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랭커 사용 설명서-105화 (105/115)

105.

나는 내 몸에 흐르고 있는 유도현의 마나가 끔찍해졌다. 풀리지 않은 수수께끼가 몇 개 남아 있긴 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의 윤곽이 모두 드러난 기분이었다. 나는 화장실로 달려가 구토를 하기 시작했다. 어린아이를 아무렇지 않게 방패삼아 죽이고, 튄 피를 닦으며 한재민의 부모를 죽이던 그 무표정한 얼굴이 너무나도 역겨워서. 그것이 끝없는 회귀를 거치며 인간성이 마모된 결과라면 나 또한 그렇게 될까 봐 두렵고 무서워서. 그래서 계속해서 나오지도 않는 토사물을 내뱉었다.

“찬희야!”

때맞춰 집으로 돌아온 유현재가 내게 달려왔다. 나는 파리해진 얼굴로 천천히 유현재를 올려다보았다. 지금 유현재의 얼굴과, 죽어가던 그의 아버지의 얼굴, 그리고 유도현의 발에 걷어차이던 어린 유현재의 얼굴이 모두 겹쳐졌다.

“어떡하지, 현재야.”

“왜. 대체 무슨 일이야. 뭔가가 잘못됐어?”

“…….”

“내가 뭘 하면 될까.”

유현재가 나를 끌어안았다. 나는 힘없이 그의 품속에서 흔들렸다.

“내가 뭘 해야 조금이라도 네가 편안해질까.”

나는 한참 침묵한 뒤 조용히 말했다.

“그냥 좀 안아 줘.”

나는 유현재의 어깨 너머로 보이는, 바뀐 시스템 창을 보며 중얼거렸다.

“지금이라도 좀 안고 있을게.”

[목표까지 92%, 달성까지 8% 남았습니다.]

진실은 곧 죽음이고, 죽음은 진실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만들 것이다. 나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다시 천천히 떴다. 내 불행은 나의 것이 아니고, 원래의 주인에게 돌려주어야 했다. 그러므로 나는 죽지 않을 것이었다. 내겐 적어도 미달성한 인생의 목표 따위 없었으므로.

*

“딜은 잘되셨나 봐요.”

“이사님께서 손해 볼 것은 없으니까요. 이사님도 그렇게 판단하셨고요.”

“진귀한 연구 자료가 되겠네요. 아마 전 세계에서 유일할 수도 있겠고.”

“뭐 그렇긴 합니다만, 제가 매드 사이언티스트도 아니고 찬희 군의 목숨까지 버려가며 그런 걸 알고 싶진 않습니다. 전 연구원이기 이전에 그냥 평범한 사람이라서요.”

“그쪽은 평범한 사람일지라도 한재민은 아니잖아요?”

“저는 시키는 부분만 할 뿐, 그 이상은 건드리지 않습니다.”

“네. 오히려 믿음직스럽네요.”

“수술해 주실 의료진은, 아, 뭐. 의료진이라 하기엔 뭣하네요. 아무래도 진짜 의사들은 아니다 보니. 내일쯤 입국한다고 합니다. 필리핀 쪽 사람들이라고 하니 참고 부탁드리고요.”

“그럼 내일 바로 수술하나요?”

“알고는 있었는데 성격 되게 급하시네요.”

“아님 말고요.”

“다음 주 중으로 할 듯싶습니다. 그쪽도 충분한 시간이 필요하다고 하니. 자투리 마나나 공장식으로 추출했지 이정도의 고급 마나를 대량으로 추출하는 건 그쪽도 처음이라서.”

“잘됐네.”

“네?”

“이든사우스 앵콜 콘서트 보고 수술할 수 있겠다.”

전정우가 어이없다는 듯 나를 쳐다보았다.

“원래 스무 살은 그렇습니까?”

“당신도 스무 살인 적 있었잖아요?”

“워낙 예전이라 기억도 안 날뿐더러 전 그런 무모한 생각 해 본 적 없습니다.”

“네, 어련하시겠어요.”

나는 다시 침대에 누워 핸드폰을 들었다.

“이든사우스 들어 보실래요?”

“……음악 감상은 딱히 취향이 아닌데요.”

