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랭커 사용 설명서-101화 (101/115)

101.

“한재민이 말했던 반가운 얼굴이 당신이에요?”

전정우가 양손을 가운 주머니에 넣고 나를 반겼다. 오랜만에 본 얼굴은 여전했다. 어쩐지 고지식해 보이는 머리 스타일도, 밋밋한 가운 속 셔츠와 바지도.

“그러게요. 저도 이렇게 다시 뵐 줄은 몰랐습니다.”

“이제 국가보단 돈을 선택한 건가요?”

“뭐가 그렇게 극단적인가요? 보편적인 이직 사유로 그저 거처를 옮겼다고만 생각해 주시면 될 텐데요.”

“아, 네. 그러죠, 뭐.”

나는 별 상관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요즘 두문불출하시더군요. 게이트 출정이 모두 퍼포먼스였다고 하더니, 이번엔 또 S급 게이트에 맨몸으로 뛰쳐 들어갔다고. 혹시 마나가 정신 상태에도 영향을 미친 겁니까?”

“저한테 왜 이렇게 관심이 많으세요?”

“고작 이 정도로 관심이 많냐고 묻는 건가요? 제가 이곳 한성 병원 연구소로 이직한 후 한 달동안 한 게 뭔 줄 압니까?”

“뭔데요.”

“유찬희 군의 생체 데이터를 모두 파악하는 것이었습니다. 각종 심리검사 결과와 그간의 정기 검사에 대한 유의미한 분석. 패턴. 죄다 도식화하여 앞으로의 연구 방향까지 잡았죠.”

“와, 존나 무섭네.”

“네. 그리고 이제야 뵙게 된 겁니다. 그전까지 제가 이곳으로 이직한 건 그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비밀이었기 때문입니다.”

“왜요?”

“아무래도 유찬희 군의 몸 자체가 워낙 신비롭다 보니.”

“방금 표현 진짜 개 징그러웠던 거 아시죠.”

“학문적인 표현이었을 뿐입니다.”

몇 년 만에 만난 얼굴이었음에도 나는 그새 그의 앞뒤 꽉꽉 막힌 말에 질려버렸다. 어차피 전정우가 단순히 돈 때문에 이곳에 왔든, 한재민의 어떤 사상에 동의해 합류했든 내게 하는 행위 자체는 똑같을 것이었다. 나를 연구하고 분석하는 것. 그리고 내가 가진 ‘다른 것’을 찾아내는 것. 한재민이 내 마나를 안정시키려는 목적은 절대 나를 살리고자 하는 희생적인 이유가 아니다. 오로지 자신의 힘을 기르기 위한 것이다. 그리고 한재민이 최종적으로 이루고자 하는 목표는 역시,

“국마연에서 당신이 이곳으로 왔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어떻게 되죠?”

“글쎄요. 단순 이직이기 때문에 별다른 제재를 할 수는 없을 겁니다.”

“돈 때문이에요?”

“직설적이시네요. 원래 회사원이란 여러 복합적인 이유로 이직을 하곤 합니다. 돈 하나로 설명할 순 없죠.”

“그럼 한재민의 사상에 동조하기 때문인가요?”

“사상이요?”

전정우가 인상을 찌푸렸다. 내 말의 저의를 “파악하려는 듯한 표정이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말을 이어 갔다.

“한재민,”

“…….”

“…의 궁극적인 목표 말이에요.”

전정우의 한쪽 눈썹이 높이 올라갔다.

“지배라든가, 소유라든가. 혹은 절대 권력이라든가.”

“그 정도 자리에 있으신 분들이라면 으레 갖고 있는 감정들이겠죠.”

“한재민은 유별나잖아요?”

“…….”

“적어도 이 나라에서, 자신의 머리 위에 아무도 없길 바라잖아요.”

“…….”

“알고 있죠?”

전정우가 가운에 넣고 있던 손을 천천히 뺐다. 내가 하려는 말이 무엇인지 대충 알고 있는 듯한 얼굴이었다.

“지금 여기에 당신이 있다는 건, 딱 한 가지 의미로밖에는 해석이 되지 않는데요.”

“섣부른 추측입니다.”

“그렇게까지 멍청한 사람 아니잖아요? 애초에 2년간 한성 병원 연구진들도 통제 못하던 이 망할 마나 흐름도 본인 정도면 할 수 있다고 생각했으니 온 거 아니냐고요. 전 당신한테서 그 정도의 자신감을 느꼈었는데.”

전정우가 한숨을 내쉬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흰 가운을 입은 모습은 이전과 똑같았지만 가슴 부근에 새겨진 로고만은 확실히 달라졌다.

“그래서, 맞다고 하면 어쩔 거고 아니라고 하면 어쩔 겁니까?”

“글쎄요.”

“……네?”

“그쪽 대답에 따라 달라지겠죠.”

어처구니없는 내 말에 전정우가 인상을 찌푸렸다.

“저의 선택과 찬희 군의 행동에 무슨 관련이 있는 거죠? 저는 그저 당신을 연구하고, 마나의 흐름을 순환시켜 주기만 하면 됩니다.”

“말했잖아요. 한재민은 지금보다 더 큰 힘을 원해요.”

“…….”

“그리고 그걸 해낼 수 있는 건 저구요.”

“……꼭 찬희 군이 아니더라도,”

“아뇨. 못해요. 그러니까 제가 갑자기 S급 게이트에 쳐들어가든, 한재민의 심기를 꼬박꼬박 건드리든 아무 말도 못 하는 거라고요. 제가 아니면 못 하니까.”

