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랭커 사용 설명서-96화 (96/115)

96.

언젠가 느꼈던 불쾌한 기분과 함께, 나는 게이트 안으로 완전히 들어갔다. S급 게이트는 아주 예전, 유도현의 기억 속에 들어가서 봤던 것처럼 인공 게이트나 저급 게이트보다는 조금 더 그럴듯한 배경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조악하나마 나무도 있었고 바람도 불었으며 흙먼지도 휘날렸다. 곧이어 다른 출정 멤버들이 게이트 안으로 속속 들어왔다.

“유찬희, 미쳤어? 너 진짜 어떡하려고 이래?”

“어떡해. 이미 들어왔는데.”

내 천연덕스러운 대답에 이주현은 황당해서 어쩔 줄 모르는 표정이었다.

“S급이라고! 다들 자기 몸 간수하는 것도 힘들어.”

“내 몸은 내가 알아서 지킬게. 걱정하지 마.”

“뭘 어떻게 지킬 건데? ……아 됐다. 마음대로 해.”

“다들 저 너무 신경 쓰지 마시고요.”

벌써부터 뉴스에서 떠들어댈 내용에 머리가 아팠지만 어쩔 수 없었다. 시스템이 내건 ‘보상’은 단 한 번도 틀린 적이 없었다. 날파리 목숨이 되어 몬스터에게 바로 목이 날아간다 해도 일단 하긴 해야 했다. 나는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일단 마나를 모아 감각을 곤두세우기 시작했다.

[이벤트가 시작됩니다!]

어느 순간 나타난 시스템이, 시야 바로 위에서 글씨를 띄웠다.

[100m 전방에 A급 2마리 질주 중, 범주 내 도착 예정 시간 20초 이내. 20, 19, 18, 17……]

“뭐야, 이거?”

내 혼잣말에 이주현이 나를 흘끗 쳐다보았다. 아직 주변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100미터 전방이면 뭐라도 보여야 정상일 텐데, S급 게이트는 변수가 많다더니 사실인 모양이었다. 나는 어쨌든 마나를 모아 손끝에 집중했다. 다행히 낫고 있다는 말이 거짓은 아니었는지 더 이상 어지럽거나 코피가 터지는 불상사는 없었다.

“온다!”

[3, 2, 1.]

허공에서 갑자기 몬스터의 형체가 나타났다. 나는 다행히 바로 앞에 있는 놈을 바로 베어버릴 수 있었다. 옆에 서 있던 헌터가 그제야 경계 태세를 갖추고 나를 서포트했다.

“이 새끼들 전부 은신해서 올 테니까 정신 차리세요!”

내 말에 옆에 있던 헌터가 얼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오랜만에 가동해 보는 마나였지만 하나도 낯설지가 않았다. 심지어 자주 전투를 해본 듯, 몸은 자유자재로 움직였다. 옆에서 계속 브리핑을 해주는 시스템 덕분일지도 몰랐다.

[2시 방향 1m 앞에 나타납니다.]

“와, 시발.”

나는 간신히 몸을 던져 몸을 드러내기 직전의 몬스터를 날려 버렸다.

“야, 주현아. 나 무기 남는 거 있으면 아무거나 던져 주라.”

이주현은 머리가 나쁜 놈은 아니었다. 나는 바로 그에게서 총 한 자루를 던져 받고 이번엔 사정거리를 유지했다.

[3시 방향 1.6m에 2마리가 나타납니다. 10, 9……]

“이주현 네 오른쪽!”

“뭐?”

[……2, 1.]

나는 이주현의 옆에 나타난 몬스터를 향해 마나를 응축한 총을 발포했다. 이주현이 빠르게 뒤로 빠지며 뒤이어 나타나는 몬스터를 처치했다.

[A급 3마리가 8시 방향, B급 4마리가 뒤이어 나타납니다.]

한 번도 실제 전투에 참여해 본 적은 없었지만 지금 시스템이 내게 주는 정보는 절대 일반적이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나는 이에 대한 이유를 생각하는 것보다 지금은 일단 주어지는 것을 닥치는 대로 사용해 보기로 했다. 자연스럽게 주도권을 쥐게 된 나는 계속해서 몬스터들의 움직임을 브리핑했다.

[잠시 소강상태에 접어듭니다. 앞으로 3시간 45분간 휴식이 주어집니다.

남은 시간: 3:44:59]

나는 그 말을 보자마자 주저앉았다. 계속해서 준비 상태에 있던 헌터들이 나를 보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앞으로 4시간 동안은 안 나타날 거예요.”

“……뭐? 그걸 어떻게 알아?”

“지금 파동 괜찮잖아. 맞지?”

이주현이 손목에 감겨 있던 파동 감지기를 내려다보았다. 잠잠한 게 맞았는지 이주현은 더 이상 아무 말이 없었다.

“너 뭐야?”

“나가서 얘기하자.”

“……제대로 해명 안 하면 국마연 같은 데 넣어버릴 거야, 진짜.”

“국마연 오랜만이네, 거기.”