“저도 노래 듣는 거 싫어했어요. 근데 은근 속이 뚫린다니까요.”

음악 어플을 열어 노래를 재생하자마자 시끄러운 일렉 기타 소리가 울려 퍼졌다. 뒤에 서 있던 연구원 한 명이 놀라 나를 쳐다보았다.

“좋죠?”

“그냥 시끄러운데요.”

“처음엔 다 그래요.”

“아, 그런가요.”

“저 여기 멤버들이 저한테 해준 친필 싸인 CD도 있는데 보실래요? 아직 저 사짜 랭커라고 밝혀지기 전이라서 진짜 정성스럽게 편지 써 줬다구요. 뭐 이젠 진짜 사짜 랭커 될 거긴 한데.”

“말이 많으시네요. 제법 긴장하실 줄 알았는데.”

“스무 살이라 그런가. 딱히 실감이 안 나네.”

“그럴 수도 있겠네요.”

뭐가 그럴 수도 있겠다는 건지. 나는 입술을 삐죽이며 음악을 껐다. 마지막으로 측정한 마나 수치는 매우 안정. 그러니까, 점점 나와 유도현의 마나가 자연스럽게 융화되고 있다는 뜻이었다. 전정우는 어처구니가 없는 듯 계속해서 검사를 다시 했었다. 여태 그렇게 융화시키려 할 땐 되지도 않더니 이제 추출하려 하니 융화되고 있는 게 짜증이 난 모양이었다.

“젊은 몸은 알다가도 모르겠군요.”

“되게 늙은 것처럼 말씀하시네.”

“아무래도 열댓 살은 차이가 나니까 적지 않은 나이 차이긴 하죠.”

“네. 그것보다 더 많아 보이시긴 하는데 아무튼 늙은 인간들도 알다가도 모르겠네요.”

“일단 수액 다 맞으신 후 귀가하시면 됩니다. 수술 일정은 오늘 중으로 이사님께서 직접 통보해 주신다고 하셨고요.”

“네. 그럼 그때 뵙는 건가요?”

“아마도요.”

“그 전에 한 번 봬요.”

“……왜죠?”

“이든사우스 콘서트 구경시켜 드릴게요.”

“아, 괜찮습니다.”

전정우가 질렸다는 표정을 지으며 나가자마자, 나는 핸드폰을 들어 메신저를 확인했다. 고한결의 문자 한 통, 유현재의 문자 네 통. 유현재는 나와 다툼 아닌 다툼을 한 후 며칠간 소식이 뜸하더니 갑자기 우리 집에서 거의 상주하기 시작했다. 아마 내가 구토하는 모습을 보고 놀라 그런 것이리라 짐작했지만, 그것 말고도 뭔가 더 있는 모양이었다.

*

“다음 주?”

“어, 왜?”

수술이 다음 주에 잡혔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유현재의 표정이 좋지 않아졌다. 나는 유현재가 분명 무언가를 계획하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가 스스로 말해 줄 때까지 기다릴 셈이었다.

“좀 더 미룰 순 없을까?”

“뭔데? 이유가?”

유현재가 머뭇거리며 눈을 굴렸다. 오랜만에 본 당황한 유현재의 얼굴이 제법 귀엽다는 생각을 했다.

“설마 이든사우스 앵콜 공연? 그거라면 내가 이미 예매해놨지.”

“아니, 그게 아니고…….”

“그럼 뭔데?”

“……너한테 소개해 주고 싶은 사람이 있어.”

유현재의 입에서 나온 의외의 말에 내 눈이 동그래졌다. 내가 ‘소개받을 만한’ 유현재의 인맥이 있다는 게 놀라웠기 때문이었다.

“누군데?”

“아직 여기 안 계셔.”

“그럼 어디 있는데.”

“영국.”

“설마…… 너 학교 다닐 때 만난 사람이야?”

“응.”

“뭐야? 무슨 사람인데.”

“말했잖아. 내가 유학 가는 이유는 하나라고.”

