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
유도현의 방 안은 휑하기 짝이 없었다. 그 흔한 포스터, 액자 같은 것도 없어 무언가를 유추할 수도 없었다. 차수현의 문자에 답을 해 준 유도현이 침대에 누웠다. 나는 이곳이 누군가의 꿈이라는 것을 계속해서 되뇌었다. 그러니까, 지금 내가 보고 있는 이 장면들이 사실이 아닐 거라는 것. 그저 단순한 꿈일 수도, 혹은 유도현의…… 어떤 소망의 잔상일 수 있다는 것. 그게 왜 내게 나타나는지는 여전히 알 수 없지만, 아니 내가 그의 마나를 흡수했으니 그의 일부가 내가 되었다는 것 정도만 예상했다. 딱 그 정도여야 했다.
유도현은 졸린 듯 눈을 끔뻑였다. 그러나 무언가를 기다리는 듯 쉽사리 잠들지 않았다. 그리고 유도현이 기다리는 것은, 금세 나타났다.
[하루를 마감합니다. 목표 달성치를 열람하시겠습니까?]
만약 나의 형체가 이곳에 있었다면 비명을 질렀을 정도로, 나는 굉장히 놀랐다. 그러니까 유도현은…… 시스템을 불러냈다.
“열람.”
유도현이 여상한 목소리로 말했다.
[목표 달성치를 브리핑합니다.]
[관리자 ‘유도현’님, 브리핑 사이트 접속을 환영합니다!]
[현재 ‘유도현’님의 능력치를 보시겠습니까? (변동 있음)]
“보여줘.”
[‘유도현’님의 능력 회귀(9/10), 세이브(3/3), 목표 달성 시 보상 (무제한), 목표 수정 권한 (패시브)]
[현재까지 개방한 루트를 자동으로 펼칩니다.]
[일반 루트 (0/1), 특별 루트(1/1)”완료!”, 히든 엔딩 (진행 중)]
[‘유도현’님은 현재 히든 엔딩 루트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진행율 현재 75% 히든 엔딩 수집까지 25% 남았습니다, 얼마 남지 않았네요! 힘내시길!]
[히든 엔딩은]
“스킵하고 목표 달성치만 보여줘.”
[……목표 달성치로 바로 넘어갑니다.]
[‘유도현’님의 목표는 궁극적인 행복입니다. 해당 목표를 위한 과정을 총 ‘7’단계 통과하셨습니다.]
[‘8’단계는 차수현 군과의 행복입니다. 영원한 행복을 약속해 보세요! 상대는 기꺼이 받아들여 줄 것입니다.]
[이후……엔딩………error……]
유도현이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나 놀라지는 않았다. 아마 갑작스레 생긴 에러가 처음이 아닌 모양이었다. 나 또한 시스템을 상대하면서 직접적으로 ‘에러’는 아니더라도 이런 식으로 내용이 깨지거나 이어지지 않은 적이 있었기에, 이것이 ‘시스템’의 고질적인 병인지에 대해 의심이 먼저 갔다. 그러나 유도현은 다른 대응을 했다.
“에러 점검.”
[에러를 스스로 점검합니다. 관리자의 권한으로 시스템 구조를 개방합니다.]
[점검에 시간이 소요됩니다. 0%……15%…………30%………]
유도현은 느긋하게 기다렸다. 원래 그랬다는 듯.
[에러 점검을 완료하였습니다. 목표 과정의 ‘2’단계 스킵이 문제인 듯하네요! 다시 ‘2’단계로 돌아가시겠습니까? 이 과정에서 ‘회귀’ 능력이 1만큼 소요됩니다.]
“미친놈.”
유도현이 욕을 읊조렸다. 2단계로 돌아간다, 는 것은 결국 다시 죽어서 그곳으로 돌아간다는 거겠지. 목표 달성을 위한 단계를 계속해서 밟아야 했다면 유도현은 도대체 ‘2단계’를 어떻게 스킵한 것일까?
[‘2’단계 내용을 브리핑합니다. ‘2’단계는……]
“닥쳐.”
유도현이 눈을 감았다. 시스템은 금세 조용해졌다. 저렇게 말을 잘 듣는 새끼였다니. 억울해지는 것과 별개로 나는 2단계가 무엇인지 궁금해졌다. 어쩐지, 무조건 알아야 할 것 같다는 강렬한 예감이 들었다.
*
유도현이 잠들자 나의 의식 또한 심연으로 잠겼다. 그리고 나는,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다시 유찬희로 눈을 떴다.
“찬희야!”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것은 유현재였다.
“어, 유현재…… 언제 왔…….”
나는 순간적으로 핑 도는 세상에 몸을 휘청거렸다.
“조심해서 일어나. 일주일 동안 누워 있었단 말이야.”
“일주일?”
“응. 일주일.”
옆에 놓인 핸드폰을 보니 실제로 쓰러진 날짜보다 딱 일주일이 지나 있었다. 그러니까, 그렇게 피를 쏟고 유도현의 진짜인지 가짜인지 모를 의식 속에서 헤엄쳤던 게 일주일이나 됐다는 거잖아.
“여기 한성 병원이야?”
“응. VIP실이라 사람들 오갈 일 없어. 안심해.”
유현재는 내가 사람들을 의식하는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넌 왜 여기 있어?”
“어?”
“영국 간다며.”
유현재가 어이없다는 듯 나를 내려다보았다.
