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
“지랄하지 마.”
한재민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기 전에 네가 먼저 쓸모없어질 거니까.”
“그래. 난 쓸모없어지고 싶어.”
“그렇게 원하면 그렇게 만들어 줄게.”
“그치만 그렇게 되지 못한다면? 내가 죽는다면 어떡하지, 재민아? 그래서 내가 다시 또 과거로 돌아가서 너를 만나고. 이후엔 더 강력한 네 약점을 잡아 널 죄여오고. 너는 결국 죽게 된다면.”
“나랑 상관없는 일이야.”
“왜 상관없어. 재민아. 과거의 너도 이런 식으로 나를 보냈지만 나는 이렇게 돌아왔는데.”
거짓말이 섞인 대사였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거짓말이라는 것은 아무도 알 수 없었다.
“기억나지? 폐공장에서 만났을 때. 나는 널 기억하지 못했지?”
한재민이 눈썹을 찡그렸다.
“그땐 우리 아버지가 널 죽였어. 지금은 네가 우리 아버지를 죽였다고 생각하겠지만.”
“너 진짜 되는대로 막 내뱉는구나.”
“유도현을 죽인 너희 부모가 괘씸해서, 너와 네 주변 사람들을 죄다 죽여 버렸어. 그래서 너무 오랜만에 본, 성인이 된 네 얼굴이 기억이 안 나더라.”
“뚫린 입이라고…….”
“못 믿겠으면 믿지 마. 그런데 넌 어차피 유도현이 그런 삶을 살아온 걸 여태 믿어 왔잖아? 결국 내 말을 믿게 될걸?”
“그만해.”
“진실이 무서워?”
“닥치라고.”
“그렇지만 진실을 제외한 나머지는 결국 다 가짜야.”
“…….”
“내가 죽게 되는 한, 너는 그냥 가짜가 된다고.”
“넌 역시 내 인생에 도움이 안 된다.”
한재민이 뒤돌아 성큼성큼 문 밖으로 걸어 나갔다. 나는 사라지는 뒷모습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확실히 불안해하고 있다. 적어도 나의 죽음을 쉽게 결정내리지 못할 정도로는.
*
이후 내가 해야 할 일은 몇 가지로 추려졌다. 마나가 빠지기 전까지 최대한 이 시스템을 알아보고 연구하는 것. 그리고 얼마 남지 않았을지도 모르는 이번 인생을 정리하는 것. 실패했을 경우, 그래. 다시 유현재를 유학 보내기 전으로 돌아가겠구나. 나쁘지도, 좋지도 않은 상황이었다. 나는 거기서 다시 또 지금의 상황을 준비하며 어떻게 하면 유도현에게서 벗어날 수 있을지 고민하면 되었다. 시스템에 의하면 분명 나는 아홉 번 죽고 열 번째 삶을 살고 있는 중이었으므로 아직 한 번의 회귀가 남아 있었다. 그 기회가 끝나면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었지만 어찌됐건, 이 상황을 타개할 수 있는 기회는 한 번 더 있었다는 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때로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이유는 단순했다. 그때의 고통을 유현재가 다시 느끼고, 지옥 같던 2년을 보내게 하고 싶지 않아서. 그래서 나는 모든 것을 바로 지금, 열 번째 삶에서 해결하고 싶었다.
“시스템.”
시스템은 착실하게 내 말을 수행했다. 오로지 감으로, 나는 이제 거의 유도현에 가까워졌다. 따로 융합제를 투여하지 않았는데도 그랬다. 이 말인즉슨 오롯이 내 것인 마나는 거의 사라지고 있다는 뜻이었다.
[관리자님, 접속을 환영합니다.]
[현재 모든 설정을 제어할 수 있습니다.]
[목표 달성율을 보시려면 1번, 유저의 크리티컬 수치를 보시려면 2번, 목표를 수정하시려면 3번, 유저의 설정관리를 하시려면 0번, 나가시려면 나가기를 불러주세요.]