나는 점점 이상해지는 분위기에 웃음기를 지우고 유현재를 쳐다보았다. 유학 가는 이유는 그래, 나 때문이라고 했다. 그때는 내가 마나 때문에 시한부 선고를 받았을 때니까. 그렇다면 지금 이 상황과 관련해 해결을 해 줄 수 있는 사람을 구했다는 건가? 나는 내 짐작을 확실하게 하기 위해 유현재를 채근했다.

“마나 연구가야? 전정우보다 더 뛰어나?”

“연구원이긴 하신데, 그쪽은 아니고.”

“그쪽은 아니란 게 뭔 말이야.”

“그러니까 그 전… 연구원 분처럼 마나 전문은 아니고.”

“그럼 뭔데?”

“강령술.”

“뭐?”

“강령술 연구를 오래 해 오신 분이야.”

유현재의 입에서 나온 것은 의외, 그리고 또 의외의 연속이라 계속해서 머리가 띵해졌다. 그러니까 나 이외에 강령술을 이행한 사람이 있다는 건가? 분명 그때, 강령술을 썼을 땐 내가 최초의 마스터라고 했었던 것 같은데.

“네가 본 그 책을 쓰신 분이기도 하고.”

“너 거기 가서 뭐 한 거니.”

책을 쓴 사람이라는 말에 나는 결국 들고 있던 잔을 떨어트렸다. 가서 조기 졸업까지 한 와중에 이런 일까지 벌였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그분이 다음 주 중으로 오신다고 하셨거든, 여기에.”

“나 때문에?”

“응. 내가 네 상황을 설명했고, 그저께 방법을 찾은 것 같다고 말씀 주셔서…….”

“근데 그걸 이제 말했다?”

“아무래도 네 상태가 좀 안 좋았다 보니.”

“너 서프라이즈에 소질 있구나.”

농담처럼 던진 말에 유현재가 속눈썹을 내리깔며 내 손을 잡아왔다.

“나 진짜 무서워, 찬희야.”

“…갑자기 왜.”

“너는 수술 날짜가 다가올수록 더 아무렇지 않은 척하고.”

“…….”

“나는 매일매일이 악몽 같아.”

일부러 아무렇지 않은 척 하는 것이 습관이 되었다 보니 아무래도 그렇게 보인 모양이었다. 나는 마른 입술을 축이며 유현재를 달랬다.

“말했지. 난 안 죽어.”

“그래. 너는 다시 어디선가 눈을 뜨겠지.”

“…….”

“그렇지만 나는, 네가 죽은 만큼 너한테서 버려져.”

“버려지다니…….”

“그런데도, 정말 아무렇지 않아?”

유현재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아마 이 말을 하기까지 나름대로 큰 고민을 해온 듯했다. 가장 힘들 건 나니까, 본인이 힘든 티를 내면 안 된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었다. 나는 유현재의 커다란 상체를 꽉 안아 주었다.

“아무렇지 않을 리가 없잖아.”

“그런데 왜…….”

“나 진짜 살고 싶어.”

“찬희야.”

“그러니까 이렇게 모든 걸 다 해보는 거야.”

아니었으면 나도,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인간성을 다 버리고 어떻게든 나 혼자만 살아남으려다, 결국 궁극적인 행복 따위 근처에도 가보지 못한 채 진짜로 죽어 버렸겠지. 유도현의 시나리오로 내가 얻게 된 것은 비단 정보뿐만이 아니었다. 내게 그는 반면교사였다. 나는 유현재의 눈물을 닦고 볼에 가볍게 뽀뽀해 주었다.

“울지 말고 우리 즐겁게 시간 보내자.”

“응.”

“같이 요리도 하고, 밥도 먹고, 자전거도 타고, 공연도 가고.”

“응.”

“그러면서 시간 보내고. 네가 모시고 온 분이랑도 이야기 나눌게.”

“응.”

“어떤 방향이든 반드시 우리가 행복할 수 있게 할게.”

“나도 그럴 거야.”

“그래. 넌 내가 1순위랬으니까.”

유현재가 대답 대신 내 입술에 제 입을 맞춰 왔다. 나는 몸을 빼려다가 그의 단단한 손에 허리를 잡혀 바짝 끌려갔다. 짠맛이 입속을 헤집고 들어왔다가 이내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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