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
유현재는……. 이제 얘가 또 뭔 개소린가, 하는 표정으로 살짝 눈을 찌푸렸다가 떴다.
“갑자기 무슨 소리야?”
“말 그대로야. 그냥 그만두면 마나 쓸 필요도 없고, 마나 안 쓰면 한성에 잡혀 있을 일도 없고…….”
“너…… 진짜 그래도 돼?”
“어? 왜?”
“왜 갑자기 놓으려고 해. 그걸.”
유현재는 마치 자신이 놓아지는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나는 오히려 내가 놀라, 유현재의 표정을 살피며 이리저리 변명을 하기 바빴다.
“아니, 그냥 갑자기 든 생각인데……. 네가 이렇게까지 반응할 줄은 몰랐어.”
“너한테 이 일이 어떤 건지, 내가 잘못 알고 있던 거였어?”
“그게, 아니…….”
“왜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든 거야? 게이트 안에 들어가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건데?”
“아니…… 진짜 별일 없었다니까.”
“별일 없었던 거 아니잖아.”
유현재의 눈은 심란함 그 자체였다. 어차피 얘기하려 해도 시스템이 막을 텐데……. 나는 나의 심경 변화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고민했다.
“그니까.”
나는 시스템의 출몰을 예상하며 말을 이어갔다.
“내가 알던 세상이…… 이게 다가 아니라는 생각을 했어.”
예상 외로 시스템은 잠잠했다. 나는 조심스럽게, 최대한 유한 표현으로 말을 이어갔다.
“내가 당연하다고 여겼던 세상이, 사실은 당연한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서…….”
“……응.”
유현재가 진지한 얼굴로 내 이야기를 들었다. 나는 그런 유현재에게 문득, 정말 고맙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구든 허무맹랑하다고 퇴짜를 놓을 말조차 이렇게 진지한 표정으로 들어줄 사람이 앞으로 더 있을까. 뭐 그런 생각을 하면서.
“왜 그런 생각을 하게 됐어?”
“어? 그러니까……. 나는,”
나는 커다랗게 숨을 들이마셨다. 여전히 시스템은 잠잠했다. 나는 하고 싶은 말을 하기로 다짐했다. 그것이 지금 내가 가장 ‘하고 싶은’ 행동이었으므로.
“난……. 이 세상은 이미 짜여진 소설이라고 생각했고. 나는 아무리 발버둥 쳐도 그 안에 있는 설정으로만 움직일 거라고 생각했고. 그건 너 또한 마찬가지였고. 그랬기 때문에 나는 오로지 이렇게밖에 살지 못할 거라 생각했는데.”
여기까지 얘기를 하고 나는 스스로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이런 말을 했음에도 시스템은 여전히 잠잠했다. 나는 습관처럼 주변을 둘러보았다. 혹시라도 배경이 회색으로 내려앉고 있는 중일까 봐. 유현재는 그런 나를 조용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랬구나.”
“……그, 이게 무슨 말이냐면.”
“응.”
“내가……. 내가,”
말릴 새도 없이 갑작스럽게 눈물이 나기 시작했다. 나는 줄줄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지도 못한 채 바닥으로 뚝뚝 떨구었다. 유현재가 천천히 다가와 내 얼굴을 어루만졌다.
“내가……. 진짜, 살려면 이래야 한다고 생각했어.”
“응, 계속 말해.”
“그러니까……. 나는, 계속…….”
“응. 찬희야. 천천히 말해도 돼.”
“……죽었어.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면, 계속 죽었어…….”
“죽었다고?”
“응. 계속 죽었어. 그리고 계속, 똑같은 때로 돌아가서…….”
뭉개지는 발음을 용케 알아듣고 유현재가 내 얼굴을 연신 쓰다듬었다.
“……그래서, 너무…….”
“…….”
“너무, 힘들었어…….”
나는 토해내듯 가장 하고 싶은 말을 내뱉었다. 유현재가 나를 꽉 끌어안았다. 나는 유현재의 품에 얼굴을 묻자마자 엉엉 울기 시작했다. 얼마 만에 마음을 놓고 우는지 몰랐다. 유현재 또한 어깨를 잘게 떨며 울고 있었다.
“힘들었어…….”
“미안해, 찬희야. 미안.”
“진짜로 힘들었어…….”
“미안해…… 내가 미안해…….”
나는 고개를 저었다. 유현재가 나를 더 꽉 끌어안았다. 나는 울면서도 이 상황이 진짜인지, 꿈이 아닌지 계속해서 생각했다. 이렇게나 쉽게 고백해낼 수 있었던 상황을 왜 수 년간 나는 혼자 앓아왔던 것일까. 그리고 왜, 시스템은 이제야 내게 이러한 상황을 허락하는 것일까. 그 이유가 무엇이 됐든 나는 이제 유현재에게 나의 가장 깊은 것을 공유해냈다는 기쁨과, 또 토해내듯 나오는 부정적인 감정들을 갈무리하지 못하고 있다는 부끄러움만을 오롯이 느끼고 있었다.
*
유현재가 잠시 물을 가지러 갔을 때 나는 나지막이 허공에 시스템을 불렀다. 시스템은 예상대로 관리자 모드에 접속해 있었다. 그래, 나는 내가 관리자일 때, 그러니까. 유도현으로 인식될 때 아무런 제약 없이 모든 행동을 할 수 있었다. 모순적이었다. 그러니까 나는 내가 아닐 때만 자유로울 수 있다는 것.
