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
예상대로 몸은 더더욱 악화되었다. 며칠간 이곳에 표류해 있어야 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벌써부터 이렇게까지 좋지 않아지는 건 역시 영 나쁜 징조였다. 15분 정도 남은 상황에서 나는 몸을 일으켰다. 움직일 수는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너 많이 안 좋냐?”
“죽을 것 같은데. 큰일이네.”
나는 이제 깜빡거리기 시작하는 시스템 창을 바라보았다.
“상태 안 좋아서 이제 위치 파악은 좀 어려울 것 같아.”
“그건 걱정하지 말고, 일단 뒤에서 추스르면서 서포트나 해.”
나는 겨우 두 발로 땅을 딛고 서 숨을 몰아쉬었다. 확실했다. 내가 ‘유도현’으로 인식될 때 시스템은 나를 관리자로 인식한다. 그러지 않고서야 원래의 유찬희는 그저 유저일 뿐이다. 그것도 유도현이 설정해놓은 대로만 움직여야 하는, 그런 유저.
“일단 12분 32초 남았어. 여기까지만 볼 수 있을 것 같다.”
이주현을 비롯한 헌터들이 다시 일어나 전투 준비를 했다. 나는 시험 삼아 마나를 다시 모아 보았으나, 무언가 역류하는 느낌이 들어 바로 그만두었다. 이대로라면 바로 피가 터져 나올 게 분명했다.
“씨발…….”
나는 욕을 읊조리며 점점 흐리게 사라지는 시스템 창을 바라보았다. 사라진 시스템 창은 이번엔 아예 다른 모습으로 떴다. 원래 알던 익숙한 창 디자인이었다.
[이벤트에 참여 중입니다!]
“알고 있어.”
[25차 도곡 2동 게이트를 탈출하십시오.]
“쳐 들어가라고 해놓고 나가라 하는 건 도대체 무슨 심보의 이벤트냐?”
내 혼잣말은 다행히 앞에서 진행되고 있는 전투에 묻혀 아무도 듣지 못했다.
[25차 도곡 2동 게이트의 탈출구는 전방 200m 서쪽에 3일 후 열릴 예정입니다.]
[그때까지 이주현 외 5명의 헌터를 무사히 살려내십시오.]
[추가 이벤트에 참여하시겠습니까?]
“미쳤어? 가지고 있는 힘이 없는데 내가 쟤넬 어떻게 지켜. 뭘 주고 말하라니까.”
[추가 이벤트에 참여하시겠습니까?]
“그러니까 참여할 힘을 달라고.”
<특수 공간 진입! : 세이브한 기억을 불러오시겠습니까? Y/N>
<특수 공간 진입! : 세이브한 기억을 불러오시겠습니까? Y/N>
시스템은 정신이 없는 것 같았다. 맥락대로 진행되는 것이 아닌, 마구잡이로 정보를 불러오듯 창이 이중으로 띄워졌다. 나는 이 창을 알고 있었다. 아주 예전, 인공 게이트에 빨려 들어갔을 때 강제로 본 창이었다.
“……이게 갑자기 왜.”
한참 전투가 이루어지고 있을 때 세이브한 기억을 불러오면 어떻게 되는 거지? 애초에 시스템은 왜 이런 게이트에 들어오는 걸 특수 공간이라고 여기는 걸까? 나는 어차피 내게 선택권이 없음을 알았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세이브한 과거 ‘25차 도곡 2동 게이트’의 기억을 불러옵니다.>
“그딴 거 없는데.”
하지만 내 말과 다르게 갑자기 누군가 조종하듯 내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는 눈을 커다랗게 뜨고 앞으로 달려나가는 내 몸을 내려다보았다.
“아, 미친. 이게 뭐야.”
스스로 마나를 모아 전투를 하던 때와는 다른 느낌이었다. 그러니까, 마치 누군가 내 몸에 빙의를 해서 움직이는 듯한…… 그런 기분. 나는 이주현의 뒤를 노리는 몬스터를 맨손으로 쳐냈다. 뒤쪽에 떨어져 있던 길지 않은 칼을 든 내가 빠른 속도로 몸을 돌려 쓰러진 몬스터를 향해 칼을 내리 찔렀다. 엄청난 힘이었다. 평소에 내가 낼 수 있는 힘보다도 더욱더 강한 마나가 손끝에 느껴졌다. 비명 소리와 함께 몬스터의 숨이 끊어지고, 이주현이 놀란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야! 괜찮아진 거야?”
대답하고 싶은 마음은 절실했으나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나는 쉴 새 없이 몬스터의 심장과 머리만을 골라 꿰뚫으며 빠르게 그것들을 처리해 나갔다. 함께 싸우던 헌터들이 점점 손을 놓고 나를 바라보는 게 느껴졌다. 나는 기계처럼 움직이는 몸을 제어하길 포기하고 움직임에 모든 것을 맡겼다.
“야, 유찬희!”
마지막 몬스터를 무찌르고 나서야 나는 스스로의 힘으로 바닥에 서 있을 수 있었다.
“미쳤어? 방금 뭐야?”
“나도 몰라.”
이제야 나오는 목소리로 나는 간신히 대답했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올라 터질 것 같았다.
<25차 도곡 2동 게이트 토벌의 기억을 해제합니다.>
“뭔 미친놈의 귀신이 들린 건지.”
“…….”
이주현이 아무 말 없이 나를 바라보았다.
“왜.”
“이상하잖아.”
“나도 내가 이상해.”
“장난치지 말고.”
“내가 사실대로 말해도 믿을 거야?”
“뭐?”
“몸이 제멋대로 움직였어.”
“……진짜 장난치냐?”
“이것 봐, 안 믿잖아.”
“아니 그걸 믿으라고 하는 말이냐고.”
