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랭커 사용 설명서-92화 (92/115)

92.

“우리 아버지?”

-……응. 국장님께서 직접 연락 오셔서 나한테 부탁했었어. 너 좀…… 봐 달라고.

“봐 달라고?”

-뭐, 한마디로 허튼짓 안 하는지 감시하란 거였는데.

“그래서 아버지 돌아가시기 전까지 나 감시한 거야?”

-아니. 3년 내내.

“어?”

-국장님께서 네가 위험할 때 나보고 꼭 도와달라고 그러면서, 내 학비 다 내주셨어.

“학비를?”

-어. 우리 집 형편 거지같은 거 어떻게 알았는지. 아무튼 그것 때문에 무사히 졸업한 거기도 하고. 돌아가시고 나서도 어쨌든 미리 내주신 학비가 있어서, 계속 너 지켜보긴 했어. 어차피 한성이 너 데리고 간 이후론 그것도 무의미했지만.

“……웃기는 짓을 했네, 아버지가.”

-아무튼, 그랬다. 별다른 건 없었어.

“아버지가 나랑 한성을 떨어트려 놓으라고 했어?”

-어. 혹시 무슨 일 있으면 너 국마연으로 떼어 놓으라고.

“그래서 그때 특관 담임이 나 한성 데리고 가려 했을 때도 국마연 간 거야?”

-아, 그때? 어. 아니 그 쌤이 굳이 먼 한성을 간다잖아.

“사실 한재민…… 그러니까 한 이사가 누굴 심어놨다고 해서. 그게 특관 담임이 아니었나 싶긴 해.”

-뭐? 그럼 한성 쪽 사람이었다고?

“몰라. 그냥 추측이야. 그냥 그러고 졸업해서.”

-고한결은?

“뭐?”

-고한결은 그쪽 사람 아니고?

“걘 아무것도 아닐걸.”

-그래? 의외네.

“뭐가 의왼데?”

-그냥. 누가 봐도 그렇지 않나?

“뭐?”

-그냥 의도 가지고 너한테 접근한 사람 같잖아.

아니면 말고. 이주현은 간략하게 말을 마무리하고 전화를 끊었다. 제법 찜찜한 마무리였다. 그러니까, 한쪽에는 한성이 심어둔 누군가가 나를 감시하고, 또 한쪽에는 아버지가 부탁한 이주현이 나를 지켜봤다. 이건 뭐 온실 속 화초라 하기도 애매하고, 공공의 적이라기에도 애매한 학교생활이었네.

“야, 시스템.”

나는 ‘그 일’이 있었던 이후 종종 시스템을 하릴없이 불렀다. 시스템은 대개 대답하지 않았지만 가끔 ‘저장하시겠습니까?’ 같은 말 정도는 띄워 주곤 했다.

[저장하시겠습니까? Y/N]

이번에도 마찬가지군.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허공에 뜬 글씨를 무시했다. 열일곱의 나는 오로지 나와 유현재만을 믿었다. 아니, 나조차도 제대로 믿지 못했다. 오로지 유현재에게만 기댔던 삶. 설령 누군가가 나를 감시하고 조종하려 한다 쳐도 오로지 유현재가 위험에 빠지지 않을지, 유현재에게 피해가 가지 않을지 만을 노심초사하며 지냈다.

“난 누굴 믿어야 하지?”

[저장하시겠습니까? Y/N]

“이주현은 거짓말을 하지 않은 게 맞아?”

[저장하시겠습니까? Y/N]

“고한결은 진짜 내 편이 맞아?”

[저장하시겠습니까? Y/N]

“그딴 걸 하나도 모르는데 내가 저장을 왜 해.”

나는 잠시 뜸을 들이다 말했다.

“왜 자꾸 저장하라는 거야? 나 다시 죽어?”

반쯤 농담이었지만 재미가 없었으므로 실패한 농담이었다. 잠시 생각에 잠겨 있으니, 조금씩 속이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자주 일어나는 약 부작용이었다. 보통 이럴 땐 주로 따로 제조해 준 진통제 같은 것을 먹곤 했다. 그러나 나는 문득 일전에 관리자 모드로 들어갔던 때에도 이와 비슷한 몸 상태였던 것을 기억했다. 처음엔 체한 것처럼 조금씩 속이 울렁거리다가, 온몸에 있는 것들이 마구 움직이는 것처럼 어지럽고 식은땀이 났다. 나는 허공에 떠 있는 저장하시겠습니까? 를 바라보았다. 여전히 그대로였다.

“안 바뀌냐? 이것도 아냐?”

나는 온몸을 헤집고 다니는 이 불쾌한 기운이 마나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건 아주 기초적인 소양이었다. 그리고 보통 모든 랭커는 이것을 자유자재로 컨트롤한다. 그렇기에 능력을 쓸 수 있는 것이고. 나는 통제할 수 없는 마나를 몸 전체로 느끼며 인상을 찌푸렸다. 마나는 마치 몸 밖으로 나가고 싶어 하는 듯 자꾸만 온몸 전체를 두들겼다.

“좀 가만히 있어.”

나는 씨알도 먹히지 않을 혼잣말을 했다. 다시 헛구역질이 나기 시작했다. 나는 결국 방으로 들어가 약을 찾았다. 막 봉지 하나를 뜯어 약을 입에 넣으려는 순간, 나는 ‘저장하시겠습니까?’의 글씨가 깨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나는 그대로 움직임을 멈추고 그 글씨를 바라보았다. 글씨는 조금씩 더 갈라지기 시작하더니 결국 형체 없이 흩어졌다. 나는 올라오는 헛구역질도 참으며 몸을 일으켜 글씨가 날아간 곳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곳에는 아주 천천히 글씨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관리자 모드로 전환합니다.]