“…….”

“그치만 만약 당신이 제 몸에서, 한재민이 원하는 것들을 빼낼 수 있다면?”

“…….”

“유도현의 마나를 제 몸이 아닌 다른 숙주에 안전하게 옮겨 담을 수 있다면? 그렇다면 제가 필요할까요?”

“그건 불가능합니다.”

“애초에 당신은 유도현의 힘이 제 몸에 들어온 이유조차 물어보지 않으셨죠.”

전정우가 표정을 굳혔다.

“다 알고 있잖아요. 제가 어떻게 이런 말도 안 되는 마나를 가지게 되었는지. 그리고 왜 그걸 스스로의 힘으로 융합할 수 없는지.”

“연구원으로서의 정보일 뿐 어떠한 사상에 동조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그래요. 그 연구원으로서의 프라이드가 당신에겐 무척 중요하겠죠. 늘 느꼈어요. 당신의 야망 같은 거.”

“…그랬습니까?”

“그럼요. 열일곱 살짜리한테도 느껴지는데 한재민이라고 느끼지 않았겠나요? 전 제안을 하는 거예요. 한재민에게 말하기 전에, 당신에게, 아주 특별하게. 프리미엄 서비스로.”

“왜죠?”

“제가 필요하니까.”

“살고 싶어지셨습니까?”

“네.”

“그럼 차라리 마나를 융합하고, 한재민 이사님 밑에서 사는 것이 훨씬 안전…….”

“살고 싶다고요, 저는.”

전정우의 표정이 난처해졌다.

“그건 제게 죽는 거잖아요.”

“…….”

“죽기 싫어요. 그러니 살게 해 달라고 딜을 하는 겁니다. 저는 제가 가지고 있는 이 몸뚱이를 드리고, 전정우 씨는 저를 살리고.”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건가요?”

“말해야 해요?”

“네. 제가 납득할 수 있는 타당한 이유가 필요합니다.”

“그냥 평범하게 좀 살고 싶어서요.”

전정우가 대답을 하려는 듯 하다가 입을 다물었다. 나의 솔직한 대답에 할 말을 잃은 듯했다. 혹은 이게 진짜인지 가늠하는 것 같기도 했다. 언제 한재민에게 달려가 유찬희의 행보를 일러바칠지도 모르는 연구원에게 거래를 제안하는 건 무모하고 또 가능성 없는 행동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에겐 전정우의 힘이 필요했다. 내 몸에 유도현의 힘, 기억, 행동, 습관. 이 모든 것을 담은 더러운 피가 빠져나가야만 나는 이 지긋지긋한 시스템과 회귀의 늪에서 벗어날 수 있음을 느꼈기 때문에.

“이미 융합이 진행되고 있어 완전히 분리해 빼낼 순 없습니다.”

“그냥 다 빼 주세요.”

“네?”

“유도현 것뿐만 아니라 제 마나까지 다 빼 주세요. 그것도 문제니까.”

“……랭커로서의 삶을 포기하신다는 말씀이신가요?”

“그깟 게 뭐라고. 포기할게요.”

“…많이 바뀌셨네요.”

“전 그대로예요. 그냥 아는 것이 많아졌을 뿐이지. 그쪽도 마찬가지잖아요? 나이가 들수록 아는 것과 필요한 것이 많아졌으니 이리로 온 거 아니에요?”

“잘 아시네요. 한 이사님과는 사실 이 건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은 건 아닙니다. 다만, 그렇게 된다면 유찬희 군 본인이 강력하게 반발할 것이라는 예상을 했고 너무 큰 리스크가…….”

“걘 아직도 저를 몰라요.”

내가 희미하게 웃자, 전정우는 허리에 손을 올린 채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서 아직도 걔가 싫어요.”

*

병원에서 항상 맞던 마나 융합 보조제들의 투약이 중단되었다. 인간의 몸에서 마나를 빼는 행위는 생각보다 기술적으로는 어렵지 않았다. 이미 연구가 많이 진행되기도 했고 실제로 뇌사 상태의 인간이 장기 기증을 하듯 마나를 기증하여 연구에 쓰거나 활용하는 일도 많았다. 문제는 ‘마나를 빼는 행위’는 뇌사 상태의 인간, 즉 죽음이 확정된 인간에게나 쓰는 위험성이 큰 일이라는 것에 있었다. 그랬기에 마나 추출은 일종의 수술 행위로 분류되었고, 나는 당연히 그 대상이 아니었다.

“돈 없는 사람들이 불법으로 마나 뽑아서 파는 게 다 이유가 있다니까.”

나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열심히 자료를 서치했다. 1급 랭커의 마나는 다이아몬드보다 귀하다. 특히 탑랭커 유도현의 마나와, 그에는 좀 모자라도 아무튼 ‘그’ 유찬희의 마나이니까. 수술은 신중하게 이루어져야 했다. 내가 죽는다면 마나는 그대로 흐름을 멈출 것이었고, 마나가 제대로 추출되지 않아 쓰지 못할 것이 되면 그것대로 상황은 안 좋게 흘러갈 것이다. 전정우는 내게 시간을 달라고 했다. 나는 이 말이 곧 한재민과의 협상임을 알았다.

[목표까지 86%, 달성까지 14% 남았습니다.]

나는 원하지 않아도 내 눈 앞에 뜨는 이 시스템 창을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음에도 조금씩 올라가는 이 퍼센티지는, 결국 시간 또한 내 편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사살 하는 것 같았다. 이제 정말로 얼마 남지 않은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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