“넌 학교 다닐 때부터 이상했어.”

“내가? 뭐가?”

“맨날 유현재 옆구리에 끼고 다니면서 과보호하고. 다른 애들은 죄다 경계하고.”

“그게 뭐 어때서? 이상한 거야, 그게?”

“정상은 아니지. 똑같은 사내자식 끼고 예민하게 구는 거.”

“너한테 피해 줬어, 내가? 오히려 좋았잖아?”

“그렇긴 하지. 하는 짓이 너무 뻔해서 관찰하긴 편했어.”

“우리 아빠가 얼마 줬냐? 진짜 딱 학비만 내줬어? 용돈도 안 주고?”

“……그게 할 말이냐?”

“궁금하잖아. 과보호는 내가 한 게 아니라 우리 아빠가 한 게 아닌가 싶은데.”

“그러게. 아무리 대단하신 분 아드님이라 해도 굳이 이렇게 사람까지 심어가면서 보호해야 하나 그런 생각은 했지. 한성도, 뭐 전투부랑 척진 거 없잖아.”

“그래?”

“물론 그…… 사건이 있고 나서는, 왜 그러라고 했는지 대충 이해는 했지만.”

“그럼 너도 대충 짐작은 하겠네.”

이주현이 의아한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나지막이 이주현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한성이 내 부모님 죽인 거.”

이주현의 표정이 굳었다.

“왜 그런 걸 나한테 물어봐?”

“궁금해서.”

“뭐가 궁금한데?”

“나는 그 일이 있고 나서 많은 생각을 했거든.”

“…….”

“도대체 나한테 아무 조건 없이 남아 있을 사람이 누군지.”

“그래서 그게 유현재라고?”

“응.”

“걘 영국 가서 돌아오지도 않았잖아.”

“그래서 더 믿는 거야.”

“뭐?”

“내가 오지 말라고 했거든. 가라고 했어. 그러니까 진짜 갔잖아. 그리고 돌아왔잖아. 진짜 내 옆에 있을 수 있다고 생각했을 때. 그러니까 난 유현재를 믿을 수밖에 없지.”

“뭐라는지 잘 모르겠네.”

“그런 게 있다, 주현아.”

“넌 여전히 잘 모르겠네.”

“그래?”

“어. 그때랑 변한 게 없어. 그냥 유현재, 유현재거리는 것도 똑같아.”

“그렇게까지 했나, 내가?”

“너 이렇게 능력 멀쩡하게 잘 쓰는데 아닌 척 군 것도 설마 유현재 복귀 때문이냐?”

“내가 뭐 그렇게 멍청한 놈이야?”

“아니야?”

“아니거든? 나 또 언제 병신 될지 몰라.”

“뭐?”

“이러다가 또 피 토하면서 쓰러지고 짐 될 수도 있다고.”

“……마나 불안정하단 건 사실이구나.”

“그럼. 그니까 내가 갑자기 픽 쓰러지면 안전한 데에 좀 데려다 놔 주라.”

“그럴 여력이 있을지 모르겠다.”

“나 죽으면 너만 손해야.”

“……뭐, 어쨌든 너희 가족한테 진 빚은 있으니까 노력은 해볼게.”

“고맙다.”

“애초에 그런 불안정한 마나로 여기에 뛰어든 네 잘못이긴 하지만.”

“그것도,”

“다 사정이 있다고?”

나는 웃으며 들고 있던 물을 마셨다. 이주현과의 대화를 마치고 나는 여전히 허공에 떠 있는 시스템의 글자를 바라보았다. 남은 시간은 착실하게 줄어들고 있었다. 시스템은 갑자기 왜 이런 기능을 내게 주는 걸까? 아무리 생각해도 나를 ‘관리자’라고 인식하고 있기 때문인 것 같기는 한데. 그렇다면 유도현은 여태까지 이런 기능들을 이용해 최상위 랭커 자리를 유지하고 있었던 걸까? 물론 기본적인 마나가 따라 줘야 하는 건 맞지만, 어쨌든 이런 완벽에 가까운 시스템의 서포트가 있다면 사실 다른 헌터들과는 시작점부터가 다른 건 맞았다.

“정말…….”

알수록 어이없는 인간이다. 그 누구보다 곧은 인간인 척, 강직한 사람인 척해 놓고는 이렇게 모순적일 수가 없었다. 시스템이라는, 어디서 얻은 건지 모를 특혜를 누리고, 제 동생을 미워하면서 끝까지 희생한 척한 새끼. 그래, 유도현은 알수록 그저 내겐 단순한 개새끼였다.

그런 생각을 하고 나자 갑자기 속이 울렁거리기 시작했다. 나는 마시던 물을 내려놓고 바닥에 털썩 누웠다. 흙이 되지 못한 자갈이 머리와 등에 닿아 걸리적거렸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팔자 좋네.”

“괴물 새끼들 나오면 말해 줘.”

“잠이라도 자게?”

“속 안 좋아서 잠 못 자.”

더 이상의 대화를 했다간 먹은 물까지 모두 토할 것 같아, 나는 입을 다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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