현재와 몸이 닿는 게…… 민망했다고나 할까.
“아니 됐어. 견딜 만해.”
“굳이 안 견뎌도 되는데.”
“아, 이게 편해가지고.”
말끝이 좀 떨렸다. 유현재보다 내가 작은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니 그를 감싼 꼴이 우습긴 했다. 유현재가 결국 작게 웃으며 내 팔 사이에 손을 넣어 슬쩍 끌어안듯 나를 잡아당겼다. 순식간에 팔에 힘이 풀린 내가 유현재의 품에 들어갔다.
“야, 미쳤어. 여기 지하철이야.”
“근데 다들 모를걸? 봐, 다들 이 정돈 붙어 있어.”
나는 유현재의 가슴팍에 얼굴을 댄 채 손에 차오르는 땀을 바지춤에 닦았다. 아무리 사람이 많아도 이 정도까지 밀착하는 건 우리뿐인 듯해 더욱더 민망해졌다. 유현재는 이런 상황이 부끄럽지도 않은지 아무렇지 않은 모습이었다. 그대로 다섯 정거장을 이동한 우리는 곧 어느 역에서 하차했다. 겨우 유현재 품에서 벗어난 나는 벌써 집에 가고 싶어졌다.
“오늘 무슨 가수 온다고 해서 사람들 더 많나 보다.”
“가수?”
“왜? 궁금하면 구경하러 갈래?”
“아니, 됐다.”
나는 고개를 젓고 고한결의 뒤를 따라 열심히 대학교 안쪽으로 걸어갔다. 한쪽에는 고한결이 말한 대로 커다란 무대가 준비되어 있었고, 또 다른 한쪽에는 발 디딜 틈도 없이 빽빽하게 주점이 붙어 있었다. 어물쩡거리고 있는 우리의 손을 잡고 고한결이 어느 주점으로 들어갔다.
“타과생이세요?”
“네. 여기 맛있다고 해서요.”
입술에 침도 안 묻히고 거짓말을 치는 고한결에 내가 다 가슴이 떨려왔다. 다행히 손님 모으기에 정신이 팔린 서버는 우리를 데려가 빈자리를 만들어 앉히고 메뉴판을 준 뒤 다른 손님을 호객하러 뛰어갔다.
“무슨 과냐 하면 그냥 공대라 해.”
“공대?”
“정확하게 과 말하면 뽀록나잖아.”
“알겠어. 근데 그걸 누가 물어보겠냐.”
나는 그제야 주점 내부를 천천히 둘러볼 수 있었다. 모두 내 또래였고, 대부분 시답잖은 얘기를 하거나 술 게임을 하며 시끌벅적하게 놀고 있었다.
“이게 대학생이구나.”
“대학생들은 술 빼면 시체랜다. 그냥 진탕 마셔. 그놈의 마스크도 벗고.”
나와 유현재가 천천히 마스크를 벗었다. 나는 계속해서 주변의 눈치를 봤지만, 고한결의 말대로 아무도 우리를 신경 쓰지 않았다. 마침 주문한 안주와 술이 도착했다. 고한결이 따라주는 술을 한 잔 마시자 쓴 기운이 온몸에 퍼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후덥지근한 공기가 불쾌할 만도 했는데 어쩐지 점점 즐거워졌다. 술기운일 수도 있었지만 나는 술잔을 들고 유현재에게 손을 내밀었다. 유현재 또한 기분 좋은 웃음으로 내가 내민 잔을 부딪혀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