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
‘시나리오’의 모든 챕터는 거의 완수되어 있었다. 내가 세이브한 적 없던 ‘도곡 2동 게이트의 기억’ 또한 이미 유도현이 완수한 기억을 불러온 것일 뿐이었다. 유도현은 아마 모종의 이유로 시스템의 관리자가 되었고, 평생 죽을 때까지 이 ‘시나리오’의 챕터를 깨며 살아왔던 것 같았다. 내가 본 적이 없는 기억은 곧 유도현의 시점에서 진행이 되었으며 가끔은 나의 과거와 겹치는 상황도 나왔다. 예컨대, 아버지가 마나 증폭제를 줘서 복용하게 되는 것이라든가.
방대한 시나리오를 모두 열람하기는 시간이 없어, 나는 마지막으로 전체 리스트만을 쭉 훑어보았다. 그러다가 2단계 옆에 ‘(미달성)’이라 적힌 작은 글씨를 발견했다. 일전에 꿨던 꿈에서 유도현이 짜증을 내며 2단계를 넘겼던 것이 기억났다. 2단계는 총 10개의 챕터로 비교적 짧게 구성되어 있었으며, 미달성인 챕터 구성은 총 2개였다.
[미달성 챕터는 달성된 부분까지만 시나리오를 불러 옵니다. 챕터를 달성하지 못하고 강제로 넘어갈 경우 시나리오는 조금씩 바뀌며 리셋하지 않는 이상 다시 돌아가기 어렵습니다. 확인하시겠습니까?]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엔 조금 더 구체적인 장면이 구현되었다. 나는 순식간에 내 집에서, 어느 도로 한복판 위로 덩그러니 떨어졌다. 도로는 엉망진창이었고 인기척이라곤 느껴 볼 수 없었다. 마치 게이트 발생 직전의 통제구역 같은 느낌이었다.
“유도현!”
나는 찢어질 듯 높은 괴성에 놀라 소리의 근원지를 바라보았다. 30대 중반 정도 된 피투성이의 남녀가 누군가를 가운데 두고 총을 든 채 서 있었다. 그리고, 그 한가운데에는.
“소리 지르지 마. 귀 아프니까.”
유도현이 서 있었다. 나는 멀쩡한 유도현을 제삼자의 눈으로 보는 것이 처음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내 ‘빙의 전’ 얼굴을 하고 있는 그대로였으며 옷이 살짝 찢어진 것 이외에는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남녀에 비해 지나치게 깔끔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순순히 죽어 줄 마음이 생긴 건가?”
“죽어 준다고? 내가?”
“아직도 오만하기 짝이 없네.”
“날 죽이면 너희 부부는 정식으로 한성을 인계받는 건가?”
“그것까진 네가 알 바 아니지. 어차피 그땐 네가 없을 테니까.”
유도현이 웃기다는 듯 파핫 소리를 내며 웃었다. 남녀, 그러니까 한재민의 부모는 긴장한 얼굴로 총을 고쳐 잡았다.
“내가 없을 거라고?”
“넌 이 상황이 웃겨? 아직도 사태 파악이 안 돼? 널 지원 올 사람은 더 이상 없다. 네 마나는 속박됐고.”
“쏴.”
유도현이 간단하게 말했다. 남자의 눈썹이 이상한 모양으로 찡그려졌다. 죽음을 맞이하는 사람치고는 지나치게 거만하고 안일한 얼굴이긴 했다. 마치 어떤 트릭이라도 설치되어 있는 것마냥. 물론 나는 유도현이 그런 이유를 이미 알고 있었지만.
“너희는 어차피 죽어.”
“뭐라고?”
“내가 죽든, 죽지 않든.”
“헛소리하지 마.”
“내가 죽지 않는다면 그에 대한 벌로 죽을 테고.”
“…….”
“내가 죽는다 해도 어차피 너희는 한성을 못 가지고 죽는다.”
“유도현, 너도 결국 죽기 전에는 마지막 헛소리나 지껄이는 그냥 인간일 뿐이구나.”
“그냥 인간?”
유도현이 웃었다.
“그냥 인간은, 이제 고작 마지막 한 발 정도의 마나만 남은 너희들이겠지.”
“끝까지 건방지네.”
“난 벌써 다섯 번째야. 너희의 총구를 보고 있는 게.”
“무슨…….”
“이번엔 살까, 아니면 죽은 척해서 너희의 알량한 자존심을 몇 초간 충족시켜 줄까. 그냥 고르면 되는 거거든.”
그때였다. 아무도 없을 줄 알았던 골목에서 훌쩍거리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한재민의 부모가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유도현은, 아주 태연했다. 알고 있다는 듯이. 이미 본 드라마의 재방송을 수없이 본 것처럼 아주 지긋지긋한 얼굴로.
“형…….”