“내가 어떻게 가?”
“왜 못 가?”
“네가 이런데 내가 어떻게 가?”
“와.”
나는 깨자마자 유현재가 훅 들어오는 탓에 차마 대답을 하지 못했다.
“내가 평생 안 깼으면 어떡할 뻔했냐?”
“그럼…… 영국을 갈 이유가 없지.”
“나도 나지만 너도 대단하네.”
“칭찬이지?”
유현재가 웃으며 침대에 두 팔을 모아 얼굴을 묻었다. 다행이다. 웅얼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현재야.”
“어?”
“만약 지금 이 상황이 꿈이고 내가 아직도 못 깨는 거면 어떨 거 같아?”
“지금이 꿈이라고?”
“응. 일어나면 사실은 완전히 다른 상황이 펼쳐져 있는 거야.”
“거기에 우리가 있어?”
“너랑 내가?”
“응. 우리가 이렇게 있어?”
“그건…… 모르지.”
“모르겠네……. 꿈에서 안 깨려고 하려나.”
“내가 꿈을 꿨는데.”
“응.”
“형이…… 스물세 살까지 살아 있었다?”
“도현이 형이?”
“응. 근데…… 정말 생생했어.”
“그 상황이?”
“응. 진짜 생생했어. 모든 게 생생했어. 그리고 있지, 거기에 우리가 없었어.”
“아예?”
“응. 엄마가 형보고 하나뿐인 아들이라고 하더라.”
“……그게 꿈이네.”
“어?”
나는 벙찐 얼굴로 유현재를 바라보았다.
“그게 꿈이잖아. 그치. 지금 이렇게 숨 쉬면서 이야기 나누고 있는 건 그럼 누군데? 우리잖아.”
“……그렇지.”
“꿈은 꿈일 뿐이야. 지금이 현실인 거고.”
“그런 거겠지.”
“설령 꿈이더라도, 깨면 우리는 여전히 여기에 존재할 거야.”
“…….”
“그러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유현재가 내 이마에 입을 맞췄다. 나는 유현재의 입술에서 전달되는 온기를 느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게 꿈이고, 허황된 사실이고, 지금의 내가 진짜다. 모든 것은 허상이고 오로지 현재만이 진짜다.
그렇다면, 무수히 죽은 과거의 나는 모두 가짜였을까?
*
한재민의 만류와 주변의 시선 때문에 나는 유현재를 공항까지 배웅해 줄 수 없었다. 유현재는 일주일이면 충분히 돌아올 수 있다고 했지만 사실 어떻게 될지는 모르는 일이었다. 이든사우스 음악이나 들으며 뒹굴거릴 생각을 하니…… 그간 바쁘게 살았던 과거가 모두 옛날 같았다.
“야, 한재민.”
“왜.”
“너 학교에 심어놓은 사람 누구였냐?”
“심어놓은 사람?”
한재민이 부러 골몰하는 척 표정을 지었다.
“누군지 알면 크게 실망할 텐데.”
“왜? 내가 잘 아는 사람이야?”
“너 아직도 고한결 의심하는구나?”
“누가 그런대?”
“걔가 만약 내가 심어놨던 애라고 하면, 앞으로 뭐 절연이라도 하게?”
“뭐…… 그 자식의 우리 집 출입을 다시 재고해 보긴 하겠지.”
“걔 맞아.”
“뭐?”
“안 믿기지?”
“미친 거 아냐? 제대로 말해.”
“봐. 안 믿잖아. 어차피 믿지도 않을 거면서 왜 묻는 건지.”
“야. 똑바로 말 안 해?”
“아무튼 걘 아니니까 안심해. 안 그래도 너 때문에 대가리 터져서 죽을 것 같은데 자꾸 쫑알쫑알 옆에서 말 걸지 말고.”
나는 입을 다물었다. 일단 고한결은 아니라고 하니까……. 묘한 안도감이 들었다. 세상에 믿을 놈 하나 없다는 게 거짓말일 수도 있잖아.
“지금 투자사들이랑 주주들 너 때문에 지랄 났거든. 어떡할래? 너 때문에 손해액이 얼만 줄 알아?”
“죽이든가.”
“어휴, 이제 찬희 개또라이 다 됐네.”
“이제 알았나. 지가 후견인 하겠다고 할 땐 언제고. 내가 갑자기 소리 소문 없이 뒤지면 다 너 때문이지.”
“넌 참 볼 때마다 느끼는 건데.”
한재민이 꼬고 있던 다리를 풀고 말했다.
“죽는 게 전혀 무서워 보이지 않아.”
“……새삼스럽네.”
“아무리 깡 좋은 인간이더라도 진짜 죽음에 직면하면 무조건…… 변하거든?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혹은 자포자기든.”
“근데.”
“넌 그냥 아무렇지 않아. 굳이 분류하자면 자포자기겠지만, 딱히 뭔가를 포기하는 느낌도 아니고.”
“…….”
“너 뭐 불사신 그런 거냐?”
한재민은 본인이 생각해도 실없는 말을 했다고 생각했는지 혼자 킥킥 웃었다.
“불사신인데? 그래서 네가 나 죽여도 죽여도 존나 살아서 끝까지 너 쫓아다닐 거야.”
“아, 씨발 개무서워.”
한재민의 전혀 무섭지 않다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나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죽음을 무서워하지 않는 나는 정말 남들과 다른 존재라는 것이, 새삼스럽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