“물 좀 마셔, 찬희야.”
“고마워.”
“괜찮아? 안 어지러워?”
“……어. 너는?”
“……난 별로 안 울었어.”
유현재가 변명하듯 대답했다. 나는 얼굴이 시뻘게진 와중에도 웃음을 참을 수 없어 픽 웃고 말았다. 유현재가 살짝 민망한 표정으로 내 옆자리에 털썩 앉았다.
“난 네 말 다 믿어.”
“응.”
“내가 가끔씩 너한테 느꼈던 것들.”
“나한테?”
“응. 그런 것들이 있었거든.”
“……뭔데?”
“너한테 가끔…….”
“응.”
“도현이 형이 보였어.”
“……형이?”
“응. 그런데, 너는 도현이 형을 정말 모르는 사람처럼 얘기했어. 이상했거든 그게. 분명 네 친형이고, 그래도 어린 시절엔 나보다 더 오랜 시간을 보냈을 텐데. 도현이 형에 대한 이야기는 오로지 나를 통해서만 이해했던 게 이상했어.”
“그랬구나.”
“이상하지. 너는 형을 아예 모르는 사람처럼 대하는데, 너한테선 형의 모습이 보였어. 고작 1년 정도밖에 보지 않은 나조차 알 정도로.”
“차수현도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어.”
“수현이 형?”
“응. 나보고 유도현 같다고 그랬어. 향수까지 똑같다고.”
“그랬어?”
“어. 그 형……. 우리 형 좋아했거든.”
“……그랬구나.”
유현재가 고개를 끄덕였다. 한동안 말이 없던 유현재가 다시 천천히 입을 뗐다.
“그리고 형이 보일 때면 너는 매일 힘들어했어.”
“내가?”
“응. 많이 힘들어 했어. 너는 스스로 못 느꼈을 수도 있지만. 그래서 일부러 네 앞에선 형 얘기를 안 하려고 했어.”
유도현 같아 보였다는 건 뭘까. 시스템이 지시한 대로 움직이는 나를 보았을 때 그렇게 느꼈던 걸까? 생각이 이어지기 전에 유현재의 질문이 다시 내게 던져졌다.
“네 삶들에서 나는 어땠어?”
“너?”
“응. 나.”
“똑같았어.”
“똑같았다고?”
“맨날 내 뒤만 졸졸 쫓아다니고. 울고.”
“내가 울었다고?”
“너 어릴 때 많이 울었잖아. 그리고.”
“널 좋아했어?”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눈물이 멈췄음에도 얼굴에 열기가 몰리는 게 느껴졌다. 나는 찬 손으로 얼굴을 식혔다.
“다행이네.”
“그렇지 않았으면 나도 널 안 좋아했겠지.”
“응. 나도 매번 널 좋아했을 거야.”
“오글거려.”
“원래 오글거리는 거야, 이런 감정은.”
허, 내가 실소를 내뱉었다. 아저씨 같은 대답을 하고는 잘만 웃는 유현재의 얼굴이…… 그래도 너무 좋아서.
“그럼 너도 날 매번 좋아했어?”
“좋아했으니까…….”
“…….”
“매번 죽으면서도 너랑 있었던 거겠지.”
유현재가 눈을 깜빡이며 나를 말없이 내려다보았다. 나는 괜스레 딴청을 피우며 볼을 긁적였다.
“난 그럼 매번 행복했겠네.”
“그렇지만은 않았을걸.”
“그렇겠지. 거기에 있는 유현재는 이제 유찬희가 없으니까.”
유현재는 나를 꼭 끌어안아 주었다.
“이번 생의 유현재는 진짜로 절대 유찬희를 안 잃을 거야.”
“그래. 나도 그래 보려고.”
유도현이 남기고 간 이 지긋지긋한 굴레를 어떻게 깨부숴 보려고. 나는 그러기 위해선, 다시 유도현과의 만남이 필요하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느꼈다.
*
[관리자님, 접속을 환영합니다.]
[현재 모든 설정을 제어할 수 있습니다.]
[목표 달성률을 보시려면 1번, 유저의 크리티컬 수치를 보시려면 2번, 목표를 수정하시려면 3번, 유저의 설정 관리를 하시려면 0번, 나가시려면 나가기를 불러 주세요.]
“목표 수정.”
[3번. 유저의 목표를 브리핑합니다.]
[당신이 설정한 유저 유찬희의 목표는 ’죽음‘입니다. 목표를 수정하시려면 ‘수정하기’를 말해주세요. 단, 목표가 수정될 경우 달성율은 리셋되어 0%부터 시작됩니다! 충분히 고민한 후 결정해 주세요.]
“리셋된다는 건, 다시 어린 시절로 돌아간다는 거야?”
[리셋은 시작점으로의 회귀를 뜻합니다. 유저의 태초를 기억해 주세요.]
여덟 살부터의 시작. 나는 이것이 진짜 해결점이 될 것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나는 이 시스템 안에서의 자유가 아닌, 진짜 유도현과의 분리를 원했다. 그러기 위해서 내겐 역시 단 하나의 선택지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