나와 유현재를 바라보았다. 그러니까, 고작 일곱 살밖에 되지 않은 나와 유현재를. 나는 울먹이며 유현재를 끌고 골목 밖으로 낑낑대며 걸어 나왔다. 유현재는 어딘가에 깊이 찔린 모양인지 반쯤 의식이 없었다. 아마 건물이나 뭔가가 무너지면서 다친 모양이었다.
“형, 현재가…….”
“나오지 말라고 했잖아.”
“그치만 형, 현재가……. 죽으면 어떡해?”
어린 유찬희는 겁도 없이 울면서 유도현에게 다가갔다. 섣불리 총을 쏘지 못한 채 한재민의 부모가 계속해서 그들을 지켜보았다. 여기서, 유도현이 나를 지키다 죽고 이야기가 시작된다. 보통 나의 삶의 시작은 그랬다. 한재민의 부모 또한, 총구를 유찬희에게 겨눈 채 유도현을 견제했다. 동생이니 반드시 지키겠지. 아마 그런 계산으로.
“가만히 있어.”
“형, 형…….”
“가만히 있으랬잖아.”
약간의 실랑이가 이어졌다. 총이 겨눠진 상황이라는 게 믿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그때였다. 유도현이 갑자기 총을 쥔 한재민의 엄마를 바라보며, 주머니에 있는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여자가 반사적으로 방아쇠를 당겼다. 잠깐! 남자가 제지하려 했지만 이미 마지막 마나까지 끌어모은 총알은 빠르게 발사된 뒤였다.
“말도 안 돼…….”
나는 입을 막았다. 구역질이 나오려 했기 때문이었다. 유도현은 아무런 표정 변화 없이, 총을 맞은 유찬희를 저 멀리 내던져 버렸다. 작게 눈을 뜨고 겨우 숨만 붙이고 있던 유현재도 미련 없이 걷어차 버렸다.
“미친놈……. 자기 동생을 방패로.”
“사람 하나 죽이려고 부부가 둘이서 난동 피우는 건 안 미쳤고?”
“미친 새끼. 제대로 돌았어. 제정신이 아니야.”
“그런 얘기는 다음에 마저 합시다.”
여자는 이미 모든 마나를 소진한 상태였고, 남자 또한 이제는 유도현이 가볍게 제압할 수 있을 정도의 힘만 남은 상태였다. 유도현이 천천히 손을 올렸다. 그리고 가볍게, 달걀을 쥐듯 손가락을 말았다. 멀리 떨어져 있었음에도 마치 누군가에게 목이 졸리듯 두 남녀의 눈이 커졌다. 그리고는 이내 축 늘어졌다.
[챕터의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였습니다.]
[챕터의 목표: 유현재와 유찬희를 구하고 명예로운 죽음을 맞이하기]
[궁극적인 목표와 챕터의 목표가 상충합니다!]
[목표 수정을 하시겠습니까?]
[당신의 현재 목표는 ‘궁극적인 행복’입니다.]
“닥쳐. 개새끼야. 건너뛸 거니까.”
[……챕터 45를 스킵합니다. 챕터 46으로 넘어갑니다.]
그리고 나는 다시 내 집, 소파 위로 다시 돌아왔다. 나는 아직도 내가 봤던 장면을 믿지 못하고 가만히 서 있었다. 유찬희를 구하긴커녕 그를 방패삼아 목숨을 유지한 유도현. 그리고도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던 얼굴. 죽어가는 유현재를 걷어차던 발.
“말도 안 돼.”
그럼에도 왜 결국 유도현은 죽고 시스템은 내게로 넘어온 걸까. 이렇게까지 살고 싶어 하는 욕망이 강했으면서. 나는 강령술을 썼을 당시, 게이트 너머로 죽은 눈의 유현재가 반복하던 말을 떠올렸다.
‘싫어서.’
‘뭐?’
‘네 행복이 싫어서.’
‘내가 가지지 못할 행복은 너도 가지지 마, 찬희야.’
‘넌 내 동생이잖아.’
‘너네 둘이 함께 행복해지는 게 싫어.’
‘사랑하는 게 싫었어.’
‘너랑 유현재가.’
나는 또 다른 미달성 챕터가 있는지 프롬프터를 천천히 확인했다. 스크롤의 가장 마지막, 10단계. 색깔이 같아서 처음엔 몰랐지만, 10단계는 전체가 미달성으로 되어 있었다. 그러니까, 결국 유현재는 목표의 마지막 단계에서 좌절하고 원하는 궁극적인 행복을 얻지 못한 채 죽었다. 그 후 모종의 이유로 시스템은 내게 넘어왔으며 그 이유는,
“내 행복이 싫어서.”
그의 희생으로 행복하게 오래오래 잘 살았다고 남겨질 나와 유현재의 그 결말이 싫어서. 이런 비겁하고 유치한 이유로 우리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