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
온전히 유찬희의 감이든, 유도현의 힘을 빌린 능력이든 간에 나는 어느 정도 내가 ‘유도현’일 때의 상태와 ‘유찬희’일 때의 상태를 점점 구분해낼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그건 모든 것이 좋지 않게 돌아가는 와중에도 그나마 상황을 내게 유리한 쪽으로 바꿔줬다.
“실험이 실패해야 돼.”
유현재는 심각한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방금까지 전정우에게 제안한 방법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있었으면서, 그것이 실패해야 한다는 내 말은 사실 누구든 납득하기 어려울 터였다.
“지금 이 마나가 다른 사람한테 주입되면 어떻게 될 것 같아?”
“추출된 마나는 누군가에게 주입하는 게 안 되잖아.”
“지금은 안 되겠지. 언젠가 될지도 모르는 거고. 한재민 손에 마나가 온전히 보관되어 있는 이상 언젠가 그건 누군가에게 쓰일 거야.”
“아예 싹을 잘라야 한다는 거야?”
“응.”
“찬희야.”
유현재가 머뭇거리며 시간을 끌었다. 유현재는 갈등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참을성 있게 그의 짧은 고민을 기다려주었다.
“그걸 꼭 네가 해야 할까?”
“뭐?”
“그냥 네가 살면…… 그걸로 끝이면 안 돼?”
“유현재.”
“쓸데없는 정의감이잖아.”
“쓸데없다고?”
나는 화를 짓누른 목소리로 천천히 말했다.
“넌 이게 얼마나 괴로운지 몰라.”
“그래, 나는 몰라.”
유현재가 지지 않고 대꾸했다.
“나한텐 네가 제일 중요하거든.”
“내가 제일 중요하면서 왜 내 고통을 몰라?”
“고통을 아니까 말하는 거야.”
“난 이게 다른 사람한테 가는 게 싫어.”
“네가 주는 거야? 네가 그 사람한테 고통을 주는 거 아니잖아.”
“네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올 줄 몰랐어.”
“아니. 너무 당연하게 나와야 하는 말이야.”
유현재가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 유현재의 심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일단 마나를 추출한다는 행위 자체도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이었으며, 그 추출한 마나를 없애겠다는 것은 한재민의 뒤통수를 치겠다는 것과 똑같았으니까. 한재민은 마음만 먹으면 전투부 보안국장의 집에 불을 질러 그를 죽이는 것도, 그것을 덮는 것도 가능한 인간이었다.
“그런데 그게 네 입에서 나오면 안 되지.”
“내 입에서 나와야 하는 말이 그럼 뭔데?”
세계의 평화, 악역의 척살, 행복한 결말……. 나는 하려던 말을 삼키고 침묵했다. 유현재에게 그러한 야망이 보였던 적이 있던가? 그러니까, 이제는 내가 소설인지 아닌지도 모를 그 ‘기억’에 의존해 떠올리고 있는 유현재의 모습이, 지금의 유현재와 똑같은 상황인가? 생각해 보면 전혀 아니었다. 오히려 반대였다. 유현재는 오로지.
“난 그냥 네가 살면 돼.”
그냥, 나를 위해 존재하는 사람처럼 굴었다. 그 수많은 시간 동안, 나의 가족이 유현재에게 지은 죄와 과거의 내가 유현재에게 저질렀던 모든 일들 때문에 그가 나를 미워할까 노심초사하며 살아왔던 날들이 너무나도 바보 같을 정도로 그랬다.
“그래.”
그게 과연 사랑이라는 이름 아래에서만 행해졌다는 게.
“고마워.”
“고맙다고?”
“그렇게 말해 줘서 고맙다고.”
“그럼 얘기는 없던 일로 하는 거야?”
“아니.”
유현재가 미간을 찌푸리며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그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천천히 대답했다.
“그건 안 돼. 이건 그냥 영원히 없어져야 돼.”
“찬희야!”
오히려 그런 말도 안 되는 의무감은 내게 더 깊게 내재되어 있었다. 이 세상의 전개와 결말을 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나는 나를 얼마나 희생했던가. 나는 지금 살아 있는 사람 중 누구보다 이 고통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이 고통이 다른 누군가에게 전가된다면 나 또한 그에 자유로울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럼 너는?”
“뭐?”
“너는 도대체 너를 언제 생각할건데.”
“…….”
“난 네가 늘 첫 번짼데, 너는 왜 네가 첫 번째가 아니야?”
“……그건,”
“그럼 나는, 내가 뭐가 되는데 대체.”
“현재야. 내 말 좀 들어 봐. 이건…….”
유현재가 감정을 누르려는 듯 눈을 감았다. 나는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몰라 연거푸 마른세수만 했다.
“그래, 찬희야.”
유현재는 대답 대신 몸을 일으켜 테이블에서 일어난 뒤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나와 눈을 맞추지 않은 채 천천히 말했다. 나는 유현재가 할 뒷말을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
“너는 네 신념을 지켜.”
“…….”
“난 너를 지킬게.”
나와 유현재의 눈빛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문장만으로는 충분히 로맨틱할 수 있었음에도 그 말에는 냉기가 서려 있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입술이 하얘질 때까지 꽉 물었다.
“그래.”
“…….”
“우리 각자 서로가 지키기로 한 걸 지키자.”
“…….”
“그리고 행복해지자.”
“……응.”
“그래.”
