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
나는 오랜만에 차려 입은 옷을 다시 한번 점검하고 신발을 꿰어 신었다. 주머니에 있는 핸드폰이 쉴 새 없이 진동했다. 아마 고한결의 메시지일 것이다.
“유현재! 나 준비 끝났어!”
“어어, 나 지금 나가.”
유현재도 평소엔 볼 수 없는 캐주얼한 사복 차림이었다. 살면서 가장 스무 살 같은 순간이었다. 나는 오, 하고 엄지를 치켜든 뒤 핸드폰을 꺼내 고한결의 메시지를 확인했다.
[고한결: 미쳤냐]
[고한결: 줄 개 길어]
[고한결: 출발했음?]
[고한결: 미리 오길 잘했다 진짜 굿즈 다 팔림]
[고한결: 존나 내가 한 락은 락도 아니구나 ㅅㅂ]
[고한결: 현타 쎄게 오네]
나는 간결하게 대답했다.
[나 지금 출발함]
[고한결: 돌았냐]
[고한결: 공연 끝나고 올라고?]
[고한결: 난 그냥 먼저 들어간다]
[집앞이잖아 30분 안에 가]
나는 메시지를 보내고 내 뒤에 서 있던 유현재를 잡아끌어 현관을 나섰다. 유현재가 내 손에 이끌려 속수무책으로 끌려 나왔다.
“빨리 안 가면 고한결 진짜 난리 날 것 같아.”
“근데 찬희야, 난 그 그룹 노래 하나도 모르는데…….”
“왜 몰라. 내가 맨날 거실에 틀어놨던 거잖아.”
“아, 그 막 시끄러웠던?”
“시끄러웠던? 너 락을 좀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아니, 그건 아니고……. 아무튼 되게 좋았던!”
나는 봐준다는 표정으로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재킷을 걸친 나와 점퍼를 걸친 유현재는 제법, 정말로, 스무 살 대학생 새내기 같았다. 대학교를 들어가진 않았지만 아마 대학생들은 다 이렇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며. 나는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가 거울 앞에 섰다.
“야, 여기 앞에 봐봐.”
“어?”
“원래 이런 데서는 이렇게 사진도 찍고 하는 거야.”
나는 엘리베이터의 거울 앞에서 핸드폰을 들고 열심히 각도를 맞춘 후 사진을 여러 장 찍었다. 셀카를 몇 번 찍어 보긴 했었지만 이런 식으로 바깥에서 함께 사진을 찍은 적은 처음이었던 지라 제법 쑥스러웠다. 유현재는 처음엔 어색하게 브이나 하고 있더니 나중엔 조금 자연스럽게 자세를 취했다. 그럴듯한 사진을 건지고서야 나는 뿌듯한 얼굴로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와, 진짜 뭔가.”
“뭔가, 뭐?”
“대학생 같다, 그치?”
아마 유현재도 나와 같이 ‘대학생’이라는 관념적 이미지에 대한 로망이 있는 모양이라고 대충 그렇게 생각했다.
“대학에나 갈까.”
“땅끝 마을은 어쩌고?”
“땅끝 마을에도 대학 있거든?”
“그러네. 그럼 거기 가자.”
“너도 같이 가게? 너는 랭커 해야지, 여기서.”
“그럼…… 장거리 연애야?”
그런가. 나는 대답하지 않고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차가 있는 쪽으로 빠르게 걸어갔다.
“그런 건 모르겠고. 얼른 가자.”
“나 이런 거 처음 가 봐서 신기해.”
“나는 뭐 처음 아니냐. 나도 떨려.”
“어제 엄청 찾아보긴 했는데, 자리에 따라 소리라든가 시야가 많이 차이난다더라고.”
“……그런 것도 찾아봤어?”
“아무래도 미리 찾아보고 연습이라도 해봐야……. 우리 둘 다 그런 거 잘 모르잖아.”
“넌 뭐 콘서트를 글로 배우는 사람처럼 구니. 고한결도 있고, 어차피 다 사람 사는 곳일 텐데.”
“그러게. 근데 진짜 우리가 이런 걸 안 해봤잖아.”
“영국 가서 한 번도 안 봤어? 브로드웨이 같은 거.”
“글쎄… 난 진짜 학교 안에만 있었어서.”
“너 정말 재미없게 살았구나.”
“……너도 그렇지 않아?”
“그건 그래.”
우리는 그냥 서로가 재미없이 살았다는 것을 인정하고 순순히 차에 올라탔다. 차는 부드럽게 지하주차장을 빠져나가 공연장이 있는 경기장 쪽으로 달려갔다. 공연장이 가까워지자, 젊은 사람들의 수가 급격히 늘어났다. 나는 창밖을 바라보며 그 사람들의 옷차림을 살폈다.
“우리도 대충 비슷하게 입은 것 같은데?”
“당연하지. 다들 이렇게 입어.”
나와 유현재는 촌놈 같은 대화를 하며 경기장 안쪽 주차장에 진입했다. 약속한 장소로 가니 고한결이 팔짱을 낀 채 우리 앞에 서 있었다.
“진짜 빨리도 왔다. 이미 줄 서서 들어가고 있는 거 보이지?”
“그럼 안 늦은 거네.”
“야, 스탠딩은 순서 놓치면 제때 못 들어가거든?”
“너나 스탠딩이지. 나랑 유현재는 좌석인데.”
“뭐 이런 게 다 있지.”