“믿든 말든 그게 사실이야.”
“너 신들렸어? 마나 못 쓰는 것도 그것 때문이야? 뭐 그런 경우도 있다던데.”
“그래. 신들렸다. 나 모시는 신이 너 오늘 죽는대.”
“하……. 됐다, 말을 말자.”
이주현이 마른세수를 하곤 뒤돌아 털썩 주저앉았다. 어쨌든 해결됐으니 다 됐다는 건가. 나는 기진맥진한 채로 계속해서 숨을 돌렸다. 적어도 유찬희에게 25차 도곡 2동 게이트 토벌 기억은 없다. 애초에 25차 도곡 2동 게이트, 라는 것은 지금 존재하는 것이니 내게 이런 기억이 있다는 것 자체가 모순이었다. 애초에 유찬희는 스무 살까지 산 적이 처음이다. 아홉 번 죽으면서 단 한 번도 성인이 되지 못했다. 그런데 도대체 무슨 기억을.
나는 여기까지 생각하고 일전에 누군가에게 들었던 그 말을 떠올렸다. 네가 기억하는 게 전부라고 생각해? 내가 기억하는 게 전부가 아니라면 도대체 나는 어디서부터 내가 아니었던 것일까.
*
그 이후에 나는 무력하리만치 이주현과 다른 헌터들에게 묻혀 게이트를 전전했다. 이전과 같은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오히려 피를 쏟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3일간 내가 한 노력의 전부였다.
게이트를 나왔을 때 우리는 예상했듯 무수한 기자들의 플래시를 피할 수 없었다. 갑작스레 게이트에 뛰어든 무능력자 유찬희는 3일간 충분히 세간의 화제가 되었다. 유찬희 때문에 모두가 떼죽음을 당하는 건 아니냐, 하고 점치는 사람들도 있었다고 했다.
“설명해.”
겨우 집으로 돌아왔을 때 나는 테이블 위에 발을 얹은 채 소파에 앉아 있는 한재민을 바로 상대해야 했다. 피곤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무시할 순 없었다. 어쨌든 내 입장이 그랬다.
“닥치고 집에 처박혀 있으랬더니 맨몸으로 게이트에 쳐들어가는 건…… 자살이라도 하고 싶었냐?”
“그게…….”
“심지어 게이트 안에선 존나 날뛰었다며? 마나는 어떻게 쓰는 거냐? 도대체 너 뭐야?”
한재민에게 앉아서 시스템에 대해 구구절절 설명해 줄 생각도 없었다. 애초에 그럴 수도 없었고. 의외로 이에 대한 이야기는 한재민의 입에서 먼저 튀어나왔다.
“예전부터 의심했던 건데.”
“…….”
“너도 유도현이랑 똑같은 능력 가지고 있는 거야?”
“뭐?”
“너희 형. 뭔 좆같은 능력 있었잖아? 죽어도 살아나고, 죽어도 살아나고.”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한재민이 피식 웃으면서 테이블에 올린 발을 내렸다.
“내가 말했지.”
“…….”
“난 다 알아. 그러니까 너희를 불행하게 하는 법을 다 알고 있는 거고.”
“무슨…….”
“나도 자세히는 몰라. 그 자식이 죽을 때 우리 부모님 앞에서 이상한 개소리를 지껄였다, 는 걸로 추측해서 알아낸 것들이니까.”
“……개소리?”
“뭐랬더라?”
“…….”
“어차피 죽지도 않는 거.”
“…….”
“그냥 안 죽여도 되지 않냐고.”
“…….”
“지겹지도 않냐던데. 매번 자기 죽여놓고 저 꼬맹이들 살려놓는 게.”
“그 꼬맹이가.”
“너랑 유현재고. 처음에 그 얘기를 들었을 땐 무슨 개소린가 싶었는데, 아주 우연히 내가 뭔가를 알게 됐거든. 그 뒤로는 대충 짐작이 가긴 가.”
“근데 왜 넌 아무것도 안했는데?”
“내가 뭘 하는데?”
“……뭐?”
“어차피 유도현은 뒤졌고. 부관참시까지 했잖아. 진짜 죽은 거야, 걔는. 그게 걔의 능력일지라도 걔는 결국 죽었다고.”
“참 단순하다, 너는.”
“내가 단순하다고?”
한재민이 비웃었다.
“난 단순한 게 아니야. 필요 없는 건 생각하지 않는 거지. 찬희야. 너희 형이 죽고, 죽고, 죽어 봤자 결국 결말은 어땠어?”
“…….”
“그냥 진짜 죽어버린 거잖아. 그냥 그게 너네 형의 운명이야. 내가 굳이 뭘 하지 않아도 걘 결국 죽을 새끼였어.”
“…….”
“그사이에 그 새끼가 뭘 겪었든, 어떤 간극이 있든 나랑은 상관없잖아. 어차피 결국 살아 있는 건 난데.”
“그래.”
나는 한재민의 말에 수긍했다. 정확히 말하면 수긍하는 척했다.
“만약 네가 똑같은 능력이 있다 해도 나한테는 아무런 상관이 없단 소리야. 결국 살아남는 건 나니까.”
“자신감 넘치네.”
“왜, 네가 생각하는 미래에 나는 죽었어?”
나는 유현재의 손에 죽었던 그 ‘소설’ 속 한재민을 떠올렸다. 거기서 한재민은 분명히 죽었다. 그것도 아주 간단하게. 그런데 그건 진짜 소설일까? 혹은 그저 내 머릿속에서 조작된 망상일 뿐일까? 내가 읽었던 소설에 들어왔다는 그 당연했던 명제조차 지금의 나에겐 아무것도 아니게 되었는데. 이제 그게 ‘사실’이자 ‘미래’였다고 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