확신할 수 없었지만 우리는 어쨌든 약속했다. 행복해지자고. 그것이 우리의 공통적이고 궁극적인 목표임에는 확실했으니까.
*
한재민은 생각보다 군말 없이 내 생각에 동조해 주었다. 마나 융합도 제대로 되지 않는 데다가 자기 멋대로 컨트롤도 안 되는 인물이었으니, 그의 입장에선 내가 마나를 빼 주면 나쁠 것이 없을 터였다. 그 이후 그의 계획에서 나의 행방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으나 내게 그것은 크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다만 중요한 것은, 뇌사가 아닌 살아 있는 사람에게서 마나를 빼낸다는 것이 굉장히 불법적인 일이며 그것을 해낼 수 있는 능력 있는 의사(라고 불리기에도 애매한)를 찾기란 하늘의 별따기라는 점에 있었다. 한재민이라면 못 찾아낼 것도 없었지만, 아무리 한재민이라고 해도 하루 만에 그런 사람을 찾아낼 방법 또한 없었다.
“너는 참 내가 웃기겠다.”
한재민이 나를 무감하게 쳐다보았다.
“갑자기 굴러 들어와서 형의 힘을 가지겠다고 설치더니, 이젠 죄다 빼 달라고 지랄하고 있잖아.”
“웃긴 건 애저녁에 지났지.”
“그렇겠네.”
“처음엔 그 힘 믿고 어디까지 설치나 궁금해서 봤는데.”
“…….”
“이젠 참 신기해.”
신기하다는 사람치곤 전혀 표정 변화가 없었지만, 나 또한 항상 한재민의 말에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 편이었기에 별 상관없었다.
“쬐끄만 것들이 뭐가 그렇게 대단하신 사랑을 하고 있는지.”
“…….”
“나중에 보면 그딴 거 다 존나 허상일 텐데, 이런 생각 하면서.”
“허상?”
“그래, 허상. 감정만큼 확실한 허상은 없지.”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네.”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네? 그게 아니라 그렇게 생각해, 보통은.”
“…….”
“니들이 존나 유난스럽고 별나 빠진 거야.”
“…….”
“보통 사람들은 목숨, 돈, 권력 이런 것 앞에서 한순간의 감정은 아무것도 아닌 게 돼. 너의 그 잘난 아버지도 마찬가지였고. 네 형도 마찬가지였지.”
“그래서, 그게 신기해?”
“어. 웃기지, 자세히 말하자면.”
“난 그래서 네가 싫어.”
“뭐?”
“다 너 때문이잖아.”
나는 한재민을 노려보았다. 한재민 또한 어디 한번 해보라는 듯 나를 마주 보았다.
“너 같은 새끼들 때문에 모두가 한순간의 감정을 저버리고 인간이 아니게 되는데.”
“…….”
“넌 모든 게 네 손 안에 있는 것 같고 재밌지?”
“내가 재밌어 보여?”
“너라고 영원히 이러고 행복하게 살 것 같아? 그게 진짜 이루어질 거라고 믿는 건 아니지?”
“아, 그래.”
입꼬리는 올라가 있었지만, 한재민의 눈에는 전혀 웃음기가 없었다. 그 동안 보아온 결과 이건 화가 났다는 뜻이었다.
“네 미래에 나는 죽었다고 했지.”
“그래.”
“어떻게 죽니?”
한재민이 평온한 목소리로 물었다. 물론, 목소리만 평온할 뿐 분위기와 그의 행동 그 모든 것이 불안정해 보였다.
“안 믿는다며?”
“네가 마치 날 전부 다 아는 것처럼 오만방자하게 굴길래 물어봤어. 날 죽일 수 있는 대단한 비책이 있나 싶어서.”
“내 형이 죽은 건 네 부모한테 진 게 아니지.”
“…….”
“네 부모를 이용해 드디어 탈출한 거지. 이 지긋지긋한 세계에서.”
“그러기에 유도현은 많이 억울해 보이던데.”
“그거야 말로 한순간의 감정이고.”
“하고 싶은 말이 뭐야.”
“네가 하고 싶은 걸 하려 할 때마다 너는 더 괴로워질 거야.”
“……뚫린 입이라고 함부로 말하는구나.”
“난 네가 죽을 때까지 죽지 않을 생각이거든. 너도 알다시피 나는 끊임없이 죽고 살아나니까.”
“그걸 누가 알아줄 것 같아?”
“죽는 순간의 네가 알겠지.”
한재민의 눈빛이 한순간에 죽었다 다시 돌아왔다. 나는 가볍게 웃음을 머금고 말을 이었다. 일부러 무언가 깨달았다는 과장된 표정과 함께.
“아하.”
“…….”
“역시 넌 그게 무섭구나.”
언젠가 저버릴 수 있는, 누군가의 손에 죽을 수 있는 무수한 기회의 한재민이. 그게 지금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아마 어린 시절부터 한재민을 계속해서 괴롭혀 왔을 것이었다. 그래서 유도현이 죽어도 죽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쯤의 나이부턴 끊임없이 그를 부관참시하고 확인사살하고 싶어 했을 것이다. 그를 죽인 것은 한재민 본인의 부모이기에, 반드시 그 화를 입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그리고 그것의 이용 수단은 유찬희였고. 하지만, 유찬희는.
“유도현이.”
유도현이 됨으로서 다시 한재민을 죽이려 하고.
“너는 죽을 운명이래.”
그 운명은 다시 한재민을 죄여오고. 그는 또 불안해지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