나는 우여곡절 끝에 티켓을 받고 유현재와 함께 공연장에 입장했다. 공연장 내부는 아주 어두웠지만 또 그만큼 화려했다. 자리를 찾아 앉은 뒤 주변을 살피는데 유현재가 내 손을 꽉 잡아 왔다.
“너무 신기해.”
“그러게. 야, 우리 진짜 뭐 하고 살았냐. 이런 것도 안 해보고.”
“그러니까. 이런 것도 보고 다녔어야 했는데. 그치.”
“그니까. 너 마스크 내리지 마.”
“너도.”
“……나는 모자까지 썼잖아.”
“응. 좋다, 찬희야.”
“……나도.”
곧 불이 모두 꺼지고 이든사우스 멤버들이 나왔다. 바로 첫 곡이 연주되자마자 나는 잡고 있던 유현재의 손에 힘을 꽉 주었다. 알고 있는 노래가, 앞에 서 있는 가수들의 입에서 직접 흘러나오는 것은 그저 음원으로 듣는 것과는 너무나도 달랐다. 유현재 또한 잔뜩 신기한 표정으로 무대를 바라보았다.
도대체 왜 이런 것들을 할 생각조차 못했을까. 그냥, 둘이서 이런 걸 보는 것도 허락되지 않은 삶이라고 생각했어서. 그래서 나는 갑자기 억울해졌다. 신나게 소리를 지르는 사람들 사이에서 나도 열심히 소리를 질렀다. 스트레스가 풀리는 느낌이었다.
*
“괜찮아?”
“……어.”
“목소리가 안 괜찮은데…….”
“말 시키지 마.”
목 아프니까. 나는 차에 올라타자마자 유현재가 건넨 따뜻한 차를 꿀꺽꿀꺽 마셨다. 뒷좌석에 앉은 고한결이 쉴 새 없이 공연에 대해 떠들어댔다.
“아, 유현재 팔아먹어서 또 대기실이라도 들어갔어야 했는데.”
“내가 뭐라고 대기실에 가.”
“야, 저번엔 유찬희 이름 대고 사인도 받았거든?”
“그거 이제 중고시장에 팔지도 못해. 이든사우스가 그거 보면 식겁할 걸.”
“그걸 왜 파냐?”
고한결이 쉴 새 없이 공연에서 부른 트랙에 대해 설명했다. 나 또한 신나게 그것에 대해 함께 열변을 토했다. 고한결과 대화를 나누다 말고 문득 유현재를 보니, 유현재는 언제부터였는지 얼굴 한가득 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안 피곤해? 왜 이렇게 웃고 있어.”
“피곤하긴 한데, 너무 좋아서.”
“어?”
“자주 오자, 이런 곳. 찬희 네가 너무 좋아하잖아.”
내가 얼굴을 붉히자, 고한결이 뒤에서 떨떠름하게 말했다. 내려 줄까? 물론 여기가 한남대교 한가운데이긴 한데. 아무튼.
“그래도 너희랑 이런 데 온 게 참 좋긴 하네. 너네랑 뭐 여가 생활 즐길 줄은 알았겠냐, 내가.”
“나도. 진짜 나 랭커 때려치울까 봐.”
“너 얼마 전부터 자꾸 무슨 심경의 변화가 있는지는 모르겠는데 잘 생각해라.”
“알고 있거든.”
어차피 이 행복도 길게 즐기지 못할 것이었다. 내겐 아직도 해결해야 할 문제들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예컨대, 지금 찍혀 있는 한재민의 부재중 전화라든가.
[목표까지 84%, 달성까지 16% 남았습니다. 힘내세요! 고지가 눈앞입니다!]
내게 자꾸만 목표를 달성하라 종용하는, 저 이중인격 시스템이라든가.
*
“그래서 네가 내린 결론이 뭐, 랭커 때려치우겠습니다. 이거라고?”
한재민이 손끝을 매만지며 건조하게 물었다.
“때려치우겠다는 게 아니고, 잠적해 보겠다고.”
“잠적?”
“일단 내 마나가 괜찮아질 때까지는 얌전히 있어야 하잖아.”
“그런데 너는 겁도 없이 S급 게이트에 뛰어들었고.”
“그건 그냥……, 아무튼 그 일을 계기로 나도 이제 조용히 있기로 다짐했다니까.”
“아니지, 찬희야, 내가 너를 어떻게 믿어.”
한재민이 나를 무감하게 바라보았다. 아까의 흥분감은 어디로 간 건지 흔적조차 남지 않은 채 나는 가만히 서서 한재민을 마주 바라보았다.
“믿지 마. 어차피 나도 알아. 또 네가 시키는 대로 안 하면 누굴 건드릴 줄 알고.”
“네가 마나를 조절할 수 있단 걸 알게 된 순간부터 나는 널 놀게 할 생각이 없거든.”
“그럼? 갑자기 또 날 복귀라도 시키려고? 그럼 이상하잖아.”
“아니지. 내가 지금 연구소에 투자한 게 얼만데.”
한재민이 잠갔던 단추를 풀며 말했다.
“어떻게 마나를 잠재웠는지 이제 본격적으로 연구해야지. 실험 대상이 이렇게 멀쩡하게 살아 돌아다니면서, 이렇게 공연까지 보러 다니는데.”
“병원에 들어가란 소리야?”
“병원에 반가운 얼굴도 있을 거야.”
“반가운 얼굴……?”
“그래.”
딱히 생각나는 반가운 얼굴이라곤 없었지만 나는 그 상황에서 따로 반박할 거리가 없었다. 일단 한재민 앞에서는 몸을 숙이는 것이 맞았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