[관리자님, 접속을 환영합니다.]

[현재 모든 설정을 제어할 수 있습니다.]

[목표 달성률을 보시려면 1번, 유저의 크리티컬 수치를 보시려면 2번, 목표를 수정하시려면 3번, 유저의 설정 관리를 하시려면 0번, 나가시려면 나가기를 불러주세요.]

“와, 씨발.”

드디어 나타났구나. 나는 가슴께를 움켜쥐고 몸을 꼿꼿하게 세웠다.

“0번. 이 미친놈아.”

[0번, 유저 설정 관리로 접속합니다. 이곳에서는 유저 지정과 유저의 커스텀 등을 관리합니다. 무엇을 확인하시겠습니까? 1. 유저명 2. 유저의 신상 정보 3. 유저의 목표 4. 유저의 능력]

“3번부터.”

[3번. 유저의 목표를 브리핑합니다.]

[당신이 설정한 유저 유찬희의 목표는 ’죽음‘입니다. 목표를 수정하시려면 ‘수정하기’를 말해 주세요. 단, 목표가 수정될 경우 달성률은 리셋되어 0%부터 시작됩니다! 충분히 고민한 후 결정해 주세요.]

나는 저 당당하게 뜬 죽음이라는 두 글자가, 무섭거나 두렵기보단 웃겼다. 죽음이 목표라고? 뭔지도, 아무것도 모르는 저 시스템 따위가 내 죽음을 목표로 설정하고 나를 조종하고 있었다고? 그리고 나는 그대로 따라 저 목표에 70%나 도달했다고? 인간이란 얼마나 나약하고 쓸모없는 존재길래 저딴 허상에 휘둘리는 건데?

“……4번도 얘기해 봐.”

[4번. 유저의 능력을 브리핑합니다. 유저의 능력은 복합적인 사유에 따라 수치가 자주 변동하니 수시로 확인해 주세요. 현재 유저의 능력. 회귀 (9/10) 세이브 (2/3). 추가적으로 획득할 수 있는 능력은 유저의 행동에 따라 달라집니다. 단, 보유하고 있는 능력의 추가 슬롯은 더 이상 없습니다.]

“아, 그럼 그렇게까지 죽어도 다시 살아난 게 다 네 놈의 능력 때문이었다?”

[관리자 설정을 이용해 주세요.]

이제는 심장이 조여왔다. 좋지 않은 징조였다. 코에서 피가 흘러나왔다. 의식이 빠르게 흐려졌다. 자꾸만 초점이 맞지 않는 눈앞을 겨우 바라보며 나는 마지막으로 번호를 하나 더 읊었다.

“2번.”

[2번, 유저의 신상 정보를 브리핑합니다.]

“빨리 말해.”

[유저는 당신의 동생입니다. 유저는 당신을 맹목적으로 따릅니다. 유저는 당신의 유일한 동생으로, 선량하고 따듯한 성품을 지녔습니다. 유저의 삶은 당신의 행동에 따라 많은 변동이 있을 것입니다. 신중하게 설정해 주세요.]

유도현, 너는 대체 왜 나한테…….

나는 그 생각을 마지막으로 기절했다. 몸이 뒤로 넘어가려는 순간, 바닥에 아무 저항 없이 부딪혀 통증을 느끼려는 순간, 나는 모든 의식을 잃었다.

*

“유도현!”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아, 그래. 나는 다시 유도현의 기억에 들어왔구나. 혹은 그에게 빙의한 내 짧은 꿈속에. 나를, 아니 유도현을 부른 건 지금보다 훨씬 젊은 얼굴의 차혜련이었다.

“넌 이제 보면 인사도 안 하냐? 선배한테.”

유도현이 고개를 꾸벅 숙였다. 차혜련은 썩 맘에 들지 않는다는 듯 팔짱을 끼고 짝다리를 짚었다.

“진짜 해담 기강 다 죽었네.”

“……절이라도 해드려요?”

“싸가지 봐.”

“그럼 먼저 가 보겠습니다, 선배. 지금 바로 부장님께 보고 드려야 해서요.”

“수현이 해담 들어온다던데.”

유도현의 걸음이 멈췄다. 차혜련이 피식 웃으며 유도현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너 유독 수현이 아꼈잖아, 그치? 좀 잘 봐줘. 우리 조카 진짜 문제아거든.”

“길드 내 규칙대로 교육이 진행될 겁니다.”

“알고 있지. 내가 그걸 모를까 봐?”

“차수현도 예외는 아니고요.”

“야박하게 이럴 거야? 수현이는 내 얼굴 볼 때마다 도현이 형 잘 있냐고 묻는데.”

“……직접 연락하면 되지 왜…….”

“글쎄? 부끄럽나? 모르겠네, 10대들 마음은.”

“아무튼 지금 하신 말씀은 못 들은 걸로 할게요.”

“뭘 못 들어. 그냥 수현이 들어온다고 말한 거 가지고. 왜 이렇게 딱딱하게 굴까.”

“가뜩이나 선배 조카라서 시선도 안 좋을 텐데 그런 말씀은 삼가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아이고. 차수현 사랑은 유도현이 최고지?”

유도현은 대답 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심장이 빠르게 두근거리는 것이 생경하게 느껴졌다. 유도현도 이런 감정을 느끼긴 했었구나, 이런 생각이 드니 우습다는 생각과 함께 어쩐지 불쾌한 감정이 올라왔다. 좀비 따위가 아닌 진짜 사람 유도현을 강제로 보고 느끼는 것이 생각보다 즐거운 느낌은 아니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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