“이거 말고 또 다른 관리는 없어?”
[명령이 인식되지 못했습니다.]
“그, 기억을 저장한다거나. 유저에게 보여줄 수 있다거나. 뭐 마나를 저장해놓을 수 있다거나. 그런 게 있을 거 아냐.”
분명히 있을 것이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인공 게이트에서는 과거의 기억들을 불러오고, 얼마 전 도곡동 게이트에선 유도현의 능력 일부를 쓸 수 있게 된 이유가 없었다.
[조금 더 명확하게 말씀해 주십시오.]
나는 허공에 뜬 그 글자를 보고 눈을 크게 떴다. 그러니까, 좀 더 명확해지면 접속할 수도 있다는 거지? 나는 자세를 고쳐 잡고 소파에 허리를 편 채 꼿꼿이 앉았다.
*
“기억 불러와.”
[조금 더 명확하게 말씀해 주십시오.]
“그… 기억하게 해 줘.”
[조금 더 명확하게 말씀해 주십시오.]
“저… 관리자의 힘을 불러와 봐.”
[조금 더 명확하게 말씀해 주십시오.]
“관리자… 힘을… 아 씨.”
[조금 더 명확하게 말씀해 주십시오.]
[조금 더 명확하게 말씀해 주십시오.]
나는 결국 들고 있던 종이를 구겨 던지고 소리를 질렀다. 벌써 한 시간째였다. 도대체 어떤 명령어로 이야기를 해야 알아듣는 거지? 나는 좀 더 생각에 잠겼다. 그러니까, 시스템의 힘으로 어떠한 ‘기억’을 불러오거나 유도현의 ‘힘’을 가지고 온 것은 모두 게이트에서였다. 혹시 게이트라는 장소가 열쇠인 걸까? 그렇다면 지금 절대 해결할 수 없는 문제다. 더군다나 이전의 S급 게이트 난입 사건으로 나에 대한 보안은 더더욱 강화된 상태일 것이었다. 마음대로 게이트에 또 들어갔다간 뭔가를 해결하기도 전에 감옥에 들어가는 변수가 생길 수도 있었다.
“아니, 미친. 내가 시키는 대로 다 해야 하는 놈이 왜 자꾸 명확하게 말하라는 거야. 개떡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듣는 게 시스템이 할 일 아냐? 나는 맨날 네가 개떡같이 말해도 죄다 이행했는데.”
생각해 보니 존나게 억울했다. 나는 이 새끼가 갑자기 날 몇 번이고 회귀시켜도, 대충 이벤트라고 빨리 해야 한다고 종용해도, 뭐 소설 문구대로 가라고 해도 다 시키는 대로 했어야 했는데.
잠시만.
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러고 보니 그런 일도 있었다. 갑자기 모든 자유의지가 멈추고, 소위 그 ‘소설’ 지문이 뜨면서 그대로 읽을 수밖에 없었던 일. 그땐 그게 내가 읽은 소설대로 이야기가 진행되어야 했기 때문에 생긴 해프닝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제 이 세계가 소설 속 내용이 아니란 걸 깨달았으니까. 그러니까 그건…….
“시나리오?”
[목표 달성을 위한 시나리오 프롬프터를 켜지겠습니까?]
와, 미친.
“켜.”
[관리자님께서 설정한 시나리오 프롬프터를 켭니다.]
[시나리오가 긴 관계로 로딩에 시간이 걸립니다. 짧게는 10분, 길게는 10시간 정도가 소요됩니다.]
“10시간?!”
뭐가 그렇게 긴 건데? 나는 입을 벌리고 천천히 전진해 나가는 로딩 바를 바라보았다.
[시나리오 로딩 중…… 1, 2, …5, 7, …9.]
숫자 올라가는 속도가 다행히 엄청나게 느리진 않았다. 나는 인내심 있게 계속해서 창을 바라보며 100%가 되기를 기다렸다. 숫자는 20이 넘어가자 현저히 속도가 줄어들었다. 제발. 나는 허리에 힘을 풀고 로딩 바를 계속 노려보았다.
[시나리오 로딩 중…… 22……, 23………….]
“아, 좀.”
내가 재촉하자 어쩐지 숫자가 좀 빨라진 기분이 들었다. 물론 타이밍이나 기분 탓이겠지만 나는 뭐가 됐든 빨리 진행되었으면 하는 바람에 계속해서 시스템을 종용했다. 누가 보면 미친놈 같아 보였겠지만, 딱히 보는 사람도 없으니까.
30에 도달하는 데에 1시간이 걸렸다. 나는 반쯤 포기한 상태로 드러누워 눈을 감았다. 한숨 자고 일어나면 100퍼센트가 되어 있겠지. 잠이 올 리 없었지만 나는 눈을 감고 움직이지 않았다.
시끄러운 기계음에 눈을 번쩍 떴다. 그새 잠든 모양이었다.
[로딩 완료! 시나리오 프롬프터를 바로 켜시겠습니까?! Y/N]
시계를 보니 정확히 다섯 시간이 지나 있었다. 로딩에 총 여섯 시간이나 걸린 것이었다. 나는 튀어나오려는 욕을 겨우 삼키고 고개를 끄덕였다. 순식간에 수많은 챕터 리스트가 떴다. 챕터는 무수히 많았으며 단계별로 이루어져 있었다. 나는 커진 눈으로 천천히 챕터들을 내려 보았다. 모두 확인하기엔 너무 방대한 분량이었지만, 마치 한 번 클릭한 것처럼 회색으로 칠해진 몇몇 챕터가 있었다. 나는 천천히 그중 하나를 눌러 확인했다.
[시나리오의 기억으로 진입합니다. 해당 챕터는 ‘특수 공간: 인공 게이트’에 진입할 때 자동으로 재생됩니다.]
[바로 보시겠습니까?]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순식간에 눈앞에 두 사람의 인영이 나타났다. 심장이 크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이미 봤던 장면이었다. 그러니까, 한 사람은 반쯤 쓰러진 채 누워 있고 한 사람을 총을 겨누고 있는 저 장면.
“명령입니다.”
“저는 명령을 받고 이 일을 하는 것뿐입니다.”
그때는 가까이 갈 수 없었지만 지금은 충분히 다가갈 수 있었다. 상대가 성대를 눌러 힘겹게 소리를 냈다. 그는, 아마 내가 사실을 모르고 봤더라도 충분히 유현재를 연상시킬 만한 외모를 하고 있었다.
“왜 나한테 이런 짓을 하는 거지?”
누워 있는 남자가 물었다. 잔뜩 다치고 짓이겨져, 굳이 총을 쏘지 않아도 자연스레 죽을 수도 있을 듯한 몰골이었다.
“…알고 계시면서 왜 물으시는 거죠?”
김구현이 말했다. 그때와 똑같은 대사였다.
“김 팀장님. 저에게 아무리 하소연하셔 봤자 소용없습니다.”
“자네도 가족이 생긴다면 이런 절박한 마음을 알겠지.”
“아, 그렇죠. 이제 5년차라고 하셨나요. 결혼 생활 그것 참 좋을 때죠.”
“그래.”
“저는 결혼을 한 적이 없어서 모르겠지만, 김 팀장님을 보며 한 번쯤은 해도 괜찮을 것 같단 생각은 했었습니다.”
이후로는 이전과 같은 대화였다. 나는 ‘유 팀장’이라는 이름이 나오자마자 다시 귀가 예민해졌다.
“유 팀장님 둘째 아들 분과 동갑이라는 얘긴 들었습니다.”
“그만. 꺼, 이제.”
나는 차마 유현재 아버지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 눈앞에 펼쳐지던 장면이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그런 거였구나. 이런 것들이 모두 ‘시나리오’로 명명되고 있었구나. 꿈에서 보던 어떤 미래도, 내가 겪어야 했던 어쩔 수 없는 사건들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